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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첸] Murmuring Room 20 上

속삭이는 방

 


 






20-1. 달빛을 찾습니다

 


 

처음 같이 살게 된 그들은 무척이나 어색해서 숨 쉬는 것마저 불편하게 느꼈다.  통화를 하거나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과 한 집에서 사는 것은 너무도 다른 것이었다.  특히, 지수는 아기도 아니고 어른도 아닌 애매한 제 아이를 어떻게 다뤄 주어야 할지 난감했다.  사실 아기였거나 완전한 어른이었어도 별반 다를 게 없었겠지만.  제 취향이라곤 전혀 고려되지 않고 꾸며진 방을 보며 종인은 조금 놀란 듯 흠칫- 뒷걸음질을 쳤다.  그녀가 그 동안 사두었던 것들로 채워진 방은 아기 방이라고 하기엔 딱딱했고 다 자란 사내 아이 방이라고 하기엔 너무 유치했다.  손가락만한 돌고래들이 달려있는 모빌을 건드리며 그는 소리 없이 웃어버리고 말았다.  뒤에서 잔뜩 긴장한 채 그를 지켜보던 지수는 얼굴을 붉히며 ‘그건 네가 2살 때산 건데, 보내진 못 하고, 그러니까 너무 예뻤는데.. 소, 소리도 난다?’ 그러곤 떼버려도 된다고 덧붙였다.

 



“그냥 둘게요. 좀 옆으로 달아도 될까요, 일어날 때 부딪힐 것 같은..”


“무, 물론이지! 내가 할게!”


“근데 저건 음.. 치우는게 낫겠어요..”

 



코를 긁적거리며 말한 그의 눈길이 닿은 곳에는 다리 한 쪽도 들어가기 힘들 것 같은 알록달록한 아기 팬티가 보란듯이 걸려 있었다.

 


 

생전 입어본 적이 없는 앞치마를 두르며 그녀는 소파에 빳빳하게 앉아있는 뒷모습을 훔쳐보았다.  또 코 끝이 찡해져서 작게 욕을 읊조렸다.  왜 자꾸 눈물이 나는 거야, 제기랄.  부엌의 작은 창문으로 이웃집 터너씨가 세차를 하는 게 보였다.  언제나처럼 마른 몸이 호스에 휘둘리고 있다.  공허한 일상에 드디어 그가 날아들었다.  나의 아기, 나의 천사.

 


지수는 친절하거나 상냥한 엄마와는 거리가 멀었다.  모든 것에 서투르고 침착함이라곤 찾아보기 어려워 걸핏하면 깨뜨리는 접시와 컵의 수가 상당했다.  이런 것들을 치우는 게, 그녀의 뒤치다꺼리를 하는 것이 종인의 일과가 되었다.  처음에 본인이 치우겠다며 나섰다가 손을 크게 베여 걱정을 끼친 이후로 지수는 얌전히 종인이 하는 대로 두었다.  공부를 가르칠 때에는 서슴없이 그의 머리를 쥐어박고 ‘너 내 아들 맞니? 이런 쉬운 걸 틀리다니, 머저리 자식이구나.’ 말하고는 그럼 내가 머저리가 되는 거야? 라고 물어 저를 웃게 만들었다.  그녀는 기업 법무팀에 소속된 변호사였기 때문에 일주일에 하루를 빼고는 아침 일찍 나가서 저녁 늦게 돌아왔다.  고작 하루뿐인 휴무를 꼭 종인과 함께 보내길 원했는데, 거무튀튀해진 눈가에 에센스를 들이부으며 ‘하나도 안 피곤해.’라며 웃는 눈이 반쯤 감겨 있는 게 부지기수.  저가 괜찮다는데도 고집스럽게 이 곳 저 곳을 데리고 다녔다.  특히, 쇼핑하러 가는 걸 좋아했는데 뭐든 종인이 고개를 저어도 제 마음에 들면 오히려 저가 어린애처럼 ‘Please~’ 하며 팔을 흔들어 기어코 종인의 손에 들려 주었다.

 



“난 너랑 쇼핑할 때가 좋더라.”

 



앞을 보며 운전 중인 그녀에게 살짝 고개를 돌리며 왜요, 묻는다.

 



“거기 있는 사람들이 내 잘생긴 연하 애인을 부러워 죽겠다는 눈으로 쳐다보거든, 하하하!”

 



물끄러미-

 



“하하.. 네가 아들인걸 알면 기절할거야.”

 



심드렁히 네, 대답하며 안전 운전 하세요, 덧붙인다.  차선을 넘겨 경고음이 울렸다.  흥, 내 아들이지만 정말 무뚝뚝하단 말이야.

 



“네, 네~ 왕자님, 분부대로 하겠나이다.”

 



샌드위치를 사오겠다며 달려가는 지수를 보며 종인이 살짝 웃어 보였다.  높은 구두 때문에 한번 휘청거리더니 저를 돌아보며 뭐라고 소리친다.  아마 ‘웃지마, 제길!’ 같은 말일 거다.  그녀는 누군가의 엄마 같은 모습은 전혀 아니지만 다른 엄마들과 같은 마음으로 절 들여다 본다.  평소에는 잘 느껴지지 않지만, 이따금 술에 취해 새벽에 들어오는 날이면 지수는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고 들어와 한참을 앉아있다 나가곤 했다.  취한 그녀는 훌쩍거리면서 미안하다고 하거나 고맙다거나 또는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비틀거리면서 다가와 자는 척 눈을 감고 있는 제 이마에 따뜻한 입술을 내리면서 속삭였다.

 



“넌 나의 전부야.”

 



이마로 떨어진 눈물이 너무 뜨거워서 종인도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불행했던 나날을 그들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지워가는 중이었다.  때때로, 그것은 어두운 터널을 만나 주춤거리기도 했지만 잠시 뿐이었다.  서로의 상처를 보듬으려는 같은 생각 때문에 둘의 상처는 빠르게 아물었다.  흉터가 남아도 괜찮다.  후에 그것을 쓸어보며 둘은 평생을 함께 ‘추억’이라는 이름을 말하게 될 것이므로.

 

 

 

“집에서 쫓겨나거나 거렁뱅이 신세여도 함께했다면 좋았을 텐데.. 왜 이렇게 늦게 알아버렸을까요? 왜 모두에게 상처를 남기고서야 돌아올 수 있었을까요..”


‘두려움 때문이지, 넌 그걸 극복한 거야.’


“차라리 절 미워했으면 이렇게 가슴이 아프진 않았을 거에요, 종인이는 절 그저.. 절 기다려줘요.. 한 시간이 걸리는 계란 프라이를 맛있다고 해줘요, 껍질이 보이는데..”


‘그 애라면 그러고도 남을 거야. 그렇다고 파이는 만들 생각도 하지 마! 그건 정말 별로야.’


“우.. 너무해요, 안나. 늦은 시간에 전화해서 미안해요, 할 말이 있었어요.”


‘결정한 거야? 괜찮겠어?’


“아뇨, 안 괜찮아요.  하지만 지금은 저 애 생각뿐이에요.”

 



멀리 떨어진 곳에서 각자의 전화기를 든 그녀들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건 사랑을 품고 있었다.

 

 

말끔한 정장 차림의 여자가 비틀거리며 초인종을 연달아 누른다.  곧 키가 큰 남자가 문을 열고 나와 그녀를 부축했다.

 



“이래서 간이 남아나겠어요?”


“아들~ 내일 뭐할까, 디즈니랜드 가서 미키랑 놀래?”


“그럼 이렇게 취해서 들어오지 말았어야죠.”


“쳇, 날이 갈수록 잔소리만 심해져!”


“지수는 주정이 심해지고요.”



 

그녀는 웃으면서 제 가방을 받아주는 아이를 올려 보았다.  5년 동안 한 뼘이나 더 키가 컸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늘 방구석에 처박혀서 공부만 하기에 내가 먹여 살릴테니까 놀기나 해! 라고 말했더니 귀엽게 콧등을 긁적거리며 재미있어서 하는 건데요, 답해서 놀라게 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그 들어가기 어렵다는 유명 공대에 철썩 붙어 지금은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지수는 졸업 시험에 합격한 종인에게 대수롭지 않은 척,

 



“날 닮긴 닮았구나.”

 



초콜릿 케이크를 사 들고 온 게 전부였다.  하지만, 얼마 안 되어 이웃들과 회사 사람들에게 직접 구운 파이를 나눠주겠다며 부엌을 온통 엉망으로 만들어 종인을 애먹였다.  그녀는 파이 포장지에 정성스레 직접 출력한 카드까지 붙였는데 거기에는 ‘내 아들이 M대를 졸업했다, 으하하하!’ 라고 적혀 있었다.  종인은 그것들을 내려다보며 몰래 버릴지 말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야했다.  지독한 극성 엄마였다.  그녀는 붉은 입술에 미소를 띤 채, 소파에 벌러덩 누워 버렸다.

 



“조니니! 나와 봐, 할 얘기 있어!”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 핀잔하며 물이 든 컵을 들고 나온다.  지수는 받아 든 컵으로 입술을 내리며 눈으로 가방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종인이 옆에 내려두었던 것을 가리키자 엄지를 치켜들며 한껏 높아진 목소리로 역시 내 아들이야.

 



“왜요?”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크고 까만 아기의 앞 테이블로 무언가 내밀어졌다.  

 

동그랗게 떠진 눈이 사랑스러워 그녀는 당장이라도 그의 뺨에 입을 맞추고 싶었지만 가까스로 참았다.  얼굴에 화장을 묻히면 다음날까지 얼마나 투덜거리는지 모른다.

 



“이건..”


“맨날 돌아가고 싶다고 징징거리니까, 시끄럽다고!”


“하.. 제가 언제 그랬어요..”

 


 

종인은 저와의 새로운 생활에 불만이라곤 전혀 없는 이처럼 굴었다.  몇 시간 동안 애썼지만 밍밍한 맛이 다인 밥과 반찬을 꾸역꾸역 다 먹고 맛있다는 말을 꼭 해주었고, 학교가 멀어도 가끔 엄마가 데려다 주는 시간이 길어 좋다며 웃었다.  걱정했던 학교 생활도 안정적으로 해내어서 뿌듯한 마음으로 교수를 만날 수 있었다.  자주 언급하진 않았지만 친한 친구들도 몇 있는 모양이었다.  모든 게 좋아 보였다.  하지만, 아무리 엉망진창이어도 저는 종인의 엄마였다.  아이가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숨기지 못하는게 있었다.  한국에 두고 온 소중한 이들에 대한 그리움.  가끔 인기척없이 집에 들어와 종인의 방문을 열어볼 때마다 그는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 지갑 속에 있는 사진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그 눈빛은 허망한 색으로 젖어 제 마음까지도 허우룩하게 만들었다.  입국할 때, 공항에서 핸드폰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그들과 연락까지 두절되었다는 것을 안 건 한참이 지난 후다.  갑작스러운 작별로 인한 일시적인 그리움일거라고 대수롭지 않게 넘긴 것이 해를 넘어가자 괜한 죄책감이 쌓여갔다.  종인에게서 그들을 빼앗은 것 같은 기분마저 느껴졌다.  그는 저를 위해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비행기에 올랐을 것이다.  저보다 훨씬 어른스러운 결정이었다.  이제는 조금 엄마다워질 필요가 있었다.  눈앞에 놓인 비행기표를 매만지면서 그는 어쩔 줄 몰라 했다.

 



“먼저 가 있어, 한국 지사로 곧 발령 날 거야. 뼈빠지게 일한 보람이 있어, 내가 인사 담당자랑 얼마나 술을 마셨는지..”


“정말.. 괜찮겠어요..?”


“그럼. 진작 이렇게 했어야하는데, 잘 몰라서.. 미안해.”

 



지수는 동공이 커졌다.  덩치가 산만 한 아들이 처음으로 제 품에 와락- 안겨 들었기 때문이었다.  따뜻한 행복감이 온 몸으로 내려 앉는다.  귓가에 고맙다고 속삭이는 목소리에 기쁨이 가득해서 그녀는 더 빨리 이렇게 하지 못한 것이 조금 후회스럽기까지 했다.

 

 




따사로운 햇빛이 드리운 캠퍼스를 가로지르며 크게 하품을 한다.  막 중간 고사가 끝난 참이다.  흰 악보 뭉치가 떨어질 듯 아슬아슬하게 옆구리에 걸려 있는데, 그 주인은 멍-한 표정으로 터덜터덜 걷고 있다.  밤새 벼락치기를 한 탓에 얇은 입술이계속 하품으로 뻐끔거린다.  머릿속은 온통 조그맣고 안락한 저의 자취방 한 켠에 널려있는 이불 속이 얼마나 포근할지에 대한 생각뿐이다.

 



“야, 김종대! 시험 잘 봤냐?”


“.. 잘 봤겠냐아.. 졸려죽겠어, 바로 뻗을 거야.”


“밥 먹고 가! 햇반 다 떨어졌다며.”


“아, 싫어. 잘 거야, 잘 거야. 토할 것 같다고, 우엑-“


“미친 놈. 어? 저 사람 오늘도 있네?” 

 



수면 부족으로 정신이 반쯤 나간 종대가 친구가 가리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곧 그의 반쯤 감겨있던 눈이 짙은 빛을 띠며 크게 떠졌다. 

 



“.. 어어..?”


“너도 알아? 며칠 전부터 정문에 죽치고 있대, 누굴 찾는 건지 뭔지. 잘 생겼다고 동아리 여자애들이 난리던데, 벌써 몇 명 꼬였네.”

 



이죽거리는 친구의 말이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커다란 정문 기둥 앞에 서 있는 남자는 지난 몇 해 동안 잊은 채 살아야했던, 그리운 이가 분명했다.  키는 더 컸지만, 여전히 까무잡잡한 피부에 뚜렷한 이목구비.  날카로워 보이는 인상이 그대로다, 처음 봤을 때처럼 그대로.  달라진 게 있다면 그 때와 달리 어른스러운 차림새.  그리고 그를 마주한 저의 마음뿐.  익숙한 느낌이라곤 전혀 찾을 수 없게된 사이에서 종대는 당황한 채 걸음을 멈추고 멀리서 그를 바라 보았다.  꽁꽁 숨겨두었던 그에 대한 감정들이 쿵쾅거리며 아우성이다.  내보내달라고 소리치지만 그럴 수 없다.  이미 너무 오랜 시간이 흘러버린 뒤다, 자그마치 5년.  종인은 저를 둘러싼 여자애들 사이에서 난처한 표정으로 코 끝에 손을 올린 채였다.  저 버릇은 그대로..  갑자기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도망쳐야 돼!  잊고 있던 아픈 기억들이 되살아나 가뜩이나 혼미한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인상을 찌푸린 채 발길을 돌린다.

 



“안 갈 거야? 왜 그래?”


“나, 나 저쪽으로 간다! 나중에 봐!”


“어어! 야, 김종대!”

 



김종대? 익숙한 이름에 종인의 고개가 반사적으로 들렸다.  꽤 먼 거리에서 황급히 계단을 오르고 있는 뒷모습이 두 눈에 크게 담겼다.  확신을 하기도 전에 이미 앞을 가로막은 사람들에게 사과의 말을 내뱉으며 몸이 그 쪽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날 못 본 걸까?

 



“김종대! 종대야!”

 



잠시 움찔-했지만 도망치는 이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이로써 일부러 저를 피한다는 게 확실해졌지만 종인은 멈출 수가 없었다.  가슴이 따끔거렸다.  하지만, 꿈 속에서까지 그리던 룸메이트가 눈 앞에 있는데 무릎 한 번 꿇어보지 못한 채 포기할 수 없다.  그를 기다리게 했던 만큼, 아프게 했던 만큼 용서를 구할 준비가 얼마든지 되어 있었다.  그를 잃어버렸던 5년 사이, 종인의 마음은 어렸을 적보다 훨씬 명확하고 성숙해져 있었다.  얼마 안 가 큰 가로수 밑에서 허둥지둥 내달리던 종대가 요란하게 넘어졌다.  저의 간절함 때문에 그런 걸지도 모른다.  악보가 흩날렸다.  종인이 그 곁으로 발걸음을 빨리 했다.

 



“씨잉..”


“괜찮아?”

 



주저앉아 긁힌 상처로 빨개진 종아리를 내려다 보고 있는 이에 다가서니 마음이 울렁거렸다.  괜찮은지 물은 목소리가 아주 작았다.  종대는 그를 봐주지 않았다.  가만히 앉아 있다가 주변에 흩어진 악보를 줍기 시작했다.  하얀 뒷목이 여전히 가늘다.  종인은 당장이라도 그를 끌어안고 싶었지만 차갑게 내쳐질까 두려워 머뭇거리다가 악보로 손을 뻗었다.  흙 묻은 악보들을 내밀자 매몰찬 손길이 그것들을 빠르게 앗아갔다.

 



“종대야..”


“따라오지 마.”

 



얼굴을 보기는커녕 저의 목소리조차 들어주지 않고 다시 등을 돌려버린다.  종인은 비어버린 제 손을 내려다보며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리고 다시 그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누가 보면 미치광이 스토커로 여길지 모르지만 상관 없었다.  지금은 아무래도 좋다.  그의 마음이 이전과 같지않아 저가 큰 상처를 입더라도 잠시만이라도 그 얼굴을 보고 잘 지냈는지 묻고, 또 허락해준다면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한 것에 대해 사과하고 싶었다.  만약에, 끝까지 용서해주지 않으면 어떡하지?  생각만으로도 절망적이다.  종대는 한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학교에서 꽤 멀어진 주택가가 나타나자 그제서야 우뚝 멈춰 섰다.  종인도 그를 따라 걸음을 멈췄다.

 



“가.. 가라고! 꼴도 보기 싫어!”


“.. 미안해. 잠깐만 얘기하자, 그러면 갈게..”

 



여전히 바보 같다.  가란다고 진짜 가겠다고 말하는 걸 듣고 있으니 종대는 울분으로 가슴 속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할 얘기 없어, 네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 평생 싫어할 거야, 절대 용서 안 해!”

 



그렇게 소리친 종대는 겹겹이 늘어선 집들 사이로 재빨리 모습을 감춰 버렸다.  종인이 팔을 뻗으며 급히 쫓았지만 원래 그랬던 것처럼 그 골목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땀이 베인 이마를 짚었다.  입술이 떨렸다.  훤한 대낮에 어딘지도 모르는 골목길에 홀로 남겨진 어른 남자는 창피한 줄 모르고 눈물을 떨구고 있다.  이제 영영 볼 수 없는 걸까?  나, 괜찮을까?  함부로 내뱉은 약속으로 묶어둔 채 내버려둔 이가 얼마나 쓸쓸한 시간을 보냈을지 가늠이 안 된다.  차라리, 저를 잊고 잘 지냈다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돌아가야 된다면, 그 편이 훨씬 마음이 덜 아프다.  이미 오래 전에 미련한 바보인 저를 잊고 잘 지냈다면..

 



“너 지금 울어?”

 



위쪽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종인은 고개를 들었다.  이질적인 눈물로 얼굴이 젖어 있었다.  다른 이들이 봤다면 적어도 1년은놀림거리가 됐을 것이다.  햇빛 때문에 베란다에 서 있는 얼굴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잘못은 지가 해 놓고 왜 울어어! 이씨, 거기서 꼼짝 말고 기다려!”

 



종인이 서 있던 곳의 앞 건물에서 슬리퍼를 끌고 나온 종대가 손에 쥔 휴지 뭉치를 눈물 범벅 얼굴에 밀었다.  종인이 훌쩍거리며 팔을 뻗자, 질색을 하며 물러난다.

 



“한 번만..”

 



몇 분 전까지만 해도 갈아 마셔도 시원치 않던 원수가, 5년 전처럼 달콤하게 속삭였다.  종대는 사납게 눈을 찢었다.

 



“이게.. 너 진짜..”

 



슬리퍼 끌리는 소리가 골목에 울렸다.  오랜만에 팔에 가득 안아보는 이에게서 좋은 냄새가 났다.  잠 오는 냄새.  어렸을 적 사근사근한 우리를 떠오르게 만드는 그런, 사랑스러운 냄새.  종대는 끌어안은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올라간 입 꼬리에 예쁜 웃음이 걸려 있다.

 



“나쁜 놈, 절대 용서 안 해 줄거야아.. 알았어? 지금 이건 네가 우니까, 그래서.. 그런 거라고!”

 



그가 보지도 않는데 종인은 연거푸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드디어 제 품에 들어온 ‘달빛’을 절대 놓지 않겠다는 듯 꽉 끌어 안았다.  검은 셔츠에 매달린 종대의 손에도 힘이 들어갔다.  애틋한 재회였다.

 

 

 



20-2. Go back

 

 


반들반들한 4층짜리 건물 한 켠이 달빛 기우는 걸 잊은 채 늦도록 환하다.  얇은 커튼 사이로 작은 인영이 팔을 괸 채 밖을 내다보고 있다.  손가락에 매달려있는 하얀 개비에서 피어 오른 연기가 어둠으로 흩어진다.

 



“후.. 과제 한다니까.”


‘담배 피우는 게 과제야?’


“무, 무슨 상관이야! 얼른 잠이나 자, 애들 깰라.”


‘내 방이야, 너 잘 때까지안 자.’


“으.. 언제 끝날지 몰라, 먼저 자.”


‘싫어.. 아무 말도 안해도 되니까 끊지 마.’


“방해된다고오. 내가 그렇게 좋아?”

 



장난기 벤 입술, 먹구름에 가려진 대신 그의 눈가에 내려앉은 반달.

 



‘응, 보고 싶어.’

 



미쳤나 봐, 신경질적으로 말하는 이의 표정은 달기만 하다.  존재감을 잊었던 담배에서 잿빛이 떨어진다.  종대는 핸드폰을 어깨와 뺨 사이에 둔 채 옆에 있는 빈 참치 캔에 담배를 비벼 끄고는 망설임 없이 쓰레기통에 넣어 버렸다.  그리고 책상 위에 놓여있는 담뱃갑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네 개비가 꽂혀 있다.  신경 쓰여.  서랍 안으로 던지듯 집어넣어 버린다.

 



“내일 몇 시에 온다고?”


‘일어나는 대로 갈게.’


“나 완전 늦게 일어날 건데?”


‘집 앞에서 기다릴게.’


“.. 마음대로 해라.. 바보야.”

 



다정하다.  원래도 그랬지만-이것에 유혹 당했었다- 돌아온 이후에는 지나칠 정도.  아마 저가 콩 심은 데 팥 난다고 해도 그렇다고 해줄 것 같다.  3주 째, 주말마다 그는 종대를 만나러 고속버스로 왕복 4시간 거리를 오가고 있다.  소망원은 시골 구석에 있으니 마을버스나 터미널에서 또 지하철까지 타야하는 여정을 헤아리면 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런데도 피곤한 기색 한번 내비치지 않고 말 그대로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겠다 표정만 짓고 있어서 종대는 머리가 복잡해졌다.  우린 어떻게 되는 거지?  우린 지금 뭘 하고 있는 걸까?  책상 앞에 앉은 그가 두꺼운 책을 펼치며 얌전히 제 목소리를 기다리고 있는 이에게 넌지시 묻는다.

 



“자고 갈 거야?”

 



곤란함이 잔뜩 묻은 정적이 흐르더니 이번에도 아니,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왜? 그럼 다음 날 또 오질 말던가아!”


‘싫어, 갈 거야.’


“그럼 자고 가라고! 어차피 다음 날 또 올 거잖아.”


‘안돼..’

 



종대가 작게 답답해 돌아가시겠네, 읊조리자 천진한 웃음 소리가 들려온다.  그러면서 죽으면 안돼, 귀엽게 속삭여서 종대는 속도 없이 웃어버리고 만다.  아무리 시간이 많이 흘렀다지만 거의 2년 동안 한 침대 생활을 했는데 이제 와서 내빼는 꼴이라니.  거기다가 손이 스치거나 저가 예전처럼 팔을 겹치기만 해도 아연실색을 하며 은근슬쩍 몸을 떼버려서 사실, 심기가 매우 불편하다.  마치 흑심 품은 늑대라도 된 기분을 지울 수가 없다.  난 예전의 김종대가 아니라고, 흥!  누가 뽀뽀라도 해줄 줄 아나?  속으로 소리친들 뭘 하나, 종인에게는 들릴 리가 없는데.  하지만, 그의 의중도 모르면서 김칫국 마시지 말라는 말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가 ‘오랜만인 친한 친구’를 찾아, 아니면 ‘깊은 마음을 나눴던 애,애..  아니 사람’을 찾아왔는지가 확실하지 않으니까.  하고 있는 걸 보면 후자에 가까운데 예전에도 워낙 저희는 또래에 비해 친근하게 굴던 사이라 헷갈리기만 한다.  스킨십을 꺼리기도 하고.  쳇, 그러면서 보고 싶다는 말은 왜 하는 거야?  밀당하냐?  나쁜 놈.  그리고 정말 후자 쪽이라고 해도 이제 마냥 어린 나이가 아니라 이것 저것 재고 따져야 할 게 많아졌다.  단순히 마음 간다고 해서 쪽쪽거려선 안 된다고!  두 눈을 부릅떴지만 머릿속에는 그와 설익은 입맞춤을 나눴던 지난 날의 피아노 실이 떠오른다.  입술이 뜨거워지는 느낌에 화들짝 놀라 날개 뼈를 의자에 부딪혔다.

 



“아아!”


‘왜? 어디 다쳤어?’


“너 안 끊었어? 뭐해?”


‘네 생각.’


“.. 너 미국 갔다 오더니 되게 이상해진 거 알아?”


‘풉.. 이건 그거랑은 별개인데..’


“뭐가? 아, 맞다! 도갱한테 전화해봤어?”


‘하긴 했는데.. 무서웠어..’


“끄하하항, 무서워써요~? 크큭.. 뭐래?”


‘욕만 하던데..’


“푸핫, 그래도 화 풀렸나보네. 전화 받은 거 보면.”

 



지난 주 저희의 단체 카톡방에 자취를 감췄던 종인의 말풍선이 다시 떠올랐다.  그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모두 놀란 것 같지만 다행이 진심으로 화를 낸 사람은 없었다.  단, 경수가 나가버렸지만.

 



 


 


어떻게 됐든 뿔뿔이 흩어져 있던 아홉이 내일 드디어 온전히 모인다.  마침 중국으로 돌아갔던 장이씽과 프라하에 가 있는 백현도 들어왔고.  우리 모두 간절한 마음이긴 했나 보다.  이렇게 딱 타이밍이 들어맞는 걸 보면.  가끔 시간이 맞는 몇몇끼리 만나 아홉이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은 앞으로 없을 거라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우린 그 기적 같은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어떤 모습일지 안 봐도 눈에 빤해서 벌써 마음이 흐물흐물 녹아버릴 것 같다.  그들에게 중죄인 격인 종인은 조금 겁이 난다고 말했지만, 홀가분한 목소리였다.  캄캄한 방 안에 핸드폰 불빛만이 환하게 주인의 얼굴을 밝히고 있다.  그 주인은 뜨거워진 귓가를 문지르며 고개를 돌려 하품을 한다.  새벽 2시가 넘도록 과제를 끝내지 못한 이를 기다리는 것이 어느새 일상처럼 되어 버렸다.  종인이 침대 머리로 고개를 젖히며 눈을 감는다.  피곤하다.

 



‘자고 갈 거야?’

 



느긋하게 감겨 있던 눈이 반짝 떠졌다.  오묘한 표정으로 콧등을 긁적거린 그는 조심스럽게 아니라는 답을 내뱉는다.  왜! 하고 빽빽거리는 종대를느물거리며 달랜다.  아마 불만투성이입술을 내밀고 있을 것이다.  옆에 있었다면 그 입술을 확 깨물어 버렸을지도 모른다.  예전에는 어떻게 한 침대에서 몸을 딱 붙인 채 쿨쿨 잘도 잤는지 모르겠다.  정말 의문이다.  요즘 저는 정상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종대와 재회하고 난 이후부터.  품에 안긴 익숙한 향기에 심장이 멎을 뻔 했다.  거기까지라면 이렇게 곤란하지도 않았겠지.  깊은 한숨이 그의 침대 위로 내려 앉는다.  이로써 두 가지는 확실해졌다.  하나는 우리가 절대 예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저가 아주 건강한 성인 남성이라는 것이다.  아, 우울해.  해맑은 얼굴을 내려다보면서 불순한 생각을 하게 되는 건 썩 기분 좋은 일이 아니다.  죄짓는 기분.  내일 제대로 쳐다볼 수나 있을까?  그는 두 손을 모았다.  김종대가 너무 귀여워 보이지 않게 해주세요, 죄송합니다.

 



‘지잉-‘

 



경수다.  몇 번이나 거절 당한 끝에 가까스로 통화를 할 수 있었다.  세상 욕이란 욕은 다 들은 것 같다.  제가 알던 경수가 맞는지 확신할 수가 없어서 혼나는 동안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만큼 그에게 실망감을 안겨줬다고 생각하니 씁쓸함을 지울 수가 없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린 그 때처럼 많은 것을 나누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벌써, 따뜻한 감정 위에 나란히 앉아 있다.  <김종인, 내일 보자. 화만 내서 미안해.>

 

 




오색 불빛 찬란한 번화가 한복판에서의 재회는 ‘개판’이었다.  종인을 보자마자 육중한 몸을 날린 찬열에 종인 옆에 달려 있던 애꿎은 종대가 엉덩방아를 찧은 것이다.  와, 엄지를 들고 능청스럽게 저를 내려다보기만 하는 찬열 때문에 화가 난 종대가 그를 물고 늘어져서 싸움이 벌어졌고 곧이어 도착한 백현이 너무도 자연스럽게그 싸움 속으로 끼어들어갔다.  오랜만에피부로 와 닿은 난리법석 때문에 종인이 당황해있는 틈에 멀리서 도끼 눈을 한 채 경수가 다가오고 있었다.

 



“.. 경수야..”


“개새끼.”

 



팔이 올라오기에 한 대 맞는 건가, 싶어 눈을 질끈 감은 종인에게 내려진 벌은 진한 포옹이었다.  옆에서 여전히 ‘꺼져!’, ‘미친 놈아!’, ‘으아악!’ 등의 비명이 들려왔지만 둘은 아랑곳하지 않고 한참 동안 서로를 끌어 안고 있었다.  어느새 사람들이 하나 둘 몰려들어 이 이상한 무리를 흥미롭게 구경하고 있다.  그 사이를 의아한 표정으로 파고들었던 세훈은 어째 변한 게 없냐? 혼잣말을 하더니 창피한 세 친구를 뜯어말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늘 그랬듯 쉬운 일이 아니다.

 



 

“야, 이 미친 새끼들아! 안 떨어져? 김종인, 도경수! 너네도 떨어져, 씨발!”

 

“하하.. 친구들이 취해씀니다, 촬영하시면 걸란합니다. 고맙습미다.”

 

다행이 그들에게는 잘생기고 예의 바른 호감 100%가 보장된 장이씽이 있었다.  그 주위에 티 나게 여자들이 몰려들어 휩쓸리고 있는 게 함정.  멀리서 귀찮다는 표정으로 이를 지켜보던 준면이 한숨을 쉬며 옆에 있는 남자에게 묻는다.

 



“지금 꼭 껴야 되냐?”


“저 원숭이들 대장이 너잖아.”


“아니, 저기요.그 쪽이 기숙사장이었는데 왜 내가 대장이야?”


“그 쪽이 학생회장이었잖아.”


“저 새끼들은 날 개무시하는데 내가 대장이었다니, 하하!”


“그래도 오랜만에 저런 거 보니까 좋다.”


“징그럽다, 새끼야. 아빠 같은 표정 짓지 마.”


“종인이 그대로네, 빨리가자.”

 



구수한 냄새가 베인 소란스러운 고깃집 한 구석을 크게 차지하고 앉은 아홉은 처음에는 실없이 웃으면서 서로의 눈치만 봤다.  어느새 성인이 되어 조금씩 변해있는 저희가 어색하면서도 신기하다.  하지만, 곧 언제 그랬냐는 듯 같은 교복을 입었을 때로 돌아간다.  준면이 든 초록병은 이제 교장 선생님의 탄산수가 아니지만.

 



“깜종, 진짜 병신이야. 21세기에 사람을 못 찾는다는 게 말이 돼?”


“너는 찾을 수 있을 것 같냐?”


“SNS 모르니, 새끼야?”


“야, 예전에도 전화 걸고 받는 것밖에 안 했는데 사람을 어떻게 찾아!”


“맞아, 카톡도 내가 가르쳐줘서 겨우 했는데에.“


“미친.. 너, 지금 폰으로 하는 거 말해 봐!”


“.. 전화, 문자, 카카오톡.. 아, 카메라?”


“.. 끝이냐?”

 



종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찬열은 욕을 읊조렸고 나머지는 크게 웃는다.  벌써 취기가 오른 백현이 어깨를 들썩거리자 그 옆에 앉아 있던 경수가 슬쩍 의자를 끌어 피하고 있다.  민석은 ‘형~’ 하고 천진하게 웃으며 꼬리를 흔드는 종인의 잔을 채우고는 어깨를 두드렸다.

 



“어머니는?”


“조만간 들어오실 것 같아요. 아, 참! 형, 그 때 브라질까지 갔다면서요.”


“으으.. 그 얘기 하지마, 쪽팔려.”


“왜요, 진짜 대단한 건데..”


“수학으로 국가 대표면 뭐해, 수능 망쳐서 재수했는데~”

 



해맑게 웃으며 이죽거리는 준면에게로 젓가락이 던져진다.

 



“닥쳐!”


“밍서기, 그 때 울어짜나.”


“닥쳐, 장이씽..”


“야, 이 형님 TV에 나오는 건 못 봤냐?”


“봤어, 너 코트에서 욕 좀 하지 마라.”


“그, 그건! 고, 공을 좆같이 던지니까 그렇지!”


“네가 좆같이 하는 건 아니고?”


“오세훈, 인간적으로 너는 내 편 들어라.”


“꺼져.”


“야, 넌 언제 또 나가?”


“나? 몰라, 할 꺼 없으면.”


“와, 저 속 편한 새끼. 졸라 부럽네.. 난 죽어라 훈련만 하고, 변백현은 휴학하고 유럽 여행하고.”


“여행이 아니고 연구하러 가는 거야, 무식한 놈아~”

 



한결 같은 이들 틈에서 종인은 홀로 녹녹한 기분이 되어 자꾸 코 끝이 찡해지는 걸 참느라 애쓰고 있었다.  함께 하지 못했던 시간들에 대한 아쉬움과 미안함.  그리고 지금 그들과 공유하는 공기, 시간, 추억.. 모든 것에 대한 감사함 때문이다.  꿈같은 시간.  떨어져 있던 공백기로부터 얻은 게 있다면 이들의 소중함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언제나 부족한 저를 헤아려주고 안아주었던, 이들만큼 함께 있는 게 자연스럽고 편안한 사람들은 앞으로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다는 확신이 든다.  

 



“으앙- 이 또라이가 내 고기 다 먹었어어!”


“쟤 고기 뺏어먹지마! 가뜩이나 술 들어가서 더 찡찡대는데, 존나 시끄럽게.”

 



감상에 젖어있던 종인이 얼른 반대쪽에 울상인 종대에게로 시선을 던진다.  발그레한 얼굴로 백현에게 삿대질을 하고 있다.  고개를 숙여 키득거렸더니, 맞은 편에 있던 찬열이 씹고 있던 당근을 내려놓으면서 한 마디 한다.  은근히 그리웠던 말이다.

 



“지랄 났네, 지랄 났어. 아직도 그 지랄이냐?”


“흐.. 나 왜 그 소리 듣기 좋지?”


“미친.. 왜, 아직도 김종대 귀엽다고 지랄 떨어보지? 졸라 패버릴라.”


“귀여운데..”


“우리도 안 변했는데 김종인이라고 변했겠냐?”


“맞아, 그대로야. 고딩 때로 돌아가고 싶다, 우리 그 때 진짜 재미있었는데..”


“형들 방 진짜 더러웠잖아요! 솔직히 말해요, 바퀴벌레 나온 적 있죠?”


“한 번 나왔다, 한 번.”


“뭐? 진짜야? 으아악, 왜 나한테 말 안 했어!? 그런 데서 잤다고, 내가? 아악, 소름 끼쳐!”


“이럴까 봐 말 안 했지, 흐흐.. 악!”


“밍서기.. 그거 숟가락인데..”


“준면이 형, 정신 나갔는데요?”


“끄하하하항, 숟가락이 날아다닌다아~”

 



즐겁다.  이제 두 손에 꼭 쥐고 두 번 다시 잃어버리지 않을 거다.  종인은 그가 할 수 있는 한 크게 웃었다.  지수가 봤다면 서운해 했겠지만, 그는 지금이야말로 진정한 제 자리를 찾은 것 같아 보인다.  아무것도 거리낄 것 없이 행복해 보이는 아홉이다.  그리고, 역시나 소란스럽다.  이런 것이 지극히 그들 답지만 말이다.  만난 건 6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는데 새벽 2시가 넘어서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우스운 건 너무 오랜 시간 동안 회포를 푸느라 알딸딸하게 취해있던 전부가 지금은 모두 말짱하다는 것이다.  각자 취향의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물고 집으로 어떻게 가네, 마네 하고 있는데 마치 어제도 이랬던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김종이인-“

 



뒤돌아 보는데 너무 순하게 웃고 있어서 놀랐다.  심쿵!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지, 마음 먹으며 종대는 그에게로 걸음을 옮긴다.  종인은 갑자기 옆으로 다가와 기대는 종대에 몸을 뻣뻣이 굳히다가 반이나 남은 아이스크림을 쓰레기통으로 떨어뜨렸다.

 



“너 집에 못 가는데, 어떡하냐아-“

 



지금 그는 종인을 놀리고 있는 게 분명하다.  메로나를 혀로 굴리며 익살맞게 눈을 휘고 있다.  종인은 일부러 저 멀리서 담배를 태우고 있는 찬열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음.. 택시라도 타고 가야 되나..”


“풉.. 10만원 넘게 나오지 않을까?”


“그런가.. 그럼 찜질방..?”



 

입씨름할 필요성을 잃은 종대의 입 꼬리가 아래로 처진다.  그의 고작 몇 마디 때문에 순식간에 서운함이 몰려왔다.  멍텅구리가 된 기분이다.  그래, 그럼.

 



“저 먼저 가요, 다음주에 또 만나는 거 맞지?”


“도갱, 나도 같이 가!”

 



손을 흔들고는 돌아선다.  종인은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뗐다가 멈추었다.

 



“어떡할래? 한 잔 더해?”


“가자, 이번엔 형이 낸다.”


“전 가봐야겠어요, 다음주에 봐요! 톡할게!”


“야, 너 어디서 자게!?”


“김종대!”

 



왠지 이대로 종대를 혼자 보내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번뜩 눈에 불을 켠 종인이 서둘러 종대가 사라진 쪽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집 앞 편의점에 들러 종인의 칫솔과 2L 짜리 생수 두 개를 들었다.  다른 건? 하고 묻는데 종대는 여전히 떨떠름한 표정을 지우지 못하고 고개를 젓는다.  그렇게 질색을 하더니 갑자기 저희 집에서 자겠다는 그의 변덕은 이해하기 힘든 것이다.  지금은 이해할 정신이 없기도 하고.  과제 때문에 쌓인 피로와 술 기운이 합쳐져 아까부터 연거푸 하품이 나와 눈물이 고여 있다.  어둑어둑한 방에 불이 켜진다.  종인이 쭈뼛거리며 작은 방으로 들어섰다.  낯선 모습의 방에 저가 사랑해 마지않는 향기가 잔뜩 묻어 있다.  쿵쾅거리는 심장을 의식하는 대신에 그의 방 구석구석을 살피자 다행이 금새 마음이 편안해진다.  작은 냉장고에 생수 병을 집어 넣으려다 그 안에 들어 있는 초코 우유 두 개를 보고 괜스레 빙그레-   이불 안 개는 건 여전하네, 방 한 구석에 겹겹이 깔려있는 이부자리.  밥은 잘 해먹지 않는지 반찬이나 쌀 따위가 눈에 띄지 않는다.  식기도 작은 몇 개가 전부고.  종대의 홀로 살림살이를 제 것처럼 돌보면서 그는 웃었다가 울상이 되었다가 한다.  그리고 어질러진 책상 위에 앉아 다시 웃고 있다.  정리 안 된 악보들에 파묻혀 있는 눈에 익은 파일 하나.  서둘러 펼친 곳에 누렇게 마른 『May Be』 악보가 그대로다.  그리고 그 뒤에,

 



“아, 피곤해애. 얼른 씻고 나와.”


“응, 금방 나올 테니까 자지 말고 기다려.”


“장담 못 해, 꿈나라 열차 도착한 지 오래야..”

 



조금만, 이라며 다급하게 화장실로 들어가 버린다.  종대는 눈을 비비적거리며 옷장에서 이불 하나를 끌어 내린다.  방을 한번 둘러보았다.  혹시 몰라 집을 나서기 전에 청소를 해뒀었는데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꺼낸 이불에 코를 묻는다.  킁킁-  잘 모르겠네, 옷장에 넣어놨다고 이상한 냄새 나진 않겠지?  원래 펼쳐있던 것을 밀고 꺼낸 이불을 옆으로 깔고는 혼잣말로 혹시 냄새 날지도 모르니까, 라며 저가 그 위로 몸을 누인다.  덜 마른 머리카락 때문에 조금 추운 것 같다.  하지만, 오늘은 혼자가 아니라 곧 따뜻해질 거라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삽시간에 얼굴에 열이 오르고 말았다.  아직 종인은 나오지도 않았는데 추위 걱정이 싹 달아나 버린다.  김종대, 정신 차려.  술에 지지마, 이성을 잃어선 안돼.  눈을 감은 채 되뇌고 있으니 곧 화장실 문이 열렸다.  저절로 꿀꺽- 침이 넘어간다.

 



“로, 로션 거기 꺼내놨어.”

 



종대는 눈을 감았다.  큰 티셔츠가 없냐는 물음에 아무거나 꺼내 입으라고 답하자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잠이 다 깨버렸다.  큰일이다.  자는 척을 하고 있지만 정신이 너무 맑아져서 보이지 않는데도 종인이 뭘하고 있는지가 머릿속에 생생히 그려지고 있다.  바짝 다가온 그가 옆을 차지하자 물기 어린 차가운 기운이 종대를 둘러쌌다.

 



“자?”


“.. 응..”


“잘 거야?”

 



종인은 가지런한 옆모습을 비어있던 눈동자에 채운다.  덮고 있는 이불에 베인 포근한 냄새가 진하게 저를 감싸 안고 있다.  콩닥콩닥-  기분 좋은 두근거림이 그들이 담겨있는 장면에 배경 음악이 된다.

 



“내가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너는 몰라도 된다.”

 



우리가 마음을 담아 서로에게 전한 시.  종인이 나지막이 그것을 읊었다.  그 때의 절절함이 밀려들자 잊었던 아픔이 뒤따른다.  종대는 괜찮은 척, 거짓 웃음을 뱉는다.

 



“풉.. 갑자기 뭐야아?”


“너를 좋아하는 마음은 오로지 나의 것이요..”


“나의 그리움은.. 나 혼자만의 것으로도 차고 넘치니까.. 맞나?”


“응. 나는 이제 너 없이도..”


“그만해.. 눈물 날 것 같아, 씨잉..”


“너를 좋아할 수 있다.”


“가물가물하다.. 못 외우겠어, 이제.”

 



거짓말을 하고 있다. 종인은 그의 악보 파일에 들어있던 종이를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떠나기 전, 종대에게 남기고 간 약속의 시.  그것이 그 안에 고이 끼워져 있었다.  늦었지만, 그 약속을 진정으로 지킬 때가 왔다.

 



“기다려줘서 고마워, 돌아왔어.”


“안 기다렸..”

 



눈을 감은 채 눈물을 구슬리고 있던 종대의 얼굴 위로 어둠보다 짙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몸을 일으킨 종인이 그의 뺨을 두 손으로 감싸고 거짓말을 내뱉은 입술에 벌을 내렸다.  말랑말랑한 입술이 부드럽게 종대의 입술에 비벼졌다.  예상치 못한 입맞춤에 굳어 있던 종대는 미간을 찌푸린 채, 눈을 질끈 감았다.  고여있던 눈물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린다.  어릴 적 서툴렀던 입맞춤이 아니었다.  모든 감각을 깨우는 진한 키스에 저도 모르게 팔을 올려 종인의 목을 끌어안고 말았다.  그러자 종인이 그답지 않게 다급한 몸짓으로 그의 가슴을 짓눌렀다.  맞물리는 입술 사이로 습한 숨결이 터져 나온다.  얇은 입매를 길게 핥은 혀가, 응?  혀?  혀라고?

 



“야, 읍.. 이 미친 노옴! 머, 멈춰봐!”

 



아랑곳 않고 화르륵 달아오른 뺨으로 가볍게 입술이 떨어졌다.  왜? 묻는 목소리가 야릇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모, 몰라서 물어? 나, 나 아직 화났어!”

 



잠시 멀뚱멀뚱 쳐다보더니 미소를 짓는다.  그러더니 곧 눈을 감으면서 다시 입술을 내민다.  과감한 유혹을 간신히 손바닥으로 막아낸 종대가 어버버버, 하고 울상을 짓고 있었다.

 



“좋아해, 네가 아니면 안 돼.”

 



손바닥에 닿은 고백. 벅차 오르는 모든 감정 때문에 숨을 제대로 쉬고 있는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

 



“이제 싫어..?”

 



이건 반칙이다.  오랫동안 쌓인 미움이 이렇게 쉽게 사라져 버리다니, 너무 억울하단 말이야.  하지만, 어쩔 수 있는 게 아니다.

 



“용서 안 해줄 거야.. 잉..”

 



말에 담긴 뜻과는 반대로 손이 종인의 티셔츠를 잡아 당겼다.  겹쳐진 입술이 오래도록 떨어지지 않았다.

 



“너 키스 왜 이렇게 잘해? 죽을래?”


“.. 맹세해, 네가 처음이야.. 진짜..”


“지인짜? 내 눈 보고 말해.”


“진짜라고, 크큭.. 너는?”


“.. 나? 나.. 나나나.. 잇.. 눈에 뽀뽀하지마, 간지러워!”


“내 꺼야.”

 



비로소 연인이 된 사랑스러운 두 사람.  어슴푸레한 새벽 공기 안에서 간간이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20-2. 사랑을 말해요

 

 

시끄러운 알람 없이 잠에서 빠져 나오는 이 시간을 여전히 좋아한다.  귀로 서서히 흘러 드는 일상의 작은 소음들.  예를 들자면, 먼 곳에서 들려오는 자동차 소리, 놀이터 안 꼬마들의 재잘거림, 구름이 움직이는 소리, 이름 모를 새의 지저귐 같은.. 그리고 오늘 같은 주말에는 하나가 더해진다.  제 집 마냥 들어와 살금살금 고양이 흉내를 내고 있는 그의 모든 소리.  뭘 만들고 있는 걸까?  싱크대로 물 떨어지는 소리, 보글보글 이 냄새는 햄 들어간 찌개?  뭉툭한 소리를 들어보면 저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칼질을 하고 있는게 분명하다.  치이익-  기름 튀는 소리는 뭐지?  눈을 감은 채, 배고픈 감각에만 집중하고 있다가 다가오는 그림자를 뒤늦게 알아챈다.  ‘쪽쪽쪽쪽-‘ 하고 온 얼굴로 입술이 떨어졌다.  누워있던 이가 키들거린다.  여전히 감겨있는 눈가를 덮은 긴 속눈썹.

 



“깨있던 거 다 알아.”

 



다시 한번 하얀 뺨에 웃음 띤 입을 맞춘다.  그래도 자는 척을 그치지 않자 종인은 들으라는 듯이 안 일어나네, 소곤거리더니 종대의 티셔츠 안쪽을 슬그머니 손을 넣는다.  몸이 움찔거리는 게 보였지만 이 위험한 장난을 그만 두고 싶은 생각은 없나보다.  마른 배를 입술로 간질이자 어느새 어깨에 올려진 손에 힘이 들어간다.  움푹 패인 배꼽에 혀를 대며 헐렁한 반바지의 허리춤을 잡아당기는데,

 



“일어났어어, 일어났다고!”

 



부스스한 사과 얼굴이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마음이 급했는지 종인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있다.

 



“더 자.”


“많이 잤어! 충분해, 정말.. 손이나 치워, 이 변태야아아!”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거리더니 빨개진 얼굴로 숨을 고르는 저를 빤히 쳐다본다.  보란 듯이 입맛을 다시더니 혀를 내어 입술을 느리게 할짝거렸다.  아, 누가 김종인을 ‘곰탱이’ 라고 불렀던가?  저렇게 섹시한 곰이 어디 있어?  여기요, 여기!  제 앞에서 지금 저 망할 혓바닥을 놀리고 있지 않습니까?  잠깐만, 나 코피 나는 거 아니지?  뭔가..  킁..  콧물이네.  변화무쌍한 얼굴색 때문에 조그만 머릿속이 다 들여다보이는 것 같아 종인은 이불 위로 몸을 구르며 크게 웃었다.  웃지마,라며 눈을 흘기지만 오히려 더 사랑옵다는 것을 알까?  다리로 방심한 몸을 감아 품 속으로 끌어당겼다.  핸드폰으로 손을 뻗으며 가만히 끌려온다.

 



“보고 싶었어.”


“지지난 주에 봤잖아.”


“맨날 보고 싶은데..”

 



몸을 꽉 끌어안고 집 냄새 베인 티셔츠에 얼굴을 비비적거리는데 종대는 어느새 무신경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다.  전에는 저가 그러기도 전에 찰싹 달라붙어서 꼼짝도 못 하게 하는 것이 그의 특기였는데 종대는 요즘 조금 이상하다.  한없이 사랑스럽게 굴다가도 한 순간에 쌀쌀맞게 돌변해서 애를 끓게 만든다.  거기다가 좋아한다는 말을 들은 지도 언제인지 기억이 안 날 정도.  흔히 말하는 ‘권태기’ 라는 게 벌써 찾아온 건 아니겠지?  저의 고백으로 진짜 연인이 된지 이제 겨우 네 달인데 말이다.  그러고 보니 먼저 손을 잡아주거나 안아주지도 않고.  맙소사, 최근엔 전화조차 먼저 걸어온 적이 없다.

 



“밥 먹자, 김치 찌개했어.”


“얄루~ 김치 찌개다! 김종인, 나한테 장가 올 거지?”

 



밥 해줄 때랑 야한 거 할 때만 좋아하는 것 같아.  주저없이 품을 벗어나버린 그의 뒤로 서운한 한숨이 따라 붙었다.

 



“맛있어?"


“응, 짱이야.. 이 밥, 햇반 아니지?”


“어제 콩밥이길래 가져왔어, 수녀님한테 얼려달라고 해서.”

 



한 입 가득 밥을 우겨 넣던 숟가락질을 멈추고 반드르르한 눈동자에 종인을 담는다.  그 먼 곳에서 일부러 집 밥을 가져올 생각을 했다니, 나를 좋아하긴 하나 봐.  목이 메도록 기쁜데 이 마음을 선뜻 알려주고 싶지 않은 건 왜일까?  힘껏 끌어안고 싶은데 그러면 안 되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얼굴에 묻은 밥풀을 떼주려는 따뜻한 손길을 자연스럽게 피해버렸다.

 



“.. 힝.. 마시쩌..”


“자주 해줄게.”


“약속?”


“응, 약속할..”


“아니다, 약속하지마. 그래 놓고 안 지킬 거잖아.”

 



장난스러운 투로 던져진 말 속에 뼈가 있다.  따뜻하게 데워진 공기가 삽시간에 얼음처럼 차가워진다.  종인이 못 들은 척 그의 눈을 피하며 고개를 숙였다.  종대는 제 입을 꿰매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저에겐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김치 찌개로 젓가락을 가져간다.  최근, 이게 그들 대화의 일정한 패턴이 되어가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종인을 죄인으로 만들어 버린 후, 자괴감에 빠지는 것의 반복.  종인을 겨냥한 그의 화살이 향하는 곳은 스스로의 마음인데 말이다.

 



“밥 먹고 영화 보러 가자.”

 



종인이 눈도 못 마주치면서 쓰게 웃고 있다.  괜찮은 척, 그렇게 저를 티끌만큼도 미워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게 느껴진다.  그의 억지 웃음을 보니 밥을 먹는 게 모래알을 씹는 것처럼 껄끄러워졌다.

 



“응.. 팝콘도 먹을래, 달콤한 맛!”


“큰 걸로 사줄게.”

 



종인이 그의 뺨을 쓰다듬더니 조심스럽게 뽀뽀해도 돼? 묻는다.  종대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면서 눈을 감았다.  서로 이렇게 좋아하고 있는데, 왜 이렇게 불안한 거야?  누구라도 좋으니까, 괜찮다고 말해줘.  나 지금 하나도 안 괜찮으니까. 

 


 

‘종인아, 내일 오지마! 미안해애, 나 동아리 애들이랑 놀러 가기로 했어.’


“아.. 그럼 일요일에..”


‘일요일에는 과제 해야 될 것 같은데..’


“.. 옆에 가만히 있으면 안 돼?”


‘너 있으면 집중 안 된단 말이야아, 보고 싶어도 조금만 참아~’

 



종인은 삐죽 처지는 입술에 힘을 주지만 뜻대로 되지가 않는다.  입에 물려있던 빨대를 꾹 깨물었다.  저는 심각한 애정 결핍에 시달리고 있다.  암묵적으로 약속된 시간의 공유마저 허락해주지 않는 연인 때문이다.  아무것도 허락해주지 않는다.  다가가는 것도, 그렇다고 멀어지는 것도.  이력서가 떠 있는 노트북 위로 무거운 한숨이 내려앉는다.  일주일에 겨우 이틀밖에 못 보는데, 이번 주에 못 보면 또 2주나 못 보는 거잖아.  요즘 들어 종대는 퍽 낯선 사람처럼 굴고 있다.  종인이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행동하고, 가볍게 말한다.  얼마 전에는 종인이 집에 와 있는데도 학교 친구들과 놀러 나가 버려서 하루 종일 천덕꾸러기가 된 기분으로 그를 기다려야 했다.  연락도 오지 않는다.  혹시 늘 저가 먼저 전화를 해서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무작정 연락을 하지 않은 날이 있었다.  울리지 않는 핸드폰 때문에 울고 싶게 될 줄이야.  다음 날, 일어나자마자 전화를 걸자 그가 내뱉은 말은 고작 ‘왜?’ 였다.  분명,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거다.  저가 좋아하는 이는 언제나 따사롭고 사랑스러우니까.  괜한 심술로 절 괴롭게 할 리가 없다.  다만, 문제는 그가 이러는 이유가 전혀 가늠이 안 된다는 것.  머저리 김종인, 무슨 잘못을 한 거야?  하루에도 수십 번씩온 몸에 피가 다 말라버리는 기분이다.  어떤 이유라도 좋으니까 옆에만 있게 해 줘.  사랑해주고 싶어.  괜한 오해가 더 쌓이기 전에 물어봐야겠다, 솔직하게.

 

 

얼마 지나지 않아 종인은 이 ‘솔직하게’를 말하게 되었는데, 안타깝게도 그건 그가 원한 분위기의 것이 아니었다.  기나긴 2주 만의 데이트였다.  평소 종대가 보고 싶다던 연극을 보기로 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때 빼고 광 내고, 룰루랄라 상경한 종인을 기다리고 있던 건 사랑스러운 연인이 아니라 알지도 못하는 그의 여자 후배였다.  갑작스런 일이 생겼다는 그 대신 연극을 보러 나왔다는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입고 온 원피스 자락을 만지작거렸다.  종인은 차마 종대의 지인에게 결례를 범할 수는 없다는 결정을 내려 생판 처음 보는 여자와 연극을 보고 쓴 커피를 마셔야 했다.  액체로 체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화를 억눌렀다.  종대와는 전혀 연결 고리가 없을 것 같았던 배신감마저 느껴졌다.  불 켜진 그의 집을 올려다보며 한참을 서 있던 종인이 발걸음을 뗀다.  손에 익은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었다.

 



“왔어?”

 



책에 시선을 고정한 채 엎드려 과자를 집어먹고 있다.  울컥- 마음이 일렁인다.  어이가 없는 건 그 앞에 서자 머리 꼭대기까지 치솟았던 화가 거짓말처럼 사그라들었다는 것이다.  화내고 싶지 않아.  그저 따뜻한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저 좀 사랑해달라고 애원하고 싶은 마음뿐.

 



“얘기 좀 해.”


“응, 얘기해애. 밥은 먹었어? 설마 선경이랑 먹었어?”


“.. 그게 뭐야, 나한테 말도 없이..”


“교수님 연주회 객원이 빵꾸나서 어쩔 수가 없었어, 미안해.”

 



가라앉은 목소리에 심상치 않은 낌새를 느꼈는지 그제야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키면서 종인을 돌아본다.  욱신거리는 명치를 누르며 종대의 곁에다가 앉았다.  답답한 속 때문에 절로 인상이 찌푸려진다.

 



“전화 한 통 해 줄 수 있잖아..”


“.. 화났어?”


“아니.”


“화났네에..”


“말 나온 김에 물을게. 요즘 왜 그래?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야?”

 



뭐가, 기어가는 목소리로 되물으면서 고개를 푹 숙여버린다.  기다란 속눈썹이 느리게 깜빡인다.

 



“너무 제멋대로잖아, 딴 사람 같아.. 쌀쌀맞고.. 나한테 화가 난 게 있으면..”


“딴 사람..?”

 



되묻는 목소리가 서릿발이다.

 



“네가 없는 동안 이렇게 변했다면 어쩔 건데?”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손을 붙잡았지만 뿌리쳐졌다.  그가 다시 지난 5년의 공백기를 꺼내놓았다.  이로써, 종인은 답을 찾았다.  종대의 이런 변화는 둘의 과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가 돌아왔다고 하더라도, ‘버림받았다’ 라는 기억으로 남은 상처가 깊었던 것이다.  그것이 종대의 애정을 좀먹고 있었다.  종인이 취업 준비를 시작한 게 도화선이되었다.  장거리 연애라는 말이 무색하게 집을 드나들던 그가 학원과 자격증 취득 등의 이유로 갑자기 저의 일상에서 뜸해지자 불안감이 종대를 잠식해버렸다.  그가 다시 사라져버릴까 두려움에 떨고있었다.  이것을 부정하려 저도 모르게 ‘내가 제멋대로 굴어도 좋아할 수 있어?’, ‘이렇게 너한테 함부로 해도 용서해줄 수 있어?’ 하고 끊임없이 애정을 시험한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을 쓰다듬었다.

 



“미안해..”


“미안하다고 하지마, 오늘 나 때문에 화났잖아! 화난 건 너잖아.. 하.. 나도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어떻게 해야 할 지 갈피를 잃은 종인이 관자놀이를 짚었다.  떨어져 있던 5년을 서로의 머릿속에서 지워버릴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 어떻게 해야 괜찮아질까..?”

 



종대는 미안하다고 했다.  그리고 혼자 생각할 시간을 갖고 싶다고 말했다.  그의 어여쁜 입 꼬리는 내뱉은 말과는 이질적으로, 붙잡아 달라는 표정을 지어냈지만 종인은 죄책감에 사로잡혀 그를 안아줄 기회를 허무하게 놓쳐버렸다.  원치 않던 공백기를 다시 갖게 되었다.

 




 

창 밖을 내다보는 종대의 앞으로 딸기가 가득 얹어진 빙수가 놓인다.  요란하게 의자에 몸을 앉힌 백현이 숟가락 두 개로 재빨리 달콤한 딸기 빙수를 퍼먹기 시작했다.  원래대로라면 ‘죽을래애! 돼지 새끼야!’ 강도 3급 정도의 징징거림이 들려와야 정상인데, 너무 조용해서 숟가락을 든 손이 허공에서 멈추어 버렸다.  핼쑥해 보이는 뺨 위에 서글픈 눈동자는 종대와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그의 일상에서 종인을 지운 지 고작 이틀이 지나 있었다.  눈 앞에서 작은 숟가락이 흔들거린다.

 



“야, 무슨 생각하냐?”


“어어.. 딸기 빙수네, 맛있겠다.”


“개그맨이냐? 똥 씹은 표정으로 맛있겠다래, 존나 웃기다.”


“똥 얘기 하지마, 신성한 빙수 앞에서.”


“빙빙 돌아가지 말고 딱 말해.”

 



뭘 말해? 묻는 얼굴은 여전히 똥 씹은 표정을 하고 있다.  숟가락을 뺏어 들어 빙수를 한 입 가득 퍼 넣는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으니, 저를 힐끔-  못 이기는 척 숟가락을 내려놓는다.

 



“내가 아는 사람 얘긴데.. 네가 심리 연구도 하니까아.. 뭐 하나 대신 물어볼까하고..”

 



그래, 그 ‘아는 사람’ 이 너구나.  백현은 속마음을 굳이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이 사람이 좋아하는 애가 있는데, 막 너무 좋은데!”

 



얼씨구?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어?  누구지?

 



“이상하게, 자꾸 못된 짓만 하게 되는 거야..”


“못된 짓? 만졌냐, 개새야?”


“아.. 말 안 해, 너한테 물어보는 내가 미친 놈이다!”

 



에이~ 빙수를 떠 먹이며 우쭈쭈쭈, 달랜다.  그러자 또 못 이기는 척, 딸기를 우물우물 씹더니 한껏 입술을 내밀면서,

 



“그러니까아.. 연락도 안 하고, 표현도 안 하고, 차갑게 하고..”


“지금 그건데, 안 좋아하는 건데 보니까?”


“아냐, 좋아해! 일부러 그러는 거란 말이야!”


“왜? 밀당이냐?”


“음.. 그게.. 무서워서, 아니 무섭대.”


“뭐가?”


“마음 다 주고, 또 헤어지면 너무 힘드니까.”

 



오호, 한 번 헤어졌었어?  이 새끼, 안 되겠네~  감히, 엉아들한테 비밀을 만들어?  조만간 애들 모아서 조져야겠다.  근데 힘들었다고, 네가 웬일로?  백현이 의자로 몸을 기대며 심드렁하게 답을 내놓았다.

 



“뭐야, 그냥 시험하고 싶은 거네. 그 사람이 자길 얼마나 좋아하는지.”

 



사뭇 심각하게 ‘맞아..’ 중얼거리더니 땅이 꺼질 듯 깊은 한숨을 내쉰다.  백현은 그런 그를 흥미롭게 쳐다보다가 ‘한번 깨졌던 커플이 왜 또 깨지는 줄 알아?’ 하고 물었다.  절레절레-  소중한 친구를 위해 장난기는 잠시 넣어두기로한다.

 



“믿음이 없거든, 계속 내 옆에 있을 거라는 믿음.  이미 끝이 있다는 걸 알았는데 몸 사려야지~  더 상처받기 싫으니까.. 자기 보호는 본능적인 거야, 못된 게 아니라.”

 



고로, 자책하지 말란 말씀.  자칭 ‘연애박사’ 변백현 선생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 아, 안 깨질 방법은 없어? 이번엔 진짜 죽을 지도 몰라..”

 



울 것 같은 목소리로 진짜 죽을 거야, 말했다.  진짜?  뭐야, 이번엔 심각하네?  조금 의외였다.  지금까지 몇 번 봐왔던 그의 연애는 대체로 가벼운 것들이었다.  지속 기간이 긴 적도 없고, 애인에게 간이며 쓸개며 빼줄 것 같이 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종대는 꽤나 단편적이었다.  올 거면 오고 갈 거면 가라, 일명 ‘나쁜 남자’ 타입이었던 것이다.  저는 절대 아니라고 하지만제 3자인 백현이 보기엔 지극히 그랬다.  저희들끼리 모여서 ‘연애의 위기 상황’ 에 대해 심각히 고민할 때도 왜 고민하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럼 헤어지면 되잖아, 하던 것이 떠오른다.  그랬던 김종대가 드디어 참 연애를 하는구나!  너도 이제 알았냐, 사랑의 고통을?  쌤통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제 머리를 감싸 쥐고 울상인 것을 보니 애잔한 마음이 인다.

 



“그런 방법 없어. 근데 후회 안 할 수 있는 방법은 있어.”


“뭔데?”


“그냥 마음 가는대로 하는 거, 끝은 생각하지 말고. 좋아한다며?”


“응.. 많이 많이.. 많이..”


“그럼 진짜 끝나버리기 전에 하고 싶은 거 하고 해주고 싶은 거 다 해줘야 덜 억울하지 않냐? 그런 걸 왜 참아!”


“몰라.. 벌써 싸웠어..”


“사람 마음 시험하는 거 아니다, 네가 잘못했어.”

 



의기소침해져서는 ‘응, 그런 것 같아.’ 맞장구를 치더니,

 



“어? 내 얘기 아니야! 미, 미쳤냐?”


“그래, 그래. 네가 아는 사람한테 꼭 전해줘, 크큭.. 서로를 믿어요, 사랑을 말해요~”


“.. 진짜 있는 노래냐?”


“와, 브라운 아이즈의 ‘사랑을 말해요’ 모르냐? 개 좋아! 그래, 이 노래 듣고 반성해라.”


“이씨, 내 얘기 아니라고오! 꺼져, 꺼져!”

 


 


 

앞에서 고기를 뒤집고 있는 종인에게서 찬열이 집게를 낚아챘다.  그러자 그 옆에 있던 백현이 잘했어, 등을 두드려준다.  어지간히 종인의 고기 굽기가 마땅치 않았던 모양이다.

 



“고기 뒤집을 힘도 없는 새끼가 뭐 하러 기어 나왔냐?”


“내 말이, 며칠 전에 체해서 자기는 먹을 수 없지만 고기를 사주겠대. 존나 기부천사세요?”


“그냥.. 속이 좀 답답해서..”


“왜? 무슨 일 있어?”

 



종인이 먼저 심중을 털어놓는 일은 거의 없다.  그는 예전부터 속으로 삭히는 데에 도가 텄으니까.  그런 그가 만나자는 연락도 먼저 하고, 고민 상담까지 하겠다니 백현은 은연 중에 오늘 참 희한한 하루라고 생각하는 중.  낮에는 김종대가 지랄이더니, 저녁에는 김종인이 지랄이네.

 



“아는 사람 일인데..”

 



너도 ‘아는 사람’ 이냐?  찬열의 입버릇을 잠시 빌려 써야겠다.  지랄 났네, 지랄 났어.

 



“애인이 시간을 갖자고 했대.”


“예쁘대?”


“응.”


“그럼 아는 사람이 잘못했네.”


“맞아, 잘못했어..”


“쓰벌.. 진지하게 받아치지 마라, 졸라리 당황스러우니까.”


 


찬열이 고기 한 점을 입으로 가져가며 홀로 심각한 종인을 나무란다.

 



“근데?”


“시간 갖기도 싫고.. 이러다 헤어지면 안 되는데..”


“그럼 무릎 꿇고 빌라 그래!”


“계속 미안하다고 했는데도 안돼.”


“마음 떴네. 그 사람 불러, 나와서 한 잔 받으라고 해. 실연의 아픔은 술로 잊어야지.”

 



마음 떴네, 찬열의 냉정한 한 마디에 종인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진다.  영양가 없는 이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백현이 고개를 저으며 미소를 짓는다.  드디어, 내가 나설 차례인가?

 



“넌 그냥 고기나 처먹어. 깜종, 박찬열이가 뭘 알겠니~ 저 새끼는 배구하다 혼자 늙어 죽을 새끼인데.”

 



이죽거리면서 쌈으로 찬열의 입을 막아버렸다.  웅얼거리면서 인상을 쓰고 있지만 소주 잔을 내밀자 금새 실실 웃으면서 건배-  단순한 건 행복의 지름길이라던데, 부러운 내 친구 찬열이.

 



“백현아, 그럼 어떡해?”

 



어라?  그답지 않게 서두르는 것에 수상함이 짙어진다.

 



“시간을 갖자는 건 둘 중 하난데, 헤어지자는 말이거나 더 사랑해 달라는 말이거나.”


“지랄하네.”

 



언제나처럼 티격태격하는 둘 사이에서 종인은 백현의 말을 곱씹는다.  헤어지자는 말이거나 더 사랑해 달라는 말이거나, 라니.  당연히 전자는 고려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종대의 입에서 그런 말을 듣게 된다면,

 



“죽을 수도 있어..”


“뭐래, 죽인다고?”


“넌 고기나 먹으라고요~ 깜종, 좀 더 말해봐. 시간 갖기 전에 무슨 일 있었는지, 그런 거 몰라..?”


“음.. 잘 지내다가 갑자기 쌀쌀맞아진 거? 아니, 그랬다는데..”

 



콧등을 긁적거리고 이리저리 눈을 굴리는 걸로 보아, 거짓말이다.  그리고 초조해 하고 있다.  백현이 눈을 가늘게 뜬 채 종인을 살핀다.  묘하게 김종대 얘기랑 겹치네.  김종인의 ‘아는 사람’이 김종대 아냐?  아니지, 김종대는 자기가 일부러 못되게 굴고 있다고 했잖아.  엥?  그럼 ‘애인’ 쪽인데?  아우, 머리 아파!  이상한 생각 하지 말자, 다른 사람이겠지(천하태평), 가 아니잖아!  김종인의 지인 폭은 거기서 거기.  미국에서 사귄 친구들이 아니라면, 무조건 백현이 아는 사람이다.  김종대의 ‘아는 사람’ 은 김종대 본인, 김종인의 ‘아는 사람’ 은 김종인 본인, 둘 다 자기 얘기를 하고 있는 거라면?  복잡해진 머리를 정리하다가 느껴지는 시선에 정신을 차렸다.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종인의 두 눈동자가 초롱초롱-  변백현 선생의 해답을 기다리는 게 보였다.  백현이 침을 꼴깍- 삼키며 입술을 떼었다.  옛날부터 둘이 유달리 붙어있긴 했지만, 그럴 리가 있나.  침대까지 같이 쓴 건 조금 과하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에이~

 



“혹시.. 그 분들, 헤어진 적 있었어?”


“어.. 헤어진 건 아니고.. 좀 떨어져 있었어.”


“얼마나?”


“한.. 5년..”

 



소름.  백현은 은근슬쩍 닭살 돋은 제 팔을 끌어 안았다.  선뜻 확인할 수 없는 확신.  이건 저의 민첩한 감 덕분이기도 했지만, 그 전에 ‘아는 사람’ 둘이 세상에서 제일 친하다고 자부하는 이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이게 무슨 개떡 같은 경우지?  너희, 설마.. 진짜야?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전에, 급한 불부터 끄고 보자.  저의 예상이 확실하다면, 

 



“김종인.. 아는 사람한테 전해, 그 애인이 더 사랑해 달래.”

 

 




오늘따라 더 공허하게 느껴지는 집이다.  가만히 있으면 우울의 파도에 휩쓸릴 것 같아 오랜만에 청소를 하기로 했다.  못된 심보로 종인을 화나게 하지만 않았어도, 혼자라고 이렇게 쓸쓸하진 않았을 텐데.  쌓아둔 옷을 개던 손을 잠시 멈춘 종대가 핸드폰을 만지작거린다.  사랑을 말해요?  진짜 있네?  감미로운 선율에 한 귀에 반해 ‘반복 재생’을 누른다.  어느새 흥얼거리면서 다시 옷 정리 시작.  백현과 낮에 먹은 딸기 빙수가 오늘 하루 끼니의 전부라 속이 허하다.  문득 잊고 살던 담배가 떠올랐다.  대학생이 된 이후에 조금 늘었었는데 종인과 만난 이후에는 피운 적이 없었다.  서둘러 구석구석을 뒤적거리다가 몇 달 전쯤에 책상 서랍에 처박은 것을 기억해냈다.

 



“뭐야..”

 



서랍을 연 그의 미간이 좁혀진다.  뜨거워지는 눈시울은 뇌로는 제어할 수 없는 신체 기관인가 보다.  담배 네 개비가 꽂혀있는 담뱃갑 위에 ‘이거 대신 나한테 전화하면 안 될까? 바로 갈게.’ 라고 적힌 포스트잇이 붙어 있다.  나, 엄청 사랑 받고 있었잖아.  그 동안 종인에게 가혹했던 저를 떠올리자 마음이 너무 아프다, 누군가 바늘로 콕콕- 찌르는 것처럼.  주저앉아 서럽게 훌쩍거리는 이의 귓가로 노랫말이 내려 앉는다.

 

서로를 믿어요, 사랑을 말해요~  어디서든 매일 난 그대 생각이죠.

그대를 원해요, 내 곁에만 있어줘요.  하루 종일 온통 그대 모습 떠오르죠.

Show me, You gotta just show me.  내 가슴은 두근거려요.

Hold me, You gotta just hold me.  매일매일 난 꿈을 꾸죠.

사랑해. 수줍은 너의 눈빛 속에 난 날아올라 영원히, 언제까지나 함께해.  너를 사랑해.

 

사랑을 말하기에 너무 늦어버린 게 아닐까?  내가 함부로 해서 화났을 거야, 어떡해.  날 내버려 두지 마.  바닥에 놓여있던 핸드폰을 집자마자 손으로 연달아 진동이 느껴졌다.  검은 화면에 떠오른 말풍선에 ‘종인’ 이라는 이름.  <종대야, 미안해. 얼굴만 보고 갈게.>  이 바보,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보고 싶어.  비밀번호가 눌리는 소리에 벌떡 일어나 먼저 문을 열어 버렸다.  그리고 어어? 놀라며 동그래진 눈을 한 그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우리 사이에 공기 한 톨조차 끼어있는 게 싫어 단단한 몸을 부여잡았다.  그러자 같은 생각이었는지 그의 손이 등을 무겁게 감싸 안아준다.  오랜만이다,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순수한 마음을 나누는 그런 느낌.

 



“너무 보고 싶어서 못 기다리겠어.”

 



칭얼거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종인의 옷이 눈물을 머금는다.  꼴사나워, 멋진 모습만 보여줘도 모자랄 판에.  셔츠에 콧물이나 묻히고 있고, 훌쩍-  아래층 어느 집 문이 열리는 소리에 둘은 발맞춰 집 안으로 몸을 들였다.  문이 잠기는 소리가 고요한 복도에 울린다.

 



“울고 있었어? 나 때문이지..”

 



머리카락에 머문 입술이 속살거려서 간지럽다.

 



“울지마, 다 내가 잘못했어.. 응?”

 



어차피 저는 계산에 능한 사람이 못 된다.  어울리지 않게 앞선 상처를 가늠하려다 눈이 멀었나 보다.  등을 토닥토닥 쓸고 이마에 입을 맞춰주는, 종인의 눈을 진작 들여다 봤다면 이렇게 어리석은 마음으로 우리의 시간을 버리지 않았을 거다.  짙은 빛을 띤 그의 눈동자가 한없이 사랑을 말하고 있다.

 



“그저께 내가 하고 싶던 말은 그냥.. 화난 게 아니라, 나 좀 봐달라는 거였어.  네가 왠지 날 안 좋아하는 것 같아서 요즘 너무.. 불안해서..”

 



저처럼 불안했다는 말을 들으니 다시 코 끝이 찡해진다.  바보 같은 나 때문에 얼마나 속상했을까?  백현의 말마따나 우린 사랑만 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라다.  넘치는 애정으로, 걱정하고 의심할 여유가 없다.

 



“일부러 그런 거야.. 너랑 있으면 너무 좋다가도.. 갑자기 이런 게 언제 변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마음을 다 주면 나중에 너무 아프니까..”


“끝을 왜 생각해!”

 



갑자기 큰 소리를 치자 종대의 몸이 움찔- 떨리는 게 느껴졌다.  그 반응에 저가 더 놀랐는지 종인은 다시 그를 끌어안으면서 ‘화, 화낸 거 아니야!’ 말한다.  품 안에서 까르르 웃음 소리가 터져 나온다.

 



“아, 맨날 같이 있다가 요즘 다시 잘 못 보니까.. 자꾸 옛날 생각 나서 무섭단 말이야..”


“이제 절대 그런 일 없어.”


“몰라.. 힝.. 나도 너한테 잘해주고, 막 뽀뽀도 하고 싶고 그랬는데에! 엄청 참았다구..”


“.. 정말?”


“응! 그런.. 으읍..!”

 



성급한 입술이 찾아 들어 뒷말이 삼켜진다.  재차 입술을 핥아 올리더니 거침없이 혀가 침범했다.  오늘 따라 심하게 몰아붙이는 탓에 조금 겁을 집어먹었다.  화난 거 맞잖아!  종대가 뒷걸음질치자 허리를 감싸고 있던한 손이 올라와 머리카락을 헤집는다.  뒤로 밀려나지 않도록 강하게 붙잡혔다.  어지간히 갈증에 허덕였던 모양인지 종인은 그를 놔줄 생각이 없다.  몸이 반사적으로 경직되는 신호를 감지하기 직전에 서둘러 입술을 뗐다.  위험했다.  아쉬운 마음을 달래려 빨개진 입술 위에 몇 번 더 가볍게 입술을 떨어뜨렸다.

 



“으응.. 말하고 있.. 었잖아, 바보야!”


“미안, 계속 말해.”



 

그러면서도 다시 쪽-  이미 어질러진 머릿속을 도리질로 다스린 종대가 다시 입을 뗀다.

 



“아무튼.. 눈에 안 보이면 싫고 짜증나, 미워 죽겠어.. 이상해.”

 



여전히 숨을 할딱거리면서 가슴에 얼굴을 묻는다.

 



“믿어줘, 네가 그랬던 것처럼 옆에 있을게.”


“내가 그랬던 것처럼?”


“응, 우리 처음 만났을 때..”

 



그 때를 떠올리기 부끄러운 건지 종인의 귀 끝이 빨개져 있다.  나지막이 얘기하는 그를 따스한 눈빛으로 올려다보면서 그 귀를 깨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거리를 뒀었어.. 그 땐 엄마나 중.. 학교 때 일로 안 좋았으니까. 네가 웃고 달라붙는 게 무서웠어, 다른 애들도 그렇고. 어차피 변할 거라고 생각했거든.”

 



오랜만에 듣는 이야기다.  종대는 그가 처음 이 이야기를 꺼내 놓았을 때를 떠올렸다.  그건 저에게도 그리 좋은 기억이 아니다.  종인이 모든 것을 털어놓은 것이 기뻤지만 홀로 견뎌냈을 작은 아이를 생각하면 너무 애달프니까.

 



“근데 내가 그래도, 넌 계속 옆에 있어줬어. 다 괜찮다면서.”


“흥.. 다 너 꼬시려고 그런 거지.”

 



종인이 얕은 웃음소리를 낸다.  그들은 그저 사랑에 빠진 얼굴로 서로를 바라볼 뿐이다.

 



“계속 옆에 있겠다고 약속할게, 그러니까 불안해 하지마.”


“안 지키면 10억 주겠다고 각서 써.”


“알았어, 크큭..”

 

 




말끔한 흰 셔츠 차림의 남자가 긴 다리를 휘적거리며 H 대학 인근 주택가를 가로지른다.  유난히 조용한 평일의 오후 시간.

 



“빵집은 어디 있지..”

 



홀로 중얼거리더니 여러 갈래로 뻗친 골목들을 몇 번 들락거렸다.  이마에 베인 땀을 손등으로 쓸고는 드디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지만, 잠시 들여다 봤을 뿐, 왜인지 다시 집어넣는다.  안타깝게도 길 찾기에 이용할 생각을 못한다.

 



“빵집..”

 



종대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을 빌려 써야겠다.  ‘곰탱이’는 한참 그 곳을 배회하다 마침 밖으로 나온 편의점 직원에게 물어겨우 빵집에 발을 들일 수 있었다.  고소한 냄새 틈으로 두리번두리번 찾는 게 있다.  방황 끝에 한 곳에서 시선이 멈춘다.  입가를 늘려 웃더니 들고 있던 쟁반에 한 눈에 봐도 많은 양의 빵들을 쓸어 담았다.  계산을 도와주던 직원이 재차 이거 다요?물었지만 천진하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학생인 애인의 빈 집에서 책을 들여다 보면서 기다리던 중 문득 며칠 전에 했던 전화 통화가 떠올랐다.  먹고 싶다고 했던 것이 있다.  지체 없이 몸을 일으켰다.

 


문을 열리는 소리에 귀가 쫑긋- 몸은 이미 현관으로 향하고 있다.

 



“진짜 왔네! 아무도 없길래 내가 불 키고 나간 줄 알았잖아, 헤..”

 



한 손에 가득 들려있던 것을 내려두더니 팔을 벌린다.  종대가 히죽 웃으면서 그 팔에 매달렸다.  하나, 둘, 셋.

 



“보고 싶었어.”


“보고 싶었어.”

 



그렇게 말할 줄 알았지.  둘은 마주 서 키들거리더니 서로를 끌어안은 채 한참을 뒤뚱뒤뚱한다.

 



“뭐 사러 갔었어? 자고 갈 거지?”

 



말없이 봉투로 손을 뻗는다.  종인이 바닥으로 와르르 쏟아놓은 것들은,

 



“단팥빵?”


“먹고 싶다며, 슈크림 들어있는 거.”

 



나 잘했지? 하는 표정.  종대에게로 고정된 눈빛이 반짝거린다.

 



“우와.. 우와! 완전 먹고 싶었는데!”

 



재빠르게 포장지를 벗겨서 한 입에 우겨 넣은 입에서 알아듣지 못할 감탄사가 흘러 나온다.  우물우물거리면서 가까이 오라는 듯 손을 까딱거린다.  뿌듯하게 웃고 있던 종인이 그 곁에 다가 앉았다.

 



“맛있어?”

 



격하게 고개를 끄덕거린 반달 눈이 속삭였다.

 



“사랑해.”

 



어어?  종인의 얼굴에 불길이 번졌다.  처음 들어보는 말에 어안이벙벙해진 그가 잠시 입을 벌린 채 가만히 있다가 눈을 크게 떴다.

 



“다시 말해봐!”


“아, 깜짝이야! 왜 소리 지르고 난리야아!”


“다시 말해보라고.”


“뭘?”


“그, 그 사.. 사랑해? 와..”

 



입술이 간질거리는 느낌이다.  처음으로 소리가 되어 나온, 온전한 제 마음을 표현하는 말.  왠지 낯간지럽고 지나치게 보들보들한 말이어서 늘 말해보고 싶다는 생각만으로 그쳤었는데, 그 말을 종대에게 먼저 듣게 될 줄이야.  빠르게 콩닥거리는 심장에 손을 얹은 채 감격한 종인을 보고 종대는 포장을 뜯고 있던 손을 멈추었다.  그리고 웃음기 지운 입매에 오직 진심만을 그려 그에게 말했다.

 



“김종인, 사랑해.”

 



서로를 믿어요, 사랑을 말해요.

 




 

번외. 몸으로 말해요

 


 

알록달록한 낙엽 위로 내딛는 걸음이 급하다.  어깨에 짊어진 가방이 무거운지 한번 들썩거리고는 더 빨리 발을 구른다.  일주일 만에 만나는 애인이 엉망진창인 집에서 목이 빠져라 저를 기다리고 있다.  거기다가 오늘은 그에게 아주 중요한 날이었다.  계단을 한 달음에 뛰어 올라갔다.

 


 

“.. 네, 네.. 걱정 마세요. 얼른 자요, 거긴지금.. 새벽 2시쯤이잖아요, 네..”

 



엄마와 통화를 하면서 저에게 팔을 벌린다.  하지만, 종대는 그에게 섣불리 다가갈 수가 없어 그대로 서 있었다.  벽에 기대있던 몸을 일으키면서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게 내려다 보인다.

 



“네. 잘 자요, 다시 전화할게요.”

 



서둘러 전화를 끊더니,

 



“왜 그러고 있어? 빨리 이리 와.”


“머, 멈춰 봐! 숨 쉬어야 돼! 후, 하, 후, 하..”


“뭐 하는 거야? 바보.”

 



어깨까지 들썩거리면서 과하게 숨을 내쉬는 종대를 보며 귀엽다는 듯이 웃고 있다.  급하게 전화를 받느라 구겨진 채 접혀있는 책을 들어 펼치는데, 사랑스러운 목소리가 엉뚱한 말을 내뱉는다.

 



“너, 오늘 그러고 면접갔다 왔어?”


“.. 응. 이상해?”


“미친.. 죽을래? 미쳤어, 미쳤어!”

 


 

이것저것 찾아보며 따라 해본다고 해봤는데 역시 이상한가? 종인이 콧등을 긁적거린다.

 



“너무.. 너무 잘 생겼잖아! 으아악!”

 



괴상한 소리를 내면서 크게 발을 구르더니 종인의 무릎 위에 내려 앉아 버린다.  심술이 덕지덕지 붙은 얼굴.  진심으로 질투를 하고 있다, 듣고 있기가 조금 민망하지만.  종인은 뭐야, 말하면서 그의 입술을 손바닥으로 밀어버렸지만 기분이 좋아 보인다.  오늘은 면접 날이었다.  아침부터 어색한 정장 차림으로 서울로 올라와 어려운 사람들을 대면하고, 시험까지 보느라 지쳐있던 참인데, 역시나 저의 연인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피곤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아, 열받아아! 말 거는 사람 없었어? 힝, 감금할거야!”

 



제발 그래 줬으면 좋겠다.  종대가 날 감금해서 평생 이 애만 보면서 살고 싶다.  제 허벅지 위에 앉아서 칭얼거리면서 어깨에뺨을 기댄다.  목 부근에서 숨이느껴진다.  지나치게 가깝다.  종인이 은근슬쩍 몸을 고쳐 앉았다.  척추를 따라 소름이 끼쳤다.

 

“진짜 멋있어, 내가 면접관이었으면너 뽑는다. 사무실로 불러서 뽀뽀하게, 히히..”

 

즐거운 상상을 하면서 키득거렸다.  근데 진짜 걱정이네, 남자인 내가 봐도 이렇게 잘 생겼는데..  회사 들어가서 인기 폭발하면 어떡하지?  생각만으로도 질색을 하며 종대는 고개를 들어 눈 위로 보이는 귀를 살짝 깨물었다.

 



“아..”


“너 가면 쓰고 다녀, 안되겠.. 어? 뭐야? 으, 으앗.. 미안!”

 



제 몸에 닿은 낯선 기운에 종대가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종인은 고개를 숙인 채,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살짝 보이는 종대의 발가락 끝이 당황한 채 정신 없이 꼼지락거린다.  끔찍한 상황이 벌어졌다.  하필 그가 제 몸을 의자 삼아 앉은 탓에 오늘은 도저히 숨길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해야 될 지 몰라 곤경에 빠졌다.  이런 날 싫어하면 어떡하지?

 



“내가.. 깨물어서 그래?”


“아니..”

 



그냥 같이 있으면 맨날 그래, 난처한 표정을 하고서도 솔직하게 덧붙인다.  그를 내려다보던 종대의 울대가 움직인다.  침이 꼴깍- 넘어갔다.  순진한 종인이 저를 향해 최대의 불순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 지나치게 자극적이다.  사실 그가 먼저 들켰을 뿐, 지금껏 저의 상황도 다른 적이 없다.  우리는 늘 아슬아슬한 선에서 사랑을 참아야 했다.  별다른 이유를 꼽아보진 않았지만 아마 한번도 그 선을 넘어본 적이 없어서이기도 하고 서투르기도 해서일 거다.  숨막히는 정적이 둘을 재촉했다.

 



“이, 일단 밥부터 먹자! 그래, 밥을 먹어야 힘을 쓰지! 아니! 그게 아니라, 내 말은 밥을 먹고 힘을 내서 아, 앞으로 우리가 어, 어, 어떻게 해야 되는지..”

 



종대의 횡설수설에 종인이 힘겹게 웃음을 흘린다.  그래, 라며 몸을 일으키는데 종대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아래쪽으로 내렸다가 급히 고개를 돌렸다.  종인아, 우리 어떡해야 돼?

 

 

냉장고 안에 역시나, 마땅히 먹을 게 없어 집을 나섰다.  종대가 애호박과 두부가 들어간 된장 찌개 얘기를 꺼내서 장을 봐다가 해먹기로 했다.  북적거리는 대형 마트에서 다시 서로에게 편안하게 녹아든 둘은 누가 봐도 집에서 나온 차림으로 팔을 겹친 채 웃고 있다.

 



“이거 사?”


“응, 하나짜리 사. 두 개는 많아.”


“두부는 큰 거 살래, 많이 넣어줘.”


“넣어달라고..?”

 



되묻는 말에 하얗게 질린 종대의 입이 경악으로 둥글게 벌어졌다.

 



“그런 말은 좀.. 조심해, 난 지금 정상이 아닌 것 같으니까.”


“.. 이 미친 놈.. 이제 막 나가자는 거야, 뭐야아!”


“아니.. 그냥 부탁한 건데..”

 



이미 들켜버렸으니 어쩔 수 없다는 듯 대범하게 ‘일상 생활 불가’ 상태에 접어들었다.  종인이 먼저 돌아선 종대의 뒷모습을 보며 제 뺨을 두드린다.  정신 차려, 김종인.  하지만, 쉬울 리가 없다.  하얀 목덜미, 마른 등, 입 맞출 때 바르작거리는 손.. 아름다운 피아노와 어울리는 그 손이 날 만진다면..  공황 상태에 빠져 멍-하니 앞에 있는 바나나를 집었다가 깜짝 놀라 집어 던지고 말았다.  그는 요동치는 욕정의 늪에 빠져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하필 마트 한 복판에서.

 



“이거 살까, 아니면.. 이거 살까?”

 



늘어서 있는 의약외품 사이에서 파스를 가리키고 있다.  네모난 것과 둥근 것 사이에서 고민 중.  손목에 붙일 거니까 역시 둥근 게 낫겠지? 물어도 옆에 있는 종인이 답이 없다.  원래대로라면 저가 먼저 나서서 이것저것 골라주고 있었을 텐데.  고개를 틀자 무언가 뚫어져라 보고 있는 게 눈에 담긴다.

 



“저거 사자.”

 



낮은 목소리가 가리킨 것은, 줄지어 늘어선 사각형의 얇은 상자들.  알록달록하고 반짝거리는, 그것들.  가격 표시 위에 정확히 쓰여진 상품명, 콘돔.  종대가 차마 말을 내뱉지 못하고 어버버버-  종인을 쳐다봤지만 이미 마음을 굳히고, 의중을 묻는 듯 저를 내려다 보고 있다.

 



“진심이야? 제, 제 정신이야?”


“응, 오늘 아니어도 필요할 것 같아.”


“야.. 이씨.. 갑자기 왜 이렇게 당당한데..”


“싫어?”

 



메마른 눈으로 저의 얼굴을 쓸며 솔직하게 유혹하고 있다.  종대는 빼도 박도 못 하게 저를 묶는 이런 대담한 고백에 한없이 약하다.

 



“안돼, 빨리 가자!”

 



종대는 달아오른 얼굴로 세모인지 네모인지 모를 아무거나 파스를 낚아채서 그 쪽을 빠져 나왔다.  도망치는 뒤꽁무니가 떨어뜨린 부끄러움을 쓸어 담으며 풉, 웃음이 터진다.  오늘은 살 수 없게 된 그것들을 다시 돌아본 종인이 어깨를 으쓱거린다.  같이 있다 보면 언젠가는, 뭐.  맨날 센 척 하더니 도망치는 거 봐, 귀여워.  각각 한 손에 봉지를 나눠 들고 발 맞춰 걷는다.  어느새 다가온 가을의 밤, 공기가 제법 쌀쌀해졌다.  옆으로 붙어 안 추워? 묻자 고개를 저으면서 웃는다.  조만간 지수가 한국으로 들어온다.  서울에 집을 구한다고 했으니, 종대의 집이 훨씬 가까워진다.  더 자주 볼 수 있게 된다.  더 자주 같이 밥을 먹고, 어디를 가거나 뭘 하든 오래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붕- 뜨는 것 같다.  종인의 발걸음이 어울리지 않는 박자로 들떠 있다.

 



“잠깐, 기다려.”

 



뭐 덜 산 게 있나?  갑자기 편의점으로 달려가버린 종대 때문에 봉지가 처져 맨 위에 있던 요구르트가 굴러 떨어졌다.  그걸 주워서 다시 넣고 있으니 후다닥 나온 이가 다시 봉지로 손을 뻗는다.

 


양치를 하고 나오니 먼저 누워 핸드폰을 들여다 보고 있던 종대가 저에게로 시선을 던진다.  슬쩍 핸드폰을 머리맡에 내리더니 이불을 끌어당겨 눈만 내놓은 채 소곤소곤.  불 끄고 와.




“벌써 자게? 영화 본다며.”


“불 끄고 봐아.”

 



종인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거린다.  불을 끄고 옆에 눕더니 언제나처럼 제 몸을 바짝 끌어 안아서 덜 마른 머리카락의 차가운 기운이 느껴진다.  종대도 자연스럽게 그의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장난스럽게 입을 맞추다가 눈 감아 봐, 하는 수상한 요청을 받았다.  종인은 별다른 의심 없이 또 뭘 해서 애간장을 녹이려고 하나, 싶을 뿐이다.  부스럭부스럭-  곧 부정확한 웅얼거림이 들려서 눈을 떴다.

 



“.. Shit..”

 



종대의 입술에 물려있는 네모 반듯한 포장을 보자마자 종인이 욕을 읊조렸다.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것이었다.  종대가 편의점에서 산 것은 ‘그것’일 줄이야.  하얗고 야한 얼굴이 입 꼬리를 올려 웃으며 물려있던 것을 손에 들더니,

 



“나 잘했어?”

 



종인은 인상을 찌푸린 채, 진짜야? 묻는다.

 



“아, 잘했냐고오!”


“응, 완전 잘했어.”

 



정색한 채, 정직한 대답을 해와서 종대의 웃음 소리가 커졌다.  키득키득거리다가 웃음을 그치고는 올곧게 눈을 맞춘다.  진한 시선이 공기 중에 얽히자 붙어 있는 이불 속이 습해졌다.  종대는 천천히 그의 팔을 붙잡아 재촉하듯 힘을 주었다.

 



“그럼 빨리 키스해줘.”

 



바짝 마른 입술을 할짝거린 종인이 눈을 감았다.  달디단 입술을 취하는 몸짓에 여유라곤 찾을 수 없다.  김종대 때문에 진짜 죽을 수도 있겠구나, 생각한 게 마지막이었다.  그 뒤로는 이성을 잃어..

 



“김종인! 나 배고파아!”

 



애인이 절 찾네요.  그 때를 떠올렸다간 정신이 혼미해져 기절할 수도 있거니와 김종대의 속살 이야기를 더 이상 남에게 알려줄 생각은 없으니이만 가야겠습니다.  잘 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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