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이 곤두선다. 구부정하게 앉아서 사람이 들락날락하는 쪽만 바라보는 중이다. 종일 난방중인 실내와 달리 야외 휴게실은 그 흔한 난로도 없는 냉골이다. 걷힌 소매를 되돌리면서 부루퉁한 입술이 웅얼거린다. 안 올 거면 말이라도 해주지. 담배 개비를 반으로 부러뜨리고 짓이겼다. 손마디가 아리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에 익숙해질 줄 몰랐다. 절반은 벌이라고 여긴다. 부당한 기다림 속에서 종대는 더 비참했을 테니까. 찬열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쌌다. 살을 에는 꽃샘추위에 귀가 붉어진 지 오래다. 휴게실에서 보자는 메시지에 오늘도 답장이 없었다. 그래도,




‘아직도 있었어?’




어제는 느지막이 올라와선 뒷걸음을 하다가 딱 걸렸다. 기다리고 있을 걸 몰랐다는 반응이었지만 정말 그랬을 것 같지도 않다. 나를 잘 아는 너니까. 야! 하고 부르는 소리에 종대가 한 쪽 눈을 찡그렸다. 손가락으로 이마를 문지르며 다가오더니 입고 있던 정장 재킷을 벗어 얼어버린 손 위로 덮어주었다. 망설임 없이 포근하고 아늑하다. 사이즈가 작아서 내가 입으면 찢어지겠다고 괜스레 툴툴거리는데 그저 옆에 걸터앉는다. 찬열은 오로지 종대만 바라보았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무표정으로 앞만 보았다. 팔랑팔랑 움직이는 속눈썹만 부드럽고 나머지는 차다. 10분 남짓한 시간 동안 시시한 대화를 나누었다. 밥은 먹었는지 물었고 종대는 고개만 끄덕이고는 말이 없다가 한참 후에 순두부찌개를 먹었다고 했다. 맛있었어? 응. 그게 다다. 아무래도 오늘은 안 오려는 모양이다. 아쉬움에 구둣발만 밀어내다가 자리를 떴다.

그를 따라 가만히 흘러가다 보면 닿아지는 걸까? 찬열이 보내는 문자에 어쩌다 한번 답장을 하고, 간혹 집에 바래다주는 걸 허락하는가 하면 어떤 때에는 화를 내며 돌아서버린다. 함께 술 한 잔 기울이며 옛 이야기에 웃음 짓다가도 다음 날이면 후회막심인 얼굴로 취해서 미안하다고 선을 긋고, 새벽까지 속살거린 통화 끝에 이러면 안 된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요즘 종대는 이렇게 제멋대로다. 그에게 함부로 여겨도 되는 존재가 되었다고 생각하면 솔직히, 회복 불가다. 마음이 변한 건 아닌지 두려우면서도, 제 잘못인 줄은 알아서 슬픔이 더 크다. 예의가 없었다. 가까워질수록 조심스러워야 했던 애정이 커질수록 정중했어야 했다. 우리는 그러지 못 해서, 그래서 헤어진 거다.

품에 안아 다감하게 머리카락을 쓸어주고 좋아한다고 말해주던 그 때로 돌아가고 싶다가도 찬열은 고개를 저어 헛된 생각을 지운다. 그 때의 종대는 홀로 아파하고 있을지도 몰라서 그러면 안 되었다. 좀처럼 용서해주지 않아서 홧김에 그만 둘까? 해도 이런 참담한 기분까지 참아지는 걸 보면 그 만큼이다. 이렇게나 김종대가 아니면 안 된다고 깨달아질 뿐이다. 내일은 네가 오면 좋겠어.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발이 무겁다.




‘나중에? 작은 카페나 하나 차렸으면 소원이 없겠다!’


‘커피도 안 좋아하면서 갑자기 무슨 카페?’


‘요즘엔 다들 그러잖아, 그냥 그랬으면 좋겠다는 거지. 아침부터 밤까지 내가 좋아하는 영화들 틀어놓고 손님들이랑 같이 보고 강아지도 있고…… 바닷가에 지으면 너무 비쌀까?’




찬열의 무릎을 베고 누워 과자 안에 들어있던 플라스틱 팽이를 만지작거렸다. 행복한 상상에 빠진 종대가 한껏 재잘거렸다. 허공에 허우적대며 나무는 어떻게 심을 거고 의자는 어떤 색깔로 할 건지 설명하는 손을 잡아챘다. 그 안에 나도 있어? 나는 뭐해? 찬열이 물었다. 그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멈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가 닫힌다. 고개를 젖혀 물끄러미 올려보기만 하는 데에 심통이 나서 다리를 크게 들썩였다. 연한 머리칼이 흐트러진다. 그제야 슬며시 웃으면서,




‘그래, 내 꿈이니까 너도 있을 거야.’




라고 속삭였다.

왜 그렇게 말했는지 지금은 너무 잘 알아먹어서 속이 아프다. 내 꿈이니까. 그는 분명 그렇게 말했다.

구두를 벗고 불을 켰다. 그 때의 박찬열은 무슨 꿈을 꾸었나? 그 안에 김종대가 있었나? 냉한 기운이 감도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찬열은 곧 양복이 구겨지든 말든 아무렇게나 드러누웠다. 떠오르는 건 온통 나를 사랑해주었던 그이다.




‘언제까지 이럴 수 있을까?’




가슴팍에 속살거리기에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옆구리에 닿은 손길이 간지러운지 종대가 작게 키들거렸다. 한 침대에서 눈을 뜨는 건 늘 있는 일인데도, 그는 유독 좋아했던 것 같다. 그 시간을 떠올리면 종대는 항상 웃고 있으니까. 언제까지?




‘영원히.’




영원이라는 말의 무게도 모르면서 함부로 지껄인 대가가 이렇게나 크다.




[왜?]




집에 갔는지 묻는 말에 두 시간 만에 온 답장이 고작 왜? 하고 되묻는 말이다. 싸락눈이 내리기에 차로 데려다 주려고 끝나자마자 회계팀으로 내려갔더니 홀랑 퇴근을 한 후였다. 허우룩한 마음을 다잡을 길 없이 찬 바닥에 붙어서 팔다리나 휘젓고 있던 찬열이 매트리스 위로 핸드폰을 집어 던진다. 작게 욕을 뱉었다. 팔을 이마에 대고 한참 씩씩거린다. 눈두덩이 뜨겁게 달아올라서 머리가 아픈 것처럼 느껴졌다. 분노의 대상은 관계를 망쳐버린 이, 오로지 자신이다.











김대리는 6시 정각에 칼같이 퇴근을 했다. 왠지 집으로 곧장 들어가긴 싫어서 메신저 친구 목록을 훑었다. 어차피 부를 사람이야 뻔할 뻔 자여도 여러 이름을 넘겨본다. 지워진 이름은 찾아지지 않는데 공연히 목록을 보고 또 보고. 마침 봄이와 산책을 나온다는 백현에 곧장 강변으로 향했다. 두어 달을 함께였다고 어찌나 반가워하는지 종대는 뛰어드는 개를 못 이겨 엉덩방아를 찧었다.




“봄! 이리와!”


“놔둬, 줄 있잖아. 그것보다 뭐, 할 말 없어?”


“할 말?”


“모른 척 하시겠다?”




눈을 흘기는 백현을 피해 다시 봄이를 불렀지만 저 놈의 멍멍이는 거들떠보기는커녕 땅에 코를 박고 킁킁거리기 바쁘다. 예쁜 단화가 제 구두를 참을성 없이 툭툭 건드린다. 의기양양하게 오세훈한테 다 들었다고 으쓱거리는 게 얄미웠다. 걔가 뭘 안다고 그래? 대꾸한 종대는 오리처럼 나온 입으로 덧붙인다. 다시 만나는 게 아니야. 우린,




“헤어지는 중이야.”




하고. 구질구질하다고 길길이 날뛰는 걸 보기 싫어서 귀를 막고 눈을 감아버렸다.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식으로 마음 가는 대로 하란다. 찬열이랑 똑같은 소리를 한다. 너희는 뭐가 그렇게 쉬울까? 나한테는 너무 어렵고 힘든 일인데. 피곤하다며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봄이 주둥이에 얼굴을 비볐다. 흙냄새가 난다. 안녕. 종대가 돌아설 때까지도 백현은 멍청하게 굴지 말라고 성화였다.

괜히 서운하다. 상처가 아무는 걸 기다려주는 이가 아무도 없다. 아무도. 터덜터덜 걷느라 집에 오기까지 꽤 오래 걸렸다.

배고파. 늦고 혼자인 저녁이라 소박하기 그지없다. 밥은 안 먹고 빵이나 먹는다고 잔소리할 사람이 없어진 뒤로 그의 식사는 대체로 이렇다. 집 안에 고소한 냄새가 진동을 한다. 아차! 잘 구워진 식빵을 접시에 쌓아놓은 종대가 싱글싱글 웃으며 식탁에 앉다가 얼굴을 굳혔다. [어디쯤이야?] 답장 하지 못한 연락이 떠올랐다. 잠깐 밖에 나왔다고 쓰다가 봄이가 안기는 바람에 가방에 집어넣은 후로 까맣게 잊고 있었다. 너무 늦었네. 괜스레 키패드를 만지작거리다가 달랑 왜? 라고 보내었다. 굳이 답장을 할 필요가 있었는지 묻는다면 할 말이 없다. 끊어낼 수 있는데도 그러지 않는다. 그냥. 어물쩍 식빵 끄트머리를 찢는데 벼락같이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다름 아닌 박찬열이다.




‘너무하지 않냐?’




잠시 망설이다 받은 전화에선 퉁퉁 부은 호통이 뻗쳐 나온다. 다짜고짜 너무하지 않냐고? 누구더러 하는 소린지 모르겠다. 포크로 잼을 휘저었다. 심난할 거 알면서도 시도 때도 없이 콕콕 들쑤시는 주제에. 대꾸도 않고 다시 식빵을 물었다. 기계 너머로 갈라진 한숨 소리가 들려온다.




‘난 너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그러는데, 노력한다고 하는 건데…… 너무 쌀쌀맞고, 막 대하니까…… 좀 상처야.’




멈칫. 치졸한 마음을 들킨 것 같아 낯이 붉어진다. 빵이 퍽퍽해서 옆에 놓아둔 우유를 한 모금 삼켰다. 허를 찔렸다. 싸늘한 눈빛이 따갑고 무심한 행동이 아프다고 잘도 따진다. 애정에는 거침이 없다. 저는 그렇게 못 해서 사랑을 잃었고, 찬열이는 우리가 변하는 걸 몰랐다. 식빵에 대충 잼을 발랐다. 혼자임에도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고 있다. 이미 온 신경을 그의 상처에 쏟고 있으면서 아니라고 고개를 저어본다. 더 이상 휘둘리지 않으려고 무던히 고생이었다. 보고 싶다는 메시지를 무시하고 정문에 서서 기다리고 있는 걸 쌩 지나치고, 제 마음을 못 이겨 무심코 그의 바다를 표류하다 좌절하기도 하고. 어쩌면 시험해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려 무엇까지 버릴 수 있는지.




‘말 좀 해 봐.’




낮게 울리는 목소리. 기어코 화를 내게 만들었다. 화낼 자격이 없는 사람과 달래줄 의무가 없는 사람 사이를 오가는 건 긴박한 호흡이 전부다. 종대는 어쩔 줄 모르고 입을 꾹 다물었다. 전화를 끊어버리고 싶은 반면에 미안하다는 말도 하고 싶다. 변명으로 들리겠지만, 상처받을 줄 몰랐다. 어느새 우리는 반대에 서 있다. 상처 주던 사람이 상처 받고 상처 받던 사람이 상처를 주는 꼴이 우습다. 돌이켜보니 이렇듯 제자리다.




‘목소리 듣고 싶어.’




뭐 하나 숨기는 법이 없다. 지금처럼. 그래서 사랑이 사그라지는 것도 보였고 지금은 자존심마저 내려놓은 게 아주 잘 보인다. 경직되었던 어깨가 등받이로 늘어진다. 싸우게 될까 봐 걱정이었다. 쓸모없는 소모전을 벌이기엔 애매한 관계다. 입가에 대고만 있던 빵을 다시 물었다. 우물우물 했더니 뭘 먹냐고 묻는다. 식빵, 하고 대답했더니 잼이나 생크림은 바르지 않았는지 궁금해 한다. 나는 그에게 다시 ‘궁금한 사람’이다. 가슴이 먹먹하다.




‘집 앞으로 갈게, 잠깐 나올래?’




단칼에 거절하면 또 상처 받겠지. 입 안에 퍼지는 딸기 향을 곱씹었다. 너무 달아서 녹아버릴까 두렵다.

얼마 지나지 않아 종대는 잠옷 위에 발목까지 오는 웃옷을 걸치고 집을 나섰다. 두근두근하고 어둑어둑한 밤, 아파트 계단에 쪼그려 앉아서 처량하게 별을 셌다. 황량한 도시의 별들은 귀히 새기지 않으면 잘 보이지가 않는다. 종대가 가진 외로움도 마찬가지다. 심연에 가라앉을 뿐,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왜 나와 있어?”




차에서 튕기듯 나온 찬열이 앉아있는 앞에 섰다. 목을 세워 보는데 뒤에 불빛이 있어 얼굴은 잘 보이지가 않는다. 대신 가쁜 숨소리가 들린다.




“안 추워?”


“응, 괜찮아.”




괜찮다는데도 기어이 차에서 담요를 꺼내오는 걸 턱을 괸 채 가만가만 지켜보았다. 부풀어진 찬열의 몸집이 크다. 워낙 크고 헐렁하게 옷 입는 걸 좋아한다. 오늘도 두꺼운 회색 후디를 껴입어서 덩치가 산만했다. 그래서 옆에 있으면 저가 고목나무에 매미 같다고 느낄 때가 많았다. 담요를 펼쳐서 무릎 위에 놓아주고는 옆에 털썩 앉는다. 어디를 가자거나 들어가자는 말이 없어 의아해하는 게 얼굴에 그대로 나타났는지 찬열이 묻지도 않은 것에 똑바로 대답했다.




“이런 것도 좋아하잖아.”




정처 없이 걷고, 밤하늘 보며 시간 축내는 것도 좋아한다. 종대가 얕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었어? 그럼. 다만, 어느 순간부터 잊혀졌다. 좋아하는 것들을 알아주지 않아도 그는 늘 곁에 있었으므로 몰라도 되었다.

나릿나릿 감기는 눈꺼풀. 멍한 눈이 찬열을 따라 움직인다. 허공에서 얽히는 시선이 새삼스레 찬열의 낯빛을 붉게 만든다.




“피곤해 보여.”


“그럴 시간이잖아.”


“괜히 불러냈네.”




마음에도 없는 소리. 종대는 은근슬쩍 제 등 뒤로 팔을 뻗는 걸 보고도 얌전했다. 내심 안심한 찬열은 생각한다. 이대로 그의 보금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아득해지는 눈빛이 저를 빤히 보고 있는 종대를 찬찬히 훑고 지난다. 밤바람에 흩어지는 머리카락, 닫힌 입술, 겨울옷에 부풀어진 몸뚱어리와 슬리퍼 끝에 홀랑 나와있는 맨발. 찬열이 아래로 향한다. 얼음처럼 차가워진 발가락을 손으로 덮어 눌렀다. 따뜻해? 뒤늦은 허락을 구하려고 힐끗 쳐다보았다. 내려다보고 있는 입 꼬리는 뜻을 모르게 묘한 방향이다. 용기를 내서 발등을 감쌌다. 따뜻해질 때까지 한참 그러고 있다가 발목도 잡아보았다. 뭉근히 살을 문지른다. 싫다고 안 하니까 얼마나 탐탁한지 저도 모르게 배시시 웃음을 짓고 말았다. 조용하던 종대가 기어코 한마디 했다.




“너 나랑 자고 싶어서 그러지?”


“뭐?”




어이가 없다. 자, 자고 싶어서? 그런 마음이 추호도 없다고 하면 거짓이지만, 우선은 아니었다. 눈살을 찌푸린 찬열이 밉살스런 종대를 어쩌지 못해 가슴을 두드렸다. 애간장 태우는 것도 유분수가 있지.




“이걸 한 대 때릴 수도 없고, 분위기 깰래?”




불만스런 입이 투덜거린다. 그런 말을 들은 게 못내 언짢았는지 다시 허리 숙여 발을 매만지면서도 혀를 끌었다. 온기가 내려앉는다. 발도 작냐? 하고 찬 데를 주무르는 옆얼굴을 응시하기만 했다. 속눈썹이 그림자를 지어낸다. 지쳤는지도 모르겠다. 날 세워 이 애를 막고 싶지가 않다. 그리운 기억 속인 듯 꿈결이라 여겨 기대고 싶기도 하다. 몰래 미소를 띠었다가 들켰다. 찬열은 잠시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곧 가슴이 뻐근해져서 눈을 피했다. 아아. 그가 웃는다. 스러진 반달이 마음에 콕콕 박혀서 아프기도 하고 조마조마하다.




“종대야.”


“응.”


“이러다 다시 만나면…… 그냥 그러면 안 되는 거야? 예전처럼 지나가는 열병이라 치고.”




만난 지 3년쯤 지났을 때 우린 한 번 헤어진 적이 있다. 스물아홉인가, 서른 그 때다. 사소한 다툼으로 작별을 고했다가 고작 한 달 만에 다시 만났다. 당장 울고불고하며 살을 섞던 것이 떠오른다. 겹쳐 잡은 손에 손톱자국을 새기면서 영원을 맹세했던 밤이다. 마냥 어리고 순진했다. 그 때로 돌아가기엔 시간이 많이 지난 걸.

이별을 겪은 연인의 재회가 대개 실패로 끝나는 이유는 우리가 영원할 거라는 믿음이 깨졌기 때문이다. 결말을 알아버린 이후, 차마 사랑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언제 또 가슴 아플 줄 모르니 마음을 아끼고 흐드러지는 애정을 꼭꼭 숨기다가 잃어버린다. 의심하다가 진심은 저버리고. 당장이라도 종대는 여기서 멈춰야 되는 까닭을 수십 개가 넘게 댈 수 있었다. 그럼에도, 앞에 있는 이는 다를까 봐 놓질 못 한다. 날 웃게 하는 건 지금의 네가 아니라 스물아홉의 너임을 알고도 말이다.




“돌아가자는 거 아니야, 새로 시작해.”


“뻔뻔하다.”




찬열이 픽 웃는다. 일그러진 눈매 탓에 울적해 보이는 것 같았다.




“이런 놈이라서 미안해.”




또 잠 못 이루는 밤일 게 분명해졌다.













신호등이 계속 빨갰다가 파랬다가 한다. 낮에는 제법 따뜻하더니 밤은 여전히 겨울을 벗지 않았다. 높은 빌딩 앞에 한 점으로 오래이던 남자는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발 끝으로 시선을 내렸다. 금방 나갈게! 퇴근이 늦어진 종대를 기다리던 그는 일순 코웃음을 쳤다. 미치겠네. 아까부터 검은 승용차 한 대가 주변을 돌고 돌아 자꾸 돌아온다. 세훈은 이제 그 차가 언제쯤 제 앞을 다시 지나칠지 가늠할 지경이다. 그리고 그 주인까지도. 김종대의 전 애인이자 현 스토커일 확률이 방금 95%로 높아졌다. 아무래도 종대의 옆에 있던 저를 알아보고 저러지 싶다. 느릿느릿 서행을 하다가 뒤차의 경음에 급히 내뺀다. 유유상종이라더니, 쌍방으로 잘 하는 짓이다.




‘세훈아, 나 찬열이랑 헤어지려고.’


‘맨날 말만 하지 말고 이제 헤어져라, 좀.’


‘이번엔 진짜야. 박찬열…… 오늘 선보러 갔어.’


‘미친 거 아냐? 와, 개새끼네, 그거!’


‘욕하지 마, 싫다는데 내가 나가라고 했어.’


‘그래, 형이 등신이야.’


‘너무 오래 만났나 봐, 변하기 전에 그만 둘 걸.’




눈물을 보이지 않아서 이상했다. 얼마 후, 그는 정말 이별을 안고 돌아왔다. 그깟 권태를 이기기엔 숨어 있던 약점이 컸다. 그래도, 본의 아니게 그들의 연애를 참관해 왔던 세훈의 설마? 하는 마음이 더 컸다. 시원하게 맞아 떨어지는 구석이 없는데도 지독히도 붙어있던 둘이다. 미련하거나 참사랑이거나 둘 중 하나가 아니면 마땅히 설명할 수 없었다. 물론, 저는 늘 전자에 한 표를 던졌다. 특히, 종대가 그렇다. 미련하기로 치자면 세계 1등일 거라고, 백현과 머리를 맞대고 앉아 늘 했던 소리다. 앞선 걱정도 많고 지나치게 이타적이다. 그가 버릇처럼 하던 말이 있다. 언젠간 보내줘야 돼. 사귄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부터 사계절을 함께 지나고, 반지 받고 운 날, 행복하다고 말할 때조차 무던히도 사랑을 놓아주려 했다.




‘찬열인지 뭐시기가 너랑 즐길 거 다 즐기고 여자랑 결혼해서 잘 먹고 잘 살 거래?’


‘아니, 박찬열은 그런 말 안 하지!’




근데? 눈이 동그래진 백현이 고개를 갸웃한다. 옆에 있던 세훈은 알만하단 얼굴로 심드렁히 중얼거렸다.




‘뭘 근데야, 이 형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다 하는 거지.’


‘찬열이는 내가 겪은 것들 평생 모르고 살았으면 좋겠어, 엄마도 못 보고, 친구도 잃고…… 세상이 무서워지는 거.’


‘애 키우는 것도 아니고, 서로 좋아서 만나는 건데 네가 왜 그런 거까지 신경 써?’


‘사랑하니까.’


‘미친 놈, 사랑한다고 그런 결정까지 대신 할 권리는 없어.’


‘오─ 변백현, 역시 이성애자다운데? 이성적이야, 아주.’




백현에게 등을 두드려 맞고도 까르르 웃는 종대를 마음처럼 꾸짖지 못 했다. 안타깝기도 하고 세훈으로서는 어느 정도 이해하는 바도 커서 그랬다.

바람이 차다. 쓰게 마르는 입술을 핥아 축였다.




“세훈아!”




멀리서 들리는 제 이름에 고개를 돌렸다. 총총 뛰어오는 이가 보인다. 토끼처럼 뛰기는. 바짝 다가와 멈춘 종대가 헉헉거리느라 인사도 제대로 못 하고 살살 팔을 잡아챘다. 일이 바빴는지 아니면, 저 뒤에 멈춘 차 주인이랑 무슨 일이라도 있었는지 얼굴이 많이 상해있다. 굳이 묻지 않고 세훈이 샐쭉해진 눈으로 그를 살피다가 주머니를 내준다.




“손 넣어, 핫팩 있어.”


“으으, 이제 봄인데 왜 이렇게 춥냐?”


“아직 아니야.”


“변백현은 거기로 바로 온데?”


“응, 건너가.”




제 주머니에 손을 넣은 종대는 기분이 좋은지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고 싱글벙글 백현이 키우는 개 이야기나 해댄다. 따뜻하다는 말도 했다. 세훈은 듣지도 않으면서 응, 응 대답하며 부러 찬열의 자동차 근처까지 그를 이끌었다. 평소 같으면 코트 주머니에 같이 손도 우그려 넣었을 테지만 지금은 저가 낄 자리가 아니다. 질질 끄는 영화는 딱 질색이다. 어떻게든 결말이 나길 바랐다. 지금 안 나서면 넌 아웃이야. 세훈이 속으로 수를 센다. 3, 2, 1.

막힘없이 내려간 창문에서 퉁명스런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어디 가?”




불쑥 등장한 찬열에 종대가 기겁하며 등을 세운다. 숨죽여 웃은 세훈은 움칠하는 어깨를 차 앞에까지 밀어버렸다. 여전히 주머니 속에 있는 손이 만류하듯 파닥거렸다. 앞으로 검은 차란 차는 전부 번호판부터 확인해야겠다고 다짐하며 종대가 마지못해 고개를 숙였다.




“어? 어, 지금 퇴근해?”


“어디까지 가는데, 타.”




됐다고 손사래를 쳤다. 차 안에 있는 이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것처럼 보였다. 안절부절 못하는 것 같기도 하고. 이래저래 곤란해져 세훈에게 어떻게 좀 해보라는 눈빛을 보냈다. 비소를 띤 채 그가 나서 차 문을 연 건 상상하지 않은 일이지만, 순식간에 벌어졌다.




“되긴 뭐가 돼, 얼어 죽겠어. 타고 가.”


“뭐? 야, 오세훈! 잠깐만!”




찬열은 똑똑히 보았다. 종대를 막무가내로 조수석에 태우는 남자가 저를 향해 눈을 찡긋거렸다. 한 때의 적이 오늘은 조력자였다. 미간을 구겼다가 곧 똑같이 윙크를 하는 것으로 답했다. 그의 코트에 종대의 손이 들어가 있던 건 영 못마땅했지만 지금 하는 양을 보니 두 손 뻗어 박수라도 쳐주고 싶다.

밀려들어와 앞으로 고꾸라지는 몸을 받쳐주었다. 당황해서 얼굴이 벌개진 종대가 눈을 피한다. 빙그레 웃으면서 손수 안전벨트까지 해주려고 팔을 뻗었다. 아냐, 아냐! 저가 하겠다고 저지하며 그는 말까지 더듬었다. 그리고 세훈이 문을 쾅 닫자마자 차가 움직였을 때엔 소리를 질렀다.




“야, 야! 뭐 하는 거야!”


“납치.”


“제 정신이야? 차 세워!”




빽빽거리며 창문에 이마를 붙였다. 멀어지는 세훈의 인영이 느긋하게 손을 흔들고 있다. 한 패였냐? 저 자식은 왜 쓸데없는 짓을 하고 난리야? 종대가 크게 한숨을 쉬니까 찬열이 입가에 걸린 웃음을 거둔다. 어두운 침묵이 시간을 타고 흘러간다. 예전처럼 창밖만 보고 있다가 히터의 온도를 낮추려 몸을 틀었다. 막힌 도로에 서 있는 불빛들이 유리에 번지고 우리는 목적지를 모른다.

찬열이 양다리야? 이죽거리면서 뽀얀 뺨을 손가락으로 찔렀다. 울컥. 터무니없는 장난에 진심으로 화가 난 게 자존심 상하지만, 종대는 있는 힘껏 찬열의 팔뚝에 주먹질을 했다. 이를 악물었으니 꽤 아플 텐데 그는 웃기만 한다. 한 대 더 맞았을 때에는 아야, 하고 엄살을 부리면서 종대의 주먹을 콱 잡았다.




“사랑해.”


“…….”


“사랑해.”


“그만해! 왜 헤어지고 나서 사랑한다고 지랄인데!”




붙잡힌 손을 빼려고 안간힘이다. 힘으로 안 되니까 힘줄 불거진 손등을 할퀴고 꼬집었다. 흘러넘치는 감정을 멈출 브레이크는 과부하로 작동이 멈추었다. 찬열은 핸들을 꺾어 차를 갓길에 세웠다. 마른 몸이 휘청거린다. 비상등이 깜빡이고 차에선 곧 빛이 새나왔다. 도담한 콧등 찡그리고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이 눈동자가 반드르르하다. 종대의 작은 손을 억지로 펴서 손가락 패인 홈에 입술을 묻었다.




“보고 싶어도 참고, 만나면 안 되는 거야? 헤어져서? 그럼…… 우린 아직 헤어지면 안 되는 거잖아.”




하필 너라서 다시 무너지고 흩어져 버린다. 가만히. 찬열이가 거친 입술을 손가락에 대고 기도하듯이 애걸하는 것을 보고만 있었다. 무기력한 저를 내치던 파도가 잔잔해지니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하면 괜찮아 지는 걸까? 세차게 퍼붓는 것들도 전부 가라앉는 건가. 천천히 시트에 몸을 기댔다. 눈을 내리깐 채 보드라운 손에 제 볼을 문지르는 찬열을 응시하는 눈가가 뜨겁게 달아오른다. 이별로 그에게 더 깊이 얽매였음을 깨달았을 때에는 이미 늦었지만, 얼마나 고되었는지는 잊히지 않는다. 뺨에 닿은 종대의 손에서 떨림이 전해졌다. 찬열은 그 울림을 멈추고 싶어 빈손으로 손목마저 부여잡았다. 울지 마.




“미안해.”




차라리 싫다거나 가라는 말이 나았다. 찬열은 저절로 알았다. 울음 섞인 미안하단 말로 모든 것이 끝났다는 것을.




“이제 진짜 아닌 거야?”


“안 될 것 같아.”


“요새 너무 좋았잖아, 이대로 지내다 보면……”


“불안하고 외로웠어, 사랑하는데도 그랬고 지금은 더해. 흔들린 거 맞아, 네 말대로 아직도 마음 있어, 그런데…… 이젠 너무 잘 알아.”




턱 끝에 고인 눈물이 주저 없이 낙하한다. 비겁해도 최선이다. 적어도 여기서 멈추면, 다시 아프지 않아도 될 테니까. 사랑한다는 이유로 박찬열에게 버림받던 나날은 지옥 같았다.




“아무렇지 않다가도 너랑 있으면 무서워. 우리가 언제 또 변할지, 그딴 거 생각하면 죽을 것 같다고, 찬열아.”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 한다. 이따금 종대가 눈물에 먹힌 숨을 들먹일 때마다 잡은 손에 힘을 주는 것밖에 할 수 없는 사람처럼 정적이다. 찬열은 기억에 없는 장면들을 헤아려 보고 있었다. 그저께, 그 전, 헤어지기 직전에도 저와 만난 날이면 주저앉아 울거나 잠들지 못해 고통스러워하는 누군가의 모습이다. 손을 잡고, 품에 안겨 웃다가도 갑자기 눈물을 흘려 당황시켰던 사람이 희미하다가 선명해지고 이내 멀어진다. 힘겹고 벅차다.




“괜찮은 줄 알았어…… 근데 아냐, 못 하겠어.”




종대를 보내버린 건 나다. 전부 멍청하고 바보 같은 내 탓이다. 허나, 마지막까지 이기적일 수밖에 없었다.




“기다릴게.”




눈물이 엉긴 눈이 사랑옵게 휘어진다. 비틀린 손이 찬열을 벗어난다. 차 문이 열리자 날 선 바람이 새어 들어왔다.

우리는 헤어졌다.































여기서 완결이면 '현명한 연애 보고서'가 제목이었을텐데요ㅎㅎ  

다음이 마지막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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