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 Chocolate Ring  [ 부제 : 달콤한 구속 ]

 


 

차들로 꽉- 막혀 있는 도로를 따라 늘어선 높고 낮은 빌딩들,그 골목 골목마다 얼굴을 내민 오색 간판들.  어둠 속에 반짝거리는 도시.  불타는 금요일을 즐기러 나온 인파들이 저희들만의 세상에 취해 있다.  거기에 의도치 않게 휩쓸리고 있던 남자가 들려있던 핸드폰을 내려다본다.  발을 버벅거리며 손가락을 움직인다.  <천천히 와~>  겨우 사람들 사이를 빠져 나와 길가 편의점 아래에 섰다.  그의 약속 상대는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걸 꺼리는 이다.  걱정스런 표정으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종대가 불현듯 떠오른 것에 반색을 하며 편의점 안으로 모습을 감춘다.

 

 

지하철에서 밀려나다시피 내린 종인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린다.  눈 앞을 빠른 속도로 스쳐 지나가는 타인들.  그 속에 몸을 들이는 것은 도저히 익숙해지고 싶지 않은 것들 중 하나다.  하지만, 신입사원 애인의 갑작스러운 야근을 너그러운 마음으로 기다려준 이를 떠올리면 이럴 시간이 없다.  그는 서둘러 발길을 옮겼다.  꽤 먼 거리에서 ‘M 편의점’ 이 보인다.  어렴풋이 그 앞에 서 있는 종대가 보이자 찌푸려있던 얼굴이 금새 풀어졌다.  그러나, 곧 종대 앞에 서 있는 긴 생머리 여자가 지나가던 사람이 아니라 그에게 용건을 가진 위험 인물이라는 것을 눈치채고는 미간을 좁힌다.  어지간하면 보기 힘든 사나운 표정이다.  죄송해요, 난처하게 웃으며 손사래를 치고 있다.  젠장.

 



“번호만 주시면 안 돼요? 저 진짜..”


“네, 안 돼요.”

 



여자는 갑작스럽게 끼어든 남자를 의아한 눈으로 올려다 본다.  종대는 제 앞을 막아선 정장 방패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으르렁거리는 목소리가 퍽 낯설다.  종인이 타인에게 이렇게 쌀쌀맞게 구는 것은 처음 봐서 장난스럽게 팔을 잡을 수가 없었다.  옆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자 화기로 빨개진 여자의 얼굴이 보인다.

 



“누, 누구신데 그러세요?”


“죄송합니다. 가자.”

 



정중한 표현과는 달리 싸늘한 눈길이다.  종대는 종인으로부터 미움을 받게 된 여자가 조금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하고 착한 그에게 미움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손가락에 꼽을 수 있을 정도니까.  붙잡힌 팔목이 세게 끌어 당겨졌다.  어라라?  지금은 ‘곰탱이’ 가 아니라 질투로 눈이 뒤집힌 야생 불곰?  어이없는 표정으로 서 있는 여자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 돌아섰다.  넓은 어깨가 화가 난 듯 들썩거리는 게 보인다.  성큼성큼 사람들 사이를 헤쳐간다.

 



“팔 아프다아-“

 



뚱한 얼굴로 저를 돌아본다.  팔목을 잡은 손길이 느슨해지더니 돌아온 착한 눈동자 가득 종대의 얼굴이 들어찼다.

 



“짜증나..”

 



큰 손으로 종대의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린다.  그 아래서 입 꼬리를 늘려 웃고 있으니,

 



“웃지마, 진짜 싫어..”


“번호 안 줬어, 뭐가 걱정이야~”


“너 쳐다본 것도 싫어, 다 싫어.”


“그래쩌요? 크큭.. 이거나 먹어, 오늘도 수고했어.”

 



내밀어진 초코 우유를 받으면서 눈썹이 꿈틀-  불만을 품었던 입술이 웃음을 지으려는 것을 참는 게 보인다.  종인은 초콜릿을 좋아한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학창시절에도 초코 우유, 제티 같은 것만 마시고 과자를 살 때면 초코 송이부터 찾는다.  농담으로 ‘그래서 피부색이 초코 우유 색인 거야.’ 말하자 절대 안 먹겠다고 선언한 것이 일주일을 채 못 넘겼던 기억이 난다.  잡혀있던 팔을 빼서 그의 팔 위로 겹쳤다.  많은 사람들을 핑계로 꼬옥 붙어 걸을 수 있다.  누구도 저희를 이상하게 보거나, 신경 쓰는 사람이 없다.  그저 이 복잡한 거리를 벗어나고 싶어할 뿐.  그래서, 가끔은 그가 좋아하지 않는 이런 번화가에 함께 나오는 것을 좋아한다.  초코 우유로는 어림도 없을 만큼 화가 났었는지 다시 투덜거리기 시작한다.

 



“안 풀려, 내가 애인이라고 말 못한 것도.. 짜증나.”

 



그게 제일 화가 났구나.  종대는 흔치 않게 아기처럼 투정하는 애인의 팔을 들어 제 어깨에 걸친다.  픽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어떤 내용이든, 그가 하는 말 속에는 늘 달콤한 사랑이 베여 있다.  얼굴 색도 그렇고, 이제 보니 초콜릿이 따로 없네.  나만의 초콜릿.  사랑스럽다.

 



“내가 말할 걸 그랬네, 네가 내 애인이라고. 다음부터는 말할게, 그러니까 기분 풀어. 응?”


“너도 문제야.”

 



나?  어깨를 으쓱거리자,

 



“네가 너무 귀여워서 그런 거잖아, 웃는 것도 너무 예뻐.”

 



이 정도면 사랑이 아니라 정신병 아닐까, 생각하며 황당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보았다.  ‘어디 가서 그런 소리 하지마, 진짜!’ 진지하게 항의했지만 씨알도 안 먹힌다.  진짠데, 혼잣말로 툴툴거리더니 어깨를 안은 팔에 힘을 주며 귓가로 입술을 내린다.

 



“오늘 아프게 할 거야.”


“이, 이, 이 미친 놈! 너네 집 가서 자!”

 



사랑스럽다, 라는 말은 취소.  야한 초콜릿이다.

 

 

라이브 연주와 특이한 파스타로 유명한 I 레스토랑 안쪽 테이블, 종대가 입술을 실룩거린다.  이런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 예약이라니, 새삼스레 간질간질한 기분이 되었다.  평소에는 데이트라고 해 봤자 영화를 보거나 연극을 보던 게 다였고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내거나 했기 때문에 이런 ‘격식을 갖춘 데이트’ 느낌은 낯설다.  왠지 제 애인이 갑자기 더 어른스럽게 느껴진다.  면접 보러 다닐 때는 입는 것조차 어색해하던 정장도 출근한 지 며칠 지났다고 지금은 아주 자연스럽게 소화하고 있다.  멋있다.  이제 능력까지 갖췄으니 완벽, 그 자체네.  주변을 지나치는 여자들이다 이 쪽 테이블을 힐끔거리는 것 같다.  눈독 들이지 마, 내 거라고.

 



“이런 데는 어떻게 알았어?”


“근처 사시는 대리님이 알려주셨어, 강남 간다니까.”


“뭔가 이상해! 우리 오늘 되게.. 데이트 같네..”


“데이트 맞잖아.”


“이럴 줄 알았으면 셔츠라도 걸치고 올 걸.. 나 너무 애 같아.”

 



뾰로통해진 애인이 벙벙한 소매를 잡아당긴다.  종인은 그 뺨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뭘 입어도 애기 같아.’ 말했다가 뾰족한 눈빛에 찔렸다.

 



“리허설은 잘 했어?”


“응, 이제 일주일 동안 감만 안 놓치면 될 것 같아.”

 



다음 주말에 H 음대 동아리 소극장 공연이 있다.  그 공연에 종대가 피아노 대표로 서게 되었다.  오늘은 연주자가 모두 모이는 최종 리허설이 있는 날이었다.  종인에게는 비밀이지만, 모두에게 사정사정해서 리허설 중간에 빠져 나와 지금 그와 저녁을 먹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시작에 지쳐있을 연인을 위해 힘겹게 내린 결정이었다.  그냥, 그를 쉬게 해주고 싶었다.  나름대로 프로 의식만은 출중하다고 믿고 있었는데, 이번 일로 꼭 그렇지도 않다는 걸 깨달았다.  쯧, 사랑의 힘이란.

 



“점심?”


“탕수육! 근데 하루 종일 피아노 쳤더니 손목 시큰거려.”


“집 가면 찜질하자.”


“응. 너는? 오늘은 잘 했어?”


“하.. 정신 없었지, 뭐. 진짜 바보 된 기분이야.”

 



그렇게 말하면서 인상을 찌푸리고 있다.  처음 발을 들인 사회 생활이 꽤나 힘든 모양이다.  어깨까지 늘어뜨리고 포크를 만지작거리는 모습이 애잔하기 짝이 없다.

 



“피곤해 보인다, 그냥 집 가서 쉬라니까아..”


“싫어, 너 보는 게 쉬는 거야.”

 



바보냐, 핀잔하지만 종대의 입 꼬리는 진하게 말려 있다.  이번주 월요일은 종인의 첫 출근 날이었다.  정신없이 흘러 금요일이 되었지만, 그에겐 아득하기만 한 시간이었다.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들에게 낯선 일을 배우느라 쌓인 스트레스가 생각보다 엄청났다.  그래서, 계속 종대 생각뿐이었다.  그 전에도 마찬가지였지만 더 절실하게.  그와 함께 늦잠을 자고, 깨어나서서로를 끌어안은 채 뭐 먹을지 고민하며 장난스럽게 귀를 깨물고 또 사랑을 나누고 싶었다.  그러면 모든 게 괜찮아질 것 같았다.  스트레스도 사라지고 연속된 긴장으로 뭉쳐있는 몸도 풀어지고 그냥 모든 게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분명히 그럴 거라고.  통화할 시간조차 없어서 화장실을 가는 길에 잠시 밥을 먹었는지 물을 수 있었을 정도인데 그마저도 종대의 수업 시간이거나 레슨 시간과 겹치면 할 수가 없었다.  그를 만날 수 있는 금요일 저녁만 기다렸다.  그런데 공연 리허설 때문에 이번 주는 만나기 어려울 것 같다는 말에 눈물이 핑- 돌았다면 믿어줄까?  저의 간절함이 통했는지 다행이 종대로부터 늦은 저녁 식사와 하룻밤의 시간을 허락 받을 수 있었다.

 



“일요일 공연에 올 거야?”


“응, 토요일에는 수녀님이랑 소윤이 만나기로 했어.”


“잘 했네.  미리 표 빼놔야지~ 매진 임박이래, 짱이지? 난 그냥 학교 애들이나 올 줄 알았는데, 헤헤-“


“네 t도 난리 났던데, 뭘.”


“또 질투하네? 질투 쩔어, 진짜.”


“그런 건 왜 하트 모양인지 모르겠어, 기분 나빠.”

 



저의 질투에 부끄러워하는 몸짓이 귀엽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린 채, 내가 그렇게 좋냐?  묻고 있다.  종대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라는 것에 여전히 변함이 없다.  워낙 어렸을 때부터 콩쿠르며 뭐며 수상 경력이 화려한 건 알고 있었지만얼마 전에 핸드폰을 같이 보고 있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의 SNS에 달린 수많은 답글과 하트.  알고 보니 자작한 피아노 반주 곡을 올렸던 것이 반응이 좋아 꾸준히 올리고 있단다.  ‘팬’을 자처한 이들과 활발하게 소통도 하고 있는 모양이다.  조금 화가 나는 건 거기에는 정말 그의 피아노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다는 것이다.  예민하게 군다고 질색할까 봐 ‘대단하다.’ 하고 말았지만 사실은 그의 얼굴이 나온 사진을 모조리 삭제해버리고 싶었다.  할 줄 알았다면 저도 모르게 실천했을 수도 있고.  이번 공연 티켓이 매진 임박인 것도 분명 김종대 때문일 거다-팔불출입니다-.  딸기 피자를 한 입에 넣고 있던 종대의 손이 진동하는 핸드폰으로 향한다.

 



“어? 변백현이다. 야, 왜?”


‘어디야, 누구랑 있어?’


“나? 김종인이랑 밥 먹어.”


‘.. 주말마다 존나 붙어있네.’


“왜 시비야아! 넌 주말마다 전화 좀 하지마, 왕따 새끼야!”

 



종인이 새우를 종대의 접시 위에 올려주며 웃고 있다.  한결 같다.

 



‘닥쳐, 다음주에 도경수랑 간다.’


“토요일, 일요일?”


‘몰라.’


“미리 말해줘야 표 빼놓지!”


‘돈 주고 볼 거야, 병신아.’

 



키득거리는 반달 눈을 보고 있으니 내내 머릿속을 차지하고 있던 불안과 걱정이 사라진다.  종인은 턱을 괸 채 두 눈동자 가득 종대를 곱씹는다.  진심으로, 그와 공유하는 시간이 휴식이었다.  얼른 그의 품에서 잠들고 싶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반쯤 풀린 눈을 하고 서 찜질 팩을 데우고 있다.  종대는 양치질을 하며 그런 그의 뒷모습을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꼭 옛날 시험 기간 때 같네.  그래도 코피 안 쏟는 게 어디야.  서둘러 물기를 닦고 나와 그 뒤에 서 엉덩이를 두드리고 등을 밀었다.  몸에 힘주어 버티면서 내가 할게, 말하는 목소리가 피곤에 잠겨 익사 직전.  뽀뽀 안 해 줄 거야, 라는 귀여운 협박에 종인이 밭은 웃음을 내뱉더니 못 이기는 척 화장실로 향한다.

 


이불 위로 풀썩 쓰러지듯 누운 종인이 흰 종이 뭉치를 들여다보고 있던 종대의 허리를 끌어 안는다.  너무 피곤했어, 소곤거린 목소리가 가엾다.  옆으로 돌아 누운 종대가 팔을 괸 채 그를 내려다 보며 어깨를 토닥토닥-

 



“수고했어, 잘 자.”


“웅.. 자기 싫은데.. 너무 졸려..”


“꿈나라 가서 핫도그 사놔, 금방 따라갈게.”


“바보, 귀여워.. 사랑해, 해 줘.”


“사랑해.”

 



칭얼거리는 이마에 입을 맞췄다.  금새 일정한 숨소리가 이불 위에 내려 앉는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종인의 머리카락을 연신쓸어 내린다.  잠시 후 손을 들어 그가 잠든 것을 확인한 종대는 조심스럽게 그의 팔을 벗어났다.  연신 올리고 있던 입 꼬리에 드디어 힘이 풀린다.  몸을 일으켜 불을 끄더니 향한 곳은 이부자리가 아닌 책상이다.  스탠드 불빛이 비춘 그의 얼굴에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종인이 보냈던 일주일 만큼 그도 바쁜 시간을 보냈다.  학교에, 과제에 제법 큰 공연을 하게 되어 밤낮 없이 연습이 이어졌으니 평소 체력이 약한 것을 감안하면 지금 눈을 뜨고 있는 게 신기한 일이다.  핸드폰 알람을 맞추고 있는데, 전화가 들어온다.  공연 책임자 격인 지인의 전화다.

 



“네, 누나. 이제 끝났어요?”

 



적막 위로 속살거리는 목소리.

 



“네, 네. 미안해요, 대신 제가 내일 1등으로가서 준비할게요~”


‘너니까 봐주는 거야, 동선은 다 외워와야 된다!’


“고맙습니다, 내 맘 알죠? 그렇지 않아도 지금 보고 있어요.”


‘오늘 꼭 해야 된다는 건 잘했어?’

 



곤히 잠들어있는 애인을 돌아보는 눈동자가 따스한 빛을 띤다.

 



“네, 덕분에요.”


‘알았어, 내일 봐.’


“수고하셨어요,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들어가서 톡 남기고요., 누나”

 



종인은 잠결에 어렴풋이 들리는 목소리를 자장가 삼았다.  아마도 오늘 저 때문에 리허설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 같다.  기분 좋다.  그에게 우선 순위가 되는 것 만큼 의미 있는게 또 있을까?  적어도 몇 년 이상은 저에게 그런 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종대는 스스로 너무 애 같다고 말하지만 저의 생각은 다르다.  외양이나 표현 방식은 그럴지 몰라도 그는 분명 누구보다 어른스럽게 저를 보듬을 줄 아는 이다.  더 멋진 점은 오히려 이 어른스러움을 알리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로 오늘처럼.  종인은 그의 이불 속에서 최대의 안도감에 젖은 채 깊은 잠으로 빠져 들었다.

 

 

 



등받이에 깊숙이 기대어 앉아 있던 종인이 무대로 나오는 익숙한 인영에 자세를 고쳐 앉는다.  

 



“피아노로 이름 깨나 날리는 저의 자랑스러운 선배님들 차례네요, 여러분도 다들 아시죠? .. 피아노과, 김종대! … 입니다!”

 



화난 사람처럼 무표정으로 앉아 있을 땐 언제고 코끼리를 처음 본 꼬마처럼 신나게 눈으로 그를 쫓고 있다.  애정 편향이 참으로 극심한 이다.  관중들에게 살짝 눈인사를 한 종대가 곧바로 검은 피아노로 향한다.  정장을 입은 건 처음 본다.  새삼 무대 위 모습에 반해버린 그가 손톱을 꾹 깨문다.  연주를 주고 받는 형식으로 이루어진다더니 그 맞은편에서 흰색 피아노가 무대 위로 천천히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미니 드레스 차림의 여자가 종종 걸음으로 나와 손을 흔든다.  뒤쪽에서 종대가 그녀에게 박수를 보내고있다.  쳇.  그런 그를 보고 가자미 눈이 되었다.  그 새를 못 참고 질투 중.  하지만 건반 위에 손이 올려지자 누구보다 진중하게 청음 한다.  그의 피아노는 저에게 늘 평온이다.  빠르거나, 아주 느리게 손을 굴러도 귀로 스미는 음은 한없이 간지럽게 마음을 두드린다.  선율에 따라 움직이는 몸짓이 아름답다.  종인은 왠지 모르게 조바심이 나서 몸을 움츠렸다.  입 꼬리에 진한 미소를 띤 채 피아노를 어루만지는 종대를 가득 그린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렸다.

 



“다음은 김종대 님의 솔로 피아노입니다, 곡명은 ‘이루마’의 『May Be』 입니다!”

 



심쿵!  실로 오랜만에 듣는 저만을 위한 곡.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저에게만 들리게 피아노로 말을 걸어오는 것 같다.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다.  다시 한번 그가 절 사랑해준다는 사실에 감격해 버렸다.  저렇게 멋진 사람이 잠시 후면 저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고, 잠들기 전 입을 맞춰줄 거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행복하다.  꿈결 같은 5분이었다.  피아노 의자에서 일어선 종대가 무대 중앙으로 걸어 나왔다.

 



“우선, 저를 이렇게 과분한 자리에 설 수 있게 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 드립니다. 피날레 치고는 잔잔했죠? 하지만, 저에게 특별한 곡이라서 꼭 하고 싶었어요. 이 곡은 한 사람 앞에서만 연주하기로 약속했거든요. 제가 이 곡을 치고 있다면 그 옆엔 언제나 그 사람이 있을 거에요.”

 



수줍게 뒷머리를 긁적거리고 있다.  고요한 공기 위로 마이크를 통해 떨리는 목소리가 고스란히 전해진다.  평소 그답지 않은 모습과 갑작스러운 고백에 종대의 지인들은 조금 어리둥절한 표정이다.  종인은 뭉클해진 가슴을 손바닥으로 눌렀다.  관중석에서 부러움과 질투 섞인 수군거림이 번져간다.  정면을 보고 있던 그가 종인을 찾아 두리번두리번-  저기 있다!  쑥스러운지 혀를 내어 살짝 웃는다.  조명 아래 그 모습에 숨이 가빠졌다.  허공에 놓인 우리만의 눈길.  이 곳에, 이 세상에 오롯이 저희 단 둘만 있는 것 같은 기분.  따뜻한 빛을 품은 밤색 눈동자에 종인만을 담으며 그가 다시 입술을 뗀다. 

 



“다음 해에도, 그 다음 해에도..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도 이 곡을 연주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헤, 부끄럽다.. 사랑해, 끝나고 치킨 먹자!”

 



여러 웃음 소리 가운데 종인만이 진지한 표정으로 얕은 고갯짓을 했다.

 



“제 프로포즈에 여러분을 이용해서 미안해요! 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다음에 또 만나요오! 안녕-“

 



무대 위에서 방긋 웃으며 손을 흔드는 연주자에 박수갈채와 뜨거운 환호가 쏟아졌다.  『May Be』의 주인만이 고개를 숙인 채 입술을 매만지고 있었다.  물기 띤 눈동자가 일렁거린다.  예상치 못한 프로포즈의 감동에서 쉽게 헤어나올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공연이 끝난 후, 조용한 복도에 발자국 소리가 울린다.  

 



“김종인!”

 



곁에 서기도 전에 제 몸이 부서져라 와락- 안아버린 종인이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웅얼거린다.



 

“너 뭐야, 진짜..”


“풉.. 감동 받았어? 이거 놔 봐, 아직 안 끝난어어.”

 



갸우뚱- 내려다보니, ‘손 내밀어 봐.’ 라고 말하며 손바닥을 내민다.  종인은 자연스럽게 그 손바닥 위에 제 손을 얹었다.  종대가 주머니에 손을 넣어 꼼지락거리더니 곧 반짝이는 무언가를 꺼내 그의 손가락 사이로 내렸다.

 



“나중에 더 좋은 걸로 해줄게.”


“이게..”


“금이야, 깨물어 봐.”

 



곁에서 키득거리다가 숙여진 고개를 들여다 본다.  반지가 자리한 손가락에서 눈길을 떼지 못하는 종인.

 



“울려고? 은근히 잘 운다니까, 정말.. 마음에 들어?”


“안 울어. 그냥 너무..”

 



말하지 않아도 안다.  종인은 말할 수 없을 만큼 행복해서,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을 함부로 깨뜨리고 싶지 않아서 잠시 가만히 있고 싶은 거다.  어떤 언어로도 그에게 사랑을 말하기에는 부족해서 못마땅해하고 있는 것이다.  종대는 그런 그의 품에 살짝 안기며 등을 쓸어주었다.

 



“나도 끼워줘. 그리고 너무 좋아하지마, 내가 지금 너 구속하는 거야!”

 



이렇게 달콤한 구속이 어디 있냐? 나지막이 툴툴거리면서 저도 종대를 구속해보려 한다.  아주 달콤하게.  서로의 손가락 위에 반짝거리는 것들을 보며 웃다가 눈이 마주쳤다.  둘의 눈동자에 사랑이 절절 들끓고 있다.  종대가 그를 끌어당기며 이리와, 속삭였다.  초록 사람 표시만이 밝은 어두컴컴한 비상계단에 가쁜 숨소리가 울려 퍼졌다.  두 남자가 마주한 입술로 깊은 숨결을 나눈다.

 



“하아.. 집 가자.”


“너 쫑파티 있다며, 어떻게..”


“지금 하고 싶어..”

 



종대의 단 한 마디로 이성의 끈이 끊어졌다.  둘은 제정신이 아닌 채로 택시에 올라 집으로 향했다.  뒷좌석에 닿아있는 두 다리가 쉴 새 없이 초조함으로 떨렸고 꽉 쥔 손바닥에 촉촉하게 땀이 베인다.  택시 기사는 아무 말없이 멍한 두 남자를 의아하게 쳐다보며 라디오의 볼륨을 높였다.

 

 




뒤로 밀려나는 뒤통수를 감싸 누이며 진한 키스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언제나처럼 다정하고 부드럽다.  하지만, 종대는 오늘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급하다.  아래서 바르작거리던 그가 손목에 얹어진 손길을 뿌리치고 다급하게 종인의 목을 끌어당겼다.

 



“빨리..”

 



야릇한 재촉에 종인이 숨을 삼킨다.  흘러나온 목소리가 온 몸을 만지는 기분이다.  갈급해진 초콜릿.  종대가 다시 입술을 부딪혀온다.  혀를 말아 올려 반복해서 빨아들이자 종인의 몸이 반사적으로 꿈틀거리는 게 느껴졌다.  화르륵- 달아오른 뺨에 재차 입을 맞추며 몸을 일으키려는데 저지 당했다.

 



“잠깐.. 움직이지마.”

 



왜, 묻고 있지만 종대의 눈은 답을 알고 있는 듯 장난스럽게 휘어 있다.  울상이 된 종인은 지나친 흥분으로 일을 그르칠 것 같다는 대답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반달 눈이 굳어 있는 이의 반들거리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놀린다.

 



“왜애- 피곤해 죽겠어? 그만 하고 잘까?”


“장난하지마.”


“하지 말라는 게 왜 이렇게 많아?”

 



종인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사랑스러운 연인이 제 안에 숨은 난폭함을 부추긴다.  키득거리던 종대의 손이 세게 붙잡혔다.  순식간에 아래로 내려진 손바닥으로 느껴지는 뜨거운 이물감에 흠칫 놀라 잡힌 손목을 움직였지만 그 뿐이었다.

 



“이건 해도 돼.”

 



대담한 유혹에 제대로 한방 먹었다.  시선을 하얀 얼굴에 고정한 채 몸만 일으켜 셔츠를 벗어 던진다.  종대는 달뜬 표정으로 그를 훑었다.  내가 졌다.  야한 초콜릿은 빨리 먹어버리는 게 정신 건강에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마른 입술을 혀를 내어 축이며 바지 위에 얹어진 손을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의 미간에 주름이 잡힌다.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과는 반대로 종대의 셔츠 사이로 손을 집어넣고 있다.

 



“잠.. 깐..”


“종인아, 으응.. 키스해.”

 



서로의 몸을 탐하는 손을 멈추지 않은 채 입술이 맞물린다.  끈적한 숨소리만이 전부였던 공기 위로 지퍼를 내리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울려 퍼졌다.

 



“먹어도 돼..?”


“윽..”

 



이렇다 할 대답 없이 종인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려버렸다.  오늘 종대는 지나치게 야해서 온 몸에 피가 끓어오르는 것 같다.  제 것에 닿아있는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가 녹을지도 모른다.  근데.. 아까부터 거슬리네.  천천히 손을 내린 종인이 흐트러진 종대의 셔츠 단추를 빠르게 풀어 벗겨냈다.  그러고는 휙-  어라라..?  지금 우리 못 보게 가려버린 거야?  깜깜해졌어!  야, 김종인!

 



“왜 그래?”


“누가 볼까 봐.”


“엄마야.. 아흣.. 음..”


“이제 집중할게, 맛있게 먹어.”

 




 

20-5. Murmuring Room 完

 

 


 
 

정적이던 한국 피아노 계에 ‘퍼포먼스 피아노’라는 장르를 새롭게 시도한 피아니스트 김종대.  지난 달, 그의 두 번째 단독 공연인 [DAILY PIANO]가 성황리에 막을내렸다.  첫 번째 단독 공연인 [JEWELRY PIANO]가 빗방울이 떨어지는 무대에서 연주를 하거나 드럼, 일렉 기타 등의 악기와 펼치는 펑키한 합주 등 말 그대로 ‘퍼포먼스’에 초점을 맞췄었다면, 이번 [DAILY PIANO]에서는 청자들과 소통하며 일상에 담담한 위안과 카타르시스를 주는 ‘스토리텔링’으로 풀어냈다.

 


Q. 당신의 SNS에 수많은 팬들을 보았다.


부끄럽지만 공연 직후에는 몇 시간씩 들여다 보고 있어야 할 정도에요.  과분한 사랑에 감사할 따름이죠.  교수님들 공연이나 동아리 공연에 객원으로 참가했던 대학생 때부터 T SNS로 팬 분들과 소통하고 있어요.  여러분들이 남겨주신 이야기가 이번 [DAILY PIANO]에 큰 영향을 미쳤죠.

 

Q. [DAILY PIANO] 공연을 기획한 동기


피아노 곡도 대중 가요나 팝송처럼 일상에 녹여 들을 수 있는 음악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다는 게 가장 큰 이유에요.  피아노를 연주하는 저조차도 밀린 청소를 할 때 가요를 듣는데, 그건 그 만큼 우리에게 그 장르가 익숙하고 접하기 쉽기 때문이에요.  피아노라고 하면 일단 어렵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아요.  그런 편견을 없애는 나비의 날갯짓을 해보자, 라고 생각했고 그 날갯짓이 이번 공연이 되었죠.  공연하는 내내 피아노 곡도 무작정 들어보시라고 계속 권유했어요, 여러분도 꼭 무작정 들어보세요!  피아노도 그냥 일상일 뿐이에요.  실제로 제가 아는 어떤 사람은 무슨 곡인지도 모르고 이유 없이 피아노를 듣는데, 그 분은 가요보다 피아노가 더 자기의 기분을 잘 맞춰준다고 말해요.

 

Q. 애인이 있다는 걸 안다.  혹시 그 분이 당신의 피앙세?


네, 그 분이 그 분입니다.

 

Q. 3년 전, 소규모 공연에서 이미 프로포즈를 했다.  결혼은 언제?


자의든 타의든 결혼 생각은 없어요.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도 있지만 곧 단념하게 되죠.  그 프로포즈는 결혼하자고 한 게 아니라, 당시 넘치는 사랑을 주체할 수가 없어서 저지른 일이었어요(웃음)  오히려 결혼 같은 약속이 없어서 더 믿음이 가요.  사랑이 아니라면 지금 제 곁에 있을 이유가 없잖아요.  그래서 언제나 날 사랑해서 이렇게 곁에 있는구나, 안심이 됩니다.  그 분도 마찬가지일 거에요.  아니라면, 이걸 보고 깨닫길.  우리는 그냥 함께할 거에요, 그러고 싶지 않을 때가 오면 떨어져 있을 거고요.  하지만, 떨어지게 되더라도 결국 다시 만나게 될 것 같아요.  매일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 어디 쉽게 떨어질 수 있겠어요?

 

- S 매거진 '이 달의 아티스트' 피아니스트 김종대  편 中 -



 



“또 보고 있어?”

 



커튼 사이로 태양의 손길이 새어들어와 아늑해진 거실 한 켠, 회색 소파에 기대 잡지를 들여다 보고 있다.  종대가 잠이 덜 깬 눈을 끔뻑거리며 그에게로 다가간다.  한 팔을 뻗어 저를 반기지만 시선은 여전히 너덜너덜해진 종이에 고정한 채다.  허벅지를 베고 누우며 비비적거리자 간지러워, 하며 웃음 소리를 냈다.

 



“이거 크게 출력해서 벽에 붙여놓으면 안돼?”


“미쳤어? 크큭, 정신 차려라.”

 



잡지를 내리더니 부스스한 얼굴에 입술을 내린다.  뒤늦게 잘 잤어? 묻는데 입술이 닿은 채 움직여서 뺨이 간지럽다.  키들거리며 종인의 허리를 끌어 안았다.  배고파.

 



“뭐 먹지? 피자, 탕수육, 갈비찜..”


“어제 치킨 먹었으니까 피자는 빼.”


“그럼 탕수육! 갈비찜은 저녁에 먹자.”


“볶음밥은?”


“게살.”

 

 


 
 

주말 시간에 함께 할 수 있는 것들을 좋아한다.  나른한 공기 속에서, 둘만의 공간 속에서.  그리 넓지도 좁지도 않은 종대의 집에서 깨어나 그가 일어나기를 기다리고, 이불 속이나 소파 위에서 한참을 속살거리고 장난을 치다가 뭘 먹을지에 대해 고민한다.  메뉴가 결정되면 음식을 주문하거나 만들고, 좋아하는 TV 프로그램을 틀어놓고 함께 식사를 한다.  그러곤 자전거를 타러 나가거나 소파에 겹쳐 앉아 영화를 보거나 외출을 한다.  하루 종일 누워서 뒹굴거나 각자 책을 읽기도 한다.  평범한 일과지만 서로가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 우리에게 특별한 나날이 된다.

 



“아하항, 유재석 짱 웃겨어!”

 



뒤로 몸을 젖히며 깔깔거리고 있다.  탕수육을 집어넣는 곳이 입인지 코인지 분간이 어렵다.  종인이 무심한 표정으로 휴지로 종대의 입가를 꾹꾹 누르면서 TV를 힐끔거린다.  진짜 웃기네.  저희는 여전하다.  서로에게 꼭 맞춘 듯이 자연스럽게 몸에 베인 습관들이 더 많아졌다.  양치가 끝나면 상대의 칫솔에 치약을 짜놓고 나오거나 집에 있는 오후면 항상 소파에 엉겨 붙어 낮잠을 잔다거나 하는 것들.

 



“아- 해.”

 



마지막 한 숟가락을 떠먹이고 입에 붙은 밥풀을 떼어 제 입으로 가져간다.  종대가 입을 우물우물거리며 고개를 돌린다.  이시간이 마냥 좋다고 말하는 것처럼 눈매를 휘고 있다.  볼록한 뺨이 새삼스레 사랑스러워 종인은 얼른 그의 귀를 잡고 쪽쪽 입을 맞췄다.

 



“오늘 뭐할까?”


“음.. 자전거나 탈까? 아니면, 퍼즐?”


“뭐 하는 거 없나 찾아볼래, 나가고 싶어. 먼저 씻어.”

 



밥 먹은 지 얼마나 됐다고 벌러덩 누워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린다.  안나 수녀님의 ‘밥 먹고 누우면 소 된다.’ 라는 말씀이 떠올랐지만 종대는 저가 잔소리를 해도 히죽- 웃으면서 음메, 하고 느물거릴 위인이다.  종인은 순순히 욕실로 향한다.  양치를 하고 있는데 벌컥- 문이 열리더니 한껏 신난 얼굴이 제 이름을 지저귄다.

 



“김종인, 김종이인! 이거 보러 가자!”

 



눈 앞으로 들이밀어진 핸드폰 화면에 초록색 슈렉과 ‘애니메이션 특별전’이라고 새겨진 큰 글씨.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이게 뭔데? 묻자, 동그랗게 치약이 올려진 제 칫솔을 집으면서,

 



“기억하려나? 우리 기숙사에서 같이 봤었는데, 드래곤 길들이기.”


“드래곤 길들이기.. 그거 까만 용 나오는 거?”


“맞아, 그 영화 만든 회사 애니메이션 전시회래, 꼭 가야 돼애!”


“그래, 어디서 하는데?”

 



입에 문 칫솔 때문에 부정확한 발음으로 신나서 주절주절하는 걸 구경했다.  옛날부터 생각했던 거지만 종대의 문화 취향은 극단적인 경향이 있다.  너무 유치하고 허황되거나 반대로 너무 고차원이거나 하는, 그런 점이 지극히 그답지만.  곁에 있다 보니, 고등학교 때 같이 보곤 했던 히어로 영화 시리즈를 이젠 저도 줄줄 꿰고 있다.  우리가 봤던 영화의 속편들이 개봉하는 날이면, 평일이든 주말이든 무조건 만나서 봐야 한다고 암묵적으로 약속되어 있고 포스터 두어 장 챙기는 것도 잊지 않는다.  우린 나중에 그 포스터들을 엮어 백과사전을 만들기로 했다-사실 별로 내키지 않지만, 종대가 눈을 반짝거리면서 웃어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최근에 그의 취향에 물든 스스로에 놀란 적이 있다.  마트를 갔을 때 저도 모르게 아이언맨 칫솔을 골랐다가 한동안 지수의 놀림을 받아야 했다.  그런 걸 좋아할 줄은 몰랐다고 말한 그녀는 그 뒤로 종종 일부러 아기자기한 캐릭터 상품을 사와 내 침대 위에 올려두었다.  책장을 차지한 조그만 것들을 보면 가끔 정체성에 혼란이 온다.  우습지만, 내가 이걸 좋아하는 건가? 하고.  하지만, 결론은 쉽게 도출된다.  김종인의 정체성 : 김종대를 너무너무 사랑해서, 그가 좋아하는 것들이 좋다.  그러므로, 나는 그것들을 좋아하는 게 맞다.  다시금 제가 결론 지은 정체성에 만족하며 종인이 머리카락의 물기를 짜고있는 종대에게 수건을 내민다.

 



“너 어제 월급 받았지? 전시회 기념품 사줘.”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문지르며 익살맞게 웃는다.

 



“키스해주면.”

 



오예, 발을 구르며 다가오더니 망설이지 않고 종인의 목을 끌어안는다.  닿아있는 입술 끝에 웃음이 걸려있다.  상쾌한 향이 베인 숨결을 나눈다.  종대의 허리를 안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자, 자기이..”

 



젠장.  종인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어쩐지 저는 이 낯선 호칭에 약하다.  얼마 전에 술에 취한 여자 후배를 집에 데려다 주겠다는 종대에게 크게 화가 난 적이 있다.  전화를 10통이나 무시했을 정도로-일부러 전화 안 받은 적이 처음이었다- 화가 났었는데 술 냄새를 풍기며 집 앞에 찾아서 와락 안기더니, ‘자기야, 나 미워할 거야?’ 이것으로 종결.  그 뒤로 종인이 유독 이호칭으로 불리면 어쩔 줄 몰라 한다는 걸 알아챈 종대는 빨개진 얼굴로 제 허리를 안고 있는 귀여운 연인을 놀리는 재미에 빠져있다.

 



“나 좀 봐봐, 자기야.”


“그렇게 부르지마, 흥분돼.”

 



순식간에 종대의 잠옷 바지 허리춤을 움켜잡는다.  그러더니 성큼성큼 욕실을 벗어났다.  아뿔싸!  잡힌 잠옷 바지에 속수무책으로 끌려가던 종대가 다급히 소리치지만,

 



“아, 안돼! 전시회 갈 거야아!”


“조금만.”


“조, 조금만?”


“응, 진짜, 진짜. 조금만.”


“지인짜.. 거짓말이면 죽어어.. 힝..”

 



이 호칭의 치명적인 부작용은 종인이안절부절 귀여움을 떤 뒤에 야수로 돌변해 버린다는 것.

 


 

“뭐해?”


“여기에 방명록 쓰래.”

 



 
 

아아, 그래. 벽면을 채우는 방명록이라니, 아이디어 좋네.  앞에서 끄적거리는 어깨에 팔을 올리고 전시회 팜플렛을 보고 있다가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종인이 픽- 웃어버린다. 

 
 


종대의 방명록에는 이름 한 자 들어가지 않고도 저희를 온전히 담은 글자들이 새겨져 있다.  뒤에서 꼬옥 껴안고 머리카락에 키스 세례를 퍼붓고 싶지만 끙.  공공 장소니까, 화내겠지?  종인은 말없이 목걸이가 걸려있는 목덜미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귓가에 속삭인다.

 



“나도 사랑해.”


“풉.. 장화 신은 고양이 쿠키 사먹자.”

 



어깨에 살짝 머리를 기대며 키들거린다.  장화 신은 고양이 쿠키라니, 그들의 일상에 참으로 어울리는 간식이다.

 




 

비밀번호 눌리는 소리가 아무도없는 복도에 울려 퍼진다.  불꺼진 방 안에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들어선 종대가 현관에 가방을 아무렇게나 내려둔다.  불을 키자 눈 안에 담기는 방의 모습은 매일 보는 것인데도 전혀 편안하게 느껴지지가 않는다. 종인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이 집의 모든 것이 쓸쓸하다.  힘없이 처진 입 꼬리.  조금이라도 위안을 얻을까, 하여 냉장고에서 캔 맥주를 꺼내 한 모금 들이키지만 소용이 없다.  끼니를 걸러 속이 쓰리다.  몸 안에 종인이 사는 건 아닐까, 생각해보고혼자 웃어버리고 말았다.  밥도 안 먹고 뭐했냐며 위장을 콕콕 찌르고 있는 김종인 세포, 상상만으로도 귀엽다.

 



“쳇.. 괜히 생각했어.”

 



보고 싶다.  그를 만날 수 있는 주말이 되려면 아직 3일이나 남았는데 말이다.  종대가 툴툴거리며 TV를 튼다.  볼륨을 높이고 리모컨을 소파에 던져놓고는 다시 냉장고 앞에 선다.  혹시나하고 텅텅 비어있는 안을 들여다보지만 답이 없다.  빨리 문 닫아! 삑삑거리는 냉장고 소리에 결국 옥수수 통조림을 서둘러 꺼내고 문을 닫았다.  흰 나무 식탁에 홀로 앉아 숟가락으로 통조림을 퍼먹으며 마시는 맥주란,

 



“맛 없어..”

 



10시를 가리키는 시계를 보며 오늘도 야근인가? 생각하고 있는데 핸드폰이 울린다.

 



“끝났어?”


‘응, 이제 나왔어. 어디야? 밥 먹었어?’


“나 집, 당연히 밥 먹었지이! 너는?”


‘회의하면서 샌드위치 먹었어.’


“피곤하겠다, 왜 맨날 야근이야?”


‘이번 달은 좀 바쁘네.. 넌 오늘 어땠어? 할만해?’


“응, 영화 신기해.”

 



공연이 끝나고 쉬고 있던 중, 지인의 소개로 영화 음악 작업에 참여하게 되었다.  얼마 전부터 회사원 연인처럼 일찍 나가서 늦게 들어오는 생활을 하고 있으니 저가 회사원이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생각뿐이다.  그리고 야근을 밥 먹듯이 하는 종인의 고된 하루를 헤아리게 되었다.  이렇게라도 알아서 다행이다.  안 그랬으면 밥 먹었냐고 물은 그에게 솔직하게 ‘지금 통조림이나 퍼먹고 있는데 이걸로는 도저히 생명을 연장할 수가 없다. 그러니 여기로 퇴근해서 나와 밥을 먹고 내일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서 출근을 해라.’ 라고 말했을 거다.

 



‘보고 싶어..’

 



고단한 목소리가 가엾다.  품에 안아 토닥토닥- 잠을 재워주고 싶다.

 



“나도, 보고 싶어서 죽을 지도 몰라.”


‘죽으면 안돼, 그럼 나도 죽을 거야.’


“거짓말, 예쁜 여자랑 바람날 것 같아!”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마.’

 



핸드폰 저 편에서 정색하고 있을얼굴이 떠올라서 크게 웃어 버렸다.

 



‘금요일에 바다 가기로 한 거 잊지않았지?’


“응, 회 먹을 거잖아아.”


‘바보, 먹을 거 생각밖에 안 하지? 저녁 먹은 거 맞아?’



 

뜨끔-

 



“먹었어! 지, 지수가 차 빌려주신대?”


‘맞다, 그래서 말인데 목요일에 우리 집에서 자자. 다음날 바로 출발하게.’


“알았어.”


‘옷 챙겨, 가을이라 추울지도 몰라.’


“네, 네~ 아, 지수한테 미리 말해놔! 나 자고 가는 거!”


‘풉.. 알았어.’


“얼른 들어가서 전화해, 지하철 사람 많지?”


‘응, 집 가서 할게.’

 



핸드폰을 내려두고 종대는 식탁 위로 팔을 괸다.  노란 옥수수 알갱이를 숟가락으로 으깨면서 멍-하니 TV로 시선을 던진다.  여러 사람들이 나와 시끄럽게 웃고 떠드는데 오늘따라 집중이 안 된다.  아무래도 여러 현장을 돌아다니느라고 저녁 식사를 걸러서인 게 분명하다.  느리게 흘러가는 밤의 시간을 깨어있기엔 영양분이 부족하다고 판단한 그는 일찍 잠자리에 들기로 한다.  잠옷으로 갈아입고 씻고 나와 핸드폰을 집는다.  식탁으로 물기가 뚝뚝 떨어진다.  집에 도착하고도 남았을 시간인데 종인에게서 전화가 없다.  막 통화 버튼을 누르려는데, 현관에서 경쾌한 버튼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뭐야아! 갑자기!”

 



핀잔 어린 말투이지만 이미 그의 셔츠에 얼굴을 묻은 채 헤헤거리고 있다.



 

“너 밥 안 먹었지?”

 



굳이 보지 않아도 그의 손에 들린게 뭔지 알아챘다.  치킨!  종대가 치킨이 들어있는 종이 백을 빼앗아 식탁으로 달려가며 ‘어떻게 알았어어?’ 묻는다.  좋아서 깡총거리는 종대를 보며 살짝 웃은 종인이 뒤늦게 허리를 숙여 구두를 벗는다.

 



“오늘은 뭐 먹었는지 말 안 했잖아.”


“뭐?”


“너 맨날 뭐 먹었는지 말하잖아, 근데 오늘은 조용하니까.. 목소리에 힘도 없고.”

 



콧등을 긁적거리며 웃옷을 벗는 종인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종대가 치킨 상자를 내린다.  매일 먹는 저녁 한 끼 걸렀다고 고된 퇴근 길을 돌아오다니, 미쳤나 봐.  어느 누가 이 애보다 날 더 사랑할 수 있을까?  어슬렁어슬렁 다가오는 종인에게 종대가 살며시 두 손을 뻗는다.  갑작스런 감동에 젖어 굳어버린 입매를 보고 종인이 미소를 띤다.  뺨을 쓰다듬으며 아이를 달래듯 ‘왜 그래~’ 말 꼬리를 늘였다.  종대는 입술을 삐죽거리면서 그의 품으로 엉겨 붙는다.

 



“일부러 온 거 아니야. 네 밥은 핑계고, 그냥 오늘 너무 보고 싶어서 온 거야.”


“.. 거짓말..”


“진짜야, 너 걸고.”


“날 왜 걸어어.. 바보야.”


“그만큼 진짜라고, 크큭.. 얼른 먹고 자자.”


“뽀뽀 100번.”

 



고개를 숙인 채 웅얼거려서 종인은 응? 하고 되묻는다.

 



“뽀뽀 100번 할 거라고.”


“아, 너무 짠 거 아니야?”


“그, 그럼 200번?”


“그래, 이따 꼭 해야 돼. 셀 거야.”


“또 사기꾼처럼 중간에 다시 셀거지?”


“어떻게 알았냐?”


“모르겠냐아! 이씨, 치킨 때문에 산 줄 알아!

 

 



 

유리창으로 둘러 쌓인 높은 빌딩, 12층에는 한 사무실만이 홀로 어둠을 밝히고 있다.  그 한 켠에 충혈된 눈을 찡그리고 있는 남자.  모니터를 어지럽게 수놓은 숫자들을 살피고 있다.  가방을 어깨에 걸며 다가온 정장 차림의 단발 여자가 종인씨, 부른다.

 



“퇴근 안 해?”


“아, 대리님. 내일 저 연차라서, 마무리하고 가려고요.”


“맞다, 바다 간다고 했지? 부럽다~ 그럼 나 먼저 퇴근할게.”


“수고하셨어요,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혼자 남은 사무실을 빙- 둘러본 종인은 빳빳하게 펴고 있던 등을 의자에 기댔다.  고단한 한숨 뒤로 몸이 늘어진다.  하루 종일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었더니 두 눈이 따끔따끔 주인에게 화를 내고 있다.  손만 뻗어 책상 위에 놓여있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휴식을 취해야지.  사진첩을 누르더니 빙그레 웃고 있다.  보고 싶다.

 
 



 

 

 

소파에 널브러져 있던 지수가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커피잔을 든다.  부엌에서 흥얼거리는 남자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  오늘도 종댕인지 방댕인지 하는 다람쥐한테 아들을 빼앗겨 버렸다.  그래서 화났냐고?  아니, 2년이 넘게 주말마다 일어나는 일인데 새삼스럽게 그럴 리가.

 



“어디로 간다고 했지?”


“강원도요.”


“조심해서 갔다 와.”


“엄마, 지금 차 걱정하는거죠?”

 



Of course, 웃는 저를 따라 웃으며 다가온 아이가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쓸어준다.  다정한 나의 천사.

 



“내일 저녁은 같이 먹어요, 오늘 출근 잘 하시고요.”


“그래, 종댕이도 데려와.”


“풉.. 그렇게 부르면 싫어한다고요.”

 



다시 부엌으로 가더니 토마토를 씻어 도마 위에 올린다.  일 중독 엄마를 두고 놀러 가는 것이 마음에 걸려 아침 식사 대용 샐러드를 준비해주고 있다.  나날이 더 자라는 것 같은 아이.  어엿한 어른이 된 종인은 이제 아무렇지도 않게 그녀에게 엄마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비록, 잔소리가 더 심해졌지만.  저 아이가 하루 끝에 늘 돌아오려는 곳이 저의 품이라는 건 정말 행복한 일이다.  외박을 밥 먹듯이 하지만, 제기랄.

 



“다 됐어요, 얼른 와요.”

 



모자는 퍽 오랜만에 함께 맞이한 평일 아침을 기분 좋게 받아들인다.  달칵- 조심스럽게 종인의 방문이 열린다.

 



“.. 안녕히 주무셨어요오..”


“Good morning, baby. 못 보던 운동화가 있길래 너일 줄 알았지.”

 



어색하게 웃으면서 종인과 눈짓을 주고 받은 종대가 지수의 맞은편 의자에 앉는다.  부스스한 얼굴을 손바닥으로 꾹꾹 누르면서 그녀를 힐끔- 쳐다본다.  샐러드를 입으로 가져가면서 지수가 심드렁하게 묻는다.

 



“다람쥐, 반지 안 꼈네?”


“네, 네? 바, 반지요?”


“그래, 우정 반지인지 뭔지.”


“아! 우정 반지! 네, 맞아요! 부, 불편해서 목걸이로 했어요, 헤..”

 



잔뜩 경직된 입 꼬리.  두 손으로 목걸이를 들어 보여주는 종대를 보며 지수가 깔깔거린다.  종인이 다가와 어깨를 꾹- 누르며 장난 치지 말라는 신호를 보냈지만 영문을 모르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다람쥐가 귀여워 쉬이 그칠수가 없다.  종인은 이마를 문지르며 종대의 옆자리에 앉는다.

 



“엄마 신경 쓰지 말고 먹어, 술이 아직 덜 깨셨나 봐.”

 



포크를 쥐어주며 놀란 다람쥐를 어르고 있다.  순식간에 주정뱅이가 된 기분이 썩 유쾌하진 않지만 눈 앞에서 사랑스럽게 웃고 있는 이들을 보니 마음이 따뜻해진다.  향긋한 커피 향기와 잘 어울리는 아침이다.  지수는 종인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고 종인 또한, 그녀에게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수는 그를 이해하기로 했다.  이런 갈등이야말로, 부모가 나서서 다그칠 게 아니라 그 편에 서서 기둥이 되어줘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다.  잘했다고 칭찬해 줄 수는 없어도 억압에지지 않기로 결심한 이들을 멀리서 지켜봐 주기로 한 것이다.  다행히 아들의 연인은 그가 모든 걸 바쳐 사랑할만한 사람이다.  착하고 해맑다.  자존감이 높아 사랑 받고, 사랑하는 법을 잘 알고 외모도 아주 훌륭하다.  유명한 피아니스트이기도 하고..  뭐야, 말하다 보니 정말 좋은 애잖아!  그리고 무엇보다 종인의 아픔을 어루만져주는 사람이라는 것은 그녀가 감사해야 할 일이다.

 



“내일 보자, 치즈 케이크 사올 테니까 다같이 와인이나 한 잔 하자고.”


“우와아! 치즈 케이크!”


“네가 그걸 이렇게 좋아하니까 줄 서서 사오게 되잖아, 망할 다람쥐!”


“헤헤, 근데 지수가 사오는 게 제일 맛있단 말이에요~ 그리고 먼저 사오겠다고 했으면서..”


“맞아요, 엄마가 얘 먹이려고 사오는 거잖아요.”


“망할 다람쥐, 망할 김종인.”

 



아들은 키워봤자 소용없다더니, 제기랄.

 

 




 
 

마음이 트이는 기분을 안겨주는 바닷길.  평일이라 해변에 인적이 드물다.  파라솔 하나를 빌려 모래에 꽂고 큰 돗자리 하나를 펼쳐놓은 자리에 둘이 소꿉장난을 하듯 앉아 있다.  그들 사이에는 핫바, 피자, 각종 과자들(초코 송이 포함), 과일 음료가 늘어져 있고 감미로운 음악이 핸드폰에서 잔잔히 흘러나오고 있다.  옛 이야기를 하다가 종인과 바다를 오기로 했던 여름날이 떠올라 결정된 데이트였다.  그 때는 아주 어리고 보고 싶은 여러 얼굴들이 함께였다.

 



“오늘 형들은 못 온다고 했지?”


“응, 경수도 시간 겨우 뺐대.”


“우리 늦는 거 알면 엄청 뭐라고 하겠다, 도갱!”


“박찬열은 나 갈구겠지, 바다를 왜 갔냐고..”


“크크큭.. 내가 지켜줄게.”


“근데.. 애들한테는 우리 언제 말하지?”


“나, 난 못 해! 절대로!”


“그래도.. 나중에 알면 더 화내지 않을까? 벌써 오래 미뤘는데..”


“그 미친 놈들이 얼마나 지랄할지 눈에 빤해! 지금도 살살거린다고 졸라 뭐라고 하잖아아, 으헝.. 근데 사귄다고 해 봐? 날 죽이려고 들 걸, 너 꼬여냈다고!”


“한 번은 겪어야 될 일이야.”


“그, 그건 그렇지. 근데.. 나 무서워..”

 



급격히 시무룩해진 종대가 종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다.

 



“변하면 어떡해.. 애들이 우리를.. 이해할 수 있을까?”


“.. 그럴 거라고 믿는데..”


“이건 다른 문제야, 그냥.. 좀 복잡해.. 다른 사람은 몰라도, 형들이랑 애들이 그러면 난.. 너무 힘들 것 같아.”


“알았어.. 조금 더 생각해보자.”

 



종인이 안심하라는 듯 그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춘다.  선선한 바닷바람이 그들의 머리카락을 간질인다.  멀리서 들려오는 것 같은 파도소리가 눈앞에서 부서졌다.  몇 억년의 세월을 머무는 바다.  제 어깨에 담요를 둘러주는 종인을 저 바다만큼 깊은 두 눈동자에 담는다.

 



“근데, 우리 만난 거 햇수로 10년 넘은 거 알아?”


“17살에 처음 만났으니까.. 진짜네, 와..”


“짱이지? 우리 다시 만난 것도 벌써 3년이고.. 시간 너무 빨라.”


“그러게, 신기하다.”


“뭐가?”


“그럼 우리 10년 동안 사랑한 거야?”


“대충 생각하면 그렇지?”


“왜 대충이야?”


“너 연락 두절 됐을 때, 내가 너 사랑했을 것 같아? 이 나쁜 놈아아!”


“난 사랑했는데..”


“닥쳐, 닥쳐. 입술 깨물어 버릴 거야!”

 



장난스럽게 제 팔을 밀치는 종대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종인이 환하게 웃는다.  너무 행복한 시간이 때때로 두려울 때가 있다.  혹시라도 저가 이 소중한 시간을, 황홀한 감정을 세월의 힘에 억눌려 잊어버릴까 봐.  그리고 불현듯 그 두려움을 곱씹다가 불행의 그림자를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악몽에서 깨어나 곁에 천사같이 잠들어있는 이를 보고 있노라면, 모두 부질없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곤 한다.  꿈속에서조차 나를 놓지 못하도록 손을 꼭 붙잡는다.  과거나 미래에 허비할 시간이 없다.  지금은 그저 품에 안겨 사랑 받고 위로 받을 수 있는 그를 사랑하는 것밖에는 중요한 것이 없다.

 



“우리 20주년 때는 유럽 여행 가자, 배낭 여행!”


“좋아, 근데 내년에도 어디 가기로 하지 않았나?”


“내년 휴가? 하와이 가기로 했잖아아.”


“가기로 한 데가 너무 많아서.. 이제 적어놔야겠어.”


“아니다, 우리 내년에 팔라우 가기로 했었나?”


“몰라, 너무 많다니까.”


“그럼 그냥 차례대로 다 가, 다아!”


“다 가려면 50년은 더 같이 있어야 돼.”


“그럼.. 안 그러려고 했어?”


“아니, 죽을 때까지 너만 사랑할거야.”


“끄아아아항, 뭐래애! 느끼해, 변태 같아!”


“죽을래? 이리와, 너.”

 



나뭇가지로 새겼던 지난 여름날의 약속처럼 우리는 지금도 함께다.  오늘 흐려진 그 약속을 다시 새겨본다.  거친 파도에 휩쓸려 이것이 닳고 닳아 사라질 때쯤 우리는 손을 잡고 돌아올 것이다.  웃으며 그 새 쌓인 또다른 지난 날을 추억하고 그렇게 계속 약속을 되새기겠지.  

 
 

속삭이는 방, 302호에서 우리가 만났던 날이 떠오른다.  그 곳을 가득 채우던 이들의 숨소리, 목소리, 웃음 소리와 울음 소리.  그리고 너의 피아노 소리.

 



“사랑해.”

 



그렇게, 우리는 늘 속삭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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