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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에야쿠] 순정의 가치 7

섹스피스톨즈 AU
















“수고하셨습니다!”


“오늘 리시브 좋은데?”


“잘했어.”




코트 위의 열기가 고스란히 담긴 손바닥이 얼얼하다. 땀으로 젖은 머리칼을 쓸어 넘긴 리에프는 벤치에 털썩 앉았다. 가슴이 들썩거릴 정도로 깊이 호흡하며 눈을 감는다. 운동화 밑창이 미끄러지는 소리, 누군가의 기합, 공의 마찰음이 한 데 섞여 조화롭게 이루어지는 앙상블. 고등학교 내내, 대학에서는 3년째 배구부에 몸담고 있다. 취미지만 어디 가서 배구로 질 생각은 없다. 한 때는 선수의 꿈을 꿀 만큼 열정을 쏟은 적도 있다. 그만큼 좋아한다. 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건 중학생 때 열렬히 좋아하던 짝사랑 상대이자 지금의 연인이다. 야옹. 고양이가 유유히 머릿속으로 걸어 나오더니 제 집인 양 드러눕는다. 왜 안 나타나나 했지. 뭐하고 있을까? 지겹다고 욕하면서도 열심히 일하고 있겠지. 점심 메뉴를 고민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슬며시 입 꼬리가 올라간다. 그에게 야쿠는 이다지도 쉬이 웃음을 이끌어내는 사람이다. 옆에 흐트러져 있던 가방을 어깨에 들춰 메고 검은색 배구화를 고쳐 신은 리에프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몸을 일으켰다.




[운동 끝! 씻고 나올 테니까 통화할 수 있을 때 연락해요.]




소음이 차단된 비상계단에 쪼그려 앉은 이의 목소리가 울린다. 손에 쥔 볼펜으로 바닥을 긁으면서 다른 손으로는 핸드폰을 귀에 대고 있다. 야쿠는 이따금 야! 소리쳤다가 혹시 누가 들었을까 눈치를 보거나 고개를 젖혀 유쾌하게 웃었다. 점심 메뉴가 무엇이었냐는 리에프의 질문에 우동이라고 답하며, 이제는 자연스럽게 보고 같은 걸 하고 있는 저가 우스워 얕게 코웃음을 친다.




‘배 아픈 건 괜찮아요?’


“지금은 괜찮아, 아무래도 저녁을 걸러서 그런 것 같아.”


‘잘 먹어야 키 크죠!’


“죽일까……”


‘퇴근하고 보면 안돼요? 회사로 갈게요!’


“몇 시에 끝날지 모르겠는데.”


‘진짜, 진짜 보고 싶은데……’




모리스케― 보고 싶어요! 하고 어리광을 부린다. 이름 끝을 늘여 부르는 걸 듣고 있자니 지난 주말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데이트에 뭘 입어야 할지 고민하면서 세 번이나 옷을 갈아입었다. 결국 나가기도 전에 진이 빠진 야쿠가 입고 나간 건 두꺼운 후디다. 크림색에 허리 쪽 한편에 자그만 곰 모양 자수가 박힌 것이다. 계속 니트나 셔츠 차림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반전이라고 수식할만한 변화였다. 커다랗게 품이 뜨는 차림새에 평소보다 귀여움이 배가 된 것은 말하나 마나. 진짜 쪼끄매! 만나자마자 리에프가 그를 얼싸안고 뺨을 비비며 떨어지지 않는 통에 길바닥에서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벌였다. 가뜩이나 눈에 띄는 외양인데 뻔뻔한 애정 행각을 벌이는데다가 두 사람의 덩치 차이도 한 몫을 해서 구경거리가 된 것도 당연지사다. 필요치 않은 실랑이를 벌이며 겨우 상영시간에 맞춰 들어갔다. 어두운 영화관에서 은근슬쩍 허벅지로 올라오는 손을 쳐내기를 수차례, 결국 야쿠가 하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았더니 리에프는 뽀로통하게 등을 돌린다. 삐쳤나? 영 돌아보질 않으니 전전긍긍하다 결국 큰 손을 끌어다 직접 제 허벅다리에 얹어주었다. 그제야 무릎이 마주한다. 됐냐고 묻는 것처럼 올려다보는 얼굴에 리에프는 새침한 표정으로 짐짓 봐주는 척 어깨를 붙였다. 앙증맞은 코에 살짝 입술을 대는 그를 막으려다 그만 두었다. 네 마음대로 해라. 원래 맷집이 좋은 건지 야쿠의 손이 제법 매운데도 몇 대 얻어맞는 걸로는 꿈쩍도 안 하는 그이다. 영화가 끝나고 소문이 자자한 음식점에서 맛있는 덮밥을 먹었고,




‘들어가기 싫어요, 10분만 더요. 모리스케―’


‘지금 그 말만 한 시간째거든.’




오랫동안 차에서 내리지 않는 연하 애인의 응석을 받아주어야 했다.

어느새 바닥에 리에프라는 이름을 그려보고 있던 야쿠는 가면 안돼요? 하고 휴대폰으로 넘어오는 목소리에 퍼뜩 지금으로 돌아왔다.




“퇴근하고 내가 집 앞으로 갈게, 잠깐 나와.”




어쩔 수 없다는 투로 말했지만 저를 녹여버릴 듯 마주쳐오는 눈동자가 보고 싶은 건 마찬가지이다.




‘와아! 좋아요!’




애정 어린 나날이다. 리에프가 실제로 쿵쿵 발을 구르고 있을 거라고 여긴 야쿠는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핸들에 팔을 괴고 두리번두리번 근방을 살피던 야쿠가 인상을 찌푸린다. 갑작스런 통증 때문이다. 바늘로 콕콕 찌르는 것처럼 아랫배가 욱신거린다. 손바닥으로 덮어 눌렀다. 이러면 금방 괜찮아지긴 하는데 통증이 잦아져서 슬슬 걱정이다. 리에프가 창문으로 들여다보고 있는 것도 모르고 배를 문지르다가,




“야쿠상! 또 아파요?”


“아우, 깜짝이야!”




갑자기 열린 문과 동시에 버럭 하는 소리에 놀라 굽어있던 등이 일어선다. 리에프는 차에 오르자마자 야쿠의 찡그린 낯을 들여다봤다. 괜찮아요? 걱정스러운 얼굴이 멈추지 않고 코앞으로 다가오는 것을 손바닥으로 막은 야쿠가 고개를 끄덕거린다. 시선은 그의 무릎에 얹어진 검은 봉지에 고정한 채다.




“타코야끼?”


“어떻게 알았어요?”


“맛있는 냄새나.”


“근처에 진짜 맛있는 집 있어서 사왔죠, 근데 배 아파요?”


“먹을 수 있어!”




작은 상자를 열자 달고 고소한 냄새와 함께 김이 모락모락 올라온다. 아파하던 것이 맘에 걸리지만 재빨리 내밀어지는 두 손을 무시하기란 힘든 일이다. 신이 난 듯 어깨를 들썩거리며 눈을 반짝이기에 얼른 젓가락부터 야쿠의 손에 쥐어주었다. 타코야끼를 한 입에 꿀꺽하더니 급한 손 부채질이 이어진다. 으, 아, 마이떠, 하, 뜨거, 혀 짧은 소리가 덧붙여졌다. 고새 데었는지 눈썹이 세모꼴이 되는데도 젓가락질은 그치지 않고 또 하나를 입 안으로 욱여넣는다. 너도 먹어. 리에프는 픽 웃으면서 알았다고 답했다.




“묻었다.”




젓가락을 들다 말고 검지로 야쿠의 입매를 문질러 닦아준다.




“맛있어요?”


“응! 여기 꺼 맛있다, 나중에 또 사줘.”


“핫도그 맛있는 데도 있는데, 좋아하……”


“좋아해, 좋아해!”




저가 좋다는 것도 아닌데 금세 입이 귀에 걸린 사자가 팔을 뻗는다. 한 손에 쏙 감기는 손가락에 깍지를 거는 것으로 모자라 끌어당겨 손등에 쪽쪽쪽쪽 입을 맞췄다. 낯간지러워 가만히 있지 못하는 야쿠가 다른 손으로 앞 머리칼을 잡아당기는 데도 헤벌쭉하다.




“핫도그가 좋아요, 리에프가 좋아요?”


“으엑, 징그러워.”


“대답해 봐요.”


“둘 다 좋아.”


“하나만 선택해요!”


“그럼, 하……”


“잠깐만요, 벌써 너무해.”




팔을 흔들면서 툴툴거린다. 덩치가 산만한 리에프가 응석을 부리는 게 왜 이렇게 귀여워 보일까? 콩깍지 한 번 제대로 씌었네. 야쿠는 어깨를 들먹였다.




“하이바 리에프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바보.”


“거짓말.”


“진짜야.”


“그럼 주말에 모리스케 집에 가도 돼요?”


“가, 갑자기 왜?”


“그 때처럼…… 같이 있고 싶어요.”




보고 싶었던 눈이다. 원하는 것이 명확한, 그림자 짙은 초록. 육욕에 허덕이던 지난날이 떠올라 야쿠는 뺨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이 자식, 이젠 가릴 게 없다 이거냐? 지난주에 주치의에게서 임신이 아니라는 진단을 받았다. 크게 실망스러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괜찮았다.




‘아기는 안 왔대.’




나 홀로 진찰을 받은 것에 삐쳐있던 리에프는 담담하게 놓아지는 목소리에 잠시 요상한 표정을 지었다. 아쉬움, 불안 그리고 안도가 섞인, 그런 얼굴빛. 사자에게도 복잡한 속내가 있었다. 아기가 생겨 야쿠와의 관계를 더 끈끈히 묶고 싶다는 바람과 저의 애정이 일방적으로 컸을 때 만들어진 씨앗이라는 아쉬움이 치열했는데 막상 임신이 아니라니 조금 김이 샜다. 하지만 그보다 앞선 건 역시 걱정이다.




‘야쿠상, 실망했어요?’


‘조금? 될 줄 알았거든, 그냥 느낌이 그랬어.’




어쩔 수 없지. 입술에 힘을 주어 억지로 웃어 보이는 이를 품에 안고 살살 머리를 어루만져 주었다.




‘괜찮아요.’




사자가 속삭이자 거짓말처럼 안심이 된다. 정말 괜찮은 일 같다. 이제 우리는 원하면 언제든지 아기를 부를 수 있다고 덧붙여서 매를 벌었지만 말이다.

가도 되죠? 되물으며 리에프는 아까처럼 야쿠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하지만 가볍지 않다. 그는 천천히 얇은 피부를 입술로 물었다 놓았다. 살짝 혀를 내어 느릿하게 쓸어 올릴 때는 마치 키스를 하는 기분이었다. 노골적이다. 그 전까지는 혹시 뱃속에 꼬물꼬물 아기가 생기고 있을지 몰라 굳이 말하지 않아도 서로 조심하고 있던 차라서 스킨십이라고 해야 입을 맞추는 게 전부였다. 두 사람 모두 진도에 연연하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시작부터 워낙 깊고 뜨거웠던지라 성에 차지 않은 게 사실이다. 야쿠의 손가락이 굳는 것을 느끼며 툭 불거진 뼈에 입술을 문질렀다.




“아, 알았어! 그만해!”




귀 끝까지 빨갛게 물들인 채 손사래를 친다. 승자의 미소를 띤 리에프가 짤막하게 성공했다고 읊조렸다. 야쿠는 그를 따라 웃었다. 이 애가 옆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위로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비어있을 가복(인공 자궁)이 전처럼 근심스럽지 않다.











아랫배가 아프다고? 야쿠는 핸드폰 너머로 들려오는 되물음에 짧게 긍정하며 토스트기의 전원을 넣었다. 식빵을 구울 거라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할 만큼 친밀하지만 왠지 제대로 된 식사를 하라는 잔소리로 진단이 끝날까 봐 입을 다물기로 한다. 집안의 의무를 전담하고 있는 요코가 으레 그래왔듯이 이것저것 묻는다. 주변 사람까지 차분하게 만들 만큼 과묵한 그녀는 꽤 유능한 의사다.




‘잠을 못 잔다거나 신경 쓰는 건 없고?’


“딱히…… 아, 하나 있다, 어머니한테 아직 말 못 했어요. 요코상이 말해주면 안돼요?”


‘그건 무리.’


“임신 안 된 거 아시면…… 으, 상상만으로 끔찍해.”


‘전前 당주님께도 아직이라고 해버렸어, 미안.’




등골이 오싹하다. 뵌 지 오래 되었지만 큰 할머님의 위압감은 언제고 떠올려질 만큼 강렬하다. 직접적인 말씀은 안 하셨지만 부모님을 통해 소식을 전해 듣고 계시겠지. 힘을 길러라, 늘 어깨를 움켜쥐던 검은 손이 때때로 머리를 쓰다듬어줄 때가 있었다. 무슨 일 때문이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 때만큼은 기뻤던 것 같다. 조만간 불러들이시겠네. 마른 입술 새로 경쾌한 알림과 함께 튀어 오른 따끈한 식빵을 밀어 넣었다.




“회충 때문은 아픈 건 아니겠죠?”


‘인공 자궁 말이야? 부작용일 수 있으니까 보러 갈게, 마침 퇴근 중이거든. 아, 혹시 모르니까 약은 먹지 마.’


“혹시 모르니까?”


‘검사했던 게 지난주쯤이니까 확률이 아예 없진 않아, 임신.’




바삭바삭 소리가 멈춘다. 입 안에 있던 것을 꿀꺽 삼킨 야쿠는 잠시 눈만 끔뻑거리다가 진저리를 쳤다. 저번에 검사한 게 끝 아니었어요? 그가 황당해 소리치든 말든 요코는 음성의 높낮이 없이 99% 정확한 검사였다고 대꾸하더니,




‘1%만큼은 기대해보렴’




덧붙인 것으로 통화를 마무리 지어버렸다. 핸드폰을 내려놓은 고양이가 손에 들린 식빵을 마저 입에 물고 멍하니 허공을 응시한다. 1%라니, 그 정도면 기적 아닌가요?

얼마 뒤에 방문한 그녀는 대대로 물려받은 것이 분명한 낡은 왕진가방에서 진찰 도구며 주사기 등을 꺼내놓아 야쿠를 겁주고는 작은 시험관에 채혈을 해갔다. 언제나처럼 엄살을 부렸지만 자비가 없다. 결과 나오면 연락 줄게. 차를 대접하는 것조차 허락해주지 않은 요코를 배웅하고 들어오자마자 리에프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씻고 온다더니 연락이 없네. 피곤해요? 오늘 많이 바빴어요?]




[괜찮았어, 그것보다] 답장을 입력하던 손이 멈칫한다. 재검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 했는데 생각해보니 괜한 기대감만 심어줄 게 뻔하다. 실망은 혼자 하는 것으로 족해. 야쿠는 확실한 결과가 나올 때까지 비밀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그보다 1%의 기적을 위해 다른 이유로 그를 실망하게 만들 수밖에 없을 것 같지만.




‘미안한데 이번 주말에 집에 오는 것 말이야, 안 될 것 같아.’




침대에 엎드려 있던 리에프가 벌떡 몸을 일으킨다. 못 볼 거라도 본 사람 마냥 경악으로 물든 낯빛을 야쿠가 봤다면 미안해서 하지 않으려던 이야기를 죄다 털어놓았을 거다.




“왜요…… 무슨 일 생겼어요?”




실은 안 된다고 윽박지르고 싶은데 꾹 참은 사자가 한껏 시무룩해진다. 실망스런 마음을 가눌 길 없어 베개에 얼굴을 묻어 버렸다. 물기가 어려 잿빛이 된 머리칼이 한기를 부른다. 달콤한 통화 속 침통하기 그지없는 소식에 잠이 다 깼다.




‘어? 음…… 무슨 일이라기보다, 어어, 친구가 결혼을 한다고 해서!’




한 쪽 눈썹이 비죽 올라간다. 누가 들어도 거짓말인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형편없는 대답에 리에프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어떤 친구요? 그럼 끝나고 만나요.”




차마 1%짜리 아기 때문에 사랑을 나눌 수 없다는 말을 할 수 없는 야쿠는 모른 체하며 허둥지둥 변명만 늘어놓는다.




‘치, 친한 친구야. 늦게 끝날 걸? 오랜만에 보는 애들이랑 회포도 풀고 또……’




거짓말이라고 사방팔방 떠드는 것 마냥 말을 더듬고 동문서답을 하는 게 통할 리 없지만 말이다. 이유를 모르니 섣불리 화를 낼 수도 없어서 리에프는 홀로 답답한 가슴을 부여잡았다. 들어주기 안타까울 만치 어설픈 거짓말이다. 하지만 고양이가 악의를 품었을 리는 없다. 야쿠상은 좋은 사람이니까. 애써 마땅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더 이상 캐묻지 않자 안 들릴 거라고 믿는지 작은 한숨이 들려왔다. 별안간 불안감이 덮친 백사자의 밤은 싱숭생숭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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