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내용으로 건너뛰기

[찬첸] 어리석은 연애 보고서 제 6장

찬열X종대


































“그 시간에 그럼 어떡해? 길바닥에서 얼어 죽게 내버려둬?”


“빙─신.”


“뭐? 빙신? 내가 형이거든!”




입이 댓 발 나온 종대가 잔에 담긴 소주를 훌훌 털어 마시자 그 앞에 마주한 남자가 코웃음을 쳤다. 잘 마시지도 못 하면서, 읊조리더니 습관처럼 안주거리를 앞 접시에 놓아준다. 차분히 내려앉은 검은 머리카락이 쌀쌀한 인상을 돋보이게 한다. 웃지 않으면 차가워 보이는 종대와는 달리 이 남자는 미소조차 냉소적이다. 뚜렷한 이목구비하며, 수려한 옷 태에 작은 선술집 곳곳에서 그들의 테이블로 시선이 날아들었다. 이미 익숙한 일인지 아니면 무신경한 편인지 아랑곳 않고 빈 잔에 술을 채운다. 그래서 어떻게 했어?




“소파에서 재웠지.”


“그게 다야?”


“아니.”


“했어?”


“오세훈! 하긴 뭘 해!”




얼굴이 불그죽죽해져서는 소리치는 종대에 농담이라며 웃었다. 이까지 보이며 천진하게 웃으니 아까보다 훨씬 선해 보인다. 세훈이라고 불린 남자는 어쩐지 안도한 듯 자세를 편히 고쳐 앉았다. 도톰한 체크무늬 셔츠의 소매 단추를 풀어 걷어 부치고는 계속하라고 말하는 대신 잔을 부딪쳤다. 종대는 턱을 괴고 한숨을 푹푹 내쉰다. 핀잔할 게 뻔해서 아무것도 말하고 싶지 않지만 속이 답답해서 내놓지 않으면 펑 터져버릴 것만 같다. 세훈은 저가 동성애자라는 것을 아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이다. 어머니, 변백현이라는 소꿉친구, 오세훈까지 겨우 세 명 중에서도 그와의 인연은 특별하다. 대학 교양 수업에서 우연히 같은 조가 되어 눈인사만 하던 사이가 하루아침에 뒤집혔다. 호기심에 처음 가 본 게이 클럽에서 딱 마주쳐버린 것이다.




‘오세훈! 각서 써, 빨리! 절대 다른 사람한테 절대 말 안 한다고!’


‘싫어요.’


‘내 인생 망하게 하려고 작정했구나.’


‘그만 따라와요, 진짜 확 소문 내버릴까 보다.’




며칠 동안 세훈을 따라다니며 귀찮게 했었다. 종대는 시도 때도 없이 꾸깃꾸깃 접힌 각서를 내밀었다. 어떤 날은 인주를 가져와서 제 손가락에 묻히려고 안간힘을 쓰고 어떤 날은 바짓가랑이에 매달렸다. 흰 종이에 아무렇게나 써 내린 각서에는 ‘김종대가 동성애자임을 발설할 시 100만원을 준다’라고 쓰여 있어서, 당시에 세훈은 그를 덜 떨어진 놈이라고 생각했다. 클럽에서 만난 지 일주일이 넘어갈 때였다. 그 날도 종대는 강의실에서 나오는 세훈을 붙잡고 각서를 꺼내 들었다. 짜증스러운 표정에 절로 주눅이 들었지만 청바지 주머니에 건 손가락을 물리진 않는다. 좋은 말로 할 때 놔요. 지나쳐간다. 무심하게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다가 그는 펜을 집어 던졌다. 펜은 정확히 세훈의 뒤통수에 맞고 떨어졌다. 진짜! 화를 내며 돌아본 세훈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누군가를 울린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너 정말 나쁘다, 나는 불안해서 잠도 못 자고……’


‘헉! 지금 울어요?’


‘밥이, 흐흑…… 안 넘어……’


‘아, 쓰면 되잖아요! 내가 말 안 해도 세상 사람들이 다 알겠네, 이렇게 지가 난리를 치면서.’


‘으헝!’


‘알았다고요! 지금 펜 들었다, 쓴다, 쓴다.’




그 뒤로는 뗄래야 뗄 수 없는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이성애자인 백현에게 이해시키기 어려운 것들을 세훈은 전부 받아준다. 어쩌면, 이만큼 나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도 없을 것 같다. 박찬열에게조차 말할 수 없던 것들을 그에게만은 쉬이 털어놓곤 했으니까.




“붙잡더라, 이제 와서.”




아직 사랑하냐고 묻는 말에 아니라고 하지 못 했어. 멍청하게 울어버렸어.




“이렇게 흔들릴 걸 알고 그랬겠지.”


“안 흔들려.”


“거짓말. 추풍낙엽이다, 낙엽이야.”


“불 난 집에 부채질 하냐?”




씩씩거리는 걸 보니 정곡이었나 보다. 제 얼굴에 삿대질하는 종대의 손가락에 콕 손가락을 맞대었다. 참 알기 쉬운 사람이다. 장난스러운 행동에 금세 입 꼬리를 올리더니 그래도 너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런 말 들어도 하나도 안 기쁘네요. 세훈은 맛없는 강냉이를 젓가락으로 쑤셨다. 어째 잘 잊어간다 싶더니 역시나. 세 달 만에 찾아온 구질구질한 전 애인 때문에 좋아하지도 않는 술을 억지로 밀어 넣고 있는 미련한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좋지 않다. 김종대는 아무것도 감추질 못 한다. 그 남자에게 돌아가고 싶어 죽겠다는 얼굴로 그러면 안 된다고 말한다. 아직 자신을 잊지 않은 것에 안도하는 얼굴로 그가 싫다고 말한다. 바보. 새삼 심연에 묻어 두었던 종대에 대한 감정을 꺼내 올린 세훈은 혀끝이 씁쓰름해서 홀로 술을 들이켰다. 알기 쉬워서, 어렵다. 박찬열이라는 사람에게 휘둘리느라 옆에 있는 절 봐준 적은 단 한 번도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아직도 사랑하잖아, 모르는 척하고 돌아가.”




꽤 묵직한 한 방을 날려놓고 안쓰러워진 세훈이 얼른 잘 익은 관자 하나를 종대의 접시에 올려 준다. 그렇게 상처받은 눈으로 보지 마요. 심술이 나긴 하지만 괴롭히고 싶진 않다. 종대는 세훈에게 짝사랑 상대이기 전에 늘 곁에 있고 싶은 좋은 사람이었다. 종대는 고개를 숙여 젓가락으로 앞 접시를 뒤적거릴 뿐이다. 세훈의 일침이 날카로웠다.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데 갑자기 뭐가 걸린 것처럼 목이 깔깔해서 입을 다물었다. 

괜스레 배시시 웃으며 화제를 돌린다. 요즘 만나는 사람 없어? 물으니 세훈은 심드렁히 고개를 저었다. 별로.




“너 인기 많잖아, 재지 말고 잘 찾아봐.”


“너나 잘하세요.”


“어쭈? 너도 내가 호구로 보이냐?”


“응.”


“너고 박찬열이고, 다 날 호구로 보는구나. 제 명에 못 살겠다.”


“좀 다르지 않나?”




장난스럽게 한 쪽 입매를 올려 웃은 세훈이 손을 뻗는다. 가만히 놓여있는 손에 깍지를 꼈다. 어쩌면 언제든 손을 잡을 수 있는 사람으로 옆을 지키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다.




“난 형 울린 적 없잖아.”




맞는 말이다. 그를 따라 미소를 띠었다.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 몇 달 동안 혼자 끙끙 앓던 것을 털어놓으니 그래도 속이 풀리는 것 같다. 적어도 세훈과 함께 있는 지금은 찬열을 떠올리면서 온갖 나쁜 감정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어서 편했다.




“잘 생겼지, 키 크지, 착하고! 왜 애인이 없나 몰라, 우리 세훈이.”


“그럼 형이 사귀던지.”


“그럴까?”




시답잖은 장난을 치며 희희낙락하는 두 사람. 아까부터 쭉 그들을 지켜보던 이가 있었다. 

저를 둘러싼 친구들은 그의 관심사에서 벗어난 지 오래다. 민석은 몇 번이나 메시지를 썼다 지우기를 반복했다. [지금 XX 이자카야에 김종대] 아니지, 아니지. [지금 XX, 나올래?] 안 돼, 여기서 싸움이라도 나면 어떡해! [요즘 김종대랑 어때?] 어떻긴 뭘 어때? 쟤한테 새 애인이 생겼잖아! 괜한 짓인가 싶어진 그는 곤란한 표정을 짓다가 핸드폰을 옆으로 밀었다. 자고로 남의 연애에는 끼어들지 않는 게 상책이다. 종대와 낯선 남자가 있는 안쪽 테이블은 여전히 화기애애한 분위기다. 저번에 찬열이 저 근처 테이블에 엎어져 울던 모습이 그 위로 겹쳐졌다.




‘나한테 간이며, 쓸개며 다 줄 것처럼 한다니까, 걘 이제 나 아니면 안 된대.’




너 아니면 안 된다던 김종대가 이제 다른 놈한테 간이랑 쓸개 빼주게 생겼다! 박찬열 바보 새끼, 있을 때 잘 했어야지. 크게 한숨을 내쉰 그는 다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김종대 새로운 사람 생겼나 봐]




침대에 드러누워서 농구 중계를 보고 있던 찬열이 급히 몸을 일으킨다. 심장이 바닥으로 쿵 떨어진 줄 알았다. 민석이 보낸 문자를 한참 동안 들여다본다.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잘못 읽은 글자가 없다. 씨발. 깨문 잇새로 욕지거리가 흘러 나왔다. 무릎을 모으고 쪼그려 앉아서 무슨 소리냐고 답장을 쓰는 꼴이 볼 품 없다. 급한 손놀림에 오타가 생겼다. 저의 참담한 심정이 고스란히 전해져 민석에게 우습게 보일 걸 알지만 고칠 새도 없었다. 그는 다시 한 번 메시지를 읽는다. 새로운 사람. 새로운, 사람.




“하? 하하……”




실성한 사람처럼 웃는 소리가 혼자인 집을 잠시간 채웠다. 휴대폰의 알림이 울리자 절로 침이 넘어간다. 갑작스럽게 티셔츠로 스민 한기에 기분이 나빠졌다.




[XX에서 술 마시고 있는데 같이 온 남자랑 엄청 친해 보여]




그 곳이라면 우리가 제일 좋아하던 선술집이다. 사귀기 전부터 같이 가던 곳이니까 어찌 보면, 파란만장한 연애사의 성지인 셈이다. 우연히 갔다가 분위기며, 음식의 맛이며 마음에 안 드는 점이 없어서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씩은 갔던 것 같다. 종대는 특히 그 집의 해물 볶음을 좋아한다. 오래된 종업원이 그가 주문을 하려고 손을 번쩍 들었더니 ‘해물 볶음하고, 어떤 걸로 드릴까요?’ 하고 물은 적도 있다. 방명록을 쓸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한 벽면에 유치하게 이름과 날짜를 쓴 적도 더러 있다. 우리의 이름이 나란히 새겨진 곳에 저가 아닌 다른 사람과 있는 종대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마음이 얼얼했다. 무슨 사이일까? 앞에서 그렇게 울어놓고 그새 애인이라니, 가당하기나 한 일인가?




“아냐.”




새 연인을 저희의 단골집에 데려갈 만큼 강심장일 리가 없다. 아니, 그렇게까지 생각할 필요도 없지. 저를 두고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조차 믿어지지 않는다. 친구일 게 뻔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찬열은 집은 어둠에 잠겼다. 다급한 걸음으로 집을 나선 그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 제 손톱을 긁어댔다. 잠옷 위에 웃옷만 걸치고 캡만 눌러 쓰고 나왔더니 털이 바짝 설 정도로 추웠지만 여유롭게 추위나 느끼고 있을 때가 아니다. 차에 오른 뒤로는 끊임없이 되뇌었다. 김종대는 내가 아니면 안 돼. 어디서 샘솟은 자신감이고 믿음인지 모른다. 선술집에 다다랐을 때에는 불안하던 마음마저 씻은 듯이 사라진 뒤였다.

근처에 차를 세운 찬열은 그제야 꾀죄죄한 행색을 다듬었다. 잠옷 바람으로 나온 것을 후회하며 종대의 친구에게서 어떻게 그를 넘겨받을지 고민했다. 넘겨받는다? 김종대가 무슨 물건도 아니고. 실소하고는 시트에 등을 기댄다. 미처 챙기지 못한 담배가 아쉬워 편의점이라도 다녀올까? 하다가 그만 두었다. 곧 차에 태울 전 애인이 담배냄새를 좋아하지 않는다.




“향수, 향수…… 아이, 씨……”




향수도 없고 방향제도 없고. 헤어져 있는 동안 흠뻑 베였을 냄새가 신경 쓰여 히터를 끄고 창문을 열었더니 바람이 차 안으로 들이닥친다. 살을 에는 추위에 금세 콧물이 다 났다. 열었던 창을 반쯤 올렸다. 차마 다 올릴 수는 없다. 차에 탄 종대가 코를 움켜쥐는 것보단 추위를 참는 게 나았다.




[왜 답장이 없어? 설마 자살했냐?]




민석의 메시지에 답장을 써 내리는 손가락이 덜덜거린다. 춥다.




[형, 상상력이 풍부하네]


[괜히 말해서 신경 쓰인다. 다 끝난 거지?]


[몰라. 김종대 지금 뭐해?]


[그건 알아서 뭐하게? 잘생긴 놈이랑 서로 계산한다고 사랑싸움 하시는데?]




친구여도 싫다. 사실, 진짜 친구인지 알 길도 없다. 종대의 친구에 대해 아는 게 없기 때문이다. 몇몇의 이름은 알지만, 그게 다다. 짙은 눈썹이 꿈틀거린다. 근데 여기 있는 거 어떻게 알았냐고 하면 뭐라고 하지? 지인이 알려줬다고 하면 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아는 거냐고 떽떽거릴 게 뻔하다. 종대는 찬열이 아무한테도 자신의 존재를 알리지 않았다고 굳게 믿고 있을 테니까.

그는 늘 우리 사이가 ‘비밀’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외면당하고 손가락질 받으면 자신을 버리게 된다나, 뭐라나. 이따금 술에 진탕 취하면 종대는 태어나서 제일 후회하는 일이 어머니께 동성애자임을 고백한 것이라고 말하면서 엉엉 울어댔다. 어떤 마음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아서 지금껏 그의 말을 따랐지만, 이제와 생각해보면 무작정 숨긴다고 될 일도 아니었다. 부모님께 말씀 드리지 않고, 주변에 알리지 않았어도 우리는 5년이나 연애를 했다. 또 울컥한다. 찬열은 마른 입술을 쓸었다. 어차피 헤어질 걸 알아서, 언젠간 저를 버릴 생각으로 만나왔다는 느낌이 지워지지 않는다. 아니, 돌려보낸다는 표현이 나으려나? 차라리 빼도 박도 못 하게 동네방네 얘기하고 다닐 걸 그랬다. 그랬으면, 조금 달랐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종대를 안심시킬 수 있지 않았을까? 떠나지 않을 거라는 말은 언제나 진심이었다.

그 때, 술집 문이 열렸다. 검은 동공이 속절없이 흔들린다. 상상과 다르다. 막상 두 눈으로 직접 종대 옆에 다른 사람이 있는 걸 본 찬열은 움직이지도 못 했다. 능청스럽게 종대를 데리러 왔다는 말을 하기는커녕 차 안에서 멍하니 그들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다.




“아……”




일순 뒤를 돌아본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착각인가? 그는 자연스럽게 종대의 어깨에 팔을 올리더니 귓속말을 했다. 다정한 모습이 눈에 박힌다. 핸들에 올린 두 손이 초라하게 버벅거렸다. 새로운 사람. 종대의 새로운, 사람.




‘나 아직 사랑하지?’


‘찬열아.’


‘대답해.’


‘싫어, 이제 그만 가.’




그 날,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는 대답을 들었으면 좋았을 걸 그랬다. 처절하게 찢긴 자만이 무참히 바람에 날려간다. 오늘밤에서야 깨달았다. 이제 난 아무것도 아니다. 그에게 아무것도 해선 안 되는 사람이다. 찬열은 그들이 시야에서 사라진 뒤에도 한참 동안 미동하지 않았다. 

우습다. 우습게도, 이런 상황에 놓이니까 확실해졌다. 너무 늦었는데.














[토요일 XX 앞에 박찬열 있었어]




의외로운 메시지다. 종대는 바로 세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받자마자 무심한 목소리가 그를 나무라는 것처럼 들렸다. 바로 전화하네.




“거기에 박찬열이 왜 있어?”




내가 어떻게 아냐고 퉁명스런 답이 돌아온다. 그렇지. 머쓱해서 실없이 웃어버렸다. 안부도 묻지 않고 너무 다급하게 본론을 꺼낸 게 민망해서 면이 홧홧하다.




‘오해했을 걸, 우리 사이.’




오해했다면, 그 애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화가 났을까, 아니면 슬펐을까? 자존심이 세서 우울해할지도 모른다. 먼저 애인을 만든 저를 괘씸하다고 생각하면서 이를 갈 수도 있다. 유치하게. 세훈이 제 얼굴을 보지 못하는 게 다행이다. 봤다면 미련하다고 구박했을 거다. 옆머리를 긁적거린 종대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해보려고 입 꼬리에 힘을 준다.




“……됐어, 신경 쓸 필요 없으니까, 이제.”


‘목소리 봐라, 그게 신경 안 쓰는 목소리냐?’


“오해했으면 이제 안 붙잡겠지, 뭐.”




전화가 끊어진 화면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자꾸 나쁜 유혹이 치미는 걸 참으려고 종대는 가는 손가락으로 휴대폰 옆면의 버튼을 반복해서 눌렀다. 전화해볼까? 실수로 눌렀다고 하고 어물쩍 그 날 얘기를 꺼내면…… 깊은 한숨이 도톰한 입술 새로 흩어진다. 왜 그가 오해하지 않길 바라고 있는지 몰라야 한다. 세상 사람들이 다 알아도 저는 그래야 된다.




“아아, 안 돼! 어떡해!”




무의식중에 그의 번호를 입력했다는 걸 깨달았을 땐 이미 통화 버튼을 누른 후였다. 가슴이 벌렁벌렁하다. 허둥지둥 핸드폰을 든 손이 형편없이 바들거렸다. 태연하게 말해, 김종대!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이오니 다시 확인하시고 걸어주시기 바랍니다. 지금 거신……’




하마터면 떨어뜨릴 뻔 한 것을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멍하다. 좀처럼 움직일 수가 없다. 못 박힌 듯 서 있는 종대의 한 쪽 귀로 끊임없이 기계의 결번 안내가 흘러들었다. 말 그대로 결번이다. 손가락 끝이 기억하는 찬열의 번호와도 이별이다. 그가 전화를 걸지 않은 한 이제 두 번 다시 예전처럼 통화할 일은 없을 것이다. 이미 알고 있는 일인데 왜 이렇게 충격적이지? 차단당했다. 창백하게 핏기가 가신 얼굴은 좀처럼 표정을 보이지 않는다. 다시 버려진 기분이다. 버려진 적 없지만 버려진 것 같은 그런, 울적한 기분. 저도 모르게 어깨를 작게 들먹였다. 암전된 화면. 일부러 번호를 바꾼 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가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미쳤나 봐.”




아직도 헤어진 연인의 편을 들 수 있다는 사실에 질렸기 때문이다. 귓가에 머무는 결번 안내를 애써 무시하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다행인 건가? 전화 걸었던 건 모를 테니까. 잘된 일이라고 곱씹으니 정말 잘된 것 같다. 실수로 전화할 걱정은 없어졌으니 말이다. 끊어내려 노력했던 찬열에 관한 생각이 손가락 실수 한 번으로 머릿속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오기 시작한다. 건조한 날씨 때문에 잔뜩 일어난 입술 가시를 만지작거리다가 또 불쑥. 헤어지기 전 몇 주 동안 키스를 한 기억이 없다. 쓸데없는 생각에 웃음이 난다. 

종대는 커피 잔을 든 채 나갈 일이 없던 베란다로 발을 내디뎠다. 오랜만에 머릿속이 온통 그의 이름으로 가득하다. 차가운 밤공기가 얇은 티셔츠 사이로 스민다. 소파에 앉아 여기에 서 담배를 피우던 등을 지겹도록 봐 왔다. 넌 무슨 생각을 했을까? 새삼스레 궁금해진다. 어이가 없다. 그럴 듯한 게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 찬열이에 대한 건 모르는 게 없다고 자부할 수 있었는데 다 허깨비였나 보다. 아무것도 모르겠다. 그가 진짜 내 애인이었는지도, 날 사랑해주었는지도 이젠 모르겠어. 마치 꿈이었던 것처럼 기억나는 게 없다. 야경이라고 이름 붙이기도 민망할 정도로 황폐한 도시가 눈동자를 채운다. 9층에서 훤히 들여다보이는 잿빛 공사장과 한 유리 빌딩 사이로 자동차 불빛이 어지럽게 엉켜 있다.




“여기 있었네.”




발에 채인 재떨이에서 뿌연 먼지가 얕게 일어 주변으로 흩어진다. 새까맣게 때가 타 눈이 보이지 않게 된 강아지 모양 재떨이. 우리가 서로의 집에 자연스럽게 드나들 게 되었을 때부터 여기 있던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놀랍지만 그 애가 흡연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건 만난 지 1년이 지나서였다. 담배냄새가 세상에서 제일 싫다고 말한 걸 계속 신경 쓰고 있을 줄 몰랐다. 줄곧 숨기다가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지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는지 새벽에 몰래 베란다로 나가 담배를 피우던 걸 들켰을 때,




‘깨, 깼어? 으, 앗! 뜨거워!’




얼마나 놀라던지. 그 때 담뱃불에 데인 중지의 흉터는 꽤 오래 그의 손에 남아 있었다. 굳이 끊게 할 생각은 없어 베란다에 이 재떨이를 놓아두었다.




‘미안해, 고마워.’


‘미안하고 고마워? 둘 중에 하나만 하시지.’


‘사랑해.’


‘어쭈? 줄이긴 해야 된다, 너!’




담배냄새가 짙게 베인 입술을 늘려 웃는 게 참 예뻤다.

보기와는 달리 단단한 철제 난간에 허리를 기대고 식은 커피를 한 모금 삼켰다. 별 하나 갖지 못한 오늘의 하늘처럼 쓸쓸하다. 조금 슬퍼지려 한다. 헤어지자고 하지 않았다면 지금 우리는 함께일까? 여느 날처럼 나는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너는 여기에서 담배를 피우고. 만약에. 어쩌면 우린 사랑이 끝난 줄도 모르고 그렇게 서로의 곁에 있었을지도 모른다. 언제까지고. 차라리 그게 나았을까?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손가락으로 서둘러 지워버렸다. 눈시울이 뜨겁고 눈물도 뜨겁다. 울렁거리는 가슴팍을 꾹 눌렀지만 소용이 없다.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오는 울음이 베란다 바닥으로 떨어진다.




“흐윽……”




이 아픔을 들을 사람도, 보는 사람도 없는데 종대는 주저앉아 무릎 위로 얼굴을 묻었다. 싫어. 전부 다 사라져버렸으면 좋겠어. 내가 널 사랑했던 게 아니면 좋겠어. 바늘이 가슴을 깊숙이 찌르는 것처럼 아파서 몸을 힘껏 웅크렸다.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이므로 다시 확인하시고……’




아직도 날 상처 입힐 수 있는 그 사람이 미워서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연애 한번 답답하게 하는 찬체니들ㅋㅋㅋㅋ 그래서 제목도 어리석은 연애 보고서입니다.

최대한 현실적으로 쓰려고 하다보니 어쩔 수가 없나 봅니다.

늘 기다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완결이 늦어져서 죄송스러울 따름입니다ㅜㅜ

금방 다시 뵐게요♥

















강나 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

댓글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