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워진 밤하늘이 내려앉은 유리창 안을 차지한 불빛은 따뜻한 색깔이다.  마주한 이를 웃게 만드는 재잘거림.  애정 담긴 목소리.  그 속에 홀로 앉아있는 남자는 두꺼운 책에 코를 박은 채 연신 미간을 찌푸린다.  그 앞에 놓여있는 머그잔은 식은 지 오래.  둥둥 떠있는 레몬도 수영을 멈추고.  느릿느릿 책장을 넘기는 손이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고 연신 테이블을 두드린다.  내일 오전 10시, 종대가 제일 약한 암기 과목의 시험 시작이자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시간이다.




‘지잉- 지이잉-‘




♡박찬열 똥개♡라는 문구로 가득 찬 핸드폰 화면을 힐끔 넘겨본 입 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여보세..”


‘응, 여보.’


“미쳤나 봐.. 여, 뭐라고?”




듣기 좋은 웃음 소리가 들려온다.  시험 기간이라서 우리는 여느 때처럼 붙어있을 수가 없게 되었다.  같이 있으면 책장보다는 연인이 된 소꿉 친구의 눈동자를 들여다보고, 그의 손가락을 넘겨보고 싶어진다.  그래서 일부러 찬열의 집으로 돌아가지 않은지가 일주일쯤 되었고 수업을 마친 후 근처 카페에서 공부를 시작한지가 3시간이 지나고 있다.  어느새 어둑해진 길거리가 이제야 눈에 든다.




‘.. 듣고 있어?’


“어어, 뭐라고?”


‘저녁 먹었냐고.’


“대충.. 샌드위치 먹었어, 너는? 집이야?”


‘담배 사러 나왔는데.’




아아, 그랬구나.  종대는 시야를 채운 글자에 밑줄을 치면서 눈을 끔뻑거린다.  핸드폰 너머 찬열은 춥다느니, 손이 시리다느니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다가 조용해졌다.  침묵을 눈치채지 못한 채 시간이 흘러간다.  책장이 넘어간다.  실룩거리는 입술 새로 알아듣기 힘든 중얼거림이 흘러나오다가 초조한 손가락에 부딪혔다.  아까도 틀렸던 걸 또 틀렸다.  신경질적으로 제 손가락을 앞니로 깨물었다가 아야! 울상이 된다.




‘뭐해.’




통화 중이었다는 걸 상기 시키는 목소리가 퉁퉁 부어 있다.  장난스레 삐쳤어? 묻자 조금, 이라는 귀여운 답이 돌아왔다.  뻐근한 목을 뒤로 젖히며 책에서 벗어난 종대가 호탕하게 웃는다.  차가운 차 한 모금으로 목을 축였다.  복잡했던 머릿속이 잠시나마 맑아지는 기분이다.  그는 의자로 깊숙이 몸을 기댔다.  시원한 숨소리가 귀를 간질인다.  집 담벼락에 기대 담배를 피우며 제 목소리를 기다리고 있을 찬열을 머릿속에 그려본다.  오늘은 시간도 우릴 도와주질 않아 도서관 앞에서 우연히 마주친 게 다인 얼굴.  괜히 제 옆에 있던 후배를 째려보기에 옆구리를 쿡- 찔렀다가 손가락을 붙잡혔다.  그 새를 놓치지 않고 찬열의 점퍼 속으로 끌려들어가 감싸진 손.  깜짝 놀라 펄쩍 뛰었더니 장난스럽게 웃던 그 얼굴.  새삼스레 보고 싶다.  내일 점심 시간을 맞춰보려다 엇갈리자 낮게 욕지거리를 하는 게 들린다.  이 애도 내가 보고 싶은가 보다.




‘아까 손 차갑더라, 따뜻하게 좀 다녀.’




망할 시험 기간만 아니었더라도, 인간 난로와 붕어빵을 옆에 끼고 이 겨울날을 이겨냈으리라.  한기가 도는 어깨에 벗어두었던 재킷을 걸쳤다.  겨울은 추위를 많이 타는 저가 제일 싫어하는 계절이다.  거기다가 시험 기간이라니, 종대는 몸을 움츠린 채로 찬열은 볼 수도 없는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새벽 1시 35분, 책상 위에 위태롭게 흔들리는 인영이 보인다.  꾸벅꾸벅-  침대 위에서 얕게 진동하는 핸드폰에 답해줄 정신은커녕 졸기에 바쁘다.  힘없이 쥐어져 있던 샤프가 제 손에서 떨어지고 나서야 엉덩이를 들썩거리면서 잠에서 깨어났다.




“아.. 미치겠다..”




종대는 반쯤 풀린 눈으로 대충 책들을 책상 한 쪽에 밀어버리더니 바로 뒤에 있는 침대로 쓰러지듯 누워버렸다.  이불을 들춰 그 속으로 머리 꼭대기까지 숨겼더니 불 켜진 방안이 삽시간에 정적으로 물든다.  그 침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째깍째깍- 자명종의 시침 소리만 요란해졌다.






스탠드 불빛 아래 기지개를 핀 찬열이 노트 옆에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담뱃갑에서 흰 개비 하나를 꺼내 들고 몸을 일으킨다.  종대는 깜깜무소식이다.  잠들었나?  홀로 키들거리면서 베란다로 향하는 발길.  창에 가까워지자 차가운 겨울 공기가 발등으로 내려앉는다.  자연스레 겨울이면 집에 처박혀서 나갈 생각을 않고 이불 속에 돌돌 말려있을 게 뻔한 연인이자 소꿉 친구인 이를 떠올렸다.  고등학생 때에도 추운 게 너무 싫다며 발목까지 오는 두꺼운 점퍼를 꼬옥 껴입고 모자까지 덮어쓰고 목도리를 코 끝까지 칭칭 감싼 채 종종 걸음으로 다니곤 했다.  그게 퍽 귀여워서 일부러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면 무슨 새끼, 무슨 새끼 하면서 씩씩거렸고.  제 힘으로 뚱뚱해진 몸을 일으키질 못해서 아등바등.  그걸 끌어안아 일으켜줄 때마다 턱에 닿는 온기 때문에 추운 겨울이 좋아졌다.  비록 억센 주먹으로 한두 대 얻어맞긴 했지만 말이다.  찬열이 여전히 입가에 웃음을 매달고 커튼을 비집는다.  응?




“첫눈이다..”




입으로 가져가던 담배 개비를 주머니에 쑤셔 넣고 그 손에 핸드폰을 쥔다.  얼씨구?  허둥지둥한 나머지 미끄러진 핸드폰이 바닥에 떨어졌지만 아랑곳 않고 재빨리 주울 뿐이다.  어두운 밤 하늘에 꽃잎처럼 흩날리는 흰 송이들을 담는 찰칵- 소리.  싱글벙글한 얼굴에 닿아 녹아 드는 첫눈.  우리의 첫눈이야.  사진과 함께 전송한 메시지에 답이 없다.  역시 자나?  몇 번이나 함께 맞아왔던 눈인데 오늘의 첫눈이 찬열에게 특별한 것은 아마 우리 사이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까닭일거다. 첫눈을 함께 맞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바보 같은 말에 기대어 지난 몇 해 동안 종대를 괴롭혔다. 그게 유일한 희망인 것처럼 중요했으니까.  그래서 첫눈이 올 때면 그의 학원 앞에서 기다리고 집으로 쳐들어가고 PC방에서 끌고 나오고.. 뭐, 그랬었다.  그를 짝사랑한 여섯 해 동안 다섯 번이나 함께 첫눈을 맞았다. 한 번은 감기 때문에 허무하게 실패했고.  올해의 첫눈을 함께 맞으면 이제 사랑이 영원해지려나?  엉뚱한 생각이 눈을 따라간다.  코 끝이 빨개지도록 베란다에 서 눈을 보고 있던 찬열은 여전히 조용한 핸드폰을 내려다보고는 서둘러 집 안으로 몸을 들였다.






뻔한 비밀번호를 누르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이럴 줄 알았지.  환하게 불이 켜져 있지만 예상대로 종대는 이불더미에 가려 코빼기도 보이지가 않는다.




“으.. 음.. 차가워.”




종대는 제 품으로 파고드는 차가운 덩어리를 반사적으로 끌어 안았다.  턱 끝을 간질이는 머리카락에 푸흐흐, 하고 바람 빠진 웃음 소리를 낸다.  찬열은 의아해서 눈을 반짝 떴다.  적어도 머리를 두드려 맞거나 욕 한두 마디는 들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귓가에 입김을 불어주는 따뜻한 이 때문이다.  왜 왔냐고 묻는 입술이 닿은 귀가 빨갛다.




“.. 첫눈 온단 말이야.”


“진짜? 그래도.. 추운데 뭘 오고 그래.. 몇 시야?”




몰라.  비몽사몽 눈을 비비며 꿍얼거리는 입술에 쪽- 입을 맞추었다.  종대는 이불 아래로 얼어있는 찬열의 손을 잡는다.  차갑다.  유치하게 첫눈 때문에 추운 겨울 길을 달려온 게 부끄러운지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종대가 잡은 손을 살짝 잡아당겼다.




“첫눈 볼까?”


“어? 어..”




순순히 일어나더니 이불을 뒤집어쓴다.  이불깃을 부여잡고 얼굴만 쏙- 내놓은 채로 찬열에게 고갯짓을 한다.  얼른 일어나.  퍼뜩 사랑스러운 이불더미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좌우로 몸을 흔들며 뒤뚱뒤뚱 창가에 서서 굳게 닫혀있는 창문을 열자 차가운 공기가 기다렸다는 듯 그들을 지나친다.  까만 하늘 아래 날아다니는 눈송이를 가만히 올려다보는 두 사람.  무슨 생각해?




“작년에도 같이 첫눈 봤잖아, 우리.”


“작년에? 아냐, 너 아팠잖아.”


“그래, 근데 네가 술 처먹고 들어와서 창문 다 열고!”


“거짓말! 내, 내가?”


“미친.. 네가 첫눈 봐야 된다고 울고불고 해서! 기억 안 나? 죽을래애?”




정말?  몸을 돌린 종대의 도끼눈에 찬열은 모른체하며 뽀뽀를 했다.




“감기 심해져서 다음 날 병원 갔잖아아!”




어렴풋이 그 날의 눈길이 떠오른다.  그게 첫눈이 내려앉은 길이었구나.  그럼 짝사랑을 시작한 이래로 한번도 빼놓지 않고 종대와 첫눈을 나눈 거다.  아픈 이에게 주정을 부린 것이 미안해서 뒤를 졸졸 따르는 저에게 내밀어졌던 손.  그 때, 잡았던 그의 손은 열이 번져 아주 따뜻했었다.  찬열은 항의하듯 튀어나온 오리입술에도 가볍게 입을 맞추고 그를 세게 껴안았다.




“이런다고 봐줄 것 같아? 이 똥개 같은..”


“좋아해.”




버둥거리던 몸이 멈칫하니 찬열은 웃었다.  정말 좋아해.




“뭐, 뭐라는 거야? 미친 놈!”


“아니, 사랑해.”


“.. 흐아..”




종대는 새빨개진 얼굴로 우스운 대답을 했다.  찬열에게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고백을 받은 건 처음이어서 당황해버리고 말았다.  사랑이라니 미쳤나 봐!  머리 끝에서 불이 난 것처럼 얼굴이 뜨거워진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종대를 내려다보던 찬열의 입술에는 여전히 웃음기가 가득 베여있다.  저희를 감싸며 녹아버리는 눈송이에 추운 줄도 모르고 둘은 입술을 포갰다.  다음 해의 첫눈에도 네 곁에는 내가 있을 거야.




“사랑해.”


“우, 우리 내일 저녁에 뭐 먹을까?”


“사랑한다고.”


“너 시, 시험 공부는 다 하고 온 거야?”


“사랑해.”


“윽..”




너른 가슴팍에 얼굴을 묻어버렸다.  종대는 여전히 발그레하다.  찬열이 조르는 것처럼 귀에 뺨을 비비기에 그는 못 이기는 척 속삭였다.  찬열에게만 들릴 것처럼 아주 작은 목소리다.




“나도 그래.”




어쩌면, 겨울이 좋아질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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