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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에야쿠] 순정의 가치 1

섹스피스톨즈 AU







 
 










끔뻑끔뻑.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눈이 멍청하게 정면을 응시했다. 담요를 다리 사이로 당겨 얼굴을 묻고 버둥거려 본다. 낮잠은 오랜만이다. 몸을 일으키진 않고 핸드폰을 찾으려 사방으로 팔을 뻗자 퍼석퍼석한 종이만 손에 감긴다. 만화책을 쌓아놓고 보다가 잠이 들었다. 무아의 경지! 허공에 유치한 손장난을 했다가 머쓱해졌다. 혼자 살기에 망정이지, 어머니께서 보셨다면 품위를 지키라고 꽤나 꾸중하셨을 거다. 모처럼 휴가인데 이게 뭐람?




“냐앙……”




하품이 연달아 새어 나온다. 나른한 목요일 오후, 큰 창으로 번진 해의 색깔이 짧은 머리카락 사이에 돋은 뾰족한 귀에 닿았다. 분홍빛 석양이 커다랗고 둥근 눈망울을 물들인다. 당황스러울 정도로 빠르게 지나간다는 점이 이 시간의 특징이다. 몇 시야? 숫자 5를 가리킨 시침을 알아챈 순간,




“으아, 늦었다!”




펄쩍 몸이 떠올랐다. 다급하게 욕실 문을 닫다가 제 꼬리를 찧은 것은 정말 바보 같은 짓이었다. 그만큼 서둘러야 했다. 어머니의 말씀을 인용하자면 오늘은 집안의 운명이 걸린 중요한 약속이 있는 날이다. 약속 시간은 여섯 시, 장소는 N 호텔 레스토랑으로 야쿠의 집에서 40분 거리에 있는 곳이지만 퇴근 시간의 도로를 고려한다면? 이미 늦었다. 일어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 있다. 오늘 저가 늦어서 상대에게 커다란 결례를 범할 것이라는 사실 말이다.

따뜻한 상아색 셔츠에 남색 정장 재킷을 걸친 그는 재빨리 현관에 다다랐다. 허둥지둥 단화를 제대로 신기도 전에 뛰어 나갈 기세로 문 앞에 섰지만 잠금 장치를 해제하기 전에 우뚝 멈춘다. 멈칫한 몸이 기울어져 이마를 부딪칠 뻔 했다. 지금 이 문을 열고 나가면 다른 인생이 시작돼, 괜찮겠어? 자문한 그는 편편한 배 위에 손을 올리고 눈을 감았다. 괜찮을 거야.

애꿎은 손가락을 깨물면서 꽉 막힌 도로를 바라보았다. 어쩌면 바람맞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내가 그 사람을 바람맞히는 거지. 선조 귀환에 중종이면 남들은 살면서 한 번 만날까 말까일 텐데, 하고 생각하며 야쿠는 쩝쩝 입맛을 다셨다. 뼈대 깊은 가문의 명맥을 유지해야 한다는 부모님에게 등 떠밀려 나가는 자리이긴 했지만 기대감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아기를 얻고 혹시 사랑에 빠지기까지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꿈 깨자, 야쿠 모리스케.”




종과 빈부의 격차를 가지고 흥정하는 반류의 맞선, 이 거래에서 사랑에 빠진다는 발상 자체가 말이 안 된다. 발정이 나면 몰라도. 누군가 비웃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태연한 척 하고 있지만 모르는 사람과 보내게 될 세 밤이 벌써부터 두려워진다. 허망한 눈동자가 어둑어둑한 하늘을 피해 핸들에 파묻힌다. 경종인 야쿠는 이 자리를 만들기까지 부모님이 엄청난 돈을 들였을 것을 너무 잘 알아서 차마 도망칠 생각은 하지 않았다. 집안에 중종의 피를 잇는 것이 가족들의 소원이고 그걸 이뤄드릴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다. 착잡한 마음이었지만 그들을 기쁘게 할 수 있다면 한번쯤은 괜찮다고 여긴 건 어쩔 수 없는 착한 심성 때문이다. 좋게 생각하자, 좋게 생각하자. 흔히 있는 일이잖아? 마침 조수석에 있던 핸드폰에서 알림이 울렸다. 뱃속 깊이 씨앗을 뿌려달라고 애걸복걸해야 하는 상대의 연락이었다.




[늦으시네요. 안 오시는 건가요?]




의외로운 메시지다. 저장되지 않은 번호 아래 통화 버튼을 눌렀다. 안면도 없는 사이에 메시지로 우는 모양의 이모티콘 따위를 보내봤자 미안한 마음이 전해지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여보세요?




“저기!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안 될까요? 차가 너무 밀려서…… 아니, 이건 핑계지. 죄송해요, 늦게 나왔어요, 깜빡 잠이 들어서…… 아, 이것도 핑계다. 한 30분만, 2, 20분만! 가면 도착하는데…… 아마, 아마도요.”




상대는 대꾸가 없다. 머저리 같이 횡설수설한 것이 창피해서 야쿠는 제 머리를 통통 두드렸다. 초조하게 다리를 떨고 있는데 휴대폰 너머로 코웃음이 넘어왔다. 냥?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그 모습이 보이기라도 한 것처럼 웃음을 그친다. 목소리를 가다듬는 소리가 급하게 이어졌다.




‘기다릴게요. 차로 오시는 거예요?’


“아, 네!”


‘조심해서 오세요.’




보통 중종은 재수 없기 마련인데 다행히 상대는 정도가 덜한 모양이다. 야쿠는 기본적인 예의범절은 갖췄나 보네, 하고 마음껏 비아냥거렸다. 하지만 조심히 오라는 한 마디에 기분이 훨씬 나아진 게 사실이다. 조금 설레는 것 같기도 하고. 어떤 이유에서든 사람을 만나는 거니까 헛된 기대에 가깝진 않더라도 끔찍한 시간은 아니길 바란다.




“어서 오십시오. 예약하셨습니까, 고객님?”


“네, 저기…… 일행이 보이네요.”




레스토랑에 발길을 들이자마자 숨을 훅 들이켜야 했다. 어떤 뒷모습에서 강하게 뿜어져 나오는 존재감에 등골이 오싹오싹해져서, 하마터면 감추고 있던 귀며 꼬리며 죄다 튀어나올 뻔 했기 때문이다. 주변에 몇 안 되는 반류들이 엉덩이를 들썩이며 그 쪽을 주시하고 있는 게 보였다. 백사자라더니 과연 위압적이다. 페로몬에 둔감하다는 핀잔을 자주 듣는 야쿠에게조차 이 정도인데 다른 이들에게는 어떨지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꿀꺽 마른 침을 넘기며 걸음을 옮겼다.




“안녕하세요, 늦어서 죄송합니다.”




앞에 있는 의자에 손을 올리며 기어가는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자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던 남자가 벌떡 일어난다. 오셨어요? 경계 어린 눈동자로 그를 살피는 야쿠의 표정이 사뭇 매섭다. 머리카락이 은빛이야! 염색인가? 상대는 이목구비가 날카롭지만 어딘지 앳된 인상이다. 피부가 하얘서 뺨이 붉어지자 금세 티가 났다. 야쿠의 노골적인 탐색에 남자는 어쩔 줄 모르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것도 모르고 야쿠는 눈에 담긴 그를 가늠해보기에 바쁘다. 키가 엄청 크네. 고개를 젖혀 올려보다가 저도 모르게 감탄했을 정도로 미남이기도 했다. 빤히 턱 끝에서 입술, 코를 지나다가 시선이 맞닥뜨렸다.




“훕! 미안한데…… 조절 좀!”




숨을 참으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앞에 있는 이가 절제를 놓쳐 흘린 페로몬이 강렬하게 야쿠의 몸을 감싸고돈다. 시선만으로도 제 몸을 어루만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남자는 발정기임이 분명하다. 이미 알고 있었는데도 질색을 하며 물러나자 그는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했다.




“죄송해요!”




곧 짙은 냄새가 사라지고 저희를 둘러싼 공기가 가라앉는다. 끓어오르던 체온이 내려가자 갑작스레 쌀쌀해졌지만 익숙해지는 건 금방이었다. 선조귀환 더하기 중종의 발정기란 이런 거구나! 덮쳐버릴 뻔 했어! 야쿠는 쿵쿵거리는 심장에 손을 올리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진정이 되자 난감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이며 서있는 상대가 보인다.




“음…… 조절한다고 한 건데 긴장을 했나 봐요.”


“나 같으면 세계 정복했겠다.”




그는 살짝 웃었다. 통화했을 때에도 저렇게 웃었을 거란 생각이 드니 괜스레 마음이 뿌듯하다. 웃으니 차가운 이미지가 단숨에 지워지는 얼굴이다.




“야쿠 모리스케에요, 스물여덟이고 만나서 반가울 자리는 아니지만…… 악수라도 할까요?”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보고자 농담처럼 던진 말인데 남자는 제법 진지한 표정으로 손을 내민다. 얼떨결에 마주 잡았다. 더 어색해지는 것 같아 얼른 주의를 돌렸다. 이름은요?




“하이바 리에프입니다, 스물넷이니까 편하게…….”


“스, 스물넷?”


“네.”


“어떤 자리인지 알고 나온 거예요?”




네 살이나 어린 애랑 뭘 하라는 거야! 정장 차림이 익숙하지 않은지 자꾸 어깨를 들먹이는 그에게 잠재적 범죄자가 된 기분으로 묻자 질문에 어떤 의도가 담겨있는지 눈치 챈 듯 눈썹을 실룩거린다. 리에프는 어리다는 이유로 무시당한 것이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어떤 자리인지 모르는 건 야쿠상인 것 같네요.”




제대로 한 방 먹은 야쿠의 두 뺨이 붉어졌다. 저가 을의 위치임을 제대로 짚어준 한 마디로 인생 최대의 수치심을 느끼는 중이다. 뭐 이런 자식이 다 있어? 맞선에 나온 중종이 그럼 그렇지! 취지부터 암울한 이 만남이 화기애애하길 바란 스스로가 멍청이라고 여기며 찬 물을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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