공항은 한산했다. 방금 도착한 비행기에서 내린 몇몇 사람이 유리로 된 자동문을 통과했고, 그중에는 볼캡에 후디까지 뒤집어쓴 나도 있었다. 1년 만인가. 오랜만에 와 닿는 일본의 공기가 못내 반가웠다. 오랜 비행으로 건조해진 눈을 비비며 주변을 둘러봤다. 새벽 네 시가 넘었든 어쨌든 이렇게 조용한 귀국길은 낯설었다. 언제나 기자들의 플래시 세례와 팬들의 열렬...
미아처럼 갈 곳을 잃었다. 안절부절못하며 복도를 서성거리는 남자는 보쿠토 코타로. 잠금장치를 바꿀 걸, 하고 후회해봤자 늦었다. 열쇠를 잃어버려 갑자기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된 그는 복도 끝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아카아시와의 일방적인 추억이 어린 의자에 널부러지듯 앉은 그는 피로감에 싸인 눈꺼풀을 문질렀다. 주린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고, 도와줄 사람은...
한 상 가득 음식을 차려놓은 종업원이 뒷걸음으로 나가 문을 닫았다. 얼른 단둘이 남길 기다렸다는 듯이 아카아시 케이지는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가까이 오고 싶은 마음을 가로막은 식탁에 어정쩡하게 팔을 얹은 모습이 귀여웠으나 솔직히 말하면 민망해하며 바로 앉을 게 뻔해서 잠자코 있었다. 오랜만이다. 보고 싶었다. 이젠 입에 올리기도 지겨운 인사를 목구멍으로 ...
따사로운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창틀을 따라 화려하게 수 놓인 보석이 빛을 머금어 반짝거리자 푹신한 침구에 파묻힌 남자가 뒤척이며 눈을 떴다. 녹음이 짙어 불그스름한 색이 감도는 눈동자가 드러나고, 이는 아카아시 공작가의 적자, 케이지의 상징이었다. 아카아시 케이지는 휘황찬란한 천장을 멀뚱멀뚱 바라보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몇 번을 봐도 익숙해지지 않는 광...
“저 먼저 갑니다.”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돌아선다. 함께 땀 흘려 연습한 사실을 지운 듯이 산뜻한 모습, 물기를 머금어 평소보다 구부러진 머리칼에서 비누 냄새가 폴폴 흐날릴 것이다. 발길을 돌리는 아카아시를 곁눈질하던 보쿠토가 뒤늦게 팔을 흔들었다. 인사는 전해지지 않았다. 아차, 하고 뒷머리나 긁적거렸다. 별 생각 없는 척 했지만 비죽 내려간 입꼬...
오지랖이거나 아니거나 아카아시 케이지가 눈에 담긴 순간, 무의미해졌다. 머리칼에서 떨어진 물이 어깨와 가슴을 타고 흘러내렸다. 막 샤워를 하고 나온 보쿠토는 밖에서 들리는 유난스러운 소음에 눈살을 찌푸렸다. 떼인 돈을 받으러 온 사채업자인지 주정뱅이인지 모를 불청객이 내지르는 소리가 벽을 타 넘을 만큼 시끄러웠다. 문을 때려 부수기로 작정한 듯 폭력적인 타...
생동하는 새싹을 담아두기에 이보다 좋은 공간은 없을 테다. 교실의 공기가 여느 때보다 들뜬 이유는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기 때문이었다. 종교적인 의미를 두지 않더라도 이상하게 특별해지기 쉬운 날. 쉬는 시간이 되자 희밝은 소리들이 드높아졌다. 시장통처럼 시끄러운 교실 가운데에서 아카아시 케이지는 느긋하게 필기를 정리하고 있었다. 얼마나 집중을 했던지 누가 다가...
부재통을 앓고 있을까. 쿠로오 테츠로가 없는 22호의 켄마는 그럴지도 모른다. 아카아시는 층계를 오를 때마다 굳어지는 믿음을 의심치 않았다. 보통 일과를 시작하느라 분주한 아침에 아카아시는 하루를 마무리한다. 냉기가 감도는 집을 대충 치우고 커튼을 쳤다. 씻고 나와 이불로 던진 몸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이 시간에 누가 찾아올 리 없었다. 선잠이 들었던 터라...
좋은 이웃이 있다는 건 행운이다. 마음 놓고 아이를 맡긴다거나 담소를 나눌, 남이지만 가까운 사람들. 우리 곁을 스쳐 지나는 즐겁고, 행복하고, 쓸쓸한 시간을 공유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다. 재미있는 이웃도 좋지. 계단을 내려오던 쿠로오가 야외 로비와 정원의 경계를 기웃거리는 남자를 보고 걸음을 그쳤다. 여기에서 볼 줄이야. 짧은 감탄이 새어 나왔다. ...
자유로운 창작이 가능한 기본 포스트
소장본, 굿즈 등 실물 상품을 판매하는 스토어
정기 후원을 시작하시겠습니까?
설정한 기간의 데이터를 파일로 다운로드합니다. 보고서 파일 생성에는 최대 3분이 소요됩니다.
포인트 자동 충전을 해지합니다. 해지하지 않고도 ‘자동 충전 설정 변경하기' 버튼을 눌러 포인트 자동 충전 설정을 변경할 수 있어요. 설정을 변경하고 편리한 자동 충전을 계속 이용해보세요.
중복으로 선택할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