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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첸] 어리석은 연애 보고서 제 1장

찬열X종대
















 
 










불투명한 파티션으로 나누어진 딱딱한 공간에서 하나 둘 무른 곳으로 돌아간다. 썰물처럼 흘러가버린 사람들은 사무실에 백색 소음만을 남겨두었다. 그 속에 홀로 무료한 손장난을 하고 있던 남자가 마침 울린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8시, 지하 주차장 A22]




군더더기 없이 간결한 메시지. 그 위로 밥은 먹었는지 묻고 답한 것과 피곤하다는 말이 이어져있다. 그저께 주고받은 것들이다. 어제는 잘 자라는 인사할 시간도 없을 만큼 바빴었나? 나는 뭘 했더라? 책상 위로 핸드폰을 내리는 손길이 느릿하다. 흰 셔츠에 어두운 자줏빛 타이를 맨 그는 피부가 하얀 편이다. 눈처럼 냉해 무표정이니 쌀쌀맞아 보였다. 끝이 살짝 처진 눈썹 아래 눈가는 거뭇하고 뺨은 조금 패여 있다. 잠을 설친 탓이다. 한 달 째 이유 모를 불면증을 겪고 있으니 멀쩡한 게 이상하지. 새우처럼 몸을 웅크리고 두통에 시달리다 겨우 잠에 드는 일과 끝의 반복. 입맛이 없고 의욕도 잃었다. 불면증은 환자가 자초해서 발병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치료가 어렵고 까다롭습니다. 포털 사이트에 ‘불면증 치료’라고 검색해 보았지만 얻은 거라곤 이런 절망적인 결과가 전부다. 입술을 삐죽거리더니 벽에 걸린 둥근 시계를 힐끗 넘겨본다. 방금 정해진 약속 시간까지 남은 시간은 1시간 반. 기다리는 것에는 이골이 나서 불만은 일지 않는다. 다만, 낭비되는 시간이 아쉬울 뿐. 낭비? 예전에는 이 기다림에 다른 이름을 붙였던 것 같다.




‘미안해, 종대야. 해외사업부에서 기안을 지금 올렸어!’


‘이래서 지원 담당은 금요일에 퇴근을 못 한다니까, 내가 말했잖아.’


‘그냥 가버릴까? 아, 짜증나.’


‘얼른 하고 내려오세요, 어차피 해야 되는데 짜증내지 말고.’


‘일 때문에 짜증난 거 아니야, 네가 기다리니까 그렇지.’


‘히힛, 대신 보쌈 사줘.’


‘겨우 보쌈이야? 다 사줄게, 조금만 기다려. 미안.’


‘미안하다는 말은 아까 했잖아.’


‘고마워.’




문득 그려지는 지난날에 저도 모르게 살포시 웃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정말 오랜만에 보는 거잖아. 애인을 만나지 못한 3주 동안 종대가 거래처 직원과 한 식사만 다섯 번이다. 밥은 잘 챙겨 먹고 다녔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저번 주에 그의 애인은 부모님 성화에 못 이겨 선을 보러 나갔었다. ‘남보다 못한 사이’라는 말로 우리를 수식하게 될 줄이야.




“지겨워…….”




따지고 보면 너도 남이니까 비교하는 것이 우습다. 애쓸 필요도 없이 종대는 감흥 없는 표정으로 의자에 깊숙이 등을 기대었다. 기다란 속눈썹이 내린 눈가가 몇 번 떨리다가 가라앉는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공기가 고요로 물든다. 잠이 들려던 찰나에 미처 종료하지 않은 사내 메신저의 편지 모양이 반짝거리며 모니터로 떠올랐다.




[요즘 무슨 일 있으세요? 웃는 얼굴 보고 싶어 로비 카페에 케이크 맡겨 놓고 갑니다. 파이팅!]




이건 또 뭐람? 최근 종대가 골칫거리로 여기고 있는 신입 직원의 다정한 메시지다. 가뜩이나 뚫어져라 쳐다보거나 티 나게 저를 찾아 난감했는데 지극히 사적인 선물까지 받게 되었으니 이러다 사내에 이상한 소문이라도 나면 큰일이다. 절레절레 고개를 젓다가 눈에 띈 달력으로 손을 뻗었다. 커다란 별표로 채워진 내일. 모니터 옆에 놓여있던 것을 움킨 손이 하얘지도록 힘이 실린다. 벌써 이렇게 되었나. 언제 표시한 건지도 가물가물한 하루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입 꼬리가 처진다. 차라리 몰랐더라면 좋았을 것이 분명했다.











지하 주차장에 발길을 들이자마자 눈에 익은 검은 차가 보인다. 다가가 조수석 쪽 창문을 두드렸다. 왔어? 물으며 그의 눈은 핸드폰에 고정되어 있다. 늦게 끝났네. 따뜻하게 데워진 시트에 앉으며 말했는데 돌아오는 답이 없다. 아무 생각 없이 눈길을 둔 그의 목 언저리에 걸려 있는 타이는 처음 보는 거다. 차마 묻지 못한 지난주에 저 넥타이를 하고 나갔을까? 입 안을 맴돌던 ‘선’이라는 단어를 억지로 쪼개어 삼켰다. 우린 눈조차 마주치질 않았다. 속이 답답해져 코트를 벗으려 하자 그제야 찬열이 손을 뻗어 소매를 잡아당겨 준다. 4년이 넘는 시간 동안 수없이 반복해 몸에 박힌 버릇이다. 코트를 반으로 개어 뒷좌석에 놓아주기에 작게 고맙다고 말했다.




“웬 케이크?”


“……그냥, 누가 줬어.”




내가 샀다고 할 걸. 무릎 위 상자를 만지작거렸다. 누구한테 받은 건지 솔직히 털어놓으면 싸움이 될지도 몰라 얼버무렸지만 시원찮은 답변이었다. 치기어린 애인이다. 찬열이라면 분명히 누가 준건지 고집스레 물을 것이다. 아니면, 케이크 같은 게 뭐가 맛있냐며 핀잔하거나. 하지만,




“배고프다, 치킨 시켜 먹자.”




예상을 빗나간 무심한 제안에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그는 아직도 종대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았다. 뒤늦게 그러자, 대답하고는 안전벨트를 매는 큰 손을 따라 움직였다.

달랑거리는 차량용 방향제는 바닥이 드러나 있다. 종대는 집 앞 공방에서 찬열과 이것저것 향을 고르던 날로 돌아가 소리 없이 웃었다. 우린 가판대 앞에서 계속 코를 킁킁거렸다. 이거? 벌레 냄새나. 벌레 냄새 맡아 봤어? 아니. 바보. 이건 어때? 유일하게 둘 다 괜찮다고 평한 것이 블랙 체리, 저 향이다. 새 방향제를 사러 가자고 하려다가 그만 두었다. 내일 말해도 되니까.

종대는 눈을 감았다. 차 안이 평소처럼 조용하다. 이 정적 위에 두 사람의 목소리나 웃음이 끊임없이 수놓아져 있을 때가 있었다. 은근하게 목을 조이는 변화를 받아들이기 힘들어 창밖을 보게 된 게 언제부터더라? 반쯤 뜨인 눈에 스쳐가는 가로수 잔영이 어지럽다. 갑작스레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아 자세를 고쳐 앉았다. 편안하기 그지 업던 우리 사이의 공기가 변했다고 느끼자마자 몸이 뻣뻣하게 굳는다. 셔츠의 첫 번째 단추를 풀어 헤쳐도 가시지 않는 불완전한 호흡이 당황스러워서 애꿎은 케이크 상자 귀퉁이를 꼬집었다. 쉬이 구겨지지 않아서 벅벅 긁힌다. 마치 한 번도 편했던 적이 없는 것처럼 좁은 차 안에 이 애와 함께인 것이 불편하다. 다른 공간에 있는 것처럼 앞만 보고 있는 사람의 이름이 입술 끝에 맴돌았다. 낯설어. 죄 지은 사람처럼 심장이 달음질친다. 등에 식은땀이 베여 셔츠가 달라붙는 불쾌한 느낌에 몸서리쳤다. 묵묵히 지도를 그려내던 내비게이션 화면을 건드려 라디오를 틀자, 찬열이 의아한 표정으로 웬일이야? 말했다. 그냥. 라디오는 좋아하지 않는 매체다. 하지만, 지금은 필요하다. 나긋나긋한 타인의 목소리가 침묵을 찢자 종대가 깊은 한숨을 뱉었다.




“회계 부문 분위기는 어때?”


“똑같지, 뭐.”


“요즘 너희 바쁠 때잖아.”




그렇지. 이마에 닿은 창의 차가운 기운. 찬열이 이어가는 대화에 종대는 무성의한 대답으로 가위질을 했다. 창문에 김이 서린다. 그 위로 숨결을 더하곤 손가락을 들어 문지르길 반복했다. 과속방지턱을 지날 때마다 몇 번 창문에 머리를 부딪쳤다.




“오늘은 축구 보고 자야지…… 이겨야 되는데.”




얼마 전 통화에서 금요일 밤에 축구 경기가 있다며 신나 하던 그의 목소리를 상기해냈다. 또 의미 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안 추워? 대답을 필요로 하지 않는 질문을 하며 히터의 온도를 높인 찬열의 손이 시트 위에 가만히 놓여 있던 보드라운 손등을 덮는다. 반지가 눌려 무게를 더했다. 잡힌 손이 너무 따뜻해서,




“피곤하다.”


“자, 다 오면 깨울게.”


“응.”




천천히 손을 빼고 시트를 젖혔다. 허공에 머무르던 큰 손의 행방은 궁금하지 않다. 아니, 궁금해 하지 않을래.

뺨을 툭툭 건드리는 손가락. 슬며시 뜨인 눈으로 차 문을 연 채 내려다보는 찬열의 얼굴이 보인다. 시원하게 트인 눈매에 늘 장난기가 어려 있다. 어린애처럼. 밤바람에 그의 옅은 향수 냄새가 실려 온다. 다 왔어. 잡아당겨져 휘청거리자 업어줘? 묻기에 손사래를 쳤다. 돌아서 구부정하게 뒤로 팔을 뻗는 모습이 우스웠다.




“싫어, 누가 보면 어떡해!”


“보면 어때?”




장난스럽게 앞서 나가는 종대의 어깨를 끌어안은 그가 다른 손으로 케이크 상자를 빼앗아 들며 말했다.




“웃었다.”




심장이 철렁했다. 혼잣말처럼 속삭인 낮은 음성에 죄책감이 일어 삽시간에 기분이 바닥을 친다. 질질 끌려가는 이 관계에 상처받고 있는 사람은 저뿐만이 아닌 것도 같았다.

치킨으로 저녁을 대신했다. 식탁을 정리하자마자 케이크를 꺼내 올리자 찬열이는 그게 더 들어 가냐고 핀잔하면서도 물었다. 우유는 있어? 냉장고를 열더니 한참을 들여다본다.




“이거…… 유통기한 지났잖아. 버려야겠다, 맥주 마실래?”


“케이크에 무슨 맥주야, 그냥 줘.”


“식중독 걸릴 일 있냐?”


“냉장고에 있었잖아.”


“고집 부리지마.”


“아파도 내가 아파, 알아서 할게.”




난 쟤가 ‘고집’이라는 단어를 말할 때가 제일 싫다. 어울리지 않게 엉뚱한 부분에서 엄격한 면이 있다. 우유 유통기한 잔소리라니, 서른 넘어 듣고 있자니 쥐약이다. 걱정이라기보다 트집으로 들려 뿔이 났다. 그래도 마실래. 안 돼. 내놔. 기어코 그의 손에 들린 것을 빼앗아 버렸다. 왜 그러냐고 묻는 듯이 당황스러운 표정이 고스란하다. 시선을 외면하고 고집스레 한 모금 꿀꺽한 것이 기어코 화를 돋웠다. 찬열이 도로 낚아채 간 우유 갑이 속절없이 기울어진다. 거기서 콸콸 쏟아지는 흰색이 방울로 끝을 맺는다.




“뭐 하는 거야!”




싱크대에 우유를 모조리 쏟아버린 찬열에 언성을 높인 종대가 지그시 입술을 깨문다. 비겁해, 김종대. 화나게 만들 거라는 걸 알고 한 행동이다. 이미 저질러놓고 자기혐오가 일어 구역질이 날 것 같다.




“쓸데없이 왜……”


“알았으니까 그만해.”




다 제 잘못이다. 그래서 화가 난다. 찬열은 싱크대에 케이크와 포크를 집어 던지듯 내려놓는 저의 뒷모습에 침묵을 지켰다.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급격히 몰려오는 피로감에 눈동자 위로 누군가 물감을 덧칠하는 것처럼 시야가 흐려진다. 나지막한 한숨 소리가 아프게 귀에 박힌다. 미안하다고 말해야 하는데…… 그러기 싫어.




“편의점 갔다 올게.”




붙잡아야 할지 고민하기도 전에 슬리퍼 끌리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문이 잠기는 기계음. 의자에 털썩 앉아 빈 현관을 바라본다. 왜 이렇게 못나졌는지 알 길이 없다. 종대가 억지를 부리면 소리라도 지르거나 잘잘못을 따지는 게 그가 알던 박찬열이다. 그런 애인에게 같이 소리를 지르거나 졸졸 따라다니면서 미안하다고 하는 게 김종대였고. 우리는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 걸까? 이 관계 속에선 서로의 감정을 감춘 채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30분 정도가 지나서 들어온 찬열에게선 짙은 담배냄새가 났다. 그가 씻는 동안 종대는 언제나처럼 티셔츠와 반바지를 욕실 앞에 놓아두었다. 식탁을 차지한 편의점 봉투 안에는 500ml 우유와 담배 한 갑, 싸구려 같은 색깔의 라이터가 들어 있다. 욕실 문틈으로 나온 손이 바닥에 놓아둔 옷가지를 가지고 들어간다. 냉장고에서 맥주 캔 몇 개를 꺼내 왔다 갔다 하던 종대는 우두커니 서 어느새 사라진 옷의 자리를 응시하다가 걸음을 옮겼다. 어쩐지 쓸쓸한 밤이다.




“빨리, 빨리! 벌써 1골 넣었어!”




소리 지르는 거 들었어. 찬열이는 텔레비전으로 들어갈 양 잔뜩 들떠 보인다. 덜 마른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비비며 그에게 다가간 종대가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담요를 끌어안았다. 축구에는 흥미가 없다. 그나마 좋아하는 스포츠는 야구인데 이번 시즌에는 여유가 없어 종대는 경기장 한번 가질 못 했다. 핸드폰으로 뉴스 기사 몇 개를 읽고 요즘 볼만한 영화가 있는지 찾다가 야구 경기를 틀어 놓았다. 거실에서 제각각 중계되는 스포츠 채널처럼 그들은 따로 논다. 축구나 야구나 몇 번씩 결정적인 순간이 있었지만 스코어는 쉽게 변하지 않았다. 찬열이 발을 동동 구르거나 아! 하고 탄식을 뱉을 때마다 저절로 종대의 고개가 들렸다. 지금처럼.




“아아!”


“재미있어?”


“응, 지면 열 받겠지만…… 뭐해?”


“야구.”




종대가 손에 쥐고 있는 핸드폰을 슬쩍 들여다보더니 찬열은 피식 웃으면서 그의 머리카락 끝을 건드린다. 넌 재미있어?




“별로.”




보던 것을 꺼버렸다. 5회 말부터 점수 차가 커서 흥미가 떨어지고 있던 참이다. 반쯤 남아있던 맥주를 연거푸 들이켜 비우자마자 찬열이는 마지막 남은 캔을 따서 내밀고는 화장실로 향했다. 전반전이 끝난 텔레비전에서 하이라이트 영상이 반복된다.

이제 맥주 없지? 손의 물기를 털며 묻기에 고개를 저었다. 아직 후반부가 남아 있는데 캔 맥주는 거덜 났다. 찬열은 더 마시고 싶은 눈치다. 하지만, 또 나갔다 오긴 귀찮은지 입술을 쭉 내민 채 종대에게 가서는,




“오랜만에 쉬니까…… 좋다.”




무릎을 베고 눕는다. 그가 편하도록 다리를 펴주었다. 축구가 끝날 때까지 종대는 너무나 익숙해서 자꾸 잊히려는 옆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애틋한 손길이 찬열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쓰다듬는다. 찬열아, 나 요즘 이상해. 잠도 안 오고 아무것도 하기 싫고. 네가 밉기만 해. 어떡하면 좋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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