첸은 긴 이야기를 끝마친 남자의 입술이 천천히 맞물리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오직 저만을 살피는 눈빛이 진실을 그리고 있다.  말도 안돼.  어느새 닿아있던 냉랭한 손을 뿌리치며,




“어떻게 내가 당신의 ‘첸’이라고 확신하죠?”




떨리는 목소리에 노기가 묻어 있다.  몇 백 년 전 그를 배신한 이와 저를 혼동하고 있다는 것에 이유 모를 치기가 일어 심기를 어지럽혔다.




“아니라면 이렇게.. 아플 리가 없어.”




소파 끝을 꽉 쥐고 있는 손을 도로 잡아당긴다.  그러더니 손바닥을 가로지른 흉터에 남자는 한참 동안 입술을 대고 있었다.  지금까지 저가 알던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 애절한 모양새에 저도 모르게 그의 뺨을 쓰다듬었다.




“당신 말이 사실이라면.. 난 어떻게 되는 거죠?”




아래로 처진 속눈썹이 사실은 다른 걸 묻고 싶었다.  지금 당신이 원하는 건 당신의 사랑을 처참히 짓밟은 '그'인가요, 아니면 여기 당신을 위해 울고 있는 나인가요?




“내가 원하는 대로 해주겠다는 것처럼 들리는군.”


“원하는 대로 하지 않으면 또 이렇게 할 건가요?”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낙인이 새겨진 손바닥을 내밀었다.  다정한 이가 아니, 라고 말하길 기다렸는데 무표정으로 저를 빤히 쳐다보기만 한다.




“지, 진짜에요?”


“아니, 지금 그렇게 했다간 죽을지도 몰라요.”


“그 말은 안 죽으면 할 수도 있다는 거잖아요오!”




웃는 남자를 보니 조금 안심이 되었다.   마음이 무겁다.  그를 두고 돌아서야 하는 마음을 바다에 던질 수 있다면, 가라앉아 평생 떠오르지 않을 것이다.




“함께 있어 줘.”




그가 가녀린 어깨에 머리를 기댄다.  목을 간질이는 숨결이 애원하고 있다.




“난 늙어 죽어요, 언제나 당신을 배신할 운명으로 태어났죠.”




그러니까, 날 미워해 봐요.  난 당신의 ‘첸’이 아니야.  그에게서 벗어나요, 당신의 눈을 멀게 한 배신자를 잊어버려요.  당신 기억 속의 나는 내가 아니야.  남자는 괴로워하는 첸의 마음이 들려오는 것을 철저히 외면했다.  제 말을 믿고 있으면서도 거부하려 하고 있다.  끊임없이 꽃을 찾아 헤맬 괴물을 걱정하는 착한 마음씨 때문에.




“그럼 난 다시 널 찾으면 돼.”


“미쳤어.. 200년이라니, 난 생각만으로도 너무.. 너무 힘든데..”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터져 나왔다.  신이시여, 가엾은 이를 구원하세요.  그가 들려준 우리의, 아니 ‘첸’과 남자의 이야기가 사실이라 한들, 되돌릴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왜냐하면, 나는 이 곳에서 나고 자란 인간 첸이니까.  그의 꽃이 될 수 없다.  차라리 듣지 않았으면 좋았을 걸 그랬어.




“당신이 무서워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요.  벼랑 끝에서 그를 밀어버렸다.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말아요, 당신의 첸이 행복하길 바란다면요.”






 
 

허망하게 남겨진 남자는 몇 날 며칠을 꼼짝도 하지 않고 방 한구석에 널브러져 있다.  눈 한번 깜빡이지 않는 그는 온 신경을 다른 곳에 쏟고 있었다.




‘엘렌.. 아프지 마.. 헴멜 병원.. 돈은.. 엘렌, 엘렌.. 듣지 마..’




듣기 싫어.  흐릿했던 눈동자가 달빛을 머금는다.  물기 어린 목소리를 끊어내자 살 것 같았다.




“하아.. ”




그를 붙잡아두었던 날, 엘렌이라는 계집이 또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졌다.  첸은 사랑스러운 눈동자로 그렇게 절 위하는 것처럼 돌아서자마자 그 옛날처럼, 하잘것없는 인간 소녀를 우위에 두고 있다.  보란 듯이 그녀만을 위해서 울고 있다.  되돌아온 운명에 엘렌이라는 인간과의 악연도 함께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남자는 하마터면 제 손으로 그녀를 죽여버릴 뻔 했다.  하지만 그 죽음이 불러오고야 말 파장이 두려워 원하는 대로 할 수 없었다.  그 계집이 죽으면 첸이 다시 사라져버릴지도 몰라.  저가 기만했던 운명의 여신의 손에 놀아나고 있다.  손 끝이 분노인지 슬픔인지 알 수 없는 감정으로 떨린다.  남자는 앞쪽에 있던 빈 액자를 신경질적으로 집어 던졌다.  둔탁한 소리를 내며 벽에 박힌 것에서 먼지가 뿜어져 나와 흩어졌다.  잠들어있던 파괴 욕구가 몸부림 친다.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말아요, 당신의 첸이 행복하길 바란다면요.  행복이라.  멍청한 인간 흉내까지 내면서 그를 찾아 헤맨 것은 이렇게 고통스럽기 위해서가 아니다.  나의 꽃만이 하사할 수 있는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야.  근데 기껏 찾은 꽃은 옛날처럼 웃어주기는커녕 나 때문에 불행하다고 말하는군.  너의 빛나는 삶을 위해 나는 눈 앞의 행복을 포기했는데 말이야.  영겁으로 빚은 사랑은 순수하지 않았다.




“날 사랑하지 않을 거라면.. 죽어버려.”




섬뜩하게 날이 선 핏빛 눈동자가 몸을 일으켰다.  문이 세게 닫혀 벽에 박혀있던 액자가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그저 다시 찾으면 돼.  날 사랑했던 첸으로 되돌아올 때까지 몇 번이고 널 죽일 거야 . 눈물에 잠긴 눈을 불로 지지고, 잔인한 말만 내뱉는 입을 찢고, 다른 이를 쓰다듬는 손을 꺾고, 날 부르는 심장을 꺼내 삼킬 거야.  그러면.  그러면 잠시라도 너와 함께 있는 기분이겠지.






스산하기 짝이 없는 병원의 갈라진 벽을 감싸 안은 담쟁이 넝쿨에 빗방울이 맺힌다.  흐려지는 창문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던 첸.  그의 뺨 또한, 눈물로 흐려진다.  병원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거다.  하지만, 가끔 나쁜 생각을 지우기 위해 새하얀 병실을 천국이라고 여겨볼 때가 있다.  구름 옷을 입고 누워 있는 나의 천사.  핏기 없는 얼굴이 보석 같은 눈동자를 감춘 채다.  다른 곳에서는 찾을 수 없어, 내가 졌어.  이제 보석을 보여줘.  독한 약 때문인지 마치 죽음을 예행하듯 깨어나 있는 시간이 짧다.




“엘렌, 아프지 마..”




비가 그치면 엘렌이 괜찮아지지 않을까? 하고 갸웃거렸다가 씁쓸하게 웃고 만다.  비를 그치는 건 슬퍼하거나 노력한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라 그저 신의 뜻임으로.  그녀는 비를 싫어한다.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비가 많이 내리는 날이면 무릎에 얼굴을 묻은 채 훌쩍거린다.  그럴 때마다 첸은 소녀의 손을 꼭 잡아주면서 저가 지켜주겠노라 약속했다.  결국은 웃고 마는 얼굴을 보면 너에겐 내가, 나에겐 네가 그렇게 단 둘뿐이라는 것이 와 닿았다.  그래서 그녀와 함께여야 한다.  엘렌을 혼자 둘 순 없다.  그럼 그 사람은?  너무 오랜 시간을 혼자였을 그 사람.  가슴이 아릿해져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내가 그 남자를 생각한다는 걸 알면 절망스럽겠지.  사죄하는 것처럼 여자의 마른 팔을 부드럽게 쓸어 내린다.  듣지마.  그 사람이 내 마음을 읽어선 안돼.  그럼 다시 와서 날 흔들지도 몰라.  영원히 ‘첸’을 찾아 헤매게 내버려두지 않을 거야,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 운명은 내가 끊어버릴 테니까.  더 이상 당신을 힘들게 만들지 않을 거에요.




“첸, 오늘은 돌아가서 좀 자요.”




다가온 간호사가 훌쩍이는 어깨를 두드렸다.




“결혼식에 못 가서 미안해요, 달리아..”


“예쁜 화관을 선물 받았으니 됐어요. 그보다 아까 엘렌과 약속했어요, 오늘은 꼭 당신을 돌려보내겠다고!”


“엘렌을.. 혼자 두면..”


“내가 있잖아요, 엘렌이 일어나서 지금 당신 얼굴을 보면 다시 자고 싶어질 걸요?”


“하하..”




그녀의 말은 틀린 게 없었다.  잔뜩 충혈된 눈 아래가 붉게 부어 올랐다.  패인 뺨 뒤쪽에는 실핏줄이 터져 울긋불긋하고 바짝 마른 입술의 벗겨진 피부가 가시처럼 일어나 있다.  엘렌이 입원한 뒤로 며칠 째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자주 있는 일이었지만 근래 그에게 들이닥친 운명의 시련까지 더해져 사실, 체력이 한계에 다다라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지끈거리는 이마로 손을 가져가자 달리아가 안쓰러운 표정으로 등을 떠민다.  그러다 쓰러지겠어요, 오늘만 엘렌은 나에게 맡겨요.



불 꺼진 집에 들어선 첸은 공기가 품은 쓸쓸함을 모른 체하며 어둠을 내몰았다.  물때 낀 접시와 뽀얀 먼지가 내려앉은 식탁이 저의 고단한 하루 같다는 생각을 하며 그는 살포시 웃어 버렸다.  허기져.  부엌 앞에 서 껍질이 쪼그라든 사과를 조금 베어 문다.  무슨 맛인지도 모르겠네, 혼잣말을 하더니 감색 선반 위를 뒤적거린다.  수많은 엘렌의 약들 중 겨우 진통제를 찾았다.  머리가 지끈거려 흐릿해지는 시야.  갑작스레 현기증이 일어 식탁을 부여잡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데,




“힘들어..”




눈을 감았다.  늘 올라가 있던 입매가 힘을 잃는다.  엘렌과 저의 체취로 아늑했던 집이 오늘따라 다른 공간이 된 것 같다.  깊은 한숨.  부모의 보살핌을 허락 받지 못했어도 그리닌이 저를 거두었으니, 모진 매질의 연속인 인생도 엘렌과 함께이니, 홀로 고군분투해야 해도 아름다운 꽃의 주인이니 주어진 삶에 감사하고 싶었다.  눈물은 참아지지 않아서 늘 흘린 눈물보다 더 웃으려고 애썼다.  누군가에게 용서를 구하듯, 언제나 행복하고 싶었다.  지금은 그 누군가가 당신이란 걸 알지만요.  

 
 

한쪽 모서리가 심하게 닳아 기울어진 책장의 그림자를 밟고 선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무표정에 떠오른 붉은 눈동자가 식탁에 기대 서 있는 이를 응시한다.  가는 목을 꺾으려는 손아귀에 잔뜩 힘이 들어가 기이하게 뒤틀렸다.  첸이 살며시 눈을 떴다.  갈색 눈동자가 평소와 달리 탁하게 생기를 잃은 채다.  시선 끝에 있던 남자가 천천히 걸어 어둠을 벗어나기 시작한다.  일정한 마찰음을 내는 구두 소리 뒤로 삐걱거리는 나무 바닥의 찢어지는 소리가 뒤따른다.  남자를 향해 팔을 뻗었다.  검은 이는 놀란 듯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가 빠르게 첸의 곁으로 다가섰다.  저를 다독이는 것 같은 맥박.  가냘픈 어깨에 살짝 이마를 댄 남자가 실소를 내뱉었다.  머릿속에서 수도 없이 찢어발긴 인간을 마주하자 온 몸에 힘이 빠져 나간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애달픈데,




“죽일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너는 또 날 밀어내겠지.  하지만, 예상이 빗나갔다.  천천히 팔을 감싸는 온기에 그의 서늘한 몸이 움찔- 떨렸다.  차가워, 라고 속삭인 첸이 반달 눈으로 나무란다.




“나타나지 말라고 했잖아요.”




귓가에 살가운 웃음소리가 내려앉는다.  흉측하게 힘줄이 불거져있는 팔을 만지작거리는 작은 손.  깃털이 내려앉는 듯한 감촉에 남자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오늘은 뭔가..”




다르다.




“이건 꿈이잖아요, 그러니까.. 마음대로 할 거에요.”




꿈?  남자는 그 품에서 떨어져 패인 뺨을 쓰다듬었다.  신열에 들뜬 몸.  이마에 베여있는 식은 땀.  유약한 숨.  당신, 아프군.  이런 류의 아픔이 어떤 건지 가늠하지도 못하는 얼굴에 걱정하는 기색이 떠오른다.  증오 따위는 이미 그를 두 눈에 담은 순간 모조리 잊어버렸다.  남자는 그런 스스로가 우습다.  꿈이라는 착각 속에 갇힌 첸이 열을 잠재우는 차가운 손을 두 손으로 붙잡았다.  몽롱한 눈동자가 처음으로 남자를 원한다고 말하고 있다.  꿈이라 믿어 한껏 열망하고 있다.  마음대로라.  어떻게 하고 싶은데? 묻자, 조금 망설인다.




‘오늘은.. 오늘만.. 당신의 ‘첸’이고 싶어요. 그렇게 해주고 싶어.’




들리지 않던 마음이 다시 머릿속을 울리다 곧, 목소리와 겹쳐진다.




“날 찾아줘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어요. 그리고..”


“그리고.”




잿빛 눈동자가 눈물에 잠겨 반들거렸다.  ‘고맙다’는 말.  기억이 나.  ‘첸’이 가르치길, 그 말은 분명 나 때문에 행복해졌다는 뜻이지.




“혼자 쓸쓸하진 않았는지..”




채 갈무리되기 전에 잔뜩 갈라진 목소리가 남자의 가슴팍에 묻혔다.  그는 힘의 경계 없이 꽃을 꽉 끌어안았다.  얕은 신음소리에 화들짝 놀라 몸을 떨어뜨리자, 첸이 아연실색한 그의 표정을 보며 웃었다.  아프잖아요.  그러더니, 어정쩡하게 서 있는 제 품에 천천히 머리를 기대며 안겨 들었다.  나른한 웃음 소리가 자장가처럼 심연에 내려앉는다.  너른 등을 감싸는 구원의 손길.  남자는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럽게 첸의 허리를 끌어 안았다.




“외로웠을 거야.. 너무..”


“으흑..”


“고마워요.”




부드럽게 저를 달래는 연약한 손에 기댄 남자는 한참 동안 눈물을 그치지 못 했다.  속으로 삼키어 감내해야만 했던, 홀로 견뎌내야 했던 지독한 외로움이 쏟아져 나왔다.  그것은 어떤 것으로도 대적할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꽃의 숨결이 세상에서 사라진 이후, 그를 찾기 위해 떼는 한 걸음으로 분노를 밟고 한 걸음으로 회한을 밟고 한 걸음으로 증오를 밟고 그렇게 하염없이 걷다 보니 배신자는 남아있지 않았다.  살결을 맞대고 사랑한다고 속삭였던 아름다운 연인만이 남자를 따라다녔다.  목숨을 끊으려고 하면 탐욕스러운 목소리가 뇌리에 난도질을 했다.  사랑해.  기다릴게.  날 찾으러 와줄래?  나만을 위해.  나만을.  전부 내 것이야.  널 더 사랑할게.  어서.  날 찾아.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게 하는 잔혹한 이를 끝내 떨쳐낼 수가 없었다.




“그만 울어요.. 마음 아파.”




가엾은 사람, 꿈결에서라도 당신을 위로할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첸이 조심스럽게 남자의 눈가를 쓸고는 머리카락을 쓰다듬는다.  남자는 절대 놓지 않겠다는 말 대신 허리를 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푸르스름한 달빛이 그들을 관음觀淫 하며 가라앉는다.  그는 고개를 들어 첸의 얼굴 위로 연거푸 입술을 떨어뜨렸다.  반듯한 이마와 눈썹 끝, 입 꼬리까지.  꽃이 주는 위안에 숨가쁜 희열이 찾아왔다.  찰나의 정적을 채운 둘의 숨소리가 달다.




“아..”




느릿하게 제 입술을 매만지는 손가락에 첸의 얼굴이 붉게 물든다.  저를 가두는 잿빛 감옥.  다가오는 입술에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하지만 이미 허리를 붙들고 있던 팔에 소용없는 저항으로 끝이 나고 만다.  잔뜩 몸을 움츠리자 닿을락 말락 한 검붉은 입술이 살짝 미소를 짓는다.




“첸, 가만히 있어요.”


“하지만..”




계속 날 위로해줘.  거부할 수 없는 낮은 목소리가 그를 묶는다.  그가 뭐라 말하기 전에 남자는 거침없이 첸을 집어삼켰다.  다갈색 머리카락을 움켜쥐는 손길이 갈급하다.  차가워.  열띤 몸을 짓누르는 서늘한 기운에 취한 이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나 때문에 아픈 사람, 미안해요.  당신을 원해요.  제 목을 끌어당기는 미약한 움직임에 기뻐하며 그는 더 깊게 꽃을 옭아맸다.  여린 살을 마음껏 탐한다.  상기된 두 뺨.  머릿속으로 흘러 드는 달뜬 목소리.




‘머리가.. 아니, 심장이 너무 뜨거워.. 죽을지도 몰라..’




위험해.  망가뜨리고 싶어.  품 안에서 바르작거리는 첸이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다.  살 내음이 진하게 베여 있는 목을 잘근잘근 깨물며 남자가 절박하게 명령했다.




“사랑한다고 말해.”




스르륵- 마른 옷가지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사랑한다고 말하라니.  첸은 그의 손아귀에서 웃어버렸다.  정말 아무것도 숨기지 못한다니까.  뜨겁게 달아오른 손으로 남자의 두 뺨을 감싸 쥐었다.  느릿하게 벌어지는 입술.  겹쳐진 두 인영을 둘러싼 공기 위에 달게 뱉어지는 속삭임.




“사랑해요.”




입술에 닿는 숨결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남자는 쓰게 웃었다.  할 수만 있다면 꿈에 갇히고 싶다는 바보 같은 생각이 들었다.  시름이 없는 몽환 속에서 그가 잠들기만을 기다리는 거다.  그러면 보잘것없는 삶을 부지하려 날 거부하는 이 때문에 이리도 괴롭진 않겠지.  이렇게 날 원하면서 여전히 날 위해서는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는구나.  사랑한다고 속삭이는 첸을 안아 들었다.  어둠이 꽃을 나락으로 이끌었다.



어슴푸레한 새벽은 고요만을 허락한다.  골목 구석에 있는 낡은 3층 건물 맨 꼭대기 층에 있는 집은 이에 복종할 의지가 없다만.  침묵 위로 급하게 새겨지는 숨소리에 얕은 신음이 섞여 있다.  제발, 이라는 애원에 아랑곳 않고 남자가 어깨에 걸쳐진 허벅지 안쪽을 혀로 길게 핥아 올렸다.




“아, 안돼.. 그만..”




눈을 꼭 감은 채 고개를 가로젓는 이를 내려다보며 픽- 웃어버린 남자가 몸을 일으킨다.  벅차 오르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아픈 연인을 지나치게 몰아붙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로선 불가항력이었지만.




“착하지.. 이제 괴롭히지 않을게, 이대로 잠드는 거야.”


“으응..”




기껏 얼러놓고도 아쉬운 마음에 빨갛게 부어 오른 목으로 입술을 내리자 바들바들 떨리는 손이 힘없이 가슴팍을 밀어낸다.  침대 옆 협탁 위에 놓여있는 먼지 낀 전등 불빛이 수명을 다한 듯 일렁거려 엉켜있는 그림자를 흐트러뜨렸다.  침대에 걸터앉은 남자와 그의 손 아래 깊은 잠에 빠져있는 첸.  온 마음을 바쳐 괴롭힌 탓에 기절하듯 잠들어버린 첸이 깨지 않도록 퍽 조심스럽게 물에 적신 천으로 몸을 닦이고 옷을 갈아 입히고 있다.  난생 처음 ‘보살핌’이라는 것을 행하는 몸짓이 미련하기 그지없다.  진땀을 빼며 옷에 겨우 팔을 꿰어주고 나서야 숨을 내뱉을 수 있었다.  푸석해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 손길이 애틋하다.




“사랑해.”




이마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지만 답은 없다.  첸의 마른 몸에 남겨진 멍울과 저가 새긴 붉은 흔적들. 이제 내 사랑은 너에게 상처로 남는구나.




“응.. 으..”




뒤척인 것뿐인데 화들짝 놀라며 눈이 커진다.  죽는 건 아니겠지?  이마로 내려앉는 큰 손.  아직 몸이 뜨겁다.  열을 떨치려 자꾸 냉랭한 저를 따라오는 미약한 몸을 내려다 보는 다감한 시선.  천천히 첸의 곁으로 몸을 가까이 누였다.  그림자를 드리운 긴 속눈썹을 눈에 담으며 색색거리는 숨소리를 듣고 있노라니, 불현듯 옛날이 떠올랐다.  성당 지붕 위에 나란히 누워 하늘을 보던 어느 날.  우리에게 내려앉는 석양을 이불 삼은 ‘첸’이 부모의 사랑을 받는 인간 아이들이 부럽다며 제 손을 끌어다 가슴 위에 얹고는,




“나도 토닥토닥해줘.”


“토닥토닥?”


“아, 이렇게 가슴을 쳐주라고오!”


“이걸 왜 하는 건데?”


“아기 잘 자라고.. 밤새 지켜줄 테니 안심하라는 거겠지.”




쓸쓸한 표정으로 말하더니 자는 척 눈을 꼬옥 감는 거다.  너무도 사랑옵게.




“첸, 집으로 돌아와야 지켜주지.”


“또 그 얘기야? 오늘은 일찍 돌아왔잖아아.”


“해가 지는데 이게 일찍이야?”


“풉.. 어떤 인간이 질투가 악의 시초라고 했어.”


“한 인간은 질투 없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는 말도 했지.”


“맙소사.. 네가 인간의 말을 인용하다니, 감동이야..”


“그럼 내일은 꽃집에 가지마.”


“정말.. 질긴 애인이네.”




어깨를 으쓱거리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오늘만큼은 옛 생각에도 고통스럽지가 않다.  눈 앞에, 나의 꽃이 있으니까.  그 때처럼 그의 가슴에 손을 얹어 살살 두드렸다.  잘 자, 내가 지켜줄게.




“추워..”




허공에서 손이 멈칫한 사이에 첸이 몸을 돌려 그에게 등을 졌다.  짙은 눈썹이 꿈틀- 남자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린다.  차가운 손을 끌어당기면서 열렬히 원할 땐 언제고.  갑자기 버림받은 기분이 된 남자가 신경질적으로 침대 아래로 흘러내린 이불을 잡아당긴다.  그걸 웅크린 몸 위에 덮어주고는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가볍게 끌려온 이불더미를 꽉 안아버렸다.  머리카락이 턱 끝을 간질인다.  뒤척거려도 놓아주지 않자 곧 포기한 듯이 얌전해졌다.  입가에 다시 미소가 떠올랐지만 야속하게도, 200년 만에야 비로소 되찾은 안식安息의 시간은 길지 않다.  동이 터올라 서서히 밝아지는 창문을 바라보던 회백색 눈동자가 사라진다.  첸에겐 그저 꿈으로 여겨질 우리의 시간.  심중이 어지러웠다.  행복이라, 나지막이 읊조린다.  이 ‘행복’은 첸의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남자가 창문으로 다가가 두꺼운 자줏빛 커튼을 쳐 햇빛을 가려버렸다.  순식간에 암흑이 된 집안, 커튼 틈새를 비집은 한 줄기 빛만이 침대 위로 미쳤다.  하지만 이마저도 남자의 등에 가로막힌다.  어둠에 짓눌린 꽃을 내려다보며 탐욕스러운 눈동자가 서서히 붉게 물들었다.  남자는 꽃이 사랑을 속삭인 순간, 이미 모든 것을 결정했다.  지금까지 함부로 패악하지 못했던 이유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연인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목숨을 비롯한 모든 것을 저버리고 얻은 빛나는 운명을 저가 짓밟아버린다면 그에게 다시는 사랑 받을 수 없을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늘 깨닫고야 말았다.  아름다운 꽃이 원하는 것은 고단한 인간에의 자유, 그리고 불멸의 사랑.  가엾게도, 지독한 악연과 인간의 시련에 묶여 있다.  그래서, 돌아오지 못하는 거다.  야윈 뺨을 긴 손가락 끝으로 쓰다듬는다.  너를 억압하는 더러운 것들은 내가 치워줄게.  넌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내 품에서 빛나는 인간으로 살아가면 돼.






미간을 좁히며 한 쪽 눈이 가늘게 뜨였다가 다시 감겼다.  타는 듯한 갈증으로 목이 찢어질 것 같다.  첸은 제 몸을 가둔 이불 속에서 겨우 두 팔을 꺼내 눈을 비볐다.  눈가에 말라붙은 눈물 자욱이 따갑게 떨어져나간다.  약을 먹은 이후로 어떻게 잠들었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아 잠시 멍하게 누워있다가 얼굴을 붉힌다.  갑작스레 떠오른 꿈결.  미쳤어, 작게 중얼거리며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고 이불에 발길질을 한다.  그런 꿈을 꾸다니 머리가 어떻게 됐나 보다.  근데, 그 사람이 많이 울어서 아주.. 슬픈 꿈이었어.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손가락 끝으로 매만졌다.  온기.




“차가워졌을 줄 알았는데..”




저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 채 몸을 일으켜 앉았다.  응? 제 팔에 맞게 접혀있는 잠옷의 소매를 보며 그가 갸우뚱거린다.  엘렌이 접어놨나?  손가락까지 내려오는 긴 소매를 보면 바보 같다고 잔소리를 했던 그녀를 떠올리며 첸은 아이가 된 기분으로 순진하게 웃어버린다.  목 말라.  침대에서 내려오는데 온 몸이 삐걱거려 그는 엉거주춤 발을 떼었다.  팔이며 다리가 두드려 맞은 것처럼 욱신거리고 컵을 꺼내려 까치발을 들었을 때는 허벅지 안쪽이 부들부들 떨리기까지 했다.  꽤 오랜 시간 잠들어있던 것 같은데 그 동안 많이 피곤했나,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물을 마시던 그가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집안이 유난히 어둡다고 느껴져 한밤중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다.  첸은 어깨로 내려앉는 한기를 끌어안으며 창문 쪽으로 다가갔다.  근 몇 년 간 커튼을 쳐본 일이 없다.  두꺼운 커튼을 살며시 걷어내자 갇혀있던 빛이 그를 집어삼킬 것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눈이 부셔 도망치듯 그 빛을 등진 첸은 서둘러 옷을 벗어버렸다.




“해가 중천이잖아! 으아아, 얼마나 잔 거야아!”




정신 없이 바닥에 널려있는 옷을 주워 입는다.  검은 날개.  그의 등에 선명하게 새겨진 검붉은 손자국들이 태양을 조롱하듯 꿈틀거렸다.






흰 침대에 앉아 바느질을 하고 있는 엘렌의 무릎 가에 팔을 괴고 있는 첸의 얼굴이 오랜만에 해사한 웃음을 띠고 있다.  그런 그를 내려다보며,




“첸, 그만 꽃집으로 돌아가는 게 어때?”




말하고 있지만 그녀 또한 오랜만에 그와 함께인 오후 시간에 꽤나 기분이 좋아 보인다.  다행이 엘렌의 병세에 차도가 있어 근래 쌓여있던 마음의 짐이 그나마 덜어졌다.




“걱정 마, 점심 시간이잖아.”


“나 때문에 괜히..”


“그보다 지금 뭘 만드는 거야?”




이상한 모양이잖아, 덧붙이며 첸이 키들거렸다.  작고 둥근 주머니 같은 것을 살짝 잡아당기자 창백한 피부 위에 오목한 볼우물이 생긴다.




“아기 손싸개야, 달리아에게 아기가 생겼거든.”


“우와! 정말이야? 장갑 같은 거구나.. 손이 이렇게 작을까? ”


“이것보다 더 작을지도 몰라.”


“이것보다? 으.. 생각만으로도 너무너무 사랑스럽다.”


“아기를 좋아했어?”


“좋아한다기 보다는.. 신기하잖아, 그냥 너무 작고 예쁘고..”




경외감으로 눈을 반짝이는 그 때문에 엘렌은 조금 우울해졌다.  저가 첸에게 해줄 수 있는 거라곤 걱정을 끼치고 삶의 무게를 더해주는 것뿐이다.  그리고 틀림없이 그를 두고 먼저 죽어버릴 테니 후에는 외로움과 슬픔 또한 안겨야겠지.  그에게 행복한 가정을 선물하려던 어릴 적 소녀의 소원은 이미 오래 전에 사라졌다.  첸은 앙증맞은 손싸개 끝을 만지작거리다가 허망해진 엘렌의 표정을 읽어냈다.




“엘렌, 난 너만 있으면 돼.”




거짓말. 사랑한다고 말해준 적도 없으면서.




“그렇게 말할수록 더 살고 싶지 않은 거 알아?”




그녀는 첸의 다정한 밤색 눈동자 위로 겹쳐지는 붉은 눈동자에 치를 떨며 바느질 거리를 내려놓았다.  저를 마주한 얼굴이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허둥거린다.  첸은 단순히 그녀가 아프기 때문에 예민해졌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꽤 긴 시간 동안 그녀를 좀먹어왔던 감정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늘 함께였던 소년이 저에게 품은 마음은 사랑이 아니다.  그저 혼자 남겨질까 두려워하는 것일 뿐.  순식간에 비참해진 그녀는 몸을 누였다.




“에, 엘렌..”


“미안해, 첸. 쉬어야 할 것 같아.”




하얀 벽을 응시하던 그녀는 쓸쓸하게 닫히는 문 소리에 눈을 꼭 감아버렸다.  멍청한 계집.  첸을 따라다니는 검은 이가 찢어지는 듯한 웃음 소리를 내면서 저를 조롱하는 것같이 느껴졌다.  무언지 가늠할 수 없는 그 존재가 사실은 자신의 어두운 심기에서 비롯된 악마는 아닐까, 의심스럽다.  언제나 아름답게 웃는,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첸을 시기하는 추악한 마음이 불러온 불행의 씨앗이 분명하다.  죽고 싶어.






따사로운 햇살이 드는 가게 앞에 쪼그려 앉아 있는 인영.  밀짚 모자를 쓰고 분주히 무언가를 하고 있다.  손등으로 흘러내리는 땀을 훔치며 열심이다.  작은 유리 화병에 하얀 알갱이가 섞인 건강한 흙들을 조금씩 주워담으면서 신이 난 듯 콧노래를 흥얼거리기까지 한다.  오랜만에 시장에 나갔다가 운 좋게도, 티노 아저씨에게 스타티스 씨앗을 잔뜩 얻어왔다.  다른 씨앗이었다면 받아오지 않았을 텐데.  손 안에 흩어진 작은 것들을 내려다보며 저의 뜻에 따라 코빼기도 내비치지 않는 검은 남자가 떠올라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 사람, 잘 지내고 있을까?  혼자 있겠지.  쓸데없는 생각을 한다고 혼내기라도 하듯 흙 속에서 별안간 꿈틀- 하고 얼굴을 내미는,




“으아아! 지렁이이!”




첸이 질색하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옆 카페 테라스에서 커피를 마시던 이웃 노인이 코웃음을 치며 꽃사람이 지렁이를 무서워하면 되겠냐며 나무란다.  그 주위에 있던 다른 이들도 착하고 사랑스러운 꽃집 주인을 따뜻한 시선으로 품었다.  첸은 머쓱한지 뒷머리를 긁적거리면서 눈을 휜다.




“반가워서 그런 거에요, 헤헤.”




은근슬쩍 꽃삽으로 지렁이를 흙 포대자루에 도로 퍼 넣어버렸다.  그 주위로 웃음 소리가 번진다.  그런 그를 밟고 선 것처럼 높은 건물의 철제 난간을 디딘 검은 구두는 미동이 없다.  오롯이 한 사람만을 담고 있는 무심한 눈동자 또한.



생명을 품은 흙이 담긴 병들을 하나하나 가게 안으로 옮기느라 첸의 귓가에 유리 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세면대에 아무렇게나 엎어져 있던 컵에 물을 받아 탁자 위에 나란히 서있는 것들에 떠먹였다.  잘 자라라, 소곤거린 그는 가게를 둘러보았다.  한 동안 방치하다시피 해 엉망이 된 나의 보금자리.  먼지들에 색을 도둑 맞은 말린 꽃들.  내가 없으면 이 곳은 계속 빛을 잃어가겠지.  호- 하고 숨을 불어넣자 빛을 머금은 공기 중으로 먼지가 뿌옇게 퍼져 나간다.  안 되겠다, 중얼거린 첸은 선반 아래 걸려있는 천 쪼가리를 물로 적시면서 거울을 힐끔- 보았다가 입술을 삐죽거리면서 고개를 숙인다.  바보 같은 생각 그만해.  나타나지 말라고 해놓고 그 사람을 기다리면 어쩌자는 거야?  잘 지내고 있는 걸 확인할 수만 있다면 이렇게 걱정이 되지는 않을 텐데.  남은 시간이 없을지도 몰라, 마지막으로 한번만 보고 싶어.  물에 젖은 흉터가 시큰거리는 느낌이 들어 얼른 그 손을 에이프런에 문질렀다.  그를 이용해서 현실에서 도망치려는 것이 번번히 양심에 의해 가로막히고 있었다.  바닥을 쓸고 막 테이블을 닦으려는데, 풍경 소리가 울린다.




“어? 엠마!”


“첸.. 어, 어제 오니까 아무도 없길래.”




풍채 좋은 중년 여성이 멋쩍게 웃으며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첸이 퍽 반가운 티를 내며 얼른 그녀에게 의자를 내주고 세면대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  그의 등 뒤로 다급히 ‘아무것도 내오지마!’라는 명령 같은 부탁이 떨어진다.  샐쭉-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손 부채질을 하며 의자에 앉았다.  엠마는 1층에 꽃집이 있는 이 건물의 주인, 즉 임대인이다.  그리닌과는 친구 사이로, 첸과 엘렌이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많은 도움을 주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냥.. 잘 지내는지 궁금해서 왔어. 엘렌은 좀 어때?”


“덕분에 많이 좋아졌어요.”




거짓을 말하는 입맛이 써서 첸은 혀를 굴렸다.  해골처럼 변해버린 얼굴을 떠올리지 않기 위해 그는 입 안쪽 연한 살을 잘근잘근 씹었다.




“병원에 있다고 들었어, 이렇게 오래 입원한 적은 없었잖아.”


“.. 네, 엠마. 하지만, 곧 괜찮아질 거에요.”


“병원비는?”


“모아둔 걸로 지불하고 있어요, 만약 수술을 하게 되면.. 조금 힘들어질 것 같지만요.”




그녀는 측은한 눈길로 억지 웃음을 짓는 이를 쓸었다.




“첸, 그래서 말인데..”


“그래도 꽃집이 있어서 다행이에요, 늘 감사해요.”




그리닌이 젊었을 때부터 첸이 주인이 된 지금까지 꽤 오랜 시간 한 자리를 지켰던 저희의 꽃집은 단골 손님이 많은 편이다.  게다가, 이웃들은 상냥했던 그리닌의 병약한 딸과 그녀를 보살피는 고아 소년을 불쌍히 여겨 늘 그들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주려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  순전히 첸과 수다 떠는 것을 좋아하는 손님들도 꽤 있지만.  덕분에 값비싼 엘렌의 병원비와 약값을 충당할 수 있었고 변변치 않아도 나름대로 불편함 없는 생활이 가능했다.  엠마는 그런 꽃집을 수십 년째 적은 액수로 빌려주고 있었다.  감사를 전하는 입 꼬리를 외면하며 엠마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 그만 가봐야겠다, 엘렌에게 안부 전해주렴.”




평소의 그녀답지 않은 어두운 표정에 저도 모르게 손을 붙잡으려 했지만,




“벌써 가시게요? 차라도..”


“아냐, 첸.”




그의 손을 살짝 뿌리치더니 무언가에 쫓기듯 가게를 나섰다.  급히 사라져버린 보라색 원피스의 잔상이 남아 문 옆 루피너스 화분과 겹쳐진다.






지친 걸음을 옮기며 병원 안으로 들어섰다.  몇 년이 되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소독약 냄새에 그의 한쪽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가 제자리로 돌아온다.  저녁 시간이 지나서인지 병원이 한산했지만 그건 그다지 좋은 느낌이 아니다.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복도를 걷는 병색에 젖은 이들, 불이 꺼진 창구와, 같은 모양의 간호사 복.  병실로 들어가기까지 몇 번이나 되풀이되는 최악의 상상.  끔찍해.




“엘렌..”




비어있는 그녀의 침대를 눈에 담은 첸의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한다.  작은 손에 들려있는 바구니 안에 들어있던 빵과 한 줌의 체리가 하얀 바닥으로 쏟아졌다.  그를 둘러싼 몇몇 사람들이 움직이는 입술이 만들어내는 음이 아무것도 들리지가 않는다.




“.. 첸! 괜찮아요?”


“에, 엘렌이..”


“진정해요, 역시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 미안해요.”


“너무 놀라서.. 집으로 간 거죠?”


“그래요, 직접 데려다 줬으니 걱정 마요.”




며칠 전부터 집에 가고 싶다는 얘기만 늘어놓았던 엘렌을 떠올리며 쿵쾅거리는 가슴을 손바닥으로 눌렀다.  다행이다.  머릿속에서 천을 뒤집어쓴 채 움직이지 않는 여자, 그리고 그 천을 걷어버리면 온갖 벌레들이 그녀의 살을 파먹고 있는 거다.  입술을 꽉 깨물면서 고개를 저었다.  바닥에 떨어진 것들을 주워담는 그에게 내밀어진 체리 두 알.




“아.. 선생님, 감사해요.”


“엘렌이 집으로 가버린 건 아무래도 나 때문인 것 같네, 인공 판막 얘기를 했거든.”


“.. 그랬군요. 제가 가서 잘 얘기해 볼게요. 꼭 엘렌에게 해주셔야 돼요!”


“첸.. 누차 말했지만 확률적으로..”


“살 수도 있잖아요.. 근데 아무것도 안 하면.. 살려주세요, 제발..”




첸은 무릎을 꿇고 노의사의 바짓가랑이를 세게 붙들었다.  의사가 난감한 표정으로 그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절 혼자 남게 두시면 안 돼요.  애원하는 얼굴은 다른 말을 했다.




“제 모든 걸 바칠게요, 심장이든 폐든 다요.. 엘렌만 살려주세요.”




그래야 제가 살 수 있어요.






차가운 공기가 폐부로 흘러 들어 옷깃을 여몄다.  벌겋게 부어 오른 두 눈가가 쓰라리다.  멋대로 집으로 돌아와버린 엘렌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탓에 온 몸의 수분을 눈물로 낭비하고 있다.




“엘렌, 수술을 하면..”


“싫어.. 병원 말고 따뜻한 이 침대에서 죽고 싶어.”


“죽는다고 말하지 마! 나를 두고.. 흑.. 날 두고 죽지마.”


“울지마, 첸.”




첸의 손을 끌어 쪼그라든 제 뺨 위로 얹은 그녀는 어떻게 해야 그를 이길 수 있는지 잘 알았다.  마치 상한 음식에 핀 곰팡이 같은 색이 된 눈동자.  손바닥으로 느껴지는 사막 같은 피부와 지독한 병의 악취.  이미 죽음에 취한 그녀를 마주한 그는 눈을 감아 버렸다.  공포에 사로잡혀 엘렌의 뺨에 닿아있던 손이 마른 어깨를 침대 위로 밀어 버렸다.  힘없이 밀려난 그녀는 비소를 지으며 그를 올려보았다.  엘렌이 아닌 다른 사람 같았다.  그녀라면 이렇게 무정할 리가 없다.  죽음이다.  넌 이제 혼자야,  첸. 네가 견딜 수 있을까? 죽음이 속삭였다.




“왜, 왜! 왜 나를.. 이렇게 못 살게 구는 거야?”


“수술한다고 살 수 있는 건 아냐.”


“살 수 있어!”


“돈은?”


“.. 그런 건 걱정하지마, 넌 그냥 행복한 생각만 해. 꼭 나을 거라고, 나와 행복하게.. 으윽.. 오래..”


“나를 봐, 이미 늦었어.”


“포기하지 마, 제발..”


“정말 이기적인 아이구나.”


“뭐..? 내가.. 내가 이기적이라고? 정말 이기적인 건 너야! 난 너를 위해.. 너를 위해 살고 있는데.”


“아니, 넌 나를 이용하고 있는 거야.”




이용한다고? 내가?




“혼자 남으면 견딜 수 없으니까.. 내가 죽으면 날 핑계 삼아 삶을 등지려는 거지?”




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간다. 가엾게도, 죽음은 연민이란 감정을 모르는 존재였다.  그래서, 그녀의 목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죽어가는 날 보면서 네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모를 줄 알았어?”


“아니야.. 아니야, 엘렌..”


“차라리 혼자가 되기 전에 나보다 먼저 죽어버리고 싶다고 생각했잖아. 내 말이 틀려?”


“그, 그만해..”




엘렌이 바로 그가 살아가는 이유였다.  이 곳, 이 인생에서의 존재의 이유.




“하지만, 날 내버려두고 죽을 수 없겠지. 그러기에 넌 너무 착하니까.”


“흐윽.. 정말 못됐어. 난 살고 싶어.”




그녀의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뜨거운 눈물이 엘렌의 치마자락을 적신다.  첸의 마음을 할퀴고 상처 입히자 오랜만에 살아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그를 사랑했다.  그래서, 그가 더 오래 웃길 바란다.  저가 없는 세상에서도, 지금처럼 아름답게.




“그래. 그러니까, 죽지 마. 나를 죄인으로 만들지 마.”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창문으로 시선을 옮긴 그녀가 입술을 달싹거렸다.  이생에 첸이 당신을 위해 사는 일은 없을 거에요, 내가 지금 이 사랑스러운 아이를 언약으로 묶어 버렸으니까.  날카롭게 갈린 복수가 그녀의 손을 떠났다.






까마귀 떼가 나뭇잎을 떨치며 날아오른다.  울창한 숲의 나무들이 불온하게 튀어 오르며 움직였다.  숲의 끄트머리에 위치한 작은 마을, 한밤중에도 시끄러운 노랫소리와 인간들의 소음이 뒤섞여 그들만의 빛을 뿜어댄다.  끼이익- 한 남자가 그 안으로 들어섰지만 각자의 하루에 취해있는 이들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  단, 한 명을 빼고.  남자는 요란한 사이에 빠른 속도로 고개를 숙여 사라지는 이에게로 천천히 눈길을 돌렸다.




“히이익!”


“왜 도망치지?”


“제, 제기랄..”




동족은 죽을 힘을 다해 내달려 숲으로 들어섰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강제로 시야를 빼앗아 버리는 숲의 어둠 속에서 소름 끼치도록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진흙이 묻어있는 것 같은 판초를 벗어 던진 동족이 바닥에 털썩- 주저 앉는다.  천으로 감추었던 흉측한 얼굴이 드러났다.  한쪽으로 흘러내린 얼굴에는 눈알이 하나뿐이고, 코는 아예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다.  그리고 끝이 뭉툭한 한쪽 다리.  발이 없다.  오늘이 제삿날이었군.  이 곳에서 다시 만나다니, 난 정녕 샤르트르의 주인에게 죽을 운명이었던가? 체념한 그 앞으로 회색 눈동자가 떠올랐다.




“날 아는 자인가?”


“캬악, 퉤! 모를 리가 있나, 날 이렇게 만들어주신 분인데.”


“어떻게 살아있지?”




지금까지 누군가를 살려둔 적은 없다, ‘첸’을 제외하고는.




“재수가 좋았지, 모조리 화형 당하기 전에 비가 내렸거든. 오늘에서야 온전히 죽을 수 있겠어.”




껄껄거리는 동족의 회상하는 과거의 날이 고스란히 전해져서 남자는 그제서야 이 자가 200년 전 ‘첸’ 대신 죽어야 했던 셋 중에 운 좋게 살아남은 절름발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전생의 엘렌을 죽인 자이기도 하고.  기분 나쁜 까마귀 울음 소리가 메아리 쳤다.  운명이라, 꺼림칙했지만 지금 저에게 필요한 이다.  그는 언제든지 이 동족의 숨통을 틀어쥘 수 있었으므로 염려하기 전에 나섰다.




“죽이지 않겠소. 대신, 해줄 것이 있습니다.”


“무, 뭐? 죽이지 않아?”


“긴 말 하고 싶지 않군요.”




절름발이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그는 문드러진 두 손을 모으며 몸을 바짝 엎드렸다.  샤르트르의 주인, 우리의 왕이시여.




“제가 무, 무엇을 하면 됩니까?”


“어떤 여자를 죽여주시오. 아주 쉽지..”




동족의 머리맡 흙구덩이로 사진 한 장이 천천히 떨어졌다.  눈부시게 웃는 남자의 옆에 화관을 쓴 여자.  절름발이의 동공이 흔들렸다.  이 여자는.  이미 한번 죽인 적이 있는 얼굴.  샤르트르의 주인에게 반죽음을 당했던 날, 죽였던 인간 소녀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남자는 저의 발목을 날려버렸던 그 동족? 뭐가 어떻게 된 건지 가늠조차 하지 못한 채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다.




“흔적을 남기지 마십시오.”


“예, 예!”




절름발이가 고개를 들었다.  주인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지만, 무거운 쇠사슬이 달린 것처럼 목이 무거웠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사진과 웃옷을 집어 든 그는 한기가 드는 팔을 끌어안으면서 절뚝거리기 시작했다.



사방으로 가지가 뻗쳐있는 커다란 나무.  그 아래 기대 있는 검은 인영.




“그 여자..”




이생에 첸이 당신을 위해 사는 일을 없을 거에요.  화를 주체하지 못한 남자가 목을 조르듯이 목체를 비틀어 쥐었다.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죽음에게 먹히기를.  진작에 죽여버릴 수도 있었지만 말라비틀어진 여자의 푹 패인 눈동자 위에 죽음이 눈을 희번덕거리며 춤을 추고 있기에 굳이 손을 더럽히지 않기로 한 것이다.  아주 잘된 일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명을 재촉하듯 저를 올려다보며 비웃는 여자를 본 순간, 자비를 거두기로 했다.  감히.  작은 까마귀 유유히 날아와 나뭇가지에 앉았다.  남자는 갑자기 픽- 웃기 시작하더니 그 웃음 소리가 점점 커졌다.  아니, 오히려 잘된 일이야.  내가 자비라니, 사냥감을 눈 앞에 두고 교만해져선 안 돼.  이제 모든 덫을 쳤으니 기다리는 일만 남았군.  영악, 교활, 애증, 비밀.. 첸을 찾아 헤매면서 인간으로부터 얻은 것들이 악을 부추겼다.  사랑만을 갈구하는 순수한 악을.  첸, 조금만 기다려.  이제 나에게 돌아올 수 있어.  어느새 남자의 손아귀에 낚아 채인 어린 새가 버둥거리며 울음 소리를 냈다.




“역시 난 너여야만 하나 봐.”




지겹고 의미 없는, 고통스러웠던 나날이 너와 함께라는 것만으로 이렇게 즐거워지다니 말이야.  보고 싶어.  부드럽게 미소를 띤 남자가 발걸음을 뗀다.  툭- 피로 얼룩진 검은 깃과 짓이겨진 몸, 불순한 흙 위로 까마귀의 시체만이 남겨졌다.






잠에서 깨어나 옆에 누운 이의 숨을 확인해야만 하는 아침은 지옥 같다.  온 정신을 엘렌의 곁에 두고 나온 첸은 꽃집 뒤쪽에 붙어있는 자그마한 창고에서 나무로 만들어진 화분 받침을 찾고 있다.  다육 식물들이 마음껏 햇빛을 먹을 수 있도록 테이블을 준비해주려는 생각이다.  습한 공기가 가진 냄새에 미간을 찌푸린 채 쌓여있는 것들에 손을 뻗는다.  이 곳에 방치된 폐품들은 매끄러운 것이 거의 없어 벌써 그의 손가락에 잔 가시들이 여러 개 박혀 있다.  지칠 대로 지친 주인은 아픈 줄도 모르는 모양이지만.  끼는 것을 잊은 장갑이 에이프런의 넓은 앞 주머니에서 달랑거렸다.  찾았다!  선반 다리를 덥썩- 잡아 당기자 그 위에 얹어져 있던 못 상자가 떨어져 금속이 마찰하는 소리가 났다.  뿌옇게 먼지가 흩날렸다.  황급히 그 곳을 빠져 나오자 숨이 트인다.  마치 구렁텅이에서 구출된 느낌이 들어 그는 살짝 웃음을 지었다.  가게 앞에 앉아 찾은 목재 받침을 물로 닦고 있는데,




“체, 첸! 도망쳐!”


“엠마..?”




커진 동공에 낯익은 여자가 고꾸라질 듯 다가오는 것이 담겨 있다.  엠마의 겁에 질린 표정을 알아차리기도 전에 첸의 몸이 큰 화병을 가득 채우고 있던 프리지아 사이로 나뒹굴었다.  찢어지는 비명과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평온한 거리에 울려 퍼진다.  이게 무슨 일이지?  역한 술 냄새.  억센 털이 엉켜있는 두꺼운 팔이 그의 멱살을 잡아 일으켰다.




“이 거지 같은 놈이, 나가라면 나갈 것이지!”


“이 애는 아무것도 몰라! 놔, 놓으라고!”


“몰라? 그럼 알게 해줘야지, 크큭..”




산 멧돼지 같은 남자가 팔에 매달린 엠마를 세게 밀어버렸다.  그리고 손아귀에 쥔 창백한 얼굴에 망설임 없이 주먹질을 했다.  첸이 할 수 있는 저항이라곤 살이 두둑이 오른 팔에 손톱을 박아 넣는 것뿐이었다.  잔인한 마찰음이 둔탁하게 허공을 가로지른다.  고통이 무뎌질 무렵, 엠마가 제정신이 아닌 남편에게 다시 달려들었다가 머리채를 잡히는 게 뿌옇게 그려졌다.




“그, 그만.. 윽.”




터진 입술에서 피가 섞인 침이 흘러내렸다.  귓속에 벌레가 들어가 있는 것처럼 웅웅거리고 눈을 뜨고 있기가 힘들었다.  첸의 긴 속눈썹에 엉긴 핏덩이가 뺨까지 늘어졌다.  우악스러운 사내가 끼고 있던 반지가 그의 눈두덩을 긁어 찢었다.  영문도 모른 채 무자비한 폭력에 발가벗겨진 첸이 흙 바닥으로 던져졌다.  흐려진 시야로 어느새 몰려든 사람들의 신발이 보인다.  그 속에 왠지 검은 구두가 있을 것 같다는 멍청한 생각을 해버렸다.  웅크린 몸으로 거센 발길질이 더해진다.  비명 한번 지르지 못한 첸이 꺽꺽거리면서 다리를 붙잡으려 했지만 그러기 전에 사내가 앙상한 손을 밟아버린 게 먼저였다.




“당장 가게를 빼지 않으면 더 험한 꼴을 당할 줄 알아라, 꼬마야.”




사내가 등을 보이자 공포에 질려있던 이웃들이 분주해졌다.  곳곳에서 안타까워하는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피투성이 얼굴에 물이 끼얹어졌고 흐리멍텅한 눈 앞으로 손을 흔들어댔다.  연달아 들려오는 제 이름을 들으면서 첸은 웃으면서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이런 류의 무력감을 강제로 주입 당한 것은 난생 처음 있는 일이었다.  끔찍했다.  누군가 바들바들 떨리고 있는 손을 꽉 잡았다.  첸의 눈동자가 옆으로 움직인다.  핏줄이 터진 흰자위 때문에 눈을 마주하고 있기가 힘들었는지 엠마가 고개를 숙여버렸다.




“에, 엠..”


“미안해, 미안해. 이럴 수가.. 정말 미안하다, 아가야.. 남편이 이 가게를 다른 사람에게 팔아버렸어.. 그 사람이 준 돈이 어마어마해.. 어쩔 수가 없었어, 미안해.”




끊임없이 미안하다는 말이 들려왔다.  그리닌의 꽃집, 우리의 꽃집을 빼앗겼다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사람들에게 밟혀 문드러진 노란 꽃들을 바라보던 첸이 갑작스레 밀려드는 극심한 고통에 가슴을 부여잡으며 고개를 젖혔다.  청명한 하늘에 흘러가는 흰 구름들, 그리고 높은 건물 위에 검은 인영.  당신일까?  보고 싶었어요.  가물가물해지는 것을 놓치지 않으려 발버둥을 쳤지만 그에게 허락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운명의 여신이 그를 저버린 게 분명했다.  그게 아니라면, 한 인간의 삶을 이렇게 처참하게 불구덩이로 처넣진 않았을 테니.  첸이 눈을 뜬 곳은 헴멜 병원이었고, 집으로 돌아가자 품에 안겨 걱정을 끼치려던 엘렌이 사라져 있었다.  흙이 묻은 침대 위에 놓인 쪽지에는,




‘Sbohem.’

   안녕




이라고 적혀있었다.  바닥에 주저앉은 첸은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도무지 헤아릴 수가 없다.  순식간에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울긋불긋한 멍이 든 얼굴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반창고들.  피딱지가 말라붙은 입술이 그를 더 애처롭게 보이게 만들었다.  지옥으로 굴러 떨어진 저가 발을 헛디뎌 다시는 헤어나올 수 없는 심연에 처박힌 것 같다.  아무것도 담겨있지 않았던 입 꼬리가 올라갔다.




“에이, 기다리면 돌아올 거야. 정말 못됐다니까, 이런 장난이나 치고..”




몸을 일으킨 그는 금이 간 갈비뼈를 고정한 붕대를 의식한 채 어정쩡하게 걸었다.  퀴퀴한 냄새가 나, 중얼거리며 창문을 연다.  서늘한 공기가 밀려들어와 불쌍한 이를 감싸 안았지만 그는 서둘러 창가를 벗어났다.  그리고 침대에서 이부자리를 걷어내 화장실로 향했다.  흙을 털어내고 세면대 옆으로 붙어있는 욕조에 집어넣자 워낙 좁아터진 것이 가득 차버렸다.  그 위로 물이 졸졸 흘러내리도록 호스를 고정했다.  양 팔을 벌리고 뒤뚱거리는 뒷모습이 갓 태어난 펭귄 같다.  집안 곳곳에 닿아있는 꽃들.  첸이 불안하게 몸을 흔들며 지나가는 바람에 꽃잎들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부엌 의자를 끌어 가스레인지 앞에 놓고는 올라선다.  너무 높아서 사용할 일이 없던 부엌 선반을 열자 악취가 밀려나왔다.  가장자리에 이빨을 드러낸 채 죽어있는 쥐가 말라 비틀어져 있다.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두리번두리번거린 그는 안에 있는 접시 몇 개를 들추어보더니 의자에서 내려왔다.  식탁 위에 놓여있는 검은 봉지로 흔들리는 시선을 고정한다.  그걸 헤치자 아주 작은 벌레들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파랗게 문드러진 체리 한 줌을 아무렇게나 입안으로 집어넣는다.  기분 나쁜 빛을 띤 과즙이 여러 갈래로 턱에 맺혔다.  이를 딱딱거리면서 입 안에 든 것들을 으깨는 모습이 기괴하다.  흐릿한 눈동자가 다시 움직였다.  손에 묻은 끈적한 즙이 그가 손을 뻗치는 집안 곳곳에 흔적을 남긴다.  바닥, 협탁의 손잡이, 책장에 꽂혀있던 표지 없는 시집, 물이 새 누래진 벽지 그리고 거먕빛 커튼.




“무, 무서워..”




창문 아래 벽에 등을 기댄 첸이 몸을 잔뜩 움츠렸다.  열어둔 창문을 통해 거리의 소음이 들려올 때마다 그의 몸이 크게 떨렸다.  내가 다 망친 거야.  또 아무것도 지키지 못했어.




“아무것도.. 없어, 아무도.. 아무도 없네? 여기, 집.. 엘렌? 엘렌은 어디 갔지?”




연한 갈색 머리카락을 움켜쥐며 무릎에 얼굴을 묻는다.  세게 짓눌린 눈 위의 상처가 벌어져 그 위에 덧대어있던 헝겊이 피로 젖어 들었다.




“첸.”




움찔-거리는 머리카락으로 부드러운 손길이 닿는다. 저음의 목소리가 첸을 쓸었다.




“나타나지 않으려고 했어. 하지만..”




빠르게 뛰는 심장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천천히 고개를 들자, 언제나처럼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아른거린다.  또 꿈인가?  남자는 엉망이 된 얼굴을 손가락 끝으로 쓰다듬었다.  화가 난 것처럼 찌푸려진 미간.




“꼴이 엉망이군.”




역시 화가 났나 봐.  당신을 위해 보란 듯이 행복하게 살고 싶었는데, 그래서 당신을 이 얄궂은 운명에서 자유롭게 해주고 싶었는데.  많이 실망했을 거야.  최악이야.




“네가 걱정돼서 죽어버릴 것 같아.”




걱정?  그렇게 모질게 말했는데 왜 돌아온 거에요?  제발, 날 더 추악한 인간으로 만들지 말아요.  날 사랑하는 당신을 끌어들일 순 없어.  근데.. 너무 슬픈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어서 눈물이 날 것 같아.  그럼 나 혼자가 아니야?




“.. 아직도 돌아올 마음이 없구나.”




돌아갈 곳, 내게 돌아갈 곳이 남아 있어.  이 검은 남자?  나 혼자가 아니야?




“기다릴게, 첸.”




남자의 차가운 손길이 거두어졌다.  생기 잃은 눈동자가 무심하게 돌아선 남자를 쫓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달빛에 등을 돌려 어둠 속에 들어선 얼굴에 섬뜩한 미소가 떠올랐다.  천천히 걸음을 내딛는 찰나의 순간에도 철저히 망가져버린 첸의 속마음이 그의 머릿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살 수 있어.  사랑해.  나 때문에 아픈 사람.  더 상처를 줘선 안돼.  힘들어.  운명은 벗어날 수 없어.  이용해.  외로워서 죽어버릴 거야.  안 돼.  닥쳐.




“가, 가지 마요!”




희열로 번뜩인 눈동자가 순식간에 붉은 색을 띠었다가 되돌아왔다.  올라가 있던 입매에 힘을 준 남자의 검은 구두가 움직임을 그친다.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 그를 올려다보는 첸.  저를 향해 서서히 뻗어지는 두 손을 잿빛 눈동자에 담은 남자는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입을 맞추었다.  제 발로 감옥으로 들어온 꽃이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상처로 얼룩진 입술이 달았다.




“사랑해.”




드디어 연인의 날개를 꺾어버린 남자의 뺨으로 환희의 눈물이 흘렀다.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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