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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에야쿠] 순정의 가치 17

섹스피스톨즈 AU
























휘영청 밝은 보름달이 뜬 밤이다. 초저녁부터 집이 분주했다. 요즘 들어 이 집은 손님맞이가 잦다. 틈만 나면 오시는 야쿠의 어머니와 주치의 요코는 물론이거니와 최근에는 아리사도 자주 드나드는 편이다. 오늘은 집들이라는 명목 하에 쿠로오와 켄마가 오기로 한 날이다. 무거워진 몸 때문에 외출을 꺼리게 된 야쿠가 신경 쓰이기도 하고 쿠로오한테 여러 가지로 신세를 졌다고 생각하는 리에프가 먼저 제안한 일이다. 불편하지 않겠냐고 묻는 야쿠의 얼굴이 이미 화색을 띠어서 그는 가심 없이 그렇게 하자고 했다. 제일 큰 프라이팬을 꺼내 야채를 볶고 메추리알에 검은 깨로 눈을 만들어주면서 콧노래가 끊이질 않았다.




“아아, 다리…… 리에프!”




파티용 가랜드를 걸겠다고 현관으로 향하다가 그대로 멈춰선 야쿠에게 펄쩍 다가간 리에프가 익숙하게 등과 오금을 받쳐 안는다. 몇 번 겪어보니 괜히 조심한다고 느리게 움직이는 것보다 재빨리 고양이를 눕히는 게 상책이라는 걸 깨달아서 그의 몸짓은 날렵하기 그지없다.




“병원 가야 되는 거 아니에요? 계속 그러네.”


“으……”


“푸흡…… 해달 같다.”




안쓰럽긴 하지만 인상을 찌푸린 채 손에 오색 가랜드를 꼭 쥔 모습에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웃겨? 웃음이 나와? 맞을…… 아! 아아……”




섣불리 팔을 들어 주먹질을 하려다 몸을 굳힌다. 다리를 문지르기 시작한 리에프의 손길은 부드럽기 짝이 없지만 이러나저러나 야쿠에게는 고통스러울 뿐이다. 임신 중기의 막바지에 이르러 부종이 심해져서 시도 때도 없이 온 몸이 저릿저릿하다. 찌르르 허벅지를 타고 오르는 통증에 울상이 된 야쿠는 다 리에프 때문이라느니 머저리라느니 웅얼거렸다. 정성껏 그의 발을 주물러 달래보지만 소용이 없다.




“몸이 너무 차갑잖아요, 오늘도 트렁크만 입고 있었죠?”


“더워.”


“그래도, 요코상이 옷 잘 입으라고 했는데 왜 자꾸 말 안 들어요? 저번에도 혼났으면서.”


“아, 살살해! 꾹 누르고 있으란 말이야…… 이 나쁜 자식.”


“말 좀─ 레이가 다 듣고 있다니까요!”


“안 들린다, 안 들린다.”




이어지는 잔소리에 장난스럽게 도리질을 한다. 리에프는 의외로 말을 참 잘 듣는다. 마냥 뺀질거릴 것 같은 생김과 달리 하라는 건 잘 따르고 하지 말라는 건 안 한다. 때로는 피곤한 장점이다. 필요한 거나 먹고 싶은 것을 부탁할 때야 벌떡 일어나 다녀오니 편하지만 간혹 엄격해질 때가 있다. 특히, 요코가 일러준 주의사항을 따르지 않을 때에는 저가 더 어른인 것처럼 야단이다. 속옷만 입고 찬 바닥에 드러누워 있지 말라고 요코에게 혼나는 걸 목격한 뒤로 졸졸 따라다니며 옷을 입혀주고, 과격한 언행이라도 뱉었다간 잔소리 폭격을 쏟아낸다. 못 들은 체 손에 쥔 가랜드를 만지작거리는 야쿠를 내려다보는 눈이 쌜쭉해진다. 어여뻐서 마음껏 미워할 수도 없다. 더 이상 끙끙거리지 않는 걸 보니 이제 좀 살만한가 보다. 야쿠는 살이 데워질 만큼 다리를 주무르고 있는 팔을 붙잡았다. 일으켜 줘. 이제 괜찮은지 물으면서 천천히 등을 받쳐준다. 고양이는 부러 그의 허리를 껴안으며 올려다보았다. 고마워. 턱이 닿은 가슴께가 간지럽다.




“내 말도 안 들어주면서.”


“그거 가지고 삐친 거야? 쪼잔하게?”


“쪼잔?”


“알았어, 좋은 말만 하면 되잖아. 리에프, 사랑해, 이거 저 위에 높이 달아줘.”


“이럴 때만!”


“알았지?”




이 정도면 가히 조련사나 다름이 없다. 좀처럼 보기 힘든 애교에 치사하다고 투덜거리면서도 천진하게 앞으로 내밀어진 가랜드를 냉큼 받아 든다. 조금 더 위에, 더, 더! 야쿠의 지시에 따라 현관으로 가는 길목 천장에 장식을 달았다. 만족스럽게 고개를 주억거리는 그에게 허리를 숙여 입술을 내민다. 잘했죠? 묻는 몸짓이다. 귀여운 나의 사자. 피식 웃은 야쿠는 가볍게 입을 맞추어 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초인종이 울리고 반가운 손님들이 발을 들였다. 어서 와! 문을 열자마자 마주한 얼굴에 야쿠의 목소리가 높다랗다. 쿠로오와 켄마는 순간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난장판 속에 손발이 안 맞는 철부지 연인을 상상했던 그들은 의외로 알콩달콩한 분위기의 잘 정리된 집에 당황하고 말았다. 거기다가 오랜만에 보는 배불뚝이 친구가 정말 낯설었다.




“딸이라니까 왠지 꽃을 사야 될 것 같았어.”




쿠로오가 야쿠의 배를 향해 예쁜 꽃다발을 내민다. 아직 뱃속에 있는 공주님 대신 꽃을 받아 든 리에프가 선수를 빼앗겼다며 툴툴거렸다. 켄마, 들어와! 그 때 쿠로오의 등에 가렸던 인영이 야쿠의 손에 이끌려 그의 옆을 지나쳤다. 예나 지금이나 단조로운 표정을 짓고 있다.




“리에프.”


“켄마 선배, 오랜만이에요.”


“뭐, 뭐야? 둘이 아는 사이야?”




두 눈이 동그래진 야쿠 앞에서 머쓱하게 옆머리를 긁적거린다. 아는 사이라고? 궁금한 건 쿠로오도 마찬가지다. 심드렁한 켄마와 얼굴을 붉힌 리에프는 각각의 따가운 시선을 피해 걸음을 옮겼다. 드디어 오늘인가? 어쩐지 쑥스럽다. 들어가서 얘기해요. 제 옷을 잡아당기는 야쿠의 어깨를 한 팔로 감싸 안았다.

그 날은 여우비가 내렸다. 푸르른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이 참 엉뚱했다. 마치 그와의 만남을 예견이라도 하듯이 말이다. 같은 교복을 입고 스쳐 지나가는 또래 친구들은 쓸데없이 해맑다. 소란스러운 우산 무리에서 슬그머니 벗어난 열다섯의 리에프는 인적이 드문 곳을 찾다가 학교의 담벼락에 다다랐다. 한 쪽 눈썹 위에 붙어있는 큼지막한 반창고가 비에 젖어 묵직하게 존재감을 더한다. 근처 벤치에 펄쩍 앉은 아이는 몸집만한 책가방을 옆에 내려두었다. 가방 안에 어머니가 챙겨준 우산이 있었지만 꺼내지 않았다. 한창 사춘기를 겪고 있던 그는 비를 맞으며 뜨거운 머리를 식히고 싶었다. 평소에 지겹도록 들어왔던 놀림이 오늘따라 왜 그렇게 듣기 싫었는지 모를 일이다.




‘하이바는 외계인일지도 몰라! 머리는 하얗고 눈은 초록색이잖아.’




내가 외계인이었으면 네 입에 끈끈이를 붙였을 거야. 어쨌든 외계인이 아니라서 이죽거리는 친구 녀석의 입을 막은 건 리에프의 주먹이었다. 아까의 일을 떠올리면서 미간을 좁히니 이마에 난 상처가 따갑다. 이긴 사람이 누구랄 것 없는 개싸움이었지만 친구의 키가 더 큰 것이 이제 막 160cm를 넘긴 그를 패배감에 휩싸이게 했다. 축축하게 젖어가는 교복 소매를 만지작거리는 손에 떨어지는 방울을 무의미하게 바라본다. 은발과 녹안. 유일한 약점이다. 누나는 언제나 아름답다고 말해주지만,




“역시 싫어.”




한참을 잡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담 너머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전까지는. 호기심 가득한 눈이 주저 없이 그 쪽으로 향한다. 갑자기 나타나 담벼락 꼭대기를 덥썩 움키는 손 때문에 놀란 그가 저도 모르게 가방 끈을 붙잡았다. 괴담의 한 장면인 줄 알았다. 여차하면 뛸 요량으로 다리에 힘을 주고 있는데 곧 그와 비슷한 교복차림의 남자가 날래게 담을 넘어 바닥에 발을 디뎠다. 그리 높지 않아도 담은 담이라 낮은 것도 아닌데 그는 가뿐히 해내었다. 고양이? 리에프는 양 손으로 눈을 비볐다. 방금 월담한 남자의 뒤로 연한 갈색 꼬리 같은 것이 살랑거렸다. 잘못 본 건가? 아니. 태연하게 꼬리 끝에서 작은 우산을 받아 들더니 휘파람을 분다. 남색 우산이 잠시 그이를 가렸다가 다시 내보였다. 이번에는 주홍빛이 도는 다갈색 머리카락 새로 세모 귀가 팔랑거리는 게 리에프의 시야에 똑똑히 잡혔다.




“외계인이다……”




리에프가 멍청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유유자적 걸음 하던 야쿠는 벤치에 앉아 저를 물끄러미 보고 있는 아이를 발견하고는 얼른 혼현을 감추었다. 본 건가? 그렇다면, 반류? 일순 긴장했는데 그에게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반류는 아닌데 그렇다고 원인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의아했지만 그냥 그런 사람도 있나 보다고 생각하고 말았다. 어쨌든 반류라면 못 알아볼 리 없지. 안심이었다. 원인은 혼현을 볼 수 없다. 네코마 고교 바로 옆 중학교 학생임이 분명한 소년을 완전히 지나친 야쿠는 다시 입술을 모아 휘파람을 불었다. 혼자일 때면 어김없이 혼현을 이용하곤 하는데 좋지 않은 버릇이다. 지금처럼 무의식적으로 사용했다가 피곤한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지난번에 꼬리로 컵을 들고 가다가 맞닥뜨린 할머님께 혼났던 걸 상기하며 고양이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쟤는 왜 저러고 있담?




“야, 우산 없어?”




앞으로 드리워지는 그림자에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이상하다. 꼬리랑 귀가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 보고도 못 믿겠다는 듯이 야쿠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야! 다시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어깨를 들썩인다.




“우산 없냐고.”




끄덕. 얼떨결에 그렇다고 했다. 우산이 있는데 이러고 있던 것도 우습고 그가 말을 걸지도 몰랐기 때문에 저절로 고개가 움직였다. 꼬리가 없어도 이상한 사람이다. 키는 저와 비슷한 것 같은데 고등학생이라는 이유만으로 어른스런 표정을 짓고 있다. 의젓하고 따뜻한 색깔의 머리카락과 눈동자가 저와 반대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류장까지 데려다 줄게.”


“괜찮아요.”


“그래? 그럼 이 우산 가져.”


“네?”


“너 줄게.”




비는 질색이지만 왠지 하얀 소년을 차가운 곳에 홀로 두고 싶지 않았다. 망할 비. 이마를 반이나 차지한 반창고가 안쓰럽게 젖어있는 게 눈에 박힌다. 이놈의 오지랖은 천성이다. 야쿠는 오만상을 찌푸린 리에프의 빈손에 아무렇게나 우산을 쥐어주곤 돌아섰다. 조금이라도 비를 덜 맞으려고 뛰기 시작했는데 얼마 못 가 팔뚝을 잡아채는 손에 붙잡혔다.




“정류장까지만요!”


“으, 잘 됐다. 나 비 싫어해.”




리에프가 들고 있는 우산 안으로 머리를 넣으면서 활짝 웃는다. 그의 산산한 미소에 몸에 철썩 달라붙는 교복에 대한 짜증스러움이 깨끗하게 가셨다. 정말 이상한 사람. 비를 싫어한다면서 모르는 사람에게 우산을 막 줘도 되는 거야? 발맞추어 걸어가면서 저를 아래위로 훑는 눈초리를 느낀 야쿠는 고개를 돌려 그 시선을 마주했다.




“나쁜 사람 같아?”




전혀 아니지만,




“담 넘는 거 봤어요.”


“그건 이편이 정류장까지 훨씬 빠르니까.”





수긍한 듯 의심스러운 눈씨를 거둔다. 하지만 야쿠는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계속 내려다보았다. 은빛이 도는 머리카락이 비에 젖어 달라붙은 흰 피부가 매끄럽고 진한 녹색 눈동자가 보석 같이 예쁘다. 터무니없는 감상에 빠져 입을 열었다.




“혼혈이야?”




하필 물은 게 이런 거였다. 그렇다고 답하는 리에프의 목소리에 날이 섰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저 하얗고 파란 소년이 아름답다는 생각뿐이다.




“염색으로 그런 색이 나올 리가 없지.”


“…….”


“우리 집 흰둥이랑 똑같은 색이네, 만져 봐도 돼?”




허락하고 말 것도 없이 그가 손을 뻗었다. 목을 움츠린 리에프는 앞으로 다가온 손목에서 풍기는 시원한 향기에 조금 멍해졌다. 약한 파스 냄새에 달큼한 향이 섞인 오묘한 향이다. 야쿠는 저만 보면 짖어대는 마당의 강아지를 떠올리며 투박한 손길로 그의 머리카락을 넘겨본다. 섬세하지 못해서 이마를 밀고 있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흰둥이는 사납게 굴어서 한 번도 쓰다듬어주지 못했다.




“흰둥이는 무지무지 귀여운 개야! 근데 날 별로 안 좋아해.”


“왜요?”


“글쎄…… 과가 달라서?”




말끝을 흐리며 야쿠가 반창고를 살살 건드렸다.




“싸운 거, 아니면…… 맞은 거?”


“싸운 거예요!”


“푸하하, 뭘 발끈하고 그래? 왜 싸웠는데?”


“머리카락 때문에요.”




세세히 털어놓지 않아도 알 것 같다. 야쿠의 손을 쳐내면서 신경질적으로 제 머리카락 끝을 잡아당긴 리에프가 씩씩거렸다. 하지만 화가 났다기보다는 울적해 보인다. 거짓이 아님을 증명하고 싶은 양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야쿠가 그 앞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예쁘기만 한데? 진심이야.”


“바꾸자고 하면 바꿀 거예요?”


“응, 바꿀게.”


“거짓말……”


“진짜야, 예뻐.”




눈결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에 주춤한 건 리에프다. 뺨이 발그스레해졌다. 낯간지러운 그의 속삭임은 거짓일 수 없다. 이미 리에프가 그렇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정류장에 다다랐다는 걸 깨닫기도 전에,




“어? 버스 왔다, 우산은 네가 가져가! 안녕!”


“아, 저, 잠깐! 만……”




그는 홀연히 떠났다. 손에 들린 우산이 아니었다면 아마 그와의 만남이 꿈이거나 귀신에 홀린 거라고 여겼을 것이다. 어쩐지 허무해진 리에프는 짧게 혀를 찼다. 야쿠 모리스케? 손잡이에 붙어있는 이름표를 오래도록 눈에 새겼다. 다시 볼 수 있을까? 답을 얻은 건 몇 달이 지났을 때다.




“야쿠, 반칙이야! 어느 틈에 거기까지 간 거야?”


“나를 놓치지 말라고 했잖아.”




야쿠? 이끌리듯 네코마 고등학교 체육관으로 향하는 리에프의 뒤로 어딜 가냐는 여러 목소리가 뒤따랐다. 우연히 지나던 중이었다. 정말 그 사람이 있을까? 발소리가 요란한 그 곳으로 슬쩍 몸을 기울여본다.




“내가 살릴게!”




무릎이 쓸리든 말든 몸을 날려서 배구공을 쳐내는 그가 거기에 있었다. 들뜬 목소리가 크게 울려 퍼진다. 사람들에 둘러싸여 즐겁게 웃는 모습에 눈이 부셔서 더 담아볼 수가 없었다. 리에프는 저도 모르게 니트 조끼의 가슴팍을 움켜쥐고 벽 뒤로 숨었다.




“뭐야…… 완전 멋있는 사람이었잖아!”




반짝거리는 사람을 동경했다. 그가 예쁘다고 말해주었던 머리카락을 싫어하지 않게 되었다.




“와, 그 때부터였던 거야? 징글징글한 순정파네.”




리에프가 이야기를 끝마치자마자 쿠로오가 맥주를 한 모금 들이키고는 이죽거렸다. 쑥스러운 듯 뭐 그렇게 된 거라고 얼버무리는 사자의 얼굴이 발그레하다. 그 옆에 있는 야쿠는 더 하고. 그들을 가리키며 흑표가 마음껏 껄껄거리는데 가만히 토끼 모양으로 깎인 사과를 돌려보고 있던 켄마가 중얼거렸다. 쿠로랑 비슷해. 징글징글한 쪽이냐고 묻는 쿠로오에게 그는 어깨를 으쓱거릴 뿐이다.




“그 뒤로 틈만 나면 훔쳐보고 그랬는데…… 아, 음료수나 열쇠고리 같은 걸 전달한 적도 있어요!”


“그, 그랬어?”


“야쿠는 의외로 그런 데 무신경하더라, 그런 걸 받아도 우리한테 자랑하고 끝이었을 걸?”


“너무 작아서 졸업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요, 고등학교에 가니까 야쿠상은 이미 없더라고요.”




허벅지를 꾹 누르는 야쿠에게 아프다고 소리치는 얼굴은 아이러니하게도 즐거움으로 물든 채다. 여전히 매를 버는구나, 읊조린 켄마에게 리에프가 항의했고 쿠로오는 잔을 내밀었다. 물이나 홀짝거린 야쿠는 잘 기억나지 않는 저희의 옛 이야기에 놀란 기색을 숨기지 못해 여전히 두 뺨이 상기되어 있었다. 그의 말대로라면, 과거의 저가 순진한 리에프를 홀린 꼴이었다. 가끔씩 캐비닛 앞에 놓여있던 이온 음료수나 어떤 애가 전해주더라, 해서 받은 고양이 키링 같은 것들은 떠오르는데 아무리 노력해도 비 오는 그 날만은 희미하다. 어쨌든 쿠로오 말대로 그런 걸 받았을 때 야쿠는 우와! 꿀꺽꿀꺽! 기뻐! 이게 다였다. 지금 돌이켜보니 지나치게 둔감했던 어린 날이다. 이제야 맞선 자리에서 리에프가 맹목적으로 굴었던 것도 납득이 된다. 리에프에게는 야쿠가 몇 년 만에 재회한 첫사랑이었던 것이다. 거기다가 반류로 각성해서 헛것이라고 생각했던 꼬리와 귀를 진짜로 마주치니 반갑기도 했으리라.




“난 왜 기억이 안 나지? 그런 일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까맣게 잊힌 순간이 아쉽다. 리에프는 시무룩한 그의 머리카락에 볼을 비볐다.




“계속 좋아했어요, 야쿠상은 그것도 모르고.”


“내, 내가 어떻게 알겠어? 고백도 안 했으면서!”


“제 첫 키스도 뺏어갔잖아요!”


“말도 안 돼!”


“꿈속에서.”


“변태 자식.”




작작 해라! 리에프에게 가만히 안겨서 속살거리는 야쿠를 보다 못한 쿠로오가 옆에 있는 애벌레 인형을 집어 던졌다. 그에겐 결곡하게만 보였던 야쿠가 사자와 붙어 앉아 자늑자늑한 눈길을 주고받는 모습에 익숙해지려면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다.




“그럼 야쿠의 혼현을 본 건 전조 증상 같은 건가? 그 때는 선조 귀환이 아니었으니까.”


“운명이죠!”


“처음 본 반류와 사랑에 빠진다, 로맨틱한걸.”


“느끼해.”


“저기, 켄마, 그렇게 노골적으로 싫은 표정 지으면 상처야.”


“켄마 선배는 여전하네요, 근데, 선배는 반류가 아닌데 왜 그런 냄새…… 아!”


“리, 리에프, 샐러드 좀 갖다 줘!”




팔꿈치로 옆구리를 세게 밀어낸 야쿠에 리에프가 칭얼거리면서 일어난다. 쿠로오와 야쿠는 서로 눈을 마주친 채로 멈칫했다. 얼간이처럼 엉성하게 입 꼬리를 올린 쿠로오는 켄마에게 사과가 맛있는지 묻는 것으로 정적을 깬다. 켄마는 고개를 돌리면서 ‘응.’하고 짧게 답했다. 묘한 분위기를 견디지 못 하고 고양이가 그들 사이로 나선다. 흥미로운 빛을 띤 켄마의 금색 눈동자가 요리조리 제 배를 따라다니는 것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어때?”


“신기해.”




가끔 쿠로오를 통해 듣거나 야쿠가 보내온 메시지로 아기라는 존재에 대해 인식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부푼 배를 보고 있으니 감회가 새롭다. 언제 나와?




“세 달만 지나면 만날 수 있어.”




줄곧 아래로 향해있던 눈길이 싱긋 웃는 야쿠에게로 고정된다. 배는 불뚝 나왔는데 팔다리는 말라서 힘겨워 보인다. 고된 것을 혐오하는 켄마는 임신을 바래왔던 그를 이해할 수 없고 앞으로도 그건 변하지 않을 것 같아서 자신이 반류가 아닌 게 다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작은 고양이를 가련하게 여겼다.




“야쿠, 많이 먹어야겠어.”




무심한 어투로 말하고는 음료수를 마신다. 어느새 돌아와 쿠로오와 술잔을 기울이는 리에프를 째려보는 켄마의 눈을 포착한 야쿠가 크게 웃었다. 걱정해주는 건 고맙지만 종일 무언가를 먹는다는 진실은 차마 말할 수가 없다. 따가운 눈총을 받은 리에프가 갸우뚱거린다.




“지금도 밥을 두 그릇씩 먹는데 더 먹을 수 있을까요?”


“닥쳐!”


“레이가 들어요!”


“쳇……”


“두 그릇…… 설마, 돼지를 가진 거야?”


“아니야, 켄마.”




심각하게 의문하는 켄마에게 답하며 다정하게 그의 뒷목을 쓰다듬은 쿠로오는 속으로 티격태격하는 사자와 고양이를 한껏 부러워했다. 좋네, 중얼거리자 두 가지 색이 섞인 푸딩 머리가 저를 올려다본다. 뭐가? 피식 웃으며 턱짓으로 그들을 가리켰더니 켄마도 살며시 미소를 띤다. 응, 좋아 보여. 때때로 홀로 짊어진 것들에 위태로워 보이던 친구가 행복해 보여서 실로 좋은 밤이다.
























순정의 가치를 완결내고 나면 쿠로켄으로 짧은 번외를 쓸 예정입니다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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