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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첸] 어리석은 연애 보고서 제 5장

찬열X종대



























살금살금. 방문을 열고 거실을 빼꼼 내다보고 있으니 봄이가 뒤에서 호시탐탐 빠져나가려 발버둥이다. 종대는 궁둥이로 개를 밀어내면서 다시 문을 닫았다. 소파 끝에 걸쳐 있는 두 다리. 새벽에라도 돌아가길 바랐던 찬열이 그대로다. 꼭 헤어지지 않은 것 같잖아. 토요일 오전에 같은 공간에 있으니 샘솟는 쓸데없는 생각에 도리질을 하며 실소를 터뜨렸다.




“봄아, 나갈까?”




거대한 털 뭉치가 신이 나 꼬리를 흔든다. 찬열이 깨서 돌아갈 때까지 방에 꼼짝없이 갇혀있으려다가 내가 왜? 짜증스럽기도 하고 막상 제정신으로 마주하기는 껄끄러워서 산책이나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잡힌 문고리가 유난히 무겁다. 도둑이 된 기분으로 숨을 들이켜고 머리맡에 섰다. 이불 위로 삐쭉 나온 머리카락. 문뱃내 베인 숨소리. 발소리를 죽이긴 했지만 한번쯤 뒤척거릴 만도 한데 제집마냥 쿨쿨 잠들어 있는 것이 영 못마땅하다. 짧게 혀를 찰 뿐인 종대를 대신해 봄이가 킁킁거리며 앞으로 나선다.




“안 돼! 이리와.”




얼른 봄이의 궁둥짝을 끌어안았다. 심장 떨어질 뻔 했네. 개를 힘겹게 안고 뒤뚱거리며 방으로 들어가는 얼굴이 창백하다. 위험인물을 깨우려는 것을 막기 위해 목걸이에 산책용 목줄을 연결해 팔에 걸었다. 찬열이 깨서 이 덩치 큰 골든리트리버와 조우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지만 시험해보고 싶진 않다. 다행이 순한 룸메이트가 술 냄새를 따르지 않고 졸졸 따라온다. 옆으로 지나다녀도 미동조차 없는 이불더미. 술을 얼마나 퍼 마셨기에 지금까지도 인사불성인 걸까? 베란다로 가서 창문을 반쯤 열었다. 차디찬 겨울바람이 희끄무레한 얼굴을 할퀸다. 환기를 시키는 게 나을 것 같다. 거실에 널브러져있는 주정뱅이에게 개털 알레르기가 있다는 게 신경 쓰여서 잠을 설쳤다. 더 솔직해지자면, 일개 주정뱅이가 아니라 한 때는 삶의 이유였던 남자다.

소파로는 눈길도 주지 않고 부엌으로 부랴부랴 돌아와 냉장고를 열어 파며 달걀이며 이것저것 꺼내는 손길은 야무지다. 고새 담담해진 얼굴에는 의연함마저 베여있다. 그리운 사람이 찾아왔어도, 그가 눈물을 보여 가슴이 아팠어도 달라질 수 있는 건 없다. 이제 우린 서로에게 과거일 뿐이니까. 끊임없이 당부하는 메아리가 울려온다. 누가 뭐래도 해장에는 계란 국이지. 실은 레시피를 보지 않고도 자신 있는 건 이것뿐이다. 얼려둔 멸치 육수를 녹여 급히 국을 끓인다. 식탁에 기대 보채듯이 다리 사이를 지나는 개와 키들거리면서 장난을 치다 보니 금세 고소한 냄새와 보글보글 맛있는 소리가 집 안에 채워진다.




“아, 뜨!”




무의식적으로 뜨끈한 국물이 튄 손가락을 날름 핥았다. 맛있어. 종대는 김이 올라오는 국을 보온병에 국자로 퍼 담는다. 어설픈 몸짓이어서 반은 흘렸지만 개의치 않고 만족스러운 듯 빙긋 웃기까지 했다. 차가워진 공기 속에 홀로 따뜻한 보온병을 소파 앞 테이블에 조심스럽게 내려둔다. 어떤 생각으로 이런 짓을 하고 있는 건지 명확히 설명할 길이 없다. 미련이라고 하기엔 이 애가 온 것이 기쁘지 않고, 먼저 버려진 건 저라서 연민할 처지는 아니다. 그저 미처 다 지우지 못한 정 때문이다. 오해만 사지 않길 바랄 뿐이다. 가져가라고 아무렇게나 휘갈겨 쓴 메모를 그 아래에 남겨두기까지는 망설임이 있었지만 긴 시간은 아니었다.

봄아, 나가자. 야상 점퍼를 걸쳐 입고 모자에 목도리까지 두르고 나온 그와 경쾌하게 발을 구르는 봄이가 집을 나선다. 안녕. 돌아오면 꿈이었던 것처럼 집은 비어 있을 것이다. 문 앞에서 멈칫한 운동화는 찬열에게 인사를 남기듯 꾸물거리다가 현관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이 인사가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된 건 몇 시간 뒤의 일이다.

적막이 흐르는 집 안으로 멋대로 숨어든 바람이 세상모르고 단잠에 빠진 이불 새로 파고든다.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좁은 소파 위에서 뒤척이다가 떨어지는 이불을 놓치고 말았다. 갑자기 와 닿는 추위에 양 미간을 사정없이 좁히며 실눈을 뜬 찬열은 얼른 다시 이불을 잡아당겨 제 몸을 감쌌다. 어라? 깊이 감겼던 눈이 짙은 쌍꺼풀을 만들어내며 번쩍 뜨인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곳. 한참 동안 멍청한 표정으로 눈만 깜짝이다가,




“우아악!”




팔다리를 사방으로 뻗은 바람에 바닥으로 떨어져 버렸다. 한숨을 내뱉자 역한 술 냄새가 끼친다. 어제를 되짚다가 무작정 종대의 품에서 훌쩍거린 것을 떠올려냈다. 돌아버리겠네. 중얼거린 다음엔 꽤 힘을 실어 머리를 쥐어박았다. 차라리 떠오르지 않았으면 좋았을 기억이다. 이마를 짚고 그대로 누워 있다가 답답한 셔츠 단추를 두어 개 풀었다. 외투를 빼곤 불편한 양복 차림 그대로다. 코트 벗기는 김에 재킷까지는 같이 벗겨줬어야 되는 거 아냐? 너무하네, 김종대. 저가 서운해 할 대목이 아니지만 입술이 절로 삐뚤어지는 건 막을 수가 없다. 게다가 쫓아버릴 기세로 활짝 열려있는 창문을 발견했을 때는 울컥해서 욕지거리도 내뱉었다.




“얼어 뒈지겠네.”




하? 어이가 없어서 실성한 사람처럼 헛웃음을 흘리다가 몸을 일으켜 앉았다. 집 안이 조용하다. 겁도 없이 닫혀있는 방문을 벌컥 열어보았다. 없다. 숨바꼭질하듯 있는 문이란 문은 죄다 열어본 그의 표정에 아쉬움이 남는다. 어제 그렇게 도망쳐놓고 왜 여기까지 찾아와버렸을까? 창문을 닫고 부엌으로 가서 찬물을 연거푸 들이켰다. 꿀꺽. 목 넘김 새로 눈 굴리는 소리가 요란하다. 

한 눈에 보기에는 크게 달라진 게 없는데 찬찬히 뜯어보니 저가 그랬듯이 사라진 것들이 있다. 하나, 냉장고에 붙어있던 산타 카드. 처음 함께 맞이했던 크리스마스에 파란 캐시미어 니트를 선물하면서 썼던 것이었다. 힘주어 써 내려가 이상하게 꺾여있던 글씨 때문에 한 동안 종대에게 놀림을 받았었다. 흐려진 기억을 긁으니 만나줘서 고맙다고 썼던 것이 떠올라 쓴 웃음이 그려진다. 둘, 찬열이 좋아하던 오리 쿠션. 잘못했을 때마다 저 대신 얻어맞기 일쑤였는데. 셋, 이사 기념으로 선물했던 선인장. 넷, 칫솔걸이. 다섯, 함께 갔던 상해에서 사온 드림 캐처. 스탠드 램프에 걸어놓았더니 어슴푸레할 때 생기는 그림자가 희한한 문양이었다. 먼저 자고 있는데 갑자기 뛰어 들어와 제 품으로 파고들더니 악몽을 쫓는 게 아니라 불러들이겠다며 투덜댄 적이 있었다.




‘그런 게 뭐가 무섭냐?’


‘아, 갑자기 소름 끼치잖아.’


‘아직 애기네, 우리 종대.’


‘아니거든? 지금 나가서 봐봐, 너였으면 벌써 지렸어.’


‘너 설마……‘


‘미친! 아니야, 봐! 안 지렸어!’


‘어디, 한 번 만져볼까?’


‘변태!’




여섯, 일곱, 여덟…… 그만 두자. 허탈하게 소파로 되돌아온 찬열이 뒤늦게 보온병을 발견했다. 가져가. 포스트잇에 적힌 다정한 글자들. 무언가 잃어버린 것처럼 허망한 발길이 다시 종대의 방으로 향한다. 우리의 사진이 들어있던 손바닥보다 작은 액자가 없어진 것 말고는 변한 게 없이, 그의 냄새로 가득한 방이다. 긴장이 풀리는 것처럼 어깨가 쳐졌다. 조심스럽게 침대로 다가간 찬열은 부드러운 이불을 움켜쥔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가만히 서서 이따금 손가락 끝만 꿈질 움직였다. 한참을 그대로이다가 천천히 침대에 걸터앉더니 곧 힘없이 스러진다. 얼굴이 처박힌 베개에서 악몽 속에서 애타게 부르던 이가 느껴진다.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는데 눈시울이 뜨겁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데 어쩔 수가 없다. 난 아직 김종대를 잊지 못 했다. 아니, 되찾고 싶다. 축축하게 젖는 베갯잇에 눈가를 짓이겼다. 차라리 멍청한 눈물을 들키고 싶다. 쪽팔려도 지금이라면, 그 애가 가엾다고 여겨 내밀어줄 손에 매달려 자존심이고 뭐고 다 내팽개치고 돌아가자고 빌 수 있을 것 같아서.

춥다. 몸을 잔뜩 움츠린 채 아파트 안으로 뛰어 들어온 종대가 엘리베이터 앞에 선다. 헉헉거리는 개의 주둥이에 묻은 눈을 털어주고 제 장갑도 탈탈 털었다. 한 시간 남짓한 산책에서 둘은 마음껏 공원을 뛰어다니고 묵은 눈 위를 굴렀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희끄무레한 얼굴이 울긋불긋하다. 새빨개진 귀 끝. 어지간히 추웠던 모양이다. 뜨끈하게 국이나 데워서 밥 말아 먹어야지, 하고 어깨를 들썩거리면서 봄이에게 말하자 멍! 대답이 돌아온다. 아마 간식이나 달라는 뜻일 거다.




“으, 추워, 추워. 어어?”




급히 현관에 발을 디딘 종대는 아직 그대로인 검은 구두를 보고 당황한 나머지 뒷걸음질을 치다 팔꿈치로 문을 세게 쳐버렸다. 쿵. 둔탁한 마찰음이 천지를 뒤흔드는 것처럼 들렸다면 믿을까? 그대로 얼음이 된 그는 온 몸에 핏기가 가시는 느낌에 얕게 몸서리쳤다. 아직도 안 갔어! 마음속으로 정리할 것을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뱉고 말았다. 먼저 안으로 겅중겅중 들어간 봄이가 사납게 짖음과 동시에 들려오는 기침 소리에 찬열이 아직 돌아가지 않았다는 것이 확실해진다. 그 자리에 굳어 여전히 현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앞으로 부스스한 까치집 머리를 한 남자가 터벅터벅 나타났다. 맨 정신에 보고 있으려니 생각보다 더 고역이다.




“웬 개야?”




태연하게 묻는다. 심지어 앞발로 기어오르는 개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만지려는 시도까지 하고 있다. 제 집인데 아직 신발도 벗지 못했다는 사실이 억울해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삐걱거리는 소리라도 낼 것 같은 몸을 움직여 현관을 벗어났다. 웬 개냐고? 종대는 안부를 묻는 듯한 그의 질문은 무시하기로 했다. 차마 네가 알아서 뭐할 거냐고 쏘아붙이지도 못하는 저가 한심하다.




“지금 일어난 거야?”


“아니.”




아니라니. 그럼 일부러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말이야? 긍정의 대답이 돌아올까 무서워서 이건 묻지 않았다. 목도리를 풀어 내리며 찬열을 지나친다. 허나 서늘한 음성은 지나가지 않고 찬열의 귀에 콕 박혔다. 왜 안 갔어?




“밥, 같이 먹어.”




웃옷을 벗어두다가 기가 차서 휙! 돌아보자 살짝 고개를 숙인다. 뚱하게 부은 입술이 홀대에 못마땅한 그의 감정을 표했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 얼굴로 열이 오른 종대는 숨을 들이마셨다. 인상을 찌푸린 채 찬열을 빤히 올려다보자 뻔뻔히 밥을 먹자던 목소리와는 달리 눈을 마주치지 못 하고 있다. 공기 중에 날리는 개털에 코를 훌쩍거리기까지 하니 그 꼴이 딱 엄마한테 혼나는 어린애다. 찬열은 제 허벅다리에 자꾸 주둥이를 들이대는 개를 밀어내면서 꿋꿋하게 날 선 시선을 받아내었다. 심장이 뻐근하다. 두 사람 사이를 메우는 침묵에 질식하기 직전에 찬열이 먼저 움직였다. 순식간에 헤어지기 전으로 돌아간 것처럼 눈에 익은 장면이 그려져 주먹을 꽉 쥔 종대가,




“너, 내가 우스워?”




목도리를 너른 등을 향해 집어 던졌다. 제대로 맞히지 못한 것에 더 화가 치민다. 바닥에 떨어진 것을 봄이가 앞발로 짓이겼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부엌에 서서 밥그릇을 꺼내놓고 있는 찬열은 돌아보지도 않고 묵묵히 상을 차린다. 네가 우스웠던 적은 한 번도 없다고, 우스워서 이런 미친 짓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고 변명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미 화가 났으니 어떤 말도 제대로 들어주지 않을 걸 안다. 

입술을 깨문 종대의 가슴팍이 분에 못 이겨 오르락내리락 들썩거린다. 눈씨가 따가울 법도 한데 끝까지 모르쇠다. 보온병에 담긴 국을 그릇에 따라내고, 밥을 푸고, 냉장고에서 김치를 꺼낼 때는 ‘반찬도 없네.’라고 혼잣말까지 했다. 단출한 상차림을 마치고 식탁에 앉고는 발로 맞은편 의자를 밀어낸다. 앉아. 처음 헤어졌다 다시 만났을 때처럼 어물쩍 장난스러운 사과를 받아주길 바랬지만 헛된 바람이었나 보다. 하긴, 그 때는 어렸지.




“겨울 아니었으면 안 데리고 들어왔어.”


“밥 먹고 얘기해.”


“할 얘기 없어.”


“난 있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찬열이 종대에게 성큼 다가섰다. 억세게 팔목을 잡은 손이 곧바로 힘껏 뿌리쳐졌다. 신경질적으로 치켜 올라간 눈이 경멸스럽게 찬열을 바라본다. 아이러니하다. 싸움 중에 자주 종대의 얇은 팔목을 함부로 잡아당기고 아프게 끌었던 게 해선 안 되는 행동이었다는 걸 지금에서야 깨달았다. 오히려 애지중지 쓰다듬을 수 있을 때에 왜 그런 짓을 했을까? 그 때, 왜 넌 가만히 있었어? 사랑해서? 그럼, 지금은?




“넌 다 정리됐을지 몰라도…… 난 아직이야. 일방적이었잖아, 김종대. 부탁이다, 앉아.”




벌겋게 부은 피부를 짜증스럽게 문지르는 종대에게 나지막이 청했다. 어쩐지 찬열의 눈은 여느 때보다 간절해 보인다. 더 이상 찬열을 상대로 감정을 소모하고 싶지 않은 종대는 일부러 크게 한숨을 내쉬며 그를 지나쳐 식탁으로 향했다. 이렇게 대하지 않으면 속절없이 흔들리는 마음을 들킬까 봐 불안했다. 찬열은 그 속도 모르고 마치 다른 사람 같은 싸늘한 태도에 혀를 내두르다가 그 맞은편에 앉았다. 저한테는 으르렁거리더니 꼬리를 흔들며 허벅다리에 기대는 개를 쓰다듬으며 짓는 미소가 영 탐탁하지 않다. 개만도 못한 취급이군. 불현듯 종대가 죽고 못 살던, 본가의 애완견이 떠올랐다. 연애 초반에 저보다 그 개를 더 사랑한다고 말해서 한동안 삐쳤던 적이 있다.




“그 개는 뭐야? 구구는?”


“…….”


“걘 너무 크지 않아?”


“구구, 죽었어. 할아버지였잖아.”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충격에 젓가락 한 짝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다급하게 언제 죽은 건지 묻는 말에 그냥, 이라고 동문서답을 한다. 종대는 밥알을 하나하나 세는 것처럼 젓가락질을 하면서 입을 꾹 다문다. 최근에 죽은 것이 아니라면, 찬열이 몰랐으면 안 되는 일이다. 조바심이 일어 다시 재촉했다.




“여름에.”


“왜 말 안 했어?”




또 그냥, 하고 말을 자른다. 급히 우리의 지난여름을 뒤적거리다가 마음에 걸리는 한 페이지를 긁어냈다. 잠결에 훌쩍거리던 것을 들었는데 왜 그러는지 묻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으면 말하고도 남았을 테니까 아무것도 아닐 거라고 속단했고, 밤중에 본가에 가봐야 한다고 약속을 취소했을 때도 일찍 집에 가서 쉴 수 있겠다며 그 소식을 반가워했다. 그 뒤로 종대는 한 동안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허하게 굴었는데 피곤해서 그렇다는 말에 무슨 일이 있는 게 아니라 다행이라고 여겼었다. 얼굴로 홧홧하게 열이 오른다. 숙취인지 스스로에 대한 역겨움인지 모를 것들이 뱃속에서 울렁거린다. 네가 나 모르게 흘린 눈물을 헤아릴 수나 있을까?




“밥은 도저히 못 먹겠다. 할 얘기 있다고 했지?”


“어? 어어……”


“말해.”




입이 바짝바짝 마른다. 되돌리자고 말할 자격이 없다는 걸 알지만,




“헤어지기 전에 우리 괜찮았잖아, 그런데 갑자기……”


“갑자기 결정한 거 아니야. 그리고 일방적이라고 생각하지 마.”


“말은 바로 해, 통보였어.”


“헤어지자고 말해주길 바란 거 아니었어?”


“그런 적 없어.”


“억지 부리지마, 우리가 예전 같지 않다는 거 너도 느꼈잖아.”


“5년이야, 변한 게 아니라 편하고 익숙해진 거고.”


“편하고 익숙한 게 그런 거였어? 언제, 언제부터 그게 그렇게 아프고 힘든 거였는데?”




말문이 턱 막힌다. 칼로 가슴을 무참히 찢어발기는 것 같다. 말간 얼굴이 아무렇지도 않게 저가 낸 상처를 드러내는 게 이질적이어서 맞닿아 있던 시선을 피했다. 외면하고 있던 죄책에 직면하자 불쌍한 척 용서를 구하려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




“찬열아, 너 변했어, 근데 모른 척 했어. 말 꺼내면 싸울 거고 그러면 헤어질 수도 있으니까…… 헤어지기 싫어서. 처음엔 그냥 권태기인 줄 알았어, 오래 만났으니까 지겨워질 수 있다, 잘 지나가면 또 좋아질 거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참았어, 연락이 안 돼도, 무관심해도…… 너랑 끝내는 것보단 나으니까, 그렇게 오래 지나니까 알겠더라고. 나만 억지로 이 관계를 끌어가고 있다는 거.”


“아냐, 우리 바빴잖아, 그래서 만나는 시간도 줄어들고……”


“핑계야.”


“이해한다며…… 이해한다고, 이래도 좋다, 저래도 좋다 한 거 너잖아, 김종대.”


“응, 이해했어. 근데 괜찮았던 적은 없어.”




너무 힘들었어. 마치 오늘 날씨가 좋다고 말하는 것처럼 태평한 표정에 가슴이 먹먹해진 찬열이 할 수 있는 거라곤 차오르는 울분을 말리려 애쓰는 것뿐이다. 괜찮다고 한 적은 없다. 종대는 줄곧 안 괜찮았던 거다. 힘들고 아프고 싫은데 참았던 거야. 싸움 대신 이해라는 고통을 홀로 끌어안은 거였다. 나처럼 이기적인 새끼 옆에 계속 있고 싶어서. 그것도 모르고 이 사랑스러운 애를 쉬운 사람으로 전락시켰다. 입술이 떨리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일부러 봄이에게로 더 고개를 숙인 종대가 상처를 잇는다.




“너한테 기대하던 것들을 포기하고 나니까, 마음이 편하더라.”


“내가 잘못했어, 종대야, 우리……”


“무슨 말 하는지 모르겠어? 다 끝났어, 난 이제 너……”


“그만해.”




식탁에 올려진 종대의 손을 그러쥔 찬열이 애원했다. 미련까지 갖지 못하도록 싹을 자르려는 의도가 다분한 말이 흘러나올까 봐 두려워서 미쳐버릴 것 같다. 차라리 그가 돌아오기 전에 도망쳤어야 했다는 후회가 밀려들었다. 종대는 천천히 손을 밀어냈다. 아무래도 찬열을 봐줄 생각이 없는지 어여쁘지만 모진 목소리가 다시 식탁 위로 흩어진다.




“너 선보러 간 날, 집에서 혼자 라면 끓여먹고 있는데…… 하, 내가 네 인생 망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 우리 사귀기 전에 그랬잖아, 마당 있는 집 사는 게 네 꿈이라고.”


“쓸데없는 소리할 거면……”


“그 마당에 그네 놔줄 거라고, 애들 놀게.”


“그건……”


“처음부터 우린 아니었던 거야.”


“닥쳐. 너 만나기 전이야, 지금 꺼낼 필요 없는 말이고. 이제 와서 이런 말 하는 거 구질구질한 거 아는데…… 몰랐어, 네가 상처받고 있던 거.”


“나도 몰랐어, 그래서 이렇게 된 거야. 찬열아, 이제 그만하자…….”


“네가 말해줬으면 나, 안 그랬을 것 같아.”


“너, 끝까지……”


“나도 내가 좆같아,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고! 씨발…… 다 변명으로 들리는 거 알아, 근데 죽도록 후회되고 돌아가고 싶은 걸 어떡하라고.”




너 진짜 나쁜 놈이구나. 떨리는 목소리에 가슴이 시큰하다. 종대의 연한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 보기 싫어서 팔을 뻗어 훔쳐버렸다. 울고 싶은 건 저도 마찬가지다. 몇 번이나 손가락 끝으로 닿을 듯 말 듯 눈가를 쓸었다. 하늘하늘한 머리칼이 손등을 간질이는 게 이렇게 벅찬 일이 될 줄 전엔 미처 몰랐다.




“나 아직 사랑하지?”


“찬열아.”


“대답해.”


“싫어, 이제 그만 가.”




안쓰러운 것과 답답한 건 별개다. 아직도 종대가 저에 대한 마음을 완전히 정리하지 못했다는 확신에 차 눈빛을 형형하게 붉혔다. 종대가 벼랑 끝에서도 그까짓 거짓말 한마디를 내뱉지 못해서 자신처럼 이기적이고 못된 놈에게 휘둘리고 있는 게 가엽다. 그렇다고 기고만장해진 건 아니다. 그 동안 종대가 숨겨온 것들에 찬열 또한 적잖이 상처를 받았다. 처음부터 우린 아니었던 거야. 애정을 쏟아 부었던 곳이 밑 빠진 독이었다는 사실에 배신감마저 느꼈다. 다신 찾아오지 말라고 이름 모를 개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가기 전에 남긴 인사가 매몰차기 그지없다.




“사랑해.”




말하고 싶던 건 사실, 이것뿐이다. 닫힌 방문에 숨처럼 소곤거린 찬열은 쌀쌀한 집을 빠져 나왔다. 주차되어 있던 차에 올라 잠시 보고 있으니 창문을 닫는 인영이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물끄러미 아파트를 올려보다가 에취! 에취! 연거푸 기침이 터져 나와 얼른 창을 내렸다. 외투에 붙은 개털이 겨울바람에 나부껴 차 안을 날아다닌다. 집 안에선 어떻게 괜찮았나 싶다가, 픽 웃어버렸다. 혀끝이 씁쓰름하다. 용서해주지도 않을 거면서 사랑옵게 구는 종대가 벌써 그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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