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이 덜 깬 멍한 눈.  러그 위에 누워 있는 집 주인의 부은 볼이 바닥에 눌린 탓에 익살스러워졌다.  흥얼흥얼.  멍하니 커다란 창 밖을 내다보면서 마음대로 지어낸 노래를 나지막이 뱉다가 제 머리카락 빛깔과 같은 볕이 코 앞에 닿아지니 배시시 웃는다.  그걸 잡으려는 양 허공에 손을 휘두르는 게 영락없는 고양이다.




“배고파?”




배 속에서 꼼질꼼질 움직이는 태동이 반복되니 야쿠가 고개를 숙여 물었다.  누굴 닮았는지 입이 쉬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거실 여기저기에 늘어져 있는 간식거리 중 젤리 하나를 날래게 잡아챘다.  집에 오실 때마다 야쿠의 어머니는 몸에 좋은 것들 놔두고 허구한 날 젤리를 달고 산다고 성화하시지만 리에프 2세가 먹고 싶어 하는 걸 어떡하나요?  설탕이 묻은 바나나 모양을 오물오물 씹으니 마음이 다 편안해진다.  임신을 하기 전에는 손에도 대지 않던 것들을 좋아하게 되다니 신기한 일이다.  젤리는 물론이거니와 각종 빵이나 푸딩 같은 것들.  특히, 생 과일이 들어간 푸딩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요즘이다.  리에프가 일어나면 집 앞 제과점부터 가자고 해야겠다.  몸집에 비해 터무니없이 커진 배로 비스듬히 누워있은 지 오래라 허리가 뻐근하다.  반대로 무겁게 돌아 누우면서 배를 받치는 야쿠의 손은 자연스럽다 못해 이젠 버릇이었다.  창을 등지니 멀찍이 현관에 쌓여있는 상자와 마주하게 되었다.  리에프의 짐이 들어있던 것이다.  그의 이삿짐을 정리하느라 새벽이 되어서야 잠들었다.  피곤해.  아직도 침실에서는 이따금 깊게 잠든 사자의 넘어갈듯한 숨 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어쩌다 보니 상견례였던 식사 이후, 사자의 부모님은 그 길로 당장 아들의 짐을 싸놓은 모양이었지만 리에프가 계속 미뤄왔었나 보다.  필요한 것이야 그 때 그 때 들러서 가져오고, 웬만한 것은 이미 야쿠의 Sweet Home에 있으니 채근하는 가족들에게 나중에! 하고 홱 돌아 고양이의 곁으로 와버렸을 게 안 봐도 눈에 훤하다.  결국 그의 가족들이 사고뭉치 아들의 동태도 파악하고 배부른 연인도 살필 겸 짐을 직접 갖다 주셨다.  야쿠는 저번처럼 그들 앞에 바보같이 떨고만 있고 싶지 않았다.  제 입으로 말하긴 쑥스럽지만, 리에프를 믿고 맡길 수 있는 괜찮은 사람으로 보여지고 싶다는 욕심이 컸다.  대청소도 하고 자신 있는 음식 몇 가지도 손수 해서 내놓았다.  공연히 무리하는 거 아니냐며 리에프는 못마땅해했지만 막상 부모님이 좋아하는 걸 보더니 저가 더 뿌듯해서 안달이었다.




‘입맛에 맞으세요?’


‘당연하죠! 전골은 야쿠상이 제일 잘하는 거잖아요.’


‘리에프, 너한테 물어본 거 아니야…….’


‘하하, 진짜 웃긴다! 팔불출이야!’




아리사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녀는 서로를 어려워하는 부모님과 야쿠 사이에서 제 역할을 톡톡히 해 주었다.  사자는 있으나 마나.  오히려, 야쿠에겐 리에프가 걸림돌이다.  무슨 얘기만 나오면 제 편을 들고 서슴없이 애정 표현을 하는 바람에 진땀을 뺐다.  둘만 있을 때는 전혀 느끼지 못했는데 식사 내내 저만 보면서 이것저것 참견하는 것을 그의 가족들이 떨떠름한 얼굴로 보고 있으니 참 고역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리에프는 야쿠가 쌈이라도 싸면,




‘쌈도 어쩜 이렇게 작게 만들었어요? 엄마, 이것 봐요, 진짜 귀엽죠?’


제 입에 뭐라도 묻으면,


‘야쿠상, 닦아줘요―’




이런 식이었다.  몰래 꼬집어 보기도 했지만 꿈쩍도 않고 천진하게 왜요? 물으니까 더 할 말도 없었다.  민망해서 밥이 입으로 들어갔는지 코로 들어갔는지 모르겠다.  리에프가 난데없이 입술을 들이미는 걸 보다 못한 부모님이 결국 그에게 점잖게 좀 있으라고 야단하셔서 야쿠는 참지 못하고 웃어버렸다.  이후에는 초음파 사진으로 도배된 앨범을 보여드렸다.  생각보다 훨씬 좋아하셨지.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 하는 리에프의 아버지에게 가져가셔도 된다며 한 장을 내밀었더니 냉큼 받아 지갑에 넣으시더라.  뒤이어 손을 내민 어머니와 아리사에게도 사진을 선물했다.




‘만져볼래요?’




자꾸 배를 힐끔거리는 아리사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면서도 눈길은 떨어지질 않는다.  야쿠는 부러 방긋 웃으면서 그녀에게 살짝 배를 내밀었다.  만져도 되냐고 묻는 것처럼 리에프와 눈을 맞춘 그녀는 제 팔을 미는 동생에 주저하다가 손을 뻗는다.




‘그,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얇은 옷 아래로 야무진 감촉이 느껴진다.  안녕.  인사를 건네자 신기하게도 배가 꿀렁 움직였다.  세상에!  처음 느껴보는 태동에 그녀는 입을 벌린 채 말을 잇지 못 했다.  고모인 줄 아나 보다고 했더니 아리사는 감격에 겨운 양으로 한참 그 곁에 붙어 있었다.




“야쿠……”


“일어났어?”




거인에 둘러싸인 소인의 기분이던 날을 회상하던 야쿠는 눈을 비비면서 다가오는 리에프 덕에 다시 그 때로 돌아간 것 같다.  새삼스럽게 큰 키를 가늠해 보다가 픽 웃었다.  일어나자마자 잠긴 목소리로 제 이름부터 부르는 게 아이 같아 귀엽다.  190cm가 넘는 아기는 곁에 벌렁 눕더니 야쿠의 등을 온 몸으로 끌어 안는다.  어깨에 턱을 대고 커다란 손바닥을 배에 올린다.  잘 잤냐는 인사라도 주고받나 보다.  리에프가 발치에 흩어져 있는 담요를 발가락으로 그러쥐어 올린다.  품 안에서 핸드폰을 만지작대는 야쿠를 제멋대로 담요로 둘둘 말아서 다시 팔 다리에 가두었다.  닿는 아무 곳에나 입술로 장난을 치다가 귓바퀴를 잘근잘근 깨문다.  사자의 이런 치대기에는 이젠 도가 텄다.  그러든지 말든지 담요를 걷어냈다.




“더워요?”


“아니, 아리사가 사진 보내래.”




그래서?  리에프는 영문 모를 표정으로 야쿠의 행동을 살핀다.  곧 카메라 화면을 채운 건 알아보기 힘든 둥근 모양이다.  성에 차지 않는지 티셔츠마저 걷어 올린다.  팽팽해진 배꼽이 보였다.




“옷은 왜 올려요?”


“애기만 찍어 보내라는데?”


“이씨! 그렇다고 맨 살을 보내냐?”


“냐? 너 방금 나한테 반말했냐?”


“내놔요, 보내지 마!”




핸드폰을 가지고 엉겨 붙어서 사진을 보내니 마니 실랑이를 벌인다.  장난스런 웃음소리가 거실에 가득 채워진다.  갈비뼈를 간질이는 손에 매달려 깔깔거리다가 리에프의 얼굴을 밀어냈다.  잠깐만!  크게 웃으면 배가 아프도록 당긴다.  여전히 웃는 표정으로 이질적이게 끙끙 앓는 소리를 내니 사자가 대신 배를 잡아주었다.  그만 웃어요.  작게 다그치는 게 왜 이렇게 웃기지?




“아아…… 너무 웃겨, 배 아파…… 큭…… 아!”




웃다가 찡그렸다가 가지가지 한다.  같이 웃어도 되는지 묻는 어리둥절한 눈동자와 마주치니 한 번 터진 웃음이 가실 새 없이 야쿠는 팔로 배를 누르면서 발을 구른다.  찢어지는 것처럼 아픈데 웃음이 안 멈춘다.  그렁그렁 맺히는 눈물을 보고 리에프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지었다가 이마를 한 대 얻어 맞았다.  훌쩍거리면서 웃기지 말라고 소리치는 배불뚝이를 어떡하면 좋을지 전혀 감이 안 잡힌다.  아가야, 넌 웃음이 많구나.



















“리에프, 볼링 치러 가자!”


“오늘은 진짜 안 돼.”


“그럴 줄 알았어.”


“이제 얘는 우리랑 다른 세상 사람이라니까, 포기해.”


“나 같아도 집에 가고 싶겠다.”




멀어지는 친구들에게 크게 손을 흔들어준 남자는 몸을 돌려 전철역으로 향한다.  더운 바람이 그의 옷깃을 스쳐 지나간다.  벌써 여름인가?  야쿠와 만나고 1년도 안 되는 시간 안에 많은 게 바뀌었다.  친구들은 철이 들었다고 말한다.  학교가 끝나면 곧잘 그들과 어울려 놀던 것이 아주 오래된 일처럼 느껴진다.  배구부에도 발길을 끊은 지 오래고.  어떤 때는 전부 시간 낭비라고 생각할 만큼 그에겐 몰두하고 싶은 것이 따로 있다.  오매불망 저를 기다리고 있을 고양이와 아기가 있는 집 말이다.  오히려 야쿠가 또래들처럼 지내라고 닦달할 정도로 리에프는 충실하다.  빨리 가서 작은 몸을 안고 오늘을 이야기하고 입을 맞추고 싶다.  지금이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럽다.  전철에 오르자 잠시 그에게로 여러 시선이 모아졌다.  워낙 키가 크니 겪는 예삿일이다.  흰 티에 찢어진 청바지만 입었을 뿐인데 이렇게 멋있을 일인가 싶은 외양이기도 하다.  아침마다 야쿠가 머리 감지 말고 가라, 모자 써라 괜히 시비를 거는 데에도 다 이유가 있다.  반류든 아니든 가리지 않고 몇몇의 시선이 리에프에게서 떨어지지 않지만 그는 핸드폰만 들여다보고 있어 어떤 것도 눈치챌 생각이 없다.




[전철 탔어요! 뭐해요?]


[누워있어. 내리기 전에 말해줘, 마중 나갈게.]


[역까지? 더운데 나오지 말지.]


[역 앞에서 주스 마시면 돼.]


[망고 주스 마중 나오는 거죠!]


[ㅎㅎㅎㅎㅎㅎㅎㅎㅎ]




아, 귀여워!  별안간 소리 없이 웃더니 끝내 어깨를 들썩이며 키들거린다.  너무도 분명하게 사랑에 빠진 얼굴이다.  그를 힐끔거리던 눈들이 아쉬움을 남긴 채 돌아섰다.  리에프는 자리에 앉자마자 책을 꺼내 들었다.  전철로는 꽤 오래 가야 해서 틈틈이 공부나 과제를 하는 편이다.  그래야 집에 가서 고양이랑 마음껏 놀 수 있으니까.  요즘엔 과제 말고도 고민이 있다.  책 위에 펼친 노트 귀퉁이가 글씨로 빽빽해진다.  문득 나른해진 분위기에 고개를 들었다.  석양이 새어 드는 창 밖으로 윤슬이 이는 강이 펼쳐진다.  사람들은 제각각 다른 눈빛으로 그 풍경을 마주한다.  리에프도 그 중 하나다.  주홍이 깊은 하늘 색에서 쉬이 야쿠의 머리카락을 떠올려낸 그는 다시 펜을 굴렸다.




“행복……”




의미를 알 수 없는 중얼거림이 진중한 입술로 흘러 나왔다.  꽤 어려운지 글씨를 벅벅 긋고 밑줄을 치고 하다가 한숨도 내쉬어본다.  슬슬 골치가 아프다.  책과 노트를 덮어 가방에 넣어 버렸다.  깊은 고민이었는지 어느새 내릴 역에 가까워져 있었다.




“이게 뭐야?”




식탁에 펼쳐놓은 리에프의 책을 정리하던 야쿠는 낙서로 엉망인 노트를 들어 올리면서 혀를 찼다.  과제한다고 안 놀아주더니 낙서만 한 거야?  저녁 메뉴가 국수로 정해지면서 소면을 사러 나간 사자를 나무라는 대신 종이를 노려보다가 그 안에서 제 이름을 찾아냈다.  죄다 ‘야쿠’라는 성이 붙은 이름이라는 것을 알아채는 데에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코하네, 하즈키, 카나미 등 많기도 많고 그 옆에는 전부 고심한 결과물이라는 것을 표하기 위한 것인지 또박또박 쓴 뜻풀이가 적혀 있다.  살며시 고양이의 입 꼬리가 올라간다.  어쩜 하나같이 예쁜 이름이다.  리에프의 사랑스러운 마음이 담겨 있는 이름들 중에 유독 진한 것이 있었다.  레이(幸)라는 글자는 여러 번 겹쳐 쓰여진 탓에 획 몇 개가 뭉툭했다.




“행복이라……”




잠시 턱을 짚고 섰던 야쿠는 아무렇게나 꺼내져 있는 펜들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다녀왔습니다!”




얼마나 떨어져있었다고 소면과 양파 따위가 든 봉지를 건네면서 야쿠의 이마에 뺨을 비빈다.  저녁이 늦어져 비키라고 할 줄 알았는데 웬일인지 그는 까치발을 들어 리에프의 턱 끝에 입을 맞췄다.  오늘 무슨 날인가?  단번에 싱글벙글해져서는 ‘모리스케―’하고 이름 끝을 늘여 부르는 가슴에 머리를 기댄 야쿠가 담담하게 읊조렸다.




“행복해.”


“네?”


“네가 있어서 행복하다고.”


“저, 저도요!”


“레이도 그렇대.”




어안이 벙벙하던 사자는 뒤늦게 의중을 알아채곤 살짝 뺨을 붉힌다.  왠지 쑥스러워서 얼굴을 보지 못 하게 야쿠를 팔 안에 가두다시피 안아버렸다.  리에프는 몇 번이나 ‘레이’라는 이름이 마음에 드는지 되물었다.  짜증을 낼 법도 한데 야쿠는 매번 그렇다고 대답했고 진심이었다.  ‘행복’이라는 이름만큼 저희의 아기에게 더 어울리는 것이 있을까?  서로의 손을 겹쳐 배를 쓰다듬었다.  레이, 네 이름을 부를 때마다 우리는 행복해질 거야.















*****
















휘영청 밝은 보름달이 뜬 밤이다.  초저녁부터 집이 분주했다.  요즘 들어 이 집은 손님맞이가 잦다.  틈만 나면 오시는 야쿠의 어머니와 주치의 요코는 물론이거니와 최근에는 아리사도 자주 드나드는 편이다.  오늘은 집들이라는 명목 하에 쿠로오와 켄마가 오기로 한 날이다.  무거워진 몸 때문에 외출을 꺼리게 된 야쿠가 신경 쓰이기도 하고 쿠로오한테 여러 가지로 신세를 졌다고 생각하는지 리에프가 먼저 제안한 일이다.  불편하지 않겠냐고 묻는 야쿠의 얼굴이 이미 화색을 띠어서 그는 가심 없이 그렇게 하자고 했다.  제일 큰 프라이팬을 꺼내 야채를 볶고 메추리 알에 검은 깨로 눈을 만들어주면서 콧노래가 끊이질 않았다.




“아아, 다리…… 리에프!”




파티용 가랜드를 걸겠다고 현관으로 향하다가 그대로 멈춰선 야쿠에게 펄쩍 다가간 리에프가 익숙하게 등과 오금을 받쳐 안는다.  몇 번 겪어보니 괜히 조심한다고 느리게 움직이는 것보다 재빨리 고양이를 눕히는 게 상책이라는 걸 깨달아서 그의 몸짓은 날래기 그지 없다.




“병원 가봐야 되는 거 아니에요? 계속 그러네.”


“으……”


“푸흡…… 해달 같다.”




안쓰럽긴 하지만 인상을 찌푸리고 오색 가랜드를 손에 꼭 쥔 채로 바닥에 눕혀지는 모습에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웃겨? 웃음이 나와? 맞을…… 아! 아아……”




섣불리 팔을 들어 주먹질을 하려다가 몸을 굳힌다.  다리를 문지르기 시작한 리에프의 손길은 부드럽기 짝이 없지만 이러나 저러나 야쿠에게는 고통스러울 뿐이다.  임신 중기의 막바지에 이르니 부종이 심해져서 시도 때도 없이 온 몸이 저릿저릿하다.  찌르르 허벅지를 타고 오르는 통증에 울상이 된 야쿠는 다 너 때문이라느니 머저리라느니 웅얼거렸다.  정성껏 그의 발을 주무르면서 여전히 웃는 빛을 띤 얼굴로 달래보지만 소용이 없다.




“몸이 너무 차갑잖아요, 오늘도 트렁크만 입고 있었죠?”


“더워.”


“그래도, 요코상이 옷 제대로 입고 있으랬는데 왜 자꾸 말 안 들어요? 저번에도 혼났으면서.”


“아, 살살해! 꾹 누르고 있으란 말이야…… 이 나쁜 자식.”


“말 좀─ 레이가 다 듣고 있다니까요!”


“안 들린다, 안 들린다.”




이어지는 잔소리에 장난스럽게 도리질을 한다.  리에프는 의외로 말을 참 잘 듣는다.  마냥 뺀질거릴 것 같은 생김과 달리 하라는 건 잘 따르고 하지 말라는 건 안 한다.  때로는 피곤한 장점이다.  필요한 거나 먹고 싶은 것을 부탁할 때야 벌떡 일어나 다녀오니 편하지만 간혹 엄격해질 때가 있다.  특히, 요코가 일러준 주의사항을 따르지 않을 때에는 저가 더 어른인 것처럼 야단이다.  속옷만 입고 찬 바닥에 드러누워 있지 말라고 요코에게 혼나는 걸 목격한 뒤로 졸졸 따라다니며 옷을 입혀주고, 과격한 언행이라도 뱉었다간 잔소리 폭격을 쏟아낸다.  못 들은 체 손에 쥔 가랜드를 만지작거리는 야쿠를 내려다보는 눈이 쌜쭉해진다.  어여뻐서 마음껏 얄미워할 수도 없다.  더 이상 끙끙거리지 않는 걸 보니 이제 좀 살만한가 보다.  야쿠는 살이 데워질 만큼 다리를 주무르고 있는 팔을 붙잡았다.  일으켜 줘.  이제 괜찮은지 물으면서 천천히 등을 받쳐준다.  고양이는 부러 그의 허리를 껴안으며 올려다보았다.  고마워.  턱이 닿아있는 가슴께가 간지럽다.




“내 말도 안 들어주면서.”


“그거 가지고 삐친 거야? 쪼잔하게?”


“쪼잔?”


“알았어, 좋은 말만 하면 되잖아. 리에프, 사랑해, 나 이거 저기에 높이 달아줘.”


“이럴 때만!”


“알았지?”




이 정도면 가히 맹수 조련사나 다름이 없다.  좀처럼 보기 힘든 애교에 치사하다고 투덜거리면서도 천진난만하게 앞으로 내밀어진 가랜드를 냉큼 받아 든다.  조금 더 위에, 더, 더!  야쿠의 지시에 따라 현관으로 가는 길목 천장에 장식을 달았다.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는 이에게 허리를 숙여 입술을 내민다.  잘했죠? 묻는 몸짓이다.  피식 웃은 야쿠는 가볍게 입을 맞추어 응했다.  귀여운 나의 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초인종이 울리고 반가운 손님들이 발을 들였다.  어서 와!  문을 열자마자 마주한 얼굴에 야쿠의 목소리가 높다랗다.  쿠로오와 켄마는 순간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난장판 속에 손발이 안 맞는 철부지 연인을 상상해왔던 그들은 의외로 알콩달콩한 분위기의 잘 정리된 집에 당황하고 만 것이다.  거기다가 오랜만에 보는 친구의 두드러진 배가 정말 낯설었다.




“딸이라니까 왠지 꽃을 사야 될 것 같았어.”




쿠로오가 야쿠의 배를 향해 예쁜 꽃다발을 내민다.  아직 뱃속에 있는 공주님 대신 꽃다발을 받아 든 리에프가 선수를 빼앗겼다며 툴툴거렸다.  켄마, 들어와!  그 때 쿠로오의 등에 가렸던 인영이 야쿠의 손에 이끌려 그의 옆을 지나쳤다.  예나 지금이나 단조로운 표정을 짓고 있다.




“리에프.”


“켄마 선배, 오랜만이에요.”


“뭐, 뭐야? 둘이 아는 사이야?”




두 눈이 동그래진 야쿠 앞에서 머쓱하게 옆머리를 긁적거린다.  아는 사이라고?  궁금한 건 쿠로오도 마찬가지다.  심드렁한 켄마와 얼굴을 붉힌 리에프는 각각의 따가운 시선을 피해 걸음을 옮겼다.  드디어 오늘인가?  어쩐지 쑥스럽다.  들어가서 얘기해요.  제 옷을 잡아당기는 야쿠의 어깨를 한 팔로 감싸 안았다.




그 날은 여우비가 내렸다.  푸르른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이 참 엉뚱했다.  마치 그와의 만남을 예견이라도 하듯이 말이다.  같은 교복을 입고 스쳐 지나가는 또래 친구들은 쓸데없이 해맑다.  소란스러운 우산 무리에서 슬그머니 벗어난 열다섯의 리에프는 인적이 드문 곳을 찾다가 학교의 담벼락에 다다랐다.  한 쪽 눈썹 위에 붙어있는 큼지막한 반창고가 비에 젖어 묵직하게 존재감을 더한다.  근처 벤치에 펄쩍 앉은 아이는 몸집만한 책가방을 옆에 내려두었다.  가방 안에 어머니가 챙겨준 우산이 있었지만 꺼내지 않았다.  한창 사춘기를 겪고 있던 그는 비를 맞으며 뜨거운 머리를 식히고 싶었다.  평소에 지겹도록 들어왔던 놀림이 오늘따라 왜 그렇게 듣기 싫었는지 모를 일이다.




‘하이바는 외계인일지도 몰라! 머리는 하얗고 눈은 초록색이잖아.’




내가 외계인이었으면 네 입에 끈끈이를 붙였을 거야.  어쨌든 외계인이 아니라서 이죽거리는 친구 녀석의 입을 막은 건 리에프의 주먹이었다.  아까의 일을 떠올리면서 미간을 좁히니 이마에 난 상처가 따갑다.  이긴 사람이 누구랄 것 없는 개싸움이었지만 친구의 키가 더 큰 것이 이제 막 160cm를 넘긴 그를 패배감에 휩싸이게 했다.  축축하게 젖어가는 교복 소매를 만지작거리는 손에 떨어지는 방울을 무의미하게 바라본다.  은발과 녹안.  유일한 약점이다.  누나는 언제나 아름답다고 말해주지만,




“역시 싫어.”




한참을 잡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담 너머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전까지는.  호기심 가득한 눈이 주저 없이 그 쪽으로 향한다.  갑자기 나타나 담벼락 꼭대기를 덥썩 움키는 손 때문에 놀란 그가 저도 모르게 가방 끈을 붙잡았다.  괴담의 한 장면인 줄 알았다.  여차하면 뛸 요량으로 다리에 힘을 주고 있는데 곧 그와 비슷한 교복 차림의 남자가 날래게 담을 넘어 바닥에 발을 디뎠다.  그리 높지 않아도 담은 담이라 낮은 것도 아닌데 그는 가뿐히 해내었다.  고양이?  리에프는 양 손으로 눈을 비볐다.  방금 월담한 남자의 뒤로 연한 갈색 꼬리 같은 것이 살랑거렸다.  잘못 본 건가?  아니.  태연하게 꼬리 끝에서 작은 우산을 받아 들더니 휘파람을 분다.  남색 우산이 잠시 그이를 가렸다가 다시 내보였다.  이번에는 주홍빛이 도는 갈색 머리카락 새로 세모꼴 귀가 팔랑거리는 게 리에프의 시야에 똑똑히 잡혔다.




“외계인이다……”




리에프가 멍청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유유자적 걸음 하던 야쿠는 벤치에 앉아 저를 물끄러미 보고 있는 아이를 발견하고는 얼른 혼현을 감추었다.  본 건가?  그렇다면, 반류인가? 싶어서 긴장했는데 그에게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반류는 아닌데 그렇다고 원인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의아했지만 그냥 그런 사람도 있나 보다고 생각하고 말았다.  어쨌든 반류라면 못 알아볼 리 없지.  안심이었다.  원인은 혼현을 볼 수 없다.  네코마 고교 바로 옆 중학교 학생임이 분명한 소년을 완전히 지나친 야쿠는 다시 입술을 모아 휘파람을 불었다.  혼자일 때면 어김없이 혼현을 이용하곤 하는데 좋지 않은 버릇이다.  지금처럼 무의식적으로 사용했다가 피곤한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지난번에 꼬리로 컵을 들고 가다가 맞닥뜨린 할머님께 혼이 났었다.  고양이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쟤는 왜 저러고 있담?




“야, 우산 없어?”




앞으로 드리워지는 그림자에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이상하다.  꼬리랑 귀가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  보고도 못 믿겠다는 듯이 야쿠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야! 다시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어깨를 들썩였다.




“우산 없냐고.”




끄덕.  얼떨결에 그렇다고 했다.  우산이 있는데 이러고 있었다는 것도 우습고 그가 말을 걸지도 몰랐기 때문에 저절로 고개가 움직였다.  꼬리가 없어도 이상한 사람이다.  키는 비슷한 것 같은데 고등학생이라는 이유만으로 어른 같은 표정을 짓고 있다.  의젓하고 따뜻한 색깔의 머리카락과 눈동자가 저와 반대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류장까지 데려다 줄게.”


“괜찮아요.”


“그래? 그럼 이 우산 가져.”


“네?”


“너 줄게.”




비는 질색이지만 왠지 그 애를 차가운 곳에 홀로 두고 싶지 않았다.  망할 비.  하얀 이마를 반이나 차지한 반창고가 안쓰럽게 젖어있는 게 눈에 박힌다.  이 놈의 오지랖은 천성이다.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는 리에프의 빈 손에 우산을 아무렇게나 쥐어주곤 돌아섰다.  조금이라도 비를 덜 맞으려고 뛰기 시작했는데 얼마 못 가 팔뚝을 잡아채는 손에 붙잡혔다.




“정류장까지만요!”


“으, 잘 됐다. 나 비 싫어해.”




리에프가 들고 있는 우산 안으로 머리를 넣으면서 활짝 웃는다.  그의 산산한 미소에 몸에 철썩 달라붙는 교복에 대한 짜증스러움이 깨끗하게 가셨다.  정말 이상한 사람.  비를 싫어한다면서 모르는 사람에게 우산을 막 줘도 되는 거야?  발 맞추어 걸어가면서 저를 아래위로 훑는 눈초리를 느낀 야쿠는 고개를 돌려 그 시선을 마주했다.




“나쁜 사람 같아?”




전혀 아니지만,




“담 넘는 거 봤어요.”


“그건 이 편이 정류장까지 훨씬 빠르니까.”




수긍한 듯 의심스러운 눈씨를 거둔다.  하지만 야쿠는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계속 내려다 보았다.  은빛이 도는 머리카락이 비에 젖어 달라붙은 흰 피부가 매끄럽고 진한 녹색 눈동자가 보석 같다.  예쁘다.  터무니없는 감상에 빠져있다가 입을 열었다.




“혼혈이야?”




하필 물은 게 이런 거였다.  그렇다고 답하는 리에프의 목소리에 날이 서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저 하얗고 파란 소년이 아름답다는 생각뿐이다.




“염색으로 그런 색이 나올 리가 없지.”


“…….”


“우리 집 흰둥이랑 똑같은 색이네, 만져봐도 돼?”




허락하고 말 것도 없이 그는 손을 뻗었다.  움찔 목을 움츠린 리에프는 눈 앞으로 다가온 손목에서 풍기는 시원한 향기에 조금 멍해졌다.  약한 파스 냄새에 달큼한 향이 섞인 오묘한 향기.  야쿠는 저만 보면 짖어대는 마당의 개를 떠올리며 투박한 손길로 머리카락을 넘겨본다.  섬세하지 못해서 이마를 밀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흰둥이는 사납게 굴어서 한 번도 쓰다듬어주지 못했다.




“흰둥이는 무지무지 귀여운 개야! 근데 날 별로 안 좋아해.”


“왜요?”


“글쎄…… 과가 달라서?”




말 끝을 흐리며 야쿠가 반창고를 살살 건드렸다.




“싸운 거, 아니면…… 맞은 거?”


“싸운 거에요!”


“푸하하, 뭘 발끈하고 그래? 왜 싸웠는데?”


“머리카락 때문에요.”




자세히 털어놓지 않아도 알 것 같다.  야쿠의 손을 쳐내면서 신경질적으로 제 머리카락 끝을 잡아당긴 리에프가 씩씩거렸다.  하지만 화가 났다기보다는 울적해 보인다.  거짓이라곤 담겨있지 않다는 걸 증명하고 싶은 양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야쿠가 그 앞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예쁘기만 한데?”




째려보는 리에프의 어깨를 두드리면서 킥킥거리더니,




“진심이야.”


“바꾸자고 하면 바꿀 거에요?”


“응, 바꿀게.”


“거짓말……”


“진짜야, 예뻐.”




눈결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에 주춤한 건 리에프다.  뺨이 발그스레해졌다.  낯간지러운 그의 속삭임은 거짓일 수 없다.  이미 리에프가 그렇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정류장에 다다랐다는 걸 깨닫기도 전에,




“어? 버스 왔다, 우산은 네가 가져가! 안녕!”


“아, 저, 잠깐! 만……”




그는 가 버렸다.  손에 들린 우산이 아니었다면 아마 그와 만난 것이 꿈이거나 귀신에 홀린 거라고 여겼을 것이다.  어쩐지 허무해진 리에프는 짧게 혀를 찼다.  야쿠 모리스케?  손잡이에 붙어있는 이름표를 오래도록 눈에 새겼다.  다시 볼 수 있을까?  답을 얻은 건 몇 달이 지났을 때다.




“야쿠, 반칙이야! 어느 틈에 거기까지 간 거야?”


“나를 놓치지 말라고, 하하.”




야쿠?  이끌리듯 네코마 고등학교 체육관으로 향하는 리에프의 뒤로 어디 가냐는 여러 목소리가 뒤따랐다.  우연히 지나던 중이었다.  정말 그 사람이 있을까?  발 소리가 요란한 그 곳으로 슬쩍 몸을 기울여본다.




“내가 살릴게!”




거기에 야쿠 모리스케가 있었다.  무릎이 쓸리던 말던 몸을 날려서 배구공을 쳐내는 그가.  들뜬 목소리가 크게 울려 퍼진다.  사람들에 둘러 쌓여 즐겁게 웃는 모습에 눈이 부셔서 더 이상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리에프는 저도 모르게 니트 조끼의 가슴팍을 움켜 쥐고 벽 뒤로 숨었다.




“뭐야…… 완전 멋있는 사람이었잖아!”




반짝거리는 사람을 동경하게 되었다.  그가 예쁘다고 말해주었던 머리카락을 싫어하지 않게 되었다.




“와, 그 때부터였던 거야? 징글징글한 순정파네.”




리에프가 이야기를 끝마치자마자 쿠로오가 맥주를 한 모금 들이키고는 이죽거렸다.  쑥스러운 듯 뭐 그렇게 된 거라고 얼버무리는 사자의 얼굴이 붉다.  그 옆에 있는 야쿠는 더 하고.  그들을 가리키며 흑표가 마음껏 껄껄거리는데 가만히 토끼 모양으로 깎인 사과를 돌려보고 있던 켄마가 중얼거렸다.




“쿠로랑 비슷해.”




징글징글한 쪽? 묻는 쿠로오에게 그는 어깨를 으쓱거릴 뿐이다.




“그 뒤로 틈만 나면 훔쳐보고 그랬는데…… 아, 음료수나 열쇠고리 같은 걸 전달한 적도 있어요!”


“그, 그랬어?”


“야쿠는 의외로 그런 데 무신경하더라, 그런 걸 받고도 우리한테 자랑하고 끝이었을 걸?”


“너무 작아서 졸업반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요, 고등학교에 가니까 야쿠상은 이미 없더라고요.”




허벅지를 꾹 누르는 야쿠에게 아프다고 소리치는 얼굴은 아이러니하게도 즐거움으로 물든 채다.  여전히 매를 버는구나, 읊조린 켄마에게 리에프가 항의했고 쿠로오는 술이나 마시자며 잔을 내밀었다.  물이나 홀짝거린 야쿠는 잘 기억나지 않는 저희의 옛 이야기에 놀란 기색을 숨기지 못해 여전히 두 뺨이 상기되어 있었다.  그의 얘기대로라면, 과거의 저가 순진한 리에프를 홀린 꼴이었다.  가끔씩 캐비닛 앞에 놓여있던 이온 음료수나 어떤 애가 전해주더라, 해서 받은 고양이 키링 같은 것들은 떠오르는데 아무리 노력해도 비 오는 날만은 희미하다.  어쨌든 쿠로오 말대로 저는 그런 걸 받았을 때 우와! 꿀꺽꿀꺽! 우와! 기뻐! 이게 다였다.  지금 돌이켜보니 지나치게 둔감했던 어린 날이다.  그제야 맞선 자리에서 그가 맹목적으로 굴었던 것도 납득이 되었다.  리에프에게는 야쿠가 몇 년 만에 만나게 된 첫사랑이었던 것이다.  거기다가 반류로 각성해서 헛것이라고 생각했던 꼬리와 귀를 진짜로 마주치니 반갑기도 했으리라.




“난 왜 기억이 안 나지? 그런 일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 순간을 까맣게 잊어버린 스스로에 시무룩해졌다.  리에프가 애써 웃음을 참으면서 그의 머리카락에 볼을 비빈다.




“계속 좋아했어요, 야쿠상은 그것도 모르고.”


“내, 내가 어떻게 알겠어? 고백도 안 했으면서!”


“제 첫 키스도 뺏어갔잖아요!”


“말도 안돼!”


“꿈 속에서.”


“변태 자식.”




작작 해라!  리에프에게 가만히 안겨서 속살거리는 야쿠를 보다 못한 쿠로오가 옆에 있는 애벌레 인형을 집어 던졌다.  그에겐 결곡하게만 보였던 야쿠가 사자와 붙어 앉아 자늑자늑한 눈길을 주고 받는 모습에 익숙해지려면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다.




“그럼 야쿠의 혼현을 본 건 전조 증상 같은 건가? 그 때는 선조 귀환이 아니었으니까.”


“운명이죠!”


“처음 본 반류와 사랑에 빠진다, 로맨틱한 걸.”


“느끼해.”


“저기, 켄마, 그렇게 노골적으로 싫은 표정 지으면서 말하면 상처야.”


“켄마 선배는 여전하네요, 근데, 선배는 반류가 아닌데 왜 그런 냄새…… 아!”


“리, 리에프, 샐러드 좀 갖다 줘!”




팔꿈치로 옆구리를 세게 밀어낸 야쿠에 리에프가 칭얼거리면서 일어난다.  쿠로오와 야쿠는 서로 눈을 마주친 채로 멈칫했다.  얼간이처럼 엉성하게 입 꼬리를 올린 쿠로오는 켄마에게 사과가 맛있는지 묻는 것으로 정적을 깬다.  켄마는 고개를 돌리면서 ‘응’하고 짧게 답했다.  묘한 분위기를 견디지 못 하고 고양이가 그들 사이로 나섰다.  흥미로운 빛을 띤 켄마의 금색 눈동자가 요리조리 제 배를 따라다니는 것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어때?”


“신기해.”




가끔 쿠로오를 통해 듣거나 야쿠가 보내온 메시지로 아기라는 존재에 대해 인식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부푼 배를 보고 있으니 감회가 새롭다.  언제 나와?




“세 달만 지나면 만날 수 있어.”




줄곧 아래로 향해있던 눈길이 싱긋 웃는 야쿠에게로 고정된다.  배는 불뚝 나왔는데 팔다리는 말라서 힘겨워 보인다.  고된 것을 혐오하는 편인 켄마는 임신을 바래왔던 그를 이해할 수 없고 앞으로도 그건 변하지 않을 것 같아서 자신이 반류가 아닌 게 다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작은 고양이를 가여워했다.




“야쿠, 많이 먹어야겠어.”




무심한 어투로 말하고는 맥주를 한 모금 마신다.  어느새 돌아와 쿠로오와 술잔을 기울이는 리에프를 째려보는 켄마의 눈을 포착한 야쿠가 크게 웃었다.  걱정해주는 건 고맙지만 깨어있는 내내 무언가를 먹는다는 진실은 차마 말할 수가 없다.  괜스레 따가운 눈총을 받은 리에프가 갸우뚱거린다.




“지금도 밥을 두 그릇씩 먹는데 더 먹을 수 있을까요?


“닥쳐!”


“레이가 들어요!”


“쳇……”


“두 그릇…… 설마, 돼지를 가진 거야?”


“아니야, 켄마.”




심각하게 의문하는 켄마에게 답하며 다정하게 그의 뒷목을 쓰다듬은 쿠로오는 속으로 티격태격하는 사자와 고양이를 한껏 부러워했다.  좋네, 중얼거리자 두 가지 색이 섞인 푸딩 머리가 저를 올려다본다.  뭐가? 하고 묻는 것 같아서 피식 웃으며 턱짓으로 그들을 가리켰더니 살며시 미소를 띤다.  응, 좋아 보여.  때때로 홀로 짊어진 것들에 위태로워 보이던 친구가 행복해 보여서 실로, 좋은 밤이다.















*****















레이, 너 정말 뚱뚱하구나.  안간힘을 쓰며 방문에 귀를 대고 있던 야쿠가 제 배를 밀듯이 문지른다.  결국 자세를 바꿔서 문에 등을 기대었다.  차단된 방에서 간간이 리에프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진중하게 되묻거나 알겠다고 답하고 있다.  괜스레 저가 다 긴장이 되어 침을 꿀꺽 삼키고 심호흡을 했다.  이심전심이랴.  뱃속의 아기가 꼬물꼬물 움직였다.




“쉿!”




분명 리에프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그 연락임이 분명하다.  길게만 느껴졌던 학기가 끝나자마자 리에프는 망설일 것도 없이 이력서를 준비했다.  교수님 한 분이 좋은 취업 기회를 마련해주셨다고 했을 때까지만 해도 야쿠는 별 다른 생각이 없었다.  왜냐하면, 최종 면접까지 보게 될 줄 몰랐으니까!  졸업까지는 아직 1년이나 남아있는 그에게 사회 생활은 빨리 해 봤자라고 만류했음에도 이번에는 제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솔직히 서운했다.  방학을 하면 내내 같이 있으면서 아기 방도 꾸미고 운동도 다니고 이것저것 준비할 계획으로 들떠있었는데 당장 면접에 합격하니 멀게만 느껴지던 그의 입사가 코 앞으로 다가왔다는 걸 실감했다.  결국 성격상 속에 담아두지 못 하고 당장 거리에 나앉을 처지도 아닌데 왜 벌써부터 저를 혼자 두는 거냐고 버럭 화를 내버렸다.




‘누가 너한테 돈 벌어 오래? 필요 없어!’




텔레비전을 가로막으며 소리친 고양이에 놀라서 튀어나온 하얀 뭉치 귀가 쫑긋 섰다가 사라졌다.  놀랄 만도 하다.  서류를 넣을 때나 1차 면접까지는 한 마디도 않고, 그 때에도 나란히 앉아 코미디 프로그램을 보고 있다가 갑자기 성화한 것이었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싸움에 불이 붙기도 전에 리에프가 항복을 선언했지만 말이 좋아 항복이지, 소리 한번 지르지 않고 야쿠를 굴복시킨 셈이다.  그는 씩씩거리는 야쿠를 끌어안아 단숨에 무력화시켰다.  달래듯이 뒤뚱뒤뚱 몸을 흔들면서 웃는데 거기에 대고 혼자 열을 냈으면 바보가 된 기분이었을 거다.  아아─ 모리스케─ 하고 아양을 떠는 어깨에 박치기를 했다.  시끄러워!  답지 않게 유치한 말만 하게 될 것 같아서 입을 꾹 다물었더니 다리 사이에 절 앉혀 놓고 입술로 귓바퀴를 앙앙 문다.  이런다고 풀릴 거면 애초에 삐쳤겠냐? 싶어서 뚱한 얼굴로 가만히 있었다.




‘반지 사주고 싶어요.’


‘뭐?’


‘야쿠상한테 해주고 싶은 게 많은데, 지금은요, 여기 널려있는 젤리도 제 힘으로 사줄 수가 없어요.’


‘안 먹어…...’




거짓말.  리에프는 픽 웃었지만 야쿠는 웃지 않았다.  고스란히 전해지는 아빠 리에프를 이해하다 못해 완벽히 이입해버려서 마음이 아프다.




‘저도 하루 종일 같이 있고 싶어요, 방학하면 놀러 갈 데도 생각해놓고…… 그런데 정말 좋은 기회에요, 잘해보고 싶어요. 아직 결과가 안 나와서 이런 말 하긴 좀 웃긴데, 회사 다녀도 불안하지 않게 노력할게요, 주말에는 화장실까지 따라다닐 거에요!’


‘그건 싫어, 바보야.’




결국 웃어버렸다.  이 애라면 정말 화장실까지 쫓아 들어올지도 모른다.  리에프는 씁쓸하게 웃는 야쿠의 턱을 부드러이 잡아 고개를 숙인다.  오래도록 입을 맞추었다.  서로의 손을 겹치고 이따금 숨결 앞에 기억나지도 않는 시시한 말을 엮으면서.  야쿠로서는 그가 무리하지 않길 바랄 뿐이다.  이미 겪어봤기 때문에 사회 생활이 얼마나 녹록하지 않은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가고 싶어하는 회사니까 잘 됐으면 좋겠다만 한편으로는 떨어져도 나쁘지 않다고 몰래 생각하고 있다.  그래도 최종 면접 때에 열렬히 응원을 해주긴 했다.  전날 밤 잠이 안 오는지 자꾸 뒤척거리기에 팔베개를 해주면서 그가 안심할 때까지 괜찮을 거라고 속삭여주고 가슴도 토닥거려주었다.  잠이 쏟아졌지만 참고 참아서 끝내 리에프가 잠드는 걸 보고야 눈을 감았다.  그것뿐인 줄 알아?  정신 없이 씻고 준비하는 틈에 정장 재킷 안쪽 주머니에 선물도 넣어 놓았다.  이 정도면 할 만큼은 했지?




‘여―보! 끝났어!’


‘야, 야! 구두부터 벗어! 어땠어? 분위기는 괜찮았어?’


‘네, 하나도 안 떨었어요!’


‘정말? 잘했어, 잘했어.’




머리카락을 말끔하게 올려 반듯한 이마가 도드라진다.  야쿠는 수트를 차려 입은 리에프가 가방을 집어 던지며 제 품으로 뛰어드는데 새삼스럽게 가슴이 뛰어서 혼났다.  앳된 느낌이 지워지니 어깨도 더 넓어 보이고 없던 분위기까지 장전이다.  남들 앞에선 헤실헤실 웃지도 않을 텐데 그럼 더 멋있어 보일게 뻔하다.  젠장!  왜 이렇게 잘 생긴 거야?  속으로 다시 한 번 불합격하라고 빌었다.




‘모리 여보, 뭐하고 있었어요?’


‘그만해…… 두 번 다신 안 써줄 거야.’




첫 면접에는 별로 긴장하지 않았었는데 최종이라는 말이 붙으니 벼락 맞기 직전인 것 같았다.  [주머니]  순서를 기다리면서 다리를 떨고 있는 리에프에게 야쿠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얼른 주머니란 주머니는 다 뒤지다가 안 쪽에서 손에 걸리는 무언가를 찾아냈다.  아기의 초음파 사진, 그 아래에 「나 돈 많아, 걱정 말고 파이팅♥ – 모리 여보 –」 쓰여있는 메모를 내려다보던 그는 소란스러운 군중 속에 몸을 숙여 키들거렸다.  코 끝이 찡해질 만큼 좋아서 자기소개서를 쥔 채 덜덜거리던 게 언제인가 싶다.  면접이 끝나자마자 한달음에 집으로 돌아왔다.  야쿠가 또 파자마 단추를 다 풀어헤치고 있었지만 잔소리보다 손이 먼저 뻗어진다.  꼬옥 껴안고 작은 얼굴이며 머리카락에 쪽쪽거렸다.  급기야 무릎을 꿇고 톡 불거진 배꼽에 뽀뽀 세례를 퍼부었다.  그만하라고 이마를 꾹꾹 밀어내는 손에도 입술을 내밀었더니 까르르 웃는다.  입술도 맞았다.  이렇게 든든한 모리 여보 덕분에,




“야쿠상! 붙었대요! 다음주부터 출근이에요!”




합격했습니다.




“와, 리에프! 잘했어! 네가 안 될 리가 없지!”




벌컥 문을 열고 나온 리에프에게 와락 안기고는 그의 엉덩이를 팡팡 두드렸다.  기특해라!  다음주부터 출근 잘 해!  무심코 함께 기뻐하던 야쿠가 그의 팔에 휘둘리면서 일순 멍해진다.  출근?  출─근?  출근!




“소화 안 되거나 그런 증세는? 슬슬 숨이 찰 수도 있는데.”


“속이 쓰릴 때는 있는데 아직 숨 찬 건 모르겠어요, 그보다 제 얘기 들었어요?”


“슬슬 조심해야 돼, 천천히 걷고……”


“진짜 걱정이라니까요! 지금까지 연락도 없고, 사고라도 친 거 아냐?”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저은 요코가 옆에 있는 찻잔으로 손을 옮긴다.  검진은 나 몰라라 하고 백사자의 첫 출근 이야기로 야단인데 도무지 뭐라고 대꾸해줘야 할 지 모르겠다.  아직 세상물정 모르는 하이바 리에프가 회사를 갔다니 이게 말이나 되냐고 묻는데, 그녀로서는 어깨를 으쓱거릴 수밖에.  야쿠 눈엔 마냥 사랑스러운 아기 사자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는 어엿한 성인이다.  심지어 덩치도 크고 가끔 대화를 나눠보면 의외인 점도 많다.  엉뚱한 소리를 할 때도 있지만 저가 흥미 있는 사항에는 꽤 심도 깊은 지식이나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그를 허투루 봤던 요코는 몇 번 놀란 적이 있다.  그리고 야쿠가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 있는데, 그건 바로 리에프가 누구한테나 멍청하게 웃어주고 간이며 쓸개며 빼줄 것 같이 구는 사람이 아니라는 거다.  하긴, 이런 건 야쿠가 알 수 없고 굳이 알 필요도 없겠지만.  걱정스럽게 푸념을 늘어놓는 그에게,




“그래? 내가 보기엔 너보다 나은데? 그다지 어린 애 같지도 않고.”




라며 낯빛 하나 바꾸지 않고 일축해버렸다.  내가 맨몸으로 바닥에 누워있지 말랬지? 덧붙이기에 야쿠는 덥다고 중얼거리면서 옆에 있는 셔츠에 은근슬쩍 팔을 꿴다.




“정신적으로 말이에요, 집이랑 회사는 다르잖아요! 요코상은 걔가 얼마나 여린지 몰라서 하는 소리에요, 덩치만 컸지, 물러터져 가지고.”


“글쎄…… 그건 야쿠 한정 아닌가?”


“네?”


“제3자로서 말할게, 하이바는 약하지 않아, 오히려 가끔은 위협적이기까지 해.”




쓸데없는 걱정 말고 축하한다고 전해 줘.  또각또각 구두 소리가 멀어진다.  야쿠는 시간을 확인했다.  오늘따라 느려터진 시침 궁둥이에 채찍질이라도 하고 싶다.  지옥으로 들어간 리에프에게서는 종일 연락이 없다.  밥은 잘 먹었는지, 혼나진 않았는지 보낸 메시지에도 답이 없고.  야쿠에게 그는 아직 기대고 싶다기 보다 안으로 품어 지켜주고 싶은 마음을 들게 하는 어린 연인이다.  엄한 데에 내놓기엔 불안하다.  침실로 향하는 걸음에 힘이 하나도 없다.  아침부터 안절부절 못하고 낮잠 시간마저 놓쳤더니 급격히 피곤해졌다.  괜스레 리에프의 베개를 귀 옆으로 당겨 놓고 눈을 감았다.




“레이, 아빠 보고 싶지?”




야쿠는 이불을 끌어당겼다.  이불로 배를 꽁꽁 감싸주는 서툴지만 애정 어린 손길이 벌써부터 그립다.

그 시각, 어느 디자인 회사 5층의 한 사무실에 빳빳이 등을 세운 신입사원이 보인다.  끌끌하게 웃고 있는 사원증의 증명 사진과는 달리 경직된 얼굴이다.  바쁘게 움직이는 이들 가운데서 뭐 마려운 강아지 마냥 다리를 떨기도 하고 요리조리 힐끔거리면서 눈치를 보기도 한다.  두꺼운 매뉴얼을 세 번째 읽고 있다.  보고 있으면 금방 오겠다던 선임은 몇 시간 째 그를 방치해서 리에프는 졸지에 꿔다 놓은 보릿자루 신세였다.  오전에 배운 것들을 다시 수첩에 정리하는데, 아까는 찰떡같이 알아들었던 것들이 처음 보는 것처럼 이게 뭔가 싶고 너무 빠르게 지나간 부분은 뒤죽박죽 적혀 있어서 어디가 시작인지도 모르겠다.  엉망진창이네.




“휴……”




쓸모 없는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에 점심 때까지만 해도 넘치던 의욕이 시들지 못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나마 제 자리라도 있는 게 다행이다.  화장실에서 마주친 동기 한 명은 아직 자리가 정리되지 않아서 응접실에 우두커니 앉아 벌을 받는 중이라고 했다.  시스템이라도 익혀보려고 마우스를 붙잡았지만 ‘권한이 없습니다’란 문구 앞에 좌절하고 마는 사자다.  핸드폰은 왠지 들여다봐서도 안 될 것 같아서 두 번째 진동이 울렸을 때 가방에 집어넣었다.  보나마나 야쿠 모리스케일 것이다.  그는 출근 전날까지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아직 어리다느니 내공이 부족하다느니 걱정을 늘어놓았다.




‘해내면 되잖아요!’




종반에는 아직도 내가 그렇게 못 미더운가 싶어서 조금 신경질을 냈다가 아차! 했다.  하지만, 주먹이 날리거나 서운해할 줄 알았던 야쿠는 의외로운 포옹으로 그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네가 다른 사람들한테 싫은 소리 들을까 봐 그래, 생각만 해도 싫어…… 분명 있을 거란 말이야, 넌 당연히 실수할 거니까.’


‘당연하다니, 너무한데요?’


‘처음인데 어떻게 실수를 안 해? 그게 더 이상하지, 어쨌든 누구나 그런 거니까 상처받으면 안 돼.’




내 사람이 타인에게 받는 상처, 생각만으로도 짜증날 만큼 싫다.  나, 야쿠상에게 엄청 사랑 받고 있는 건가?  리에프는 새삼 감동해서 야쿠가 팔뚝을 꼬집을 때까지 껴안은 어깨를 놓아주지 않았다.  가르쳐주는 것을 받아 적으라며 잘 포장된 가죽 수첩이랑 펜까지 받았을 때에는 눈물까지 날 뻔 했다.  고양이가 보고 싶다.  아침에는 어디 멀리라도 보내는 것 같이 시무룩한 얼굴로 현관에서 기껏 하는 말이 안 가면 안 돼? 였다.  힘이 쭉 빠져서 헛웃음을 뱉었더니 그런 소리를 한 것이 스스로도 머쓱했는지 억지로 입 꼬리를 늘리면서 히죽 웃더라.  귀여운 웃음소리를 떠올리니 굳어있던 얼굴에 미소가 어린다.  야쿠 앞에선 달고 사는 웃음이 이 곳에선 왜 이렇게 어려운지 모르겠다.  점심 시간에 계속 억지로 웃었더니 눈가에 경련이 일 지경이다.  이제 와보니 야쿠가 왜 그렇게 노심초사였는지 조금 알 것도 같다.  겨우 몇 시간인데, 벌써 이 공간에 숨이 막힌다.  나중에야 어떨지 모르겠지만 사람들이 건네오는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신경을 써야 하고 도통 갈피를 잡기 어려운 업무들은 학교에서 배운 것과는 천지 차이다.  지금은 할 수 있는 것도 없어서 덩그러니 시간만 헤아리는 게 전부라 더 불편했다.  피곤해.  집에 가고 싶다.




“리에프!”




퇴근 시간에 휩쓸려 발길을 재촉하는 사람들 틈에 끼여 전철역을 빠져 나오던 리에프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지친 기색이 역력했던 얼굴에 화색이 돈다.  양 손에 망고 주스를 들고 있는 야쿠가 보인다.  거짓말처럼 기분이 좋아졌다.




“왜 나와 있어요? 오래 기다렸어?”


“레이가 망고 주스를 집어넣지 않으면 배를 발로 차겠다고 해서.”


“변덕이 심해서 이걸 마셔도 찰 거에요.”


“알아.”




보잘것없는 우스갯소리가 더 없이 소중한 시간이다.  낯선 공간에서 이것만큼 절실한 게 없었다.  야쿠는 힘들었다는 말 한 마디 없이 망고 주스를 받아 드는 리에프를 안쓰러운 눈길로 쓸어본다. 열심히 했나 보네.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역시 이 집이 주스를 잘한다니까! 너스레를 떨기에 손날에 묻은 펜 자국은 눈 감아 주기로 했다.




“수고했어.”




얼른 들어가서 밥 먹자!  허리를 감싸오는 작은 손을 제 손으로 덮으면서 리에프는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숨통이 트이는 것 같다.  다들 이렇게 버티고 사는 건가 보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서.  그러면, 나도 행복해지니까.















*****


















“다녀왔습…… 어?”




언제나처럼 현관에 나와있던 야쿠가 보이지 않는 집을 한 눈에 담으면서 서둘러 구두를 벗어 던졌다.  어디 있어요? 묻는 말에 여기! 하는 대답이 멀다.  좌우로 늘려보는 목에서 뚝뚝 소리가 난다.  어느덧 출퇴근에 익숙해졌지만 아직은 답답하기만 한 양복을 차례차례 벗어 개어놓고 헐렁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이제 살겠네.  온 몸을 감싸고 있던 긴장감이 사라지자 비로소 마음이 자유롭다.  집이 제일 좋다니까.  그 중에서도 야쿠 모리스케가 있는 집은 최고의 안식처다.  휘적휘적 거실로 나온 그는 곧바로 욕실로 향했다.  벌컥 문을 여니까 이제 막 속옷을 끌어내리려던 고양이가 질색을 한다.




“왜 들어와!”


“새삼스럽게 뭘 그래요? 밥은?”


“쿠로오가 왔었어.”




애매하게 걸려있는 속옷을 잡아당겼다가 손등을 꼬집혔다.  도와줄게요.




“또 저번처럼 불끈 하면 어떡하려고?”


“약 올리는 겁니까?”


“헤헤…… 그럼 오늘은 몸 좀 지져야겠다.”




근래에는 미끄러질까 봐 리에프가 목욕을 도와주는 날이 아니면 욕조를 이용할 수가 없었다.  레이의 만만찮은 무게 때문에 요코도 거듭 주의를 줘서 기껏해야 물만 묻히는 샤워만 하다가 오늘은 제대로 씻을 수 있다는 사실에 신이 난 야쿠가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내밀어진 칫솔을 받아 들었다.  꽁무니에 사자 캐릭터가 붙어있는 해괴한 칫솔이다.  심지어 사자가 커서 칫솔걸이에 들어가지도 않는다.  심부름을 시켰더니 이런 걸 사와서는 저가 양치질을 할 때마다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른다.  사랑에 빠지면 바보가 된다더니, 리에프는 정말 그렇게 된 것이 분명하다.  물이 받아지는 틈에 거울 앞에 나란히 서서 양치를 했다.  서로에게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장난하는 모습이 참 그들답다.  안 해도 된다니까!  이제 임신에 대한 거라면 거의 전문가 수준인 리에프가 사뭇 진지하게 온도계를 욕조에 담그는 걸 본 야쿠가 유난이라고 야단이지만 싫은 눈치가 아니다.  리에프는 제 티셔츠를 꼭 붙들고 있는 손을 잡아챘다.  조심하라고 중얼거리면서 등을 받쳐주는 팔에 의지해 물이 찰랑이는 욕조로 발을 디딘다.  아아, 따뜻해.  나른해지는 표정에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 사자가 꼬리를 흔들면서 그 곁으로 쪼르르 다가 앉았다.  야쿠는 그런 그가 귀엽다는 듯이 물기 어린 손가락으로 아래턱을 쓰다듬었다.




“머리도 감아야죠?”


“해주게? 나야 좋지만…… 피곤하지 않아?”


“누가 그냥 해준대요?”




자.  한 쪽 뺨을 내민다.  반달눈이 된 야쿠는 그에 입술을 대고 키들키들 웃는다.  상쾌한 치약 냄새가 베인 숨결이 간지럽다.  뻔뻔하게 고개를 돌려 반대쪽에도 뽀뽀를 받아냈다.  마지막이라며 눈을 감은 리에프의 귀를 잡아당겨 콧잔등과 입술에 차례로 입을 맞추고 장난스럽게 입술을 깨물었다.  목덜미를 쓸어 내리는 손길이 진득하기에 어깨를 밀어냈더니 혀를 내어 입맛을 다신다.




“생각보다 일찍 왔네, 회식이라더니.”


“저녁만 먹고 끝났어요, 갑작스러운 자리여서 사람도 적었고……”




야쿠의 머리맡에 걸터앉아 분홍빛이 된 몸을 내려다본다.  온전히 내 것일까?  가끔은 옆에 있어도 욕심이 난다.  머리카락이 짧아서 힘들일 것도 없이 거품을 내는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손가락이 길어서 조금 엉성해 보인다.




“다행이다, 일은? 바빴어?”


“음…… 말하기 싫은데……”


“무슨 일 있었어?”


“주문서에 0을 하나 더 붙여서 회사를 말아먹을 뻔 했어요.”


“뭐?”


“천 만원을 일 억으로 만드는 게 쉬운 일이더라고요, 다행이 보내기 전에 알았는데……”


“혼났어?”


“네.”




아무렇지 않은 척 말하지만 실수 때문에 울적했던 게 틀림 없다.  제게 향해진 커다란 눈망울을 피하는 눈초리가 한껏 처져 있었다.  그는 심각한 것 같아서 야쿠는 웃음을 참으려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  사무실 한 켠에 신입사원 리에프가 시무룩하게 고개를 떨구고 있는 게 머릿속에 그려진다.  그 정도면 약과야.




“나는 회사 들어간 지 얼마 안 됐을 때, 법인카드 잃어버렸어.”


“헉! 야쿠상, 심해.”


“죽을래? 아무튼 난생 처음 멍청하단 소리도 들어보고…… 집에 와서 술 마시고 울었어.”


“풉…… 귀여웠겠다.”


“귀엽긴, 회사에 불 지르려고 했는데?”


“하하, 그러고도 남았을 것 같아.”


“그 때는 그거 해결하겠다고 며칠을 고생했는데 지금 생각하니까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 그냥 그럴 수도 있는 거야, 누구나.”




처음이니까 괜찮아.  머리카락을 헹구는 기분 좋은 손에 기대 눈을 감으면서 야쿠는 어른스러운 말투로 웅얼거렸다.




“지금 위로해주는 거에요?”


“너무 기죽지 말라고, 대신 다음부턴 조심해.”


“멋있어, 사랑…… 으앗, 바지 다 젖었다!”




제 팔에 턱을 괸 야쿠는 허둥지둥 발을 구르는 리에프를 보며 함소한다.  웃옷도 이미 절반이 물에 젖어 살에 달라붙은 걸 보고 바보라며 손가락질을 했더니,




“받아라!”




샤워기를 들어 물을 뿌려댔다.  미쳤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소리치는데 그는 유치하게 에베베베 약을 올린다.  손에 잡히는 거라곤 샤워볼이 전부고, 힘껏 던졌지만 리에프는 전혀 타격을 입지 않았다.  분한 마음에 야쿠가 벌떡 몸을 일으키다가 별안간 꽥 소리를 냈다.




“아! 나 엉덩이, 엉덩이!”


“모리!”


“쥐! 쥐나…… 히잉……”




못 살아!  누가 고양이 아니랄까 봐 쥐를 달고 산다고 핀잔하며 수건이란 수건은 다 꺼내서 바닥에 펼쳐놓는다.  제 딴에는 미끄러지면 안 되니까 취하는 방법인 건 알지만 잘 했다고 하기엔 참 고생스러운 수다.  빨래는 다 누가 하냐며 칭얼거리는 야쿠에게로 펄쩍 다가가서 고개를 숙였다.




“지금 빨래가 문제에요?”


“왜 네가 성질이야?”




인상을 찡그린 채 느릿하게 뻗어지는 야쿠의 팔을 잡아당겨 제 목에 두르게 하고 다급하게 안아 올렸다.  들리자마자 신경질적으로 제 어깨를 깨무는 야쿠가 얄미워서 한 대 쥐어박고 싶은데 두 손이 자유롭지 않아 보복할 수가 없다.  에잇!  대신 안고 있는 한 손으로 그의 엉덩이를 꽉 쥐었다.  야!  귀까지 새빨개진 그가 크게 버둥거린다.  하지만 다시금 퍼지는 고통에 얌전해졌다.




“레이, 리에프는 바보야. 그리고 멍청이, 똥개야……”


“아니야, 절대 아니야, 야쿠 모리스케가 훨씬 나빠.”




아래에서 중얼거림이 이어진다.  레이가 듣고 있다면 아빠들은 사이가 나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리에프는 실없이 웃으면서 계속 아니라고 반박했다.  참으로 험난한 목욕이다.  수건이 쌓아 올려진 바닥에 앉히고 개중 큰 하나로 몸을 감싸주었다.  허리에서 다리로 내려가는 따가운 통증.  찔끔 눈물이 다 났는지 야쿠가 훌쩍거린다.  그를 보면서 ‘자꾸 몸 생각 안 하고 움직이니까 그렇죠’ 야단하면서도 리에프는 고개를 숙여 붉은 눈가로 입술을 내린다.  이럴 때마다 왠지 제 잘못인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숙명인가 보다.  축축하고 딱딱한 욕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용서를 비는 마음으로 그의 허리춤을 주물렀다.  야쿠는 산책이랍시고 놀러 왔던 쿠로오를 역까지 데려다 준 것을 후회하는 중이다.  리에프가 회사원이 된 후로 근처에서 일을 하는 그가 자주 저녁 식사 상대가 되어주고 있기에 심한 말은 삼가도록 하겠다.  리에프의 자상한 손 아래에서 쓸모 없는 상념에 빠져 있던 야쿠는 문득 벌거벗은 몸이 부끄럽다.  은근슬쩍 손에 채이는 수건 하나를 끌어당겼다.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말 걸지 마......”




듣기 좋은 웃음 소리를 낸다.  리에프가 덮어준 수건으로 몸의 물기를 닦아 내니 슬슬 한기가 몰려온다.  앞으로 몸을 웅크렸다.  추워.  일어날 수 있겠냐는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벽에 걸린 가운을 가져와 손수 입혀준다.  사회선배로서 충고를 한 뒤였다는 걸 감안하면 참 민망한 상황이다.  하지만 싫지 않아서 아무 말도 않았다.  야쿠는 천진한 얼굴로 리에프가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볼 뿐이다.  마른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문지르고 손에 오일을 쥐어주고는 엉덩이를 두드린다.




“바르고 이불 속에 들어가 있어요!”




까분다고 툴툴거리면서 욕실을 나섰다.  절뚝거리는 뒤로 사자의 해맑은 소성이 따른다.  금방 야쿠가 있는 침실로 쫓아온 얼굴에 피곤이 가득하다.  리에프는 이불 위에 널브러져있는 둥근 언덕 옆에 벌렁 드러누웠다.  공기를 물들인 싱그러운 냄새가 코를 찌른다.




“죽겠다! 눈 감으면 바로 잠들 것 같아.”


“빨리 자자.”


“몸 차가워요, 이리 와.”




이불을 들어 꾸물거리는 몸을 재촉한다.  리에프가 제 다리로 차가운 발을 문질렀다.  따뜻해.  야쿠는 조금이라도 더 깊게 그에 닿고 싶어졌다.  돌아눕자 자연스럽게 등을 끌어안아준다.  몸을 단단히 얽는 팔에 얼굴을 묻었다.  서로를 빈틈없이 포개어 안은 둘은 살며시 눈을 감았다.




“요코상은 별 말 없었어요?”


“응, 딱히 이상한 건 없다고 했는데…… 원래 반류는 임신하는 것도 힘들고 출산해도 한 동안은 안심할 수가 없대.”


“레이는 괜찮을 거에요.”


“걱정 안 해, 우릴 닮았으면 엄청 튼튼할 걸?”


“이제 정말 얼마 안 남았다……”


“그만 말하고 자.”




숨소리가 엷어질 때까지, 경각에 무의식이 된 부드러운 갈기가 뒷목을 간질일 때까지 기다린다.  여러 가지 이유로 깊은 수면을 할 수 없게 된 야쿠가 좋아하는 틈이다.  리에프가 제 곁에서 최대로 안심한 채 잠드는 시간.  두툼한 앞발을 살살 쓰다듬었다.  손가락 사이로 흩어지는 은색 털이 달빛을 받아 윤슬을 만들어낸다.  네가 없었다면 어떻게 견뎌냈을까?  아기의 몫까지 늘어난 외로움을 혼자 떠안고 살아나갈 수 있었을까?  아마 못 했을 거야.  절망의 늪에 빠져 레이를 잃어버렸을지도 몰라.  이리 소중한 존재로 자라지 못했겠지. 야쿠는 리에프의 품 속에서 몸을 둥글게 말아 배를 껴안았다. 포근해.



그 날, 네가 있어서 다행이라는 말을 하지 못 했다.
















*****
















어린 날에 이런 일이 있었다.  그 해 여름은 지독히도 더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연이은 폭염주의보 속에 동네에 있던 작은 연못 물이 말랐다.  거기에 사는 물고기들이 죄다 바닥을 기어 다닌다는 친구의 말에 모험심 충만한 새끼 고양이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보육원 선생님 몰래 뒤뜰로 나온 소년, 야쿠 모리스케는 들꽃이 피어있는 풀 길을 헤쳤다.  동그란 갈색 눈동자에서 넘치는 생기가 꽃봉오리를 틔울 듯 했다.  고양이로 변해서 물고기 간식을 입에 털어 넣는 걸 상상했더니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넝쿨이 매끄러운 종아리를 할퀴는 것도 모르고 내달린다.  날 선 갈맷빛 가시들을 순식간에 지나쳐 고지에 다다랐다.  하지만.




‘아아…… 으, 으악!’




신나게 달려온 아이를 기다리고 있던 건 ‘죽음’이었다.  입을 벌리고 말라 죽은 것들 앞에 선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다.  풀썩 주저앉은 엉덩이가 아팠다.  내려다 보이는 다리에는 불그죽죽하게 그어진 상처들에 피가 맺혀 번진다.  이와 대조를 이루는 하얀 눈들.  두려움인지 고통 때문인지 모를 눈물이 퐁퐁 솟아오르는데 개중에 뻐끔뻐끔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것들이 보였다.  하찮게도 작다.  망설일 것 없이 두 손으로 꿈틀거리는 물고기를 움켰다.  왔던 길을 돌아가면서 몇 번이나 미끄러졌고 넘어지기도 했다.  보육원 뜰에 있는 회색 수돗가에 이렀을 때에는 무릎 아래 흰 피부가 온통 핏물로 얼룩져 있었다.  수도꼭지에서 쏟아지는 비가 힘겹게 아가미를 부풀리는 것을 적셔간다.  눈물이 말라붙은 볼이 따가웠다.  제발.  흙 묻은 손이 물에 떠오르는 것들을 누르고 또 눌렀다.  살아줘.  갑자기 왜 이런 꿈을 꿨을까?




“정신 놓으면 안 돼, 눈 떠!”




뺨을 내리치는 손이 매섭다.  야쿠는 아프다고 말하려다가 그럴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희미하게 보이는 산소 호흡기의 굴곡진 단면이 보인다.  괜찮아요.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뻗었지만 얼마 못 가 요코에게 무심히 잡아 내려졌다.  그래서 눈물을 닦아줄 수가 없다.  그녀가 울고 있는데.  숨을 한 번 들이쉴 때마다 마른 목구멍이 들러붙어 괴롭다.  허억, 허억하는 기분 나쁜 숨소리는 내 것일까?  아니면, 가여운 아기의 것일까?  눈 앞이 가물가물한데 머릿속에는 예쁜 얼굴 하나가 박힌 듯 비켜나지 않는다.  리에프, 많이 놀랐겠지?  창피하게 또 엉엉 울면서 달려오는 거 아냐?  그 애라면 분명 그러고도 남을 거다.  날 많이 좋아하니까.  도로를 가로지르는 구급차의 사이렌이 요란하다.  차가 밀려있는 도로는 시간이 멈춘 공간처럼 적막한데 차 안은 급박하고 참혹하다.  볼품없는 잠옷은 걷잡을 수 없이 빠르게 붉어지고 간이 침대의 모서리를 비집은 핏방울이 끄트머리에서 추락한다.




“5분 후 도착 예정입니다, 바로 수술 해야 돼요!”




요코는 간헐적으로 튀어 오르는 다리를 붙잡았다.  형편없이 패인 뺨과 핏줄이 터져 거무스름하게 변해지는 얼굴을 살피다 고개를 돌려버렸다.  여기에 누워있는 이는 야쿠와 전혀 다른 사람이다.




‘밥은 당연히 먹었죠! 오늘은 입맛이 없어서 한 그릇밖에 못 먹었어요.’




당장이라도 웃음기 어린 눈으로 말을 붙일 것 같은데 아무리 기다려도 미동이 없다.  조산기가 보인다는 말을 일부러 하지 않았다.  가벼운 증세였고, 아기에 관한 일이라면 무슨 얘기만 해도 과민 반응이어서 괜한 걱정만 하게 할까 봐 그저 조심하라고 당부했다.  대신 부족한 시간을 쪼개 그의 집에 들르고 여의치 않으면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곤 했는데, 오늘 야쿠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평소 같으면 뭐라도 하고 있나 보다고 생각하고 말았을 텐데 왠지 기분이 이상했다.  지나친 기우이길 바랬다.  하지만, 불안한 마음을 이기지 못해 들이닥친 집에 그가 피를 뒤집어 쓴 채 쓰러져 있었다.  이미 고통에 몸부림치다 기절한 게 분명한 모습이다.  바닥 여기저기에 난잡하게 이어진 핏자국이 생생하게 야쿠를 그려냈다.  출산 예정일보다 한 달 하고도 반이 남았을 때다.  위험해.  얼마나 방치되었는지도 정확하지 않고 일반적인 여성의 몸도 아닌 반류다.  느리게 감겼다 뜨이는 눈이 초점을 잡아내려 필사적이다.  살아줘.  그 모습이 거의 의식이 없는 상태임에도 어떻게든 아이를 살리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여서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 때, 야쿠의 몸이 경련하기 시작했다.  핏물이 아래로 왈칵 쏟아진다.  갑자기 밀려오는 통증에 명확해진 의식으로 야쿠가 비명을 질렀다.  숨이 멎을 듯한 고통으로 비틀린 얼굴에 땀방울이 송송 맺힌다.




“어억……”


“모리!”




수없이 마주해왔던 장면이 오늘처럼 두려운 적도 없었다.  요코는 저도 모르게 떨리는 몸을 덮어 눌렀다.  죄책감에 사로잡힌 요코의 앞으로 저지하는 손길이 뻗어진다.  동행한 전문의가 고개를 젓자 그녀는 순순히 물러났다.  동시에 다른 이들이 야쿠에게로 손을 뻗친다.  냉정함을 잃은 의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제 배에 손톱을 세운 야쿠를 응시하던 허망한 눈길이 돌아선다.  핸드폰을 꺼내든 손에는 다행히도 망설임이 없었다.




‘여보세요?’


“하이바.”


‘요코상, 이 시간에 웬일이세요?’




업무 중이라 곤란했는지 목소리가 작았다.  요코는 이마를 짚은 손을 연신 꼼지락거렸다.  아무것도 예상하지 못하는 이에게 전해야 할 소식이 지나치게 절망적이다.




“미안해요, 지금 바로 XX병원으로 와야 해요.”









택시 기사는 뒷좌석에 앉아있는 남자를 힐끔 쳐다보았다.  목적지를 이야기한 이후로 거의 넋이 나가있는 손님에게는 안 좋은 일이 있는 것이 틀림 없다.  아니라면, 저렇게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진 않을 테니까.




‘조산입니다, 수술 전망은…… 좋지 않아요. 하지만……’




색을 잃어버렸다.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이 전부 잿빛이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오래된 음악에는 가사가 없다.  혹시 꿈은 아닐까?  우리의 현실이 이리도 끔찍할 수가 있을까?  리에프는 전화를 넘어온 가녀린 음성이 내뱉은 말들을 억지로 되뇌었다.  수술, 조산, 미지수, 확률……  지독히도 우리와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이다.  어떤 부분을 야쿠와 연결시켜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그러고 싶지도 않은데 코 앞에 닥친 현실은 잔인하게 종용한다.  갑작스런 타격으로 머리가 지끈거린다.  괜찮을 거야, 괜찮을 거야.  불안을 이기지 못해 쿵쿵 울리는 박동을 막으려 목을 눌렀다.  그것도 잠시뿐이다.  마지막으로 본 고양이의 얼굴을 떠올리자 내내 억누르던 울분이 터져 나왔다.  웃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내 탓이야.  새벽에 사소한 다툼이 있었다.  근래에 처음으로 한 프로젝트를 도맡게 된 리에프는 과로에 시달렸다.  집에 와서는 힘든 내색을 않으려고 노력해야 했지만, 쉬운 일이었다.  현관에 들어서면 반갑게 팔에 매달리는 무게를 느끼는 것만으로도 고단함이 잊혀졌으니까.  동화책 읽어줄래?  곁에 다가앉자 자연스럽게 허벅다리를 베고 눕는다.  익살맞은 눈이 어서 읽으라고 재촉했다.




‘그 때였어요, 숲 속에 성난 사…… 야쿠상, 너무한 거 아니에요?’


‘뭐가?’


‘읽어달라고 해놓고, 지금 핸드폰 게임 하는 거에요?’


‘바보, 내가 읽어달랬냐? 계속해, 레이는 재미있게 듣고 있을 거야.’


‘알았어요.’


‘……’


‘숲 속에 성난 사냥꾼 리에프가 나타나 고양이를 공격했어요. 뽀뽀 공격이었어요!’


‘뭐? 으아, 하하하! 간지러워!’




뺨을 깨물었더니 목을 끌어안는다.  행복하게만 들리는 웃음이 귓가로 흩어졌다.  하지만, 어제는 날이 좋지 않았다.  협력하던 다른 부서의 담당자가 실수를 하는 바람에 프로젝트에 차질이 생겼고 그 책임이 고스란히 리에프에게 전가되었다.  어쩔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머리를 조아리고 죄송하다는 말을 하기가 싫고 화가 나더라.  한껏 짜증이 난 채로 몇몇 동료와 술을 마셨다.  차라리 일찍 들어가서 야쿠와 뒹구는 게 훨씬 나을 거라는 생각을 했지만 저를 위로한답시고 어깨를 두드리는 이들을 내치기도 힘들었다.  퇴근은 6시인데 거의 11시가 다 되어서야 집에 도착했다.  짐볼에 앉아서 운동을 하고 있던 야쿠가 현관으로 향한다.




‘으, 술 냄새! 피곤하지도 않아?’


‘야쿠 여보다─’




들러붙는 사자를 억지로 방으로 이끈 야쿠는 그를 던지다시피 침대로 밀어냈다.  자주 있는 일이 아니라서 다행이다.  리에프는 정말 무겁다.  헥헥거리면서 두 손으로 허리를 짚고 섰다.  널브러진 회사원이 팔을 휘저으며 여보를 찾는다.  겨우 넥타이와 양말만 벗겨냈는데, 그것조차 큰 일이었다.  일부러 멀찍이 걸터앉았더니 반쯤 뜨인 눈초리가 그를 따라온다.




‘나 싫어요? 술 마셔서 싫어요?’




아니.  픽 웃으며 일어난 야쿠는 손을 뻗어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었다.  의심스러운 표정이다.  그럼? 하고 묻듯이 손을 잡아당기기에 못 이기는 척 문뱃내 나는 가슴팍으로 쓰러지면서,




‘그래도 좋아.’




대답했다.  그제야 실없이 헤벌쭉 웃더니 눈을 감는다.  여기까지는 문제가 없었다.  리에프의 주사는 애교 수준이고 야쿠는 그가 잠든 것을 확인하고 나와서 짐볼을 가지고 놀다가 방으로 돌아왔다.  술 냄새가 싫어서 등을 지긴 했지만 취한 리에프가 싫은 건 아니었고 내일 얼마나 피곤할까? 하는 걱정과 안쓰러움 속에 잠이 들었다.  새벽 3시쯤에 번쩍 눈이 떠졌다.  야쿠는 마치 원래 잠들어 있지 않았던 것 같이 선명한 의식에 의아하며 몸을 일으켰다.  배가 고픈가?  속이 허하다 못해 쓰려서 그는 자연스럽게 침대를 벗어났다.  어둠 속을 밝히는 냉장고 불빛이 오롯하다.  과일이나 냉동 케이크 등 당장 먹을 수 있는 것들이 있었지만 끌리지 않았다.  그는 냉장고를 닫고 부엌의 조명을 켰다.  까치발을 들고 선반을 손으로 쓸다가 라면을 채어 내린다.  물이 끓는 동안 그는 엉덩이까지 흔들면서 야식 시간을 만끽했다.  먹음직스러운 라면이 담긴 사기 그릇을 놓쳐버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쨍그랑!




‘어? 리에프, 그게……’




상황 파악이 되기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침실에서 뛰쳐나온 리에프는 야쿠의 어깨를 세게 밀쳤다.  뜨거운 김이 올라오는 음식 바닥에 널려있는 그릇 조각에 다치기라도 할까 봐 그런 것이지만 놀라있는 야쿠에게는 역효과를 불러일으켰다.  깨워서 미안하다고 배가 고팠다고 어리광을 부리려던 몸이 뻣뻣하게 굳은 채로 뒤로 밀렸다.




‘뭐 하는 거에요, 이 시간에!’




순간적으로 오싹해진 등골에 식은땀이 베이는 게 느껴진다.  야쿠에게 무슨 일이 난 줄 알았다. 날카로운 마찰음 뒤로 이어진 최악의 상상이 그의 화를 끌어올렸다.  왜 나한테 성질이냐고 따져 물을 줄 알았던 야쿠는 웬일로 입을 꾹 다물었다.  깜짝 놀라서 말이 안 나왔다.  부주의한 제 잘못인 건 알지만 이 시간에 배가 고픈 것도 서러운데 라면도 못 먹고 리에프한테 혼나기까지 하니까 여간 울적한 게 아니다.  어디 다친 덴 없는지 물어보지도 않고 신경질적으로 제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는 걸 보고 고개를 숙여버렸다.




‘깨우던가 하지…… 하아……’


‘뭘 깨워…… 배 불렀다고 라면도 못 끓이겠어? 그냥 미끄러진 건데……’


‘이걸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와요? 잘못 엎었으면 어쩔 뻔 했어요!’


‘미안해, 내가 치울게.’




맞은 편에서 쪼그려 앉은 귀가 새빨개진 것을 보고야 리에프는 완전히 잠에서 깼다.  이런 걸로 야쿠에게 화를 내고 있다는 게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다.  아직 술이 덜 깬 게 분명해.  되는 일이 없다.




‘이리 나와요.’




손목을 잡으니 야쿠는 별다른 말 없이 그에 따랐다.  국물이 튄 옷을 갈아입고 욕실로 향하는 길목에 바닥을 치우느라 성난 등이 있어 살금살금 움직였다.  다리에 물을 끼얹고 있는데 곧 리에프가 따라 들어와 손을 씻는다.  뒤뚱뒤뚱.  도망치듯이 나가려는 야쿠를 붙잡으려다가 그만 두었다.  우선 씻고 옷도 갈아입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얼마 못 자고 또 출근할 생각을 하니 한숨이 흘러나온다.  사회 생활이 괜히 힘들다고 하는 게 아니다.  학생 리에프라면 지금쯤 삐친 여보를 위해 새 라면을 끓이거나 졸졸 쫓아다니면서 어떻게든 화를 풀어줬을 것이다.  애초에 이런 일을 만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과로로 여유가 없는 회사원 리에프는 그러지 않았다.  침대 끝에 딱 붙어있는 이의 어깨로 팔을 뻗으려다가 아까 소리친 것이 민망해서 다시 거두었다.  내일도 옆에 누워있을 사람이라서 그리 조바심이 나지 않았다.  퇴근길에 망고 주스를 사야겠다고 생각을 하다가 잠이 들었다.  하루 아침에 이렇게 희미해질 리 없는 사람이었다.  리에프는 바짓단을 꽉 쥐고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참지 못하고 울어버리면 진짜 안 좋은 일이 일어날까 봐 무섭다.  불안해서 미쳐버릴 것 같다.  앞이 캄캄해지는 걸 견딜 수 없어 눈을 감았다.  고인 눈물이 눈꺼풀을 데울 양 뜨겁다.  제발 살려주세요.  제발.




‘수술은 잘 끝났습니다, 경과는 더 지켜봐야겠지만 산부는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기는……’




유리 벽으로 차단된 공간에 죽은 듯이 누워있는 이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버겁게 이어져있는 기계들.  창백한 뺨을 어루만지고 싶은데 리에프의 손이 닿아있는 것은 차가운 유리다.  춥진 않을까?  이대로 눈을 뜨지 않으면 어떡해요?  내가 미워서 깨어나기 싫다고 하면 어떻게 할까요?  묻는 이도, 답하지 않는 이도 불분명하다.  푹 꺼진 환자복 아래로 드러난 가는 발목, 커다란 바늘이 꽂혀 있는 팔, 실핏줄이 터져 거무죽죽한 뺨까지 어느 하나 아프지 않은 게 없다.  세게 누르고 있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가슴이 아파서 그는 이따금 탄식처럼 신음을 뱉었다.  하루 전까지만 해도 저 안에 깊이 잠들어 있는 사람의 숨결을 느꼈었다는 사실이 꿈만 같다.  따뜻한 눈동자를 마주 보고 웃고 있던 것이 거짓처럼 어렴풋하다.




“실례지만, 나가셔야 돼요.”


“아, 여기에 있으면 안 될까요? 안도 아닌데......”


“중환자실은 면회나 대면 시간이 정해져 있어서요, 죄송합니다.”




흰색 벽에 붙어있는 의자에 고개를 숙인 채 앉아있는 남자의 앞으로 그림자가 드리운다.  급히 고개를 든 리에프는 그 그림자가 야쿠이길 바랬던 것인지 티 나게 실망한 기색을 보였다.  요코는 쓰게 웃으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방금 전까지 든직하게 가족들을 위로하고 깨어나지 않는 야쿠의 곁을 떠나지 못 하더니 지금은 다른 얼굴이다.  충혈된 눈이며 갈라진 입술이 윤기를 잃어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것 같다.  손에 난 손톱 자국이 그의 두려움을 여실히 내보이고 있어서 그녀마저 심장이 떨렸다.




“중환자실에 있는 동안은 기다릴 곳이 마땅치 않을 거에요, 시간도 정해져 있어서 여기 있어봤자 힘만 들 거고……”


“그래도…… 좀 불안해서요.”


“모리스케는 괜찮을 거에요.”




의외로운 일이다.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이바, 들어가요. 당신까지 약해지면 안 되는 때에요.”




경쾌한 알림이 울리고 곧 문이 열린다.  현관을 디딘 구둣발이 움직이지 않는다.  리에프는 어둠에 잠식되어버린 집에서 생소한 감정을 맞닥뜨렸다.  지독한 상실감.  세상의 모든 불행이 제게 닥쳐온 것은 아닐까?




“다녀…… 니다……”




어서 와!  불 꺼진 집 안 어딘가에서 당장이라도 이름을 불러줄 것 같다.  안 들어오고 뭐해?  그는 기꺼이 환청을 따랐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서늘한 공기를 밟으며 불을 켜자마자,




“아…… 으윽…… 흡……”




무너져 내렸다.  우리는 괜찮지 않다.  지금 괜찮은 건 아무것도 없다.  리에프는 서로의 잔상이 가득한 곳에 홀로고, 야쿠는 소름 끼치도록 냉랭한 곳에 덩그러니 누워있다.  바닥나지 않을 것 같던 애정도 우리를 얽어주던 ‘행복’을 잃으면 무용지물이다.  바닥에 선명하게 새겨진 핏자국 앞에 주저앉은 그는 오열했다.  바닥으로 떨어지는 눈물에도 상흔이 흐려지지 않는다.  지켜주지 못 했다.  야쿠 모리스케가 깨어나 현실을 마주했을 때, 절망은 두 배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옆에 있을 남자는 무력하게 가진 전부를 잃겠지.




‘운전 조심해서 와.’




사흘 만에 듣는 목소리가 차분하다.  회의 중이었지만 핸드폰 화면에 떠오른 이름을 기다리게 할 수 없어 급히 빠져 나온 그는 회사야? 묻는 말에 대답도 하지 못 하고 벽에 기대어 고개만 주억거렸다.  나 일어났어.  기다리고 있었다고 말해주고 싶은데 목이 메어서 리에프가 한 거라곤,




“네, 네……”


‘울지 마.’


“네……”




하고 멍청히 답한 것뿐이다.  끝이 갈라진 음성에 어린 물기를 숨길 수 없었다.




“야쿠상!”




허공에 놓여있던 시선이 벌컥 열린 문으로 향해진다.  왔어?  리에프는 억지로 발을 옮겨서 야쿠의 침대로 다가갔다.  다리에 추라도 달린 듯이 걸음이 무겁다.  다짜고짜 핼쑥해진 뺨에 손을 올렸다.  손바닥에 감기는 보드라운 감촉.  생생하다.  진짜인지 가늠해보는 듯한 행동에 응하려 손을 겹쳐 잡았다.  걱정했구나.  허리를 숙여서 야쿠의 어깨에 턱을 기댄다.  단단한 느낌이 전혀 없는 몸이 부서져버릴까 봐 경직된 팔이 어정쩡하게 둘러졌다.  괜찮아.  부드럽게 등을 두드리는 손길에 너른 어깨가 크게 들썩거렸다.




“얼마나 무서웠냐 하면…… 텔레비전 채널에 공포 영화밖에 없는 거, 그 만큼이었어요……”




야쿠는 엷게 웃었다.  깨어나자마자 리에프가 곁에 없던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마음을 갈무리할 시간이 없었다면 모진 말로 상처를 줬을 게 분명했다.  사랑스러운 그에게는 잘못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원망을 말했을지 모른다.  수척한 몰골로 치자면 사자는 이제 막 의식이 돌아온 저와 별반 차이가 없을 정도로 엉망이다.  그걸 보니 응어리진 마음이 잘 숨겨졌다.




“밥은 제대로 먹었어?”


“당연하죠.”


“거짓말.”




가만히 안겨있던 야쿠가 살짝 리에프를 밀어냈다.




“레이…… 보러 갈까?”




리에프는 짤막한 머리카락이 눌려있는 머리를 내려다본다.  움츠러든 몸이 ‘신생아 집중치료실’이라는 팻말이 붙은 유리 창으로 빨려 들어갈 것처럼 앞쪽으로 쏠려 있다.  어쩐지 낯선 느낌이 든다.  그가 울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찜찜하고 조마조마하다.  우리는 레이를 만날 수 없었다.  야쿠가 링거 바늘을 빼기 전에는 감염의 우려가 있어 아기를 직접 볼 수 없다고 한다.  아쉬운 마음에 절뚝거리면서 간호사를 붙잡더니 아기에 대해 이것저것 묻다가 다른 미숙아에 비해 건강한 편이라는 얘기를 듣고 나서야 안심이 되었나 보다.  연신 고개를 숙여 감사를 전하곤 멀거니 서 있는 리에프 곁으로 돌아왔다.  야쿠는 난처하다는 듯이 머리를 긁적이면서 그를 빤히 올려다본다.




“못 본대……”




어쩔 줄 모르겠다.  코 끝이 찡해진 리에프는 서둘러 야쿠의 등 뒤로 가 어깨를 감싸 안는다.  계속 마주하고 있었다간 펑펑 울어버릴 것 같았다.  왜 그러는지 묻지도 않고 헐렁한 환자복에 덮인 손이 그의 팔을 꼬옥 붙잡는다.  그러곤 그저 분홍색 담요가 덮여있는 인큐베이터에 달려있는 명찰을 보고 있을 뿐이다.  레이는 32주 만에 세상에 나왔고, 체중은 고작 1.9킬로그램이다.  아기는 태어나자마자 ‘응급환자’가 되어 수술실 앞을 지키고 있던 가족을 지나쳤다고 한다.  이틀 간 의식이 없던 야쿠는 여덟 달 동안 품고 있던 아기를 보지도 못한 채다.  우리에게 이렇게 가혹해도 되나?  한참 동안 시선을 떼지 않다가 소매를 잡아당겼다.  리에프.




“넌 봤지? 어때?”


“예뻐요, 작고……”




코에 연결된 수유 관이나 제 손만한 주사 바늘이 꽂혀있는 손등을 보면 가슴이 미어진다는 말은 덧붙이지 않았다.  리에프는 담당 의사에게 들었던 말들에 대해서도 입을 다물었다.  인큐베이터에 언제까지 있게 될 지는 두고 봐야 알 일이고, 그 안에 있는 동안은 언제든 응급 상황이 올 수 있다는 이야기를 그에게 늘어놓을 수 있을 리가 없다.  리에프가 휠체어의 손잡이를 끌었다.  부축을 받아 그에 앉은 야쿠는 영 어색한지 병실로 돌아가는 내내 휠체어가 싫다는 말을 반복했다.  우리는 나약하다.  그래서 마음껏 울지도 못 하고 서로에게 잘 견뎌내자는 말도 하지 않았다.
















똑똑.  문을 열고 들어가자 멍하니 창 밖을 보고 있는 등이 눈에 든다.  가운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그 곁으로 다가섰다.  야쿠, 하고 부르는데 돌아보지도 않고 석양에 살만 데우고 있다.  길어진 해가 보랏빛으로 부스러진다.




“몸은 좀 어때?”


“좋아요, 아픈 데도 없고.”


“오전에 진통제 놔달라고 했다며?”


“아, 비밀이라고 했는데…… 진통제 맞았더니 괜찮아졌어요.”


“얼굴 보여줘.”




천천히 뒤를 돌아보는 얼굴에 무심하리만치 표정이 없다.  울고 있을 줄 알았어.  뚝뚝하게 중얼거리자 야쿠는 살짝 웃었다.  간이침대에 놓여있는 정장 재킷과 가방은 리에프의 것이겠지.  진작부터 유명인사였던 이 반류 커플은 여전히 병원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있다.  오늘만 해도 중종이 지극정성으로 경종을 보살피더라, 아기는 아직 인큐베이터에서 못 나온다더라, 둘이 죽고 못 사나 보더라 하면서 속닥거리는 것을 목격했지만 틀린 말은 아니어서 못 들은 척 돌아섰다.  리에프는 퇴근하기가 무섭게 병원으로 와서 야쿠가 잠들고 나서야 돌아간다.  주말에는 집으로 돌아가지도 않는다.  다리가 뻗어 나오는 불편한 간이 침대에 웅크리고 자는 걸 몇 번이나 본 적이 있다.  원래 야쿠에게만은 한없이 다정한 사람이었지, 하지만, 어딘지 이질적이다.




“오늘도 밥을 거의 못 먹었네, 다시 죽으로 바꿔줘?”


“입맛이 없어요.”


“재미있네.”


“내가 입맛이 없다는 게 그렇게 웃을 일이에요?”


“누구라도 웃었을 거야.”


“리에프는 눈물을 글썽이던데요?”




요코는 무언가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마침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리에프다.  병실 문 높이가 아슬아슬하다고 고개를 꺾는 사람은 저이밖에 없을 거다.  그는 야쿠와 대화 중인 그녀에게 눈짓으로 인사를 건네고는 작은 냉장고에 물통과 음료 몇 개를 집어넣었다.  서랍에 차곡차곡 쌓여있는 간식들 중 몇 개를 꺼내서 둘 사이에 놓더니 자연스럽게 야쿠의 옆에 걸터앉는다.  바나나 맛이 나는 쇼트케이크의 포장을 뜯어 작은 손에 쥐어주는 걸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착각인가?




“다음주에는 퇴원해도 되겠다.”


“그냥 있으면 안 돼요? 레이랑 같이 나가고 싶은데……”


“입원해있든 집에서 오든 면회 시간이 30분인 건 바뀌지 않아.”


“그래도……”


“하이바 생각도 해줘, 매일 여기로 퇴근하고 있잖아.”


“아……”


“저, 전 괜찮아요.”




착각이 아니다.  리에프가 우물쭈물 고개를 숙이는 걸 본 요코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뱉었다.  야쿠는 어느새 벽을 보고 있다.  허구한 날 엉겨 붙어 있던 두 사람의 모습은 근래에 통 볼 수가 없었다.  유능한 의사여도 마음의 병을 고치는 데에는 답이 없다.  답답해진 공기를 참지 못 하고 병실을 나섰다.  그녀가 나가자 리에프는 급히 일어나서 침대를 정리하고 옷가지를 건다.  내쳐지지 않으려 안간힘인 걸 아는지 모르는지 고양이는 누워서 이불을 끌어당겼다.  지금 야쿠는 사자를 돌아볼 여력이 없다.  한계점에 서 레이만을 바라고 있는 것만으로 벅차다.  간이 침대의 삐걱거리는 바퀴 소리가 들린다.




“오늘은…… 무슨 일 없었어?”


“네, 야쿠상은요?”


“별로.”


“의사 선생님한테 들었어요, 아기 양말 가져갔었다고……”


“추워 보여서……”


“인큐베이터 안에 체온 유지 장치가 있어서 괜찮대요.”


“응.”




양말을 신겨주려다가 저지당했다.  아기는 여전히 작고 빨갛다.  리에프를 쏙 빼닮아서 머리카락이 반짝거리는 은빛이다.  어떤 날은 이상한 보호막을 머리에 쓰고 있고, 어떤 날은 눈 옆에 쭈글쭈글한 테이프를 붙이고 있다.  얼마나 착한지 우는 건 한번도 못 봤다.  눈동자도 사자를 닮아 녹색일까?  사실 아직 눈을 뜬 모습도 본 적이 없다.  의사 선생님이 병실에 있는 전화로 하품을 했다, 몸무게가 늘었다 전하는 소식은 늘어나는데 정작 저희가 만나러 가면 레이는 잠만 잔다.  조심스럽게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진다.  야쿠는 그냥 가만히 있었다.  그러고 보니 리에프가 저녁이나 챙겨 먹었는지 모르겠다.  어제는 병문안을 왔던 쿠로오가,




‘뭐야, 네가 환자냐? 사자가 아니라 말라비틀어진 생선 같네.’




야단하고는 데리고 나갔다 돌아왔는데 오늘은 그의 식사를 챙겨줄 사람이 없다.  리에프는 한참 동안 색이 바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이렇게 손이 닿을 거리에 있는데 가깝지가 않다.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해도 거리감이 적나라하다.  함께 있어도, 대화를 나누어도 속이 텅텅 비어있어서 도저히 따뜻해지질 않는다.  야쿠의 눈을 마지막으로 본 지가 언제였는지 기억이 안 난다.  안아주고 싶어도 그럴 자격을 잃어서 망설이다가 놓치게 된다.  저 무서워요.  나 좀 봐줘요.  침대에 얼굴을 묻은 리에프의 억눌린 울음 소리가 들리는데도 야쿠는 돌아보지 않는다.  우리는 아직도 악몽에서 깨어나지 못 했다.
















*****
















에어컨의 냉랭한 기운이 차 안을 맴돈다.  추워요? 묻는 리에프를 빤히 쳐다보던 야쿠가 픽 웃는다.  지금은 여름이라고 말하면서 그가 장난스럽게 팔뚝을 친다.  기분이 좋아 보인다.  다행이야.  운전대를 잡고 옆을 힐끔거리더니 안심한 듯 리에프의 어깨가 내려갔다.  어제 저녁에 레이가 무호흡 증세를 보였다는 연락을 받았다.  의사 선생님이 잠시였고, 지금은 잘 있다고 말씀하셨지만 부모 마음이 어디 그걸로 족하겠는가?  특히나, 아기에 관한 거라면 바짝 날이 서 있는 야쿠가 그 길로 병원에 가겠다고 나섰다.  당연히 저도 그를 따랐다.  하지만, 면회 시간이 아니라는 이유는 거부당했고 너무 늦은 시간이라 출입 자체에 제한을 받았다.  애걸복걸하는 우리가 불쌍했는지 간호사 한 분이 잠든 레이가 담긴 동영상을 찍어 보여주셔서 그걸로 위안하며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야쿠는 이후로 새벽까지 잠을 못 자고 한 시간에 한 번 꼴로 두통약을 먹어댔다.  벌써 몇 개째야?  텔레비전을 켜 놓고도 신경은 온통 그에게로 향해있다.  리에프는 초조하게 다리를 떤다.  저까지도 머리가 아픈 것 같았다.  침실에서 부엌을 오가는 이를 눈으로 쫓는다.  차라리 마음이 아픈 만큼 나를 때리거나 품에 안겨서 엉엉 울어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근래에 간절하게 바라는 소원 중 하나다.  안 되겠다!  결국 방으로 발을 들인 리에프가 침대에 웅크리고 누워있는 야쿠에게로 다가갔다.  손에는 악어 모양 젤리 한 봉지가 들려있었다.




‘약을 너무 많이 먹으면…… 안 되니까……’




베개 위에다가 살며시 젤리를 올려둔다.  벌 받는 아이처럼 뒷걸음질을 쳐서 다시 멀어졌다.  야쿠는 멀뚱멀뚱 리에프의 손이 눈 앞까지 왔다가 사라지는 걸 보고 있었다.  그의 눈은 바로 앞에 있는 리에프를 보고 있으면서도 실은 보고 있지 않다.  오로지 아기에 대한 염려로 어둠 속에 잠긴 채다.  갑자기 레이의 상태가 악화되면 어쩌나, 그러다 제 품에 안아보지도 못 하고 떠나버리면 어쩌나 하는 상상은 잔악한 벌레와도 같아서 그의 애정을 갉아먹고 끔찍하게 삶을 해친다.




‘야쿠상…… 우리 아침에 병원에 다시 가요, 일찍 일어날게요.’




애처로운 한숨이 나부낀다.  쉬어요.




‘리에프.’


‘…….’


‘레이가 잘못되면……’




힘 없는 목소리가 선명해지기 전에 리에프는 도망쳐 나왔다.  절대로 닫지 않던 문까지 쾅 닫아버렸다.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절대 알고 싶지 않다.  들어선 안 되는 말이었을 거라는 확신이 든다.  안간힘을 써서 모르는 척 해야 했다.  안 그러면 그의 세상이 처참하게 무너질 테니까.




“괜찮아 보여서 다행이에요.”


“응, 레이는 강해.”


“야쿠상을 닮았으니까요.”




생긴 건 너랑 똑같잖아.  야쿠가 오늘 찍은 사진을 보여주려 핸드폰을 내민다.  정면을 보고 있으면서 한 손으로 그걸 받으려다가 그의 손 끝을 붙잡았다.  저가 잡고도 놀랐는지 리에프는 흠칫 떨더니 얼른 손을 놓으려고 했다.  채 떨어지기 전에 야쿠가 아무렇지 않게 손을 뒤집어 큰 손을 맞잡는다.  낯설다.  리에프의 손이 따뜻하다 못해 뜨겁다.  얼마 만에 잡아보는 건지.  웃지도 못 하고 울지도 못 해서 얼굴이 일그러지는 게 느껴진다.  한 손에 폭 감기는 손을 세게 붙잡았다.



 

“좀 너무해.”




야쿠는 아기 사진을 콕콕 눌러보더니 대뜸 불만스럽게 투덜거린다.




“뭐가요?”


“눈동자까지 널 닮은 거 말이야.”


“음……”


“싫은 건 아니지만.”




레이는 오늘 아무것도 달고 있지 않아서 오랜만에 온전히 얼굴을 보여주었다.  밤새 하던 걱정도 팔다리를 뻗으며 하품을 하는 걸 보고 있으니 기억이 나지 않았다.




’우리 왔어, 레이.’


‘여기 좀 봐봐.’




리에프가 만들었던 애착 인형이 아기 옆에 고이 누워 있다.  아직은 애벌레 인형보다도 작다.  빨리 저 만큼 커야 안아줄 수 있을 텐데 애태우는 거에 비해 성장이 더디다.  부모의 목소리가 미숙아가 자라는 데 도움이 된다는 얘기를 들은 후로는 우리는 거의 만담을 하는 수준으로 30분을 내리 쉬지 않고 아무 말이나 지껄인다.  요즘엔 레이 방에 대한 이야기가 주된 내용이다.  이렇게 빨리 나올 줄 몰라서 비워놓았던 작은 방을 채우는 재미로 버티는 중이다.  얼마 전에는 분홍빛이 도는 벽지를 발랐고 이른둥이용 아기 용품들을 주문했다.  죄다 장난감처럼 조그맣다.




“저녁은 초밥 사올까요?”


“그래.”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아기 방으로 쌩 들어가버린다.  시야에서 놓쳐버린 야쿠가 사라진 곳을 응시하다가 리에프는 고개를 숙여 빈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방금 전까지 잘 붙잡고 있었는데.  두어 번 접었다 펴더니 입 꼬리에 힘을 주어 억지로 웃고는 신발을 벗었다.  예전에도 주말이 이랬었나?  할 게 없어서 청소를 한다.  껍데기만 야쿠인 것 같은 이를 오래도록 졸졸 따라다니다가 포기했다.  가끔 없는 사람 취급을 하면 타격이 크다.  청소기를 돌리고 있으니 어느새 빨래 바구니를 들고 옆을 지나간다.  우리의 집에서 우리는 따로 논다.  밤은 더 처절하다.  퇴원한 날 밤에 깨어나니 고양이가 없었다.  헐레벌떡 일어났다가 거실 러그 위에 몸을 말고 있는 잠들어 있는 걸 본 뒤로 먼저 거실에 이부자리를 깔기 시작했다.  아직 몸도 성치 않은데 딱딱한 바닥에서 재우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랬지만 막상 저가 없는 침실로 은근슬쩍 들어가는 등을 볼 때면 누군가 바늘로 심장을 콕콕콕 찌르는 것 같은 건 어쩔 수가 없다.  레이가 오면 당신도 돌아오는 걸까?











벌써 한 달 째다.  레이 공주가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제 방을 두고 딱딱한 기계 침대에 누워있은 지.  오늘은 리에프와 함께 오지 않았다.  일이 바빠서 저녁에 따로 들르겠다며 연신 미안하다고 하는 음성이 땅이라도 파고 들어갈 것처럼 낮았다.  전용 의복을 갖추고 소독까지 마친 후에 익숙하게 제 자리를 찾아간다.




“레이, 나 왔어.”




집게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앙증맞은 손가락을 툭 건드렸더니 꼬물꼬물 움직인다.  다시.  툭.




“그래, 나야.”




겨우 손가락 하나를 힘겹게 움켜쥐는 손.  어쩜 이렇게 예쁠까?  반드르르하게 젖어가는 눈동자가 아기를 애달프게 훑는다.  부쩍 자랐어도 이렇게나 작다.




“리에프 아빠는 저녁에 올 거래, 꼭 올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아, 참…… 오늘은 큰 주사를 맞아야 된대, 미안해…… 그래도 이것만 맞으면 집에 갈 수도 있다니까…… 리에프는 아마 네가 집에 온다면 엄청 호들갑을 떨 거야, 임신이란 걸 알았을 때도 세게 안으면 네가 납작해질 것 같다고 무서워했거든. 바보 같지?”




그래도,




“정말 좋은 아빠야, 너처럼 예쁘고……”




진짜 바보 같은 건 나야.



신생아 집중치료실에서 나오는 야쿠를 기다리고 있던 요코가 손을 흔든다.  마음껏 마시고 있냐며 달콤한 바닐라 라떼를 내밀자 그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산후 조리 잘못하면 고생한다, 잘 먹고 잘 자야 돼.”




그녀의 진료실에 누워서 천장을 보고 있으니 여기서 자주 혼났던 것이 떠오른다.  물론, 리에프 때문이었다.




‘오늘 아침엔 일어났을 때 현기증이 났대요!’


‘아아.’


‘그리고 요즘 자꾸 속이 답답하고, 체한 것처럼요!’


‘그건 태아가 커지면서 장기가 눌려서 그렇고.’


‘또, 또 배에 이렇게 선이……’


‘잠깐만, 모리스케, 너는 입이 없니? 왜 하이바가 설명하는 거야?’


‘응? 다 맞는데…… 리에프, 너 언제부터 이렇게 기억력이 좋았어? 짱이다!’


‘하하, 당연하죠!’


‘사랑의 힘인가?’


‘야쿠상도 참, 부끄럽게.’


‘둘 다 이제 그만 나가.’




바닐라 라떼처럼 달디단 기억이다.




“풉……”


“왜 웃어?”




아니, 하고 얼버무리는 야쿠를 넘겨보던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실없긴.  아물어가는 수술 부위를 소독하면서 요코가 인상을 찌푸렸다.  흉터가 크게 남을 것 같다.  붉은 선이 티끌 없는 매끄러운 피부 위에 선명하게도 새겨졌다.  쯧.  혀를 찬 그녀가 거즈를 덧대면서 물었다.




“하이바는 뭐래? 이거 보고 꽤 울었을 것 같은데?”


“음…… 그냥……”


“뭐야, 그 대답은?”


“아직 못 봐서……”




냉전 아닌 냉전.  설마 퇴원하고 나서도 그 모양이야? 하고 속마음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 했다.  요코는 그렇게 서로 죽고 못 살던 고양이와 사자가 이제 와 답답하게 구는 게 잘 이해가 되지 않아서 혹시 저가 독신주의자여서 그런 것인지 자문해본다.  아기도 잘 견뎌내고 있는데 왜 어른들이 문제인 거야?  테이프 끊어지는 소리가 건조하게 공간을 채운다.  편편한 배에 꾹 눌러 붙였다.  확실히 이상한 건 그녀가 아니라 야쿠였나 보다.  괜스레 옆에 있는 침대 모서리를 슥슥 문지르면서 저기, 하고 운을 뗀다.




“나도 걔한테 잘못이 없다는 거 알아요.”


“그런데?”


“얼굴만 보면 그 날이 떠올라서……”




눈을 질끈 감는다.  다시 생각해도 아찔한 기억이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부터 배가 아팠다 안 아팠다 하긴 했는데 극악한 고통은 아니어서 무시했다.  밥도 잘 먹었고 프로그램을 틀어놓고 짐볼 운동도 하고 낮잠을 자다가 번쩍 눈을 뜨니 잠옷이 온통 피투성이였다.  몸이 반으로 갈라지는 것 같은 통증 속에서 핸드폰을 찾으려 했는데 어디에 뒀는지 기억나지도 않고 억지로 바닥을 기다가 쇼크로 쓰러지고 깨어났다가도 다시 정신을 잃었다.  의식이 흐려지는데도 오한이 덮친 손발이 얼음에 박힌 양 차가운 것만은 뚜렷했다.  서슴없이 다가오는 죽음이 무서워서 몇 번이나 리에프를 불렀는데 그 애는 오지 않았다.  지켜준다고 했으면서.




“죽다 살아난 너한테 이런 말하긴 뭐하지만…… 하이바도 마찬가지일 거야. 내가 울었던 거 기억나지?”


“네? 요코상이요?”




진짜?  벌떡 몸을 일으킨 야쿠의 이마를 꾹 눌러버렸다.  기억 못하고 있을 줄 모르고 덧붙인 말이다.  드물게 얼굴을 붉힌 그녀가 헛기침을 하며 도구를 정리한다.  어렸을 때부터 봐온 요코이지만 눈물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울었다는 얘기도 들어본 적이 없고.




“아무튼…… 처치도 못 하겠더라, 숨이 넘어갈 것처럼 네 팔다리가 꺾이는데 너무 무섭고 눈물만 나는 거야. 나도 그런 적은 처음이야, 결국 손 떼고 다른 사람한테 맡겼지.”


“몰랐어요.”


“내가 이 정도였는데, 하이바는 어땠겠어? 나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을 텐데.”


“그래서 손만 닿아도 벌벌 떠나?”




우스갯소리를 해보지만 가슴 한 켠이 시큰거려서 눈은 웃어지지 않는다.  오늘 아침에 리에프한테 잘 다녀오라는 인사를 했었나?  잠결에 다녀오겠다는 목소리는 들은 것 같은데, 대답을 해주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제도, 모레도.




“레이는 내일부터 집중 검사에 들어갈 거야, 무사히 마치면 퇴원할 수 있어.”


“아픈 거에요?”


“아니, 검사라고 부르지만 그냥 담당들의 판단 같은 거야.”


“판단……”


“인큐베이터 밖에서도 체온 유지가 되는지, 호흡 곤란은 없는지 보는 거지.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게 있는데…… 이대로라면 통과하기 어려울 것 같네.”


“그게 뭔데요?”


“가정에서 준비가 되었는지.”


“내가 뭐 안 한 게 있나? 뭐요? 뭐지? 체크리스트에 있는 건 다 준비했는데……”


“모리스케, 레이는 고비도 잘 넘겼고 잘 자라고 있어. 이제 하이바를 좀 봐 줘.”


“…….”


“다음엔 예전처럼 안겨 들어와.”


“칫…… 우리가 언제 또 그랬다고…… 그것보다, 언제부터 걔 편이었어요?”


“지금 그 애만 혼자거든.”














병원에 들렀다 오느라 귀가가 늦은 리에프는 뻐근한 뒷목을 문지르며 욕실을 나왔다.  씻으러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거실에 있던 야쿠가 보이지 않는다.  레이 방에 있나?  슬쩍 문을 열어봤지만, 없다.  뭐해?




“으악!”




뒤에서 들려온 예상치 못한 목소리에 펄쩍 뛰어오른다.  이 방에 있는 줄 알았다는 둥 그냥 열어본 거라는 둥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에 야쿠는 어깨를 들먹일 뿐이다.  유부초밥 먹을래?  방문을 열어본 게 큰 죄라도 되는 것처럼 늘어놓는 횡설수설을 막았다.




“네?”


“유부초밥 해놨어, 좋아하잖아.”


“아……”


“먹기 싫어?”


“아, 아니요! 진짜 좋아요!”




턱을 괴고 앉아서 맥주를 들이켰다.  이런 기분은 퍽 오랜만이다.  맞은편에서 싱글벙글 유부초밥을 입 안으로 우겨 넣고 있는 리에프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 배가 부른 것 같다.  괜스레 손가락을 엮으면서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렇게 맛있어? 체하겠다.”




볼이 불룩해서 대답도 못 하고 고개만 끄덕거린다.  머리카락 많이 자랐네.  저 상처는 언제 난 거래?  면도하다 긁혔나?  매일 같이 있었는데 안 보이던 것들이 눈에 찬다.  리에프만 혼자야.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요코의 말을 곱씹었다.  ‘혼자’는 너무 쓸쓸하고 아프고, 무섭다.  야쿠는 다시금 새롭게 피어나는 감정들이 혼란스러워서 제 손톱을 꾹 눌렀다.




“어디 아파요?”


“어?”


“인상 쓰길래……”


“아냐, 마저 먹어. 넌 나만 보고 있냐?”




그가 씁쓸하게 고개를 숙인다.  문득 궁금해졌다.  리에프가 어떻게 웃었더라?  요코의 말대로다.  그도 분명 혼자 남겨질까 봐 무서웠을 거다.  저와 레이가 무사하길 누구보다 간절히 바랬을 거고 지금은 두 사람 몫의 걱정을 떠안은 채 견뎌내고 있다.  가엾은 리에프, 정말 혼자였구나.  내버려두기엔 너무 소중한 이다.




캄캄하다.  불 꺼진 집.  텔레비전마저 껐는지 갑자기 온 공간이 고요해졌다.  일찌감치 침대에 누워있던 야쿠가 살며시 눈을 떴다.  리에프는 오늘도 거실에 이불을 깔았다.  누군가와 통화를 하면서 오늘 레이가 손을 흔들어줬다면서 흥얼거리는 게 들린다.  아마 부모님일 거다.  아기의 부모만 면회가 가능해서 거의 매일 부모님께 전화를 드린다.  이건 야쿠도 마찬가지다.  레이는 벌써부터 사랑 받는 데가 많기도 하다.  곧 그의 목소리가 지워졌다.  조금 망설이다가 이불을 걷어냈다.  살금살금.  빼꼼 목을 빼고 거실을 살핀 야쿠는 그가 잠들지 않았다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사자의 혼현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리에프는 자는 척을 한다.  조금 놀랐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분명히 그랬다.  그는 다가오는 발소리에 이불 속에서 쿵쾅거리는 심장 대신 티셔츠의 끝을 부여잡고 있다.  떠난다고 할까 봐 무서워서, 다시는 못 보게 될까 봐 그게 두려웠다.  발 끝을 세우고 천천히 그에게로 다가간 야쿠는 오도카니 서서 누워있는 그를 내려다보았다.  주저하듯이 발가락이 꼼질거린다.  하지만 곧, 나릿나릿 이불을 들추고 무르지 않은 등에 이마를 기댔다.  팔로는 두꺼운 허리를 감고.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상상이 안 된다.  당장 잠들 수 있을 만큼 마음이 편안해졌다는 것 말고는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다.  비로소, 제 자리로 돌아온 기분이다.  기다려줘서 고마워.




“미안해……”


“…….”


“사랑해.”


“흐……”




떨리는 몸을 쓸어 내렸다.  리에프가 운다.  이를 악물고 흐느끼다가 참지 못하고 어린 애처럼 엉엉 운다.  그 동안의 슬픔이 한꺼번에 몰아쳐 서글프고 더 서글픈 울음이다.  야쿠가 봐주지 않는 것도 괜찮고 보듬어주지 않아도 괜찮았다.  기다리지 말라는 말만 하지 않길 바랬다.  야쿠는 눈물을 그의 티셔츠에 벅벅 문질렀다.  울지 말라고 웅얼거리면서 제 얼굴도 이미 눈물 범벅이다.  리에프는 한참을 서럽게 울었다.  끅끅거리는 게 안쓰러워서 어깻죽지를 잡아당기니까 순순히 몸을 돌린다.  손등으로 꾹꾹 눈물을 닦아주었다.  마구잡이로 팔에 매달리는 손에 안심하라고 깍지를 껴주고 꼬옥 안았다.  다 큰 어른 둘이 눈물에 젖은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는 꼴이 가관이다.  그래도, 좋기만 했다.  사자는 눈물로 흐려진 인영에 아무렇게나 입술을 내렸다.  줄곧 기다리던 사람이다.  손대면 깨질까, 보면 닳을까 귀해서 더 어려운 나의 연인.




“킁…… 다 울어쩌?”




여전히 훌쩍거리면서 리에프가 고개를 젓는다.  고개를 젖혀 턱 끝에 입을 맞췄다.  사랑한다는 말 말고 우리 사이에 어떤 게 더 필요할까?  상처조차 지우는 너의 말인 걸.  새벽 내내 두 사람은 고백했다.  서로의 입술을 탐하고 땀이 베인 몸을 끌어안으면서 눈물을 흘렸다.  사랑해, 리에프.
















*****
















비가 온 뒤에 땅이 굳는다.  우리의 자리도 단단하게 굳어진다.  한적한 도로를 서행하는 검은 중형차, 그 뒷좌석에 사자와 고양이는 나란히 앉아있다.  그들은 어느 하나에서 한 시도 눈을 떼지 못 한다.  저희를 닮은 불그스름한 얼굴이다.  코가 둥글다.  속눈썹이 촘촘하다.  야쿠가 잠들어있는 아기의 가슴께를 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  리에프의 팔에 안긴 채 새근새근 잘도 잔다.  우리 아가.  잠결에 코를 찡그리는 것에도 리에프는 어깨를 움칠 떤다.  아까부터 움직이지도 못하고 손가락 끝까지 굳어있는 그의 얼굴도 붉다.  편하게 앉으라고 해도 도저히 안 된단다.  깨서 울면 어떡하냐고 성화를 하더니 차에 올랐을 때부터 지금까지 꼿꼿하게 허리를 세우고 앉아서는 목은 반쯤 아래로 꺾인 채다.  그에게로 잠시 시선을 옮겼다가 야쿠는 웃어버리고 만다.  아마 누가 보더라도 웃었을 것이다.  로봇 같아.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아주었다.  그리고 어깨에 손을 척 얹었다.  꾹 밀었더니 차마 크게 외치진 못 하고 입 모양으로 안 돼요! 안 돼! 하지만 순순히 놓아줄 고양이가 아니다.  그의 몸이 기우뚱 등받이에 닿을 때까지 힘을 풀지 않았다.  키들키들거리는 야쿠를 흘겨보다가 금세 빙긋이 웃고 만다.  훨씬 편해졌다.




“너 아까 왜 울었어?”


“음……”


“예상은 했지만.”


“그게요……”




그의 팔을 편안하게 고쳐주며 야쿠가 물었다.  리에프는 입술을 옴짝달싹한다.  동물이 새겨진 손수건으로 침이 흐르는 아기의 입가를 닦는 고양이를 따라 움직이는 눈동자가 선연하다.  제 입으로 말하기 쑥스러운 대답이라 말 꼬리가 흐려졌다.




“둘이 문을 열고 나왔는데, 갑자기…… 다 깜깜해지고 진짜 야쿠상이랑 레이한테만 빛이 났어요…… 다른 건 하나도 안 보이고, 둘 다 작고, 예쁘고…… 뭐, 뭔가 내가 아빠라는 게 믿겨지지 않았다고 해야 되나?”




원래 부모는 아기가 태어나거나 처음 안아볼 때 경이로움에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더니 아니나 다를까?  야쿠가 레이를 안고 신생아실을 나오자마자 그는 울음이 터져서는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했다.  그 탓에 주변이 어수선해진 건 두말하면 잔소리.  병원의 유명인사들은 마지막까지 참 요란하다.  이미 두 팔에는 레이가 안겨 있어 두 팔을 펼치고 다가오는 리에프를 맞아주지 못 했다.  대신 야쿠는 그 새로 들어가 폭 안겼다.




‘내가 너 이럴 줄 알았다, 뚝!’




핀잔하면서도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얼굴이다.  야쿠는 두 팔로 눈물을 훔치는 그를 달보드레한 눈빛으로 올려보았다.  누가 보든 말든 리에프의 가슴팍에 머리를 기댔다.  비로소 셋이 함께다.  조심스럽게 저희를 감싸 안는 팔은 어느 때보다 단단하다.  소음은 음악소리처럼 감미롭고 품에 안겨있는 아이는 따뜻하다.  마치 소설 속 주인공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현실이라고 여겨지지 않으리만치 행복한 책 말이다.  물기 어린 사자의 숨을 느끼며 그는 확신했다.  수많은 과거의 나날 중에 지금이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고.




“쿠로는 왜 울었어?”




감성에 휩쓸린 건 비단 리에프뿐만이 아니었나 보다.  운전대를 잡고 있던 켄마가 아직도 눈가가 벌건 그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얇은 입술에 걸린 미소.




“으…… 켄마, 너.”


“쿠로오상, 울었어요?”


“리에프야 아빠라서 그렇다 치고 넌 뭐냐?”


“몰라! 그냥 눈물이 났어!”




조수석에 앉은 쿠로오의 얼굴이 새빨갛다.  괜히 따라 왔다가 창피한 꼴만 보이고 놀림만 받는 처지다.  ‘행복’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밝혀주러 온 사람치고는 푸대접을 받고 있다.  전날 그와 함께 한가한 저녁 시간을 만끽하고 있던 켄마가 리에프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타이밍이 나쁘게도, 새로 나온 게임을 막 시작했을 때였다.  무시하려다가 야쿠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하고 서둘러 받았더니,




‘켄마 선배, 도와주세요! 운전을 못하겠어요!’




아기를 데려와야 하는데 떨려서 운전을 못하겠다며 울고불고 하는 거다.  목소리는 얼마나 큰지 옆에서 듣고 있던 쿠로오가 도와줘야겠다고 읊조렸고 싫다고 하기도 뭐한 일이어서 알았다고 했다.  울며 겨자 먹기로 승낙한 것 같아도 사진으로만 봤던 그들의 아기를 만날 생각에 기꺼이 허한 것이다.  귀찮게 달고 온 소꿉 친구가 눈물을 흘릴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작은 아기 보따리를 안은 야쿠가 앞에 섰을 때에만 하더라도 그는 한껏 느물거리면서 혀 짧은 소리를 내고 있었다.  오야오야.  아무렇지도 않게 ‘아기 공주’라는 호칭을 하는 걸 보고 켄마는 조금 질색했다.  둘은 통통한 입술을 오물거리는 아기를 보고 있다가 무언가 허전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부재.  진작 야단법석을 떨면서 야쿠와 아기의 정신을 쏙 빼놓아야 할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채고 둘은 주위를 돌아보았다.




‘으흐흑…… 어흑……’




켄마는 본능적으로 그들에게서 물러났다.  주변에 있는 모두를 통틀어서, 아니 병원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 제일 커다란 남자가 어깨를 들썩이면서 울고 있다.  절대 그의 일행으로 보이고 싶지 않다.  곧 리에프가 그에 비해 한없이 작은 이들을 품에 쏙 감추는 게 보였다.  창피하지만 행복해 보이네.  살짝 미소를 띤 켄마는 무의식적으로 동의를 구하려고 쿠로오를 찾았다.  옆에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다.  두리번거리다가 쉽게 뻗친 머리를 찾아냈다.  단란한 세 가족의 뒤로 몰래 눈물을 훔치고 있는 이가 보인다.  얼른 그 곁으로 다가갔다.  쿠로오.  무심한 눈동자가 쳐다보자 손을 산만하게 움직인다.  당황스러워 보인다.  말없이 그저 보고만 있는데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그는 끝내 입술을 삐죽거렸다.  켄마, 놀리지마.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아직이라면 하긴 할 건가 보네?’


‘응, 웃기잖아.’




못 됐어.  감흥 없는 말투로 이죽거리는 켄마의 볼을 아프지 않게 꼬집은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들만의 세상에 빠진 반류 친구들은 웅성거리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지 꿋꿋하게 사랑을 속삭인다.  바로 옆에서 지금까지의 시련을 지켜봤기 때문일까?  리에프가 눈물을 떨구는 걸 보는데 괜히 눈시울이 시큰해졌다.  팔에 쏙 들어오는 아기를 내려다보는 눈이 얼마나 진득한지 보고 있는 제 머리가 멍해질 정도였다.  그래서, 이렇게 된 거다.




“쿠로오상 의외로 마음이 여리네요!”


“어우, 징그럽다.”




얄미운 한 쌍이 마음껏 그를 놀렸다.




“왜 나한테 난리야, 난 누구처럼 대성통곡하진 않았다고.”


“누가 또 대성통곡했는데요?”


“인간아, 너, 너!”


“모리스케, 쿠로오상 좀 혼내줘요, 자꾸 저한테 뭐라고 해요─”


“야, 야쿠가 그런……”


“리에프한테 그러지마.”


“뭐? 미쳤냐?”




온 낯이 경악으로 물든 쿠로오야 그러든 말든 리에프는 헤벌쭉하게 웃는다.  여전히 아기에게 달라붙어있는 야쿠의 머리카락에 입술을 비비면서 좋아하는 꼴을 보고 있다가는 제 명에 못 살 것 같다.  쿠로오는 그들을 외면하고 등받이에 깊숙이 기대앉았다.  불만스러운 면면이다.  뒤에서 야쿠상 멋있다느니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알다가도 모르겠다.  얼마 전까진 답지 않게 서먹서먹하게 굴어서 보는 저희까지 불편하게 만들더니 지금은 사이가 너무 좋아서 탈이다.




“힘들지? 내가 안을까?”


“가벼워서 괜찮아요, 그것보다 배고파 죽겠어요.”


“가자마자 밥부터 먹어야지.”


“시켜먹을까요?”


“그러자, 귀찮으니까. 레이도 맘마 먹여야지.”


“아, 귀여워!”


“뭐래?”


“맘마 할 때마다 뽀뽀하고 싶으면 어떡해?”


“안 돼.”




쿠로오는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몸서리를 쳤다.  정말 미쳤다고 중얼거린 쿠로오가 켄마의 옷자락을 붙잡는다.  리에프가 야쿠에게 그랬듯이 쟤네 좀 혼내달라고 말했지만,




“운전할 때 건드리지 마.’




타박만 받고 나가 떨어졌다.  바로 위에서 저렇게 닭살을 떨어대는데 레이가 깨지 않는 게 신기하다.  순해도 저렇게 순하고 착한 아기가 없다.  볕이 좋은 날이다.  따스하게 데워졌을 보금자리가 안락하겠지.  그 안에서 그들이 언제나 행복과 함께하길 바란다.









“불 끌까요?”


“응, 수유등은 켜야 돼.”




어둠이 내려앉자 침대 주위로 은은한 빛이 떠오른다.  리에프는 옆으로 누워서 살살 아기의 가슴을 두드리고 있는 야쿠의 등을 끌어안았다.  침대에 붙인 상아색 아기 침대 위, 속싸개에 고이 쌓여 얼굴만 빼꼼 나온 아기는 주변 공기마저 가라앉힐 것처럼 평온한 표정이다.  천사가 따로 없네.  집이 떠나가라 응애응애 울던 게 언제였나 싶다.




“알람 맞춰놨어?”


“네.”




뒤로 손을 뻗었다.  물기 어린 리에프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다가 귓바퀴를 만지작거린다.  잘 했어.  금방이라도 잠들 수 있을 것 같은데 불안한 마음에 눈이 감아지지 않는다.  둘 다 눈꺼풀이 한 짐이다.  초보 아빠들은 지쳤다.  육아란 게 쉬운 게 아니다.  아기를 품고 있던 8개월보다야 나을 거라 여긴 건 정말 뭘 몰라서 그랬던 거다.  출산 전 깨치다시피 한 육아서는 우렁찬 아기 울음 소리 앞에선 무용지물이었다.  자다 깨서 울고 먹고 다시 자다 깨서 울고.  두세 시간에 한번씩 분유를 타는 것조차 전쟁 같았다.  온 몸에 힘을 주고 우는 레이를 안은 야쿠는 다급하게 빨리 하라고 성화인데 젖병을 집어 든 리에프의 머리는 백지장이었다.  미리 소독해서 건조시킨 젖병을 꺼냈는데 조립 순서가 떠오르지 않는다.  분명 해본 적이 있는데 이렇게 맞춰도 안 되고 저렇게 해봐도 안 되니 손은 헛돌고 울음 소리는 더 커지고.  어느새 옆으로 온 야쿠도 혼란스럽긴 마찬가지라서 두 사람은 딱 죽을 맛이었다.  겨우 젖병을 조립하면 무얼 하나?  펄펄 끓는 물에 분유를 타다가 반은 식탁에 쏟아버리고 이걸 또 찬물에 식히려면 한 세월이 걸리는 것을.  그 뒤로는 바로 다음 것을 타놓고 분유포트에 넣어놓았다.  배가 고팠나 보다.  다행이 우유를 잘 먹었지만 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배운 대로 아이를 모로 안아 트림을 할 때까지 소화를 도왔다.  처음에는 그럭저럭 잘 넘어갔는데 두 번째에 먹은 것을 죄다 토하는 것이 아닌가?




‘어, 어떡해……’


‘괜찮아요, 원래 그런다고 했잖아요.’




저를 안심시키면서도 리에프의 얼굴은 사색이어서 전혀 믿음직스럽지 못 했다.  목욕을 시키는 건 왜 그리 무섭던지 다 큰 성인 남성 둘이서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너무 작아 안는 것도 겁이 나는데 목욕은 오죽할까?  신생아 때는 자주 씻겨야 하는데 매일 이렇게 지옥과 천국을 오갈 걸 생각하니 막막하다.  그래도, 서로가 옆에 있어 다행이다.  종일 그들을 거쳐간 크고 작은 소동을 떠올린 야쿠가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웃으니 가만히 그의 허리를 어루만지던 리에프가 왜 웃냐고 물었다.  귓가에 닿은 숨이 간지럽다.




“피곤해 죽겠어.”




진짜 죽을 것 같아.  야쿠가 하품을 하며 소곤거렸다.  덩달아 하품을 한 리에프는 그의 뺨에 코를 묻었다.  이대로 잠들면 좋겠다.




“잠깐이라도 자요.”


“응……”




대답을 하는 목소리가 졸음을 쫓으려 안간힘을 쓰는 듯하다.  사자의 귀를 매만지고 있던 그의 손에 힘이 빠진 지 오래다.  몽롱해진 건 저도 마찬가지다.  살며시 눈을 감았다.




“으앙!”




눈을 번쩍 뜨는 것과 동시에 야쿠는 몸을 일으켰다.  리에프도 마찬가지다.  번개라도 맞은 것 같았다.  서둘러 아기를 품에 안아 누르는 게 보인다.  난색을 한 야쿠가 입 모양으로 더 자라고 말하는 것 같지만 그럴 수 있을 리가.  잠이 확 달아났다.  목덜미를 긁적거리며 일어난 그는 무릎을 꿇어 앉은 야쿠의 허리를 천천히 끌어당겼다.




“왜?”


“기대요, 레이를 안고 있잖아요. 그럼 야쿠상은 제가 안아줘야죠.”


“말은.”




리에프는 가슴을 누르는 무게를 가뿐하게 받쳐 안는다.  고개를 숙여 미소를 띤 한 쪽 입 꼬리에 쪽쪽거리면서 아래로 칭얼칭얼 잠투정 하는 아기의 통통한 뺨을 손가락 끝으로 쓸었다.  짧고 가는 머리카락 끝이 점점 진한 색을 띠는 것이 야쿠를 닮을 모양이다.  쇄골을 간질이는 머리카락과 같은 색깔이다.  하루 종일 아기를 안고 있었더니 고양이의 몸에서도 포근한 냄새가 난다.  아기 냄새가 난다고 중얼거리면서 목을 킁킁거렸더니 어깨를 움츠리면서 키득거린다.  야쿠는 금방 다시 잠든 레이의 위로 안도의 한숨을 뱉는다.  그 옆에 있는 리에프의 손은 거인의 것 마냥 크다.




“우리 행복하게 살자.”




여전히 아기를 바라보면서 야쿠가 소곤거렸다.




“되게 설레는 거 알아요?”


“뭐가?”


“야쿠상이 그렇게 말하니까 너무 기대돼요, 앞으로가. 내일은 어떨지, 또 얼마나 좋을지……”




밭은 웃음이 들리더니 살짝 고개를 끄덕거린다.  한 손으로 야쿠의 턱을 부드러이 잡아 고개를 돌리게 만들었다.




“사랑한다고 말해주세요.”


“질리지도 않아?”


“질릴 만큼 자주 해준 사람처럼 말하시네.”


“까불어.”


“빨리 해줘요─”


“네가 애냐?”




사랑을 말하지 않는 입술을 벌하려 한다.  리에프가 급하게 입을 맞춰오는 게 귀여워서 응해주기로 한 야쿠는 살포시 눈을 감았다.  짧게 혀를 섞은 뒤 아쉽게 떨어졌다.  아무래도 지금은 레이가 방해꾼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반드르르하게 젖은 입술을 손가락으로 닦아주면서 리에프는 어쩐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애가 이렇게 키스를 잘하겠어요?




“누가 잘한대?”


“못하진 않잖아요!”




픽 웃은 야쿠는 엉거주춤 그에게서 떨어진다.  천천히 몸을 숙여 온 몸으로 아기를 누이고 싸개를 다시 침대에 묶었다.  손은 여전히 아기에게서 떼지 못한 채다.  은근하게 두드리던 것마저 바로 그만 두지 않고 서서히 거리를 뒀다.  깨울까 봐 망설이다가 발그레한 뺨 근처 허공에 입을 맞춘다.  벽에 기대 그대로 앉아있던 리에프가 손을 뻗어 그의 발목을 잡아 끌지 않았다면 계속 아기를 떠나지 못 했을 거다.  쉬이 침대 가운데로 끌려온 고양이가 몸을 뒤집기 무섭게 그 위로 올랐다.  얄망궂게 눈웃음을 한 그가 리에프의 목을 끌어안는다.




“아무래도 자긴 그른 것 같은데…… 한 번 더 할까?”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저돌적인지 모른다.  어쩌면 의식은 이미 잠들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단숨에 사랑의 포로가 된 리에프가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침실에서 이따금 숨죽인 속삭임이 들려왔다.  웃음소리도 들렸다.  그들은 서로의 품에서 몽롱한 새벽을 지새다가 잠들고 깨기를 반복했다.  해가 뜨고 지고 달이 뜨고 지고.  늘 같은 자리에서 그들만의 나날을 맞이할 것이다.  아쉬운 하루를 떠나 보낼 때도 있을 거고 새로운 하루를 기다릴 때도 있겠지.  냉장고에 붙어있던 「사랑해」, 「일어나면 연락줘요♥」 따위의 쪽지와 우스꽝스러운 두 사람의 사진 위로 「분유 사다 줘」, 「야쿠 여보, 설거지 내가 할 테니까 하지 마요!」, 「소고기, 양파, 당근」, 「분유 비율 7:3」 등의 메모와 아기 사진이 쌓인다.




“어때? 향기로워?”




퇴근한 리에프를 붙잡고 기저귀를 들이민 야쿠가 물었다.  사랑하면 아기 똥 냄새가 향기롭게 느껴진다고 덧붙인다.  당연하죠!  자신만만하게 킁킁거리더니,




“어쩜 똥도 이렇게…… 우욱!”


“푸하하, 미치겠다!”




헛구역질을 하면서 달음질 치는 리에프를 보고 웃겨 죽겠단다.  기저귀를 들이대면서 한참을 쫓아다니며 놀려주다가 아기 우는 소리에 후다닥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레이를 안고 나오니 쪼그려 앉아서 눈 딱 감고 기저귀에 코를 대고 있는 그가 눈에 든다.  잔뜩 찡그린 얼굴이 가관이다.  엉뚱한 건 변함이 없다.  쓸데없는 짓 하지마!  엉덩이를 발로 밀었더니 뒤를 돌아보며 정말 사랑한다고 변명을 늘어놓는데 왠지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던 것 같다.




“빨리 씻고 나올게요.”


“응, 옷 이리 줘.”


“고마워요, 뭐 잊은 거 없어요?”


“잊은 거?”




찌개라도 데우고 있었던가?  무의식적으로 부엌으로 시선을 옮기는 걸 막아 선다.  아기의 완두콩 같은 눈망울 속에 겹쳐지는 인영이 그려졌다.  이렇게 평화로운 하루하루에 감사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때로는 시련이 찾아오기도 한다.  육아는 매일 하는 일임에도 처음인 것처럼 어렵다.  이제 곧 리에프의 퇴근 시간이라 마중을 나가려던 차였다.  예뻐 죽겠다!  켄마가 선물한 멜빵 원피스를 입힐 생각에 들뜬 야쿠가 푹신한 매트 위에서 발을 구르는 레이와 눈을 맞추었다.




“이거 입고 아빠 마중 가자, 망고 주스도 사고─”




하지만, 어쩐 일인지 현관문은 열린 적이 없다.  리에프가 돌아오기 전까지.  집으로 발을 들이자마자 다녀왔습니다! 하는 느긋한 인사가 끊어졌다.  찢어질듯한 울음소리에 사랑하는 이름을 부르던 목소리가 묻힌다.  서둘러 거실로 향했다가 그는 잠시 멈칫했다.  눈 앞에 펼쳐진 의외로운 광경에 놀란 것이다.  얼굴이 새빨개진 채 악을 쓰는 아기의 손만 붙잡고 있는 야쿠의 등이 보였다.




“모리스케?”




얼른 옆으로 다가 앉아 레이부터 안아 들었다.




“으어엉…… 리에…… 흑, 이거…… 미안……”


“왜 울어요! 무슨 일 있었어요?”




눈물 범벅이 된 얼굴이 레이와 다름이 없다.  별안간 재킷에 얼굴을 묻더니 더 크게 울기 시작했다.  엉엉 우는 야쿠에 당황한 그는 입만 뻐끔거린다.  등 뒤로 식은땀이 솟아나는 게 느껴졌다.  이게 무슨 일이지?  산후우울증인가?  두 명의 눈물 바람에 휩쓸려 머릿속이 복잡하다.  한 손으로 갈색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면서 울지 말라고 해도 소용이 없었다.  저마저 울고 싶어졌다.  그나마 착한 레이가 리에프 아빠의 마음을 헤아렸는지 곧 울음을 그쳤다.  조그만 불가사리 인형이 달린 흔들 침대에 눕혀도 가만히인 것을 보고야 안심이다.  이제 남은 문제는 그의 재킷에서 떨어지지 않는 얼굴뿐이다.




“왜 그러는데, 응? 얼굴 좀 봐요.”




뭐라고 말을 하긴 하는데 알아들을 수가 없다.  재킷을 벗었더니 그대로 거기에 엎어져서 우는 걸 보고 리에프는 입가로 손을 가져간다.  심각한 상황인데도 두 손으로 재킷 자락을 꼭 쥐고 엎드린 엉덩이가 사랑옵다.  이 정도면 병이지 싶지만,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  옷의 한 쪽을 잡아당겨서 뺏으려니까 같이 딸려오다가 몸을 일으킨다.  두 팔로 얼굴을 가리고 몸을 들썩거리는 이를 껴안은 그는 여전히 웃음을 참고 있다.




“크…… 왜 우는 건데요? 애기에요?”


“주거……”




이번엔 똑똑히 들었다.  심각한 일은 아닌 것 같다.  리에프는 혼자 노는 아기를 넘겨보며 야쿠의 울음이 사그라질 때까지 안고 있었다.  더 이상 떨림이 전해지지 않을 때 슬며시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면서 왜 그러는지 되물었다.




“…… 단 말이야…… 어떡해……”


“네?”


“상처 났다고…… 레이, 얼굴.”




상처?  급히 옷을 갈아 입히다가 헛손질을 해서 레이의 귓가를 할퀸 모양이었다.  자세히 보니 발간 선 하나가 그어지긴 했지만 이렇게 울고불고 할 정도는 전혀 아니다.  하지만, 평소에도 아이를 더 귀히 여기지 못해 안달인 사람인데 얼마나 놀랐을지 뻔할 뻔 자.  괜찮다고 해도 흉터 남으면 어떡하냐고 하면서 다시 눈물을 뚝뚝 떨군다.  한참 동안 어르고 달래도 안 돼서 결국 리에프가 아기에게 연고를 발라주고 약국에 가서 전용 밴드까지 사오고 나서야 눈물을 멈췄다.  그래도 시무룩하게 입 꼬리를 내리고 자꾸 미안하단 말밖에 안 하더라.




“괜찮다니까요.”


“얼마나 아팠겠어?”


“내 등 할퀼 때도 그런 생각 해요?”


“이 짐승, 너랑 레이랑 같아?”


“와, 너무해. 내가 좋아요, 레이가 좋아요?”


“레이.”


“비켜요.”




그제야 웃는다.  야쿠를 무릎 사이에 앉히고 손톱을 깎아주던 리에프가 장난스레 그의 귀를 깨물었다.  눈에 담아도 아프지 않을 이들이 덧나지 않도록 어루만지면 상처는 금세 아문다.  우리는 지금까지 몇 번이나 그렇게 서로를 구해왔다.  이 기억이 하나로 얽혀 그는 또 다른 내가 되고 나는 그가 된다.  우리의 애정이 변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굳어진다.  그래서, 간혹 거세게 부딪힐 때도 있다.  당신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시험하고 싶기 때문이다.




‘죄송합니다, 최대한 빨리 새로운 시안 보내드릴게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 리에프의 눈이 깊게 감긴다.  야근은 꿈과 희망을 짓밟는 사회 악이다.  얕게 고개를 저었다.  지금이 퇴근 시간에서 두 시간이나 지난 여덟 시라는 사실 말고도 더 끔찍한 게 있다.  그에게는 퇴근이 퇴근이 아니라는 거다.  집에 가면 하루 종일 레이와 씨름했을 야쿠 여보를 위해 해야 할 일이 산더미다.  젖병 소독도 해야 하고 음식물 쓰레기도 갖다 버려야 하고 아기에게 자장가도 불러줘야 하고.  좋아서 하는 일이지만 힘에 부친 게 사실이다.  첫 사회 생활과 동시에 첫 육아까지, 벌써 몇 달째 제대로 잠을 잔 적이 없다.  퀭한 눈가가 흰 피부에 두드러져서 안색이 나쁘다는 얘기를 듣는 건 이제 예삿일이다.  오늘은 졸다가 업무가 지연되고, 실수까지 해서 다른 사람을 탓할 수도 없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오랜만에 차를 끌고 나왔더니 평소엔 한적한 길이 오늘따라 꽉 막혀있다.  앞 쪽에 사고가 났나 보다.




[차 밀린다ㅠㅠ]




답장은 안 올지도 모르겠다.  아기를 돌보느라 바쁜 야쿠는 요새 전화도 잘 받지 못 한다.  레이가 크면서 깨어있는 시간이 늘었고 아무거나 입으로 집어넣는 통에 전처럼 메시지를 주고 받거나 짧은 통화조차 할 수가 없다.  제대로 앉아서 식사를 할 수도 없어서 간단한 요기거리로 허기를 채우고 저가 퇴근하면 휘몰아치듯 밥을 퍼먹는 걸 보면 안쓰러워 죽겠다.  하지만 밥을 못 먹는 건 리에프도 마찬가지다.  수면 부족으로 입맛을 잃은 지 오래다.  밥 먹을 시간에 차라리 한 숨 자겠다고 점심 시간에 휴게실에 가 있을 때도 많다.  그들이 누리는 행복에 걸맞은 고된 대가다.  역시 집에 도착하도록 답장은 오지 않았다.  축 처진 어깨로 들어온 리에프는 비어있는 현관에 달랑 놓인 슬리퍼가 오늘따라 쓸쓸하다고 생각했다.




“왔어?”




옷을 갈아입고 씻고 나올 때까지도 야쿠를 못 봤다.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털면서 거실로 가니 레이를 안고 우유를 먹이다가 고개를 든다.  도담스럽게 웃는 얼굴이 예쁘다.  그는 금방 다시 아이에게로 눈을 돌린다.  맛있어요? 물으면서 우르르 까꿍! 재롱을 부린다.  그걸 내려다보면서 웬일인지 리에프의 입술이 퉁퉁 부어서는,




“내 밥은 챙기지도 않으면서.”




툴툴거렸다.




“이젠 레이한테까지 질투야?”


“질투하는 거 아니에요.”




리에프를 쳐다보지도 않고 대화를 이으려던 야쿠는 날 선 목소리에 흠칫 놀랐다.  동그랗게 떠진 눈이 그림자 진 녹색 눈동자 아래에 놓인다.  왜 그래?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손을 잡으려 했는데 그는 저도 모르게 야쿠의 손을 피했다.




“그냥…… 잘 표현해주지 않으니까, 가끔은 자신이 없다고요.”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앞에 서서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을 한 리에프에 어쩔 줄 모르지만 몸은 움직일 수가 없다.  아무것도 모르는 천진한 아기의 눈이 야쿠를 묶어두고 있기 때문이다.




“레이는 야쿠상에게 없어선 안 될 존재고, 저는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그만인…… 그런 기분이 들어요.”


“뭐? 말도 안돼.”


“처음 만났을 때 그랬잖아요, 아기만을 원한다고.”


“그 때랑 지금은 달라!”


“알아요, 제 말은 그러니까…… 아니에요, 무슨 말을 하는지 저도 모르겠네요.”




말 그대로다.  나오는 대로 말하면서 자신도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허나, 위로가 필요했다.  지친 걸까?  저도 레이처럼 따스한 그의 품에 안기고 애정 어린 입맞춤을 받고 싶은 것만은 확실하다.  스스로도 어이가 없는 생각이었다.  난처한 표정이 된 야쿠에게 미안할 뿐이다.  그는 지금 아무것도 해줄 수 없으니 제 이기심 때문에 나쁜 사람이 될 위기에 놓였다.  리에프는 쓰게 웃었다.  어디라도 기어들어갈 듯한 음성으로 그냥 해본 말이라고 읊조리고는 물러난다.  설거지가 쌓여있을 부엌 쪽으로 몸을 돌렸다.




“리에프.”




야쿠는 손수건으로 레이의 입가를 닦으며 우유병을 내려놓았다.  오래 다리를 접고 앉아있다가 일어서니 저릿한 감각이 뻗쳐 오르지만 참을 만 하다.  지금은 축 처진 채 돌아온 사자가 중요했다.  리에프.  우뚝 멈춰 서 있더니 다시 한 번 이름을 부르니까 천천히 뒤로 돈다.  팔을 뻗었다.  이리와.  리에프는 망설이다가 그에게로 다가갔다.  한 팔에 안겨있는 아기가 손을 흔든다.




“저는, 그냥……”


“쉿, 말하지 않아도 돼.”




허리로 감기는 작은 손.  얌전히 그에게 안긴 리에프는 입술을 꾹 깨문다.




“내가 너무 무신경했어, 미안. 힘들었지?”




말 없이 고개만 끄덕거린다.  속상하다.  리에프가 힘들다고 말할 때까지 알아채지 못한 걸 보면 어지간히 사자에게 신경을 쓰지 못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이라면 진작에 달래줬을 텐데 아기 사자에게 온 마음을 쓰느라 겨를이 없었다.  그렇다고 매일 살갑게 엉기거나 사랑을 속삭이는 성격도 아니니 여린 리에프가 마음 고생을 했다면, 제 잘못이다.  야쿠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서 있는 그를 더 세게 껴안았다.




“너와 레이가 전부야.”


“……”


“이런 말 하긴 늦었지만…… 너여서 다행이야, 네가 아니라면 레이도 없었을 거야. 혼자선 못 버텼을 테니까.”


“……”


“사랑해.”


“……”


“리에프?”




묵묵부답이다.  콧등으로 떨어진 물방울을 맞은 야쿠는 픽 소리 내어 웃었다.




“이래서야 울보가 둘이잖아, 정말 피곤하다─”




입술을 깨물고 훌쩍거리는 커다란 아기 아빠의 엉덩이를 팡팡 두드렸다.  투정을 부리고 저를 괴롭혀도 아기도, 아빠도 귀엽기만 하다.  푸하하!  야쿠가 크게 웃자 리에프는 몸을 배배 꼬면서 소리 없이 항의했다.




“주말에는 단둘이 어디라도 다녀오자.”


“응?”


“우린 휴식이 필요해. 레이는 부모님께 맡기고, 아마 좋아하실 거야.”


“흐…… 레이를 두고……”


“그럼 가지 마?”


“음……”


“자고 올 건데?”


“가, 가요!”




귀를 잡아당겼다.  입을 맞추자 몸을 뒤로 빼려다가 되돌리는 게 느껴졌다.  두 뺨을 감싸 쥐는 손길.  리에프는 애틋하게 야쿠의 얼굴을 쥐고 입술을 혀로 핥았다.  눈물 맛이 난다.  이 사람은 어쩜 이렇게 능숙할까?  언제나 미워할 수 없도록 옭아매고 도망가지 못 하도록 깍지를 낀다.  맞물린 입술 새로 속절없이 내뱉었다.  사랑해요.  사랑해, 레이.  우리는 행복을 안는다.









“이거? 코.”


“이, 이.”


“눈.”




요즘 레이는 말문이 트여서 질문이 많다.  리에프의 배 위에 포개져서 얼굴 여기저기를 가리키는 걸 보고 야쿠는 입 꼬리를 늘린다.  볕은 따사롭고 선풍기가 돌아가는 집 안은 산뜻하다.  아이가 까르르 웃으니까 두 아빠도 따라 웃는다.  기분이 좋은지 작은 귀가 팔랑거린다.  아직 발현할 때가 되지 않았어도 가끔 귀며 꼬리를 보여줄 때가 있다.  팔을 휘젓던 레이가 사과를 집어먹는 야쿠를 가리킨다.  이?




“내 거.”


“레뿌?”


“응.”




별안간 인상을 팍 찌푸린 레이가 힘차게 팔을 저었다.  턱받이에 침이 흥건하다.  리에프 거 아니래!  야쿠는 박수까지 치면서 웃는데 리에프는 단호하게 답한다.




“어? 모리스케는 리에프 거야!”


“안냐! 리에부 아!”


“맞아!”




진심으로 싸우고 있는 거야?  사자들의 사랑을 독차지한 야쿠는 그저 웃을 뿐이다.




“그럼 사이 좋게 나누자, 레이.”




레이를 안아 그 곁으로 기어온 리에프가 야쿠의 팔을 당겨 눕힌다.  한 팔에 아이를 안겨주더니 반대 쪽으로 가서 저가 팔베개를 하고 눕는다.  야쿠는 양 팔에 누운 이들을 번갈아 보다가 리에프의 이마에 쪽 소리가 나게 입을 맞추고 고개를 돌려서 가슴팍에 엎어진 레이의 뺨에 뽀뽀했다.  꼬물꼬물 앙증맞은 손이 그의 옷자락을 움킨다.  고새 그를 따라 턱 끝에 입을 대고 부, 부 옹알이를 한다.  그걸 보고 리에프가 질 수 없다는 듯이 야쿠의 볼에 대고 입술을 부풀렸다.  새된 웃음 소리가 한적한 주말 오후를 수놓는다.  행복해.  꿈조차 이렇게 행복할 수 없을 거야.  그 길로 깜빡 잠이 들었나 보다.  야쿠는 잠이 덜 깬 흐리멍덩한 눈을 깜빡인다.  레이.  무의식 중에 옆을 더듬는다.  손에 걸리는 거라곤 얇은 이불뿐이다.  반쯤 몸을 일으켰다.  아늑한 불빛 아래 리에프가 보인다.  사랑스러운 나의 연인.  잠투정하는 애기를 어깨에 모로 안고 춤을 추듯 몸을 움직이고 있다.  눈이 마주쳤다.  그가 다가온다.




“더 자요.”




이마며 코, 눈두덩, 입술에까지 상냥하게 입을 맞춰준다.  그에게선 익숙하고 편안한 냄새가 났다.  자기를 쏙 빼 닮은 아기를 안고 있는 저이가 곁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것이 오롯해진다.  우리를 둘러싼 공기, 시간, 온 감정……  살아가면서 순정의 가치를 헤아릴 수 있는 이가 몇이나 될까?  야쿠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






- The end -























번외.

[쿠로켄] 순정의 행방









‘네 눈에도 내가 다르게 보여?’


‘아니, 나한텐 쿠로오만 보여.’




수증기로 뿌얘진 거울을 손날로 닦아냈다.  비추어진 남자는 물에 젖어 이마에 달라붙는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쓸어 넘긴다.  이목구비가 날렵해 살가운 인상은 아니다.  거울 속을 직시하는 눈빛이 유난히 매서웠다.  종일 보이지 않는 표범의 기운을 다스리느라 몸이 천근만근이다.  중종 흑표인 쿠로오 테츠로는 타인에게 혼현을 내보이길 꺼리는 편이다.  같은 반류에게조차도.  그렇다 보니 밖에서는 늘 온 몸의 말단까지 신경을 곤두세워야 한다.  이유를 묻는다면 확답을 할 순 없지만 일종의 트라우마 탓이다.  발현하고 가치관이 형성될 즈음에, 인간 관계에서 반류라는 게 얼마나 성가신 일인지 깨달았다고나 할까?




‘코즈메 켄마는 우리랑 다른 부류야, 걘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할 거야.’




한 동네에 살던 망할 악어 자식이 켄마에 대한 제 약점을 건드리지만 않았어도 지금보단 편하게 살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쿠로오는 미간을 찌푸렸다.  코즈메 켄마는 옆집에 나고 자란 소꿉친구이자 10여 년의 짝사랑 상대, 그리고 지금은 동거인이다.  욕실 문을 열자 한기가 밀려든다.  물기를 제대로 닦지 않아 다부진 몸에 티셔츠가 달라붙는데도 그는 아랑곳 않고 거실로 나아갔다.  웅얼거리는 목소리 때문이다.  깼나 보네.  씻으러 들어가기 전까진 소파에 웅크려 세상 모르고 잠들어 있던 켄마가 휘적휘적 다가오는 그를 올려다본다.  눈이 꺼벙한 걸 보니 잠이 덜 깬 게 분명하다.  통화를 하는 모양인데, 바닥에 휴대폰을 놓고 귀만 올린 채다.  휴대폰 들 힘도 없는 거야?  쿠로오가 키들거렸다.




“응…… 쿠로? 옆에 있어.”




수건으로 젖은 머리카락을 털면서 입 모양으로 누구야? 물었다.  야쿠.  조그만 입술이 속삭인다.  마른 침을 삼킨 쿠로오는 가만히 서서 이따금 얕게 움직이는 입술을 빤히 쳐다보았다.  아, 키스하고 싶다.  한번도 안 해 본 건 아니다.  몇 년 전에 취해서 홧김에 켄마의 입술을 훔친 적이 있다.  지금 그와 통화중인 야쿠는 자는 애한테 파렴치한 짓을 했다며 길길이 날뛰더라.  하지만, 정작 당사자는 반응이 없었다.  얌전히 입술만 붙인 것도 아니고 명백히 진한 입맞춤이었는데 말이다.




‘모르는 척 하는 건지, 아무렇지도 않은 건지…… 별다른 말이 없어.’




유일하게 제 짝사랑 사정을 알고 있는 야쿠에게 전화로 하소연하는 목소리가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고양이가 여러 말로 위로해주려 했지만 절망이 가시긴커녕 더 울적해졌다.  싫었으면 가출하지 않았을까?  켄마가 신고하지 않은 걸 다행으로 알라는 말이 최대의 위안이었다.  그마저도 잠시 뿐이었지만.  갑자기 청포도가 쓰네 마네 딴소리를 하기에 잠자코 있었더니 핸드폰으로 여지없이 리에프의 음성이 난입했다.  야쿠상, 아─해요!  야쿠가 입덧 때문에 통 먹지 못 했을 때라 그의 사자가 과일이라도 먹이려는 거였다.  괜찮으니까 끊어.




’그, 그래. 아무튼 만나서 다시 얘기해.’




그 때만큼 야쿠가 부러운 적도 없었다.  그들의 아기는 벌써 네 살 배기다.  어찌나 예쁜지 눈에 넣어도 안 아플 거라고 장담한다.  얼마 전에 리에프가 자랑 삼아 보낸 동영상이 있는데, ‘사랑해’ 하니까 레이가 짤막한 팔을 머리 위로 들어 하트 모양을 만들려고 애쓰는 거다.  꼬물꼬물.  당장 쓰러지지 않은 게 이상할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갑자기 왜 꼬마 사자 얘기를 하게 됐더라?  아무튼, 켄마와의 첫 키스는 상처로 남았다.  게다가 취중이라 감촉이나 기분이 잘 생각나지 않아서 생각하면 괴롭기만 하다.  홀로 고개를 저은 쿠로오는 수건을 팽개치고 소파로 다가갔다.  아무런 제어 없이 개방된 맹수의 혼현이 날래게 움직인다.  자유.  오로지 켄마의 곁에서만 얻을 수 있는 안식이다.




“쿠로, 무거워.”




저에 비해 육중한 쿠로오가 몸 위로 쓰러지듯 눕자 가감 없이 질색인 표정을 지어낸다.  그러든 말든 피곤하다고 중얼거리면서 틈으로 파고든다.  넓은 집에서 이렇게 바짝 붙어있지 못해 안달이다.  켄마는 소파 끝까지 밀려났다.  떨어질 걱정은 없다.  허리를 단단히 붙드는 팔에 익숙하다.




‘쿠로오가 귀찮게 하는구나? 작작 하라고 전해. 이만 끊을게, 리에프가 아이스크림 사왔어.’


“잘자, 야쿠.”


‘너도 잘자고 내일 봐.’




전화가 끊어진 걸 확인한 켄마는 몸을 뒤챘다.




“차갑잖아.”




한껏 볼멘소리를 한다.  나른한 음성.  품에서 바르작거리면서도 쿠로오를 벗어나거나 밀쳐내진 않는다.  얇은 손가락으로 목덜미에 닿은 검은 머리카락을 쓸어 내렸다.  그의 손길에 쿠로오는 기분이 좋은 듯 낮게 웃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젖혀 무심히 움직이는 손 끝에 입술을 댄다.  켄마는 피부에 휘감기는 냉기가 실은 열기인 줄 모른다.  평범한 원인이라서 그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 한다.  애정을 갈구하는 표범의 페로몬이나 제 앞에서만 방탕하게 풀어지는 혼을 평생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허공에 얽히는 두 사람의 손가락이 왜 그리 애틋하게 서로를 감싸는지 도통 이해하기 힘들다.




“내일 소풍 가기로 했어.”




켄마가 조금 성가시단 얼굴로 말했다.  하품을 하며 돌아눕더니 쿠로오의 다리 새로 제 발을 들여 놓는다.  그는 눈을 감았다.  쿠로오가 딱 5초만 조용하면 바로 잠들어버릴 것 같다.  잠들락말락 하는 걸 알지만 소풍? 하고 되물었다.  정적인 켄마와 어우러지지 않는 단어다.




“레이가 가고 싶어한대서……”


“거절할 수가 없었어?”




잠시간 어떻게 알았냐는 듯 침묵하더니 이내 끄덕거린다.  귀엽다.  숨을 쉬는 게 귀엽고 가까이서 보이는 솜털이 귀여워 죽겠다.  쿠로오는 어쩔 줄 몰라 포개진 몸을 은근히 조였다.  더운 숨이 끼친다.  켄마가 또 하품을 했다.  턱 아래서 비비적거리더니 본격적으로 잘 요량으로 긴 한숨을 내쉰다.  픽 웃으면서 토닥토닥 등을 두드려주었다.  출시 예정인 신작 게임을 테스트하느라 이틀 동안 밤을 새더니 영 맥을 못 춘다.  가뜩이나 체력도 약한 애를 이렇게 혹사시키다니, 망할 놈의 회사.




“아!”




깜짝이야!  제 품을 떨치고 벌떡 일어난다.  부스스한 머리카락이 잘랑거렸다.  후다닥 방으로 뛰어 들어가버린다.  저렇게 급한 건 좀처럼 보기 힘든 모습이다.  별일이네.  어안이벙벙해진 쿠로오가 반쯤 일어나 앉아 왜 그러냐고 소리쳤다.




“쿠로.”




발그레한 뺨의 빛깔이 그로 하여금 이 무료한 낙원을 벗어날 수 없게 한다.




“이거 레이가 좋아할까? 회사에서 받은 건데.”


“그건 좀……”




무시무시한 이빨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괴물 인형을 들고 서 있는 켄마의 눈이 반짝거린다.  진심으로 레이가 저 인형을 좋아하길 바라고 있는 거다.  저기, 켄마?  설마 그 인형이 들고 있는 거 사람 다리야?  쿠로오가 말 끝을 흐리며 난색을 하니,




“귀엽지 않아?”




미묘하게 시무룩해지는 저 애를 어떻게 안 좋아하겠어?




“귀여워……”




물론, 쿠로오가 말한 건 인형이 아니라 그걸 내려다보면서 살며시 웃는 이다.











푸르른 잔디 위 노란 텐트, 체크무늬 돗자리 옆 옹기종기 모여있는 신발들.  따뜻한 강바람이 머리카락을 간질인다.  지그시 감긴 속눈썹 위에 앉은 햇볕에 야쿠는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선베드에 누워 만끽하는 평화로운 주말,




“한 입만─ 레이, 한 숟가락만 먹자, 응?”




방금 한 말은 취소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시끌벅적하고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하루.  그래서, 좋은 날이다.  실눈을 뜨니 야쿠의 눈에 들어오는 광경이 가관이다.  앙증맞은 멜빵 바지를 입은 꼬마 숙녀, 그 입가에 묻은 밥풀을 떼어 제 입으로 가져가면서 애원하는 아빠 사자를 보라.  아이는 한창 호기심이 생길 나이라 성질이 산만해졌다.  주의를 끌지 못하면 금세 다른 데로 눈을 돌려서 진득하게 밥을 먹이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다.  방금 리에프의 무릎에 앉아있던 레이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울먹울먹한 얼굴이 저에게로 향해진다.  어떡해요, 모리? 하고 도움을 요청하는 눈동자는 여전히 싱그러운 색깔이다.  봄의 녹음과 여름의 바다, 가을의 그림자, 겨울의 영원이 담긴 그 색.  배불러 낳은 건 하난데 왜 애가 둘인지 의문이다.  야쿠가 심드렁하게 팔을 뻗었다.  얼른 손에 기대오는 리에프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는다.




“켄마! 벌써 다 먹은 거야? 이거 맛있다, 한 번만 먹어봐.”




옆 집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 집 애도 밥을 안 먹나 봐요?  야쿠가 실소하자 쿠로오가 머쓱하게 눈을 휜다.  밥상머리로 엎어져 징그럽게 생긴 인형을 만지작거리는 켄마와 그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는 표범 친구.  이미 오래 전부터 지겹도록 봐오던 장면이다.  달라진 게 있다면,




“밥 먹고 눕지 말라니까, 켄마.”




켄마를 향한 쿠로오의 눈빛이다.  꿀 떨어지면 저 집에서 얻어와야겠네.  답답한 마음에 야쿠는 끌끌 혀를 찬다.  그러자 바짝 다가온 리에프가 코 앞에서 갸우뚱거린다.  왜요?  아무것도 아니야.  그의 집에도 꿀은 차고 넘친다.  어느새 켄마에게 다가간 레이가 그 앞에 쪼그려 앉아 손가락으로 참견을 한다.  아기 사자는 유독 켄마를 좋아한다.  켄마의 성격상 사근사근하게 보아주지 않는데도 졸졸 따르고 잘 보이고 싶어한다.  저번에 은근슬쩍 물어봤더니, 아빠에게만 털어놓는 비밀이라며 고백하더라.




‘왕자님 같아.’




어려도 보는 눈이 있다.  오뚝한 콧날과 느긋한 행동이 야쿠의 공주님에게는 동화 속 기품 있는 왕자처럼 보였을 만도 하다.  제 눈에는 그저 세 얼간이 중 하나일 뿐이지만.  그나저나 맹수 두 마리는 영 실속이 없다.  여태껏 수북한 도시락을 넘겨본 고양이는 피곤하다는 듯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하루에도 수번 입안에 맴도는 행복을 부르는 목소리가 상냥하다.  레이.




“켄마 삼촌은 주먹밥을 한입에 먹을 수 있대, 보여달라고 해봐!”




야쿠의 말에 제 팔에 가만히 손을 올리고 있던 아이가 켄마에게로 시선을 던진다.  푸르락붉으락해지는 그의 낯빛을 보며 나머지는 마음껏 즐거워했다.




“으……”




기대에 찬 눈망울을 이기지 못해 주먹밥을 집는 켄마를 보며 쿠로오는 싱글벙글한다.  밥을 씹는 볼에 불만이 가득하다.  곧 레이가 고사리손으로 밥을 움켰다.  눈길은 여전히 켄마 왕자에게 놓인 채다.  나란히 앉아 우물우물하는 양이 바라보는 이들을 황홀로 물들인다.  표범과 사자는 존경을 담아 야쿠에게 엄지 손가락을 추켜세웠다.




“쿠로오상은 아기랑 잘 놀아주네요.”




허리를 깊숙하게 숙여 레이와 걸음을 맞추는 인영이 신기하다는 듯이 리에프가 중얼댔다.  강가에서 날아온 비누방울이 경쾌하게 터진다.  몸이 근질근질한 고양이가 아쉽게 팔을 내리며 답한다.




“베테랑이지, 날 때부터 켄마 어린이 보호자였으니까.”


“하긴, 선배는 편식도 심하고 낯도 가리고 여러모로 손이 많이 갔겠죠. 그래서 그런지……”




별안간 코를 킁킁거린 사자가 핸드폰에 코를 박고 있는 켄마를 흘깃 쳐다본다.




“켄마 선배한테 쿠로오상 냄새가 나요, 완전 진해.”


“같이 살잖아.”


“첨엔 그렇고 그런 사인 줄 알았는데, 아니라고 펄쩍 뛰더라고요.”


“누가? 쿠로오가?”




두 사람의 대화가 신경 쓰였는지 켄마가 슬쩍 고개를 든다.  일그러지는 눈매를 눈치채지 못한 리에프는 굳이 손사래 쳤던 쿠로오를 흉내 냈다.  태양으로 칠해진 눈동자에 멀리서 아장아장 걷는 아이와 검은 남자가 들어찬다.  헌칠하고 날 선 생김에 어울리지 않게 다사롭다.  어쩐지 눈을 뗄 수가 없다.  쿠로오는 표범이다.  아무리 봐도 제 눈에는 그저 삐죽 머리에 못생긴 소꿉친구로밖에 보이지 않지만.  반류 세계의 그에 대해선 아는 게 많지 않다.




‘반류는 특별한 동물의 영혼을 가진 사람이래, 쿠로오네 가족 말이야.’




어릴 때였다.  어머니께 이야기를 들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며칠 동안 쿠로오가 우리 집에 오지 않은 적이 있다.  학교에 가고, 돌아올 때에도 혼자였다.  흔치 않은 일이다.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깊게 잠들지 못 했다.  책상 아래로 처박힌 배구공이 자꾸 시선을 빼앗는다.  어린 켄마는 방에 틀어박혀서 한참을 조용하다가 사탕 몇 개를 움켜쥐곤 집을 나섰다.  쿠로오의 방문은 굳게 닫혀있었고 똑똑 두드려도 열리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마음대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신열에 들뜬 숨이 느껴진다.  평소처럼 이름을 부르지 않거나 웃지 않는 그는 낯설다.  머리맡에까지 갔다가 도로 문 쪽으로 돌아와 한참을 멀찍이 서 있기만 했다.  많이 아픈가 봐.  잠든 마냥 눈을 감고 있는데도 호흡이 사납다.  살금살금.  도로 곁으로 다가갔다.  이불 위로 나와있는 손에 사탕만 쥐어주고 가려던 참이다.




‘켄마……’




보지도 않고 어떻게 나인 줄 알았을까?  대답 없이 침대에 살짝 걸터앉았다.  이대로 돌아가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쿠로오가 했던 것처럼, 아프다니까 이마부터 짚어본다.  뜨겁고 축축하다.




‘가지마.’




쿠로오는 제게서 떨어지려는 손을 세게 낚아챘다.  베개 옆에 놓아둔 사탕이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진다.




‘네 눈에도 내가 다르게 보여?’




울먹임이 손등으로 녹아든다.  그의 눈물이 마를 때까지 켄마는 옆에 있었다.  회상은 오래지 않아 멈추었다.  얼굴로 드리워진 그림자에서 보드라운 냄새가 난다.  멍한 표정을 갈무리하기도 전에 일순 가까워졌다가 멀어진다.




“레이, 켄마한테 뽀뽀했어?”


“응.”


“갑자기 왜?”


“좋으니까!”




천천히 손을 들어 뺨을 쓸어보았다.  사랑이 묻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뭐, 뭐?”




말을 더듬는 쿠로오를 올려다보며 켄마는 사정없이 인상을 찌푸렸다.  흔들리잖아, 라며 들고 있는 게임기로 눈씨를 되돌린다.  제 허벅다리를 베고 누운 그를 허망하게 내려보는 쿠로오의 입이 닫히지 않고 뻐끔거렸다.  잘못 들은 게 분명하다.  선풍기 바람에 휘날리는 노랗고 검은 머리카락이 피부를 간질인다.  방금 자길 좋아하냐고 물은 사람치고 지나치게 태평하다.  환청이었다고 단정하기로 한다.  늦더위 때문인지 간담이 서늘했는지 척추를 타고 흐르는 땀방울이 느껴진다.  귀에 익은 ‘Game Over’ 사운드에 켄마의 짜증이 이어졌다.




“또 졌어?”


“누워서 하니까 적중률이 떨어져서 그래.”


“그럼 앉아서 하……”


“쿠로오.”


“응?”


“대답 안 했잖아.”




맙소사.  환청이 아니었어!




“저, 나는……”




황급히 눈을 피했다.  입이 마르는지 음성 끝이 잘게 부서진다.  켄마는 느릿하게 몸을 일으켜 앉아 주섬주섬 게임기를 챙기기 시작했다.  제대로 진심을 전하지 않으면 방으로 도망쳐버릴 게 뻔하다.  알면서도.  꽉 쥔 주먹이 파들파들 떨린다.  어렵다.  너무 오래 묻어둔 만큼 꺼내기 힘든 말이다.  가슴이 시한폭탄처럼 급박하게 치달아 답답했다.  벌 받는 아이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떨군 쿠로오를 힐끔거린 켄마가 아예 소파를 벗어난다.  굴곡 없는 맨발이 앞에 섰다.  턱 아래를 부드러이 쓸어 올려 눈을 맞추게 한 건 찰나다.




“나는 좋아.”


“…… 뭐라고?”




그는 주저 없이 입을 맞추었다.  이번에도 제멋대로 문을 열고 들어온다.  입술을 스치는 감촉은 눈결처럼 짧은데 영원을 약속한다.  감미로워 눈을 감는 건 고사하고 힘이 풀려서 켄마의 팔을 콱 부여잡았다.




“여기에 하는 게 제일 나아.”




입술을 뗀 켄마가 탐탁하지 않다는 듯 말했다.  그러곤 얼빠진 소꿉친구를 내버려두고 제 방으로 쪼르르 들어가버린다.  철컥!  문이 잠기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남겨진 이는 당근처럼 빨갛다.  한달음에 내달린 쿠로오가 문이 부서져라 쾅쾅 두드린다.




“케, 켄마! 문 열어봐! 그냥 들어가 버리면 어떡해!”


“싫어.”


“열어줘, 키스하고 싶어!”


“징그러워……”




소중한 건 늘 당신 곁에 있어요.




“좋아해.”



























수정본과 번외까지, 이제야 순정의 가치를 온전히 끝마쳤습니다.

재미있게 봐주시고 응원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며 짧은 후기를 씁니다ㅎㅎ

중장편을 쓸 때에는 나름대로 복선도 넣고 다른 편에서 이어지는 단서도 남기는 편인데

때마다 과연 독자 여러분도 잘 찾아보셨을지 궁금합니다.

여유가 있으시다면 몇 편 후에 회상씬으로 다시 나오는 대사나 

재등장하는 상황, 소품을 찾아보시는 것도 순가의 재미를 더할 것 같습니다.

번외의 주인공은 쿠로켄입니다!!

나른하지만 깜찍한 이들과 고양이네 근황까지 전할 수 있어 쓰는 내내 기분이 좋았답니다.

볕 좋은 날, 체크무늬 돗자리에 누워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이들과 여러분이 함께하길 바라며.

오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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