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지자.”




눈물이 날 줄 알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입술을 뗀 순간부터 시시각각 마음이 단단해진다. 할 수 있는 최대로 냉정해진다. 난감한 표정을 지우지 못하는 반듯한 찬열의 얼굴이 이유를 묻는 것처럼 비틀렸다. 기념일 따위를 잊은 건 잘못이 아니다. 문제는 가슴 아파야 할 타이밍에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거다. 언제나 그에게 뜨겁던 김종대는 이제 없다. 사랑했으니까, 우리 너무 좋았으니까 더 애쓰고 싶었는데 이별을 참을 수가 없었다. 더 이상 널 사랑하지 않아. 미안하다는 말은 목이 매여 웅얼거림으로 끝났다. 일방적인 통보가 갑작스럽겠지. 어쩌면 자존심 상하거나 화가 났을 수도 있겠다. 만약에, 상처 받았다면 흉터가 남지 않길 바란다. 그리고 고맙다는 말은 마음이 좁아져 입 밖으로 꺼내질 못 했다.




“괜찮겠어?”




스물일곱부터 서른한 살이 되기까지의 시간. 영원히 제 곁을 지켜줄, 찬란하고 눈부신 추억이 고맙다고 말해주고 싶었는데 그마저도 들어주지 않는구나. 종대는 그저 돌아설 뿐이다. 나란하던 시간에 비할 수도 없이 짧은 몇 마디만으로 우리의 전부를 부셔버릴 수 있다는 게 신기하면서도 억울했다. 이렇게 쉬운 사이였구나. 눈물도 나지 않았다.

만난 지 5년이 되던 날, 우리는 헤어졌다.











이상하리만치 괜찮다. 혼자가 된 지 한 달이 지나가는데, 사실 변한 게 별로 없다. 매일 연락하거나 주말에 약속을 잡아야 된다는 의무감으로부터 해방됐다는 거 외에는. 계속 혼자였던 것 같기도 하다. 얼굴 폈다는 인사를 듣는 일이 잦은 요즘이다. 고맙습니다, 웃으며 종대가 고개를 숙인 데에는 인정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한 달 만에 몸무게가 4kg이나 늘어난 것이 사실이니까. 수척했던 볼에도 부쩍 살이 올랐다. 완전히 가시진 않았지만 여러 가지 핑계로 미루고 있던 운동을 시작하고 새로운 가족이 생기면서 불면증도 점점 호전되어 간다. 주말이면 밀린 책이며 영화를 닥치는 대로 보느라 시간이 모자라다. 이별 노래가 전부 제 이야기 같긴 하지만 눈물이 날 정도로 슬픈 적은 없다. 못 미덥겠지만 찬열이와 헤어지고 종대는 한 번도 운 적이 없다. 오히려 우리가 연인이었을 때, 더 아프고 더 슬펐다. 종대는 희미해진 반지 자리를 만지작거렸다.




“대리님, 퇴근하실 거죠? 같이 저녁 먹으러 가요!”




빈 손가락을 내려다보면서 환히 웃는 그녀에 난처해졌다. 빛나는 눈동자, 발그레한 두 뺨. 잊고 있던 무언가 기억나려 한다. 5년 전, 찬열이를 짝사랑 했을 때의 제 모습이다.




‘혹시 회계 팀? 회식 때 뵌 것 같은데……’


‘박찬열! 아, 훕! 안, 안녕하세요!’




새빨개진 얼굴로 입을 막은 종대를 보며 찬열은 호탕하게 웃었다. 종대는 1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전체 회식에서 그를 본 후, 이미 상사병을 앓고 있던 차였다. 그래서 앞에 세워진 차에서 드러난 얼굴을 보자마자 마음 밖으로 꺼낸 적 없던 이름이 기다렸던 것처럼 혀끝을 떠났나 보다.




‘하하…… 제 이름 알고 계시네요.’


‘전 회계 부문 김종태입니다! 아니, 아니, 대요…… 김종대…….’




찬열은 웃음을 참기 위해 손등으로 입술을 꾹 누르더니 어디 사냐고 물어왔다. 눈이 펑펑 쏟아지던 날. 너무 긴장해 이름을 틀리게 말한 것이, 바보 같은 인상을 남길 것이 속상해서 온 몸이 눈처럼 휘날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데려다 줄게요. 찻길에 겹겹이 쌓이는 함박눈 때문에 길고 길어지는 차 안에서의 시간이 10초처럼 느껴졌다면 믿어질까? 나중에 왜 차를 세웠는지 묻자,




‘몰라, 그냥 그러고 싶었어. 운명이었나 봐.’




걷잡을 수 없는 운명이었다고 말했지. 지금, 그 운명은 우리의 주머니에서 떨어져 어딘가를 헤매고 있을 거다. 더럽혀지고 짓밟히고 찢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좁지만 춥지 않은 곳을 찾아 꼭꼭 숨어 있길 바란다. 몇 년이 지난 후, 찬열이가 그걸 발견하여 추억이라 말해준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




“대리님?”


“아아, 미안. 집에서 봄이가 날 기다리고 있어서, 저녁은 다음에 먹어요.”




허나, 저에게는 띄지 않았으면 한다. 제 것이라 착각하여 다시 주머니에 넣어버리면 안 되니까.











현관에 구둣발을 들이자마자 열렬한 환대를 받는 것은 참 기분 좋은 일이다. 뭐라고 표현해야 따뜻해지는 이 마음에 가까울지 도저히 모르겠다. 가슴팍에 얹어진 두터운 털 뭉치의 무게에 뒤로 넘어지듯 몸을 젖힌 종대는 깔깔거리며 손을 내젓는다.




“봄, 봄! 간지러워, 침 묻히지 마아!”




개는 혀를 내어 그의 턱을 마구 핥아댄다. 구불거리는 상아색 털을 손가락으로 쓸어주며 조금 끌어안자 아늑한 냄새가 난다. 부드러워. 그래, 그래. 나도 보고 싶었어. 덩치가 종대만한 이 골든리트리버 봄이는 친구의 반려 견이다. 더 친근하게 정의하자면, 친구의 자식 같은 멍멍이니까 그에게는 조카인 셈이다. 별안간 유럽 여행을 떠나버린 친구 백현이 부탁하기에 선뜻 보살피게 되었다. 본가에서 오래 개를 키웠기 때문에 종대에게 이 더부살이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구구는 얌전했는데!”




힘겹게 방으로 들어서며 그가 중얼거렸다. 봄이에게 무릎을 치여 걸음걸이가 휘어진다. 구구는 종대의 동생이나 다름없던 개다. 이번 여름, 14년 동안 함께이던 구구는 할아버지가 되어 먼저 하늘나라에 갔다. 한 동안 사별로 힘들어하다 얼마 전에야 헤어 나왔다는 건 혼자만의 비밀이다. 어머니께 내색할 수 없었지만 숨을 쉬지 않는 작은 몸을 직접 묻은 일이 꽤나 충격이었다.

밑반찬이 떨어져서 밥 대신 빵 쪼가리를 배가 부를 만큼 집어 먹었다. 남은 우유도 한 모금뿐이다. 큰 통을 사면 다 먹기도 전에 유통기한이 지나고 작은 것을 사면 금방 바닥난다. 그는 멍한 표정으로 빈 우유 갑을 꾹꾹 눌러 접었다.




‘뭐야? 박찬열! 네가 우유 다 마셨지?’


‘응, 난 우유 싫어, 사오지 마.’


‘근데 왜 마셔? 멍청아.’


‘네가 밥 대신 먹으니까, 밥 먹으라고.’


‘웃기시네─ 그냥 좋아한다고 말해!’


‘좋아해, 김종대! 됐어?’


‘미친.’




은근히 부끄러운 말 잘했었는데. 언제쯤 쓸모없어진 기억을 되새기는 짓을 그만두게 될까? 꼬리를 살랑거리는 봄이에게 선반 위에 올려두었던 개 껌을 내려주고 욕실로 향했다. 이빨이 보이게 껌을 물고 소파로 가는 토실토실한 엉덩이가 문에 가려진다.

대롱대롱. 코끝에 따뜻한 물방울이 매달린다. 이제 막 거품을 문지르려는 참인데 어렴풋이 문을 긁는 소리가 들려온다. 또 문 까지겠네. 봄이 벌써 나를 그리워한다.




“조금만 기다려.”




마침 찬열과 헤어진 것이 다행이다. 그는 동물 털 알레르기가 있어 개나 고양이를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가 헤어지지 않았더라면 봄이와 지내지 못 했을 거다. 합리화 하는 건 아니고 지금 옆에 있는 건 봄이니까 하는 말이다. 홀로 머쓱해져 종대는 수건을 뒤집어썼다. 욕실에서 나오자 차가운 기운이 몸을 에워 닭살이 돋는다.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9시네.

헤어진 이후, 찬열이에게 몇 번 연락이 왔었다. 늦은 시간에 온 두 번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술에 취해 있었을 거다. 새벽 감성에 결심이 무너지거나 실수를 저지른다면 그것도 곤란한 일이고. 무음으로 설정을 바꾼 핸드폰을 배게 아래에 두었다. 천둥 같던 진동음이 잔상을 남겨 잠을 설쳤다. 그 뒤 주말 오후에 받은 건 문자 한 통으로, 문 앞에 두고 간 상자를 확인하라는 내용이었다. 제법 큰 상자에 종대가 빌려주었던 DVD 몇 장과 책 두 권, 폴라로이드 카메라, 목도리 그리고 찬열의 커플링이 들어 있었다. 상자 바닥에 반지만 달랑 들어있어서 하마터면 못 보고 지나칠 뻔 했다. 저가 가지고 있는 반지만으로 벅찬데 도대체 어쩌라는 건지, 순간적으로 울컥해서 집어 던졌다가 잃어버렸지만. 소파 밑으로 들어갔는데 당분간 꺼낼 생각이 없고 나중에는 기억이나 할지 모르겠다. 주말에는 청소를 해야겠다. 왜 미루고 있었는지 모를 일이다.




“장난감 가져와, 놀아줄게.”




큰 개가 퍼뜩 바닥에 코를 대고 이리저리 킁킁거린다. 장난감을 찾는 거다. 봄이는 천재가 분명해. 곧 눈알 한 쪽이 없는 곰 인형을 물어온 개의 머리를 부드러이 쓸어 주었다. 뉴스에서는 날씨 예보가 흘러나온다. 선선한, 쌀쌀한, 쓸쓸한 가을.




“내일은 산책하러 가자.”




줄곧 하고 싶었던 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종대는 살며시 눈을 감고 품에 안기는 개에 머리를 기댔다. 일찍 들어올게. 콩콩 울리는 심장 소리를 듣고 있자니 잠이 올 것 같다. 오늘은 그만 애써도 돼. 여긴 나 혼자뿐이니까.











목말라. 타는 듯한 갈증으로 잔뜩 인상을 찌푸린 채다. 찬열은 발로 이불을 걷어찼다. 커튼이 펄럭여 들어온 진한 햇볕이 그의 몸을 가로지른다. 아아. 팔을 들어 눈을 덮고 앓는 소리를 내 본다. 술을 퍼 마신 건 위장인데 왜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픈지 늘 의문이다. 집에 어떻게 들어왔더라? 새벽까지 이어진 술자리를 떠올려보니 가관이다. 어렴풋이 변기를 붙들고 오열한 것이 뇌리에 그려져 귀 끝까지 열이 올랐다. 다행인 건 저번처럼 회사 사람들 앞에서 울진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 땐 진지하게 퇴사를 고민해야 했다.

숨에 역겨운 술 냄새가 베여 있다. 생수를 병째 나발로 불고 빈 통은 쓰레기장이 된 부엌으로 던져 버렸다. 널찍한 원룸이 엉망이다. 발에 차이는 빨래거리를 헤치고 싱크대에 쌓여있는 것들을 외면한 채 냉장고를 열었다. 여기도 엉망진창이네. 비어있는 계란 포장지를 바닥으로 떨어뜨린다. 술 마신 다음 날이면 계란 국 생각이 간절해지는데 그건 종대가 해주는 게 제일 맛있었다. 다른 건 내가 하는 게 나은데 계란 국만큼은 인정한다.




‘얼마나 마신 거야─! 우리 집으로 오면 어떡해, 출근인데!’


‘보고 싶으니까 왔지! 아, 좀! 소리 지르지 마, 머리 울려.’


‘얼씨구? 이게 뭘 잘 했다고. 얼른 일어나! 차는?’


‘대리.’


‘그건 잘했네. 나와, 계란 국 했어. 밥 먹고 출……’


‘사랑해.’


‘일어나기나 해!’




담배, 담배. 달랑 놓여있는 매트리스 옆을 나뒹구는 양복 재킷에서 담뱃갑을 끌어내는 손길이 다급하다. 찬열이 흰 개비를 입에 물고 능숙하게 불을 붙인다. 이제 살 것 같다. 소모하는 담배가 늘어난 만큼 중독이 심해졌나 보다. 나른해지는 몸을 자각했지만 당분간은 줄이기 어려울 것 같다. 이젠 김종대가 아니라 ‘사랑해요, 니코틴!’이라고 외쳐야 하나? 웃음기 없는 눈으로 킬킬거리다가 바닥에 담뱃재를 떨어뜨렸다. 발로 쓱 미는 폼이 쉽다. 청소를 하긴 해야 되는데. 토요일 4시, 그 애는 뭘 하고 있을까? 영화 보는 거 좋아하니까 방구석에 틀어박혀서 울고 웃을 수도 있겠다. 봤던 영화를 또 보다가 까무룩 낮잠에 들었을지도. 빔 프로젝터가 바닥으로 굴러 떨어진 줄도 모르고 잠에 빠져 벌어진 입술에 몰래 다가가 쪽! 입을 맞추면 그는 멍청한 얼굴로 깨어나곤 했다.




‘봤던 걸 또 보니까 졸리지.’


‘으음…… 재미있단 말이야.’


‘그렇게 계속 보는데 질리지도 않아?’




종대는 그렇게 물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부스스해진 다갈색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 넘겨주니 저를 계속 보니까 질리는지 되묻는다. 펄쩍 뛰며 아니라고 대답하자 입매를 늘려 활짝 웃으면서,




‘질리는 게 아니라 점점 편해지는 거야, 나한테 이 영화가.’




너한테는 내가. 그를 따라 웃었다. 종대가 좋아하는 영화와 책 몇 권은 언제까지나 그 애의 방 어딘가에 존재할 것이다. 원하면 언제든 그가 편하게 쉴 수 있는 안식처가 되어주겠지. 박찬열도 그 옆에 계속 함께일 줄 알았다.




“어?”




한껏 써진 기억을 깨뜨리는 진동음에 찬열은 서둘러 담뱃불을 꺼뜨리고 우당탕 큰 덩치를 굴린다. 아! 윽! 씨! 버둥거리는 긴 다리. 커튼 아래에서 겨우 찾아낸 핸드폰 화면에 떠 있는 이름은 기대했던 것이 아니다. 그래, 연락할 리가 없지. 그 놈의 똥고집. 쩍쩍 갈라진 목소리가 퉁명스레 흘러나온다. 어제 함께 있던 친구의 전화다.




“왜.”


‘목소리 봐라, 이제 일어났냐?’


“죽겠다…….”


‘잘 마셨다고, 다음엔 형님이 쏠게.’


“어.”


‘근데, 도대체 김종대가 누구냐?’


“……왜? 네가 걜 어떻게 알아?”


‘미친 놈, 네가 술 마실 때마다 무슨 새끼, 무슨 새끼 하니까 알지. 사기라도 당했냐?’


“닥쳐, 끊는다.”




종료 버튼을 연달아 누르곤 곧바로 통화 목록을 살폈다. 제발!




“휴우……”




안도의 숨이 깊다. 이번에도 그에게 전화했던 기록이 남아있었다면 자살했을지도 모른다. 찬열은 종대와 헤어진 후에 술에 취해서 두 번인가 그에게 전화를 한 적이 있다. 보기 좋게 거부당해 부재중으로 남겨졌다. 구질구질한 전 애인? 새로운 내 이름이다. 나쁜 새끼. 적어도 목소리는 들려줄 줄 알았다. 그 시간에 한 전화면 술에 취해있다는 걸 알았을 테니까. 집에 조심해서 들어가라고, 술은 조금만 마시라고 할 줄 알았는데 철저히 무시당했다. 종대가 전화를 받았으면 저가 했을 취중진담, 그게 궁금한데 이걸 알려줄 수 있는 유일한 열쇠는 매정하기 그지없다. 무슨 말이 하고 싶었던 건지, 어떤 말을 했을지 모르겠다. 그를 붙잡았을까? 다시 생각해보라고 다그치거나 잘못했다고 빌거나. 아니, 안 그랬을 것 같다. 솔직히 2, 3년 전에 잠깐 헤어졌을 때보다 마음이 아프거나 하질 않아서 잘된 건가 싶기도 하고. 그 때에는 진짜 심장을 누가 잡아 뜯는 것처럼 아팠는데 말이야. 이렇게 된 참에 보란 듯이 잘 먹고 잘 살아서 약 올리고 싶기도 하다. 술 취해 우는 건 그냥 주정이다. 영화 속 실연의 주인공이라도 된 줄 알고 이별에 취한 거다. 자조적인 미소가 찬열의 입가에 번진다. 그렇다고 행복해라, 사랑했다 이런 말을 했을 것 같지도 않다. 스스로 이렇게 못돼 처먹었다고 말할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자기는 진짜 그런 놈이었나 보다. 종대가, 먼저 제 손을 놓은 김종대가 불행했으면 좋겠다. 매일 후회했으면 좋겠다. 저를 보고 싶어 하다가 죽어버리길 바란다. 아, 방금 한 말은 취소. 죽으면 안 돼. 죽을 만큼 나를 보고 싶어 하길 바란다고 정정하겠다.

지금 네 마음은 어때? 그래도 한 때는 죽고 못 살았는데 벌써 다 지워버리고 후련하게 웃고 있진 마라. 그렇다고, 울지도 말고.




“존나 복잡해…….”




그는 새 담배로 손을 뻗친다. 5년, 긴 시간이다. 함께 지나보낸 사계절이 다섯 번이고, 찍은 사진이 수천 장이고, 사용한 콘돔이 200개가 넘는다. 뭐야? 생각보다 콘돔은 적게 썼네. 평균을 잘못 냈나? 키스는 셀 수도 없다. 젠장. 어쨌든, 짧다고 할 수 있는 시간이지만 어떤 사람을 알기엔 충분한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근데, 정말 이상한 일이다. 지금까지 저가 알던 사람이 이제 자기는 그런 사람이 아니란다. 언제나 기다려주고 이해해줄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찬열은 담배꽁초가 수북한 참치 캔으로 시선을 옮겼다. 청소나 해야겠다. 이대로 살다간 미쳐버릴지도 몰라. 아직까지 왼손 네 번째 손가락을 묶고 있던 반지를 빼버렸다.




“어? 이거 나한테 있었네. 없어졌다고 찾더니……”




먼지에 쌓인 해리포터 시리즈 DVD 중 하나를 러닝머신 아래에서 발견해냈다. 빌린 날의 기억이 아득한 걸 보니 꽤 오랫동안 여기에 처박혀 있던 것 같다. 찬열은 한 손에는 쓰레기봉투를 꼭 쥔 채 다리에 못이 박힌 듯 서 있다. 이게 종대한테 얼마나 중요한 건지 알아서 차마 버려지지가 않는다. 지인을 통해 한정판을 구했다고, 알아먹지도 못할 주문을 외우면서 방방 뛰었던 것을 떠올리자 인상이 팍 찌푸려진다. 하필이면 이걸 빌려가지고! 과거의 박찬열, 죽어라! 연애 초창기에는 한창 환심을 사려던 때라 그가 좋아하면 덩달아 좋아하고 싶었다. 노래 가사처럼 널 너무 사랑해서 네가 되고 싶었다. 그 열망은 어디로 처박혔을까? 손에 들린 이 DVD처럼 색이 바랜 뒤에야 찾아지면 너무 늦을 텐데. 지금도 늦었지만.

꽉 찬 종량제 봉투들이 한 달 동안 얼마나 피폐한 생활을 했는지 알 수 있는 척도가 되어 준다. 창문을 활짝 열어 환기를 시켰다. 맑은 공기가 밀려들어와 찬열은 연거푸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 앞을 차지한 커다란 상자 두 개. 하나는 옷장에 넣었고 하나는 현관 앞에 두었다. 이제는 ‘애인’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 없는 이가 잔뜩 묻어있는 물건이 담겨있다. 제게 남아있어야 할 것과 그에게 돌아가야 할 것. 반지는 도저히 어느 쪽에 넣어야 할 지 모르겠다. 가지고 있기도 싫지만 버리기는 더 싫다.




[돌려줄 게 있어. 꼴도 보기 싫어하는 것 같아서 그냥 집 앞에 두고 왔다.]




문 앞에 상자를 놓고 미련 없이 돌아섰다. 이별에 대한 책임을 떠넘기고 나니 답답했던 속이 풀리는 기분이다.

돌아오는 차 안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따라 흥얼거리던 남자는 문득 바닥난 방향제를 발견했다. 언제 다 떨어졌대? 그는 그걸 억지로 잡아 뜯어 바닥에 툭 던져놓았다.




“뭐더라……”




달고 아늑한 향기였는데,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어리석은 연애 보고서는 전체적으로 두 사람의 상태나 감정을 사물에 빗댄 부분이 많습니다.

찾아보며 읽으시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1장에서 후반전이 시작하기 전에 거덜난 맥주나 2장에서의 짝 잃은 슬리퍼 등!!  

이번 3장에서는 청소 = 마음 정리 / 방향제 = 두 사람의 지난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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