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부터 부슬부슬 비가 내렸다.  잔뜩 흐린 하늘을 보니 금방 그칠 것 같지가 않다.  노란 꽃을 한 아름 안고 있던 남자는 오리처럼 입이 나와있다.  잠들기 전, 싱그러운 프리지아를 가게 앞 가득 내놓으려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  어깨까지 들썩거리며 한 숨을 크게 쉬더니 조심스럽게 꽃을 내려두고 발걸음을 옮긴다.  초록색 문이 열리자 매달려있던 풍경이 유리 조각 같은 소리를 냈다.  손잡이를 돌려 차양을 내린다.  덜거덕덜거덕-  기름칠이라도 해야겠네, 혼잣말로 투덜거린 그는 다시 안으로 들어와 두리번거리다가 하늘빛을 머금은 수국 한 다발을 집어 들었다.  비님이 손을 뻗칠 수 없는 곳에 놓아두고 젖은 거리로 시선을 던진다.  알록달록한 건물들이 비를 머금어 진한 색을 띠었다.  손을 뻗어 저도 진해져 보려 한다.  젖어가는 손바닥을 물끄러미 기다란 흉터를 쳐다보더니 얇은 입술 끝을 올렸다.  기억이 없는 상처의 흔적.  하지만, 이 흉을 보고 있노라면 이유 모를 그리움이 밀려온다.  오늘따라 진해 보이는 건 기분 탓인가?  빗물이 흰 팔목을 따라 흐른다.  한기를 느낀 그는 회색 에이프런에 팔을 문지르며 몸을 돌렸다.  다시 유리 소리가 울린다.  가게 한 켠에 있는 조그만 세면대로 가 무심코 바로 앞 거울로 눈길을 올렸는데,




“..으아아! 응?”




소스라치게 놀라 뒷걸음질을 치곤 뒤를 돌아본다.  한 데 어우러진 꽃들이 무슨 빛깔인지 모르게 서로에게 번져있다.  부, 부, 분명 사람이 있었는데!  다시 돌아본 거울에는 하얗게 질린 제 얼굴만 가득.  어깨 뒤로 보였던 어두운 인영은 사라져버렸다.  눈을 비비고 팔을 눈 앞에까지 들어 들여다본다.  오소소 돋아있는 소름.  팔을 빠르게 문지르며 몸을 움츠렸다.  엘렌 때문에 잠을 잘 못 자서 그런가?  헛것이 다 보이네.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한낮에는 켤 일이 없던 불을 켠다.  그러면서, 듣는 이 하나 없는 허공에 대고 무서워서 그런 거 아니야아! 라고 소리쳤다.  동그래진 눈으로 좌우를 살피는 것도 잊지 않고.  여전히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아름다운 꽃들과 작은 화분에 앉아있는 다육 식물들, 그리고 오래된 가스레인지와 세면대 따위, 눈에 익은 가게의 모습일 뿐이다.  머쓱했는지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혀를 내어 웃어 버린다.



장미 한 송이를 품에 안고 나가는 백발 노인을 문 앞까지 배웅하며 손을 흔들었다.  벌써 5시가 넘었는데 손님은 겨우 두 명뿐이었다.  이른 어둠이 내려앉은 거리에 오늘따라 지나다니는 사람조차 없다.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의자에 털썩 앉아버렸다.  에이프런 앞 주머니에서 꼬불거리는 수염의 노인이 그려져 있는 지폐를 꺼내 쥔 얼굴에 근심이 떠오른다.  처진 속눈썹 아래로 진 그림자.  뜨르들로빵 두 개랑 우유 하나 사면 끝이겠군.  딸기 먹고 싶다.  한 명만 더 와라, 제발.  익살맞게 두 눈을 꼭 감고 기도하듯 손을 맞잡아 흔드는데, 찰그락-




“어서 오세요!”




벌떡 일어난 그는 천천히 걸어 들어오는 손님을 보고 잠시 숨을 멈췄다.  와, 잘 생겼다.




 
 

“.. 스타티스 있나요?”




차분한 저음이 스타티스를 찾는다.  말쑥한 검은 수트와 잘 어울리는 목소리였다.  첸은 망연자실한 입 꼬리를 숨기지 못한 채,




“지금은 말린 것밖에 없는데..”




대답했다.  새벽 꽃 시장에 갔을 때 기껏 적어둔 ‘사야 할 꽃’ 메모를 거들떠 보지도 않은 것이 화근.  가지각색의 꽃에 마음을 뺏겨 이 꽃, 저 꽃을 집어 들었는데 그 속에 정작 샀어야 할, 1번으로 적혀있던 스타티스는 한 송이도 끼어있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서야 그 존재감을 깨달은 그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앞에 선 남자가 웃고 있는 것은 보지도 못하고 스스로를 다그치느라 바쁘다.  바라고 바라던 손님을 바보 같은 실수로 놓치게 생겼다.  힝, 내 딸기.  스타티스는 말려도 아름다움이 사라지지 않기 때문에 간혹 가게 앞에 앙증맞게 포장해두면 사가는 손님들이 있었지만, 일부러 찾아온 손님이 말린 꽃을 찾을 리 만무하다.




“상관 없어요.”




네?  되물은 주인을 빤히 쳐다볼 뿐, 다른 말이 없다.  첸은 당황스러워 진짜요? 하고 한 번 더 물었지만 손님은 고개만 끄덕거린다.  허둥지둥 몸을 돌려 꽃들이 걸려있는 벽으로 향했다.  작은 나무 사다리를 밟고 올라 말린 꽃 묶음을 따면서 뒤에 있는 남자를 힐끔-  이사라도 온 건가?  처음 보는 손님이네.  흐린 빛깔로 마른 꽃들이 오늘따라 더 예뻐 보였다.  다행이야.  낯선 남자는 천천히 가게를 둘러보았다.  무심한 눈빛이 한 곳에서 멈춘다.  방긋 웃고 있는 남자와 화관을 쓴 여자가 손을 잡고 있는 사진.  얼마나 살 건지 묻는 밝은 목소리에 그는 전부 다, 짧게 답한다.  여전히 사진에 시선을 고정한 채다.  첸은 신이 나서 고개를 흔들었다.  기묘한 분위기의 손님이었지만 딸기를 살 수 있다는 생각에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고마울 따름.  지금껏 말려놓은 양이면 1,000코룬은 받을 수 있겠지만 양심상 700코룬만 받아야겠다고 생각하며 바닥으로 발을 디뎠다.




“따로 포장해드릴까요?”




양이 많아서 시간이 조금 걸리지만요, 덧붙이자 가게 한 구석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남자가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제일 오래 걸리는 것으로.”


“아아.. 네, 여기 앉아서 기다리실래요?”




맞은 편 의자에 손을 뻗어 자리를 내주자 남자는 정중하게 목례를 했다.  나이가 많아 보이지 않는데 저보다 묵직한 연륜이 느껴져 떨떠름하다.  거기다가 제일 오래 걸리는 거라니, 리본이라도 두 번 묶어줘야겠네.  800코룬 받을 거야.  피식-  남자의 한 쪽 입 꼬리가 올라갔다.  레이스 리본을 푸르던 첸이 의아하게 쳐다보자 실례, 라며 다시 표정을 굳힌다.  둘 사이에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남자 손님은 드물어서-특히, 젊고 잘생기고 예의 바른- 상대하기가 퍽 어려웠다.  거기다가 앞에 있는 남자는 근황 같은 것을 묻는 저에게 예 또는 아니요, 로만 대답을 하고 있으니 미칠 지경이다.  아, ‘글쎄요.’ 추가.  불편한 나머지 리본이 평소처럼 정갈하게 묶이지가 않는다.  조금이라도 몸을 움직이거나 다른 곳을 봤으면 좋겠는데, 리본을 묶는 첸의 손에 눈길을 고정한 채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있다.  끔뻑거리는 것조차 잊은 것처럼 중한 눈길.




“저기요.. 죄송한데, 다른 데 좀 봐주실래요? 리본이 안 묶어져요..”




끄덕.  남자는 손에서 시선을 돌렸지만 여전히 리본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의 눈이 향한 곳이 다름 아닌 제 눈동자였으므로.  정자세로 앉아있는 남자의 회백색 눈동자에 첸의 얼굴이 오롯이 담겼다.  허공에서 마주쳐버린 것을 무시하고 싶었지만 공기가 몸을 묶어버린 듯 피할 수가 없다.  둘은 마치 눈으로 깊은 대화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머릿속이 하얘진다.  이상한 일이었다.  남자의 눈동자 속에 갇혀있는 자신.  그 감옥이 현실인 것처럼 느껴졌다.  검붉은 빛이 도는 입술에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괜찮으신가요?”


“.. 아, 네! 조금 피곤해서.. 금방 해드릴게요.”




천천히 하세요, 라며 남자는 드디어 꽃들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늘 몸이 안 좋은가? 생각하며 서둘러 보랏빛 스타티스를 종이 포장지에 담아 레이스 리본으로 묶었다.  이마에 한기가 도는 것이 그새 식은땀이 난 것 같았다.  작은 꽃다발이 10개나 생겼다.  그것들을 커다란 투명 비닐에 조심스럽게 넣어두고 조금 남은 상아색 스타티스를 모아 쥐었다.  이 마지막 다발에는 유카리와 미니 장미를 섞어서, 남자에게 내밀었다.  딸기를 살 수 있게 해준 마지막 손님에 대한 보답.




“선물하실 거죠? 이건 특별한 분에게 주세요, 좋아하실 거에요.”




그것을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살짝 닿은 손가락 끝.  남자가  좋아할까요? 묻는다.  환하게 웃으며, 물론이라고 답하자 옅은 미소를 띠었다.  그 눈동자에 여전히 저가 갇혀 있다.




“700코룬입니다.”


“리본 값까지.”




남자는 800코룬을 테이블 위에 올리더니 빠른 걸음으로 가게를 나섰다.  첸은 뭔가 들킨 것 같은 느낌을 받았지만 꽃에 몇 푼이라도 더 값을 쳐준 손님 덕분에 날아갈 듯 기분이 좋아졌다.  서둘러 문 앞까지 따라 나서며 넓은 등에 감사합니다, 인사를 전했다.  슥-  어라?  눈 앞으로 내밀어진 꽃다발에 어리둥절한 채로 고개를 드니,




“또 봐요, 첸.”




손을 끌어 멋대로 마지막 꽃다발을 안겨준 남자는 저가 뭐라고 말을 하기도 전에 몸을 돌려 빗 속으로 걸어 나갔다.  이걸 왜 나한테?




“자, 잠시만요!”




인영은 이미 사라졌고 텅 빈 거리에 까맣게 내려앉은 어둠만이 발 아래에 번져 있었다.  진짜 이상한 손님이네.  근데.. 내가 이름을 말한 적이 있었나?  방금 ‘첸’이라고 부른 것 같은데, 잘못 들은 건가?




“모르겠다아. 돈도 벌고, 꽃도 받고.. 행운의 날임에 틀림없어!”




가게로 들어와 쓰레기를 치우고 꽃들을 정리했다.  곧 가게에 불이 꺼진다.  우산 아래 흥에 겨운 콧노래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목에서 또르돌로빵 두 개와 우유, 딸기, 치킨 수프 분말을 샀다.  우산을 든 손에 꽃다발 또한, 소중하게 들려 있다.  후미진 골목 안, 구석에 있는 구멍 뚫린 철제 계단으로 3층을 올라가자 말린 꽃과 월계수 잎을 엮어 만들어진 리스가 걸려있는 문이 보였다.  그가 그 안으로 모습을 감춘다.




“다녀왔어.”




침대에 앉아 바느질을 하고 있던 엘렌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다리 위로 꽃다발을 내려놓았다.  푸석푸석하게 빛 바랜 머리카락이 입술을 간질인다.  꽃을 들여다보며 웃는 걸 보니 첸의 입술에도 미소가 걸렸다.  배고프지?  조금만 기다려.  부엌으로 가 냄비에 물을 올리고 졸졸 흐르는 물에 딸기를 씻고 있는데 언제나처럼 그녀가 오늘은 어땠는지 물어온다.




“오늘은.. 뭔가.. 이상했어.”


“왜? 무슨 일 있었어?”


“.. 아니, 그냥. 딸기가 먹고 싶었는데, 딸기를 살 수 있게 되었지..”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바보야.”




‘특별한 분에게 주세요, 좋아하실 거에요.’  그 손님, 왜 나에게 저걸 주고 갔을까?  또 보자고 했어.  그리고..  잠시 닿았던 손을 떠올리며 그는 얕게 몸서리를 쳤다.  괜히 신경 쓰이네.




“아앗, 내 딸기!”




딸기 한 알을 떨어뜨리고 나서야 잡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차르르- 울리는 풍경 소리에 거울을 보고 있던 첸이 반사적으로 ‘어서 오세요!’ 인사를 하며 고개를 돌렸다.  어?  그 때 그 손님이다!  남자는 오늘도 검은 수트 차림이다.  고풍스러운 타이가 인상적이다.  가볍게 목례를 하며 가게로 들어서더니 다가오는 주인에게 무례할 정도로 진한 시선을 내린다.  그것을 눈치 채지 못한 첸은 저도 모르게 반가운 마음이 들어 입 꼬리가 올라갔다.




“또 오셨네요!”




말없이 얼굴로 내려졌던 시선이 살짝 머리 위로 올라갔다.  다갈색 머리카락, 그 위에 얹어져 있는 화관.  연한 색의 장미와 작고 하얀 꽃들이 사이사이 수놓아져 있다.




“예뻐요.”


“아! 내 정신 좀 봐! 이, 이건 달리아가 이제 곧 결혼을 하는데.. 달리아는 헴멜 병원 간호사에요!”




당황한 그가 화관을 내리며 빨개진 얼굴로 횡설수설을 늘어 놓았다.  이런 화관을 쓰고 있는 건 꼴불견이잖아!  속으로 자책하는 사이 그의 뺨으로 남자의 손가락이 다가와 닿았다.  첸의 눈이 커진다.  뭐, 뭐야?  서늘한 감각이 솜털을 어루만지듯 부드럽게 움직이다 떨어져 나간다.  두 사람을 둘러싼 공기들이 숨을 멈추었고 허공에서 마주한 눈동자도 움직임을 멈추었다.  또다.  또 갇혀있다.  눈맞춤에 얽매인 채 첸은 홀린 듯 천천히 제 뺨을 손으로 쓸어 보았다.  남자의 손길이 닿았던 곳이 화염이 들끓는 것처럼 뜨겁다.




“나도 모르게.. 천사 같아서.”




달콤한 초콜릿을 머금은 채 말한 걸까?  낮은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속삭이는 것처럼 크게 들려와서 어깨가 움찔- 떨렸다.  바닥으로 떨어지는 눈동자를 감추는 긴 속눈썹이 수줍게 깜빡인다.




“네? 아, 음.. 네? 이, 이 화관 말씀하시는 거죠? 하하.. 천사라니..”




별다른 대꾸가 없어 더 민망해졌다.  애꿎은 화관을 만지작거리고 있으니 남자가 천천히 팔을 들었다.  눈 앞으로 다가오는 큰 손에 몸을 움츠렸는데 뒤쪽에 있는 벽을 가리킨다.  깜짝이야, 또 쓰다듬는 줄 알았네.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그가 가리킨 곳으로 눈을 돌렸다.  벽에 걸려있는 마른 스타티스들.




“오늘도 스타티스로 드려요? 아, 생화도 있는데에.”


“전부 다.”




이 손님, 제일 좋아.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그는 몸을 돌린 채 콧잔등을 찌푸렸다.  뭐 하는 사람일까?  오늘은 청포도 사야지.  나무 사다리에 오른 엉덩이가 씰룩-  조용한 가게에 작게 흥얼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우두커니 서있던 남자의 입술이 엷은 미소를 머금는다.  따뜻한 뺨에 닿았던 손, 미세하게 떨리는 그것을 내려다보곤 손톱이 파고들 정도로 세게 주먹을 쥔다.  빨리 안고 싶어.  창백한 피부에 힘줄이 불거졌다.

.





적막이 흐르는 가게 안, 해가 지는 것도 모르는 채, 주인은 꽤나 깊은 잠에 빠져있다.  근처에 있는 양로원에서 카네이션 브로치 대량 주문이 들어와서 하루 종일 붉은 카네이션과 리본을 꿴 참이었다.  손가락 끝에 꽃물이 들어 붉은 색을 띠고 있다.  그 위로 서서히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흰 피부로 내려앉는 누군가의 손.




“웅.. 추워..”




인상을 찌푸리며 한쪽만 실눈을 뜨더니 여러 번 느리게 끔뻑거린다.  어두워진 것을 알아차리고 나서야 기지개를 켜며 잠에서 깨어났다.  테이블 가득 늘어져있는 카네이션.  아직 30개나 남았잖아, 울상을 짓더니 고개를 젓는다.




“아냐, 감사하는 마음으로 해야지!”




반달 눈으로 카네이션 한 송이에 입을 맞춘다.  천진난만한 애정.  그것은 꽃보다는 삶에 대한 것이다.  태어난 이후 하루라도 고되지 않은 날이 없었다.  그가 처음 배운 단어는 ‘5코룬’이었고 곧 말할 수 있게 된 문장은 ‘5코룬만 주세요.’였다.  주인 모를 집 담벼락들 사이 작은 틈이 그의 세상이었다.  도둑 고양이들과 음식물 쓰레기를 뒤져 나눠 먹었고 비가 많이 내리는 날에는 물에 젖은 앙상한 몸을 끌어안으며 오늘은 데려가 주실 건가요? 신에게 물어야 했다.  착한 일을 한 적이 없기 때문인지 신은 그 물음에 답해준 적이 없었지만.  집에서 잠을 자거나 창 밖을 바라보고 있을 엘렌의 얼굴이 그려졌다.  가여운 나의 연인, 그녀 덕분에 어엿한 일을 하며 따뜻한 집에서 살고 있다.  이제는 잠들기 전에 엘렌의 나무 껍질 같은 피부를 쓰다듬으며 1,000개의 귀를 가졌다는 신에게 그녀 대신 저를 데려가 달라고 기도했다.



군데군데 홈이 파인 나무 식탁에 앉아있는 남녀가 도란도란 웃음을 피운다.  그 앞에는 빨간 꽃이 한 가득.  집으로 돌아와서도 카네이션에 바느질을 하고 있다.  엘렌이 도와주고 있지만 저녁 식사 후 먹은 약 기운 때문에 그녀의 눈에 졸음이 가득하다.  반쯤 감긴 눈으로 엉뚱한 곳에 바느질을 하고 있다.




“엘렌, 그만하면 충분해. 얼른 누워.”




키득거리며 다가가 조금만 힘을 주어도 바스러질 것 같은 어깨를 밀었다.




“한숨만 자고 일어나서 도와줄게.”


“그래, 고마워.”




잘 자라는 인사로 그녀의 뺨에 입을 맞췄다.  평소처럼 바로 눈을 감지 않고 입술을 달싹거린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모양이다.




“첸.. 요즘..”




얼마든지 기다리겠다는 듯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리며 머리카락을 쓸어주었다.  한없이 따뜻한 눈빛이 그녀를 보듬는다.




“자꾸 우리 집에 신이 찾아와.. 날 데리러 오신 걸까?”


“그게 무슨 소리야? 누가 왔었어?”


“아니.. 사람이 아니야.”


“으.. 엘렌! 너 일부러 겁주려고 그러는 거지? 못 됐어, 하나도 안 무서워~”


“진짠데.. 그리고 지금도 네 뒤에..”


“으아악! 엘렌!”




그녀는 이불 속으로 뛰어든 첸을 내려다보며 까르르 웃었다.  이불 밖에 남겨진 다리가 오두방정을 떨며 흔들린다.  그녀는 안 무섭다고 소리치는 볼록한 이불을 쓰다듬으며 웃다가 창문에 드리우던 어둠이 송두리째 사라지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가버리셨네.  설 자리를 잃었던 달빛이 그들의 집으로 새어 들었다.






따뜻한 햇빛이 그림자를 따라다니는 오후.  빗자루를 가게 앞을 쓸고 있는 첸의 앞으로 검은 구두가 멈춰 섰다.  고개를 드니,




“어어, 안녕하세..”


“식사 같이 해요.”


“네?”




무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보던 남자는 안 먹은 거 압니다, 덧붙였다.  정말 이상한 손님이라고 생각하며 얼떨떨한 표정으로 가만히 있으니 빠르게 빗자루를 가로채 가게 안으로 들어간다.  밖에 홀로 남아 있다가 연달아 들리는 유리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저, 저기요!”


“뭐 먹고 싶어요?”




반사적으로 머릿속에 잘 구워진 고깃덩어리가 떠올랐다.  먹고 싶은 거 없어요, 라고 대답했는데 남자는 픽- 웃더니 ‘고기?’ 하고 물었다.  뭐야, 내 생각이라도 읽는 거야?  그것보다 당신이랑 먹으면 체할지도 모른다고요!




“저는 가게를 비울 수가 없어요, 미안해요.. 아..”




몇 번이나 봤다고 눈에 익어버린 감정 없는 얼굴이 아래로 떨구어진다.  무표정임에도 한껏 시무룩해 보이는 남자 때문에 첸은 두 손을 모아 꼼지락꼼지락-  괜히 미안해지네.  어쩌지?  앞에서 안절부절 못하는 손가락을 보며 남자는 살짝 미소 지었지만 그건 꽃집 주인이 미처 눈치채기 전에 지워졌다.




“포, 포, 포장해오면 같이 먹을 수 있.. 겠죠? 하하..”




말없이 나가버리는 뒷모습을 보며 머리를 긁적거린다.  이게 무슨 상황이람?  곧 꽃 향기 사이로 맛있는 냄새가 뒤섞였다.  정갈하게 포장된 것을 꺼내놓고 있다.  누가 보면 친한 사이인 줄 알겠네.  여전히 왜 이 남자와 저가 점심을 함께 먹게 된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마냥 싫지는 않다.  어차피 배가 고프기도 했고 덕분에 근사한 점심을 먹게 되었으니 잘된 일이다.  이상한 손님이 손을 씻어야겠다며 가게 한 켠의 세면대로 향한다.  마치 이 장소를 잘 아는 사람처럼 거리낌이 없다.  우와, 맛있겠다.  막 나이프를 들었는데, 다가온 남자가 제 손 위로 큰 손을 얹었다.  흠칫- 놀라자 저를 달래듯 낮은 목소리가 귓가로 떨어진다.




“해줄게요.”




묘한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왠지 자꾸 이 사람에게 휘둘리는 것 같아.  의외로, 맞은편에서 능숙하게 요리를 칼질하는 남자와 공유하는 공기가 편안했다.  탁자에 팔을 올려 턱을 괴고 그를 구경했다.  어디 사세요? 묻자 근처입니다, 답한다.  무슨 일 하세요? 묻자 딱히, 답한다.




“근데 우리 통성명도 안 한 거 알아요? 난 첸이에요.”


“알아요.”


“그 쪽은요?”


“이름 같은 건 없어요.”


“아, 그렇구나! 엄청 치사하시네, 이름 알려주는 게 뭐 어렵다고. 혹시 범죄자 같은 건.. 아니죠?”




거짓말은 안 합니다.  고개를 저으며 말하자 첸이 심드렁히 ‘그러시겠죠~’ 이죽거렸다.  데자뷔인가?  이 사람과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를 하고 웃는 게 익숙한 것처럼 느껴진다.  마치 일상 같잖아.  무언가 떠오르려고 해.  어제도 이런 시간을 보냈던 것 같은, 그런 말도 안 되는 환상 속에 발길을 들였다.  그런 자신이 되려 낯설어져서 거의 엎드리다시피 했던 몸을 고쳐 앉았다.




“꽃은 좋아하시죠?”


“별로.”


“와.. 뭔가 배신감 느껴진다아!”




울상으로 투덜거리자 그제야 고개를 들더니 살짝 웃고는 다시 고개를 내린다.




“꽃을 안 좋아하면 왜 여기 이러고 있는 거에요?”


“당신 때문에.”




지금 저가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 고백하신 거에요? 묻자 네, 답한다.  은근히 웃긴 사람이네.




“농담도 하시네요.”




키득거리자 움직이던 팔을 멈추고 고개를 든다.  말없이 마주하는 얼굴에 단호함이 서려 있다.  모르는 척 눈을 휘어 헤헤- 웃고 말았는데 넘어갈 요량이 없는 모양이다.




“농담 같은 건 할 줄 몰라요.”




늘 저를 가두고 마는 흐린 빛깔의 아름다운 눈동자.  회색 눈망울을 차지한 검은 동공이 블랙홀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앞으로 접시가 놓여진다.  남자는 얇게 썰린 토마토를 모조리 첸의 접시 위에 얹어주며 말했다.




“토마토와 먹는 걸 좋아하잖아요.”


“네? 어떻게 아셨어요?”




남자는 대답하지 않고 그저 절 빤히 쳐다보았다.  아니, 노려보았다고 하는 게 알맞다.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블랙홀이 포악한 빛을 띤다.  나이프를 쥔 하얀 손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잘게 떨리고 있다.  남자가 화가 난 건지, 무엇이 그를 화나게 했는지 도저히 헤아릴 수 없다.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첸이 그 눈을 피했다.  그리곤 당장이라도 블랙홀에 집어삼켜질까 무서워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는 마치 원래 그랬던 것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이상한 사람이야..”




잔뜩 쓸쓸해졌다.




강나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