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내용으로 건너뛰기

[세첸] 꽃 시리즈 Ⅱ. Lagrass (부제 : 친절한 당신)

세훈X종대


 
 






화려한 불빛들이 수놓아진 도시의 밤.  새벽 두 시, 감성의 파도에 거침없이 몸을 내던진 이들이 거리를 휩쓸며 청춘을 발산한다.  그 속에 이질적으로 섞인 남자가 작게 욕지거리를 흘린다.  사람들에게 번진 것처럼 한참을 걷다 보니 비교적 한적해 보이는 골목이 나타났다.  그 곳으로 서둘러 발길을 디딘 남자는 한숨을 쉬고는 틈 없이 정렬되어 있는 네온사인이 붙어있는 건물 앞까지 걸어나갔다.  ‘Secret Bar’라고 쓰여진 간판을 올려보고는 고개를 젓는다.  언제 봐도 구닥다리 같은 이름.  지나치는 사람들을 잔뜩 의식하며 두리번거린 그는 재빨리 지하로 모습을 감추었다.  구닥다리라고 표현된 곳은 의외로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누가 봐도 돈 꽤나 발린 인테리어의 바였다.  검은색 가죽 소파와 바 스툴, 은빛이 섞인 대리석 기둥, 천장에 매달린 모던한 팬던트 조명까지.  말쑥한 차림의 바텐더들 옆에 서 앞에 있는 손님과 대화 중이던 준수한 외모의 남자가 가게로 들어선 그를 보더니 반갑게 손을 흔든다.




“세훈아!”




좁혀진 미간을 문지르면서 대충 바로 앞에 있는 빈 자리에 앉아버렸다.  어느새 다가온 남자를 향해 ‘여기서 이름 부르지 마.’ 라고 힘껏 으르렁거렸지만 소용이 없다.  제 말에는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형사님이라고 불러도 되나? 하고 너스레를 떤다.




“김준호..”


“형이다.”


“형, 나 8일만에 쉬는 날이라고. 진짜 죽을래?”


“알지, 알지. 근데 너밖에 부탁할 사람이 없었어.”


“뭔데 그래?”


“사장님!”




어디선가 절 찾는 목소리에 준호는 헤헤- 사람 좋은 웃음을 짓고는 몸을 돌린다.  저 형이 진짜!




“코스로 대접할 테니까 즐기면서 기다려요, 형사님~”


“술 안 마셔!”




들은 척도 않고 걸어나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저건 형 아니었으면 진작 때렸다, 라고 생각했다.  푹신한 소파에 등을 기대니 쌓였던 피곤이 몰려온다.  흘러나오는 음악도 좋고 조명도 어두컴컴하고 까딱하면 잠이 들 것 같아 얼른 몸을 일으켰다.  죽겠네.  어딘지 냉소적인 느낌이 드는 얼굴에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눈에 익은 직원 한 명이 알은 체를 하며 그의 테이블에 과일이 가득 담긴 트레이를 내려둔다.  겨우 몸을 일으킨 세훈이 그에게 눈 인사를 하며 체리를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술은 어떻게 드릴까요?”


“안 마셔.”


“에이~ 오랜만에 오셨잖아요.”


“차 가져왔어.”


“그럼 Non-alcohol이라도 갖다 드려요?”


“고마워.”


“아, 오늘 첸 형 때문에 오셨구나~”


“뭐? 누구?”


“첸이요, 첸! 저기 노래하고 있는 형이요.”




직원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으로 자연스럽게 고개가 돌아갔다.  앞쪽 유리 부스 안에서 눈을 감은 채 노래를 부르고 있는 남자.  인식하지 못하고 있던 목소리가 귓가에 살포시 내려앉는다.  이 형은 언제 또 저런 걸 만들었대?  여기는 게이 바야, 라이브 카페야, 정체가 뭐야?  도대체?  어깨를 으쓱거린 그는 투덜거린 것과는 달리 부스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육안이 불분명한 정도도 아니다.  그 안에서 입을 벙긋거리는 남자는 꽤나 제 취향이었다.  선이 가는 것도 그렇고 착해 보이는 인상이 마음에 들었다.  저런 얼굴이 흥분한 채 아래에 깔려 있다면, 상상만으로도 피곤이 싹 달아난다.  하지만, 무엇보다 끝이 말려 올라간 것처럼 보이는 입 꼬리를 가까이서 보고 싶다.  키스를 하면 더 좋고.  그 이후는 말할 것도 없다.  바쁘기도 하고 귀찮기도 해서 연애고 뭐고 관둔 지 오래인 세훈은 오래간만에 구미가 당겨 저도 모르게 마른 입술을 혀로 쓸었다.  마침 사내에서 막내 딱지를 떼서 제 시간을 굴릴 수 있게 된 참이라는 것도 그를 부추겼다.  딱히 연인의 성별에 제한을 둔 적은 없지만 지금이라면 같은 남성이 좋을 것 같다.  저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남자 말이다.  자유분방한 스타일이면 좋겠는데.  얽매이고 싶진 않으니까.  그가 김칫국을 사발째 들이키고 있을 때, 노래 한 곡이 끝났다.




“마지막 곡입니다. 김광석의 ‘사랑했지만’.”




눈매를 과하다시피 휘어 웃는 걸 보니 마음이 조금 급해졌다.  그나저나 쟤 때문에 날 불렀다니, 혹시.. 소개팅? 일 리가 없지.  이 새벽에, 저 형이, 날 위해서, 그런 기특한 생각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사실 세훈이 생각하는 최상의 시나리오는 오늘 저이와 뜨거운 하룻밤을 보내고 깔끔하게 작별하는 것이었다.  진중한 연애가 두어 번 상처를 준 이후로 그는 은연 중에 연애를 기피했다.  연애란 감정의 과소비나 인생의 사치쯤?  이제는 그게 편했다.  가벼운, 책임이 없는 관계.  성가시게 하면 정이 뚝 떨어진다.  기대했다가 상처받는 게 싫어서 아예 처음부터 포기하는 거일지도 모르고.  포크로 사과를 집어 먹으며 그는 쓰게 웃어버렸다.  혼자 별 생각을 다 하네.  진짜 외로운 건가?



어제는 하루 종일 비가 내렸어.  자욱하게 내려앉은 먼지 사이로.

귓가에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그대 음성 빗속으로 사라져버려.

때론 눈물도 흐르겠지 그리움으로, 때론 가슴도 저미겠지 외로움으로.

사랑했지만, 그대를 사랑했지만 그저 이렇게 멀리서 바라볼 뿐 다가설 수 없어.

지친 그대 곁에 머물고 싶지만 떠날 수 밖에.

그대를 사랑했지만.




“고맙습니다.”




조심스럽게 유리 부스 뒤쪽 문을 열고 나가는 것을 보고 나서야 다시 소파에 기댔다.  목소리도 좋네.  앞으로 지나가면 말이라도 걸어볼까 했더니, 생각하며 아쉬움을 사과로 달랜다.  첸이라고 불린 남자가 동성애자가 아니어도 저가 원하면 술 상대쯤은 허락할 거라는 확신.  픽- 웃어버린 그의 자신감에는 근거가 있었다.  잘생긴 외모로 덕을 본 건 물론이요, 조금 못된 성격까지 어느 정도 용서를 받아왔다.  뿐만 아니라 부족할 것 없는 집안 환경도 한 몫을 거들었으니까.




“마셔.”




화려한 빛깔의 칵테일로 목을 축였다.  그걸 마시면서 쳐다보자 눈치가 빤한 준호가 샐쭉- 웃으면서 운을 뗀다.




“아까 노래 부른 애 봤지? 걔 좀 집에 데려다 줘.”


“뭐? 형 애인이야?”




아니, 단호한 대답에 다행이다, 라고 말할 뻔 했다.




“직원인데 몸이 좀 안 좋아, 걱정할 정도는 아닌데.. 아무튼, 그것 때문은 아니고 가게 진상 하나가 들러붙어서 성가시게 됐어.”


“들러붙어?”


“집 앞에서 기다리고, 번호는 어떻게 알아냈는지 연락도 오고..”


“그래서, 스토커 잡아서 건수 올리라고? 내 소중한 Off에?”


“아니, 원래는 내가 데려다 주는데 오늘 중요한 고객이 와서.. 아무튼 좀 부탁해~ 요즘 세상이 너무 흉흉하잖아, 찜찜해.  한번만, 세훈아~”




김 샜다.  집에 데려다 주기, 기회라면 기회랄 수 있었지만 세훈이 원한 가벼운 관계와는 어울리지 않는 시작이었다.  거기다가 준호가 이렇게 따로 부탁할 정도의 친분을 가진 직원이라면 더더욱 엮여서는 안되겠지.  갑작스레 흥미를 몽땅 잃어버린 그는 심드렁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신나서 재잘거리는 준호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취향인 남자와 기분 좋게 한 잔 하고 즐긴다> 대신 <집에 가서 시원한 맥주 마시고 축구나 보다 잠들어야지>, 행복한 계획을 세웠다.  네 걸로 전화한다, 하고 테이블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던 세훈의 핸드폰을 집는다.




“응, 나야. 후방에서 기다려, 내 친구 갈 거야! .. 아냐, 안돼! 미쳤어? 진짜 친한 친구야, 부담 갖지마. 응, 응. 기다려, 내일 보자~”




살가운 통화에 지랄하네, 중얼거리자 웃으면서 주먹질을 해왔다.  절친한 사이고 이미 여기로 불려왔을 때부터 그의 부탁을 들어줄 요량이었으므로 더 이상 뭉그적거리지 않았다.  핸드폰을 받아 들고 바지 주머니에 있는 차 키를 버릇처럼 확인했다.




“휴무 맞춰, 진짜 크게 쏠게. 내 마음 알지?”


“꺼져, 간다.”


“응, 직원 통로에 있을 거야! 전화해!”




준호는 손을 흔들며 휘적휘적 가게 뒤쪽으로 향하는 그를 보면서 이마를 문질렀다.  정확히 말했어야 했나?  뭐, 눈치는 기가 막히니까 금방 알아채겠지.



문을 밀고 들어선 직원 통로에 서 있는 인영에게 다가갔다.  생각보다 키가 작았다.  머리가 제 턱 부근쯤이라고 쓸데없는 가늠을 한다.  발자국 소리에 고개를 돌리더니 살짝 웃으면서 안녕하세요, 인사를 했다.




“초면에 신세부터 지네요, 고맙습니다.”




움직이는 입술을 곁눈질하던 세훈은 신경질적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아, 아깝다.  역시 내 취향이야.




“네, 가죠.”




하지만, 그는 단념이 빠른 편이었다.  어차피 못 먹는 감을 찔러서 무엇 하리?  무미건조한 대꾸를 하고는 앞으로 나서는데,




“저기.”


“네?”


“죄송한데.. 옷 좀 잡아도 될까요?”




몸이 좀 안 좋아, 가까스로 준호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실망한 나머지 기본적인 배려도 하지 못했다는 것에 급히 반성을 한 후, 우물주물 하고 있는 남자의 곁으로 갔다. 어디가 아픈 거지?  다린가?  멀쩡한데?  작게 고맙습니다, 하며 옷깃을 힘없이 움키기에 손을 잡아 제 팔 위에 얹어 주었다.




“친절하시네요.”




씨발.  하얗게도 웃네.  차를 주차해놓은 곳까지 오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사람이 많은 탓도 있고 조수석에 앉은 하얀 남자 때문이기도 했다.  몸을 움츠린 채 걷는 그가 자꾸 지나가는 사람들에 치여 뒤처지는 바람에 세훈은 짜증이 났다.  얼굴이 취향이고 뭐고 굼뜬 사람은 딱 질색이다.  불러주는 주소를 네비게이션에 입력했다.  우리 집이랑 가깝네.  습관적으로 담배를 입에 물었다가 옆을 힐끔- 보고는 한숨을 쉬어 버렸다.  움찔- 하는 게 느껴진다.  아니, 담배 무는 걸 봤으면 펴도 된다거나 자기는 안 핀다던가 뭐라고 말을 해야 피던지 말던지 할 거 아냐.  소심한 거야, 눈치가 없는 거야?  쌓여있던 피곤과 스트레스가 엉뚱한 곳에 해소되고 있다는 것에 아랑곳 않고 세훈은 운전대에 손을 올렸다.  적막이 흐르는 차 안의 공기가 답답하다.  라디오 볼륨을 높이려는데, 옆에서 안전벨트를 꼭 쥐고 있던 이가 말을 걸어왔다.  버튼에서 손을 뗐다.




“사장님 친구라고 하셨죠?”


“.. 아뇨, 제가 두 살 어려요.”


“그럼 제가 형이에요, 전 사장님보다 한 살 어리거든요.”




형 대접해달라는 거야?  기가 찼다.  방금 전까지는 안절부절 못 하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생글생글 웃으면서,




“이름 물어봐도 돼요?”




묻는다.  옛 말 틀린 거 하나 없다고, 웃는 것을 보니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솔직히 그냥 웃는 얼굴 때문은 아니고 웃는 예쁜 얼굴 때문이었지만.  인상이 서글서글한 게 성격도 좋아 보였다.




“오세훈이에요. 그 쪽은 ‘첸’이라고 부르던데..”


“아, 그건 가게에서 쓰는 이름이고 본명은 김종대에요!”




별 것도 아닌 것에 화들짝 놀라 커지는 목소리.  세훈은 입가를 가리며 살짝 웃었다.  전혀 형 같지가 않은데.  강아지 같아.




“그 스토커 얘기나 좀 해봐요.”


“아아.. 들으셨어요..? 스토커는 아니고 그냥.. 나쁜 분은 아닌데.. 좀..”


“그런 식으로 말하니까 당한다는 생각은 안 해요?”


“네?”


“헷갈리게 하잖아요.”




속마음이 튀어나간 것에 아차, 싶었지만 간혹 있는 일이어서 가타부타 변명은 하지 않았다.  조금 밝아졌던 분위기가 삽시간에 바닥을 쳤다.  딱히 신경이 쓰이진 않았다.  어차피 오늘 보고 말 거다.  속으로 ‘뭐 이런 재수없는 새끼가 다 있어?’ 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그 분한테 상처가 될까 봐 조심스러웠는데.. 세훈씨 말대로 제가 헷갈리게 하는 게 더 상황을 안 좋게 끌고 간 것 같아요. 다음에는 제대로 말씀 드릴게요.”


“아.. 네.”




보이는 것과 다르게 똑 부러지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런 담백한 대화는 나쁘지 않다.




“고마워요, 오늘 이렇게 데려다 주시는 것도 그렇고.”


“이래 보여도 형사에요.”


“와! 진짜요? 저 그럼 형사 친구 생긴 거에요?”


“네, 뭐.. 형사 동생으로 하죠.”


“우와.. 신기하다, 갑자기 든든해졌어요.”




뭐지?  이 말도 안 되는 ‘순수한 느낌’은 어디서 나오는 거지?  못 먹는 감이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타입은 성가실 확률 100%.  지금도 성가시다.  아니면, 연기일 수도 있고.  게이 바에서 일하는 것만 봐도 쉽게 판단하는 건 어리석은 짓일 거다.  하지만, 이상형에서 점점 멀어지는 대신 그는 다른 쪽으로 존재감을 가지기 시작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왠지 그가 친하게 지내면 좋을 ‘괜찮은 사람’이라는 느낌만은 지울 수가 없다.  저는 원래 타인과 잘 어울리는 성격이 아니다.  친해지는 데 어렵기도 하고 오래 걸리기도 하고.




“다음에 제가 술 살게요. 세훈씨, 왠지 좋은 사람 같아요.”




근데, 김종대에게는 쉬워 보이는 모양이었다.  오늘 처음 본 내가 좋은 사람이라니.  소리 없이 한쪽 입 꼬리만 올려 웃는 세훈은 여지없이 못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 사람, 지금 나 유혹하는 거 맞지?  웬만하면 괜찮은 사람은 울리고 싶지 않은데, 어쩔 수 없지.  준호 형, 미안.  김종대가 먼저 시작했다는 것만 알아줘.




“그 술, 오늘 사요.”




검은 소파에 앉아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던 종대의 앞으로 양주와 유리 잔이 놓여진다.  샤워 가운을 입은 채 곤란한 표정인 걸 보니 세훈은 더 신이 났다.  우리 집으로 갈래요?  술집은 떨떠름해하기에 물려면 물어라, 하고 던진 미끼를 순진하게도 덥썩 물어주었다.  포기했던 <취향인 남자와 기분 좋게 한 잔 하고 즐긴다> 선택지가 굴러들어온 것에 들뜬 저는 주차를 하고 그가 부탁하지 않았어도 달려가 팔을 내주었다.  집까지 에스코트를 하며 어디가 아픈지 물을까, 하다가 관두었다.  왠지 신경만 쓰일 것 같았다.




“술 잘 마셔요?”


“그냥.. 보통이요. 세훈씨는요?”


“즐기는 정도.”


“그렇게 말하는 거, 진짜 세보여요.”




짧은 대화로 긴장이 조금 풀어졌는지 그가 해사하게 웃었다.  하룻밤 상대로는 아까울지도.  웃는 얼굴이 정말 예뻤다.  왠지 나른해 보이는 연한 색깔의 눈동자마저 색정적이다.  세훈은 젖은 머리칼을 수건으로 문지르며 종대의 옆에 앉았다.  그러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이 술잔을 내밀었다.  부끄러워하는 것 같으면서도 빼는 법이 없다.  역시 다 연기였나?  그럼 그렇지.  어줍잖은 미련을 없애기 위해, 그리고 더 편하게 즐기기 위해 세훈은 싹을 자르기로 했다.




“자고 갈 거죠?”




그리고 망설이는가 싶더니 고개를 끄덕거린다.  아아.  역시.  서너 잔을 주고 받으면서 우린 사소한 대화를 나누었다.  쉬는 날이 언제인지, 보통 무얼 하는지,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같은 아침이면 잊어버릴 이야기들.




“얼굴 빨개졌어요.”


“헤.. 정말요? 창피하네.”


“나는?”


“세훈씨는 멀쩡한데요?”




두 손으로 뺨을 감싸 쥐면서 반달 눈이 되는 걸 보고 세훈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았다.  탁- 소리가 나자 또 김종대는 몸을 떨었다.  연기든 뭐든 지금 앞에 있는 이가 제 머리를 들끓게 하는 것만은 변하지 않는다.  굳이 조심스럽게 굴 필요성을 못 느껴서 노골적으로 허벅지 안쪽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 뻣뻣해진 뒷목을 잡고 입을 맞추었다.  말캉말캉한 혀를 집요하게 괴롭히자 으응,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미치겠네.  농밀한 입맞춤을 멈추지 않은 채 세훈은 방황하는 작은 손을 잡아 뻐근해지는 저의 아래로 이끌었다.  드로즈 안에서 경직된 손가락은 그가 하라는 대로 말을 아주 잘 들었다.




“하아.. 착해.”




귓가에 속삭이자 몸을 움츠린다.  그 반응이 마음에 들어 웃으면서 귓바퀴를 핥아 올리자 찡그리는데, 그것조차 예뻤다.  벌어진 가운의 매듭을 잡아당기자 반사적으로 제 것에서 손이 떨어지기에,




“멈추지마.”




가슴께를 깨물었더니 눈가가 붉어져서는 싫다고 말한다.  왠지 귀여워서 눈가에 쪽쪽 입술을 떨어뜨렸다.  흰 피부를 지분거릴 때마다 그는 허벅지를 떨면서 허리를 조였다.  미치겠네.  세훈이 애타는 입술을 깨물었다.  티셔츠를 벗으면서 몸을 일으키자 김종대는 소중한 것을 빼앗긴 듯한 표정으로 팔을 뻗었다.




“아.. 가까이.. 가까이에 있어줘요.”




그게 야했다.  긴 새벽이 될 것 같았다.











답답해.  저를 꼬옥 끌어안고 있는 팔을 더듬더듬 밀어냈다.  틈 없이 밀착되어 있는 맨 살이 느껴지자 잠에서 확실히 깨어났다.  얼굴을 붉히며,




“저기.. 세훈씨..”




어깨를 두드렸더니 그는 끄응- 하며 팔을 들어 다시 종대를 감싼 이불 더미를 옥죄었다.




“으.. 세, 세훈씨?”


“.. 조금만.. 응.. 좋은 냄새나..”




쌀쌀맞았던 목소리를 잠꼬대로 들으니 귀엽게 느껴진다.  종대는 소리를 죽여 웃고는 천천히 옆으로 몸을 빼고 조심스럽게 이불을 걷었다.  온 몸이 두드려 맞은 것처럼 무겁다.  녹이 슨 장난감이 된 기분으로 삐걱거리는 허리를 쓸어 보았다.  괜한 짓을 했나? 싶었지만 곧 아니라는 결론을 내린다.  오랜만에 누군가의 품 안에서 깊이 잠들 수 있었잖아.  그는 손가락 끝으로 느껴지는 감각으로 바닥에서 몇 벌의 옷가지를 모았다.  눈 바로 앞까지 들어 하나하나 검사를 한 후에야 제 것들을 되찾을 수 있었지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바지 주머니에 있던 핸드폰 후면 버튼을 두 번 누르자 12시 21분, 이라는 기계음이 흘러나왔다.  점심시간이네, 밥 같이 먹어도 되나?  아니.  제 눈이 불편한 걸 알게 된 사람들은 보통 세 가지 부류로 나뉜다.  동정하거나 이용하거나 아니면 도망치거나.  그런데 준면의 친구라는 세훈은 이 부류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다.  안됐다, 따위의 말도 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살갑게 구는 저에게 거리를 두지도 않았다.  함부로 손을 대거나 들러붙지도 않았고.  그래서 이번엔 다를까? 하고 헛된 기대를 해 보았다.  이 사람이 늘 외로운 저의 나날에 기댈 수 있는 친구나 연인이 되어줄 수도 있겠다, 하는 그런 바보 같은.  하지만,




‘자고 갈 거죠?’




아아.  역시.  주저 없이 옷을 챙겨 입었다.



단칸방에 몸을 들인 종대는 문이 닫히자마자 깊게 숨을 내쉰다.  초행길에서 집으로 돌아오기까지 잔뜩 긴장을 한 채여서 긴장을 풀자 순식간에 녹초가 되어버렸다.  손바닥이 땀으로 촉촉해졌다.  들고 있던 캐인(시각장애인용 보조 도구)을 바닥에 힘없이 내려 둔다.  어쩔 수 없는 경우에만 사용하지만, 이걸 쓸 때마다 기분이 더러워지는 데에는 저항할 수가 없다.  그는 이불 머리맡에 있는 담뱃갑에서 하얀 개비 하나를 꺼내 물었다.  외롭다.  초점 없는 갈색 눈동자가 긴 속눈썹 뒤로 숨어버린다.  그래도 그 사람, 참 다정했어.






‘지이잉- 지이잉-‘


이불 속에서 뻗어 나온 손이 진동이 울리는 쪽을 더듬다가 멈춘다.




‘오세훈!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


“.. 어.. 지금 일어났어..”


‘미친 놈. 종대 잘 데려다 줬다며, 고맙다~’




‘종대’ 이름에 눈이 번쩍- 뜨였다.  없다는 걸 알면서 저도 모르게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 응. 다른 말은.. 없었어?”




잠긴 목소리로 짐짓 물었다.  침대에 걸터앉아 담배개비를 입으로 가져간다.  김종대 끝내줬는데, 하고 홀로 여운에 빠져 들었다.  가는 허리를 흔들면서 눈물을 흘리던 얼굴이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그리고 그 전에 차 안에서 ‘이름 물어봐도 돼요?’ 했을 때의 웃는 얼굴.  갑자기 혀 끝이 씁쓰름해졌다.




‘다른 말? 아니, 너 뭐 실수했냐?’


“몰라. 후..”


‘몰라? 설마.. 둘이 뭐 있었어? 종대랑? 네가?’


“그 말투는 뭐냐? 나 걔랑 잤는데.”




키득거리면서 홈 바로 향했다.  오랜만에 기분 좋은 기상이었다.  개운해.  냉장고에서 500ml 우유를 꺼내 입으로 가져갔다.




‘미쳤다.. 너 그런 거 질색하는 놈 아니었냐? 웬일이래? 하긴, 종대가 그런 걸 커버할 만큼 매력 있..’


“그런 거?”


‘응, 너 은근히 여리잖아~ 크큭, 안 어울리게.. 그럼 만나기로 한 거야?’


“아니, One night.”


‘.. 와.. 이 새끼, 강심장 다 됐네. 질질 끌려 다니겠네, 싶었는데..’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그런 거는 뭐고 김종대랑 내가 하룻밤 즐기면 이상한 일이 되는 이유는 뭐란 말인가?  질질 끌려 다녀?  내가 왜?  핸드폰 너머로 여전히 변했네, 어쨌네 하는 준호의 목소리를 뚝- 자르고 못 알아듣겠어! 소리를 질렀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어어? 종대 눈 안 보이잖아, 그래서 네가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을 줄 알았지. 너 원래 약한 거에 더 약해지잖아~ 한 번 신경 쓰이면 계속..’




한대 얻어맞은 것처럼 머리가 띵-하고 울렸다.  머금고 있던 우유가 그의 입가를 타고 흘러내린다. 뭐라고?  눈이 안 보여?  눈이..




“그걸 왜 이제 말해!”


‘아이씨, 깜짝이야! 뭘!’


“눈이 안 보여? 진짜야? 으아, 씨발! 개좆같이 굴었는데! 아.. 씨.. ”


‘헐.. 몰랐어? 걔도 숨기지 않고.. 완전 안 보이는 건 아니고, 약시 같은..’




옷을 잡으면 안 되냐는 둥, 멀쩡한 사내놈이 사람들한테 치이고, 차 탈 때도 엄청 오래 걸렸지..  그것도 모르고 그에게 짜증을 냈던 게 생생하게 떠올라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모든 게 내숭이 아니라 진짜 불안해하고 진짜 망설인 거였을지도 모른다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마주하기 싫은 감정이란 감정들이 죄다 기어 나와 죄책감을 불러 일으킨다.  고작 하룻밤 상대의 약점 하나 알아버렸다는 것에 세훈은 크게 동요하고 있었다.  준호의 말대로 그는 어울리지 않게 여린 마음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약자에겐 약하고 강자에게 강한, 그런.




‘사귈 것처럼.. 속인 건 아니지?’


“내가 그랬겠어? 하.. 차라리 그랬어야 돼..”




그럼 오늘 아침에 처음 와보는 곳이라서 택시 타는 것까지만 부탁한다고 거듭 고개를 숙이던 걸 그냥 보내진 않았겠지.  씨발.




‘그럼 됐어, 신경 쓰지마. 오히려 종대가 아무렇지도 않아할 것 같다.’


“.. 상처받거나 그랬으면 어떡하지? 아.. 지금까지 험난하게 살았을 거 아냐.. 근데 나 같은 새끼한테 엮어가지고..”


‘내가 이럴 줄 알았지. 오세훈, 지랄하지마~ 동정하는 게 더 나빠, 그냥 신경 꺼라. 나도 모르는 척 할 거니까.’




그래, 상처받거나 했으면 연락이 왔겠지.  내가 전화해볼까?  그 때, 준호 형이 걸었던 번호 저장해놨는데.  아니다.  내가 억지로 그런 것도 아니고, 자고 간다고 한 건 그 자식이었잖아.  아니, 아니, 종대.  김종대였잖아.  그리고 심하게 하지도 않았..  오세훈, 이 미친 새끼야.  중간에 아프다고 했잖아, 그래서 어떻게 했더라?




‘아, 아파.. 아앗..’


‘쉬이.. 착하지, 조금만.. 참아.’




천하의 빌어먹을 새끼.  참으라고 했어, 참으라고!  씨발, 울고 싶다.  얼마나 아팠을까?  아냐, 근데 마지막엔 좋아했어.  그럼 됐지.  암, 그렇고 말고.  그렇게 생각하면서 정작 세훈은 책상에 팔을 괴고 머리카락을 쥐어 뜯고 있었다.  일주일이 넘도록 일을 할 때를 제외하고는 종대 생각으로 시간을 보내는 중.  제대로 잠을 잘 수도 없어서 눈가가 까칠하다.  저조차도 어떻게 하고 싶은 건지 전혀 감이 오지 않는 혼란이었다.




“오 형사, 괜찮아? 요즘 무슨 일 있는 것 같은데..”


“아, 아닙니다. 조금 피곤해서요..”


“내일부터 쉬지? 힘내.”




내일부터 쉬지, 라는 말에 그는 눈을 번뜩였다.  혼자 전전긍긍해봐야 소용이 없다는 걸 깨달은 그는 핸드폰을 꺼내 준호에게 오늘 갈 거니까 룸 예약, 하고 문자를 보냈다.  그리고 김종대도 예약, 전송.  직접 부딪혀서 괜찮은 모습을 확인하면 마음의 짐이 사라질 거다, 분명.  혹시 상처받았으면 내가 책임을..



은 개뿔.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준호와 시시덕거리는 종대를 보면서 세훈은 입 안의 여린 살을 꽉 깨물었다.  소파에 기대어 매서운 눈으로 둘을 응시한 채.




“세훈이 좋은 놈이야, 계속 친하게 지내.”


“네, 그런 것 같아요.”


“근데 싸가지가 없긴 하지?”




저걸 진짜 죽여?  왜 저렇게 딱 달라붙어 있어?  입 모양으로 욕을 하는 걸 본 준호가 크게 웃으면서 몸을 젖혔다.  종대는 흐릿하게 보이는 세훈의 얼굴이 저를 흘기고 있는 것도 모른 채 둘 사이에서 어색하게 물을 들이킨다.  그가 왜 저를 만나러 왔는지 예상되는 이유가 불분명해 조금 겁을 먹었다.  세훈이 저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다는 걸 나중에 준호를 통해 들은 터라 사실 마음이 불편하기도 했고.  눈 얘기를 직접 말하지 않은 것에 화가 난 걸까?  아니면 나에게 속은 기분이 들었나?  하지만, 그게 하루로 끝난 사이에 크게 영향을 미칠 것은 아니어서 고개를 갸우뚱-




“아, 맞다! 종대야, 내일 뭐 없으면 드라이브 갈래? 친구들이랑 바다 갈..”


“나랑 밥 먹을 거야.”




헛소리가 튀어나갔다.  세훈은 스스로도 놀라 버렸지만 가까스로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할 수 있었다.  준호에게는 통하지 않은 모양이지만.  아까부터 저가 들고 와 옆에 둔 것을 놀리 듯 힐끔거리면서 웃고 있다.  그걸 보지 못하는-흐리게 보인다는 게 어느 정도인지 모르겠다- 김종대만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다.  흰 셔츠를 입은 모습이 토끼 같았다.  뭐야, 오늘은 왜 저렇게 귀여운 건데?




“푸후후웁… 아아, 그래? 세훈이랑 종대가 밥을 먹기로 하였구나~”


“.. 좀 나가지? 김종대랑 둘이 얘기하고 싶은데.”




제 이름이 들리니 또 움찔-  얄밉게 눈을 찡긋한 준호는 콧노래를 부르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아, 하고 종대가 저도 모르게 앞에 있는 남자보다 친한 사장님의 팔을 잡을 뻔 했지만 허공에서 그쳤다.  그걸 보고 세훈은 또 눈이 가늘어졌다.  내가 뭐 잡아먹어?




“크흠.. 잘 지냈어요?”


“아, 네.. 세훈씨는요?”


“왜 말 안 했어요?”


“.. 이미 알고 있을 줄 알았어요, 사장님이 말씀하셨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건 사과 드릴게요.”




검은 눈썹이 꿈틀-하고 움직인다.  그 날도 느꼈던 거지만, 약점이 있을 뿐이지, 마냥 유약한 사람은 아닌 것 같다.  제 눈이 아픈 걸 왜 나한테 사과 한담?




“뭐, 뭐라고 하는 건 아니고. 그걸 알았으면..”


“아무래도 제가 딴 소리할까 봐 걱정돼서 오신 모양인데, 불편하긴 해도 아무한테나 손 벌리고 그럴 정도는 아니에요.”




아무한테나?  말 존나 잘 하네.  성질을 긁힌 세훈이 사납게 반격했다.




“그럼 원래 아.무.하.고.나 자고 그래요?”




단박에 아니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젠장, ‘아무하고나’라니 너무 심하게 쏘아붙였다.  심장이 울렁거리는 것 같았다.  긴 속눈썹을 아래로 내리 깔고 손가락으로 유리잔을 매만지면서 그는 차분히 말을 이어나갔다.




“다른 걸 기대했어요, 제 눈이 이런 걸 알면서도 편하게 대해 주시길래. 모르셨다는 걸 알았으면 집까진 가지 않았을 거에요.”


“다른 거라면.”


“제가 원하는 건 언제나 깊은 관계에요. 눈 때문인 것 같지만.. 잘된 적이 없어요. 보통 이용하거나 도망치니까요.”




억지로 웃는 건 확연히 다르다.  눈도 덜 휘어지고 입 꼬리도 덜 올라가고.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것 같아서, 저가 그렇게 만들어버린 것 같아서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처음 만날 날은 정말 예쁘게 웃었는데.




“그럼 나랑은, 잘될지도 몰라서 잤다?”


“아니요, 자고 가라는 말을 듣는 순간 그럴 생각은 접었어요. 세훈씨 말 그대로 하루 놀자는 거였잖아요, 그래서 저도 그냥 논 거에요.”




틀린 말이 하나도 없는데, 이상하게 세훈은 분통이 터졌다.  저도 그냥 논 거에요?  상처 입은 건 이율배반적으로, 종대가 아니라 저가 되었다.




“정말 좋은 사람이네요, 세훈씨. 얘기 듣고 일부러 오신 거 맞죠? 어떤 이유든 신경 써 주셔서 고마..”


“딴 소리하는 거 맞네.”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을 들으면 원래 저렇게 고개를 갸우뚱거리나 보다.  아까도 그러더니 지금도 아주 살짝 머리를 옆으로 까딱거린다.  역시 개 같아.  아니, 강아지.




“그 쪽이 딴 소리할까 봐 걱정돼서 온 거 맞는데, 진짜 딴 소리하시니까.”


“네?”


“하룻밤 자고 끝나도 상관없지만 그게 안될 수도 있잖아, 그래서 난 아무하고나 안 자요. 깊은 관계로 발전해도 되는 사람이랑만 잔다고.”




종대는 혼란스러운 듯 입을 꾹 다물었다.




“깊은 관계를 원한다면서요, 그거 나랑 해봐요.”


“어.. 저기, 세훈씨. 우린 이미..”


“미안해요, 나 솔직히 당신 눈 아픈 거 알았으면 안 잤을 거야. 계속 작업 걸지 말지 고민도 안 했을 거고.”


“근데, 왜..”


“벌써 좋아진 것 같아. 계속 생각나고, 오늘도 이대로 가면 안될 것 같아요.”




딴에는 절절한 고백이었다.  다행이 싫지는 않은지 음, 하고 발그레해지는 뺨을 손등으로 누른다.  그런 종대를 보니 당장 물고 빨고 사랑해주고 싶어서 애가 끓었다.  아, 앞으로 얼마나 성가실까?  지금도 저렇게 예쁜데.




“가까이에선 좀 보인다던데.. 나 잘 생겼어요, 후회 안 할 걸?”


“힛.. 원래 이렇게 말이 빨랐어요?”


“.. 긴장했으니까.. 쪽 팔리게.”




투덜투덜거리면서 세훈은 챙겨온 것을 들어 종대의 옆으로 슬그머니 다가갔다.  버릇처럼 꼼지락거리는 두 손을 잡고 놀라지 않도록 천천히 따뜻한 뺨에 쪽-  그 날처럼 좋은 냄새가 난다.  그러면서 소담한 꽃다발을 내밀었다.  뭐라도 준비해야 할까 싶어 경찰서 앞에 있는 꽃집에서 얼른 집어온 것이었다.  너무 화려한 꽃다발은 피하고 싶었는데 마침 적당한 게 눈에 띄었다.  강아지풀에 예쁜 색을 입힌, 종대에게 어울리는 그런 것.  그가 부끄러워하면서 그걸 코 앞까지 들어 들여다보더니, 갈색 택을 잡으며 ‘카드도 썼어요?’ 물었다.




“아닌데. 라그라스, 꽃말, 친절한 당신. 꽃말이래요.”


“아아.”


“카드 써줘? 이런 거 좋아해요?”




종대는 손사래를 치면서 기쁘게 웃었다.  라그라스.. 친절한 당신.  오늘 그가 받은 건, 그야말로 ‘친절한 당신’이었다.  세훈이 진하게 올라간 입매에 입술을 대고 속살거렸다.




“우리 집에서 자고 일어나서 같이 밥 먹어요. 내일은 집에 바래다 줄게요.”











높은 바 스툴에 앉아 목이 돌아간 것처럼 앉아있는 세훈의 앞으로 준호는 일부러 물이 든 잔을 챙- 소리가 나게 내려 놓았다.  닳겠네, 닳겠어~




“형.. 심각해.”




부스 안에서 눈을 감은 채 노래를 부르고 있는 연인.  일 때문에 퍽 오랜만에 보는 거여서-고작 4일 만이다- 심장이 두근거리기까지 한다.  말 안 하고 몰래 왔다고 칭얼거리겠지?  아, 존나 귀여워서 어떻게 참지?  조금 야윈 것 같은데?  설마 나 때문에 속상해서 그런 거야?  올라갔다 내려갔다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눈썹을 보면서 준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전에도 연애를 시작하면 순애보적인 면을 보이긴 했지만 그의 이번 연애는 훨씬 더 심각한 수준에 이른 것 같다.  이건 순애보 정도가 아니라 팔불출.  아니면 스토커?  또는 변태?  그래 보여, 하고 답해주자 신경질적으로 ‘아, 심각하다고!’ 소리를 친다.




“그래 보인다고!”


“나 정신병자였나 봐, 김종대 가둬놓고 나만 보고 싶어.”


“미친 새끼.. 싸웠다더니 벌써 화해했어?”


“아직.”


“뭐? 왜 싸운 건데?”


“.. 시계 사줬거든, 비싼 거. 안 걸릴 줄 알았는데 누가 알아보고 말해줬나 봐.”


“싸울 것도 셌다!”


“끝까지 아니라고 하니까 자기 눈 때문에 속이냐고 하잖아.”




내가 그것 때문에 얼마나 마음 아파하는지 알면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해? 하면서 왜 얼굴은 실실 웃고 있냐?  유리 잔을 닦으면서 꼴 보기 싫어, 중얼거린 준호가 옆에 있던 막내 직원에게 ‘첸, 이것만 부르고 가라고 해.’ 하고 크게 말했다.  그제서야 정면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능글맞게 웃는다.  날카로운 인상이 조금 나아 보였다.  이제와 털어놓자면, 오래 못 갈 줄 알았다.  장애가 있다고 말할 것 까지야 없지만-일상 생활을 하고 있으므로- 종대의 눈이 불편한 건 사실이었으니까.  보통 사람들끼리도 힘든데 어쩌나 싶었는데 괜한 기우였나 보다.  둘 다 1년 전보다 훨씬 좋아 보인다.  세훈의 성질이 많이 죽었고 종대는 더 밝아지고.  의외로 찰떡 궁합인 모양이다.  가장 흥미로운 점은 천하의 싸가지 오세훈이 꽉 잡혀 산다는 거겠지, 순전히 본인 의지로.  되려 종대가 귀찮아 하는 것 같다, 라는 말은 굳이 하지 않겠다.




“형, 근데 탈의실 비번 뭐야?”


“미친 놈아, 무슨 짓 하게! 안 가르쳐 줘!”




종대는 셔츠를 벗고 입고 왔던 헐렁한 후드로 갈아입었다.  오늘은 목소리마저 뜻대로 나오지 않아 의기소침.  목이 따끔거리더니 아무래도 감기에 걸린 것 같다.  개인 라커 안 쪽에 넣어둔 핸드폰을 꺼내 한쪽 눈 앞에 대고 들여다봤지만 부재중 알림이 떠있지 않다.  싸운 뒤에 통화를 하긴 했지만-밥 먹었는지 물은 게 끝- 어제부터는 중요한 일을 하는 건지 바쁜 건지 연락이 두절되었다.  그러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조금 침울해 지는 건 어쩔 수가 없나 보다.  내가 나쁘게 말하긴 했어, 생각한 종대는 한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최근 컨디션이 좋지 않아 예민해졌을 때, 하필 다툼이 생겨버렸다.  어쩌면 괜한 자격지심에 그를 화풀이 대상으로 삼은 것인지도 모른다.




‘애초에 내가 못 보니까 이렇게 속인 거잖아.’


‘말 가려서 해.’


‘그냥 말했으면 됐잖아, 왜 사람 바보 만들어?’


‘말했으면 안 받았을 거잖아요.’


‘응, 알면 이런 거 하지마.’


‘하.. 돌겠네.’




그는 화를 꾹꾹 참으면서 끝까지 제 옆에 붙어 있었다.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는데도 몇 시간이 지나서야 내일 출근해야 한다며 돌아가 버렸지.  그게 4일 전이다.  잔뜩 시무룩해진 얼굴로 팔을 뻗는다.  라커 문이 손에 걸렸다.




‘띠리릭-‘




누구지?  이 시간에 탈의실 쓸 사람이 있나?  눈을 찌푸린 채로 고개를 돌렸다.  가게 사람이라면 저를 위해 먼저 말을 걸어주는 게 다반사인지라 말없이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에 조금 긴장했다.




“놀랐잖아아.”




바로 옆에서 나는 익숙한 향기에 종대는 입 꼬리를 늘려 웃었다.  무작정 기대자 세훈이 거기에 맞춰 그의 몸을 끌어 안는다.  낮게 깔린 목소리로 수갑 차야지, 하고 말했다.  라커 안에 있는 은빛 시계를 집어 가는 손목에 채운다.  종대는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하루 종일 빳빳하게 굳혔던 몸에 힘을 풀자 살 것 같다.




“미안해..”


“잘못했으면 벌 받아요.”




세훈은 긴 손가락으로 종대의 턱을 올리고 혀를 내어 입술을 핥았다.  그러고는 그를 벽으로 밀어붙인다-늘 손으로 머리를 감싸는 건 잊지 않는다-.  다리 사이로 무릎을 굽히며 깊게 입을 맞추다가,




“뭐야.. 아파?”


“응? 아니?”


“몸 뜨거운데.”


“감기 기운 있는데, 괜찮아.”


“그럼 그냥 쉬지!”




걱정스러운 나머지 인상을 팍 쓰고 펄쩍 뛰는 애인을 올려다보면서 종대는 해맑게 웃었다.  거짓말처럼 기분이 좋아졌다.




“네가 데리러 올 것 같아서.”




웃는 것 봐, 오늘도 일찍 자긴 글렀다.  세훈은 미열이 앉은 이마에 제 턱을 비볐다.  그리고 사랑스럽게 속삭인다.




“자기.. 오늘은 한번만 할게요, 아프니까.”


“.. 아구, 머리야..”


“.. 존나 귀여워. 벌떡 했어.”


“참을 수 있어?”


“갸우뚱 하지마. 으.. 나 죽어.”


“헤헤.. 나 두고 죽으면 안돼, 자기이.”


“씨발..”




 
 

준호는 조용히 탈의실 문고리에 경고 메시지를 걸어 주었다.  그리고 미친 새끼들, 읊조린 후 몸을 돌렸다.  그래서, 이 이야기의 주제가 뭐냐고?  오세훈, 씹덕사로 사망하다.




강나 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

댓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