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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첸] 꽃 시리즈 Ⅰ. Statice 2

불멸의 사랑


 
 






점심 식사를 망친 이후, 남자는 한 동안 코빼기도 보여주지 않았다.  덕분에 첸은 홀로 혼란 속에 남겨졌다.  괴로운 시간이었다.  언제나처럼 평화로운 거리와 따뜻한 빛을 품은 꽃들, 그리고 모정을 가진 태양.  변한 건 아무것도 없다, 그 이상한 손님을 볼 수 없다는 것 말고는.  유리 조각 소리가 울리면, 꽃집 바닥을 디딘 것이 검은 구두가 아니라는 사실에 실망했다.  남자가 궁금하다.  왜 그런 눈으로 저를 보는지, 그래서 저를 이리도 외롭게 만들어 버리는지 궁금하다.  멍한 표정으로 유리창을 닦는 손길에 힘이 없다.  쥐고 있던 헝겊을 떨어뜨린 것도 모른 채 손바닥으로 유리창을 쓸다가,




“나.. 미쳤나 봐.”




왜 자꾸 그 사람이 떠오르는 거야?  그 날, 내가 무슨 실수를 했길래 그렇게 화가 난 걸까?  이유를 몰라서.. 그래서, 미안해요.  그는 울상으로 몸을 돌렸다.  유리창으로 보이던 해사한 얼굴이 사라지자 꽃집에서 꽤 먼 거리의 맨션 꼭대기 층 창문이 사나운 마찰음을 냈다.  어두운 색 커튼이 천천히 집 주인의 모습을 감춘다.  시든 백합에 한숨을 불어넣는 이의 귓가로 유리 소리가 맴돈다.




“어서 오세.. 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한 얼굴로 들어온 남자가 살짝 고개를 숙인다.  저도 모르게 입 꼬리를 올릴 뻔 했다.  이성이란 게 없었으면 그의 품에 기대어 투정했을 수도 있고.




“.. 스타티스로 드릴까요?”




끄덕거린 남자에게서 등을 돌렸다.  낮은 온실에 가둬 두었던 꽃을 꺼내 잎을 따면서 그 때 왜 그냥 갔는지 물었지만 끝내 대답이 들려오지 않는다.  어쩐지 더 이상 캐물어도 절대 답해주지 않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어 그만 두기로 했다.  대신 입술을 삐죽거렸지만.




“포장해드려요?”


“네, 제일 오래 걸리는 것으로.”


“아, 네. 풉.. 여기 앉으세요.”




왜 웃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어서 아무것도 아니라며 손사래를 쳤다.  너무 일관성 있는 주문이라서, 라는 말이 차마 나오지 않았다.  남자는 그가 내주는 의자에 천천히 앉더니 처음 왔을 때처럼 그의 행동을 따라 눈동자를 굴렸다.  그 눈동자가 닿은 곳마다 경직되는 느낌이다.  생화가 쌓여있는 신문지를 풀어헤치며 힐끔- 쳐다봤다가 또 시선이 매여 버렸다.  마치 주문에 걸린 듯이 멈춰버린 손을 움직이려고 해봤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저를 집어삼킨 회백색의 눈동자를 피할 수도 없다.  그 눈동자들은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가늠조차 안 되는 걸.  답답한 마음이 밀려온다.  숨막혀.




“우리.. 어디선가 만난 적이 있나요?”




첸은 물음을 내뱉고는 저가 놀라버렸다.  입 밖으로 튀어나온 질문이 스스로도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었기 때문에.  방금 공기에 흘려진 목소리가 정말 제 것이 맞는지 의심했지만 이런 생각이 미안할 정도로 열렬한 반응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탁한 잿빛 눈동자가 반들거리는 물기를 띠며 기뻐하고 있다.  적어도 제 눈엔 그렇게 보였다.  그것을 보니 왠지 서글픈 마음이 되어서 ‘늘 스타티스를 사러 오는 이상한 손님’일 뿐인 남자에게 사과를 하고 싶어졌다.




“기억할 수 없겠지만.”




남자가 내뱉는 느린 한 음절마다 집중을 하느라 숨을 참았더니 머리가 지끈거린다.




“알게 될 거에요, 우리가 얼마나 특별한 사이인지”


“우리.. 라면 손님과 저 말인가요?”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거린 남자에게 첸은 억지 웃음을 지으며 ‘그것 참 이상하네요.’ 얼버무렸다.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말과 행동.  우리가 특별한 사이라고?  저번엔 뜬금없이 고백을 하질 않나, 정말 이상해.  역시 거리를 둬야겠어.  허둥지둥 가위로 꽃 줄기를 자르기 시작했다.  여전히 집요한 시선이 따라온다.  꽃을 손질하는 내내 귓가로 ‘우리가 얼마나 특별한 사이인지.’ 라는 목소리가 반복적으로 맴돌았다.  끈적한 저음에 유혹당한 심장이 지나치게 빠르게 뛰어 숨이 가쁘다.  이상한 사람은 앞에 있는 손님이 아니라 그런 그를 끊임없이 의식하고 있는 저일지도 모르겠다.  숨을 제대로 쉬고 있지 못해서인지 정신이 아득해졌다.  나 왜 이러지?  첸의 미간이 좁혀지더니 순간 힘을 잃은 손에서 가위가 떨어졌다.  날카로운 금속성의 소리가 가게 안에 울려 펴졌다.  남자가 느릿하게 몸을 숙인다.  움직이는 검은 수트가 악마처럼 보였다.  무서워, 이 사람.  머릿속에서 적색 경보가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더 이상 이를 궁금해하지 말라는 본능적인 신호.




“떨고 있네요.”




남자가 주운 가위를 손에 쥐어주며 속삭였다.  그는 손바닥에 있는 흉터를 누르듯이 만지며 미소를 지었다.  언제 생긴 지도 모르는 그 상처 자국이 욱신거려.  얼음같이 차가운 손이 닿아있는 곳을 내려다보니 사시나무 떨 듯 덜덜거리는 제 손이 눈에 들어온다.  왜 이러는 거지?  무언가 말하고 싶은데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공포에 사로잡힌 몸이 남자에게 붙들려 있을 뿐이다.




“겁을 주려는 생각은 없었는데.. 그 벌로 원할 때까지 나타나지 않을게요.”




그 벌이 저를 향한 것인지 남자를 향한 것인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가 포장된 작은 꽃다발 하나만을 집어 들고 그 빈자리에 큰 액수의 지폐를 내려두고 멀어져 가는데도 눈 한번 깜빡이지 못하고 서 있었다.  여전히 떨리고 있는 손에 가까스로 가위가 매달려 있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진 말아요.”




명백한 경고.  가게 안에 혼자 남겨진 것을 인지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천천히 고개를 숙이자 여전히 잘게 떨리는 손이 눈에 들어온다.  꿈인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다가 테이블 위에 놓여진 지폐를 보고 사색이 되었다.






갈증으로 눈을 뜬 엘렌이 인상을 찌푸리며 몸을 일으킨다.  윤기 없이 마른 금빛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침대 끝에 엎드려 자고 있는 남자.  오늘도 제 팔다리를 주물러주다가 잠이 든 게 뻔했다.  그를 애처로운 눈빛으로 쓸다가 천천히 고개를 올렸다.  시선 끝에 닿은 구두, 그리고 그 주인.  암흑 속에 반짝이는 두 눈동자가 첸에게 고정되어 있다.  그의 머리카락을 아주 조심스럽게 손에 쥔 채.  신이었다.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저희 집을 지켜보던 그 분.  저가 아닌 연인에게 손을 미친 그 분의 뜻에 덜컥 겁을 집어먹은 엘렌이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은다.




“.. 체, 첸이 아니에요..! 절 데려가셔야 해요..”




그제야 신은 그녀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하찮다고 말하는 것처럼 반쯤 감긴 눈에 일말의 감정도 느낄 수가 없다.  엘렌이 신이라 여기는 이는 느리게 그녀를 훑어보는가 싶더니 어느새 곁으로 다가와 있었다.  찰나였다.  찢기는듯한 고통이 퍼져 여자는 손가락으로 허공을 휘저었다.  순식간에 그녀의 머리카락을 움킨 손이 가차없이 잡아당겼다.  통증과 함께, 새된 신음소리가 공포에 묻혀 사라진다.




“난.. 신이 아닙니다. 조용히 잠드는 게 좋을 거에요.”




붉게 변해버린 눈동자가 드러내는 지독한 혐오.  충격으로 굳어버린 엘렌의 몸이 경련한다.




“영원히.”




이불 위로 끊어진 머리카락들이 힘없이 내려 앉았다.  바닥에 새겨진 그림자 속으로 사라지는 악惡을 하릴없이 바라보는 여자가 하얀 옷깃을 움켜쥐었다.  겁에 질린 얼굴이 부서질듯 비틀어져 있었다.  






작은 그릇에 수프를 떠 담은 첸은 급히 나무 쟁반 위에 그것을 올려 침대로 다가갔다.  두 눈 가득 눈물이 그렁그렁 매달려 있었지만 애써 입 꼬리를 올려 미소를 짓고 있다.




“엘렌, 밥 먹자. 앉을 수 있겠어?”


“.. 미안, 첸...”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젓는 엘렌을 잠시 내려다보던 그는 그래, 라며 손으로 땀이 베인 이마를 쓸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얕은 숨이 새어 나오는 입술에 입을 맞춘다.  바짝 말라 갈라진 그녀의 입술이 솔방울 같다.  침대 옆에 놓인 낡은 협탁 위에 아무렇게나 널려 있는 피로 물든 헝겊들.  쟁반을 바닥에 내려두고 그것들을 집어 화장실로 향했다.  물을 틀자 기분 나쁜 색의 핏물이 흰색 세면대를 적신다.




“흐윽..”




물소리에 기대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퀭한 눈가가 빨갛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진 말아요.  그 경고 이후, 세뇌 당한 것처럼 시시각각 남자가 머릿속을 채웠다.  눈 앞에 선명하게 아른거리는 얼굴과 귓가에 머무는 낮은 목소리.  나락으로 밀쳐지는 아찔한 기분 속에서 저도 모르게 그를 기다렸다.  아마 며칠만 더 그렇게 지냈다면 길거리로 나가 행방도 알 수 없는 이상한 손님을 먼저 찾아 나섰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현혹되어 버렸다.  하지만, 엘렌의 병이 갑자기 악화되어 남자는 단숨에 설 자리를 잃었다.  첸은 며칠 동안 집에서 꼼짝 않고 그녀의 병 간호에 매달렸다.  매 순간마다 눈물을 참느라 애썼지만 잘 되지 않았다.  만약 엘렌이 죽고 혼자 남는다면?  거울로 비친 얼굴이 주르륵주르륵 흘러내리는 눈물로 젖어있다.  어쩌면 내가 그 남자를 기다려서 엘렌이 더 아파진 걸지도 몰라.  엘렌, 나를 벌 주려는 거야?  용서해 줘, 제발 날 혼자 남겨두지 마.  길 고양이와 다름 없었던 시절, 엘렌의 엄마인 그리닌을 만났다.  그녀는 아기자기한 꽃집의 주인이었는데 저를 꼭 닮은 병약한 딸과 단둘이 살고 있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어느 날, 첸은 며칠을 굶은 채로 그들의 꽃집 앞을 지나다 정신을 잃고 말았다.  김이 나는 죽을 받아먹으면서 난생 처음으로 ‘따뜻함’이라는 말의 의미를 배웠다.  퐁퐁 솟아오르는 눈물이 기쁠 때도 흘릴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도 그 때였고.  그것을 인연으로 그리닌은 가여운 소년을 품 안에 거두기로 했다.  반짝거리는 눈동자가 마주한 순간부터 애정을 갈구하는 것을 모른 체 할 수가 없었다.  소중한 꽃집을 기꺼이 보금자리로 내주고,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가르쳐 주었다.  자연스럽게 그녀의 딸인 엘렌과 남매처럼 자랐고 그리닌이 사고로 세상을 떠난 이후에는 그녀와 각별한 사이가 되었다.  험난한 세상에 단 둘뿐.  특히, 혈혈단신 첸에게 생명의 은인이자 유일한 가족, 연인인 엘렌은 인생 그 자체로 여겨졌다.  그렇게 소중한 존재였다.  그녀를 살릴 수만 있다면 목숨도 아깝지 않을 만큼 다시는 혼자 남기가 싫었다.



걱정스러운 눈이 엘렌에게 투정을 부리고 있다.  고개를 벽에 기댄 채, 정말 괜찮은지 묻는다.  가기 싫어.  말없이 웃으며 그녀는 팔을 뻗어 그를 안아주었다.  첸의 극진한 간호 덕분에 기운을 차렸지만 여전히 뺨이 핼쑥하게 패여 있다.  낯빛이 탁하게 물들어 전혀 아름답지가 않다.  찡해지는 코 끝을 마른 어깨에 묻었다.  이대로 꽃집을 내버려두면 안 된다는 엘렌의 성화에 못 이겨 결국 집을 나설 참이다.  먹고 싶은 건 없는지 묻자, 잠시 고민하더니 과일이라는 답변이 돌아온다.




“그럼 체리 값만 벌고 들어 올거야아.. 알았지?”


“응, 얼른 가. 시장 열었겠다.”




문이 닫히자 거짓 웃음을 흘리던 그녀가 깊은 숨을 내쉬었다.  곧장 침대로 걸어가 몸을 누인다.  고작 몇 분 일어나 있었다고 현기증이 일어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첸..”




뜨거운 눈물이 베갯잇을 적셨다.  바짝 마른 입술이 찢어져 피가 맺힌다.  첸과 있는 시간이 두려워졌다.  늘 둘 뿐이었던 집에 언젠가부터 암객暗客이 함께다.  두려워.  핏빛 눈동자가 그녀를 따라다닌다.  끊임없이 얼른 죽어버리라고 속삭인다.






도시의 소음으로 가득한 거리 위에 꽃집 주인이 제 몸집만한 꽃 더미를 끌어안은 채 걷고 있다.  집에 홀로인 엘렌의 걱정으로 넋이 나가 벌써 수 차례 사람들과 부딪혀 사과를 한 참이다.  혹시 갑자기 쇼크가 오거나 하진 않겠지?  식은 수프를 먹을 텐데, 점심 때 집에 다녀와야겠다.  그의 다갈색 머리카락에 묻은 향기가 바람에 실려 흩어진다.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해 상한 얼굴이 파리하다.  등에 식은땀이 베어 몸을 떨고 있지만 정작 스스로는 돌볼 생각이 없다.  그저 엘렌의 걱정뿐이다.  빨간 장미 한 송이가 떨어져 주인의 발에 짓이겨졌다.




“비켜요! 비키라고!”




혼비백산한 사람들이 소리의 근원지에서 흩어지는데도 첸은 멍한 표정으로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공사 현장의 날카로운 철근이 그를 향해 빠른 속도로 떨어지고 있었다.




“꺄아아악!”




응?  무슨 일이지?  여자의 비명 소리에 고개를 돌리는 순간 시야가 검은색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곧 얼굴로 튄 차가운 것에 반사적으로 눈이 감겼다.  비릿한 피 냄새.  그리고 흩날리는 꽃잎들.




“이런 식으로 나타나고 싶지 않았는데, 당신은 어쩔 수가 없네요.”


“.. 이게 무슨..”




검은 셔츠를 관통한 날카로운 철근의 끝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다.  남자와 저를 둘러싼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점점 멀어지는 것처럼 아득해진다.  첸은 허망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 보았다.  물이 들어찬 것처럼 귓속을 울리는 이명.  무슨 일이 일어난 거죠?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저를 보고 있다.  외면해야 했던 그리움이란 감정이 꽃일어 마음에 소용돌이친다.  실은, 이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어.  첸은 초점 잃은 눈으로 상처 입은 그의 가슴팍을 쳐다보았다.  나 때문에.  피에 젖은 손이 올라와 수척한 얼굴을 쓰다듬는다.  뜨겁게 일렁이는 눈동자.  다친 건 그인데 내가 더 아픈 것 같아.  소리 없이 남자에게 묻고 있다.  왜 이제야 왔어요?




“날 불러주길 바랬거든.”


“.. 부르지 않았어요.”




그래서 억울해, 라고 속삭인 남자의 입매가 길어졌다.  그 미소에 따라 웃어버린 첸의 눈이 천천히 감기며 몸이 기울기 시작했다.  

 
 

눈물이 흘렀다.  그리고 그가 안고 있던 꽃들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고요한 방 안, 폭신한 이불.  공간을 가득 채운 꽃 향기.  천천히 눈을 뜨니 보이는 천장은 예상했던 것처럼 저가 알던 색이 아니다.  비어있는 곳곳에 아무렇게나 놓여있는 스타티스.  사용한 흔적이 없어 보이는 화려하게 조각된 원목 가구들.  비어 있는 유리 진열장, 여신이 새겨진 그림 액자들.  그것들을 지나쳐 방을 나섰다.  짙은 녹색 소파에 걸터앉아 있는 남자는 저가 보고 있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인상을 찌푸린 채다.  철근이 박혀 있는 곳에서 피가 흘러 잘 짜인 나무 바닥에 붉은 웅덩이가 생겨 있었다.  짜증 섞인 신음을 내뱉으며 가슴에 박혀 있는 쇠를 움켜잡는다.  설마.




“잠깐만..!”




팔을 뻗었지만 남자는 그걸 단숨에 뽑아 바닥으로 집어 던졌다.  사방으로 피가 튀었다.  망연자실한 손이 제자리를 찾아 천천히 내려간다.  남자는 언제 그랬냐는 듯 무표정이 되어 피 묻은 손을 옆에 있던 천으로 닦더니 몸을 일으켰다.  무자비하게 벌어진 살점이 보여 고개를 돌렸다.  그는 곧장 다가오더니 외면하는 저의 목 부근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아마 핏방울이 튄 모양이었다.  손길을 거두지 않고 목을 감싸더니 살짝 힘을 주고는 이마에 입을 맞춘다.  괜찮은지 묻는 낮은 목소리에 우습게도 안심이 되었다.




“괜찮은지 묻고 싶은 건 나에요.”




고개를 끄덕이더니 돌아서면서 ‘너무 괜찮아서 문제지.’ 라고 읊조린다.  사실이었다.  벌어져있던 날개 뼈 위의 상처가 빠른 속도로 사라지기 시작했으니까.  상처뿐만이 아니었다.  더럽혀졌던 벽과 바닥의 핏자국마저 각각의 미세한 틈으로 스며들더니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마치 이 세상이 그의 존재를 허락하지 않겠다는 것처럼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남자는 소파에 아무렇게나 걸쳐 있던 셔츠를 입고 천천히 단추를 잠근다.  첸은 그저 가만히 서 있었다.  얼어버린 저에게서 멀어진 그가 바닥을 보고 있었다.  주춤거리는 다리를 억지로 움직였다.




“꿈일 리 없어, 근데 상처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남자의 셔츠를 잡아 내렸다.  대리석 같은 피부에 상흔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다.  맙소사.  그는 그저 고개를 숙인다.  평범한 사람이고 싶은 눈치였지만, 그건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사실이 될 수 없었다.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는 것은 벽에 등이 닿아 깨달을 수 있었다.  벽을 짚은 손이 땀으로 축축한 습기를 머금고 있다.  남자가 무서웠다기보다 스스로를 경계하기 위함이었다.  가라앉은 어깨를 안아주고 싶어질까 봐 두렵다.  아니, 이미 그러고 싶어졌다.  위험해.  몸을 돌려 현관으로 향했다.  문 손잡이에 손을 얹었을 때, 드디어 그가 입술을 뗐다.




“가지마.”




간절한 목소리.  돌아가야 할 곳, 엘렌이 떠올랐다.  그녀가 아프다.  근데 저이도 많이 아파 보여.  돌아보자 저가 두고 가버릴 것을 아는 듯 시선을 피한다.




“네가 가면 그 여자를 죽일 거야.”




서슬파란 협박에 이율배반적으로, 첸은 웃음이 날 뻔 했다.  사람인지 돌연변이인지 모를 존재가 전혀 무섭지 않은 이유는 아마 자만심 때문일 거다.  남자는 저에 대한 절절한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기척 없이 곁으로 다가온 울음 섞인 숨소리가 그랬다.  순식간에 벽을 짚은 팔 안에 갇혔다.  사납게 으르렁거리고 있지만 하나도 위압적이지 않다.  오히려 애절하게 붙잡는 것처럼 느껴져서 슬픈 걸.  천천히 손을 들어 그의 뺨에 얹었다.  손바닥으로 고스란히 전해지는 한기.  어린 짐승 마냥 손바닥에 뺨을 기대는 남자.  가슴이 아릿해서 입술을 깨물었다.




“가지마..”




엘렌, 미안해.  이 사람이 눈물을 그칠 때까지만..






남자는 차갑다.  몸 속에 흐르는 피가 차갑고, 피부가 차갑고, 눈물이 차갑다.  도망이라도 칠까 봐 이러는 건지 손을 꽉 잡고 있다.  이렇게 하는 것만으로 그에게 위안을 줄 수 있다면 얼마든지 잡혀있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손이 너무 시리다.  동상에 걸리는 게 아닐까? 생각하니 웃음이 났다.  그가 제 얼굴과 손을 번갈아 보더니,




“미안, 이불이라도 갖다 줄까요?”




손을 놓는다.  그것만으로도 녹을 것처럼 따뜻해져 고개를 저었다.  품에 안겨 잠든다면 얼어 죽게 되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다니..”




풀 죽은 얼굴에는 미안하지만, 사랑스러웠다.  첸이 키들거리면서 너른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저는 지금 제 정신이 아닌 게 확실하다.




“생각도 읽는 거에요?”


“명확히 원하는 것만.”


“또 어떤 걸 할 수 있죠? 혹시 과일이나 꽃을 만들어 낼 수 있나요?”




터무니없는 요구에 씁쓸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저가 할 줄 아는 것이라곤 그저 연명延命과 파괴, 그리고 눈 앞에서 천진난만하게 머리카락을 비벼오는 이를 사랑하는 것뿐이다.




“내가 기억하지 못한다고 말했었죠?”




우리의 이야기를 듣는다면, 넌 어떤 표정을 지을까?




“당신의 이야기를 해 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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