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외곽에서도 꽤 멀리 떨어져 있는, 산 꼭대기에서 내려오는 강 줄기의 끝이자 참나무 숲의 시작.  첸이 살던 곳에서 국경을 두 번이나 넘어야 닿을 수 있는 곳이다.  날카로운 창살로 길게 이루어진 벽이 보인다.  녹이 슬어 얼룩덜룩해진 커다란 자물쇠가 그 벽에 늘어붙은 채 굳어 있다.  썩은 나뭇잎이 부서져 땅의 다리 위에 널려있고 스산한 공기가 목을 조르는 것처럼 무겁다.  드문드문 드러나있는 잘 닦인 돌 조각을 따라가자 곧 이질적인 장소가 나타났다.  빽빽하게 맞물려있는 참나무를 꺾어 햇빛이 들도록 만들어진 집터다.  잡다한 꽃들이 배열 없이 자라나 서로의 색에 번져있는 뜰, 그것들로 둘러싸인 아담한 집. 침대 위에 나란히 누워있는 두 인영이 보인다.  검은 머리카락에 닿아있는 잿빛 시선 끝에 새근새근 잠에 빠져있는 이가 있다.  검은 남자는 그의 가슴팍을 살살 두드리고 있다.  남자는 요즘 인간 연인을 보살피는 재미에 푹 빠져 있었다.  이것저것 손이 많이 가는 게 즐겁다.




“아침이야.”




온기를 가진 뺨에 입술을 붙인 채 소곤거리지만 첸은 고개를 저으면서 돌아누워 버린다.  팔을 뻗어 허리를 끌어당기자 끙끙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 숨소리만으로도 기쁜 눈빛이 되더니 둥근 등에 얼굴을 묻는다.  이름을 부르는 나직한 목소리가 솜털을 간질였다.  서늘한 품 안에서 키들거리다가 겨우 눈을 뜨더니 소처럼 끔뻑거린다.  그게 또 견딜 수 없이 사랑스러워서 남자는 보드라운 손을 잡아서 한참을 조물조물-




“더 잘래?”


“.. 배고파요.”


“옷 입고 나와.”




흉이 생긴 눈썹 아래에 입술을 내리고 침대를 벗어나는 뒷모습을 보고 있던 첸이 창문으로 고개를 돌린다.  하얀 햇살이 새어 들어와 눈을 살짝 찡그렸다.  빛이 들긴 하지만 하늘을 가린 나무 울타리 틈새로만 하늘 한 쪽을 볼 수 있어 태양은 구경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도 불만은 없다.  이 곳은 아주 안전하고 조용하니까.  저는 하염없이 꿈결을 걷는 기분으로 살아가는 중이다.  침대에서 내려와 거실로 나갔다.  부엌과 이어져 있어 식탁으로 쭉 걸어나갈 수가 있다.  언제나처럼 무심한 표정으로 냄비 앞에 서서 다가오는 절 빤히 쳐다본다.




“오늘은 뭐에요?”




종종 하는 생각이지만, 국자를 들고 있는 모습이 정말 안 어울린다.  굳이 말로 내뱉지는 않았다.  어차피 제 생각을 벌써 읽었을 거다.  첸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국자로 시선을 옮긴 남자를 보고 배시시 웃었다.  옷을 입지 않고 이불을 질질 끌고 나온 것에는 전혀 괘념치 않고 그가 의자를 빼주었다.  그러곤 잠시 덮어 놓았던 책을 다시 들여다보면서 ‘굴라시라고 써있군, 오늘은 굴라시야.’ 라고 답한다.  그게 어떤 요리인지나 아는지 모르겠다.  그게 뭐냐고 물으면 아마도 딱딱한 말투로 채소와 고기가 들어간 요리, 라고 말해줄 것이다.  거의 모든 음식을 그렇게 설명한다.  요리는 마음을 비추는 거울, 이라는 말을 온전히 이해해본 적이 없었는데 검은 이가 제게 하는 걸 보면 이 말이 떠오르면서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저를 향한 올곧은 마음.  이 사람은 정말 날 사랑해.  배가 고프다고 할 때마다 서점에서 직접 고른 가정식 요리책-너덜너덜해졌다-을 따라 음식을 만들어 주는데, 보통 순서대로 만들기 때문에 다음 메뉴가 궁금할 때에는 몰래 그 책을 훔쳐보곤 한다.  처음 그와 이 집에서 살게 되었을 때, 뭐가 필요하냐고 묻기에 배가 고프다고 말하자,




“생고기는..”


“네?”


“안 좋아해?”


“.. 음.. 혹시 조리는 아예 하지 않나요? 당신은.. 그러니까 생고기만 먹는 거에요?”


“뭐든 상관없어. 다만, 잡아서 그냥 먹으면 되니까 편해.”




그 말을 듣고 첸은 솔직히 조금 겁을 먹었다.  남자가 옛 이야기를 털어놓을 적에 사람을 ‘별미’라고 표현했던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잡아서 그냥 먹으면 된다, 라니.  끔찍한 상상을 하고 있자 곤란하다는 듯이 눈이 커져서는,




“’첸’을 만난 이후에는 인간은 먹은 적 없어.”




그러니까 700년 동안 안 먹은 셈이지, 라고 덧붙여서 그가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해냈다.




“그 말은.. 먹은 적이 있다는 거네요?”




답하기 싫어하는 표정으로 충분히 대답이 되었다.




“맛있어요?”




첸의 엉뚱한 질문에 남자는 소리를 내어 크게 웃었다.  맛있어.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입을 맞춰왔다.




“미안하지만, 생고기는 가아끔 먹어줄게요! 우린 요리를 해야 돼요.”




그 날 저녁, 나갔다 돌아온 남자가 요리책과 함께 계량 컵과 주방 저울, 각종 소스 등-책에 써있는 모든 도구와 재료-을 식탁에 모조리 늘어놓았다.  그 앞에서 자꾸 웃음이 나서 다친 갈비뼈를 부여잡고 있어야 했다.




“첸, 그게 왜 웃겼는지 난 아직 잘 모르겠어.”




멍-하니 회상하고 있던 갈색 머리카락 앞으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빨간 스튜가 밀어졌다.  남자가 맞은 편에 앉더니 숟가락과 포크를 쥐어 준다.  먹어 봐.




“잘 먹을게요. 다음 식사는 제가..”


“내가 해도 돼, 재미있어. 그런데..”




그는 별안간 숟가락으로 제 그릇에 있는 당근을 골라 빵 접시로 옮기기 시작한다.




“당근도 싫어해요?”


“익힌 당근만큼 맛이 없는 건 세상에 없어.”


“풉.. 저번엔 양배추가 그렇다면서요오!”


“아, 양배추.. 그것도 그래.”




첸이 미소를 띠면서 그가 격리시켜버린 당근을 포크로 찍어 입으로 가져갔다.  맛있다는 듯 고개를 흔들면서 오물거리는 모습을 빤히 쳐다보던 남자가 ‘먹는 것만 봐도 맛이 떠올라.’ 라고 말하며 일순 콧등을 찡그렸다.  몸을 뒤로 젖히며 크게 웃어버린 첸이 ‘사람도 먹으면서 이까짓 당근을 못 먹어요?’ 놀린다.




“그건 고기잖아.”


“아..”




정적.  허공에서 서로의 동그래진 눈을 마주친 그들은 소리 없이 입매를 늘려 웃어버린다.




“밥 먹고 나갈까?”




좋아요, 고개를 끄덕거리며 음식을 가득 떠먹는다.  그런 그를 두 눈에 가두면서 검은 남자는 잠시 다른 생각에 빠졌다.  저희가 머물던 나라가 아직도 난리통이다.  일주일이면 잠잠해질 줄 알았는데 한 달이 넘도록 갈기갈기 찢긴 채 발견된 여자의 시신과 그녀와 함께 살던 청년의 실종으로 떠들썩하다.  하필 가뭄이 와서 저가 강에 버렸던 꽃집 건물주의 시신까지 발견되어 당분간은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짜증이 밀려왔다.  그 계집의 죽음에 첸이 얽히는 일이 없도록 더러운 벌레까지 끌어들였건만.  일을 그 따위로 처리하다니, 다시 마주친다면 사지를..




“저기..”




첸이 몸을 움츠린 채 불안한 눈빛으로 저를 살피는 게 또렷해졌다.  남자는 손 안에서 휘어진 숟가락을 내려보았다.




“눈이..”




겁먹은 꽃에게로 다시 시선을 옮기자 움찔- 하고 당황해서는 고개를 숙인다.  화를 억누르지 못해 붉게 변해버린 눈동자와 찌푸려진 미간은 좀처럼 보여줄 일이 없어서 놀라게 한 모양이다.  숟가락을 내려놓자 황급히 몸을 뒤로 뺀다.  감싸고 있던 이불이 흘러내려 그의 얇은 어깻죽지가 드러났다.  적나라하게 새겨진 잇자국과 멍울.  남자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리와.”




첸은 곧바로 몸을 일으켜 그에게 다가갔다.  머릿속이 새하얘져서 옷 대신이었던 이불을 제대로 잡지도 못한 채였다.  끌려가던 얇은 이불이 식탁 옆에 널브러졌다.  남자는 순순히 품에 안겨오는 하얀 몸을 끌어안았다.  언제 그랬냐는 듯 기분이 좋아졌다.  행복해.  그는 첸이 정신적으로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것을 염려하면서도 가끔 교묘히 그것을 이용했다.  약해진 마음을 지배하는 것은 쉽다.




“첸, 걱정하지마. 사랑해, 널 다치게 하는 일은 없을 거야.”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자 첸이 차가운 품 속으로 더 파고 들었다.




“네가 날 떠나지만 않는다면 말이야.”


“네, 절대 안 떠날게요.”




남자의 얕은 웃음 소리가 들리자 안심이 된다.  경직했던 몸이 느슨해지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첸의 턱을 들어 살짝 입을 맞추었다.  천천히 눈동자를 감추는 속눈썹이 아름답다.  틈새 없이 맞물린 입술에서 젖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단 둘뿐인 이 곳에 첸이 무서워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죽음, 빈곤, 폭력, 외로움.. 그것들을 기꺼이 집어 삼킨 남자가 절 사랑해준다.  그것들로부터 지켜주고 안아주고 입을 맞춰준다.



견고한 문이 열린다.  먼저 흙에 발을 디딘 첸이 입 꼬리를 올린 채 집 앞에 아무렇게나 심어져 있는 꽃들 곁에 쪼그려 앉았다.  예쁘다.  뒤따라 나온 남자가 손을 뻗자 얼른 일어서서 그 손을 잡는다.  남자는 손 잡고 걷는 걸 유난히 좋아한다.  저가 그의 품에서 안정하는 것처럼, 그도 저의 따뜻한 손을 잡고 있으면 안심이 된다고 한다.  햇살을 벗어나서 어두운 숲 속까지 걸어 나갔다.  둘은 같이 읽고 있는 고전에 대한 얘기를 나누거나 간혹 밤에 들려오는 산 짐승 소리에 대한 추측 따위를 하며 걸음을 그치지 않는다.  꽃이 해맑게 웃으면 남자도 따라 웃었다.  철창 같은 벽이 나타났을 때 언제나처럼 발길을 돌렸다.  문득 이 너머에 존재할 정겨운 사람 냄새를 기억해낸 첸이 멈칫- 했다.  남자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도시로 나가볼래?”




다정한 말투에 숨겨진 서슬 퍼런 의미가, 첸에게 고통을 떠올리게 했다.  안돼, 그 곳은 지옥이야.




“아니요.”


“필요한 건?”


“없어요.”




남자는 무표정으로 손을 놓았다.  그리고 그 손을 마른 등으로 올려 천천히 밀었다.  썩은 나뭇잎에서 발을 뗀 첸은 멍해진 얼굴로 중얼거린다.




“당신만 있으면 돼요.. 당신만.”






벌써 1시간 째다.  창문 앞에 턱을 괴고 반짝거리는 눈빛으로 무언가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  눈이 커졌다가 휘어졌다가, 입 꼬리가 올라갔다가 내려갔다가.  그런 인간을 보고 있는 남자의 눈동자 또한 미동이 없다.  들고 있는 책이 더 이상 넘어가지 않는다.  

첸이 집 앞 뜰을 서성거리는 아기 사슴에게 사랑에 빠진 것처럼 굴고 있다.  그에게는 별 것도 아닌데 살아있다는 걸 감출 수 없을 만큼 달콤한 숨을 쉬는 저의 꽃에게는 그렇지가 않은가 보다.




“첸.”


“.. 네.. 우와..”




눈길 한번 주지 않는다.




“잡아줘?”




그제서야 고개를 돌려 저를 쳐다본다.




“아니요.”




반달 눈으로 몸을 일으키면서 아이고,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책을 덮었다.  남자는 다가온 이에게 팔을 뻗어 제 다리 사이에 앉혔다.  자연스럽게 단단한 가슴팍에 등을 기댄 첸이 그가 옆으로 밀어둔 책들 사이에서 『이반 일리치의 죽음』 이라는 제목의 책을 집어 든다.  책장을 넘기면서 대수롭지 않게 속살거렸다.




“있어야 할 곳에 있는 게 아름다워요, 내가 가두면 죽어버릴 거야.”


“잘 보살피면 되지.”


“마음.. 영혼이 죽으면 살아도 사는 게 아닐 거에요.”




남자는 그의 머리카락에 입을 맞추었다.  네가 있어야 할 곳은 여기야.  첸은 오로지 사슴만을 생각하며 내뱉은 말인데 괜히 조바심이 난다.  책을 들여다보는 목덜미에 입술을 묻고 꼬옥 끌어 안으면서 연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지그시 묻는다.




“뜰을 더 넓혀줄까?”


“또? 와아! 그럼 이번엔 과일 나무를 심을까요?”


“좋을 대로.”




신이 나서 품에서 비비적거리는 첸을 내려다보며 미소를 짓는다.  이렇게나 좋아하는 바람에 2년 사이에 집 뜰의 면적이 몇 배나 늘어났다.  함께 산 지 세 달쯤 지났을 때까지 첸의 불안 증세가 나아지지 않아 걱정하던 차에 책에서 햇빛이 인간의 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내용-행복물질 세로토닌 분비, 우울증 완화 등-을 읽은 남자는 일꾼을 사들여 집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커다란 나무 울타리를 일부 제거해버렸다.  그리고 벌거숭이가 된 볕 드는 땅을 연인에게 선물한 것이다.  저만의 정원을 가지게 된 첸이 며칠 동안이나 졸졸 따라다니며 좋아했던 것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 뒤로도 몇 번이나 그의 빛나는 세계를 넓혀주었다.  야생화와 잡초들이 아무렇게나 피어있던 곳이 지금은 아름다운 화원이 되어 있다.  집 뒤뜰은 키가 큰 해바라기들이 줄지어 섰고 벽면에는 빨간 장미가 무성하다.  아기자기한 꽃 잔디가 물결을 이루는 그만의 낙원.  마음 쓸 것이 생긴 덕분인지 그 뒤로 첸은 눈에 띄게 생기를 되찾았다.  무슨 나무를 심지? 혼잣말을 하더니 몸을 틀어 눈을 맞추면서 사과를 좋아하는지 묻고 있다.  별을 품은 갈빛 눈동자는 여전히 검은 이를 휘두르는 힘을 가졌다.  몸과 마음을 바쳐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루어주고 싶다고 염원하게 만든다.




“아니면, 토마토를 심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제 품을 벗어나더니 방에서 종이와 펜을 들고 나왔다.  곁에 엎드리더니,




“사과나무랑 토마토 모종, 식물 영양제..”




적으며 그것들을 얼마나 잘 키울 건지 재잘거린다.  양 발이 가볍게 허공을 가르며 흔들렸다.




“또 한동안 밖에서 살겠군.”




새로운 식물이 받아들여줄 때까지 몇 번이고 정원으로 뛰쳐나갈 것을 알아서 불만스러운 투정이 흘러나왔다.  남자를 올려다본다.  무표정으로 왜, 하고 묻자 슬그머니 일어나 앉았다.  조심스럽게 손가락 끝을 툭- 건드린다.  그 모습이 귀여워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겨우 참고 가만히 있었더니 고개를 옆으로 떨구면서 웅얼거리는데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들리지가 않는다.




“첸, 똑바로 말해.”




발그레해지는 뺨.  대꾸 없이 첸이 코 앞까지 다가오자 남자는 목을 빼서 가볍게 입을 맞췄다.  무조건 반사처럼 저도 모르게 그렇게 해놓고서 아차! 싶은가 보다.  눈을 살짝 찌푸렸다.  더 놀려주고 싶었는데.




‘사과 나무보다 당신과 있는 게 좋아요.’




남자는 청명하게 전해지는 갑작스런 목소리에 조금 놀란 표정이 되었다.  입을 꾹 다물고 잘 들리는지 확인하는 것처럼 절 빤히 쳐다본다.  가끔 이런 식으로 첸에게 능력을 역이용 당할 때마다 깜짝 놀라고 만다.  인간은 영악하다.




“그러니까 같이 하면 안 될까요?”




역시 영악하다.  ‘첸’은 인간의 이런 점이 저를 끌어당긴다고 말했었다.  이제서야 그 말을 이해할 마음이 생겼다.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안 돼요? 되물으며 남자의 손에 제 손가락을 얽는다.  작은 손이 손등 위에서 꼬물거리는 것에 동해서 손을 잡아 아프지 않게 깨물자 입매를 늘려 키득거린다.




‘허락해줘요, 그럼 당신을 더 사랑할게요.’




어쩌면 자신 또한 꽃에게 속박당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남자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든 다 해줄게, 내 곁에만 있어줘.



보슬비에 젖은 거리. 축축해진 공기를 가로지르는 커다란 우산 하나.  그 아래 걸음이 느린 이들은 비슷한 갈색 코트를 걸치고 있다.  남자는 곁에 달라붙어 제 팔을 꼬옥 붙들고 있는 첸을 내려다보면서 살짝 웃어버렸다.  코트의 팔이 길어 손등이 죄다 덮여있다.  남자가 걸음을 멈췄다.




“첸, 우산 들어 봐.”


“네? 아, 네.”


“오랜만에 나와서 좋지 않아?”


“좋아요..”




하지만, 자꾸 끔찍한 기억이 떠오르려고 해.  눈을 감고 얕게 몸서리를 치는 첸의 코트 소매를 접어준 남자가 다시 우산을 건네 받는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 첸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안심하는 것처럼 배시시- 웃었지만 손가락에 잔뜩 힘이 실려있다.  시간이 꽤 지났지만 여전히 사람이 많은 곳에서는 안절부절 못 하고 신경을 곤두세우곤 한다.  곧 다시 눈을 크게 뜨고 주변을 두리번거리기에 여념이 없다.  오늘 밤에는 약을 먹여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런 날에는 좀처럼 잠에 들지 못하니까.  평소 들르던 원예 전문점에서 첸이 종이에 적어온 것들을 모두 구할 수 있었다.




“사과는 언제부터 열려요?”


“이 묘목으로는 2년은 더 키워야지.”


“우와! 2년밖에 안 걸린대요!”


“그 때는 두 개가 고작일 거야.”


“그럼 하나는 저희가 나눠먹고, 하나는 할아버지께 드릴게요.”




비에 섞인 웃음 소리가 듣기 좋다.  팔을 걷어 부치고 사과나무 묘목을 직접 묶으며 주인 할아버지와 담소를 나누는 연인을 보며 남자는 픽- 웃어버렸다.  하지만, 남자가 일순 표정을 굳혔다.  쪼그려 앉아있는 첸의 뒤에 서 있던 그는 본능적으로 꽃을 숨겼다.  들고 있던 코트를 어깨에 걸쳐주자 불온한 낌새를 눈치채고는 몸을 일으켰다.  급한 손길이 남자의 코트를 움킨다.




“첸, 여기서 기다려. 잠깐 나갔다 올게.”


“..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야, 우유를 사올게.”


“네.. 빠, 빨리 와야 돼요.”




의아한 표정으로 저희를 보고 있는 노인에게 고개를 숙이며 잠시 문을 닫고 있을 것을 부탁했다.  위압적인 분위기에 홀린 주인이 재차 고개를 끄덕거리며 몸을 돌린 그를 따른다.  누군가의 끈질긴 시선.  음습하고 기분 나쁜 기운이다.  어느 쪽이지?  트인 거리로 나온 그는 가능한 한 넓은 범위 안에 여러 사람을 순식간에 읽어 들였다.  의자를 사야 해.  오늘 저녁은 뭘 먹을까?  피곤해 죽겠네.  비가 계속 내려.  우산을 두고 내렸잖아.  샤르트르..  찾았다.  역시 너였구나.  남자는 마음 언저리를 찜찜하게 배회하던 벌레를 죽일 생각에 들떠 한 쪽 입 꼬리를 올렸다.  붉은 눈이 큰 강을 가로지르는 현수교 주탑 위에 주춤거리는 인영을 응시한다.  절름발이가 도망치기 전에.  검은 구두가 건물 사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그의 바램은 뜻밖의 벽에 가로막혔다.




‘너무 무서워.. 돌아와요, 제발..’




머릿속을 울리는 간절한 목소리.  울음소리.   빠른 속도로 도시를 벗어났던 남자는 거친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멈칫-하고 말았다.  분노로 엉긴 손이 엷게 떨렸다.  갈등할 새도 없이 그는 이미 발걸음을 돌린 채였다.  굳게 닫혀있는 문을 열자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몸을 웅크린 첸의 둥근 등이 눈에 들었다.




“가, 갑자기 주저앉아서는, 이렇게 울어서..”




노인이 어쩔 줄 몰라 하며 그에게 횡설수설을 늘어놓았다.  아랑곳 않고 두려움에 사로잡힌 가여운 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손으로 어깨의 떨림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의심하는 것처럼 천천히 돌아보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있어서 가슴이 아리다.




“첸, 돌아가자.”




팔을 뻗자 검은 품에 세게 얼굴을 묻은 첸이 남자의 셔츠를 꽉 쥐었다.  장난스럽게 코트로 그의 등을 감싸며 달래듯 몸을 흔들었지만 훌쩍거림이 쉬이 그치지 않았다.  남자는 멀뚱멀뚱 서 있는 노인에게 손짓을 해 소중한 것이 든 종이 봉투를 받아 들고는 주머니에서 지폐를 꺼내 주었다.  꼼짝도 안 하는 연인을 끌어안다시피 해 가게를 나선 그는 차양 아래에서 다갈색 머리카락에 입술을 대고 속살거린다.




“아무데도 안 가, 그만 울어..”




멈추지 않는 눈물 때문에 두 뺨이 쓰라렸다.  혼자 남겨진 짧은 순간에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잔혹한 것들이 저를 덮쳤다.  엘렌의 눈 위에 앉아있던 죽음, 도망쳐버린 저를 탓하는 그리닌과 마을 사람들, 그리고 갈라진 손목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핥으며 실망스럽다고 말하는 ‘첸’의 얼굴.  뒷목으로 도는 한기가 심해 크게 떨자 남자가 더 강하게 끌어안아 주었다.




“집에 가면 맛있는 거 해줄게.”




첸은 목소리가 잠겼을까 봐 저를 달래려 애쓰는 남자에게 대답해주고 싶지가 않았다.  그래서 마음속으로만 ‘네.’ 하고 말했다.  머리 위로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우리의 낙원으로 돌아가자.  손을 잡고 어둠이 내려앉은 거리를 헤치면서 둘은 처음으로 같은 생각을 했다.  쉬고 싶다고.  과거, 사랑, 증오, 기억, 고통도..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그저 옆에 있는 이와 깊은 잠에 들고 싶다고 생각했다.






적막이 흐르는 집 안. 창가에 기대어 앉아 잔뜩 흐린 하늘을 보고 있던 남자.  오늘도 비가 오겠군.  또렷한 눈매가 만족스러운 빛을 띤다.  비가 내리는 동안에는 한창 농부의 꿈을 이루고 있는 인간 연인이 제 옆에 꼼짝 않고 붙어있을 테니 잘되었다는 생각이다.  몇 달 전에 심은 토마토 중 한 줄기가 죽어버린 후로 나머지를 보살피느라 전전긍긍이다.  마음 같아선 죄다 뽑아버리고 싶지만, 늘 그렇듯 생각뿐이다.  그것들과 춤을 추며 해맑게 웃는 모습을 좋아한다.  곁에 있음에도 그리워져 고개를 돌리자 이솝 우화를 읽으면서 동물 이야기를 늘어놓다가 낮잠에 빠져버린 첸이 눈에 담긴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남자는 발소리를 죽인 채 방으로 들어가더니 얇은 담요를 가지고 나왔다.  그걸 조심스럽게 잠든 이의 몸을 덮어주고는 그 옆에 눕는다.  색색거리는 숨소리.  기다란 속눈썹.  그의 어느 것 하나도 저를 행복하지 않게 하는 것이 없다.  그래서 괴롭다  그를 얻기 위해 만든 악랄한 비밀들이 우리의 낙원을 파멸시킬까 두렵다.  물기 어린 눈동자가 애처롭게 흔들렸다.  남자는 불안을 떨치기 위해 첸의 곁으로 더 다가갔다.  이미 한번 꽃을 잃어본 적이 있는 이는 가엾게도 홀로 견뎌야 했다.  몸을 뒤척거린 첸이 번쩍- 눈을 떴다.  이제는 당연하리만치 익숙해진 존재가 곁에 누워 있다.  감겨있던 눈꺼풀이 서서히 눈동자를 뱉어놓는다.  블랙홀같이 깊은 눈.  꼬물꼬물 움직여서 서늘한 품으로 다가가려 해보지만 담요에 걸려 속도가 더디다.  남자가 담요로 감싸인 허리를 팔에 가둬 잡아당겼다.  손쉽게 그 품에 다다른 첸은 키들키들거리면서 단단한 가슴팍에 얼굴을 비볐다.




“나 오래 잤어요?”


“아니.”


“배고프다.”


“이번에는..”


“거위 간이죠?”




어떻게 알았냐고 물으면서 그의 반듯한 이마에 거듭 입술을 내렸다.  뿌듯해하는 표정이 사랑옵다.




“식탁에 꺼내둔 거 봤어요, 헤.. 도와줄게요, 같이 해요.”




요리를 돕겠다고 나선지 몇 분만에 소스를 뒤집어 썼다.  바보같이 뚜껑이 열려있는지도 모른 채 흔들었다가 말이다.  지저분해진 바닥과 울상이 된 첸을 번갈아 본 남자가 이마를 긁적거린다.  웃음을 참는 것처럼 입을 꾹 다물고 있다.




“옷 갈아입고 올게요..”




입술을 쭉- 내민 채로 방으로 향한다.  웃옷을 벗어버리고 조금 더 두꺼운 옷을 꺼내 입었다.  차가운 남자의 곁에 붙어있으려다 보니 어느새 옷장이 두툼한 옷들로만 가득 차 있다.  바닥을 닦고 일어나는 그에게 엉거주춤 다가가 넌지시 더 도와줄 건 없는지 묻는다.  다갈색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그에게서 ‘파프리카 썰어줘.’ 라는 부탁을 받았다.




“색깔 너무 예쁘다. 윽.. 씨에서 매운 냄새 나요오..”




알록달록한 파프리카를 댕강댕강 썰고 있다.  아니, 눈에 보이지 않는 꽃의 요정들과 대화를 하고 있다고 여겨도 될 것 같다.  불길에 프라이 팬을 얹으며 저가 끝내 대꾸를 하지 않자,




‘흥.. 듣고 있는 거 다 알아, 옆으로 가도 돼요?’




마음을 두드린다. 의자에서 내려와 옆으로 다가선 첸이 남자의 허리를 안고는 힘을 줬다.  세게 밀어보지만 꿈쩍도 하지 않자 낑낑거리면서 비켜 봐요, 하고 칭얼댄다.




“뭐 하는 거야?"


“내가 구울게요, 당신이 파프리카 썰어요."




제 팔을 힐끔거리는 걸 눈치챈 남자가 순순히 옆으로 물러났다.  얼마 전에 튀김 요리를 하다가 작은 화상을 입었다.  상처가 아물지 않는 것을 본 첸이 계속 그걸 신경 쓰고 있던 모양이다.  근래 저가 불 근처에만 가도 호들갑을 떨거나 끊임없이 조심하라고 채근했던 것이 이제야 떠올랐다.  무언가를 조심하라는 말은 처음 들어봤다.  이 말은 앞으로도 그에게밖에 들을 수 없는 것이겠지.  당장 따뜻해지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아서 등을 끌어안았더니,




“조심해요! 이따가, 이따가!”




듣기에는 좋지만 지나치게 엄격한 걱정이다.




“첸, 할 말이 있어.”


“뭔데요?”


“우리..”


“잠깐만요.. 좋은 일이에요, 아니면.. 나쁜 일이에요?”




먹던 것을 내려두는 첸의 눈썹이 근심으로 처져 남자는 ‘내게는 좋은 일이야.’라고 말하려던 것을 그만두기로 한다.




“글쎄.”


“말해봐요.”


“이 곳을.. 떠날래?”




눈을 마주치지 않고 음식을 씹는 모습을 보니 오랜 고민 끝에 힘겹게 꺼낸 말인 것 같았다.  명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저와 얽힌 무언가로 인한 것임이 확실하다.  이미 진실로부터 한번 도망쳐버렸다.  이대로 그를 따라 모든 것을 외면한 채 살아가도 되는 걸까?  진정 계속 도망칠 수 있을까?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두 사람의 식탁에 무거운 침묵이 자리했다.  남자가 식탁 위에 올려 있는 첸의 손등 위로 제 손을 겹쳤다.  너의 세계를 포기해.




“우리 토마토들은 어쩌죠?”




억지로 입 꼬리를 늘린 첸은 손을 뒤집어 남자의 손에 손가락을 얽었다.




“떠나요, 당신도 편하게 잠들 수 있는 그런 곳으로.. 가요.”




첸은 빛나는 것들을 버리기로 했다.  신께서 하사한, 인간으로서 짊어져야 하는 양심의 가책, 죄책감, 정직, 진실 따위를 이 곳에 묻고 떠날 것이다.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  ‘첸’의 비명소리가 머리를 난도질했지만 손가락 끝 마디에서 퍼지는 차가운 감각이 더 거세게 그를 몰아붙였다.  검은 이는 고맙다는 말 대신 첸의 손을 꼬옥 잡으며 미소 지었다.  남자와 함께라면, 그것만으로도 괜찮다는 어리석은 생각이 들었다.



곧 비가 오려나 보네, 먹구름이 흘러가는 잿빛 하늘을 올려다보던 첸의 입 꼬리가 올라간다.  집 안에서 팔짱을 낀 채 저를 내다보고 있을 감시자의 눈동자 색과 하늘 색이 같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창문을 돌아보자 역시나 심드렁한 표정으로 우두커니 서 있는 검은 머리카락이 보인다.  저가 크게 흙손을 흔들자 입술을 움직이는 것을 보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들릴 리가 없다.




‘안 들려요오! 빨리 들어오라고 하는 거 맞아요?’




끄덕- 뜰에 청량한 웃음 소리가 울려 퍼진다.  첸은 고개까지 젖히며 크게 소리 내어 웃어버렸다.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우뚱거리더니 그도 미소를 지었다.  무표정일 때가 많은 남자가 웃을 때마다 심장이 보들보들해지는 기분이 된다.  최근 그와 함께 삶과 죽음을 다룬 책을 읽고 있다.  재미있는 내용이 아니어서 미뤄두었다가 다시 읽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의 가슴팍에 기대어 책장을 넘기다가 [그는 의지할 데 없는 자신의 처지, 절대 고독, 사람들의 냉혹함, 신의 냉혹함, 신의 부재가 서러워 울었다.]는 구절에서 저는 슬프게도 남자를 떠올리고 말았다.  살결을 맞댄 채 함께 숨을 쉬고 있는 검은 남자를.  그를 멋대로 동정한 것을 숨기지 못한 첸이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미안해요..”




남자는 죄악의 피를 수도 없이 뒤집어쓴 저를 위해 눈물을 흘리는 마음씨 착한 연인을 탓할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그를 더 사랑해주고 싶어졌을 뿐이다.  그는 천천히 몸을 굽혀 첸의 발등에 입을 맞추었다.




“네가 나의 신이야, 날 구원해 줘.”


“.. 내가 어떻게.. 아..”




발등에 닿은 냉랭한 기도를 들어주기 위해 첸은 온정의 눈물을 흘렸다.




“사랑해요. 당신을.. 영원히 사랑할게요.”




모든 것을 잃었어도 이 사람에게만은 해줄 수 있는 게 남아있다는 사실에 살아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날을 그리는 얼굴로 빗방울이 떨어진다.  옆에 있는 괭이를 주워 든 첸이 집을 향해 발을 뗀다.  어느새 문을 열고 수건을 든 채 저를 기다리는 남자가 보인다.




“어차피 떠나는데.”


“그렇다고 내버려둘 순 없잖아요, 당장 가는 것도 아니고..”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우리 어디로 가는데요?”


“여기서 멀리 떨어진 대륙이야, 아름다운 곳이니까 마음에 들 거야.”


“이 집보다 아름다울 순 없을 거에요..”




시무룩해지는 뺨을 살짝 깨물면서,




“섬 하나를 화원으로 만들게 해줄게.”


“네에? 와.. 진짜에요?”


“응.”


“와아..”


“.. 첸, ‘부자 애인’이라는 호칭은 듣기 싫어.”


“마음대로 생각 읽지 말아요오!”


“왠지 돈 때문에 날 사랑하는 것 같잖아.”


“푸하하하, 말도 안 돼. 듣지 말라고요!”




소곤소곤하는 둘의 목소리가 빗소리와 합쳐지고 곧 문이 닫혔다.  비로소 가혹한 운명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고 믿었다.  굵어진 빗줄기가 무자비하게 꽃들을 찢어발기기 시작했다.  새카만 먹구름이 떠오르는 달빛을 억압하고 별빛을 헤쳤다.  천둥 소리가 대지를 부술 것처럼 무거웠다.






거세게 몰아치는 비바람, 신의 위엄을 증명하는 천둥 소리.  며칠째 계속 내리는 폭우에 산 기슭에서 흙더미가 떠밀려와 첸의 화원을 무덤으로 만들어버렸다.  아무렇게나 꺾여버린 여린 가지, 목이 잘린 꽃잎들이 빗길을 따라 흘러내린다.  캄캄한 어둠이 내려앉은 숲 속 집의 창문이 번개 불빛에 반짝거렸다.




“첸, 잠이 안 와?”




뒤척거리던 이가 살며시 눈을 뜬다.  천둥이 심장을 동요시켜 잠을 방해한다.  돌아누워 마주한 첸이 그냥요, 얼버무리며 이불 속에서 남자의 손을 잡았다. 




“이야기 해줄래요?”


“어떤.”


“뭐든, 지금 생각나는 거요.”




보채듯이 손가락을 매만진다.  그는 살짝 웃고는 첸을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너를 찾은 날.. 머릿속에 네 목소리가 들렸어, 비가 온다고 투덜거렸지.”




그랬나? 중얼거리면서 키득거리는 첸의 이마에 입술을 대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여전히 손가락에 닿아있는 온기.  꽃 내음.




“그 전에는 확신이 없었어, 나를 두고 죽어버린 ‘첸’을 용서할 수 있을지. 널 찾아 헤매는 이유가 온전히 사랑 때문인지..”


“그런데요? 확신이 생겼어요?”


“응. 널 보는 순간. 그저.. 네 옆에 있고 싶다는 생각만 했으니까.”




듣기 좋은 고백에 첸의 눈매가 곡선을 그렸다.  그가 보여주는 세상에 거짓은 없어 불안했던 마음이 거짓말처럼 가라앉았다.  이 사람이 날 찾아서 다행이야.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검은 이에게는 숨길 수 있는 것이 없고, 그이 또한 숨기는 게 없다.  그래서 언제나 순수한 저로서 사랑 받을 수 있다는 것, 그건 인간의 삶 속에서 늘 애써야 했던 첸에게 완벽한 안정을 선사했다.  억지로 웃거나 행복해하지 않아도, 이기적이고 위선적인 저를 품는 변함없는 시선을 받는 것이 좋다.  하지만, 곧 슬픔이 들이닥쳤다.  언젠간 홀로 남겨질 나의 천국.




“내가 죽으면..”




굳어지는 얼굴에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잠시 멈추었지만 곧 물음이 이어졌다.




“다시 날 찾을 거에요?”


“아니.”


“응? 마음이 바뀌었어요?”




어떻게요? 하고 물었지만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가감 없이 읽힌 첸의 마음이 그의 죄책감을 들쑤시고 있었다.  거짓 위에 세워진 낙원에서 진심으로 행복해하는 꽃을 마주하고 있는 것이 고역이다.  검은 두 팔이 천진난만한 이를 끌어안았다.  피가 마르는 고통이 나아질까 했지만,




‘사랑해요.’




남자는 죄악의 늪에서 몸부림쳤다.  몸의 마디 마디를 부셔도 이것보단 고통이 덜할 것 같았다.  비로소 얻게 된 사랑에 이토록 괴로울 줄이야.  첸이 당신을 위해 사는 일은 없을 거에요.  흉측하게 찢긴 여자의 얼굴이 그를 조롱하듯 어둠 속을 맴돌았다.  그녀의 말대로 되었다.  지금 첸이 바라고 있는 것은 추악한 거짓으로 연인의 눈을 가린 검은 이가 아니라 정직한 애정으로 늘 그를 바라봐주고 곁에 있어주는 저이다.  ‘나’이자, 내가 아닌 이를 사랑하는 가여운 연인.  이젠 되돌릴 수도 없으니 첸의 사랑을 받는 건 영원히 저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끔찍한 복수이자 그가 치러야 할 죗값이었다.




“숨 막혀어! 죽일 작정이에요?”




유일한 희망은 첸이 깨닫지 못하는 한, 그의 곁에 있을 수 있다는 것뿐.  남자는 두려움에 떨며 품 안에서 바둥거리는 그를 놓지 않았다.  필사적으로 옷깃을 부여잡은 손가락이 하얗다 못해 새파랗게 변했다.  저의 부재를 떠올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첸이 입 꼬리를 늘려 웃으면서 그의 등을 부드럽게 쓸고는 고개를 들어 차가운 눈물 위에 입을 맞추었다.  참회의 눈물은 용서받지 못한 채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무덤이 된 정원 곁에 앉아 흙더미를 쓸어보는 손길에 힘이 없다.  첸은 저가 떠날 것을 알고 소중한 것들이 잔인한 결심을 한 것처럼 느껴 마음이 썼다.  겨우 살아남은 꽃 잔디 위에 엉겨 붙은 흙을 털어주고 몸을 일으켰다.  창문을 돌아보았지만 오늘은 저를 지켜보던 이가 보이지 않는다.  비가 그치자마자, 남자는 짐을 싸는 것에 여념이 없다.  갑자기 서두르는 이유를 물었지만 미소를 지었을 뿐이다, 왠지 가슴을 저리게 만드는 그런 미소를.  

그 때, 첸의 눈에 날개를 팔랑거리는 나비가 들었다.  손에 앉은 검은 나비.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내려다 보았지만 야속하게 날아가 버린다.  홀린 것처럼 그걸 따라 걸음을 떼던 그는 해가 만든 길의 끝에 멈춰 섰다.




“마지막으로 한 번 돌아볼까?”




첸은 어둠 앞에서 충동을 조금 망설였다.  언제나 암흑과 함께여서 무섭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던 곳, 저희의 터전이지만 막상 혼자 발길을 들이려니 겁이 나는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마지막’이라는 언어가 부추기는 감성에 젖은 고민은 길지 않았다.  남자가 듣고 있을 게 분명해서 일부러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더 밝은 생각을 하며 비에 젖은 나뭇잎을 밟아 나갔다.  서늘한 공기가 흰 팔에 매달려 솜털이 바짝 섰다.  짙은 초록 어둠이 가진 축축한 냄새.  나뭇가지에 숨어있던 새나 작은 동물들이 움직일 때마다 빗방울이 떨어져 머리카락이 젖었다.  이렇게 넓었나?  이끼가 끼인 커다란 바위 앞-철벽 근처-에 멈춘 첸은 썩어서 기울어진 나무 기둥에 앉아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하얀 버섯들을 내려다보면서 ‘저거 먹어도 되는 건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는데, 바로 위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드니 머리 위로 작은 종이가 팔랑거리며 내려앉고 있다.  하얀 손이 그 귀퉁이를 낚아챘다.




“.. 이건..”




웃고 있는 저와 화관을 쓴 엘렌의 사진. 이게 왜 이런 곳에..




“크크크.. 정말 회귀한 게 맞잖아. 재미있어, 재미있어!”


“누, 누구세요?”




갑작스레 눈 앞에 놓여진 걸걸한 목소리에 뒤로 몸을 젖혔다.  둔탁한 마찰이 느껴지는 등.  첸은 돌아보고 싶지 않았다.  온 몸으로 느껴지는 불길한 기운에 척추를 따라 소름이 끼쳤다.




“그런 걸 설명할 시간이 없다고! 자, 이걸 봐!”


“으윽!”




억센 손이 연한 갈색 머리카락을 움켜쥐고는 흔들었다.  눈 앞으로 색 바랜 신문이 펼쳐졌지만 머릿속이 새하얘져 제대로 읽을 수가 없었다.  악취에 섞인 피 냄새가 반사적으로 첸의 손을 떨리게 만들었다.  구겨진 사진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스스로 무던히도 잊으려고 애썼던, 남자가 잊게 하려던 것들이 한 순간에 붕괴했다.




“사, 살려주세요.. 살려줘.. 사, 살.. 려..”




덜덜거리는 얇은 입술에서 애원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정체 모를 존재가 욕지거리를 하더니 마른 등을 발로 차버렸다.  힘없이 썩은 나뭇잎 사이로 나뒹군 첸이 본능적으로 도망치기 위해 움직였지만 다가오는 절뚝거리는 다리 한 쪽이 더 빨랐다.  돌 바닥을 긁는 손등을 힘껏 밟혔다.  날카로운 비명 소리에 놀란 새들이 한꺼번에 날아오르자 절름발이가 몸을 숙이며 닥치라고 악을 쓰더니 주머니에서 단도를 꺼내 들었다.  목에 닿은 날이 새파랗게 반짝거린다.  이가 부딪힐 정도로 턱이 떨려 피부가 칼날에 쓸리길 반복했다.  뺨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이 피와 섞여 흑색을 물들였다.




“엘렌이라고 하지? 네 여자, 시체로 발견된 건물 주인.. 범인은 누구일까?”


“엘렌.. 엘렌..”


“그래, 내가 먹었어.”




엘렌?  먹어?  눈 앞으로 던져진 신문지에 진한 글씨들이 첸의 눈동자에 쓰여진다.  엘렌, 살인, 시체, 실종, 범인..




“샤르트르의 주인이 시킨 일이지, 사진도 그 분이 주신 거야.”




거짓말.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지난 기억들.  사랑한다고 말하는 낮은 목소리, 아름다운 잿빛 눈동자.  당신일 리가 없어요.  그가 믿고 싶은 것과 반대로, 죽음을 밟고 선 다정한 남자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너 때문에 눈과 귀가 멀었더군, 덕분에 복.. 수..”




혼란을 야기하는 목소리가 끊어짐과 동시에 첸의 시야로 피가 흩뿌려졌다.  흙 바닥을 뒹구는 흉측한 얼굴이 몸통을 잃은 채로 키득거렸다.  넋이 나가 채 눈을 감아야 된다는 생각을 하기도 전에 붉은 눈동자와 마주하고 말았다.  위압적인 한 쌍은 첸을 보고 있지 않았다.  거친 호흡.  무자비한 도륙屠戮.  절름발이의 가죽을 찢어 발기는 질척한 소리.  도망쳐.  오랜 시간 이 곳을 지킨 숲이 공포에 질린 것처럼 기이한 안개를 내뿜는다.  이를 악문 검은 남자는 손가락이 허공을 가를 때까지 처형을 멈추지 않았다.  형체를 알아 볼 수 없는 살덩이들이 피에 젖어 버려졌다.  그것들을 무참히 밟은 남자는 첸이 있던 자리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신발 한 짝을 천천히 주워 들고는 눈을 감는다.




‘도.. 도망쳐.. 살려줘!’




“첸..”




숲의 한 쪽으로 고개를 돌린 그는 지체 없이 발길을 돌렸다.  제 빛을 찾은 눈동자 아래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너무 많은 것을 빼앗아 너마저 잃게 만들었구나.  녹이 슨 철창을 부여잡은 하얀 손.  첸은 도망쳐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후들거리는 다리를 채찍질했다.  남자로부터 도망치는 게 아니었다.  이미 죽어버렸을 괴물 때문도 아니다.  그는 진실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것이었다.  추악한 진실을 인정하는 순간, 더 이상 살아갈 수 없게 될 테니까.  눈 앞에 선 검은 낙원을 잃지 않기 위하여 필사적이었다.




“.. 아니라고 말해요.. 다 거짓말이라고.. 말해!”




남자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피로 얼룩진 목덜미와 처진 입매, 눈물에 잠긴 반달, 흐트러진 머리칼, 상처 입은 흙 발.  빛나기를 포기한, 더 이상 사랑스럽지 않은 그 존재를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무심한 뺨으로 눈물이 떨어졌다.  오늘에서야 깨달았다.  날개를 꺾은 날부터 저가 사랑하던 꽃은 이미 죽었다는 것을.  제 손으로 죽여버렸다.  손등으로 얼굴을 가린 채 훌쩍거리는 첸에게 천천히 다가간 남자가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더러워진 발을 들어 닦아주고는 신발을 신겨준다.  검은 머리카락을 내려다보면서 웃음이 새어 나오려는 것을 참기 위해 꽃은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까지처럼 지켜주려는 거죠?  나를 죄인으로 만들지 않을 거야, 당신은.




“첸, 미안해.”




역겨운 진심이 아무런 방해 없이 전해져 괴로웠다.  어깨를 세게 움켜쥔 손이 가늘게 떨린다.  첸은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발자국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그를 향해 다가오는 엘렌의 것이었다.  귀를 막아도 그치지 않고 점점 커진다.




“거, 거짓말이라고 말해줘요.. 제발..”




남자는 겁에 질린 얼굴을 애달프게 쓸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목소리가 비명처럼 흘러 들어와 견딜 수 없이 슬프고 고통스러운 감각을 부추긴다.  닿아있으면 첸의 뜻대로 해주고 싶어질까 봐 몸을 일으켰다.




“너무 늦게 알았어, 진정으로 사랑하는 게 어떤 건지..”




내가 아니라 네가 행복하길 바랬어야 했는데, 너에게서 모든 걸 빼앗고 나마저도 널 잃고 나서야 깨달아버렸어.  첸의 생각을 끊어내자 숲의 무거운 존재감에 얕은 숨소리만 남았다.




“그 여자를 죽인 것도.. 꽃집도.. 내가 한 거야.”


“왜 그랬어요.. 도대체 왜..”


“그만해, 이미 알고 있었잖아.”




아아.  잔뜩 경직되어 있던 등이 움찔-거리더니 둥글게 말렸다.  어린 아이 같은 울음 소리가 비처럼 쏟아져 나왔다.  사진이 사라진 액자에 쌓여있던 먼지, 글씨를 쓸 줄 모르는 엘렌이 남겨놓은 쪽지, 침대를 더럽힌 커다란 발자국, 잔인한 폭력에 짓밟힐 때 보았던 검은 인영.  처음부터 첸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검은 이에게 날개를 내어준 것도, 속에 품은 악惡과 타협한 것도 온전히 그의 뜻이었다.  망연자실한 범인은 끝까지 저를 지켜주지 않은 남자를 원망스러운 눈으로 올려다봤다.  이율배반적으로, 남자는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꼈다.  후회 또는 죄책감이니 하는 불순한 감정을 덜어버리자 비로소 꽃만을 열렬히 원하던 저로 되돌아왔다.  더 이상 첸을 망치지 않아도 된다.  거짓없이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행복마저 느껴지는 것 같았다.  이젠 사랑 받지 못하겠지.  붉은 입술이 회한으로 그린 미소를 띠자 첸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 당신이 다 망쳤어.. 흐윽..”


“돌아가자, 우리의 집으로.”


“날 사랑한다면서요, 날 위해 뭐든 한다고 했잖아..”




넌 더 이상 내가 사랑하던 첸이 아니야.  내가 그렇게 만들었어.  남자는 손을 뻗었다.  그걸 빤히 노려보고 있던 이가 결국은 고개를 젓는다.  날 너무 사랑해서 탈이라니까.




“.. 배고파요.”


“맛있는 거 해줄게.”




첸은 차가운 손을 잡았다.  어둠 속을 걸어나가는 남자의 등 뒤를 따라 걸었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지만 어떤 이유에선지 불분명했다.  남자에게 미안해서인지, 두려움인지 아니면 거짓으로 더럽혀진 빛나는 삶에 대한 미련 때문인지 전혀 가늠이 안 된다.  난 그저 행복하게 살고 싶었을 뿐인데.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멍하니 걷다 보니 제 손을 꽉 잡고 있는 커다란 남자의 손이 눈에 들어왔다.  미세한 떨림.




‘울고 있어요? 당신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았는데.’




남자를 앞질러 섰다.  순수한 빛을 머금은 눈동자가 휘어진다.  눈물 범벅이 된 얼굴은 검은 이와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집으로 돌아와서 채소와 고기, 수면제가 들어간 음식을 함께 먹었고 저가 하겠다고 떼를 쓰는 바람에 첸이 설거지를 했다.  남자는 그를 위해 따뜻한 목욕물을 받아주었다.  말끔해진 몸에 입을 맞추면서 상처가 난 목과 발바닥에 연고를 바르고 반창고를 붙여주자 샐쭉- 웃는다.  첸이 감사의 표시로 그의 턱에 뺨을 비볐다.  남자가 웃었다.  그리고 둘은 해가 질 때까지 창가에서 책을 읽었다.  남자의 품에서 벗어난 첸이 사라지는 해를 붙잡으려는 것처럼 창문 위에 손을 얹었다. 

 
 

해가 지는 눈동자를 보며 남자는 늘 꽃 향기를 가득 묻힌 채 성당으로 돌아오던 ‘첸’을 떠올렸다.  무언가를 열망하던 그 눈동자가 아름답다고 말해주고 그의 꿈을 꺾으려 하지 않았다면 우린 계속 함께였을까?  그럼.. 내가 이렇게 너의 꿈을 짓밟는 일은 없었을까?




“졸려.. 잘래요.”




침실로 향하는 마른 인영을 따라 들어갔다.  침대에 걸터앉은 남자는 눈을 감은 첸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넘기고 이마와 콧등에 입을 맞췄다.  가슴을 두드리자 좋다, 하고 중얼거리면서 입 꼬리를 올린다.  깃털 같은 숨소리가 고르게 들려올 때까지 손을 멈추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킨 남자가 방을 나서고 곧 문소리가 들렸다.  한참 뒤에 다시 문이 열리는 마찰음이 들렸고 돌아온 그가 온기를 끌어 안으며 이불 속으로 몸을 숨겼다.  불꽃은 조용히 낙원 위에 피어났다.  해바라기들이 서로의 목을 조르며 스러지고 벽에 붙은 불씨가 몸집을 부풀려 유리가 깨졌다.  전에 물은 적이 있지, 네가 죽으면 다시 널 찾을 거냐고.  이젠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만약에 우리의 운명이 다시 시작된다면, 네가 다시 내 앞에 나타난다면.  죽을 힘을 다해 도망칠 거야.  네가 행복할 수 있도록.  참 어리석지.  죽음에 이르러서야 널 사랑하는 방법을 깨닫다니 말이야.




“첸, 사랑해.”




서늘한 품에 안겨 있던 뺨으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다시 한번 운명의 굴레를 함께 걸을 수 있다면.  내가 당신을 찾을게요.  그 때는 내가 아니라 당신을 사랑할거야.  행복하게 해줄 거야.






- 100년 후 -


화려한 빛 아래 두 손을 모아 기도를 하는 사람들.  장엄하게 진동하는 공기 안에 그들의 열망은 광기를 품은 것처럼 보인다.  성당 입구에서 잠시 그들을 바라보던 남자는 천천히 계단으로 발길을 돌린다.  반쯤 감긴 공허한 눈이 계단을 둘러싼 벽 기둥 틈새를 지나치며 매일 반복되는 기도문을 읊조렸다.  기괴한 분위기를 가진 이.  근데, 아까부터 거슬리는 저건 뭐지?  일정한 속도로 기둥을 건드리던 손가락 끝을 멈추고는 사람들 속에서 안절부절 못하는 인영에게 시선을 고정한다.  연한 갈색 머리카락 아래 선한 눈동자가 또렷하게 저를 보고 있다.




‘뭐야? 기도.. 는 거.. 처음.. 보나? 설마.. 들킨 건.. 겠지?’




검은 옷을 걸친 남자가 머릿속으로 띄엄띄엄 들려오는 소리에 눈살을 찌푸린다.  왜 저 인간의 생각만 흐릿하게 들리는 거지?  처음 겪는 방해에 불쾌해진 그가 돌 벽에 손톱을 세게 긁는다.  소름 끼치는 마찰 끝에 피가 스몄지만 조금 지나자 상처와 함께 벽의 흔적마저도 사라져 버렸다.  기분 나빠.  죽여야지.  다시 눈을 감은 채 열심히 기도를 하고 있는 인간에게로 눈을 돌렸다.




‘신.. 여.. 저를.. 하소서.. 첸은 돼지 고기.. 토마토만.. 습니다.’




짙은 눈썹이 꿈틀- 이해하기 힘든 인간의 기도문에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곧 계단을 드리운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성당을 빠져 나온 첸은 콧노래를 불렀다.  손가락을 폈다 접었다 하며 오늘 행한 착한 일을 꼽아보았다.  시장에서 행패부리는 주정뱅이의 돈을 훔쳤고, 숲 속 정찰도 했고, 꽃집 소녀를 도와 물을 길러 주었지.  아, 그 애가 준 걸 어디에 뒀더라?  고개를 숙여 웃옷 틈으로 손을 넣는 순간, 무언가 그의 몸으로 떨어졌다.  순식간에 바닥으로 처박힌 작은 몸이 뭉개지는 소리를 냈다.  휘둥그래진 눈이 겁에 질린 채 저를 깔고 앉은 검은 이를 직시했다.




“뭐야, 너.. 인간이 아냐?”


“윽.. 왜, 왜 이러는 거야아! 아파!”




‘동족.. 없다고 했는.. 설마 성당에 사는.. 그 미친.. 은 아니.. 지? 근데.. 잘.. 겼다..’




남자는 사납게 으르렁거리며 첸의 어깨에 손톱을 박아 넣었다.  아래서 바르작거리며 내지르는 비명 소리는 명확한데 이 약해빠진-살의가 느껴지지 않으므로- 동족의 생각은 정확하게 읽히지가 않아 답답했다.  왜지?




“짜증나는군.”


“.. 아파, 아프다고오! 살려줘!”




이상한 낌새를 느낀 남자가 고개를 숙여 동족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이건 그 동안 숱하게 봐온 살려달라는 표정이 아니다.  오히려, 죽여달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눈 앞에 나타난 동족이 깨어나서 처음으로 그로부터 많은 것을 끌어내고 있었다.  능력이 통하지 않아 지금 죽이면 왜 죽음을 원하는지 알 수 없겠지.  살려줄까?  어차피 언제든지 죽일 수 있으니까.  첸은 실눈을 뜬 채 저를 빤히 내려다보는 남자를 부추겼다.




“살려주세요, 살려줘어!”




‘빨리 죽여.. 뭐해? 자살.. 못.. 데.. 잘 됐지.. 디어.. 회귀.. 수.. 오예!’




“오예?”


“.. 네?”


“오예가 무슨 말이지?”


“.. 음.. 그건 살려달라는 뜻이에요.”


“거짓말.”


“저, 저기요? 으아!”




남자는 몸을 일으키고는 흥미로운 사냥감을 어깨에 가뿐히 둘러 업었다.  첸은 악을 지르며 버둥거렸지만 억센 팔에서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툭- 바닥으로 헝겊을 기어 만든 주머니가 떨어졌다.  소녀에게서 받은 것이었다.




“으엉.. 저, 저거 주워 줘!”




아랑곳하지 않고 제 갈 길을 간다.




“제발.. 그럼 내 발로 따라갈게, 난 약속은 꼭 지켜. 응?”




멈칫-한 남자는 생경하게 피어 오르는 감정에 거부감이 일었다.  왜 이 부탁을 들어주고 싶은 거지?  왜 웃음이 날까?  삽시간에 불어나는 그에 대한 궁금증을 어떻게 해소해야 될지 감이 전혀 오지 않는다.  욕을 읊조린 남자는 첸을 바닥으로 밀쳐버렸다.  훌쩍거리면서 바닥을 기어가 주머니를 소중히 끌어안는 것을 보니 온 몸이 가렵다.  입을 쭉- 내밀고 주머니를 풀어본 첸은 저도 모르게 소리 내어 웃었다.  인간에게 받은 작은 씨앗들에 진심으로 기뻤다.  왠지 그들과 같아진 기분이다.




“빨리.”




서슬 퍼런 목소리에 얼른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고마워, 내 이름은 첸이야. 근데 나랑 뭐하게? 당신이 그 유명한 살인귀 맞아? 근데 난 왜 죽이..”


“시끄러워, 인간 같이.”


“.. 나 인간 같아? 히잉.. 진짜?”


“죽인다.”




‘인간이래.. 아.. 인간이라니.. 감동.. 소문이랑.. 르게.. 착하네. 죽여.. 죽여라. 메롱.. 그게.. 원하는 바..’




머리를 날려버려야겠다고 생각한 순간,




‘그래도 오늘은 혼자가 아니네. 행복하다.’




남자는 고개를 돌렸다.  왜? 하고 묻는 이의 웃음기 베인 입 꼬리.  빛나는 게 묻어있는 것처럼 반짝거렸다.  갖고 싶어.  하지만.  의미를 알 수 없는 두려움이 검은 이를 덮쳤다.  안돼.  혼란스러워진 남자의 눈동자가 붉게 달아올랐다.  제어하기 힘든 이 살생 충동이 늘 그를 외롭게 만들었다.




“응? 눈동자 색이 변했네. 예쁘다, 꽃 같아. 나 꽃 좋아하는데에.”


“하.. 미치겠군.”




황당한 나머지 웃음이 터졌다.  온 몸에 힘이 빠진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제 손을 잡으며 ‘배고픈데 밥 먹을래?’ 말하는 첸을 따랐다.  인간은 절대 안 먹으니까 그건 빼고, 덧붙인다.  맞잡은 서로의 손은 차가웠다.  그게 위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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