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 bananas : 머리가 홱 돌다, 터무니없는 짓을 하다








꾸벅꾸벅.  빳빳한 재질의 남색 티셔츠에는 작은 주머니가 달려있다.  찢어진 청바지에 흰 스니커즈.  길이를 주체하지 못해 책상 앞으로 뻗어 나온 다리의 소유자는 학생들 사이에 우뚝 솟은 것도 잊은 채 졸고 있었다.  이질적인 회백색 머리카락이 에어컨 바람에 흩날린다.




“리에프, 일어나.”




반쯤 뜨인 눈이 절 깨운 친구를 쳐다보는가 싶더니 다시 스르륵 감겼다.  수업 끝났어!  책상이 끌리는 소리,  여러 개의 목소리, 갑자기 와 닿은 소음들에 그제야 눈을 뜬 남자는 크게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켠다.  눈가에는 아직도 잠이 어려 있다.  의자에 걸쳐놓았던 셔츠를 어깨에 걸치고 주섬주섬 가방에 전공 서적과 노트북을 집어넣다가 인상을 팍 찌푸린다.  아이고, 머리야.




“리에프가 많이 마시긴 했지, 기억은 나냐?”


“말도 마, 죽겠어. 누가 나 때렸어? 팔이 왜 이렇게 아프…”


“어? 아마 야쿠 선배일 걸?”


“맞아, 네가 안 떨어지니까 계속 때리던데.”


“야쿠? 그게 누군데?”


“그렇게 공개적으로 고백해놓고, 이제 와서 누구냐고?”


“그런 취향인 줄 몰랐어, 리에프.”




고백?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리에프를 제외한 모두가 한껏 깔깔거렸다.  볕이 일렁이는 교정이 활기를 띈다.  귀엽다느니 잘 어울린다느니 저희들끼리 영문 모를 소리만 해대는 통에 머리가 더 지끈거린다.  리에프는 속눈썹을 간질이는 머리칼을 신경질적으로 쓸어 넘겼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친구들 중 하나가 핸드폰을 그의 코앞으로 들이밀었다.  이제 기억하겠냐고 묻는 끝은 거의 들리지 않았다.  화면에는 어제의 하이바 리에프와 낯선 사람이 함께 찍힌 사진이 떠 있는데, 이건 그냥 사진이 아니다.  그걸 뚫어져라 쳐다보는 얼굴이 점점 새파랗게 질려간다.  그 속에 있는 저는 지그시 눈을 감은 채 두 손으로 밝은 갈색 머리카락을 부여잡고 입을 맞추고 있었다.




“난 동영상도 찍었어.”




잠깐만!  말릴 새도 없이 재생된 영상이 그를 희미한 기억 속으로 되돌리기 시작한다.  어제는 리에프가 친구들과 함께 입부한 답사 동아리의 신입생 환영회였다.  여행 동아리라 인기가 많을 줄은 알았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은 인원이 넓은 선술집을 가득 채웠다.  동아리 회장인 쿠로오 테츠로가 긴장한 신입생들에게 ‘뜸한 놈들까지 전부 와서 그래.’라고 느물거렸지만 어려운 자리인 것만은 변함이 없다.  자기소개를 한 뒤에는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자연스레 몇 차례나 술을 받아 마셨고 두어 시간이 지나자 리에프는 제 정신이 아니었다.  그 친구들은 말할 것도 없고.  느지막이 2차로 자리를 옮길 때에는 반 이상이 집으로 돌아갔지만 정신만 없을 뿐이지, 겉보기에 멀쩡한 리에프는 선배들에게 발목을 잡혔다.  선선한 어둠이 내려앉은 길.  무거운 걸음으로 소란스러운 무리를 따르는 그에게 누군가 초콜릿 우유를 내밀었다.




‘괜찮은 거 맞아? 너 눈 풀렸어, 이거라도 마셔라.’




리에프가 멀뚱멀뚱 내려다보기만 하니까 익살맞게 눈을 휜다.  키들키들 웃으며 주머니에 우유를 넣어준 이가 앞으로 먼저 나아갔다.  오색 간판의 불빛이 그의 등으로 번져간다.  누구지?  청재킷 주머니에 삐죽 나온 우유 갑의 모서리를 손톱으로 긁었다.  발그레해진 얼굴에는 멍청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열댓 명 정도가 남은 자리에서 쿠로오는 이리저리 품을 팔다가 눈에 띄는 장신의 후배에게로 다가갔다.  또 시작이네.  비죽 올라간 그의 입매를 보며 몇몇이 고개를 젓는다.  쿠로오가 이런 자리에서 추억이라고 불리는, 잊지 못할 이야깃거리를 만드는 게 자신의 역할이라고 굳게 믿고 있음을 아는 이들이다.  이번 환영회 타깃은 저 멀대같은 녀석인가?




‘괜찮은 거야?’


‘네, 네. 쿠로오 선배! 쿠로오 테츠로, 이름 다 기억한다고요.’


‘하하, 웃긴 놈.’




은근슬쩍 옆에 앉아 술잔을 내밀었다.  이미 해롱해롱한 후배는 해맑게 웃으며 넙죽 받아 마신다.  잘 마신다며 추켜세우자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다가 병을 쓰러뜨릴 뻔 했다.  학교생활이며 동아리에 대해 이것저것 알려주던 쿠로오가 친근하게 리에프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있잖아, 리에프.




‘동아리에 누구 마음에 드는 애 있어? 예쁜 사람 있는 것 같아?’


‘음… 있어요!’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두리번거리다가 우렁찬 목소리로 수긍한 그의 뒤쪽에서 쿠로오가 주목하라는 듯 급히 손짓했다.  마치 대어를 낚은 어부처럼 신이 난 표정이었다.  어찌 보면 대어가 맞다.  아늑한 불빛 아래, 처음 장소에서와 달리 차분히 이야기를 나누던 이들이 못 말린다며 웃어댔다.  너무 쉽게 마수에 걸려든 후배가 귀엽기도 하고 가엾기도 하다.  그 속에는 야쿠 모리스케도 함께였다.  앞에 있던 과자를 집어 쿠로오 쪽으로 던진 그는 ‘작작 해라, 인간아.’ 핀잔했다.  쿠로오는 이에 아랑곳 않고 리에프의 귓가에 낮게 속삭인다.




‘그게 누군데?’




녹음이 우거진 눈동자가 나릿나릿 움직이더니 한 곳을 응시했다.  어라?  느긋하게 마른안주를 뜯고 있던 야쿠는 일순 퍼지는 정적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려 있었다.  그리고 기다란 손가락 하나가 정확히 제 얼굴을 가리키고 있는 게 보였다.




‘저-기, 저 짧은 머리… 진짜 귀여워, 너무 작고… 진짜 작아, 요만해.’




요만하다고 말하면서 리에프는 야쿠를 가리키던 손가락을 둥글게 말고는 베시시 웃었다.  그 동그라미 안에 갇힌 야쿠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진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쿠로오를 비롯한 모두가 급히 입을 틀어막거나 고개를 돌렸지만 끅끅 터져 나오는 웃음이 숨겨질 리 없다.  커다란 눈을 부릅뜬 야쿠가 그들을 향해 웃지 말라고 경고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와중에 턱을 괸 리에프는 이젠 대놓고 야쿠에게 추파를 던지고 있었다.  여전히 허공에 동그랗게 떠 있는 손가락 사이로.




‘아까 우유… 줄 때? 되게 예뻤어.’




두 뺨에 화르륵 불이 붙는다.  저 바보가!  초면인 후배가 첫눈에 반해준 덕분에 웃음거리가 된 야쿠는 꽉 쥔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야쿠 선배, 대단한데요?  그 주먹은 이죽거리는 타케토라의 머리를 세게 쥐어박는 데에 쓰였다.  그만 웃어, 이 새끼야!  거의 뒤로 드러눕다시피 하고 배를 부여잡은 쿠로오를 어떻게 죽일지 고민하느라 야쿠는 타케토라가 리에프에게 무언가 속삭이는 것은 보지 못 했다.  벌떡!  리에프가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반사적으로 위험 신호를 감지한 모양인지 촬영을 하는 주변 사람들에게 욕을 퍼붓고 있던 야쿠도 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용수철처럼 몸을 일으켰다.  키가 큰 줄은 알았지만 성큼성큼 다가오니 가히 위압적이다.




‘뭐, 뭐야?’


‘찜.’




누구도 예상치 못한 도둑질은 눈 깜짝할 새에 대담하게 벌어졌다.  이상한 일이다.  팔을 올릴 틈조차 주어지지 않은 찰나의 시간이었는데 아주 느리고 조용히 흘러갔다.  그래서 야쿠는 모든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제 머리를 부드러이 움켜쥔 커다란 손, 끝내 감기는 몽롱한 눈, 왼쪽 입가에 닿은 입술까지.




“어제 진짜 웃겼지?”


“대화방에 동영상도 올라왔더라.”


“야쿠는 좋겠다, 파릇파릇한 신입생이랑 뽀뽀도 하고-”




신이 나서 떠들어대는 이들 때문에 다시금 그 순간이 선명해졌다가 흐려진다.  옆에서 낄낄거리는 타케토라의 발을 꾹 밟아버렸다.  그가 야쿠 선배는 인기가 많으니 빨리 점찍어야할 거라는 헛소리만 하지 않았어도 입술을 빼앗기진 않았을 거다.  방바닥에 내팽개친 땀으로 젖은 티셔츠가 떠올라 진저리를 쳤다.  뽀뽀 이후에도 리에프에게 어지간히 시달렸기 때문이다.  딱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이지, 건방지게 머리는 계속 쓰다듬지, 체대라더니 힘은 어찌나 센지 누가 당겨도 꿈쩍도 안 하더라.  망할 신입생.




[안녕하세요? 신입생 하이바 리에프입니다. 어제 일은 정말 죄송합니다. 기억이 잘 안 났어요.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은데 시간 내주실 수 있나요?]




뽀뽀하고 죄송하고 북 치고 장구 치고 혼자 다 해먹는구나.  메시지 끝에 귀여운 캐릭터가 눈물을 글썽거리며 두 손 모아 비는 이모티콘이 연달아 전송되었다.  귀가 간지러웠는지 때마침 도착한 문자에 헛웃음을 지은 야쿠는 [식사는 무슨. 나중에 보면 아이스크림이나 사줘]라고 답장했다.  오래도록 놀림 받을 걸 생각하면 괘씸하지만, 취중 실수이기도 하고 그 애 눈에 내가 어여쁘다는데 별 수 있나?











리에프가 아이스크림을 살 기회를 얻은 건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후다.  교수님의 개인 사정으로 수업이 한 시간이나 일찍 끝났다.  이 수업을 같이 듣는 친구는 자체 휴강을 해버려서 리에프는 한적한 교정의 나무 그늘 아래 벤치에서 홀로 여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금방 더워지겠네.  온기가 베인 바람이 흰색 티셔츠로 파고든다.  그 때,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신나는 팝송을 배경으로 한 남자가 불쑥 시야로 들어왔다.  짧은 머리카락이 햇빛에 반짝거린다.  얼굴이 잘 안 보여도 눈대중만으로 알아챌 수 있었다.  맞은 편 인도에 키만큼 쌓은 책 꾸러미를 아슬아슬하게 들고 가는 사람이 저가 술김에 입술을 훔쳐버린 선배라는 걸.  드디어 만났다!  사진으로 수없이 마주했던 이다.




“주세요, 제가 들게요!”


“어어? 너는…”




가뿐히 야쿠의 짐을 빼앗은 리에프는 어색해서 고갯짓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가까이 다가서니 둘의 체구 차이가 여실하다.  가슴께 쯤 오려나?  슬쩍 가늠해보다가 저를 올려다보는 눈망울과 맞닥뜨렸다.




“방금 작다고 생각했지?”




살짝 고개를 끄덕여 수긍하자 그는 ‘아니라고 대답했어야지.’라며 솜주먹으로 어깨를 두드린다.  깨끔하게 웃는 얼굴에 삽시에 마음이 편해졌다.  환영회 이후 어딜 가나 그 날의 사건이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바람에 리에프는 슬슬 곤란하던 차였다.  동아리 친구들이나 선배들의 인사는 대개 ‘야쿠는 어디에 두고 혼자야?’ 따위고, 뽀뽀 사진을 저장하지 않은 이가 없고.  저야 원래 그런 것에 굴하는 성격이 아니라서 상관없지만, 야쿠가 제대로 인사조차 나눈 적 없는 후배와 엮여 같은 괴롭힘을 당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 미안해서 밤마다 이불을 뻥뻥 걷어차야 했단 말이다.




“너 아니었으면 큰 일 날 뻔 했어, 앞이 안 보였거든.”




리에프는 옆에서 총총 걸음을 걷는 야쿠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휘청거리시더라고요, 놀리듯 말했더니 창피한 듯 뺨을 긁적거린다.  불퉁하게 까불지 말라고 하는데 건방지게 웃음이 났다.  술에 취해서 한 짓이긴 하지만 많은 이들 중에 왜 이 사람이었는지 알 것 같아서다.  두런두런.  살가운 어투와 몸짓이 그를 둘러싼 공기를 데우고 있어서 리에프마저 따뜻해지려 한다.




“오늘은 아이스크림 사게 해주실 거예요?”




거, 참 끈질기네!  핀잔하며 야쿠는 계단 앞에서 책 더미를 고쳐 안는 리에프의 등허리에 살짝 손을 얹었다.  야쿠 딴에는 그가 넘어지기라도 할까 걱정이 되어서 그랬지만, 글쎄?  리에프를 놓치지 않으려 꼬옥 붙잡은 걸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죄송해서 그래요, 엄청 화나셨을 것 같았어요.”


“아니거든! 그랬으면 지금 너랑 이러고 있겠냐? 설마 내가 계속 화나있는 줄 알았던 거야?”


“다들 피곤하게 할 것 같아서… 그, 음… 제가 뽀뽀해버려서.”


“하하, 직접 말하기 부끄럽지도 않냐? 별로 신경 안 쓰니까 걱정 마.”




어쩐지.  지난 일주일 동안 하루에 한 번 꼴로 아이스크림을 언제 먹겠냐고 묻더니만 어지간히 마음을 쓰고 있었나 보다.  야쿠는 메시지를 받을 때마다 ‘진짜 날 좋아하나? 미친 거 아냐?’하고 질색했던 게 떠올라서 조금 미안해졌다.  리에프라고 불러도 되냐고 묻자 급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은발의 뻗친 한 쪽 끄트머리가 눈에 들어서 피식 웃음을 흘린 야쿠가 앞서 계단 위로 올랐다.  그제야 눈높이가 맞는다.




“그럼 리에프, 도서관 갔다가 아이스크림 먹으러 가자. 시간 돼?”


“네! 돼요!”


“이것도 인연인데 앞으로 잘 지내보자고, 아, 그리고…”




여기 뻗쳤어.  야쿠는 팔을 들어 리에프의 머리카락을 정리해주고는 돌아섰다.  뒤늦게 눈썹을 찡그린 리에프는 불현듯 스미는 더위가 태양 때문인지 야쿠 때문인지 헷갈린다.  술에 취한 것도 아닌데 웃음기 서린 작은 얼굴이 이렇게 귀여워 보일 줄이야.  의외로운 일이었다.











수업이 끝나면 친구들과 동아리방으로 우르르 몰려가는 게 리에프의 일과 끝이다.  굳이 출석 도장을 찍을 필요는 없지만 가야 할 이유라면 차고 넘친다.  그 곳에 있는 라커에 무거운 전공서를 보관해야하고 혼자 때워야 할 저녁 식사나 술자리를 함께 할 누군가를 찾기도 쉽다.  어서 와.  쿠로오를 비롯한 선배 몇몇은 카드 게임이 한창이다.  리에프는 두리번거리다가 탁자에 앉아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는 야쿠를 발견했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야쿠 선배, 어디에요? 동아리방에 있어요?] 라고 보낸 문자에 답장이 없었다.  라커에 아무렇게나 책을 밀어 넣으면서 힐끔거렸지만 이쪽을 보지 않아 인사도 나누지 못한 참이다.




“리에프, 이것만 넣어줘. 내 거는 모형 넣었더니 끝났어.”




그러든가.  순순히 제 책 두어 권을 꺼내고 친구의 것을 대신 넣어 주었다.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자취를 하고 있는 리에프에게 라커는 그리 간절한 것이 아니다.  시끄러운 이들 사이에서 빠져나온 그는 슬그머니 탁자로 가 책을 놓으며 야쿠의 맞은편을 차지했다.  왔어?  뒤늦은 인사를 건네면서 살랑살랑 팔을 흔든다.  흰색 캡에 벙벙한 분홍 티셔츠가 무척 잘 어울린다.




“문자 보냈는데, 못 봤어요?”


“응, 핸드폰 저쪽에 충전시켜놨어. 뭐라고 보냈는데?”


“그냥, 어디 있나… 뭐해요?”


“필기한 거 정리, 안 그러면 나중에 못 알아봐서.”


“와, 선배 진짜 악필이야! 공부 못 하죠?”




죽을래?  탁자 아래로 발길질이 넘어왔지만 이미 예상했던 일이다.  피했지롱!  장난스럽게 웃으니 야쿠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젓는다.  그의 노트 가까이에 턱을 괸 리에프는 움직이는 펜을 따라 공연히 눈을 굴리다가 넌지시 묻는다.  집에 언제 갈 거예요?  대답에 뜸을 들이자,




“저녁 같이 먹으면 안 돼요?”




입술을 모아 쫑쫑거린다.  이렇듯 덩치와 안 맞게 아양을 부리면 야쿠는 꼼짝을 못하겠다.  귀여운 자식.  그저 손으로 그의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릴 수밖에.  막 친해질 때에는 과묵한 줄 알았는데 지금은 하는 짓이 딱 사람한테 들러붙기 좋아하는 애다, 애.




“이따 되는 애들끼리 한 잔 하기로 했어, 같이 가자.”


“선배들만 가는 거 아니에요?”


“아닐 걸? 무슨 상관이야, 오늘은 진탕 마실 테니까 데려다 줘.”




너만 믿는다.  휘어지는 눈 꼬리가 희한하다.  선배가 웃으면 덩달아 기분이 들뜨고 마니까.  근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우리는 부쩍 친해졌다.  동아리방에서 거의 매일 마주친 덕이기도 하지만 전적으로 리에프의 노력이 컸다.  미안하다는 핑계로 야쿠가 좋아하는 간식을 사다 바치는 건 예삿일이거니와 우산이 없다느니 학생증을 두고 와서 도서관 출입이 어렵다느니 하는 갖은 이유로 야쿠를 찾고 주말엔 뜬금없이 심심하다는 메시지를 보내기도 하고.  특히, 요새는 서로의 집이 가깝다는 걸 알게 되어서 같이 귀가하는 일이 잦다.  리에프는 괜스레 필사에 바쁜 작은 손을 콕콕 건드렸다.  하지 말라고 허공에 휘둘리는 손과 장난하는 것조차 즐거운데 다른 건 오죽할까?  밥을 먹고 함께 걷고 장난을 치는, 그의 곁에 머무르는 시간이 좋다.  그냥.  왜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아마 야쿠 모리스케가 좋은 사람이라서 그렇겠지.  유쾌하고 귀엽게 생긴데다가 다정하기까지 해.  문득 어제 있었던 일이 떠오른다.




‘야쿠 선배, 진짜 좋지 않아? 은근히 잘 챙겨주고 옷 입는 것도 귀엽고.’


‘맞아, 저번에 어려운 과제 있다고 했더니 자기 한 적 있다면서 자료 주셨거든? 근데 중요한 부분마다 ‘참고해’라고 쓴 포스트잇 붙어있는 거야, 감동했잖아.'


‘아, 귀여워! 친해지고 싶은데 먼저 말 걸고 그러진 않더라.’


‘여자 친구 없다고 했지?’


‘들은 적 없어. 아, 남자 친구라면 여기 있잖아.’




바로 앞자리에 앉아 한참 야쿠에 대해 재잘거리던 여자애들이 리에프를 가리키며 까르르 웃었다.  평소 같으면 장난스럽게 내 거니까 건드리지 말라든가 헤어졌으니 마음대로 하라던가 동조해 주었을만한데 그는 어쩐지 뚱한 얼굴이다.  시끄러워.




‘리에프, 농담 아니고 좀 도와줘, 선배랑 친해질 수 있게. 우리 중엔 네가 제일 친하잖아!’


‘싫-어, 귀찮게 하지 마.’




너무해! 하고 칭얼거리는 목소리가 듣기 싫어서 휴대폰을 들어 시선을 차단해버렸다.  조급해진다.  앞에 놓인 화면에 빠르게 메시지를 작성했다.




[수업 있어요? 저 오늘 점심 혼자 먹어야 되는데ㅠㅠ]


[왕따냐? 수업중이야, 1시에 끝나. 너무 늦지 않아?]


[기다릴게요!]




친구들한테도 선배가 좋은 사람인 건 달갑지 않은 일이다.  호시탐탐 친해질 기회를 노릴 거라고 생각하니 짜증스러워졌다.  결국, 어제 점심은 보란 듯이 야쿠와 먹었다.  우습게도, 질투인 것 같다.  더위라도 먹은 게 분명하다.




“리에프?”




갑자기 조용하기에 고개를 들자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후배가 보인다.  삐죽삐죽.  이 애는 웃지 않으면 인상이 차가운 편이다.  너 지금 무시무시한 얼굴이야, 라며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당겨 제 흉내를 내는 야쿠의 행동에 언제 그랬냐는 듯 리에프가 함소한다.  안심한 야쿠는 다시 필기에 집중하려다가 저만 기다리는 것처럼 가만히 앉아 있는 게 또 신경이 쓰인다.  저리 가서 놀라고 해보지만, 싫단다.  이러니 친구들이 리에프를 ‘야쿠 껌 딱지’라고 지칭하는 것에도 반박불가.  애인이라고 부르는 것보단 껌 딱지가 나으려나?  어쨌든 나를 좋아해주고 잘 따르는 후배가 싫을 리 없다.  얼굴도 번드르르해서 보고 있으면 심심하지 않고.  무슨 말이라도 걸어야 할 것 같아서 옆에 둔 책들은 왜 안 넣었는지 물었다.  야쿠의 필통을 뒤적거리면서 심드렁히 라커 공간이 부족하다고 대꾸한다.  필요하면 3번에 갖다 넣어.




“3번이면, 맨 아래 칸이네요. 키가 작아서 거기 쓰시는 거예요?”


“… 쓸데없는 소리하면 죽는다!”




한 대 얻어맞기 전에 몸을 일으켰다.  허리를 잔뜩 굽히고 야쿠의 캐비닛에 책을 넣는 그를 발견한 쿠로오가 뒤쪽에서 이기죽거린다.




“오, 이젠 라커도 같이 쓰는 거야?”




그 옆에 있던 다른 이들도 한마디씩 거들었다.  지겨울 정도로 자주 듣는 소리들이어서 리에프는 그저 씨익 웃고 만다.




“어제 학생 식당에서 단둘이 있는 거 봤어.”


“아무리 공식 커플이라지만, 너무 붙어있는 거 아니야?”


“얏쿵은 우리 동아리의 엄마 같은 존재니까 독점하는 건 곤란해.”




선드러지게 웃으며 멀찍이서 지켜보던 야쿠가 짓궂게 저희를 놀려대는 무리에 지우개를 집어던졌다.  웃기시네!




“그럼 쟤가 찜하기 전에 말렸어야지, 난 이미 리에프 거라고.”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띄우는 데 크게 한 몫을 한 그의 너스레에 다들 얄궂은 야유를 보내고 웃고 떠드는 와중에 리에프는 끼어있지 않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여버렸다.  뻐근해진 목덜미에 손바닥을 얹자 열기가 타고 오른다.  그에게만 이르게 다다른 여름날에 정신을 못 차리겠다.  그리고,




“놔아! 이 거인아, 안 가… 안 갈래…”




몇 시간 후에 다른 의미로 정신을 못 차리는 야쿠를 어깨에 들춰 업게 되었다.  리에프는 제 등을 때리는 우악스러운 주먹질에 혀를 내둘렀다.  이제 못 마시겠지? 하며 야쿠를 약 올린 끝에 고주망태로 만든 범인을 흘겨보자 너라도 멀쩡한 걸 다행으로 알라는 눈빛이 돌아온다.  쿠로오 선배는 악마야.




“리에프, 야쿠가 취했다고 허튼 짓 하면 안 된다-”


“저는 안 취했거든요.”


“그럼, 부탁한다! 주말 잘 보내.”




선선한 밤바람이 땀방울 맺힌 이마를 쓸어준다.  어둠에 번지는 가로등 불빛 아래를 지나는 두 사람과 하나의 그림자.  선배, 자요?  엉거주춤 멈춰 서서 축 늘어진 몸을 겨우 고쳐 업었다.  목덜미로 문뱃내 베인 더운 숨이 닿는다.  두근두근.  고요한 새벽을 두드리는 심장 소리에 조마조마해진 리에프의 걸음이 빨라진다.  언제나 지나치기만 했던 집에 발을 들인 그는 야쿠의 몸을 조심히 끌어 침대에 눕히고 나서야 제대로 숨을 들이킬 수 있었다.  옆에 걸터앉아 둘러보니 여느 자취방과 다를 게 없이 단출한 살림이다.  다만, 그 주인이 야쿠라는 것만으로 특별해보일 뿐.  코가 떨어져 나간 미키 마우스 슬리퍼가 왜 이렇게 깜찍한지 모를 일이다.  눈을 감은 채 팔에 감기는 이불을 끌어당기려고 애쓰는 야쿠를 실컷 구경하다가 일어났다.  가야지.  얇은 이불을 가슴께까지 덮어 주었다.  이제 돌아서면 되는데 다리가 움직이질 않는다.  꼼지락거리는 손에서 도담스러운 입술까지 눈길을 옮기는 데에는 몇 초도 걸리지 않았는데 말이다.  취기가 오르기엔 너무 늦었다.  그런데도 리에프는 어느새 야쿠의 손바닥에 제 손을 맞대고 있었다.  픽 웃으면서 역시 작다고 중얼거리고 볼을 꾹 눌러도 깨질 않으니 욕심이 커진다.  자꾸 입술로 가는 시선을 잘라낼 수가 없다.  에라, 모르겠다!  술 때문이다.  아니, 이건 전부 선배 탓이다.  바싹 마른 제 입술도, 앞으로 기울어지는 몸도 아무것도 이기지 못 했다.  맞물린 입술이 녹녹하고 보드랍다.  잘 기억나지 않는 첫 입맞춤에서도 이런 느낌이었을까?  숨이 멎을 것 같아.




“으응…”




눌린 입술에서 흘러나온 앓는 소리에 퍼뜩 정신이 든 리에프는 도망치듯 집을 빠져나왔다.  신발장과 문에 몸을 부딪쳤다는 것도 모를 만큼 머릿속이 새하얗다.  지나치는 풍경이 모양을 갖추기 전에 운동화는 새로운 땅을 밟았다.  다리에 힘이 풀릴 때까지 내달린 그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붉다.




“헉, 헉… 미쳤어…”




목이 메고 숨이 차서 새어나온 목소리가 탁했다.  쿠로오 선배, 죄송합니다!  허튼 짓 해버렸어요!











만나기로 한 곳에 먼저 나온 야쿠가 하품을 하고 있는 게 보인다.  선배도 일어난 지 얼마 안 됐구나.  [리에프, 밥 먹자]  오후의 끝자락에 깨니 도착해있는 메시지에 부리나케 나온 참이다.  리에프가 가까이 다가가 속은 괜찮아요? 묻자 아무렇지 않게 죽을 것 같다며 팔에 이마를 기대온다.  일부러 건너편에 있는 신호등을 쳐다보았다.  저지른 짓이 있어 당분간 똑바로 쳐다보진 못 할 것 같다.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새벽에 있었던 일이 선배의 기억 속에는 없나 보다.  하긴, 그의 잠결이었으니까.  경직한 채로 멍하니 있었더니 곧 너야말로 괜찮은 거냐고 셔츠 소매가 콱 당겨졌다.  얼떨결에 눈을 마주쳐 버렸다.  푸하하!  퉁퉁 부은 눈두덩과 베개 자국이 난 뺨을 보자마자 하릴없이 웃음이 터진다.  리에프는 손을 뻗어 그의 부루퉁한 얼굴을 만지려다가 용기가 부족해 급히 주먹을 쥐었다.  어쩌면 좋지?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는 얼굴이다.  야쿠 선배가 좋다.  너무너무 좋아.




“야쿠 선배!”




손 부채질을 하는 야쿠와 발맞추어 걷던 리에프가 대뜸 입을 뗐다.




“화학과니까 혹시… 사랑의 묘약 같은 것도 만들 수 있어요?”


“뭐? 바보야, 화학이 무슨 마법인 줄 알아?”


“쳇, 시시하다.”


“왜, 주고 싶은 사람이라도 생겼어?”




으쓱.  어깨를 들먹이더니 ‘뭐 먹을까요?’라고 중얼거리면서 주의를 돌린다.  왠지 그 속이 빤한 것 같은 야쿠는 킬킬거리면서 리에프의 등허리를 팡팡 두드렸다.




“나한테 그런 걸 먹일 거라면 사양할게, 차라리 치킨 카레를 사줘.”


“먹고 싶으면 그냥 그렇다고 하지, 아무데나 갖다 붙이기는.”


“맞을래? 욕은 속으로 해라.”


“밥 먹고 집에서 영화 볼래요? DVD 있는데… 맞다, 선배가 좋아하는 수입 맥주도 있어요!”


“왜, 또 취해서… 아니, 그, 그래! 팝콘도 사고! 아, 배고파! 빨리 가자!”




다급하게 리에프를 앞질렀다.  새벽녘을 이고 우당탕 뛰쳐나가던 뒷모습이 자꾸 떠오르는데도 태연한 척을 하는 것은 더 이상 무리다.  야쿠의 얼굴로 번진 석양은 아주 뜨거운 색이었다.  선배, 같이 가요!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멀지 않다.  쉬이 따라잡혀 옆을 내주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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