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렁이 모양 젤리를 낚아채는 집게손가락이 날래다. 입 속으로 떨어뜨린 것을 오물오물 맛있게도 먹는다. 허리 아래 깔려 있는 온열 패드가 따뜻해서인지 아니면 조용한 탓인지 다갈색 눈망울에는 잠이 가득하다. 다리에 말린 담요를 끌어당기면서 고개를 젖혔다. 식탁 아래로 쭉 뻗어있는 두 발이 보인다. 제 것과 같은 모양을 가진 실내화가 신겨져 있다. 이따금 한 쪽 다리가 흔들거렸다. 리에프는 몇 시간째 열심히 과제 중이다. 방해하면 안 되겠지? 야쿠는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깊게 눈을 감았다. 웅웅거리는 세탁기의 소음이 점차 흐려진다.




“음……”




가슴 위로 더해진 무게에 인상을 쓰기에 얼른 손을 썼다. 잠꾸러기. 리에프가 잠든 연인에게 팔베개를 해주며 속살거린다. 담요 속 고양이가 따뜻하다 못해 뜨겁다. 몸통에 제 다리를 얽으면서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전이되는 체온. 이대로 한 몸이 되었으면, 하고 엉뚱한 생각을 하며 키들거렸더니 야쿠가 크게 뒤척거렸다. 시끄러워. 다소 신경질적인 웅얼거림과 반대로 얇은 팔목이 은색 머리칼을 부드러이 헤집는다. 빨래 냄새가 퍼진 집 안이 어둑하다. 잠들 때만 해도 밝았는데 어느새 땅거미 진 거실로 베란다 빗살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몇 시야?”


“7시.”


“많이 잤네, 과제 다 했어?”


“대충이요, 보고 싶었어요.”


“풉…… 느끼해, 저리가.”




여전히 머리카락을 만지작대던 야쿠가 옆으로 돌아누웠다. 꽤 오랫동안 몸을 데워주던 온열 패드와 떨어진 등에 한기가 돌았지만 곧 리에프의 손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좀 나아졌어요? 물으면서 그는 옷 속으로 손을 넣어 땀이 베여 촉촉해진 피부를 쓸었다. 괜찮다는데도 끈질기게 등허리를 꾹꾹 주무른다. 그렇게 한들 가실 고통이 아니지만 말리지 않는 이유는 그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편하길 바라기 때문이다. 입덧이 잠잠해지자 요통이 생겼다. 허리가 끊어질 것처럼 아프다. 아기가 커지는 만큼 시시각각 몸이 망가진다. 이를 지켜볼 수밖에 없는 사람도 고통스러운가 보다. 가끔 저를 보는 얼굴이 일그러지면 저절로 알아진다. 괴로워 죽겠다는 표정이다. 지금처럼.




“둘째는 제가 가질게요.”


“그러시던지.”


“흘려듣지 마요─ 방금 그 말투, 나빴어.”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니까 그렇지.”


“그럼 또 이렇게 고생하는 걸 보고만 있으라고요?”


“저기요, 애초에 두 번째를 허락한 적 없습니다만.”




아직 나오지도 않은 아기를 사이에 두고 쓸데없는 입씨름이다. 두런두런. 어둠으로 스며드는 그들의 소리.




“일단 얘부터 낳고 보자.”




귀엽게 배를 두드린다. 리에프는 마른 등허리를 누르던 손을 옆구리에 얹고 그의 입가에 입술을 내렸다. 마주보고 누워서 둘째를 갖네 마네 성화일 땐 언제고 연신 쪽쪽거리기에 바쁘다. 배고파요. 나도. 하다못해 저녁 메뉴를 꼽아보면서 손깍지를 끼고 장난하느라 불빛이 켜진 건 한참 뒤다.

전골을 해주겠다고 나선 고양이 옆에서 채소를 다듬던 리에프가 슬쩍 웃음이 터진 입가를 가린다. 야쿠가 갈아입고 나온 파자마 차림은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다. 펑퍼짐한 원피스 형태에 아랫단에는 작은 프릴이 달려 있다. 야쿠의 어머니가 이걸 사오셨을 때, 그들은 두 말 할 것도 없이 ‘공주 잠옷’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레이스로 짜인 헤드 드레스도 함께 들어있었지만 야쿠가 몇 번인가 발로 차 어딘가에 처박아버려서 행방이 묘연해졌다. 죽어도 안 입겠다는 걸 조르고 졸라서 한 번 입게 했더니 그 뒤로는 제일 좋아하는 잠옷이 되었다. 촉감이 보들보들하고 가벼워서 이 만큼 편한 옷도 없다나 뭐라나.




“아아!”


“변태같이 웃지 마라.”


“알았으니까 발 좀!”




야쿠에게 발가락을 밟힌 리에프가 우스꽝스럽게 팔을 퍼덕인다. 발을 떼자 다시금 올라가는 저 얄미운 입 꼬리를 보라. 야쿠가 눈을 흘겼다.




“맛있게 해줘요, 모리 공주님─”


“국자로 맞아 볼래?”




뒤로 와서 어깨를 끌어안고 능청스러운 목소리로 이죽거린다. 리에프는 제 가슴에 닿아있는 작은 머리통에 턱을 비볐다. 한 손에 들린 국자, 다른 손으로는 살살 소금을 치는 게 내려다보인다. 야무진 손놀림이지만 콩깍지 쓰인 눈에는 그저 즐거운 소꿉놀이다. 저리 가! 옆구리로 날아든 팔꿈치에도 꿋꿋하게 등 뒤에 딱 붙어 서서 입술로 귓바퀴를 앙앙 물고 머리카락 끝을 킁킁거리다가,




“야쿠상…… 우리, 부엌에서 야한……”


“가위가 어디 있지?”


“으악, 잔인해!”




주방 가위를 들고 쫓는 야쿠를 피해 줄행랑 친 리에프가 욕실로 숨어버렸다. 문 열어! 쾅쾅 두드리다가 문에 귀를 댔다. 불을 껐다 켰다 하는데도 반응이 없다. 그러다 벌컥 열린 틈으로 번뜩이는 녹색 눈동자와 마주쳤다. 이번엔 멋모르고 돌아선 야쿠가 도망을 친다. 얼마 못 가 붙잡힌 그는 번쩍 들려 식탁에 앉혀졌다. 식탁 모서리를 짚고 선 리에프가 짐짓 무표정으로 손을 내민다. 장난기 그득한 고양이가 그 손바닥에 손을 얹었다. 낮게 웃은 리에프가 위험하다고 말했다. 가위를 내밀자 잘했다는 듯이 눈가에 입을 맞추고 돌아선다. 가위가 제 자리를 찾는다. 곧 허리를 숙여 다가오는 리에프에 시야가 가려졌다. 너의 제 자리는 나구나. 들추어진 옷이 허벅지 위로 살랑거린다. 까르르 번지던 웃음이 그쳤다. 애정이 꽃일어 전골만 속을 끓일 뿐이다.











왜 사랑이 전부가 될 수 없다는 거지? 꽉 막힌 도로를 불안한 눈빛으로 살피던 리에프의 한숨이 차 바닥으로 떨어진다. 핸들을 움켜쥔 화기 어린 손을 겹쳐 잡은 야쿠가 애써 웃는다. 허나 그 미소 또한 씁쓸해서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들의 목적지는 주인공이 초대되지 않은 상견례였다.

우연히 아리사의 전화를 받게 된 어젯밤의 일이다. 가출한 후로 리에프가 가족들의 연락을 일방적으로 거부하고 있음을 어렴풋이 눈치 채고 있던 야쿠는 한참을 망설인 끝에 울리는 전화를 집어 들었다. 리에프는 욕실에 있었다. 계속 피할 수도 없고, 하루 빨리 명확히 다듬어야 할 일이기도 했다.




‘드디어 받는구나! 너 때문에 돌아버리겠어, 레보치카!’


‘아, 저……’


‘엄마, 아빠가 얼마나 화가 나셨는지 상상도 못 할 거야!’


‘저기!’


‘너한테 정말 실망이야! 다 망치게 생겼어, 아기가 태어나면 네 아빠는 멍청이라고 일러줄……’


‘안녕하세요, 야쿠 모리스케에요. 지금 리에프가 씻고 있어서…… 죄송해요.’


‘아, 실례했습니다.’




어색한 침묵이 감돌아 후회했지만 곧 그녀가 상냥한 목소리로 아기는 잘 있나요? 하고 물어봐 주었다. 건강하게 자라고 있다고 했더니 다행이라는 혼잣말이 휴대폰 너머로 전해져 그나마 위안이 된다.




‘혹시 내일 부모님끼리 만나는 거 알고 계세요?’


‘네? 그게 무슨……’


‘저희 부모님이 댁에 청하신 일이에요, 리에프가 제멋대로 나가버려서 화가 나셨거든요.’




이럴 수가! 혼란스러운 통화가 끝나자마자 어머니께 전화를 걸었다. 야쿠의 어머니는 이런 일을 앞두고 일언반구도 없을 분이 아니다. 모리! 밝은 목소리가 예상했던 대로 아기의 안부부터 물었다. 어머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다짜고짜 어떻게 된 거냐고 묻자 시치미를 뚝 떼시더니 종반엔 사실대로 털어놓으셨다.




‘그 쪽은 상견례가 아니라고 딱 자르더라, 그래서 너한테 말 안 했어. 모리, 신경 쓰지 마. 사자 사위가 탐나도 그런 가족이라면 이쪽에서도 사양이란다.’


‘정말 괜찮으신 거예요?’


‘그럼! 그나저나 언제부터 만난 거야? 아기로도 모자라 선조 귀환을 낚다니, 누가 내 자식 아니랄까 봐.’




이미 얻을 건 얻었잖니? 아기를 소유물로 지칭하는 말이 날카로이 귀를 파고들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어도 야쿠는 그녀의 소중한 자식이다. 아기까지 벤 고양이를 탐탁히 여기지 않는 하이바 가족의 태도에 화가 나신 게 분명했다. 게다가 어머니는 부족할 것 없이 야쿠 가문의 사람이었다. 아무리 선조 귀환이라도 감히 우리 집안을 무시할 순 없다고 생각하고 계실 거다. 한층 깊어진 갈등만을 직시한 채 야쿠와 리에프는 소용돌이 가운데 섰다. 각각 다른 이유로 노기 충만한 부모들이 만나 좋은 이야기가 오갈 리 만무하다.




“제 잘못이에요, 이렇게 미루는 게 아니었는데……”


“됐어, 나도 똑같아.”


“그래도…… 좋은 분들인데, 저한테 화가 나서 그러신 거예요.”




속상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리에프의 입술이 퉁퉁 부었다. 바로잡지 않은 오해들이 좋은 사람들에게 편견을 입혀버렸다. 난 역시 애송인가 봐. 야쿠는 상심한 리에프의 손등을 간질이며 몇 번이나 괜찮을 거라고 말했다. 그건 저에게도 해주고 싶은 말이다. 끝까지 이 애와 함께할 수 있을까? 소중한 사람들이 우리를 용서하지 않으면 어떡하지? 아득한 공포가 호시탐탐 저를 노린다. 오늘따라 딱딱하게 굳은 배를 쓰다듬으며 강해져야 한다고 되뇌었다. 지금껏 일은 일대로 벌여놓고 눈 가리고 아웅이었다. 마음 한 구석이 찜찜하던 걸 상기하면 차라리 잘된 일이다. 이런 생각은 긴장감을 달래는 데에 조금 효과가 있었다. 고급 일식 음식점 주차장에서 앞선 차를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할머님……”


“제법 배가 나왔구나.”




비서의 부축을 받으며 자갈 바닥을 디딘 노부인의 흑색 기모노에 윤슬이 인다. 야쿠를 뒤따르던 리에프는 저로 향해지는 눈씨에 움칠 떨었다. 퍼뜩 고개를 숙였지만 몸을 세웠을 땐 이미 저만치 가버린 뒤다. 재빨리 그녀를 에스코트하려 팔을 뻗은 야쿠는 단호한 손길에 저지당하곤 물러났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가문과 더불어 기업을 이끄는 수장이었으니 그에 마땅한 위엄이 흘러넘치는 분이다. 아기 덕분에 의기양양하게 마주할 용기가 생겼는데, 오늘은 아니다. 죄라고 할 것까지는 없지만 벌여놓은 일이 있어 그는 잠자코 있었다. 입이 두 개여도 할 말이 없다. 얼른 야쿠의 어깨를 감싸 안은 리에프는 그녀의 기백에 몰래 혀를 내두르며, 그 동안 고양이가 왜 그리 벌벌 떨었는지 단번에 이해했다.




“상견례가 아닌 줄 알았으면 오지 않았을 게다.”


“그게……”


“뒷방 늙은이도 눈이 있고 귀가 있다. 잘못된 처신으로 망신살이 뻗쳤구나, 경종 중에서도 하찮은 고양이가 높은 곳에 오르려거든 제대로 올랐어야지.”




그녀의 말은 언중유골이라, 한 마디 한 마디가 가슴을 난도질했다. 분명 무뎌진 고통인데 사랑하는 이의 옆이라서 새삼 극심하게 차오른다. 리에프에겐 한없이 귀한 사람이던 저가 한 순간에 바닥을 내보인 것 같아 수치심이 일었다. 고개를 숙이자 부푼 배가 눈에 든다. 나의 기적. 덩달아 아기도 보잘것없는 존재로 전락시킨 것 같은 기분에 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리에프의 가족에게도 이런 취급을 받을까 줄곧 두려웠다. 지금은 사자의 애정을 등에 업었지만, 그게 없다면 아무것도 아닌…… 응? 자괴하고 있을 틈을 빼앗겼다. 어깨를 안은 큰 손이 분에 못 이겨 부들부들 떨리는 걸 인지하자마자 아니나 다를까, 리에프의 고함이 이어졌다.




“그렇게 말씀하지 마세요, 야쿠상은 잘못한 거 없어요!”




혼현을 개방시킨 바람에 포효로 뒤바뀐 음성이 귀를 찢을 것처럼 거세어서 지나가던 반류 몇몇이 꼬리를 내빼며 질색을 했다. 평범한 원인들마저도 이쪽을 보고 있었다. 리에프가 달려들 기세로 그녀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그만해! 놀란 야쿠가 갈기를 잡아채지 않았다면 구설에 올랐을 것이다. 붉은 꽃이 핀 기모노 사이를 헤쳐 나온 검은 꼬리가 경계하듯 털을 세웠다. 허깨비는 아닌 모양이로군. 반면 할머님의 면면은 가소로운 비소로 물들었다.




“모리, 거기 있는 백사자를 진정으로 갖고 싶은 게냐?”


“네?”


“두 번 묻게 하지 말거라.”




야쿠는 고개를 들어 옆에 딱 버티고 선 사자를 올려 보았다. 큰 할머님 앞에서 이 소란이면 어쩌자는 거야? 기가 찬다. 제 일이라면 앞뒤 잴 것 없이 나서서 말썽을 일으키는 사자가 내뿜는 콧김이 머리카락을 흩날리게 했다. 저도 모르게 피식 웃어버린 야쿠는 헛기침으로 목소리를 갈무리하고는 대답했다.




“네, 함께 있고 싶습니다.”




말없이 돌아서는 그녀의 뒤를 따르면서 야쿠는 여전히 씩씩거리는 리에프의 등허리를 안아 달래었다.

안내 받은 방에서 대치하듯 마주한 가족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분위기가 냉랭하다. 처음 뵙는 리에프의 부모님은 야쿠의 입을 떡 벌어지게 만들었다. 큰 키에 서구적인 외모가 돋보였다. 혼혈인 어머니는 그렇다 치고 아버지가 일본어를 유창하게 구사했을 때에는 너무 신기해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리에프는 쪼르르 앉은 야쿠 가족에 흠흠하게 웃어버렸다. 닮은 구석은 없지만 몸집이 왜소한 것만큼은 똑같아서 마치 러시아 전통 인형, 마트로시카 같다는 게 그들의 첫인상이었다.




“모리, 너 의외로 외모를 중시하는구나?”


“들리겠어요, 어머니.”




부모도 서로의 아이에게 제각각 감상을 써 내린다. 막상 출중한 외모의 리에프를 보자 눈 녹듯이 앙금이 풀린 야쿠의 어머니는 앞에 놓인 석화 요리를 그에게 밀어주다가 모두의 눈총을 받았다. 굴하지 않고 장어 꼬리를 수저에 은근슬쩍 올려준 것을 사자가 넉살 좋게 받아먹은 후로는 완전히 기권해버리셨다. 숨 막히는 정적 새로 젓가락 부딪히는 소리만 들린다. 꼬르륵. 이렇게 어려운 자리인데도 넌 배가 고프니? 괜스레 아기에게 탓을 돌린 야쿠는 진수성찬에 눈이 돌아가 연달아 침을 삼켰다. 상견례 아닌 상견례지만 부모님이 고른 식당만큼은 최고급 생선을 전문으로 하는 이름 있는 곳이다. 깨작깨작 눈치껏 움직이던 수저가 점차 속도를 더해간다.




“몇 개월이랬지?”


“4개월이요, 조심해야 될 땐데 엄마, 아빠 때문에 이게 뭐에요?”


“철없이 가출한 네 잘못이지!”


“잘 먹네.”


“그 동안 입덧 때문에 거의 굶었거든요.”




저런. 리에프의 부모님이 야쿠를 따라 요리조리 움직인다. 제 자식들은 전부 키가 커서 이렇게 작은 또래를 보는 것이 참 오랜만이다. 음식으로 가득 찬 두 볼이 터질 듯하다. 그들은 반류가 아니기 때문에 리에프의 아기를 가진 야쿠를 굽어 살피게 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생식 능력이 떨어지는 반류 사회에서는 거래가 만연해 혈맹이 약한 편이다. 그런 사회적 분위기가 원인에겐 영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별안간 리에프가 조상의 영향을 받아 반류가 되어 그런 거래에까지 손을 뻗쳤지만 원래 저희의 가치관을 따르자면 이 연인을 반대할 이유가 없다. 아기도 생겼고 둘이 좋다는데 무엇이 문제랴? 홧김에 리에프 버릇을 고쳐주려다가 막상 아기가 잠들어 있는 배를 마주하자 오만 생각이 다 쏟아진다. 야쿠의 입가에 묻은 양념을 발견한 리에프의 아버지가 망설이다가 냅킨을 내밀었다. 고맙습니다. 활짝 웃는 밤색 눈동자에 매료된 두 사람이 속닥거린다.




“고양이라고 하지 않았나? 내가 보기엔 햄스터일 것 같은데?”


“그러게요. 어머, 새우를 한입에 털어 넣었어요.”




향긋한 꽃내음이 녹은 차를 마시고 식사가 거의 끝나갈 즈음이 되어서야 앞날에 대한 이야기가 다시 불거졌다. 급속도로 어색해진 공기에 식탁 아래로 발바닥을 붙이고 꽁냥꽁냥 눈짓을 하고 있던 사자와 고양이가 등을 세운다.




“굳이 따지자면…… 계약이 가장 큰 문제겠지요.”


“맞습니다, 큰어머님. 이런 경우는 드물어서 계약서에 혼인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하지만, 거래 상대와 관계 발전은 계약위반이죠.”


“계약서만 놓고 보면 귀 댁의 하이바 리에프는 아기에 대한 권한이 전혀 없습니다만!”




화기애애한 것도 잠시였다. 높은 언성이 오가는 사이에서 야쿠의 눈동자가 잘게 떨린다. 차라리 기절이라도 해서 이곳을 빠져나가고 싶었다. 모든 언어가 저희를 향해 폭력을 퍼붓는 것 같다. 그 때, 고고한 자태로 찻잔을 내려놓은 노인이 몸을 일으켜 앞에 섰다.




“할머님, 그렇게 갑자기 일어나시면……”


“보아하니, 너희 부모 중에 혜안을 가진 이가 없구나.”


“말씀이 지나치세요, 큰어머니!”


“이 애들은 이미 향방을 결정했습니다. 우리, 어른들이 할 수 있는 건 뒤치다꺼리뿐이라오.”


“그렇다고 계약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아기가 생겼어도 둘이 만난 건 고작 몇 개월입니다.”


“혼인이라면, 집안끼리의 이치도 맞아야지요!”




잠시만요! 앞으로 나선 리에프가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




“말씀 중에 죄송한데, 이대로는 도저히 끝날 것 같지가 않아서요. 이렇게 된 건 다 저 때문이에요, 잘못했습니다. 할머님 말씀대로 저희는 같이 있기로 했어요, 그건 절대 안 변해요! 그러니까 한번만 봐주세요, 집 나간 거 죄송하고 비밀 연애한 거 다, 다 잘못했어요!”




갑작스런 전개와 리에프의 기백에 모두 어안이 벙벙한 와중에 야쿠가 슬그머니 그 옆에 꿇어앉았다. 이럴 땐 죽이 잘 맞는다. 엉거주춤 배를 감싼 그를 보는 눈동자들이 안절부절 못하고 나부꼈다.




“네, 저희가 잘못했어요. 결혼이든 뭐든 아무것도 안 해도 되니까 그냥 리에프가 제 옆에 있게만 해주세요.”


“에? 그런 건 해야 되지 않아요?”


“빌기나 해, 윽……”




뒷골부터 허리까지 찌릿한 고통이 훑고 지나가 인상을 찌푸리자 그 곳의 손들이 죄다 그에게로 뻗쳤다. 빨리요! 리에프가 펄펄 날뛰며 어른들을 닦달한다. 당장 용서고 허락이고 하지 않으면 야쿠를 들춰 업고 도피라도 갈 기세였다.




“야쿠상 힘든가 봐요! 땀나잖아요! 저희가 잘못했다고요!”


“이, 일단 일어나!”


“받아주셔야 일어나죠.”


“그럼…… 우선, 같이 있는 건 허락하는 게 어떻습니까?”


“그래요, 저러다 배라도 뭉치면 어떡해요!”




얼떨결에 내뱉은 허락을 의심하기도 전에 리에프가 야쿠를 일으키며 와아! 감사합니다! 잘 살게요! 선수를 쳤다. 명분을 잃은 부모들이 멍한 얼굴로 박수치는 것을 보며 호탕하게 웃은 노부인은 어쩔 줄 몰라 하는 손자를 따사로운 눈길로 쓸었다. 우여곡절 끝에 화합을 이룬 뒤에는 큰할머님이 오랜 식견으로 어른들을 설득해서 모든 게 순조로웠다. 그녀는 사자를 갖고 싶다던 야쿠의 바람을 이뤄주기 위해 리에프의 부모에게 자존심이 없는 사람처럼 굴었다. 지금껏 본 적이 없는 모습이다. 계약서를 파기하는 조건으로 위약금 배상은 물론, 장기적인 사업 투자까지 약속하시며 부디 고양이를 어여삐 봐달라고 고개를 숙이셨다. 보는 사람이 민망할 정도로 저자세였다. 사이좋은 둘이 싹싹 빌기 전부터 진즉 마음이 풀렸던 양가 부모는 못 이기는 척 화답하고는 손을 맞잡으셨다. 이렇게 아름다운 결말은 일절 상상해본 적이 없다. 식당 앞머리에서 할머님께 혼이 나 찡했던 건 지금에 비하면 약소하다. 마음이 헤아려진다. 사랑 받을 자격이 충분한 야쿠가 모든 게 자기 잘못인 양 겁을 내는 것이 마음에 안 들었던 그녀는 문 앞에서 절 기다리는 이에게로 손을 뻗었다.




“아직 기백이 부족하다, 숙여야 할 때와 뻗대야 할 때를 구분하렴.”


“오늘 일은…… 감사해요.”


“그럼, 안아주지 않으련?”




경직된 팔이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당황스러워 뭐라고 하셨어요? 하고 묻는 얼굴로 우뚝 서 있었다. 뒤에 있던 리에프가 등을 밀자 그제야 찻잎의 향기가 베인 기모노 자락을 부여잡았다.




“아가, 기특하구나.”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는 손은 미약하지만 거세게 마음을 흔든다. 세상 무서울 게 없다. 이렇게 든든한 뒷배를 두고서 홀로 전전긍긍한 건 어리석은 짓이었다. 가족들을 태운 승용차가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곰비임비 쌓여 있던 너더분한 일이 모조리 사라진 것처럼 후련해서 눈물이 쏟아진다. 목구멍이 울렁거린다. 저는 혼자인 적이 없었다. 가족. 리에프가 만들어준 기적이 야쿠가 간절히 바라던 것을 찬란하게 선사한다.




“야쿠상이 정말 좋은 사람이라서 주변에 좋은 사람들만 있나 봐요.”


“…….”


“그래서, 저도 그렇게 되고 싶어요.”




사랑스러운 연인으로, 가족으로, 아빠로, 친구로, 당신만의 사자로, 오로지 야쿠 모리스케만을 위한 좋은 사람으로 곁에 있을게요. 야쿠는 리에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더 이상 제 앞에서 약한 모습을 감추지 않는 것이 기뻐 가슴이 떨린다. 눈물이랑이 난 뺨에서 눈을 떼지 못 하겠다. 함께이면 언제까지고 반복될 감정. 그는 듬쑥하게 야쿠의 손을 잡았다.




“사랑해요, 내가 진─짜 행복하게 해줄게요!”




나도야. 훌쩍거리는 콧등에 가벼이 입을 맞추었다.




“저도 안아주면 안돼요?”




리에프는 가만히 안기는 몸을 포옥 감싼다. 기쁜 의미가 담긴 눈물이라 그렁그렁한 것을 말리지 않았다. 어깨를 떨면서 끅끅 우는 야쿠의 머리를 끊임없이 쓰다듬었을 뿐이다. 연신 사랑한다고 속삭였다. 울음이 잦아들 때까지, 그가 마음껏 행복에 잠기도록 리에프는 기다렸다. 기우는 달빛이 그들을 비춘다.




“돌아가자.”




우리의 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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