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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에야쿠] 순정의 가치 16

섹스피스톨즈 AU




















잠이 덜 깬 멍한 눈. 집 주인의 볼이 바닥에 눌린 탓에 익살스러워졌다. 흥얼흥얼. 커다란 창을 내다보면서 마음대로 지어낸 노래를 뱉다가 제 머리카락 빛깔과 같은 볕이 코에 닿아지니 배시시 웃는다. 그걸 잡으려는 양 허공에 손을 휘두르는 게 영락없는 고양이다.




“배고파?”




꼼질꼼질 움직이는 태동이 반복되니 야쿠가 고개를 숙여 물었다. 누굴 닮았는지 입이 쉬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거실 여기저기에 늘어져 있는 간식거리 중 젤리 하나를 날래게 잡아챘다. 집에 오실 때마다 야쿠의 어머니는 몸에 좋은 것들 놔두고 허구한 날 젤리를 달고 산다고 성화시지만 리에프 2세가 먹고 싶다는 걸 어떡하나요? 설탕이 묻은 바나나 젤리를 오물오물 씹으니 마음이 다 편안해진다. 임신하기 전에는 손도 대지 않던 것들을 좋아하게 되다니 신기한 일이다. 젤리는 물론이거니와 각종 빵이나 푸딩, 특히 생과일이 들어간 푸딩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요즘이다. 리에프가 일어나면 집 앞 제과점에 가자고 해야겠다. 몸집에 비해 터무니없이 커진 배에 허리가 뻐근하다. 반대로 돌아누우면서 배를 받치는 야쿠의 손은 자연스럽다 못해 이젠 버릇이었다. 창을 등지니 멀찍이 현관에 쌓여있는 상자와 마주했다. 리에프의 짐이 들었던 것이다. 그의 이삿짐 정리는 새벽이 다 되어 끝났다. 피곤해. 아직도 침실에서는 깊게 잠든 사자의 넘어갈듯 큰 숨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어쩌다 보니 상견례였던 식사 이후, 사자의 부모님은 그 길로 당장 아들의 짐을 싸놓은 모양이지만 이사는 늦어졌다. 필요한 거야 그 때 그 때 집에 들러서 가져오고, 웬만한 것은 이미 야쿠의 Sweet Home에 있으니 채근하는 가족들에게 리에프가 나중에! 하고 홱 돌아 고양이 곁으로 와버렸을 게 안 봐도 눈에 훤하다. 결국 그의 가족들이 사고뭉치 아들의 동태도 파악하고 배부른 연인도 살필 겸 짐을 직접 갖다 주셨다. 야쿠는 저번처럼 그들 앞에 꿀 먹은 벙어리로 있고 싶지 않았다. 제 입으로 말하긴 쑥스럽지만, 리에프를 믿고 맡길 수 있는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다는 욕심이 컸다. 대청소도 하고 자신 있는 음식도 손수 해서 내놓았다. 공연히 무리하는 거 아니냐며 리에프는 못마땅해 했지만 막상 부모님이 좋아하는 걸 보더니 저가 더 뿌듯해서 안달이었다.




‘입맛에 맞으세요?’


‘당연하죠! 전골은 야쿠상이 제일 잘하는 거잖아요.’


‘리에프, 너한테 물어본 거 아니야…….’


‘하하, 진짜 웃긴다! 팔불출이야!’




아리사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녀는 서로를 어려워하는 부모님과 야쿠 사이에서 제 역할을 톡톡히 해 주었다. 사자는 있으나 마나. 오히려 야쿠에겐 리에프가 걸림돌이다. 무슨 얘기만 나오면 제 편을 들고 서슴없이 애정 표현을 하는 바람에 진땀을 뺐다. 둘만 있을 때는 전혀 느끼지 못했는데 식사 내내 저만 보면서 이것저것 참견하는 것을 그의 가족이 떨떠름한 얼굴로 보고 있으니 참 고역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리에프는 야쿠가 쌈이라도 싸면,




‘쌈도 어쩜 이렇게 작게 만들었어요? 엄마, 이것 봐요, 진짜 귀엽죠?’


제 입에 뭐라도 묻으면,


‘야쿠상, 닦아줘요―’




이런 식이었다. 몰래 꼬집기도 했지만 꿈쩍도 않고 천진하게 왜요? 물으니까 더 할 말도 없었다. 민망해서 밥이 입으로 들어갔는지 코로 들어갔는지 모르겠다. 리에프가 난데없이 입술을 들이미는 걸 보다 못한 부모님이 결국 그에게 점잖게 좀 있으라고 야단하셔서 야쿠는 실없이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후에는 초음파 사진으로 도배된 앨범을 보여드렸다. 참 좋아하셨지.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 하는 리에프의 아버지에게 한 장을 내밀었더니 냉큼 받아 지갑에 넣으시더라. 뒤이어 손을 내민 어머니와 아리사에게도 아기 사진을 선물했다.




‘만져볼래요?’




자꾸 배를 힐끔거리는 아리사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면서도 눈길은 끊이지 않는다. 야쿠는 부러 방긋 웃으면서 그녀에게 살짝 배를 내밀었다. 만져도 되냐고 묻는 것처럼 리에프와 눈을 맞춘 그녀는 주저하다 손을 뻗었다.




‘그,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얇은 옷 아래로 야무진 감촉이 느껴진다. 안녕. 인사를 건네자 신기하게도 배가 꿀렁 움직였다. 세상에! 처음 느껴보는 태동에 그녀는 입을 벌린 채 말을 잇지 못 했다. 고모인 줄 아나 보다고 했더니 아리사는 감격에 겨운 양으로 한참 그 곁에 붙어 있었다.




“모리……”


“일어났어?”




거인에 둘러싸인 기분이던 날을 회상하던 야쿠는 눈을 비비면서 다가오는 리에프 덕에 다시 그 때로 돌아간 것 같다. 새삼스럽게 그의 큰 키를 가늠해 보다가 픽 웃었다. 일어나자마자 잠긴 목소리로 제 이름을 부르는 게 아이 같아 귀엽다. 190cm가 넘는 아기는 곁에 벌렁 눕더니 야쿠의 등을 온 몸으로 끌어안는다. 어깨에 턱을 대고 커다란 손바닥을 배에 올린다. 아가와 잘 잤냐는 인사라도 주고받나 보다. 리에프가 발치에 흩어져 있는 담요를 발가락으로 그러쥐어 올린다. 품 안에서 핸드폰을 만지작대는 야쿠를 제멋대로 담요로 둘둘 말아서 다시 팔 다리에 가두었다. 닿는 아무 곳에나 입술로 장난을 치다가 귓바퀴를 잘근잘근 깨문다. 사자의 이런 치대기에는 이젠 도가 텄다. 그러든 말든 담요를 걷어냈다.




“더워요?”


“아니, 아리사가 사진 보내래.”




그래서? 곧 카메라 화면을 채운 건 알아보기 힘든 둥근 모양이다. 성에 차지 않는지 티셔츠마저 걷어 올린다. 팽팽해진 배꼽이 보였다.




“옷은 왜 올려요?”


“애기만 찍어 보내라는데?”


“이씨! 그렇다고 맨 살을 보내냐?”


“냐? 너 방금 나한테 반말했냐?”


“내놔요, 보내지 마!”




핸드폰을 가지고 엉겨 붙어서 사진을 보내니 마니 실랑이를 벌인다. 갈비뼈를 간질이는 손에 매달려 깔깔거리다가 리에프의 얼굴을 밀어냈다. 잠깐만! 크게 웃으면 배가 아프도록 당긴다. 여전히 웃는 낯으로 이질적이게 끙끙 앓는 소리를 내니 사자가 대신 배를 잡아주었다. 그만 웃어요. 작게 다그치는 게 왜 이렇게 웃기지?




“아아…… 너무 웃겨, 배 아파…… 아!”




웃다가 찡그렸다가 가지가지 한다. 같이 웃어도 되는지 묻는 어리둥절한 눈동자와 마주치니 한 번 터진 웃음이 가실 새 없이 야쿠는 팔로 배를 누르면서 발을 구른다. 찢어지는 것처럼 아픈데 웃음이 안 멈춘다. 리에프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지었다가 이마를 한 대 얻어맞았다. 훌쩍거리면서 웃기지 말라고 소리치는 배불뚝이를 어떡하면 좋을지 전혀 감이 안 잡힌다. 아가야, 넌 웃음이 많구나.














“리에프, 볼링 치러 가자!”


“오늘은 진짜 안 돼.”


“그럴 줄 알았어.”


“이제 얘는 우리랑 다른 세상 사람이라니까, 포기해.”


“나 같아도 집에 가고 싶겠다.”




멀어지는 친구들에게 크게 손을 흔들어준 남자는 몸을 돌려 전철역으로 향한다. 더운 바람이 그의 옷깃을 스쳐 지나간다. 벌써 여름인가? 야쿠와 만나고 1년도 안 되는 시간 안에 많은 게 바뀌었다. 친구들은 철이 들었다고 말한다. 학교가 끝나면 곧잘 어울려 놀던 것이 아주 오래된 일처럼 느껴진다. 배구부에도 발길을 끊은 지 오래고. 어떤 때는 전부 시간 낭비라고 여겨질 만큼 그에겐 몰두하고 싶은 것이 따로 있다. 오매불망 저를 기다릴 고양이와 아기가 있는 집. 오히려 야쿠가 또래들처럼 지내라고 닦달할 정도로 리에프는 그에 충실하다. 빨리 가서 작은 몸을 안고 오늘을 이야기하고 입을 맞추고 싶다. 지금이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럽다. 전철에 오르자 그에게로 여러 시선이 모아졌다. 키가 크니 겪는 예삿일이다. 흰 티에 찢어진 청바지만 입었을 뿐인데 이렇게 멋있을 일인가 싶은 외양이기도 하다. 아침마다 야쿠가 머리 감지 말고 가라, 모자 써라 괜히 시비를 거는 데에도 다 이유가 있다. 반류든 아니든 가리지 않고 몇몇의 시선이 리에프에게서 떨어지지 않지만 그는 핸드폰만 들여다보고 있어 어떤 것도 눈치 챌 생각이 없다.




[전철 탔어요! 뭐해요?]


[누워있어. 내리기 전에 말해줘, 마중 나갈게.]


[역까지? 더운데 나오지 말지.]


[역 앞에서 주스 마시면 돼.]


[망고 주스 마중 나오는 거죠!]


[ㅎㅎㅎㅎㅎㅎㅎㅎㅎ]




귀여워. 별안간 소리 없이 웃더니 끝내 어깨를 들썩이며 키들거린다. 명백히 사랑에 빠진 얼굴이다. 그를 힐끔거리던 눈들이 아쉬움을 남긴 채 돌아섰다. 리에프는 자리에 앉자마자 책을 꺼내 들었다. 전철로는 꽤 오래 가야 해서 틈틈이 공부나 과제를 하는 편이다. 그래야 집에 가서 고양이랑 마음껏 놀 수 있으니까. 요즘엔 과제 말고도 고민이 있다. 책 위에 펼친 노트 귀퉁이가 글씨로 빽빽해진다. 문득 나른해진 분위기에 고개를 들었다. 석양이 드는 창밖으로 윤슬이 이는 강이 펼쳐진다. 사람들은 제각각 다른 눈빛으로 그 풍경을 마주한다. 리에프도 그 중 하나다. 주홍이 깃든 하늘색에서 쉬이 야쿠의 머리카락을 떠올려낸 그는 다시 펜을 굴렸다.




“행복……”




의미를 알 수 없는 중얼거림이 진중한 입술에서 흘러 나왔다. 꽤 어려운지 글씨를 벅벅 긋고 밑줄을 치고 하다가 한숨을 내쉬어본다. 슬슬 골치가 아프다. 책과 노트를 덮어 가방에 넣었다. 어느새 내릴 역에 가까워져 있었다.




“이게 뭐야?”




식탁에 펼쳐놓은 리에프의 책을 정리하던 야쿠는 낙서로 엉망인 노트를 들어 올리면서 혀를 찼다. 과제한다고 안 놀아주더니 낙서만 한 거야? 저녁 메뉴가 국수로 정해지면서 소면을 사러 나간 사자를 나무라는 대신 종이를 노려보다가 그 안에 엉뚱하게 자리한 제 이름을 찾아냈다. 낙서가 죄다 ‘야쿠’라는 성이 붙은 이름인 것을 알아채는 데에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코하네, 하즈키, 카나미 등 많기도 많다. 그 옆에는 고심한 결과물이라는 것을 표하기 위해 또박또박 쓴 뜻풀이도 적혀 있다. 고양이의 입 꼬리가 살며시 올라붙는다. 어쩜 하나같이 예쁜 이름이다. 리에프의 마음이 담겨 있는 이름 중에 유독 진한 것이 있었다. 레이(幸)라는 글자는 여러 번 겹쳐 쓰인 탓에 획 몇 개가 뭉툭했다.




“행복이라……”




잠시 턱을 짚고 섰던 야쿠는 아무렇게나 꺼내져 있는 펜들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다녀왔습니다!”




얼마나 떨어져있었다고 소면과 양파 따위가 든 봉지를 건네면서 야쿠의 이마에 뺨을 비빈다. 저녁이 늦어져 비키라고 할 줄 알았는데 웬일인지 그는 까치발을 들어 리에프의 턱 끝에 입을 맞췄다. 오늘 무슨 날인가? 단번에 싱글벙글해진 그에게 머리를 기댄 야쿠가 담담하게 읊조렸다.




“행복해.”


“네?”


“네가 있어서 행복하다고.”


“저, 저도요!”


“레이도 그렇대.”




어안이 벙벙하던 사자는 뒤늦게 의중을 알아채곤 살짝 뺨을 붉힌다. 왠지 쑥스러워서 제 면면을 보지 못 하도록 야쿠를 팔 안에 가두다시피 안아버렸다. 리에프는 몇 번이나 그 이름이 마음에 드는지 되물었다. 짜증을 낼 법도 한데 야쿠는 매번 그렇다고 대답했고 진심이었다. ‘행복’이라는 이름만큼 저희의 아기에게 더 어울리는 것이 있을까? 서로의 손을 겹쳐 배를 쓰다듬었다.

레이, 네 이름을 부를 때마다 우리는 행복해질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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