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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첸] 꽃 시리즈 Ⅰ. Statice 3

불멸의 사랑


 
 






작은 조각들로 수놓듯 지어진 높은 성당의 지붕에 누워 있는 검은 인영.  작열하는 태양을 맞서고 있는 얼굴로 그림자가 드리운다.  꽃 향기.




“또 꽃집에 갔다 왔어?”


“알면서 묻지마~ 그보다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




대꾸가 없자 거침없이 배 위에 올라앉아 감겨 있는 눈꺼풀을 손가락으로 들어올리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냐고!’ 소리친다.  누워 있던 남자는 입가에 웃음을 품으면서 몸을 반쯤 일으켰다.  바람에 흩날리는 다갈색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며 묻는다.  무슨 일이 있었는데?




“이름이 생겼어! 나도 인간 아이처럼 이름을 선물 받았다고오!”




말려 올라간 입 꼬리가 그리고 있는 행복을 깨뜨리고 싶지 않아서,




“대단하네.”




대답했지만 만족스럽지가 않았는지 아니면 거짓인 게 티가 났는지 입술을 삐죽거린다.  들고 있던 꽃의 이파리를 만지작거리는 손에서 꽃 한 송이를 빼앗아 귀에 꽂아주었다.  잘 어울려.  장난치지마, 눈을 흘기며 제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투덜거린다.




“내가 인간 흉내를 내는 게 싫은 거지?”


“전혀.”


“바보 같다고 생각하고 있잖아.”




화를 돋울 게 뻔해서 굳이 아니라는 선의의 거짓말을 하지 않고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 생각을 읽을 수가 없는 걸 보니 이미 화가 난 것 같지만.




“방금 전까지 행복했잖아, 갑자기 왜 화가 난 거야?”


“난 인간이 되고 싶어.”


“불가능해.”


“될 수 있어! ‘떠돌이’ 얘기 들었잖아!”




‘떠돌이’라면 얼마 전에 이 곳을 지나갔던 그 동족을 말하는 모양이다.  저희는 보통 거주하는 지역으로 서로를 칭하곤 하는데-예를 들어, 우린 ‘샤르트르에 사는 자들’ 따위로 불리고 있을 것이다- 그는 머무는 곳이 없다고 했다.  세계 곳곳을 떠돌아다닌다는 그를 따라 나서겠다는 연인을 말리느라 혼이 났었다.  떠돌이는 우리에게 신빙성 없는 이야기를 밤새도록 들려주었는데 멍청하게도, 정정하겠다, 순진하게도, 저의 사랑해 마지 않는 연인이 그걸 곧이곧대로 믿고 있다.  빌어먹을 동족은 꼬부라진 턱주가리를 매만지면서 껄껄거렸다.




‘회귀한 자를 만난 적이 있다니까. 그건 허무맹랑한 신화가 아니야, 내 두 눈으로 직접 봤으니까. 어제의 동족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났다고! 물론, 너무 반가운 나머지 잡아먹어 버렸지만 말이야.’




회귀回歸, 인간도 짐승도 아닌 저희 사이에 내려오는 신화의 이름이다.  이것을 설명하자면, 우선 저희에 대해 알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깨어나니 존재했다.  이유는 없다, 아니 모른다고 하는 게 맞겠지.  태초부터 지구상에 서식하는 모든 것을 밟고 설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인간 수명의 수십 배에 달하는 반영생, 뛰어난 회복 능력, 고도로 발달한 신체 기관, 각자가 가진 특별한 능력까지.  하지만, 질서가 없고 지식이 없으며 무엇보다 기원起源이 없다는 것은 개체수가 적은 우리, 동족들에게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존재의 의미를 찾지 못한 대부분이 살인귀가 되거나 인간 흉내를 내며 미쳐버리거나 자살했으니까.  자연스럽게 우리는 도태되었다 . 뿔뿔이 흩어졌고, 스스로가 마지막 일족이라 믿으며 어딘가에서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미 전부 사라져버렸을 수도 있고.  그런 존재들에게 ‘회귀’는 최후의 희망 같은 것이었다.  회귀, 돌아오고 돌아가는 환생의 굴레.  죽음 이후, 같은 이름과 운명으로 다시 태어난다.  하지만 운명의 여신 데르타가 창조주가 버린 저희를 불쌍히 여겨 이생에서 살인하지 않고 간절히 바라면, 빛나는 인간의 운명을 선물한다는 것이다.  이 우스운 이야기를 믿지 않았다, 어차피 쉽게 죽어지지도 않았으니까.  나의 가여운 꽃에게는 유일한 꿈이었지만.  무미건조한 명령이 흘러나왔다.




“멍청한 소리 하지마, 그건 네가 될 수 있다는 말이 아니야. 다시 태어난다면 그건 네가 아니야,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할 테니까.”


“하지만..”


“지금, 자살이라도 해서 인간으로 태어나겠다는 거야?”


“불에 뛰어든다면 죽을 수도 있..”




저를 눈 앞에 두고 유언과 다름 없는 말을 지껄이는 아름다운 꽃의 입술을 사납게 집어삼켰다.  부드러운 입술을 갈급하게 취하며 그가 걸치고 있는 옷을 찢어 내렸다.  한번만 더 날 버리겠다고 말하면 너를 불에 달군 철창에 가둬 버릴 거야.  눈물이 흐르는 뺨에, 가는 목과 어깨에 입을 맞췄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표정으로 낮은 곳의 지붕들을 보고 있다.  석양이 그리는 아름다운 옆모습.  손을 올려 턱을 제 쪽으로 돌렸다.




“날 혼자 두지 않을 거잖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거린다.  입매가 늘어졌지만 여전히 슬픔으로 젖어있는 눈.  남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선물 받은 이름은 뭔데?”




그제야 반달 눈을 하며 제 품에 얼굴을 기댄다.  저는 절대 이를 이길 수 없을 것이다.  꽃 내음이 묻어있는 머리카락이 턱에 닿아 간지러웠다.  웃음기 어린 목소리.  옛 노래처럼 듣기가 좋다.




“내 이름은 첸이야, 고집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zäh에서 발음을 따오셨대.“


“’고집 있는’이라.. 널 잘 알게 되었네, 그 여자.”


“당연하지, 그리닌은 상냥해.”




그리닌이라는 여자는 마을 어귀에 있는 작은 꽃집의 주인이다.  앞에서 재잘거리는 연인이 동경하는 인간 그 자체이자 스승-그의 말을 따르자면-.  악 감정은 없지만 그의 헛된 희망에 불을 지피는 건 그녀일 때가 많아서 가끔 찢어 죽이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긴 하지만, 지금 앞에 있는 이를 이렇게 사랑스럽게 웃게 만드는 걸 보면 좋은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다.




“나한테 엄마라는 게 있었다면 분명 그리닌이었을 거야, 그리고 엘렌이 내 여동생이고..”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서 허리에 손을 얹자 의중을 알아차린 그가 어깨를 살짝 깨물면서,




“첸이라고 불러줘, 그럼 널 더 사랑할게.”




진심으로 그렇게 불러주고 싶지 않았지만, 거부할 수는 없다.




“Comme vous voulez, Chen”

         당신 뜻대로, 첸




조소하듯 한 쪽 입 꼬리를 올린 첸이 다가와 남자의 귀를 천천히 핥았다.  남자는 머리를 뒤로 젖혔다.  태양빛에 잠겨도 서늘하기만 했던 몸이 타오른다.  나의 꽃, 첸을 사랑했다.  깨어난 지 500년이 넘어 삶의 정의를 잊어버리고 호흡에 감사하지 않게 되었어도, 그를 사랑하는 것만은 변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쩌면, 그가 인간과 비슷했기 때문에 더 사랑스러웠을지도 모른다.  첸은 햇살처럼 웃고, 공감할 수 없는 이유로 눈물을 흘렸다, 마치 인간처럼.  유일하게 절 끓어오르게 만드는 이.  그만이 날 웃게 하고, 울게 하고, 화나게 할 수 있었다.  그와 함께면 저절로 살아있는 것처럼 굴었다.  그만이, 나의 첸만이 이 하릴없는 존재의 의미였다.



까치발을 한 채 웃옷 끝을 쥐고 계단을 올라온다.  커다란 종탑 아래 벽에 기대어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남자는 드물게 소리 내어 웃으면서,




“첸, 토마토에게 성장할 시간을 주는 게 어때?”


“나도 알아.”




머쓱한지 옷에 한 가득 담겨있는 조그만 토마토들을 내려다보며 새침하게 대답한다 . 초록색인 것들이 잔뜩 섞여있다.  아마 밭 주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덜 익은 것들로 따왔겠지만 양이 상당했다.  이 동네 토마토 씨가 마르겠군.




“꼭 토마토를 곁들여야 해?”


“하지만, 고기 먹을 때 토마토를 같이 먹으면.. 조금..”


“조금.”


“더 맛있단 말이야아.”


“후.. 이리와.”




남자가 앞으로 발을 내디뎌 연인의 팔을 잡아당겼다.  이마와 콧잔등에 연거푸 입을 맞추며 키들거린다.  첸이 어정쩡하게 옷을 쥔 채 고개를 저으면서 ‘토마토는 건들지 마!’ 소리쳤지만 소용이 없다.  널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




“피곤한 하루였어.”




그리닌의 집 뒤에 있는 텃밭에 하루 종일 꽃을 심었다.  존귀한 생명을 품은 작은 씨앗을 갖고 싶어서 주머니에 한 줌 숨겼다가 들켜서 꿀밤을 맞았다.  그녀는 인간 여자치고는 제법 손이 맵다.  만약 씨앗들을 성당 지붕 틈바귀에 심으면 꽃이 필까?  포크 끝으로 바닥을 긁으며 미소 짓고 있는 첸을 힐끗 쳐다본 남자는 미간을 좁힌다.  슬슬 인내심에 바닥이 나고 있다.




“’피곤한’이라는 게 어떤 건데?”




남자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음.. 얼른 네 팔을 베고 누워 밤하늘의 별을 보고 싶은 거?”


“아. 그렇다면, 나도 피곤해.”




무심한 목소리로 달콤한 말을 내뱉는다.  첸의 눈매가 휘어졌다.  정말 아무것도 숨기지 못한다니까.  제 앞에 있는 동족同族의 연인은 감정이란 것을 숨기는 법을 모른다.  숨길 필요도 없겠지만.  저를 향한 깊은 애정을, 그리고 인간의 삶을 동경하는 연인에 대한 경멸 또한 숨기지 못 한다.  하지만, 저는 다르다.  인간의 삶에 섞여 살면서 ‘비밀’이라는 것을 배웠다.  그에게 비밀을 만들어 버렸다.  ‘피곤한’이 사실은 지치고 고달프다는 뜻이고, 그건 ‘인간이 아닌 삶’에 대해 말한 것이라는 비밀.  동족들이 마구 짓밟고 조롱하는 인간은 특별한 존재들이다.  그들은 찰나의 인생 속에서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자들.  영생을 누리면 뭐하리, 그저 무의미한 세월을 견뎌야 할 뿐인데.  핏기 어린 생고기가 담긴 접시를 그에게 밀었다.  고기가 썰리는 느낌을 좋아하지 않는다.  괜한 죄책감이 밀려온다.  인간 고기도 아닌데 말이다.




“오늘 스타티스라는 꽃을 심었어, 내가 제일 좋아하는 꽃이야.”




나이프로 고기를 썰어 옆으로 치우곤 개 중 가장 붉은 토마토를 집어 얇게 썰고 있다.  듣고 있는 거야? 묻자, 어깨를 으쓱거린다.  좋아하는 이유가 뭐냐고 물어주길 바라는 첸을 놀리려 일부러 남자는 입을 다물고 있다.  입술이 삐죽-




“내 생각 읽은 거 다 알아아. 너 지금 웃고 있거든?”


“우리 피곤할까?”


“싫어, 배고파.”




남자는 웃으면서 오늘은 새벽까지 사랑스러운 연인을 괴롭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인간 생활에 정신이 팔려 저는 뒷전인 그에게 달콤한 벌을 내려야 한다.  저음의 목소리가 달래 듯 부드럽게 그들 사이에 놓였다.  왜 그 꽃을 좋아하는데?




“.. 꽃에 담긴 의미가 마음에 들어.”


“뭔데?”


“불멸, 영원히 죽지 않는 사랑.”


“우리에게 어울리는 꽃이네.”




토마토가 얹어진 고기를 앞으로 내밀면서 그가 말했다.  우리에게 어울리는 꽃이라.




“응, 영원히..”




또 비밀을 만들었다.




“사랑해.”




나는 더 이상 이렇게 살아갈 자신이 없어.  미안해.






 
 

데르타 여신이 제게서 첸을 앗아간 것은 연일 계속된 폭우 끝에 하천이 넘친 날들 중 하루였다.  그리고 그리닌의 꽃집에 물이 들어찼다며 울상을 해서는 나간 그가 돌아오지 않은 지 이틀째 되던 날이었고.  어둠 속에 내팽개쳐지는 천둥번개 속에 검은 남자는 가벼운 몸짓으로 지붕을 밟고 섰다.  속눈썹 끝으로 빗방울이 맺힌다.  무심한 눈길로 캄캄하게 물든 마을을 살피고 있다.  꽃집은 어디지?  첸, 나를 불러봐.  어서.  남자는 눈을 감았다.  한참을 서 있던 그가 순식간에 허공으로 발을 디디고는 사라져 버린다.  새까만 하늘에 수 놓인 잿빛 구름이 불온하게 움직였다.  본능적으로 이끌리는 곳으로 걸음 하다 보니 멀리에 꽃이 그려진 나무 팻말이 보였다.  Grinin’s Flower.  비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팻말의 밧줄 한쪽이 형편없이 갈라져 있다.  마을 한 구석에, 지붕이 둥근 집.  여기가 첸이 인간인 척 일을 돕고 있던, 그가 사랑하는 인간들이 사는, 그가 있는 곳이다.  부서진 문을 밀고 들어가자 진흙탕이 되어버린 바닥에 빛 바랜 꽃들의 시체가 널려 있다.  검은 구둣발이 그것들을 짓밟으며 계단으로 향한다.  깨진 유리창으로 거세게 비바람이 들이쳐 넝마가 된 커튼이 을씨년스럽게 휘날렸다.  그리고,




“정말 넌 어쩔 수가 없구나.”




벽에 기대 있는 다갈색 머리카락을 쓰다듬자 감겨 있던 눈꺼풀이 느리게 눈동자를 내놓는다.  생기 잃은 눈동자가 저를 올려보다가 누군가를 찾는 것처럼 옆으로 움직였다.




“그, 그리.. 크윽..!”




첸이 기침을 하며 피를 토한다.  잔뜩 짓이겨진 복부에서 내장이 흘러나와 있다.  남자는 고개를 돌렸다.  맞은 편 바닥에 쓰러져 있는 중년 여성과 어린 소녀.  이들이 그리닌과 그녀의 딸, 엘렌이겠지.  서로의 조각난 몸을 끌어안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들에게서 이미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불행히도, 하필 첸의 ‘인간 가족’이 동족의 식사거리가 되어버린 것이다.  먹이사슬의 최정점에 있는 저희에게 인간은 별미 같은 것이었다-인간적으로 설명하자면, 고래 고기 같은 것인가-. 첸과 함께 지내게 된 뒤로 저는 맛볼 수 없게 되었지만.




“식사를 방해해선 안돼.”


“.. 그렇.. 게.. 말하지 마! 흑.. 그 놈들이.. 우리를..”




한눈에 봐도 심한 상처를 입은 걸 보니 그들의 식사를 방해하려다 호되게 당한 게 분명했다.  한 명이었다면 모르겠지만 여러 명이었다고 하니 죽지 않은 게 다행일 수도.  간발로 일어나지 않은 끔찍한 일에 대한 상상 때문에 머리에서 열이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첸이 내 곁에서 사라질 뻔 했다.  이건 예삿일이 아니다.  저까짓 인간들 때문에.  남자의 눈동자가 붉은 빛을 띠며 어둠 속에 일렁거렸다.




“첸..”


“.. 말.. 하지.. 마.. 흐윽..”


“이들은 신의 품으로 돌아갔을 뿐이야.”


“나, 나 때문.. 이야. 윽..”




남자는 인상을 찌푸리며 그 곁에 한쪽 무릎을 꿇어 다가 앉았다.  눈물을 훔치는 손길에 화가 묻어났다.  강압적인 목소리가,




“그만해.”




속삭인다.  그들을 위해 우는 것도, 멍청한 인간 흉내도 모두 그만 둬.  언제나처럼 고집스럽다.  눈물을 그치기는커녕 상처가 회복되기 시작했는지 첸이 고통스럽게 울부짖었다.  비통에 젖은 비명소리가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상처를 입는 것보다 장기가 재생되고 빠르게 상처가 아무는 과정이 더 고통스럽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남자는 바닥에 널브러진 첸의 장기를 잡아 무자비하게 뜯어 버렸다.




“아악! 나, 날.. 으.. 죽여줘!”




쉿, 그를 진정시키려는 듯 턱을 잡아 피가 말라붙은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춘다.  피 냄새.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머릿속으로 비명이 밀려 들어온다.  아름다운 목소리.  죽여, 어서 날 죽여!




“듣기 싫어, 첸.”




주변 바닥을 살피던 중 흙 묻은 가위가 눈에 띄었다.  불은?  가위를 집어 차갑게 식은 난롯가로 향한 남자는 숨이 겨우 붙어있는 불씨에 들고 있던 것을 쑤셔 넣었다.  여전히 첸은 복부를 움켜쥔 채 숨을 헐떡이고 있다.  날 죽여줘, 그럼 널 더 사랑할게.  제 화를 돋우려는 게 확실하다.  일부러 그런다는 걸 알면서도 그를 바라보는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고작 2년이라는 시간을 함께 보낸 인간들 때문에 저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제멋대로 굴고 있는 연인을 용서할 수 없다.  숯덩이 사이로 뻗쳐 나온 가위의 손잡이를 낚아챘다.  불에 달궈진 날카로운 쇠가 김을 내뱉는다.




“오늘을 기억해, 내가 널 사랑하지 않은 유일한 날이니까.”


“으읏.. 으아악!”




살이 타는 역겨운 냄새와 꽃 향기가 뒤섞여 기분이 아주 더러워졌다.  첸의 손바닥을 파고든 칼날이 기이한 소리를 내며 피를 내뿜는다.  남자는 가위 끝을 발로 지긋이 밟았다.  금 간 나무 바닥에 칼날로 묶여버린 손 끝이 파르르 떨린다.  원망으로 물든 눈으로 저를 올려다보던 첸이 몸을 크게 떨더니 기절해버렸다.  하마터면 분노로 이성을 잃을 뻔 했다.  심장을 찔렀다면 그는 즉사했을 것이다.  불은 견디기 힘들다.  불에 의한 상처는 훨씬 고통스러울뿐더러 잘 회복되지 않으므로.  자살하는 동족들이 거의 분신이라는 길을 택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남자는 셔츠를 벗어 가여운 연인의 몸을 감쌌다.  무표정이지만 어느새 회백색으로 돌아온 눈동자가 슬픔에 잠겨 있다.  여전히 잘게 떨리고 있는 손에서 가위를 뽑아내자 손가락이 바짝 경직하면서 새하얗게 변했다.  이 상처는 흉터로 남겠지.  첸의 몸에 유일하게 새겨질 자국이라고 생각하니, 저라는 낙인을 찍은 것 같아 조금 용서가 되었다.  내 곁에 있어야 해, 영원히.  바닥에 쓰러져있는 그를 천천히 끌어안은 남자는 몸을 일으켜 그 곳을 벗어났다.  무거운 천둥 소리가 그들의 뒤를 따른다.  성당 종탑 안 쪽.  두꺼운 천 위에 첸을 누였다.




“놀이는 끝났어.”




고통으로 일그러진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고는 약해지는 빗줄기 사이로 돌아선다.  남자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남겨진 이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눈물은 달빛처럼 차가웠다.






황홀한 미식에 취한 채 어두운 골목길을 걷고 있는 세 남녀.  그들에게서 비릿한 피 냄새가 풍긴다.  비가 퍼붓던 식사 장소를 빠르게 벗어났지만 하늘이 갠지 오래지 않은 이 마을도 흠뻑 젖어 있다.  한 남자가 다리를 절뚝거리면서 가래가 들끓는 목소리로 신경질을 부렸다.




“근데 그 미친 놈은 뭐람? 발목이 날아가는 바람에 신발을 잃어버렸잖아, 제길.”


“인간을 싸고 돌길래 동족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하하, 그래서 방심했다고 말하고 싶은 거지?”


“쳇.. 보통은 아니었어, 우리 셋을 상대로 꽤나 오래 버텼잖아!”


“설마 ‘샤르트르의 주인’은 아니겠지?”




‘샤르트르의 주인’이란 말에 셋 사이에 잠시 불길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인간이건 동족이건 가리지 않고 살육한다는 그 자 때문에 이 일대에 서식하는 동족이 없다는 소문이 있다.  400년 전 일어났던 이름 없는 동란同亂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자.  그를 왕처럼 섬기는 자들도 있다.  갑자기 자취를 감추었지만 오랜 시간이 흘렀어도 깨어난 지 얼마 안 된 애송이들 사이에서 아직도 전설로 여겨지고 있었다.  이들도 그 애송이에 포함되는 자들이다.




“웃기지마, 그 미치광이였다면 지금 우리가 살아있겠어?”


“여길 지나는 김에 만나고 가는 건 어때? 왠지 엄청 섹시할 것 같아, 하아.”




푸른 빛이 도는 긴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내리며 여자가 코웃음을 쳤다.




“아무래도 찜찜해, 죽여버릴 걸 그랬나?”




아니.  어둠 속에서 낯선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어리둥절해있는 그들 앞으로 검은 구두가 멈춰 선다.  저희에게 기척을 숨기고 다가올 상대는 흔치 않다.  인간이 아니다.




“누, 누구야?”




단숨에 꺾인 목이 이끼가 끼여있는 벽으로 밀렸다.  푸른 색 머리카락이 치렁치렁 매달린 머리가 으깨져 겹겹이 칠이 벗겨진 시멘트 벽에 검붉은 피칠갑을 했다.  흘러 내리는 핏줄기를 보면서, 나머지 둘은 서둘러 등을 붙이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마찰에 튕겨 나온 여자의 둥근 눈알 한쪽이 바닥을 구른다.  암흑에서 뻗어 나온 다리가 그걸 밟고 섰다.  비에 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새빨간 눈동자가 그들을 내려본다.




“첸이 그러더군요, 밤은 인간들이 자는 시간이라 조용히 해야 한다고.”


“Merde!”


“쉿.”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저 눈 앞에 있던 남자가 사라졌다는 걸 알아챈 순간,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진 자가 비틀거리면서 뒤로 돌았다.  아직 떨어져나간 발이 재생되지 않아 몸이 크게 흔들렸다.




“으, 으아아.. 사, 사, 살려줘! 어억!”




제 일행의 입에 박혀있는 남자의 손.  그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천천히 팔을 벌린다.  투두둑- 섬뜩한 소리가 귀를 간질이는 동시에 눈 앞에서 처절하게 입이 찢어지는 모습이 대조적인 감각을 괴롭혔다.  반쪽으로 나뉜 동족의 머리통이 피를 흩뿌리며 골목에 나뒹구는 양철통으로 처박혔다.  머리를 잃은 몸통이 서서히 무릎을 꿇고는 찰랑이는 빗물에 잠겨 든다.  홀로 남은 이는 깨어나서 처음으로 두려움이라는 감각을 가르치고 있는 자로부터 도망치려 애썼다.  하지만 힘이 풀린 다리로 할 수 있는 건 고작 꿈틀거리는 동족들의 반半시신 사이로 엉덩방아를 찧은 것뿐이다.  목숨 부지하기를 포기한 절름발이는 발 앞으로 다가선 남자를 노려보았다.  덜덜거리는 입술 새로 침이 흘러내리고 있다.




“샤르트르의 주인.. 재수도 없지, 당신을 만날 줄이야. 하하하.. 이유도 없이 개죽음을 당.. 하..”




걸걸한 목소리가 듣기 싫어 남자는 그에게 유언을 허락할 마음을 거뒀다.  흰 손이 가슴팍을 꿰뚫었다.  둔탁한 파열음.  당신들을 죽이는 이유?  오늘은 이유가 있습니다.  오랜만에 화가 났거든요, 사랑하는 연인에게 말이에요.  그런데,




“첸을 죽일 수는 없잖아.”




손바닥에 올려진 심장이 마지막으로 크게 박동했다.  남자는 그것에 무자비하게 손톱을 박아 넣고는 파쇄해버렸다.  곧, 잔인한 살육의 흔적만이 남은 이 곳에 기름 냄새가 퍼지기 시작한다.  벽을 밟고 선 남자는 성냥개비를 손 끝에 얹은 채 흘러가는 먹구름을 바라본다.  불길이 내지르는 비명은 소리가 없다.  그래서, 장례葬禮는 평온했다.  그게 위로가 되었다.






구름이 닿아있는 성당 지붕 끝, 무릎을 끌어안은 채 앉아있는 첸의 어깨로 모포가 내려 앉는다.  별빛이 지는 곳은 너의 눈동자.  물기를 머금은 다갈색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손에 쥐어 입술을 내렸다.  기분이 어떤지 묻는 목소리가 방금 처참히 동족들을 파멸시킨 이와 같은 남자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다정하다.  그 곁에 앉았지만 저를 봐주지 않는 첸.  폐허 같은 마을을 내려다보는데 평소와 달리 눈물을 흘리지 않고 있다.  더 이상 슬프지 않은 건가?  아니면, 화가 난 걸까?  그가 허락하지 않아서 생각이 읽히지 않는다.  상심했을 나의 꽃을 달래줘야 해.  남자가 조그만 손을 끌어당긴다.  손바닥에 울퉁불퉁한 흉터가 느껴졌다.




“이게 뭔데?”




첸의 손바닥으로 올려진 작은 주머니.




“갖고 싶다고 했잖아.”




그걸 살짝 끌러본 연인이 드디어 웃었다.  스타티스 씨앗.  정말 늘 내 마음을 읽고 있었구나.




“네 탓이 아니야, 어차피 인간은 죽잖아.”


“응.. 그래도.. 언젠간 용서를 구할 수 있겠지..”




데르타 여신이 날 구원해서 다음 생은 인간으로 태어날 수 있다면, 피지도 못한 채 시들어버린 엘렌을 위해 살고 싶어.  그리고 꽃집 주인이 될 수도 있겠지.  소중한 시간과 짧은 숨에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거야.  부모에게는 ‘착한 아이’, 마을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으로.  나와 똑같이 생긴 아기를 가질 수도 있을 거야.  그게 커가는 걸 지켜보면서 경이로움에 취한 표정이 내 얼굴에도 그려지겠지, 엘렌을 바라보던 그리닌처럼.  그래, 늘 차갑게 식어있는 몸이 따뜻하다는 건 얼마나 행복한 느낌일까?  하지만.. 행복에는 희생이 따르지.  이 곳에 영원히 버려질 나의 사랑.  모든 걸 잊는다 해도,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은 변하지 않을 거야.




“.. 내가 회귀해서.. 나중에, 아주 나중에 말이야..”




제 눈치를 살피며 씨앗 주머니를 만지작거린다.  남자는 앞으로 그의 인간 흉내는 두고 볼 생각이 없기에 마지막 아량을 베풀기로 했다.  날 무서워하지마.  온기를 품은 침묵에 안심하며 어깨에 머리를 기대온다.




“인간으로 네 앞에 나타나면 어떡할 거야?”




남자가 웃는다.  고개를 살짝 틀어 귓가에 속살거렸다.




“몰라서 물어?”


“죽일 거야?”


“아니.”




의외의 대답이었는지 첸이 몸을 일으켜 놀란 눈으로 저를 마주본다.  보드라운 뺨을 쓸자 품 안으로 머리카락을 비비며 안겨 든다.  둥글게 말린 등을 팔 안에 가두었다.




“그게 진짜 너라면, 날 사랑해달라고 애원할거야.”




그게 진짜 너라면 말이야.




“거짓말, 아무리 나라도.. 네가 싫어하는 인간인데?”


“어쩔 수 없잖아.”


“.. 정말 날 사랑하는구나..”




새삼스럽게.  콧잔등을 살짝 깨물었다.  훌쩍거리기 시작한 그의 등을 살살 토닥거렸다.  너른 품 안에서 의식을 닫은 채, 첸은 흔들렸다.  그를 사랑한다.  영원한 내 마음의 주인.  하지만,




“’피곤한’ 하루였어.”




작게 중얼거린 첸이 팔을 들어 주인의 목을 끌어 안았다.  그리고는 입매 끝에 입을 맞추었다.




“사랑해.”




찢긴 흉터가 선명한 손바닥에 뺨을 비비적거리며 사랑해달라고 보채는 연인을 위해 꽃은 눈물을 흘렸다.  처연한 달빛이 이들을 비춘다.  그 빛은 상처 입은 꽃이 시드는 것을 방해하려는 것처럼 오래도록 지지 않았다.






햇살에 반짝이는 머리카락.  푸르른 하늘을 배경으로 웃고 있는 얼굴을 좋아한다.  거대한 십자가 아래 종탑 그늘에 앉아 허둥지둥 움직이는 첸을 보면서 남자는 미소를 짓는다.  흙손으로 성당 지붕 틈바귀를 파헤치고 있다.  꽃씨에 숨을 불어넣듯 입을 맞추고는,




“예쁘게 피어나라.”




이젠 창조신 흉내를 내려나 보다.  날 구하고 있으니 이미 신이나 다름 없는 존재인데 말이다.




“이봐요, 게으름 씨. 좀 도와줄래요?”


“’게으름’?”


“살찐 돼지 같은 걸 말하는 거야.”




푸하하, 크게 웃으며 몸을 일으킨 그는 빠르게 다가가 첸의 허리를 안아 올렸다.  태양의 보살핌 아래 둘은 쉴 새 없이 꽃씨 위를 나뒹굴었다.  첸, 이런 게 네가 말하는 ‘행복한 시간’이라는 걸까?  왠지, 나도 알 것 같아.



섬광을 품은 붉은 눈동자가 십자가를 밟고 서 있다.  토마토를 따오겠다고 나선 연인이 심야가 되어도 돌아오지 않고 있다.  평소 같으면 이렇게 초조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를 열렬히 원하는 마음은 절대 식을 일이 없어 첸의 머릿속을 살피는 것이 일상이었으니까.  하지만, 오늘은 다르다.  그가 심중을 닫아 아무것도 들을 수가 없다.  철저히 거부 당하고 있다.  제발.  남자가 입술을 깨물었다.  생전 느껴볼 일이 없었던 공포恐怖라는 것이 그를 덮쳤다.  혼란에 빠진 눈동자가 기괴하게 움직이며 마을을 살핀다.  흰 피부에 솟아오른 힘줄이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꿈틀거렸다.



재의 티끌이 눈보라처럼 나부끼는 곳.  나뭇잎 사이로 울리는 맑은 휘파람 소리.  높은 나무의 가지에 걸터앉아 있는 존재.  허공에 매달린 다리가 살랑거리고 있다.  사슴 같은 눈을 덮은 긴 속눈썹.




“따뜻한 무덤이네.”




달빛이 축복을 내리고 있다.  아름답게 빛나는 용암을 보고 있노라니, 저를 애타게 찾고 있을 연인의 눈동자가 떠오른다.  흐린 하늘 같은 색깔이 화가 나면 저렇게 불타오르는 것처럼 뜨겁게 변한다.  첸의 입 꼬리가 올라간다.  보고 싶어.  언제나 나를 직시했던 당신의 마음 때문에 ‘행복한 시간’이었어.  내가 당신을 저버린 걸 알면 아름다운 눈동자가 또 핏빛으로 물들겠지.  첸은 다시 살인귀로 되돌아갈지도 모르는 그를 염려했다.  무고한 인간들이 저 대신 그 화를 입어서는 안 된다.  아니면 남자는 자살을 할지도 모른다, 유일한 삶의 의미를 잃었으니.  이미 수많은 자의 피를 뒤집어 쓴 그가 회귀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저 때문에 그가 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리는 것도 용납하기 싫은 것이다.  어떻게 하면 당신을 내 뜻대로 묶어둘 수 있을까?  첸이 몸을 일으키고는 나무 아래로 발을 디딘다.  열기를 품은 대지가 얼음장 같은 이질적인 존재를 반긴다.  

 
 

그는 가벼운 몸짓으로 단숨에 흘러내리는 용암 줄기를 피해 더 위쪽으로 올라갔다.  에트나 화산 꼭대기에 선 인영.  튀어 오르는 불빛이 닿은 옷깃이 녹아 내린다.  가만히 불구덩이를 내려다보는 이의 하얀 뺨으로 눈물이 흘러내린다.


듣고 있어?  가엾은 나의 사랑, 날 절대 용서하지 마.  어쩌면 당신을 너무 아프게 해서 난 회귀할 수 없을지도 몰라.  죽음 앞에 서니 후회만 밀려오네.  붉은 눈동자를 처음 마주했을 때, 살려달라고 애원하지 말 걸 그랬어.  그럼 사랑하기 전에 죽을 수 있었을 텐데, 이렇게 괴로울 일도 없었겠지.  이기적이지만.. 다시 만나고 싶어.  죽이기 위해서라도 좋으니까 날 찾으러 와줄래?  너의 여생餘生도 나만을 위해 살아줘.  사랑해.




“J'attendrai ton, Adieu.”

     기다릴게, 안녕.




귓가에 속삭이는 것처럼 머리에 울리는 목소리.  이젠 아무것도 들리지가 않는다.  공기처럼 늘 저를 감싸 안고 있던 숨 소리도 들리지가 않는다.  남자는 미동하지 않았다.  잿빛 눈동자로 무의미해진 세상을 내려다볼 뿐이다.  지독한 배신.




“남은 생도 너만을 위해.. 너만.. 사랑해..”




동이 틀 때까지 그는 계속 같은 말을 반복해 중얼거렸다.  형체 없는 통증을 지우기 위해 십자가 기둥을 긁었다.  세게 긁힌 손톱이 떨어져 나가고 손가락 끝이 쓸려 피부가 갈리는데도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다.  남자는 첸과의 보금자리였던 종탑 안 쪽으로 내려왔다.  꽃을 심는 데 쓰였던 괭이가 눈에 들어오자 자연스럽게 머릿속으로 그걸 든 채 해맑게 웃고 있던 얼굴이 떠올랐다.  이젠 두 번 다시 들을 수 없는 목소리가 그를 채찍질한다.  날 절대 용서하지 마.  다시 만나고 싶어.  날 찾으러 와줄래?  나만, 나만을 위해.  나만 사랑해.  다시.  나만.  사랑해.  기다릴..




“으아아악! 닥쳐!”




서서히 핏빛으로 물드는 눈동자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날카로운 쇠붙이를 집은 남자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제 심장을 향해 겨누었다.  질척거리는 파열음이 종탑을 맴돈다.




“하..”




눈물로 젖은 얼굴에 미소가 피어 올랐다.  대단해, 첸.  심장이 찢겼는데도 네가 선사한 고통에 비하면 간지러우니 말이야.  온몸을 적신 차가운 피가 성당 지붕 틈으로 흘러 든다.  숨어있던 씨앗들이 양분을 게걸스럽게 삼킨다.  

 
 

죽음으로 시작된 불멸의 사랑이 찬란하게 피었을 때, 그 곳에 남자는 없었다.






- 217년 후 -


이번 도시는 조용하군.  어제까지 머물렀던 곳은 하필 축제 기간이어서 밤낮없이 소란스러웠던 것을 상기하며 검은 셔츠의 남자는 미간을 좁혔다.




“식사는 어떻게 하시겠어요?”


“룸으로.”




필요 없습니다.  대리석이 깔려있는 로비에 서 있던 남자는 따라 나서려는 호텔 직원을 저지한다.  홀로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은 그는 금빛으로 치장된 거울 속의 자신을 마주하고는 픽- 웃어버렸다.  말끔한 정장 차림에 몸에 베어버린 인간적인 말투와 몸짓.  첸이 봤다면 배를 쥐고 깔깔거렸을 거다.  인간을 경멸하는 저가 이렇게 훌륭하게 그들에게 섞여 살아가고 있으니.  그러니 어서 내 앞에 나타나 기뻐해줘.  인간이든, 동족이든 뭐라도 상관없으니까.  그저 ‘피곤한’ 나를 안아주고 입을 맞춰줘.  그리고 보고 싶었다고 말해준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  남자는 배신당한 이후, 연인의 유언에 충직하게 따르는 중이었다.  대륙에서 대륙으로, 나라에서 나라로, 도시에서 도시로 한시도 쉬지 않고 그를 찾아 헤맨다.  그가 회귀했는지도, 생사조차 알 수 없지만 어쩔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정처 없이 흘러가다 보면 언젠간 만날 수 있겠지.  그게 지금 저가 믿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창가에 기대어 비 내리는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는 남자.  곁에는 식어버린 스테이크와 반쯤 비워진 와인 잔이 있다.




‘.. 프리지아.. 비가 오잖아.. 히잉..’




쨍그랑-  갑자기 울린 이명에 놀란 남자의 손이 식사가 와인 잔을 밀쳐 버렸다.  이럴 수가.  존재하는 것을 잊었던 심장 박동 소리와 그리웠던 목소리가 합주를 시작한다.  셔츠의 가슴팍을 움켜쥐었다.  200년 동안 호흡을 멈추고 있었던 것처럼 밀려들어오는 공기를 기꺼이 집어 삼켰다.  되돌아온 운명의 굴레.  환희로 물든 남자의 머릿속으로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름칠이라도 해야겠네.’




정말 너라면, 첸이라면.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 어둠에 몸을 숨겼다.  남자는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꽃집 안을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늘 제 숨결이 닿아있던 다갈색 머리카락과 긴 속눈썹, 끝이 말린 입술.  호흡하고, 말하고, 움직이는 것을 눈에 담는 표정은 형용할 수 없이 애틋한 것이다.




‘딸기 먹고 싶다. 한 명만 더 와라, 제발.’




드디어 찾았다.  나의 꽃.  가게로 들어선 남자는 그토록 찾아 헤맨 이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어내서 덩달아 움찔-해버렸다.




‘와, 잘 생겼다.’




다물려 있는 입술.  머리로 명확히 전해지는 엉뚱한 생각에 웃고 싶었는데 남자는 그러질 못 했다.  제 기능을 하는지 의심스러웠던 심장이 난폭하게 요동쳤다.  약 200년 만에 피부로 와 닿는 숨이 이리도 달콤할 줄이야.  사랑스러운 건 그대로야.  하지만, 곧 난관에 부딪혔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어쩌면 ‘첸’이라고 여길 수 없는 인간을 눈 앞에 두고 그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갈피를 잡지 못 했다.  우선, 꽃집이니까 꽃을 주문해야겠지.  남자는 천진난만하게 저를 보고 있는 꽃집 주인을 내려다 보았다.  붉은 기가 도는 눈 밑을 보니 지난 날이 떠올랐다.  예전처럼 그에게 아무렇게나 지껄여도 되는지 잠시 고민해버렸기 때문에 되살아난 기억일 것이다.  시장에 간다는 ‘첸’을 따라나선 날이 있었다.  돼지 고기를 사면서 그 주인에게 잔돈은 됐다, 라고 말했다가 하루 종일 잔소리를 들은 날.  시장 한복판에서 ‘정중하게 말해!’라며 얼마나 크게 소리를 질러댔는지 주변에 있는 인간들이 다 우리를 쳐다봤다.  모조리 죽여버리고 싶었지만 그럼 또 화가 난 연인이 어디론가 숨어서 애간장을 녹여버릴 테니 그럴 수가 없었다.  그래, 인간한테는 정중하게.  네가 좋아하던 스타티스, 불멸의 사랑을 줘.




 
 

“.. 스타티스 있나요?”




갑자기 울상이 되어버려서 가슴이 철렁했다.  내가 뭘 잘못 말한 것인가?




“지금은 말린 것밖에 없는데..”




사려던 걸 잊은 것 때문에 속상해하고 있다.  두 손으로 제 머리를 감싸 쥐고는 스스로를 나무란다.  지극히 사소한 일로 울고 웃는 게 여전하다.




‘으아.. 이 바보. 스타티스를 까먹다니! 힝, 내 딸기.’




남자가 소리 없이 웃었다.




“상관 없어요.”


“네?”




되묻는 얼굴을 쓰다듬고 입을 맞추고 싶다.  손을 대기만 해도 부서져버릴 것 같아.  너무 미약해서 온전히 안을 수는 없을 거야.  아아, 어떻게 하면 이 인간이 날 사랑해줄까?  아름다운 꽃들이 조금씩 묶여 있는 걸 따는 뒷모습을 보면서 그는 고개를 숙여버렸다.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건 그에겐 익숙하지 않은 감각이다.  애써 시선을 옮겼다.  온기가 가득 내려앉은 꽃집.  다정한 색깔들로 칠해진 벽과 헝겊 주머니 가득 담겨있는 생명의 씨앗들.  그리고 작은 나무 조각들로 만들어진 액자 속 환히 웃는 남자와 그 곁을 차지한 여자.  남자는 손톱이 손바닥에 파고들 정도로 세게 주먹을 쥐었다.  대단해, ‘첸’.  네가 원하던 걸 모두 가졌구나.  빛나는 인간의 삶뿐만 아니라 나의 여생까지도.  눈 앞에 아른거리는 다갈색 머리카락을 눈동자에 새기며 남자는 저에게 어울리는 흉악한 마음을 품었다.  너를 훔쳐야겠어.  가둬놓고 날 사랑해달라고 애원할거야.  도망치지 못하게 팔다리를 자르면 죽으려나?  하찮은 인간의 몸이니, 철근으로 몸을 꿰뚫어 묶어도 죽어버릴까?  그러면, 곁에 있어도 웃는 모습은 영영 볼 수 없겠지.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따사롭게 웃어주지 않을 거야.  인간이어도, 내 곁에서 빛을 잃겠지.




“따로 포장해드릴까요? 양이 많아서 시간이 조금 걸리지만요.”


“제일 오래 걸리는 것으로.”


“아아.. 네, 여기 앉아서 기다리실래요?”




‘제일 오래 걸리는 거라니, 리본이라도 두 번 묶어줘야겠네. 800코룬 받을 거야!’




‘첸’은 감추는 데에 능해서 생각이 이렇게 명확하게 들리진 않았다.  티없이 맑은 목소리.  그가 앞으로 저한테 아무것도 숨길 수가 없다는 사실에 기쁨이 밀려온다.  살짝 웃자,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올려다본다.




“실례.”




첸은 작은 손으로 꼼지락꼼지락- 리본으로 꽃을 묶어낸다.  남자는 저 리본이라면 저이를 묶어도 다치진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하다가,




“처음 뵙는데.. 이사 오셨어요?”


“네.”


“전 어렸을 때부터 여기 살았는데에, 도움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오세요!”


“네.”


“아.. 식사는 하셨어요?”


“아니요.”


“이, 이 꽃에는 이 리본이 괜찮겠죠?”




난감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묻는 첸에게 남자는 글쎄요, 답했다.  작은 손이 움직일 때마다 손바닥을 가로지른 긴 흉터가 보인다.  낙인烙印.  그것이 남자를 환락으로 이끌고 있다.  그는 제 안에서 끓어오르는 애통을 억누르려 애썼다.  마주한 눈동자가 품고 있는 색만으로도 위안을 받은 남자는 내밀어진 꽃을 받아 들었다.  스친 손에 화상을 입은 듯한 착각이 일어 손가락이 굳는다.




“선물하실 거죠? 이건 특별한 분에게 주세요, 좋아하실 거에요.”




제게 특별한 사람은 단 한 명뿐이다.  좋아할까요? 되묻자,




“물론이죠!”




달빛을 그린 눈과 오롯이 저만을 위한 해사한 미소.  한시라도 잊을까 두려워 되새기고 되새겼던 나의 첸.  남자는 균열하는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 간신히 이성을 붙들고 있었다.  그를 훔치려던 이상이 이루어지면 이 웃음을 다시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 몸부림쳤다.  지금 이대로가 너의 행복이라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또 봐요, 첸.”




 빛나는 삶을 살아줘, 제발.  그녀가 아닌 내 곁에서.  내가 너의 주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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