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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에야쿠] 순정의 가치 9

섹스피스톨즈 AU



















고양이의 집이 분주하다. 부엌에 서서 채소를 썰고 햄을 자르고. 한 쪽에서 구워지는 식빵이 타닥타닥 듣기 좋은 소리를 냈다. 한껏 들뜬 야쿠가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슬슬 도착할 때가 됐는데.”




미끄러지면 어떡해요? 눈이 와서 위험하다는 핑계로 한사코 집에 있자고 떼를 쓰던 리에프를 기다리는 중이다. 깨끗이 정리된 집으로 햇볕이 들어 눈이 부시다. 그걸 물끄러미 보고 있던 갈색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검은 빛을 띠었다가 돌아왔다. 손에 들고 있던 것들을 대충 도마 위에 밀어두고 거실 한복판에 드러누웠다. 따사로운 빛 아래에서 금세 나른해진다. 요즘 들어 쉽게 피로해져서 툭하면 누워있기 일쑤다. 감긴 눈이 팔에 파묻힌다. 잠이 들락 말락 몽롱한 중에 샌드위치를 만들려던 계획을 상기해냈다. 아무래도 샌드위치는 리에프한테 만들어달라고 해야겠다. 아기가 졸리데. 몸을 뒤척거리며 엄살을 부려본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그 친구인 사자도 마찬가지인가 보다. 딩동. 초인종 소리에도 일어나지 않고 심드렁히 앞치마에서 핸드폰을 꺼내 만지작댈 뿐이다.




[비밀 번호: ******]




리에프는 메시지를 확인하고는 하하 웃어버린다. 점점 움직이길 귀찮아하는 고양이의 행동에 ‘게으름’이란 이름을 붙이기엔 제 눈에 너무 어여쁘다는 생각 때문이다. 덕분에 현관 비밀 번호도 알게 되었으니 불만이 없다. 야쿠상과 아기가 기다리는 집. 설레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천천히 숫자 버튼을 눌렀다.




“야쿠상!”




아늑한 집 냄새가 얼굴을 감싼다. 감격스런 표정으로 마치 원래 제 것인 양 가지런히 놓여있는 슬리퍼를 신고 집 안으로 발을 들였다. 안녕. 창으로 새어 든 볕을 쐬느라 거실에 널브러져있는 야쿠가 팔만 들어 살랑거리는 게 짙은 초록 눈에 그려진다. 들고 온 과일 꾸러미와 작은 상자 하나를 식탁에 놓고 목도리를 끌러내는 리에프의 몸짓이 날래다. 그는 얼른 누워있는 옆에 벌러덩 몸을 누여 야쿠를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얼음장 같은 뺨을 이마에 비비자 야쿠가 짧게 혀를 차면서 다감한 손으로 어루만진다. 따뜻하게 입고 다녀.




“보고 싶었어요.”


“그저께 봤잖아.”


“매일 보고 싶다고요!”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이 제 품에 쏙 든 몸을 껴안고 머리카락과 이마에 수없이 입술을 내린다. 엷은 웃음이 흩어진다. 부쩍 잠이 많아진 걸 알아서 뚱딴지같은 시간임에도 자고 있었는지 묻자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면서 눈은 반쯤 감긴 채다. 그 위에 다시 입을 맞추고 느릿느릿 등을 쓸었다.




“샌드위치를 만들고 있었는데, 애기가 누우라고 했어.”


“나무늘보를 가진 거예요?”


“아닐 걸? 아빠가 사자니까.”




듣는 것만으로 벅찬 아빠라는 단어에 얼굴을 붉힌 리에프가 귀여워 고개를 들어 콧방울을 살짝 깨물었다. 다리를 얽은 채로 그들은 떨어질 생각이 없다. 식빵이 식은 지 오래다.




“생각 좀 해봤어요?”


“뭘?”


“같이 사는 거.”


“음…… 아직.”


“진짜 이상한 거 알아요? 아기까지 생겼는데 그런 게 생각해봐야 될 문제에요?”


“네가 잘 몰라서 그래, 다른 반류들은 이러지 않아.”


“반류가 아니라, 전 그냥…… 야쿠상을 좋아하는 사람이에요.”




뚱한 입술로 읊조린 리에프에 대꾸할 말을 잃고 빤히 쳐다보았다. 어쩜 표정 하나 안 바뀌고 저런 낯간지러운 말을 하나 몰라. 심각하게 웃지 말라는 말에 야쿠는 청개구리처럼 까르르 소리 내어 웃어버렸다. 사실 같이 사는 건 그리 큰 문제가 아니다. 그가 염려하는 건 당사자인 저희보다 두 집의 어른들이다. 야쿠의 집안이야 선조귀환에 중종인 새 가족을 반기지 못해 안달이겠지만 예상대로라면 하이바 가족은 그 반대일 거다. 아무리 원인이더라도 조상 중에 반류가 있었을 테고 선조귀환인 리에프의 짝으로 경종이 탐탁하지 않을 것이다. 이 답답한 속도 모르고 어린 사자는 쉼 없이 투덜거린다. 실랑이하자면 끝도 없을 것 같아 우선은 달래는 게 좋다고 판단했다. 반짝거리는 은발을 손가락으로 쓸어 넘기자 절 못 믿는 거예요? 하고 쓸데없는 것을 물으려던 입이 멈춘다. 뻣뻣한 목에 팔을 두르고 슬그머니 힘을 주어 끌자,




“이런다고 넘어갈 줄 알아요?”




눈썹을 치켜 올리고 그르릉거린다. 맹수 조련에 일가견이 생긴 야쿠는 속눈썹이 그늘지도록 눈을 내리깔고 느물느물 속삭였다.




“네가 원하는 게 단순히 동거라면이야 당장이라도 할 수 있는데.”


“단순히 동거, 그거 아니에요.”


“그렇다면 우리끼리 정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저도 알아요, 근데 야쿠상이 계속 남 일인 것처럼 말하니까……”


“나도 너랑 살고 싶어.”


“정말요?”


“그럼 매일 이렇게 할 수 있잖아.”




다시 당기니 이번엔 얌전히 끌려온다. 야쿠는 나지막이 키들거리면서 리에프의 입술을 아프지 않게 깨물었다. 그리고 곧 익숙하게 입을 맞추었다. 이마에 닿은 머리칼이 흐트러지는 것이 느껴진다. 맞물린 입술 새로 혀를 내어 문지르자 갈급한 숨소리를 낸다. 서로를 삼키는 접촉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바람에 정적을 수놓는 건 축축한 마찰음이다. 세상에서 가장 안락한 장소에서 사자와 농밀한 키스를 하고 있다는 사실에 자극 받은 야쿠가 집요하게 리에프를 괴롭혔다. 말캉말캉한 혀를 붙잡힌 채로 질끈 눈을 감고 있던 리에프가 결국 그의 어깨를 밀어냈다. 이성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하게 중심을 잡은 것이 다행이면서도 아쉬운 둘이다. 타액에 젖어 번드르르해진 입술을 엄지로 닦아주자 야쿠는 수줍게 눈웃음을 친다. 어리석은 투정이었다. 사탕발림만으로 행복에 겨운 주제에 야쿠의 고집을 꺾어보려 했다는 게 우습다.




“리에프, 나 배고파.”




군소리 없이 벌떡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허전해진 옆구리가 영 내키지 않아서 야쿠가 그 뒤를 따른다. 식탁 위 과일 더미를 헤집었다.




“드라마에서 임신하면 꼭 과일부터 찾던데, 그보다 샌드위치로 밥이 되겠어요?”


“어제부터 먹고 싶었어. 이건 뭐야?”




과일 옆에 놓인 상자를 집어 들었다. 엽산? 약인가? 사뭇 신중하게 식빵을 세모꼴로 자르면서 리에프가 초기에는 먹어주는 게 좋다고 설명하더니 덧붙인다.




“찾아보고 산 건데 혹시 모르니까 요코상한테 물어봐 주세요.”




그러겠다는 대답을 미루고 체리 하나를 집어 들었다. 새삼 그를 어리게만 여겼던 것이 머쓱해진다. 얼마 전에는 잠자리에서 반류 임신에 관련된 책을 읽고 있다고 해서 황당했던 적이 있다. 이제 막 글을 배운 아이처럼 밤새 이것저것 재잘거리더라.




“닦아줄게요.”




입 앞에서 낚아채간 열매를 닦아 금방 다시 입술에 대어준다. 촉촉한 체리를 받아먹은 야쿠가 너른 등에 머리를 기댄다. 샌드위치에 열중인 리에프의 허리를 껴안았다. 이런 보살핌에 익숙해져 조만간 청혼하는 건 자신이 될지도 모른다.




“회사는 언제까지 나가요?”


“아버지가 당장 휴직하라고 하셔서 다음 주중에는 정리될 것 같아.”


“다행이다, 출퇴근할 거 생각하면 걱정이었는데.”




팔불출. 아직 배가 편편한데도 유난인 걸 보면 벌써부터 만삭 때의 모습이 눈에 훤하다. 맛있어요? 응. 하나 더 먹어요. 이러다 굴러다니겠어. 그래도 귀여울 걸요? 귀엽다고 하지 말랬지. 마주 앉은 식탁 위로 흐드러지게 피는 일상적인 대화. 소소하지만 묵직하게 가슴을 채우는 변화에 그들은 감회가 새롭다. 앞으로 수도 없이 반복될 순간들이 기꺼워 일렁이는 눈빛이 허공에서 깊게 얽혔다.

엉겨 붙어서 텔레비전을 보다가 폭신한 러그 위 제 품에서 곤히 잠이 든 야쿠를 내려다보는 눈이 다정다감하다. 살금살금 곁에서 벗어나 침실에서 꺼내온 이불을 덮어주자 얼른 그 속으로 숨어버린다. 임신하면 혼현이 옅어진다더니 꽤 깊이 잠들었는데 고작 두 귀만 쫑긋해지고 몸은 그대로다. 그게 신기해서 살짝 이불을 들춰보던 리에프가 무언가 떠오른 듯 현관 쪽으로 향했다. 침실이며 드레스 룸, 욕실까지 집 구경을 하던 그가 유일하게 들어가지 못한 방이 있다. 여긴 안 돼! 야쿠가 손사래를 치며 필사적으로 막아내기에 포기한 척 했던 그는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볼록한 이불더미. 까치발을 하고 굳게 닫혀있던 곳에 다다랐다. 조심스럽게 문을 연 그는 의외로운 빈 방에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늘하늘한 커튼 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이 크지 않은 방을 가득 채운다. 불을 켜자 벽면에 나란히 늘어선 상자들이 보여 홀린 듯 안으로 들어갔다. 이게 뭐지? 일곱 개의 자그마한 상자 갑 위에 해만 다른 날짜가 아무렇게나 휘갈겨 쓰여 있다. 리에프는 제 손바닥보다 작은 것 중 하나를 집어 먼지를 불어냈다.




“아……”




터져 나온 탄식에 입을 막아야 했다. 빛바랜 상자들 위에 새겨있는 날짜. 그건 야쿠가 스무 살이 된 해부터 생일마다 하나씩 사 모은 아기 신발들이었다. 늘 담담한 체하던 눈빛에 어린 갈망을 왜 몰랐을까? 당신은 간절했잖아요. 서러울 것이 없는 지금인데 이곳에 홀로였을 그에 저마저 쓸쓸해지려 한다.




‘애기는 내 진짜 가족이 될 테니까…….’




가슴이 뭉클해서 색이 흐려진 상자를 오래도록 내려다보았다. 늘 당연하게 여겨지는 ‘가족’이라는 단어가 고양이에겐 너무 특별해서 함부로 보여줄 수 없던 거겠지. 야쿠가 진정으로 원했던 것을 이뤄줄 수 있어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 그리고 이젠 그의 바람에 제 이름도 함께이기를 빌어본다. 

잠들어있는 이의 곁으로 돌아와 팔을 괴고 누웠다. 그가 깨어나면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애원할 거다. 당신의 가족이 되고 싶어요! 종지부를 찍어야 할 때가 머지않았음을 직감한 듯 애지중지 이불더미에 기댄 리에프의 녹안이 결의에 차 짙어졌다.











간밤에 눈이 내려 세상이 온통 하얗다. 운전하는 거 알면 난리일 테지. 고새를 못 참고 사자 생각이다. 벽을 따라 주차된 고급 승용차들을 지나치며 야쿠는 고개를 젓는다. 일가친척들이 모두 모일 줄 알았다면 어머니께 주말에 본가에 들를 거라는 말 따위는 하지 않았을 텐데. 벌써부터 다가올 축하 인사가 부끄러워 한숨을 뱉었다. 기쁜 마음에 유난스러운 어머니의 성정을 잊은 탓이다. 같이 가고 싶다고 조르던 리에프까지 달고 왔다면 큰 파란이 일었을 거다. 거래 상대와, 아니 선조귀환인 것도 모자라 중종이기까지 한 사자와 연인으로 발전했다고 하면 당장 그를 식구로 끌어들이려고 다들 난리도 아니었을 게 분명하다. 가족들이 저와 리에프를 납치하는 둥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우스운 장면을 상상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대문 앞 계단까지 마중 나온 어머니가 보여 헛웃음을 지었다. 전화로도 뛸 듯이 좋아하시더니 환하게 웃으시며 두 팔을 흔든다. 그녀는 야쿠가 차를 세우자마자 벌컥 문을 열었다. 모리! 고운 손이 제 손을 겹쳐 잡는다. 고마워. 부드러운 곡선을 가진 눈에 눈물이 맺히려는 것을 알아챈 그는,




“애 놀라요.”


“어머, 어머! 그런 말을 잘도 하는구나.”


“저 차들은 다 뭐에요, 누가 보면 잔치라도 하는 줄 알겠네.”


“축하해야지, 반류가 태어나는 건 오랜만인 걸!”




못 말린다는 듯이 혀를 찼지만 잡힌 손을 놓진 않았다. 이제 스스로 떳떳하게 당신의 사랑을 받을 수 있겠지요. 밑 빠진 독처럼 애정이 채워지지 않는 나날이었다. 이제 마음의 짐을 덜었으니 솔직하게 털어놓자면, 정숙하고 엄격한 집안 분위기에 억눌려 대를 잇기 위한 도구 취급을 자처했기 때문에 부모님을 외면해왔다. 서둘러 대가를 치르라는 종용으로 느껴져서 그들의 사랑이 늘 두려웠다. 모리스케, 아기를 갖지 않아도 아무도 너를 나무라지 않을 거야. 자라면서 그런 분들이 아니라는 걸 몸소 깨달았지만 여전히 마음 한편이 불편했다. 입양된 아이로서 어쩔 수 없이 가지게 된 경계 때문이다. 경계의 벽을 깨기 위해 나가기로 한 ‘거래’에 후회는 없다. 오히려 감사하기까지 한 걸.

전에 없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대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정신없는 축하 인사가 이어졌다. 축하해, 모리스케! 어려운 걸 해냈구나.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어쩔 줄 모르는데 다행히 먼저 와 있던 요코가 피곤하게 하면 안 된다고 모두에게 주의를 주어서 곧 조용한 별당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서재에 계신가요? 지나가던 고용인에게 큰 할머님의 행방을 물은 야쿠는 옷매무새를 정리하곤 나무 창살 앞에 섰다. 문풍지 위로 그림자가 졌는지 입을 떼기 전에 들어오라는 목소리가 먼저였다.




“편히 앉으렴.”


“네, 건강은 좀 괜찮으세요?”


“쓸모없는 소리 말고 듣고 싶은 이야기를 해다오.”


“8주차고, 반류는 확실하지만 종은 꽤 지나야 알 수 있대요.”


“그건 이미 들었다.”




벚꽃이 새겨진 다기가 매끄럽게 기울어졌다. 검은 꼬리가 수려한 선을 그리며 찻잔을 앞으로 밀어준다. 할머니와 단 둘일 때나 꾸중을 들었을 때마다 눈물을 닦아주었던 보들보들한 혼현으로 손을 뻗었지만 닿을 수는 없었다. 눈앞에서 왔다 갔다 약을 올리는 꼬리를 낚아채려 야쿠는 몇 번이나 허공을 할퀴었다. 제 눈엔 여전히 철부지 꼬마인 고양이가 기특하지만 상냥한 할머니와는 거리가 먼 그녀는 그저 조심하라고 소곤거렸다.




“만약 고양이라면…… 널 닮았겠구나.”


“이왕이면 사자인 게 좋겠지요.”


“아기가 듣지 않게 배꼽을 가리고 험담 하여라.”




어렸을 때에도 저 미소를 본 적이 있다. 언제였더라? 씰룩 올라가는 입 꼬리를 주체하지 못하고 뿌듯하게 웃자 얼간이처럼 웃지 말라는 그녀의 꾸지람이 떨어졌다. 믿는 구석 하나 생긴 걸로 무서울 게 없다. 아니, 둘이지. 지금쯤 운전면허 학원에서 진땀을 빼고 있을 아빠 사자까지. 그이와 아기가 괴로운 기억을 사분사분하게 덮어 새 사람이 된다. 야쿠는 행복을 감추지 않고 산드러지게 배에 손을 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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