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로오.”


“여보, 따뜻하게 입고 다녀야지, 옷 꼴이 이게 뭐야?”




한 쪽 입 꼬리를 올린 능청스런 얼굴로 야쿠의 어깨에 팔을 올린 뻗친 머리 남자가 다시 한 번 ‘여보’라고 불러본다. 너한테 부탁한 내가 머저리지. 이마를 짚은 야쿠는 차마 꽉 쥐어진 주먹을 뻗지 못하고 이를 갈았다. 지금은 누구보다 쿠로오가 절실한 때다.




‘모리, 미안. 기다려도 상관없지만 정 궁금하면 병원으로 와야 해.’




기다릴 수가 있겠냐고요! 하필 요코에게 일이 생겨 병원에서 그녀의 동료에게 검사 결과를 받게 되었다. 병원에 가는 거야 어렵지 않다만, 여기에는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이 있다. 그건 바로 보호자 동행 의무, 임신에 기여한 두 사람이 함께 방문해야 한다는 것. 그 동안은 주치의인 요코가 집으로 직접 방문해주고 있었기 때문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지만 반류 임신에 관한 진찰로 병원에 갈 때는 당연한 일이다. 야쿠와 리에프가 가진 만남 같은 일종의 반류 간 성 매매 거래를 규제하기 위해 마련되어 있는 조건인 셈이다. 기껏 리에프에게 거짓말을 했는데 이제 와서 다 털어놓기도 곤란하고 마침 딱 데려가기 좋은 친구가 있어 다행이었다. 같은 고양이과에 중종 흑표, 쿠로오 테츠로. 고등학생 때부터 친한데다가 진작 저의 사정을 알던 사람이라 최적이다. 예상대로 그는 흔쾌히 응해주다 못해 어깨동무까지 하면서 과히 역할에 몰입했다. 여보라니, 징그러워죽겠네.




“그나저나, 사자는 어쩌고?”


“확실해지면 말할 거야, 괜히 실망시킬 필요 없으니까.”


“흐응, 너만큼 실망하는 것도 아닐 텐데?”




때때로 표범은 지나치게 예리해서 불편하다. 야쿠는 그를 콱 흘겨보고는 괜스레 팔을 잡아당기며 걸음을 재촉했다.




“근데 임신이어도 곤란한 거 아냐?”


“뭐가.”


“남남이면 상관없겠지만, 사귀게 됐잖아, 너희.”


“그런가?”


“만약 임신이라면 둘의 아이니까, 좀 더 앞을 생각해야지.”


“같이 살기라도 하라는 거야?”


“잘 됐잖아, 운 좋게 반려까지 얻었으니 혼자 힘들게 키우지 않아도 되고.”




일리가 있는 말이어서 잠자코 듣고 있던 야쿠는 주머니에서 울리는 핸드폰을 무시했다. 리에프의 목소리를 들으면 당장 보고 싶다는 말이 나올 것 같았다. 갑자기 생각이 많아져서 그런지 또 배가 따끔따끔 아프다. 인상을 쓰자 쿠로오가 얼른 그의 어깨를 문지르면서 병원으로 이끌었다. 쿠로오는 연신 여보를 부르다가 발등을 밟히고 나서야 조용해졌다. 먼발치에서 리에프가 황망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다는 건 꿈에도 모른 채 두 사람은 흰색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축하 드려요. 여기, 아기집 보이세요? 대략 4주에서 5주……”


“네? 말도 안 돼! 저번 주까지만 해도……”


“진정해. 선생님, 계속 말씀하시죠.”




어깨를 꾹 누르는 쿠로오의 손길에 입을 다물었다. 눈앞에 보이는 초음파 사진에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줄만이 그어져 있는데, 이게 아기집이라니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머릿속이 새하얘져서 의사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 인공 자궁은 착상이 늦어질 때가 있다고 설명하며 의사는 여러 사진을 보여주었다. 무릎 위에 얹힌 제 손이 떨리는 게 느껴진다. 야쿠는 1%의 기적이 일어난 것에 기쁨보다 무서움이 앞섰다. 지금은 그랬다. 이미 단념한 뒤여서 무방비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다음 주는 되어야 심음 확인이 가능하고, 정상 임신으로 판명할 수가 있어요. 뭐든지 조심하시고 음주, 흡연 당연히 안 됩니다. 식사 자주 거르세요?”




쿠로오는 두 손을 모은 채 가만한 야쿠의 어깨를 밀었다. 여전히 멍한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거린다. 제 정신이 아니네. 고양이가 저답지 않게 두려움 서린 눈으로 그를 올려다본다. 기뻐해야지, 야쿠. 막상 임신 판명을 함께 받고 있자니, 저가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어 쿠로오는 괜스레 얼굴도 모르는 백사자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졌다. 잠시뿐이지만 남의 기쁨을 대신 차지하고 있는 것이 찜찜하다.




“당분간 절대 안정 취하셔야 돼요.”


“혹시 종 같은 건……”


“반류 여부나 종은 8주차에 알 수 있습니다.”




옆에 계시면서 잘 챙겨주세요. 마지막으로 당부하는 의사의 말에 쿠로오가 뒷머리를 긁적거리면서 알겠다고 답했다. 야쿠가 배 위에 천천히 손을 올린다. 정말 거기 있어? 믿어지지 않을 만큼 빠르게 뱃속에 잠들어 있는 존재를 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누구보다 이 소식을 기뻐해 줄 한 사람이 떠올라서 드디어 웃음이 터져 나왔다.




“진짜 안 데려다 줘도 돼?”


“됐어, 환자도 아니고. 오늘 같이 와줘서 고마워, 쿠로오.”


“우리 사이에 이 정도쯤이야. 얼른 가서 쉬어, 잠도 못 잤다며.”


“켄마한테 안부 전해줘, 엄청 놀랄 걸.”


“당연하지, 축하해.”




몸조심해, 여보! 대견하다는 듯이 야쿠의 머리를 쓰다듬은 쿠로오가 마지막까지 짓궂게 놀리며 발길을 돌린다.

야쿠는 병원 앞에 우두커니 서서 검사지를 찬찬히 다시 읽어보았다. 규칙적인 식사, 단백질 섭취, 다음 주 초음파 검사라고 쓰인 부분까지 읽었을 때,




“야쿠상.”




그토록 간절했던 목소리가 거짓처럼 바로 앞에서 들려왔다. 리에프? 야쿠는 올라가는 입 꼬리를 의식하기 전에 온 몸을 옥죄는 고통에 신음을 뱉으며 주저앉았다. 안 돼! 본능적으로 두 손으로 배를 감싸 쥐었다.




“결혼식에 간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늦을 거라고…… 저한테 그랬잖아요, 아까 그 사람이랑 무슨 사이에요? 왜 야쿠상을 그렇게 불러요?”


“리, 리에프…… 잠깐, 윽……”


“말해 봐요!”




리에프는 파들파들 떨리는 야쿠의 몸을 내려다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울상이었지만 눈동자만큼은 형형하게 사나운 빛을 내뿜고 있다. 차라리 야쿠가 저에게서 아기를 얻을 수 없었기 때문에 또 다른 거래에 휘말렸을 거라고 믿고 싶었다. 병원 앞에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서로에게 기대는 두 사람이 연인 같다고 생각한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낯선 남자는 아는 얼굴이었다. 학창 시절에 야쿠의 배구 연습을 훔쳐볼 때마다 옆에 있던 사람. 야쿠상이 그럴 리가 없잖아. 그가 저를 속였을 리 없다고 도리질을 쳐도 모든 감정이 배신감에 젖어 끓어오르는 화에 몰두하게 했다. 자신이 중종이 쓸 수 있는 동결 능력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도 자각하지 못한 채다. 강제로 혼원이 몸에 묶인 야쿠는 필사적으로 몸을 웅크렸다. 보이지 않는 무수한 끈이 걸린 몸이 사방으로 잡아당겨지는 느낌에 발버둥 쳤지만 풀려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극심한 통증 속에서도 리에프가 보고 싶었다. 상처받았겠지. 오해라고 말하고 사과하고 싶은데, 아기가 있다고 말해줘야 하는데 움직일 수가 없어. 질끈 감긴 눈으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끝내 아득해지는 정신을 놓았다.











병실에서 나온 쿠로오의 검은 눈동자에 고개를 숙이고 의자에 앉아있는 은발의 남자가 담긴다. 언제 들어온 건지 모르지만 아마 얼마 안 되었을 거다. 마셔. 음료 캔을 내밀었다. 충격을 받은 건지 초점 잃은 시선 둘 곳을 모른다. 야쿠를 쓰러지게 만든 것은 괘씸했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놓인 것이니 가엾기도 하다. 따지고 보면 오해하게 만든 장본인 중 하나가 저이기도 하고. 쿠로오는 요지부동인 손 사이에 직접 음료수를 놓아주었다. 병원 앞에 있는 그들을 발견하고 차를 세운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기절해버린 고양이를 끌어안고 겁에 질려 있기에 무심히 밀쳐 넘어뜨렸던 것이 떠올라 새삼 미안하다. 야쿠나 아기가 다쳤다면 친구로서 더한 짓을 했을지도 모르지만.




“너 그거 함부로 쓰면 안 돼, 경종이나 중간종한테는 꽤 위험하다고.”


“그런 게 되는지 몰랐어요.”




아, 선조귀환이랬지. 반류에 대해 잘 모를 수도 있겠다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쿠로오는 지금 그의 상황이 안타까워서 짧게 혀를 찼다. 지켜본 지 얼마 안 되었어도 백사자와 고양이, 두 사람이 얼마나 답답하게 만남을 이어갔을지 빤하다. 서로에게 부족한 믿음을 아기가 채워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아직 태어나지 않았으니 이 멋진 쿠로오 삼촌이 대신해야겠군.




“야쿠는 걱정 마, 깼다가 다시 잠들었어.”


“아……”


“우선, 오해한 것 같은데 야쿠랑 나는 그런 사이 아니야.”




풀이 죽어있을 때가 언제였냐는 양 싸늘한 눈길이 쿠로오에게로 향해진다. 같은 중종인 흑표범에게조차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의 위화감이다. 절레절레 고개를 저은 그는 새파랗게 어린 리에프를 한 대 쥐어박고 싶은 것을 참으며 말을 이었다.




“알지 모르겠지만, 계속 배가 아파서 검사를……”


“알아요.”


“이봐, 쓸데없는 부분에 질투하지 말아줄래?”


“…….”


“아무튼, 검사를 받았고 보호자가 필요하대서 같이 온 것뿐이야.”




왜 저한테 말하지 않았을까요? 묻고 싶은 것을 곱씹으며 리에프는 도로 고개를 숙였다. 울적해진 옆얼굴을 빤히 보고 있던 쿠로오가 그의 머릿속을 들여다 본 양 덧붙인다.




“너한테 말하지 않은 건, 야쿠 잘못이야. 하지만, 그 전에 네가 믿음을 줬다면 나한테 부탁하는 일은 없었겠지.”




분하지만 대꾸할 말이 없다. 애꿎은 손톱을 꾹꾹 눌렀다. 야쿠가 기댈 수 있는 사람인 적이 있는지 잘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서, 야쿠상…… 괜찮은 거예요? 어디 안 좋은 건 아니죠?”


“그건 직접 물어봐, 네가 아빠잖아.”




아빠? 한동안 경직되어 넋을 놓고 있더니 다시 한 번 떨리는 목소리로 정말인지 묻는다. 하얗게 질린 얼굴이 볼만했다. 반들거리는 녹색 눈동자에 눈물이 차오르는 것이 보이자 역시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쿠로오는 축하한다는 말 대신 웃으면서 그의 등을 떠밀었다.

몸이 무거워. 병원 특유의 소독약 냄새, 금속의 마찰음, 손에 겹쳐진 누군가의 온기.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야쿠는 잠의 여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팔을 간질이는 머리칼. 그리고 울음.




“흑, 으읍…… 끅……”




울음소리? 반짝 눈을 뜬 야쿠가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깜짝이야! 제 손을 잡고 훌쩍거리는 인영이 내려다보인다. 들썩들썩 흔들리는 너른 어깨.




“너 울어?”




저를 부르는 음절 사이사이에 눈물이 묻어 있다. 당황한 야쿠는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서둘러 리에프의 젖은 눈가를 쓸었다. 우는 얼굴이 기다리는 줄 모르고, 실은 버럭 화부터 내고 싶었다. 하지만 저가 잠들어 있는 동안 그가 얼마나 자책했을지 불 보듯 뻔해서 그럴 수가 없다. 한참 울었는지 눈 아래가 새빨갛게 부었다.




“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 으흑……”


“그만 울어.”


“그것도 모르고, 야한 생각만, 킁, 하고…… 야쿠상 다치게 하고.”


“괜찮아.”


“정말 너무해요! 아니, 이, 이건 화낸 게 아니고……”




서러움이 복받치는지 꺼이꺼이 눈물을 쏟는다. 절대 화내는 거 아니에요. 처진 입술 끝이 발뺌했다. 아빠라는 수식이 붙기엔 영락없이 어리고 귀여운 사자다. 나의 리에프. 뚝! 다그치자 끙끙거리면서 울음을 참으려고 입술을 앙 다문다. 야쿠는 그게 사랑스러워서 살포시 웃으면서 그의 옷자락을 끌어당겼다. 허리를 껴안고 포슬포슬한 니트에 얼굴을 기대자 다시 잠이 온다.




“리에프, 나중에 혼나면 안 될까? 지금은 좀 피곤한데.”




야쿠가 보든 말든 눈가를 훔치면서 급하게 고개를 끄덕인 그는 제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머리를 아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어떻게 혼내겠어요? 이렇게 작고 예뻐서 닿아있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요.




“안 갈 거야?”


“저더러 지금 집에 가라고요? 나빴어. 진짜 못 됐고, 밉고……”


“애기 들으라고 하는 소리야?”


“와, 진짜…… 악마.”


“안 갈 거면 옆으로 와.”




믿음직한 애인이 되겠다고 다짐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좁은 침대에서 야쿠가 내어준 품에 얼굴을 묻고 있는 저가 한심하다. 허나 지금은 아무래도 좋았다.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는 손, 달보드레한 당신의 냄새. 한없이 투정하고 사랑해달라고 애원하고픈 기분이다.




“진짜 애기 있대요?”


“있긴 있다는데 무슨 콩처럼 생겼더라.”


“왜 나한테 말 안 했어요?”


“미안, 확실해지면 말하고 싶었어. 재검사니까……”




홀로 아기를 지키려 고군분투했을 야쿠를 떠올리자 애달프고 믿어주지 못한 것이 미안하기도 해서 가슴이 뜨거워진다. 아야! 힘껏 끌어안았다가 저희 사이에 있을 존재를 의식하고는 펄쩍 떨어져나간 리에프가 침대 울타리에 뒤통수를 부딪쳤다. 저 때문에 아기가 찌그러지진 않겠죠? 묻는 얼굴이 사뭇 진지하다. 얕은 웃음소리가 그 위로 흩어졌다. 바보냐? 야쿠는 두 손으로 얼빠진 사자의 뺨을 감싸 쥐고 고개를 숙여 부드럽게 입 맞추었다.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어요, 떨어지기 싫어요.”




나도. 리에프의 품에 깊숙이 얼굴을 묻었다. 어쩌면 너야말로 기적의 시작이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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