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외사랑의 끝

 

 


칸막이 책상들이 늘어선 자습실.  엎드려 있는 준면과 안경을 닦고 있는 세훈의 옆에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책을 들여다 보고 있는 종인이 앉아 있다.  책 위로 빼곡하게 누워 있는 글자들을 진중한 눈길로 쓸어 담는다.  멈칫-  음악이 바뀌었다.  그가 손을 들어 이어폰을 눌러 본다.  언제 들어도 기분 좋은 곡, 『May Be』. 자연스럽게 이 곡을 선물 받았던 생일이 떠올랐고 흘러가 선물한 이의 얼굴이 그려진다.  언제나 저에게 사랑옵게 다가오는,

 


 

“종인아, 토요일에 뭐할까?”


“공..”


“공부 빼고.”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털며 어깨를 으쓱거린다.  아무 계획도 없다는 말 대신.  종대는 입 꼬리를 힘주어 올리며 침대에 걸터앉은 다리를 흔들거렸다.  다른 말 없이 빙그레 웃으며 저를 보고 있기에 왜, 물었더니 입술을 달싹거리며 시선을 바닥으로 내렸다.

 



“영화 보러 가자고.. 내가 엄청 좋아하는..”


“전에 말했던 거? 개봉했어?”


“응! 어제, 어제!”

 



또 기억하고 있네.  기분 좋아.  금새 신이 난 종대가 서 있는 종인의 곁에 다가서 그의 팔을 흔든다.  ‘하지마, 바보야.’ 말하면서 이마를 밀었지만 꼼짝도 않고 웃으면서 매달린다.

 



“같이 갈 거지이이- 빨리 대답해애!”


“알았어, 애들은?”


“어어? 애들? 바쁘대, 바쁘지. 바빠! 바쁠 걸?”

 



미심쩍은 눈길에 제 발 저린 종대가 어버버버 다급하게 손을 내젓는다.  또 무슨 앙큼한 생각으로 이러나 싶어 계속 의심을 내렸다.  얇은 입매 끝에서 쉴 새 없이 변명이 떨어진다.  어디 가서 죄짓고는 못 살 위인이다.

 



“애들 공부하게 내버려둬~ 너만 공부 잘하면 다냐아아!”


“그게 무슨 상관이야?”


“그러니까아! 몰라! 둘이 가.”


“왜?”

 



종인의 얼굴로 손이 뻗친다.  눈을 흘기고 얄미운 입술을 손으로 잡아당기며 닥치고 둘이 가자, 엄포를 놓기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빙그르르 돌아 오예, 침대에 몸을 던진다.  바보 같은 웃음 소리가 이어졌다.  우리가 보게 될 영화라면 가끔 그가 보고 있던 그런 류일 거다.  희한하게 생긴 히어로들이 모여 외계인에 침공당하는 지구를 구하는, 뭐 그런 내용의.  영화에 흥미는 없지만 발을 까딱거리고 있는 해맑은 얼굴에 흥미가 있다.  영화관을 가는 것도 퍽 오랜만이고.

 



“이번에 나온 게 3편이란 말이야? 지금 1편보고 자, 내일은 2편. 내일 일찍 들어와!”


“그냥 봐도 되는데..”


“아, 안돼! 처음부터 봐야 더 재미있어! 빨리 일루와.”

 



침대를 팡팡 두드리며 재촉하기에 불을 끄고 못 이기는 척 옆에 엎드렸다.  멋있긴 하네.  화면에 엔딩크레딧이 나오자 종인이 하품을 하며 핸드폰을 덮는다.  고개를 돌리니 이미 영화 중반부터 팔을 괴고 잠들어 있던 룸메이트가 눈에 들어왔다.  정적이 깔린 침대 위로 차분한 숨소리가 일정한 선율을 만든다.  그의 속눈썹에 닿을 듯 말 듯 손가락으로 쓸어본 종인의 눈동자가 어둠 속에 반들거린다.  살금살금-  조심스럽게 반듯한 이마에 입술을 내렸다.  잘자.

 



“.. 왜 그랬어?”


“미안, 나도 모르게.. 어?”


“개소리야, 이거 왜 이렇게 풀었냐고.”

 



세훈이 저가 빌려준 노트의 한 부분을 가리키며 속살거린다.  얼굴이 빨개진 채 허둥지둥하는 302호의 친구를 보며 고개를 갸우뚱-  공부 많이 해서 정신 나간 거 아냐? 물으며 키들거리는 그를 헛기침으로 외면하고는 노트에 연필을 내린다.

 



“오늘도 11시? 컵라면 먹고 올래?”


“아니, 나 오늘 일찍 들어가.”


“웬일로?”


“음.. 뭐 볼 게 좀 있어서.”

 



차마 종대와 캡틴아메리카 2편을 봐야 된다는 말이 안 나와 콧등을 긁적거리며 답했다.  눈을 오래 마주치고 있으면 절대 비밀은 아니지만, 뭐든 주절주절 거짓말을 늘어놓게 될까 봐 종인은 서둘러 책장을 고쳐 잡았다.

 




 

알람이 울리지도 않았는데 저절로 눈이 떠졌다.  눈보다 빠른 손이 옆으로 뻗어졌지만 룸메이트의 온기만 남아 있을 뿐 늘 닿던 감촉이 없다.  종대는 저답지 않게 재빠르게 이불 속에서 빠져 나와 창문으로 다가섰다.  밀려 들어오는 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자 머리가 맑아진다.

 



“아- 날씨 좋다! 헤헤..”

 



종인과 함께일 오늘에 홀로 데이트라고 이름을 붙여본 종대가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며 발을 구른다.  괜스레 기분좋은 날이다.  아니, 나까지 속일 필요는 없잖아.  너무도 명확한 이유로 기분 좋은 날이다.  달칵-

 



“벌써 일어났어?”


“너, 너는?”


“전화 와서.”


“엄마? 이 시간에 전화하셨으면 또?”


“응, 핸드폰에서 술 냄새 나는 기분이야.”


“끄하하항, 너네 엄마 너무 음.. 귀여우셔.”

 



지수가 아침에 전화하는 일은 드문데, 거의 주말이거나, 그 때마다 고주망태가 아닌 적이 없다.  특히 최근에, 종대와 저는 그녀의 취중 전화로 잠에서 깬 적이 몇 번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서인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지만 언제나처럼 밝은 목소리에 오래 가지 않았다.  뜻하지 않게 일찍 일어나버린 302호의 둘은 침대 위에 겹쳐져 한껏 뭉그적대다 나갈 준비를 했다.  종대는 여러 개의 모자를 늘어놓고 한참을 뭘 쓸지 고민하다가 ‘꼭 써야 돼?’ 종인의 물음에 간단히 모자 쓰기를 포기한다.  서로 맞춘것도 아닌데 둘은 살금살금 복도로 나와 조용히 기숙사를 빠져나갔다.  교문까지 말 한마디 않고 조금 떨어져 걷다가 학교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손뼉까지 마주쳤다.  애들이 봤다면 배신자들, 이라고 난리였겠지.

 



“뭐 먹을래?”


“네가 먹고 싶은 거.”


“그럼, 피자.”

 



우리의 메뉴 정하기는 쉽다.  종인은 언제나 제게 그 일을 맡겨 왔다.  처음에는 억지로 따라 주는 것 같아 불편했지만 지금은 진짜로 뭐든 괜찮아서, 그렇게 한다는 것을 알아서 아무 문제가 없다.  오히려, 저가 먹고 싶은 걸 그와 함께 먹을 수 있으니 더 좋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종인은 정말 싫은 것에는 특유의 표정으로 답하는데, 다행히 종대는 그 표정을 읽을 줄 아는 상대이다.

 



“아, 그만 좀 웃어.”


“흐히.. 나 왜 자꾸 웃음이 나지?”


“피자가 그렇게 좋냐?”


“아니거든.”

 



네가 좋아서, 라는 말을 삼키며 하루 종일 내려올 생각 않는 입술 끝을 문질렀다.  종인은 저가 진짜로 피자 때문에 실실거린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피자를 두 조각이나 한꺼번에 접시에 올려주었다.  저를 어떻게 생각하는 건지, 마다하지 않고 한꺼번에 입에 우겨 넣었지만.

 

 

영화관에서는 팝콘을 한 주먹씩 퍼먹다가 꿀밤을 맞고 팝콘을 빼앗겼다.  종대가 이마를 문지르며 입술을 삐죽거린다.  그렇게라도 안 하면 온 신경이 그에게 쏠려서 곤란했기 때문에 그런 건데.  손끝만 스쳐도 그 자리에 불이 붙은 듯 뜨거운 느낌이 들었다.  얼굴에 열이 올랐다 내렸다 반복해서 마음과는 별개로 피곤하기까지 하다.  그토록 기다려왔던 영화지만 조만간 혼자 다시 봐야할 것 같다.  화면을 보고 있어도 머릿속에 들어오는 게 전혀 없었다.  지금은 그저 종인이 팝콘을 몇 번 집어 먹는지, 어떤 장면에서 웃었는지, 닿아있는 손가락이 왜 움직이는지 따위만 중요하다.  전편들을 보면서 심드렁히 ‘그냥 그래.’ 라고 평할 때는 언제고 종인은 화면에 마음을 온전히 빼앗겨 버렸다.  내 마음은 모르고, 쳇.  괜히 얄미워져 어깨에 올려져 있는 그의 손을 깨물어 버렸다.  그제야 저에게 시선을 주며 어깨를 으쓱한다.  아, 한대만 때렸으면 소원이 없겠네.  물론, 입술로.  종인은 고개를 숙이며 입술을 실룩거리는 종대를 보다 다시 화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심각한 장면인데.  웃음 코드가 희한하네, 라고 생각하며 그의 얼굴에도 엷은 미소가 떠오른다.

 



“그렇게 기다리더니, 재미있었어?”


“응! 너는?”

 



괜찮았어,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고는 ‘나도 아이언맨 되고 싶어.’ 라고 너무 안 어울리는 말을 덧붙여서 종대는 목을 뒤로 젖히며 크게 웃어버렸다.  돌아가는 길에 서점에 들렀다.  어떤 책을 꺼내 펼치던지 그들의 웃음 소리가 책장 소리 뒤로 꼬리를 문다.  참고서를 뒤적거리다가 어떤 책에 오랜시간 사로잡혀있는 룸메이트에게 다가섰다.  시집이다.  만화가 아닌 책을 보는 모습은 오랜만이다.  얇고 작은 그 시집이 종대와 잘 어울린다.  그의 뒤에 서 종인은 잠시 혼자만의 감상에 젖어 보았다.  그와 공유하는 이런 침묵, 공기조차 좋다고 느끼는 저가 낯설다.  서로에게 겉잡을 수 없이 스며들어 있다.  혹여 그와 떨어지게 되면, 제 몸에 번져 있는 그가 지워진다면, 모든 것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종인은 저도 모르게 그의 뒷목으로 손을 뻗었다.  조금 힘을 주어 끌어당기자 종대의 어깨가 가슴팍에 닿았다.  초조한 두려움이 멎는다.

 



“응? 왜?”


“그냥.. 아이스크림 먹을래?”


“당근이지! 초코 콘!”

 



아이스크림을 손에 쥐고 익숙해진 길 위를 걷는다.  어느새 해가 지고 있어 어둠에 물든 공기가 무겁게 느껴졌다.  늘 종인과 함께 있으면서도, 지금 저희를 스쳐 지나가는 시간이 아쉽다.  저절로 걸음이 느려지고, 그 걸음에 종인이 맞춰 걷는다.

 



“김종인.”

 



웃음기 없는 얼굴은 생소하다.

 



“나한테 넌.. 특별해.”


“갑자기 뭐야.”


“그냥, 그렇다고.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떨어지진 말자.”


“무슨 일?”


“만약에 싸우거나, 뭐.. 마음이 안 맞거나 해도..같이 있자는 거지, 붙어 있으면 다시 괜찮아질 거야.”




일생일대의 고백을 앞둔 종대의 마음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약해졌다 강해졌다 담금질을 반복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애써도 막상 굳게 마음을 먹고 나니 잘 되지가 않는다.  혹시 거절 당할지 모르는 제 마음보다 종인의 마음이 걱정되었다.  마음이 약해서 저를 배려한답시고 쓸데없는 짓을 할지도 모른다, 그는 분명 그럴 것이다.  그런 건 의미가 없다.  종대가 갖고 싶은 건 오롯한 그의 진심이다.  종대의 손에서 쓰레기를 빼앗듯 가져간 그가 제 것과 함께 주머니에 넣는다.  종대는 살포시 웃으며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솔직하겠다고 약속해.”

 



뭘? 이라고 묻겠지, 언제나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느리게 감긴 눈가로 긴 그림자가 진다.

 



“약속할게.”

 



종대의 예상이 빗나갔다.  단호한 음성에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열어둔 창문으로 든 선선한 자홍바람이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린다.  피아노 의자에 한가로이 누워있는 이.  구름한 점 없이 푸르른 하늘로 손을 뻗어 본다.  허공에 피아노를 연주하듯 손가락을 움직이더니 곧 흥얼거림이 입혀졌다.  반달을 머금은 눈에 묻어있는 감정들.  설렘, 기대, 두려움..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걸까?

 



“내가 너를.. 으으.. 못 하겠어!”

 



다리를 구르며 벌떡 몸을 일으킨다.  상기된 뺨을 두 손으로 감싸고 몸을 흔드는 모양새가 요란하다.

 



“내, 내가.. 후.. 망했어, 망했다고!”

 



오리처럼 입술을 내민 채 울상이더니 피아노 위에 놓여있는 종이로 손을 내린다.  낙서처럼 써 있는 글귀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중얼중얼-  사뭇 진지하다.  근데, 이거 왜 이렇게 슬프지?  끊임없이 움직이던 입술이 서서히 굳어졌다.  내 마음이랑 똑같아서 그런가?  별안간 종이를 품에 꼭 끌어 안는다.  잘 될 거야, 종이에게 말을 붙여 보았다.  당연히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너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어떤 말로 날 행복하게 할까?  그 머릿속에 두 사람은 절대 놓지 않을 것처럼 손을 맞잡고 있었다.  홀로인 피아노 실에서 얕은 웃음 소리가 새어 나온다.  김종대, 넌 할 수 있어!

 

 

주머니 속 낮게 울리는 핸드폰에 종인이 웃음을 감추려 헛기침을 한다.  당연히 종대겠거니 하고 몰래 들여다 보았다.  안나 수녀님?   <종인아, 괜찮을 때 전화해줘.>  수업 시간에 연락을 받은 적은 처음이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들어 종인은 몸을 곧게 세웠다.  쉬는 시간 종이 울리자마자 그는 교실을 나섰다.

 

 

연습실 밑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종인의 말풍선에 서두르다가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구를 뻔 했다.  때문에 바싹 긴장했다가 다리에 힘이 풀려 버렸다.  별관 건물 밖으로 나오자 계단 아래 어둠 속, 우두커니 서 있는 인영이 눈에 담긴다.  종대는 걸음을 멈추었다.  저를 기다리고 있는 뒷모습.  갈비뼈가 들썩거릴 만큼 크게 호흡을 내뱉고 다시 발을 내딛는다.

 



“야!”


“.. 왔어?”

 



콩닥콩닥 뛰는 가슴 때문에 잔뜩 굳은 종인의 얼굴을 보지 못 했다.  벤치에 앉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들을 둘러싼 공기만 흘러가지 않고 머물렀다.  약속이라도 한 듯 둘은 그 침묵을 눈치 채지 못 했다.  서로 다른 이유를 가지고서.  종대는 고심 끝에 손 안에서 꼬깃꼬깃해진 종이를 가방 안으로 집어 넣었다.  그리고 두 손을 꼭 쥐고 눈을 감았다.

 



“내가 너를..”

 



 
 

캄캄하다.  온 우주에 지금 제 목소리를 들어야 하는건 한 사람뿐이다.  떨리는 목소리가 창피했지만 이까짓 감정은 그를 좋아하는 마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너는 몰라도 된다.

너를 좋아하는 마음이 오로지 나의것이요, 나의 그리움은 나 혼자만의 것으로도 차고 넘치니까. 

나는 이제 너 없이도 너를 좋아할 수 있다.”

 



종인은 운동장에 고정한 눈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바르작거리는 종대의 마음이 그가 읊는 시에 담겨 온 몸으로 흘러 들었다.  가슴이 크게 울컥-해서 몸이 덜컹거린 느낌이었다.  그의 고백은 예상했던 것처럼 너무 사랑옵고 진실하다.  그래서 슬펐다.  도망치고 싶었다.

 



“종인아, 나..”


“미안해.”

 



솔직할 수 없어서 미안해.  약속을 못 지켜서 미안해.  둘은 언제나처럼 서로를 생각한다.  너는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종대는 명백한 거절에 당황한 표정을 지우지못하고 허둥거렸다.  상상 속에서 이미 수백 번이나 일어났던 일인데 실제로 미안하다는 목소리를 듣고 나니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변하는 건 없을 거라고, 저보다 더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을 이에게 말해주고 싶은데 목소리는 나오지 않고 애꿎은 눈물이 그의 다리 위로 뚝-떨어졌다.

 



“.. 나 미국 가.”

   



그리고, 생각했던 것보다 더 최악의 고백이 되었다.  종대의 외사랑이 끝났다.

 

 




 ‘여보세요.’


“네, 수녀님. 무슨 일 있으세요?”


‘.. 놀라게 하려던 건 아닌데, 미안하구나. 늦으면 좋을 게 없는 것 같아서..’


“말씀하세요.”


‘요새 지수랑 통화하지? 혹시 제부 얘기 들은 거 있니?’

 



수녀님의 제부라면, 종인의 외할아버지, 즉 안나의 아버지다.

 



“아니요, 없어요.”


‘원래 혈압이 있었는데 요즘 자주 쓰러진 모양이야, 일시적인 거지만. 어제는 화장실에서 쓰러져서 좀 다쳤나 봐, 입원했다고 하더라..’


“괜찮으시대요? 엄마는 그런 말씀 없었는데..”


‘너한테 부담될까 봐 말 못 했겠지. 지수가 많이 힘들어한대.’

 



그녀가 술에 취해 전화를 걸어늘 말하길 머뭇거리던 게 ‘할아버지’의 얘기였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얘기 들었어, 지수가 같이 살자고 했다며.. 이제 그 애한테 답을 주는 게 어떻겠니..’

 



종인은 불안해진 마음을 잠재우려 주먹을 꽉 쥐었다.  두 달 전 지수를 만났을 때부터 고민했던 일이지만 종인은 그 시기를 적어도 고등학교 졸업 후로 잠정적으로 미룬 상태였다.  사실 곧바로 그녀를 따라갔어야 하는 것이 옳은 일이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그러기엔 이 곳에 너무도 소중한 것들이 남아있다.  저에게 사랑 받는 느낌을 알려주고 사랑 하는 법을 가르쳐준 이들.  그리고..  그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불안에 떨고 있을 그녀의 곁으로 돌아가 버팀목이 되어줄 사람은 저뿐이다.  지수의 외사랑이 끝났다.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  갑작스럽게 종인을 떠나 보내게 된 이들은 한 동안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 하고 버둥거려야 했다.  똑같은 일상으로 그려진 2주였는데 온통 슬픔투성이였다.  302호의 바닥은 매일 손님을 맞이했다.  종대가 ‘우리 방이야아, 좀 꺼져!’ 소리쳤지만 누구 하나 듣는 이가 없이 돌아가면서 베개를 들고 문을 두드렸다.  사실 그래서 다행이었다.  신경질을 내는 척 했지만 종대는 302호에 종인과 단둘이 남겨지는 게 무서웠다.  울고불고 그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가지 말라고 애원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렇게 추한 끝을 보여주고 싶지 않다.  오늘은 경수와 백현이 바닥을 차지하고 누워 한참 종인을 괴롭히다가 막잠에 든 참이었다.  등을 지고 누워있던 종대가 속삭였다.

 



“너 가는 것도 못 보겠다..”


“내일 가서 언제 온다고?”


“다음주 화요일.”


“그럼 못 보겠네..”

 



콩쿠르 때문에 배웅도 할 수가 없게 되었다.  뜻대로 되는 게 아무것도 없다.  우린 다시 볼 수 있는 걸까?  함께 보내왔던 긴 시간만큼 기다리면 될까?  젖은 눈가로 이불을 덮어 썼다.

 



“잘 자.”

 



종인을 가늘게 떨리는 어깨로 손을 뻗으려다 그만 두었다.  이기적인 욕심으로 그에게 더 이상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시간이 조금 흐른 뒤에도 돌아올 수 있을까?  그 때도 나를 보고 웃어 줄까?  뜬 눈으로 지샌 우리의 마지막 밤은 찰나처럼 짧았다.  

 

 




콩쿠르를 마치고 돌아오자 냉기를 품은 302호가 종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양쪽으로 갈라져 떨어져있는 침대와 비어버린 책상 한 켠을 눈에 담자 가슴이 욱신거린다.  당장이라도 화장실 문을 열고 나와 잘 갔다 왔는지 물으며 제 가방을 들어줄 것 같은데, 한참을 서 있어도 인기척이 없다.  언제나 아늑했던 이 곳이 기분 나쁜 외로움으로 가득 차 있다.  힘없이 침대에 털썩 주저앉은 종대는 낯선 방 풍경을 허무한 눈길로 쓸었다.  책상 위에 놓여있는 종이 한 장.  거기에는 종대가 그에게 전했던 마음이 남겨져 있었다.

 



내가 너를 나태주

 


내가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너는 몰라도 된다

 

너를 좋아하는 마음은

오로지 나의 것이요

 

나의 그리움은

나 혼자만의 것으로도

차고 넘치니까

 

나는 이제 너 없이도

너를 좋아할 수 있다.




그 아래 종인이 두고 간 마음이 있었다.  




'돌아올게, 기다려.'  




그의 진심이었다.  그것을 끌어안은 입 꼬리가 진한 웃음을 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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