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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첸] 雪中愛

월간첸른(http://monthly0921.dothome.co.kr) 12월호 참여작




雪中愛



사그라지지 않는 침전의 불빛.  내관들은 문 밖에서 저희들끼리 눈짓을 주고받으며 저린 발을 꼼지락거렸다.  서안(책상)을 가득 어지른 서책과 상소문을 번갈아 보며 일그러지는 용안을 마주하고 있는 의정부 재상들과 군영의 대장들은 차라리 지옥에 떨어지는 게 나을 참이다.  그들은 잘잘못을 따져 묻는 왕의 눈을 피해 땀이 베인 손바닥을 관복 아래로 넣어 쓸었다.  여기 적힌 국방 강화에 쓰였다는 금괴는 지금 누구의 뱃속에 들어가있냐는 말이다!  그들의 왕은 이미 익선관과 용포마저 풀어헤친 채다.  체통을 지키시라 고했다가 왜놈 소리를 듣고 나서는 아무도 그 차림새에 토를 다는 이가 없었다.  굶어 죽는 백성이 있다면 너희가 경을 칠 것이다, 하는 게 말버릇인 왕은 백성들에게 성군이라 칭송 받았지만 궁궐 내에서는 폭군이라 불리기 일쑤였다.  조세 개혁안 내놓아라, 청렴한 인재 데려와라.  여린 생김과는 달리 그는 신하들을 달달 볶아댔기 때문이다.  또한, 피를 두려워하는 법이 없어 보위에 오른 해에 핏줄이나 친인척에 연연하는 일 없이 썩은 꼬리를 대거 숙청한 일이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순진하게 짐이 해야 될 일이 무엇이지요? 묻던 왕이 뒤에서 빼도 박도 할 수 없는 증참을 긁어 모아 외조부며 숙부며 가차없이 목을 베어버리는 것을 눈 앞에서 본 뒤로 신하들에게는 그가 야차와 다름이 없었다.  허나 은근히 강직한 왕을 바래왔던 이들에게는 천군만마가 따로 없었다.  그는 총명한 머리와 열린 귀, 뜨거운 심장을 가진 이상적인 군주였다.  후사가 없는 게 흠이었으나 위업에 비하면 티끌이다.  근래에는 왜군이 남해성 침략을 시도하는 탓에 심사가 뒤틀려있었다.  여차하면 직접 전쟁터에 나설 기세여서 신하들은 왕의 비위를 맞추느라 전전긍긍이었다.  그래서 금일 불시에 불려와 4시간 째 혼쭐이 빠지는 데에도 함부로 불만할 수 있는 이가 없나 보다.




“.. 주변 군의 관아를 열어 노인과 여인, 아이들을 보호하라 이르고..”




머리를 맞댄 이들 중 한 사람인 남南 금위대장 세훈은 다른 이들과는 달리 이 곳에 붙들려있는 것보다 왕께서 요새 통 취침하시지 못한다는 내전 상궁의 귀띔에 더 신경을 쓰고 있었다.  파리해진 안색으로 물든 야윈 뺨, 바짝 말라 피딱지가 내려앉은 입술을 훔쳐보는 눈길은 소리가 없었지만 왕은 귀신같이 그 눈길의 끝을 찾아낸다.  무얼 보는 게냐? 묻는 것 같은 웃는 얼굴이 달님처럼 눈이 부셔 감히 고개를 돌렸다.  지체 없이 보랏빛 비단에 말린 하나를 낚아채는 손이 보인다.  올 것이 왔구나.  세훈은 그에 근심 어린 얼굴이 되어 시간이 멈추길 바랐다.  그것은 왕의 호위를 책임져야 할 저가 아버지의 부름으로 최전방에 파견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서신이었다.  애써 모른 체하고 있으니 곧 떨리는 음성이 귓전에 내려앉는다.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배신감에 질린 얼굴이든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든 가슴을 찢는 것처럼 고통스러울 것이라 세훈은 확신했다.




“금위대장 오세훈을 남해성 전선에 보..”




서릿발 같은 눈총이 고개를 조아린 세훈에게로 향했다.  채 말을 끝맺지 못한 왕의 어수가 비단을 짓이긴다.  눈치가 빤한 영의정은 서둘러 바닥에 바짝 엎드려 고했다.  이 건에 금위대장과의 친분에 휘둘려 왕이 망발이라도 했다간 둘을 고깝게 여기던 세력에게 괜한 트집을 잡힐 명분이 될 것이라 여긴 것이다.




“전하,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벌써 자시옵니다. 오늘은 이만하심이..”




그리 하시오.  퇴전을 허하는 고갯짓에 신하들은 반색을 띈다.  또 어떤 불호령이 떨어질지 몰라 서둘러 걸음을 물렸다.  앞서 물러난 이들 뒤로 고개를 조아린 세훈은 차마 저를 향한 흑색 눈동자를 올려보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언제나 그리워지고 마는 얼굴을 들여다 보고 싶었지만 지금이라면 힘겹게 부여잡은 각오가 사상누각처럼 무너질 것 같아 두렵다.  멈추어라.  서슬 퍼런 명령에 그가 나서기 전에 어전의 문이 굳게 닫혔다.  투박해진 제 손과는 달리 매끄러운 섬섬옥수.  전하.  부름에도 답 없이 왕은 그를 이끌었다.  침전 안쪽의 밀실은 왕만 드나들 수 있는 곳, 가신 몇몇이 그 존재를 알았지만 침전 문이 닫히고 나면 왕이 온전히 홀로 머물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왕과 막역한 사이라 자부할 수 있는 세훈마저도 이 곳에 발을 들인 건 처음이다.  작은 창으로 드리운 달빛.  두 사람의 그림자.  왕은 아까와는 아무것도 담겨있지 않은 얼굴로 익숙하게 인광노(성냥)를 집어 들었다.  그 뒤를 따르던 세훈이 조심스럽게 손을 뻗는다.  이리 주십시오.  어슴푸레한 어둠에 가렸던 얼굴로 불빛이 번지자 다른 이는 볼 수 없을 낯선 용안이 환히 드러났다.  눈매에 열린 눈동자가 힘을 잃고 보드랍게 그를 담고 있다.




“전하.”

“그렇게 부르지마.”




매서운 목소리가 울린다.  불빛이 만들어낸 그림자 하나.  세훈은 품에 안겨 든 옥체를 마주 안지도, 그렇다고 뿌리치지도 않고 가만히 있었다.  전하, 하고 한번 더 불렀다가 발등을 콱 밟히고서는 숨죽여 웃어버렸다.




“종대야.”




다정하게 불려진 이름은 참으로 오랜만에 듣는 것이어서 퍽 낯섦이라.  너른 들판에 우뚝 선 소나무로 자라야 했던 외로운 궁에서 유년 시절부터 함께한 벗이자 가슴에 묻은 정인에게만 불리기를 허한 왕의 이름이었다.  종대는 움켜쥔 세훈의 옷깃을 세차게 흔들었다.




“네 아비에게, 대장군에게 갈 수 없다 고해라. 심보 고약한 왕이 보내주지 않는다 이르란 말이다!”




그리 할 것이지?  저를 올려다보며 보채는 물기 어린 눈동자.  어린애처럼 악을 쓰는데 하나도 밉지가 않다.  외려 애달파서 세훈은 제 입술을 깨물었다.  심중에 이르는 통증이 지금까지 무수히 그의 몸을 스쳐간 상처는 비할 데 없이 아렸다.
 




“금위대장은 왕을 보호하는 직책이다, 나를.. 그런데 왜 네가..”




세훈의 어깨에 이마를 기댄 목소리가 위엄을 잃고 볼품없이 갈라졌다.  저가 보내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고 사지를 묶어 가두어도 그는 뜻을 꺾지 않을 걸 이미 알고 있다.  밀정에 따르면 이번 왜군의 침략은 대대적이리라.  자칫 잘못하면 큰 전쟁으로 번질 수도 있다는 것을 염려한 세훈의 아버지가 남해성으로 떠난 것이 보름 전이다.  대장군이라 칭해지는 그는 선왕 때부터 지금까지의 전투에서 패한 적이 없는 백전노장이었다.  그 뒤를 따라 내로라하는 군단들이 진입로에서 왜군을 처단하기 위해 남해로 내려갔다.  거기에 세훈 또한 빠질 수 없었다.  대장군의 장자라는 위치에 걸맞게 무예가 출중하여 이미 무사로 정평이 난 지 오래였으니 조정은 물론이거니와 전쟁이라는 악惡 자체가 그를 무덤으로 불러들이고 있었다.  다만, 소중한 이가 마음에 걸려 미루고 미루다 결정한 일이었다.  종대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의 가슴에 매달렸다.  위대한 왕이 아닌 나약한 인간으로 절 봐주고 이렇게 애처로이 우는 것을 불쌍히 여겨 곁에 남아주길.




“나를 지키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고.. 그.. 랬잖아..”

“우지 마십시오.”




흘러내리는 옥루를 문지르는 따뜻한 손에 뺨을 기댔다.  검을 놓은 적이 없어 거칠한 살 가시.  이럴 줄 알았다면 나를 지키기 위해 무관이 되겠다던 너의 말에 그리 기뻐하지 않았을 것이다.  손이 하얘지도록 세훈의 옷깃을 움켜쥔 종대는 고개를 들었다.  허공에서 마주친 눈을 피하려 하기에 쥔 것을 한번 세게 당겨 겁박했다.




“옥에 가둘 것이다.”

“그 옥은 낙원이겠지.”




세훈은 쓰게 웃었다.  그의 주인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하늘이시여, 어찌 이리 가혹하단 말입니까?  천명을 받들어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살았습니다.  어머니와 외조부마저 외면하고 뜨거운 피를 뒤집어쓰는 것조차 마다하지 않았지요.  밤이면 악몽에 시달려 잠을 자지 못하고 속을 게워낼지라도 역한 이 생을 감내하게 했던 것, 그저 지금 내가 붙잡고 있는 이 하나만 바랐는데 그게 그리 못마땅하신 거요?  그저 오세훈이라는 사랑옵은 벗 하나만 곁에 두고자 했던 게 잘못이요?  야속한 하늘을 원망하는 틈으로 조용한 울림이 새겨진다.




“널 위해 가는 거다.”




너의 안위, 너의 세상, 너의 백성을 지키기 위해.




“집어치워! 죽으면, 네가 죽으면.. 다 무슨 소용이야..”




숨을 쉴지언정 죽은 것과 마찬가지일 것을.  세훈은 제 가슴팍을 치는 종대의 연한 손을 잡았다.  구슬픈 울음소리가 밀실을 채워 세훈을 익사시키려 한다.  떨리는 몸을 힘주어 끌어올린 그는 가만히 왕의 머리가락에 턱을 비비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앞선 죽음보다 품 안의 왕이 슬피 우는 것이, 홀로 기다릴 것이 더 아파서였다.  단단한 몸에 기댄 속눈썹이 뺨 아래로 그림자를 그어냈다.  달마저 그들이 가엾다.  가장 가까이에 머무르면서도  단 한번도 서로의 것인 적 없던 그들이 처연하다.  허망하게 가라앉은 눈동자들.  세훈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 어수가 제 등을 감쌌다가 떨어지는 것에 뒷걸음질을 쳤다.  그의 관대가 바닥으로 떨어져 둔탁한 소음을 만들었다.  하지만,




“무엇이든.. 해준다고..”




거스를 수 없는 목소리.  어명이다.  띄엄띄엄 공기에 수놓아지는 그것이 저를 원하고 있다.  감정마저 무겁게 억누르고 있던 옷가지가 바닥에 흐르는 내내 눈물 길이 난 얼굴을 내려다 보았다.  나의 사랑스러운 주군.  종대의 뺨을 그러쥔 세훈은 주저 없이 그의 입술을 앗았다.  조갈이 심한 가뭄이 되어 샘을 탐했다.  불경을 용서하십시요.  기꺼이 감은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린다.  태초로 돌아간 그들은 탐욕스럽게 서로를 집어삼켰다.  독이었으나 달았다.






이른 새벽을 지저귀는 새 울음이 눈밭으로 떨어진다.  정적의 현신인 것처럼 눈송이는 내려와 틈을 채울 뿐이다.  잠에 빠져있는 종대의 머리카락을 빗어 넘기고 반듯한 이마에 입술을 내렸다.  뒤척거리는 어깨가 드러나자 세훈은 조심스레 이불을 끌어 덮어주곤 몸을 일으켰다.  상흔으로 뒤덮힌 무사의 등은 곧 지난밤 흐트러진 옷가지로 가려진다.  좁은 창을 밀자 소리없이 쌓인 눈이 시야를 어지럽힌다.  이불자락으로 몸을 가린 왕은 미동도 없이 서 창 밖을 바라보고 있는 너른 어깨를 마주하자 다시 눈물이 날 것만 같다.




“눈이 옵니다.”

“예부터 넌 눈을 좋아하더라.”




전하께서도 좋아하시잖아요.  옛 기억이 떠오른다.  15년 전, 아버지를 따라온 궁의 안쪽 정원에서 종대를 처음 만났다.  맨발로 눈 위를 걷고 있는 너를 보았던 열살 소년은 무릎을 꿇어야 했다.  천진하게 웃던 그 얼굴.  아버지가 맹세케 한 충성이 없었더라도 언제든 저는 그에게 굴복했을 것이다.  세훈은 제 몸뚱어리를 끌어안은 고운 손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돌아오겠다고 약속해.”




그는 끝내 약속해주지 않았다.  속절없이 기나긴 밤들이 지나갔다.  시간 또한 그처럼 야속하다.  왕은 울지 않았다.  다만, 웃음 잃은 얼굴이 창백하고 뺨 아래 실핏줄이 터져 흉했다.  1년 남짓한 전란에서 거듭되는 승전보에도 그는 기쁘구나, 란 말 뿐이어서 신하들은 맥이 빠졌지만 희생당한 백성들을 위한 비석을 세우라는 명 뒤에는 감복하여 고개를 조아렸다.  누구도 한 사내가 앗아가버린 저희 왕의 애락을 눈치챌 수는 없다.




“산보를 나가고 싶구나.”


“예, 전하. 눈이 내리니 가림막을 준비하겠나이다.”




종대는 느린 걸음으로 눈 위를 걸었다.  잿빛 하늘을 수놓는 하얀 눈송이가 그의 뺨으로 내려 앉는다.  저릿한 심장을 덮은 용포의 가슴께를 움켜쥐자 내관들이 뛰어왔다.




“전하! 어디 편찮으신..”

“아무것도 아니다.”




팔을 뻗어 그들을 물리곤 왕은 계속 걸었다.  멀찍이 떨어진 신하들의 눈에 하이얀 눈밭에 우뚝 선 장미가 담긴다.  붉은 용포를 잡아채듯 눈발이 날렸다.  거먕빛이 된 눈가에 차오르던 눈물이 벼랑으로 떨어진다.  




날이 찹니다.

옥루를 그치옵소서, 고운 얼굴 상하십니다.

제가 지켜드릴 것입니다.

종대야, 우지마라.

내가 나쁘다. 응? 잘못했어.

네가 좋아하는 약과 먹자.




“으흑..”




너로구나.  뻗은 손바닥에 가만히 오른 눈송이에 뺨을 짓이겼다.  눈물 범벅이 된 얼굴로 왕은 어린애처럼 엉엉 울었다.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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