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 기다려줄게

 


 

맑은 날씨의 주말이라 이른 시부터 성당의 공기가 여러 빛을 띠었다.  그리 넓지 않은 뜰이 희고 검은 차들로 메워지고 군데 군데서 다른 목소리들이 합쳐진다.  종인은 오전부터 ‘원장실’이라 쓰여있는 공간에 있었다.  안나 수녀님의 개인 사무실 같은 곳이다.  원래대로라면 소망원 아이들과 함께 있어야 마땅하지만 오늘은 그 자리를 타인에게 양보해야 했다.  일찍 일어나 비몽사몽인 채 내려오자 수녀님은 오늘은 학생들이 봉사활동을 올 예정이니 쉬어도 된다며 제 등을 쓸었다.

 



“그럼 일 도와드릴게요.”


“집에 오면 일만 하는 애가 무슨 또 일을 하겠대?”

 



까르르 웃으셨지만 종인이 어지럽게 쌓여있는 종이 더미로 시선을 내리자,

 



“하이고.. 저건 어쩔수가 없네.”

 



돋보기 안경을 고쳐 쓰시는 걸 보고 그는 웃어버렸다.  난처하실 때면 하시는 행동이다.  컴퓨터로 작성해야 하는 서류 작업은 나이가 지긋한 그녀에게는 조금 버거운 일이다.  독수리 타법에 자신이 있었지만 아무리 잘한다고 해도 독수리 타법일 뿐.  굳이 부탁하지 않아도 종인이 왔다 가고 나면 늘 책상 위 어지럽게 널려있던 일거리가 사라져 있었다.  얼른 내려가 보세요, 그의 말에 ‘감사합니다’란 답이 돌아온다.  그 앞에는 ‘천사를 보내주셔서’라는 말이 소리 없이 붙어있다는 것을 종인은 모를 것이다.  

 
 

열어놓은 창문으로 훈풍이 밀려들어왔다.  귀를 울리는 여름 매미 소리.  들여다보던 종이를 내린다.  문득 이 곳에 있으면서 저가 여름 풍경에 놓여본 적이 있었는지 헤아려본다.  전이랑 뭐가 달라진 걸까?  위안을 얻을 수 있는 장소가 생겼다는건 그가 알게 모르게 마음 속에 파란을 만들고 있었다.  지금 종인에게는 소망원, 그리고 안나 수녀님의 품이 아니더라도 돌아갈 곳이 존재한다.  ‘302호’라는 글자 아래 ‘김종대’, ‘김종인’이라는 이름이 나란히 적혀있는 팻말이 붙어있는 곳.  그리고 그 문을 열기만 하면 언제라도 함께 시간을 달려줄 이들이 있는 그 곳.  옆에 놓여있던 핸드폰 버튼을 꾹-  

 
 

저희 아홉의 사진이배경화면으로 되어 있다.  3학년 졸업 사진을 찍은 얼마 뒤, 준면이 꼭 옷을 맞춰 입고 단체 사진을 찍어야 된다고 떼를 써 다같이 보충을 빼고 사진관에 가서 정장까지 빌려 입고 찍은 사진이었다.  이 날, 재미있었는데.  혼자 키들거리며 괜히 화면을 건드려본다.

 

 


“아, 답답해 죽겄네!”


“너 지금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지?”


“크큭.. 형도 참, 눈치가 빠르셔.”

 



백현이 준면의 발길질을 피해 재빨리 자리를 뜬다.  셔츠 단추를 반이나 풀어 헤치고 종인의 허벅지를 베고 누워있던 종대가 벽쪽으로 돌아 누우며 추워, 중얼거린다.  차가운 바람이 뿜어져 나오는 에어컨 앞이라 덥다고 난리를 치며 눈을 감더니 금새 더위가 가셨나 보다.  옆에 내려놓았던 정장 재킷을 덮어주는 걸 보더니 찬열이 어김없이 ‘지랄 났네.’ 라며 비아냥거렸다.  306호에서 새벽까지 같이 게임을 했다는데 왜 김종대만 맥을 못 추고 널브러졌을까?

 



“저 새낀 체력이 딸려서 안 된다니까.”


“저체중한테 뭘 바래?”


“.. 오세훈 죽인다..”

 



종인이 같이 웃자 허벅지에 올려진 머리에 무게가 더해졌다가 허전해진다.  너무 춥다고 몸을 파닥거리면서 경수가 앉아있는 조명이 있는 쪽으로 가버렸다.  그의 허벅지를 베고 누웠다가 곧 바닥으로 떨어지는 게 보였다.  ‘좀!’ 소리를 치지만 경수는 단호하게 다리를 꼬아버린다.  다리를 끌어안고 징징거리는데도 본체 만체-  

 



“아, 시끄러워! 그냥 해 줘라!”


“싫어, 더워.”


“자, 요기 봐~”


“그런 건 언제 챙겼냐?”


“이럴 때 찌고야지. 얘들아, 요기, 요기.”

 



 
 

장이씽은 제 캠코더에 담기는 이들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중국으로 돌아가서 본다면 그리움이 덜하겠지, 하는 생각이 미쳐 잠시 멍해졌는데,

 



“형! 잘생긴 사람부터 찍어염~ 브이~”


“풉.. 배켠이 귀척 쩌러.”


“아씨, 누가 저 형한테 귀척이란 말 가르쳐줬냐?”


“보나마나 김준면이겠지.”


“나 아니거든!”

 



제 곁으로 다가오는 민석에게로 렌즈를 돌렸다.  멍청아, 부르더니 타이로 손을 뻗쳐온다.  이 따뜻한 손길이 얼마나 그리울까?

 



“그렇게 웃지마, 띨띨해보여.”


“띨띠르?”


“응, 너 같은 거.”


“학생들! 들어와요!”

 

“우리 뭐 하나 하자! 윙크해, 윙크!”


“찍습니다~ 하나, 둘, 셋!”

 



우린 몇 장의 사진을 고르는 데 꽤 오랜 시간을 허비했다.  종인은 모든 사진과 함께 이 순간을 담고 있는 장이씽의 캠코더를 부러운 눈길로 쳐다보았다.  나도 앞으로는 동영상으로 찍어야지, 다짐하는 새 준면이 이러다간 날 샌다며 제멋대로 사진을 골라버렸다.  인화된 사진을 받아 든 종인은 가슴이 조금 뻐근해졌다.

 



“들고 있어 봐, 이거 찍어서 배경화면 할래애.”


“나도 해줘.”

 



콧등을 긁적거리는 손을 잡아 내리면서 종대가 입 꼬리를 올렸다.  당연하지.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회상에 빠져있는데 핸드폰 화면으로 말풍선이 떠오른다.  내일 일찍 와.  종인은 몇 시에 돌아가야 할지 고민 중.  그는 그 곳으로 간다고 하지 않고 자연스레 돌아간다고 말했다.

 

 

정리가 끝나자 네 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봉사활동 온 학생들과 근처에 있는 냇가로 놀러 나갔다는 아이들을 마중하러 나섰다.  나가는 길목에 있는 방울 토마토를 서너 개 따서 입으로 가져간다.  햇빛이 따사롭다.  잔디인지 뭔지 모를 풀이 앉아있는 흙 길, 초록 밤나무, 아직 서로의 손을 놓지 못한 민들레 씨앗들 그리고 연두색 물결이 치는 논두렁.  오랜만에 발길을 뻗은 곳곳에서 어린 기억을 떠올리다가 잠시 잊은 척 보관해 두었던 문자를 열어 보았다.  <만나줄래? 답장 기다릴게.>, <네가 괜찮다면 바로 한국에 들어갈 예정이야.>

 



“오빠!”

 



화들짝 놀라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고개를 들었던 종인은 활짝 웃고 있는 소윤의 손을 잡고 있는 이를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 도경수?  그도 놀란 듯 잠시 멈칫하는 게 눈에 들어왔다.  소윤이 그 손을 놓고 발걸음을 내딛기에 습관적으로 큰 보폭으로 다가가 안아 올렸다.  종인은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깨물었다.  경수는 그런 그를 지나쳐 친구들인 듯 보이는 이들에게로 앞서 나갔다.  젖어있는 소윤의 머리카락이 얼굴을 간질인다.  천천히 뒤를 돌아 벌어진 거리만큼 작아진 뒷모습을 쫓아갔다.  그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런 상황을 전혀 상상해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막상 현실이 되니 커다란 벽에 가로막힌 것처럼 가슴이 답답해졌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예전처럼 불안감에 짓눌려 세상에서 사라져 버리고 싶다거나, 하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저 경수가 저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뿐.  종인은 그가 왜 저를 그냥 지나쳐 가 버렸는지 알았다.  같이 온 친구들에게 함부로 종인의 이야기를 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경계한 거다.  여기서 알은 체를 했다면 그들에게 종인의 이름이든 뭐든 분명 ‘소망원에 사는 친구’에 대한 설명을 해야 했을 거다.  너무도 그다운 행동이라 저도 모르게 살짝 웃어 버렸다.  어쩌면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  저희들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간혹 내밀어온 따뜻한 손을 보고도 모른 체 해야 할 때마다 ‘너희를 믿을 것 같아?’ 라고 그들을 기만하는 기분이 들어 죄책감이 느껴졌다.  가족이나 중학교 생활에 대해 이야기할 때,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저를 그들은 분명히 알고 있다.  그래도 그들은 저를 재촉하거나 채근하는 일이 없다.  그저 묵묵히 기다려준다.  그 기다림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종인은 별안간 뜨거워지는 목구멍에 소윤을 감싼 팔에 힘을 주었다.  그 기다림의 의미는..  소윤과 함께 마지막으로 소망원 뜰에 발을 들였다.  그와 낯선 몇 명이 성당 쪽으로 가고있는 게 보였다.  그 뒷모습을 보고 있는데 마침 경수가 뒤를 돌아보았다.  손으로 전화기 모양을 만들어 귀에 댄 그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한 시간 뒤쯤에 그로부터 성당 뒤 등나무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말풍선이 도착했다.  저를 기다리는 모습을 보며 잠시 숨을 골랐다.

 



“웬 봉사활동이야?”

 



퉁명스럽게 내린 목소리가 조금 떨린 것 같다.  맞은편에 앉으면서 들고 온 음료수 캔을 그 앞에 내려놓았다.

 



“.. 친구들은?”


“먼저 갔어, 둘러대느라 혼났네.”

 



평소와 똑같은 표정.  처음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처럼 어른스러운, 그런 표정에 높이 들려있던 마음이 차분히 내려앉는 것 같다.  종인이 ‘음’, ‘어’ 따위의 말이 되지 못한 소리를 내뱉자 그는 어색하게 하지마, 한마디 하며 크게 웃었다.

 



“크흠.. 여기가 우리 집인 거 어떻게 바로 알았냐?”


“너 완전 편한 차림이잖아, 츄리닝 봐.”

 



아, 아무렇게나 접혀 올라가있는 바지를 내려다봤다.  누가 봐도 집이라고 생각하겠구나.

 



“굳이 말 안 해줘도 돼.”

 



경수의 말에 휘청거리던 마음이 균형을 잡는다.  널 못 믿어서가 아니라 그저 말하기가 어려울 뿐이라고 종인은 소리 내어 말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대신 다른 곳을 서성이던 눈동자를 올곧게 경수의 눈에 맞추었다.

 



“솔직히 알고 싶긴한데.. 그건 호기심 같은 게 아니라 혹시 내가 조금이라도, 음..”


“무슨 말인지 알아. 오늘따라 너도 말을 못 하는 것 같다?”



 

종인의 농담에 경수의 어깨가 조금 내려갔다.  사실 경수도 마음을 졸이고 있었던 것이다.  예기치못한 이 일로 혹시 종인이 다시 멀어질까, 그에게 상처를 입혔을까 걱정에 바싹 말랐던 입술이 그제서야 느껴졌다.  종인이 가져온 음료수 캔을 집어 들었다.

 


의외로 담담히 제 얘기를 꺼내놓는 종인을 두 눈 가득 담으면서 먹먹해지는 것을 억누르느라 혼났다.  일부러 어제 백현이 보내준 웃긴 사진들을 떠올려야 했다.  안 그러면 그에게 어줍잖은 동정의 눈물을 보여줄 것만 같았으므로.  상처들을 잘게 조각 내 하나하나 감내하면서 저렇게 담담한 척을 할 수 있을 때까지 얼마나 고통스러운 나날이었을지 감히 헤아릴 수도 없는 것이어서 함부로 이해한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종인처럼 담담한 척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었다.  그건 저도 모르게 캔의 글자를 손톱으로 지워야 했을 정도로 어려웠지만.  비로소 알맞은 영단어의 뜻을 알아낸 것처럼 머릿속에서 그에 대한 모든 게 제자리를 찾아간다.  종인이 저희를 받아들이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린 이유, 왜 홀로 있을 때의 교실을 불안해 했는지, 생일에 보였던 눈물이 어떤 의미인지, 왜 타인의 호의를 두려워하는지.  그리고 지금 그에게 저희의 곁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느껴져 가슴이 벅찰 정도로 기쁘고 고마워졌다.  저는 그를 절대로 이해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괜찮다고 말하지도 않을 거고 잘 견뎠다고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저 곁에 있을 거라고, 그가 원하면 언제든 그러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럼 너 신부님 될 거야?” 


“미친.. 여기 살면 다 꿈이 그건 줄 아냐?”


“넌 왠지 잘 어울릴 것 같아서.”

 



놀리듯 웃는 경수의 앞으로 종인이 들고 있던 음료수 캔을 밀어놓았다.  제 얘기를 들으면서 몇 번이나 눈물을 참으려 음료수를 벌컥벌컥- 들이키는 걸봤다.  지금도 입술이 말라 보였다.

 



“근데 여기 사는 것치곤 영 독실하지가 않네.”


“응, 난 별로..”


“세례명은 있어?”


“안젤로.”


“무슨 뜻인데?”

 



종인이 고개를 살짝 숙이면서 ‘천사.’ 하고 읊조렸다.  귀 끝이 빨개져 있었다.

 



“풉.. 잘 지었네.”


“죽는다.”

 



웃음기 서린 눈동자를 마주하며 경수는 속삭였다.  우리가 기다려줄게.  그 기다림의 의미는..  그들이 저를 아주 사랑한다는 것이다.

 

 




14-2. 외사랑 Ⅰ

 


외사랑 : 좋아하는 걸 알면서도 받아주지 않아서 한쪽만 상대편을 사랑하는일.

 



십자가를 짊어진 예수상이 있는 앞뜰에 피는 장미들이 그러하듯 소년은 그냥 그 곳에 있었다.  갈 곳 잃은 아기 새들을 보살피는 곳에.  잠을 깨 일어나면 늘 시끄러운 또래 애들과 뛰어 놀고 삼시세끼를 꼬박 먹고 다정한 수녀님들이 읽어 주는 동화의 꿈을 꾸었다.  성당에 붙어있는 건물에 그의 방이 따로 있었지만 왜 친구들과 떨어져 혼자 그 곳에서 자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소년은 안나 수녀님에게 하루 종일 떼를 써 결국 소망원에 머무르게 되었다.  함께였던 친구들이 계속 제 곁에서 떠나는 이유를 묻자 수녀님은 저가 그들과 다르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

 



“뭐가 다른데요?”


“종인아, 너한테는 내가 있잖니.”


“그럼 다른 애들은 이모할머니가 없어요?”


“그래, 넌 가족이 있는 거야.”

 



사실 그 때의 소년은 ‘가족’ 등의 의미를 헤아릴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기에 무엇도 이해할 수가 없을뿐더러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냥 호기심 많은 어린이로서 책에서 본 엄마, 아빠 같은 것에 대해 더 물었을뿐이다.  그녀는 저희가 책 속에 있는 ‘가족’이라고 했지만 믿어지지 않았다.  이모할머니는 거짓말쟁이야, 우리가 가족이라면 왜 할머니가 엄마가 아닌 건데?  소년에게는 생일 즈음마다 선물을 보내주는 산타 할아버지 같은 존재가 있었다.  꼭 생일이 아니었던 것도 같다.  6개월에 한 번 정도?  그냥 어쩌다 한 번이었다.  우체부 아저씨가 커다란 글씨로 ‘지수’라고 쓰인 상자를 갖다 주시는 날이면 하늘로 날아갈 듯 기분이 좋아 하루 종일 그 상자를 안고 다녔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모두가 잠든 밤에 홀로 그 상자를 열어 보았다.  보통 그 안에 들어있던 건 장난감 따위였는데 그의 나이에 비해 너무 유치하거나 너무 어렵거나 해서 제대로 가지고 놀아본 적은 없었다.

 



“할머니, 지수가 뭐에요?”


“지수는.. 이름이야.”


“누구 이름이요?”

 



안나 수녀님은 그이름에 대한 것만은 똑바로 대답해주신 적이 한번도 없었는데-어디선가 주워들은 ‘후원자’라는 단어를 ‘지수’라는 이름으로 인식하기로 했지만- 그 이유를 알게 된 것은 조금 더 성장한 이후였다.  소망원에서만 머물러 있던 많은 것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하자 손바닥 뒤집듯 쉬이 바뀌었다.  저를 뺀 모든 친구들에게 너무나 당연하게도 엄마나 아빠가 있었으므로.  누가 그러라고 가르쳐주지 않아도 착하고 얌전한 아이가 되었다.  그건 받아들이기 싫은 걸 말하거나 물어올 때 입을 다물어도 괜찮은 사람이 되기 위한 종인의 본능적인 자기 방어 방식이었다.  남들이 말하는 불쌍한 사람이 저라는 걸 깨달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크게 슬프거나 하진 않았던 것 같다.  그건 안나 수녀님의 품에서 그런 슬픔보다 더 큰 사랑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런 순수함이 오래 가지 않았다.  가끔 찾아오는 낯선 어른들이 소망원 아이들의‘예비 부모’라는 것을 알게 된 종인은 선악과 같은 희망에 사로잡혔다.  10살이라는 나이의 최대로 영악하게 굴었던 것 같다.  마음씨가 좋아 보이는 아저씨와 아줌마에게 몰래 주머니에 있던 과자를 건네며 ‘행복한 하루 되세요.’ 라고 속삭였다.  지금 돌이켜보면 놀랍도록 불쌍한 짓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꼬마 김종인에겐 스스로를 칭찬할 만한 일이었을 거다.  석양이 내려앉은 나무 판자가 올려진 복도에서 있는 그 어른들과 수녀님을 훔쳐보며 제 이름이 들려올 때마다 쾌재를 불렀다.  하지만 얼마 후, 종인을 찾아온건 그들이 아니었다.  내밀어진 햄버거를 두 손으로 받고는 작게 ‘고맙습니다.’ 고개를 숙였다.

 



“착하게 자랐네, 안나랑 느낌이 비슷해.”

 



이 누나는 누군데 할머니를 안나라고 부르는 거지?  먹음직스러운 햄버거를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소년은 앞에 앉아있는 그녀의 한국말이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예쁘다고도 생각했다.  구불구불한 긴 머리카락이 부드러워 보였다.  곧 테이블 위에 올려진 긴 손톱이 덜덜 떨리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와서 이유 모를 불안감을 느껴야 했지만 잠시 뿐이었다.

 



“나는 지수라고 해, 나 알지?”

 



소년은 서둘러 햄버거를 삼켜버렸다.  지수라고?  이 누나가 지수?  또렷한 눈빛이 반가움으로 반짝거렸다.  그녀는 기뻐 보이는 어린 아이를 내려다보면서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삽시간에 뜨거워진 눈시울을 지나 흐르는 눈물을 막을 수는 없었다.

 



“우린 같이 살 거야. 당장은 아니지만.. 조금만 기다려줄래?”

 



감자 튀김을 집어먹느라 그 눈물을 보지 못한 종인이 천진난만하게 물었다.  누나, 근데 왜 우리가 같이 살아요?  지수는 고개를 숙여 눈물을 닦아내었다.  긴 시간 동안 외면해왔던 모성애라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고통스럽게 그녀를 꾸짖었다.

 



“내가.. 네 엄마니까.”

 



순간, 그녀의 긴 손톱이 무자비하게 소년의 마음을 할퀴었다.  그 날, 소망원이 아닌 인기척이라곤 하나도 묻어있지 않은 제 방에서 잠을 청했다.  누구에게도 가엾은 저를 들키지 않겠다는 아이치고는 독한 마음으로 그러한 것이었다.  지금까지 소년이 불행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버림받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머물 장소가 있고 가족이라고 말해주는 안나 수녀님이 계셔서, 라는 이유뿐만 아니라 존재감은 전혀 없지만 ‘부모’라는 것이 분명 저를 사랑했을 거라는 믿음으로 스스로를 위안 삼아왔던 것이다.  실재하지 않는 그들을 동정하기까지 했다, 저를 잃어서 얼마나 슬플지.  바보같은 짓이었다.  TV나 책에 나오는 그런 필연적인 사정 때문이 아니라 선택에 의해 자신이 혼자여야 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은 그가 가졌던 모든 것을 송두리째 앗아갔다.  책장에 놓여있던 장난감들을 쓰레기통을 향해 집어 던지던 소년은 헛구역질을 하며 방을 뛰쳐나갔다.  급히 화장실로 들어가 먹었던 것들을 모두 게워내었다.  어지럽던 게 가시며 체기가 가라앉았지만 마음의 체증은 전혀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주홍 불빛 아래서 밤새 훌쩍거림이 멎지 않았다.  비로소 버림받은 날의 밤은 아주 지독했다.  안나는 마침내 어린 조카가 아이를 키우기로 결심한 것에 기뻐하고 있었다.  뱃속에 들어선 축복을 지우지 않겠다고 말했던 때와 마찬가지로.  그녀는 정에 이끌려, 그리고 세월에 무뎌져 저희들이 밟고 선 작은 아이를 보지 못 했다.  그저 종인에게 이제 ‘엄마’라는 존재를 말할 수 있게 된 것에 제 죄책감을 덜어냈을 뿐이다.  그래서 모든 게 잘 되었다고 여겼다.  지수는 시험에 합격하면 바로 종인을 데려가겠다는 말을 남기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버렸다.  안나는 아주 오래 전처럼 몇 번이나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여린 어깨를 품에 안으면서 기특하다고 속삭여 주었다.  지수 또한, 죄의 굴레를 벗어버린것처럼 행복하게 웃었다.  하지만, 둘의 이기적인 행복은 그리 오래지 않아 산산조각 났다.  종인은 더 이상 안나에게 ‘이모할머니’ 라는 호칭을 쓰지 않았고 지수의 선물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타인의 집에 얹혀사는 것처럼 굴기 시작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시켜도 하지 않던 청소를 스스로 하고 저녁 시간까지 방 안에 틀어박혀 공부를 하거나 책을 읽었다.  그리고 그녀가 늘 아이를 향해 뻗었던 주름 앉은 따뜻한 손길을 허망 한눈빛으로 저버렸다.  안나는 그제서야 저희가 어른이라는 오만한 이유만으로 빛나는 존재를 기만해 상처 입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참회의 눈물로 보내는 나날이 길어져도 꺼뜨린 빛은 쉽사리 살아나지 않았다.

 



“종인아, 시험 잘 봤어?”


“조금?”


“으아, 이 부러운 자식! 난 엄마한테 죽었어~”

 



앞에서 시험지를구기며 절규하는 친구를 보며 종인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빨리 나와, 오락실 가기로 했잖아!”

 



벌써 문 앞에 나서며 재촉하는 이를 따라 얼른 책가방을 들었다.  마구잡이로 버튼을 누르고 있는 그를 내려다보던 종인이 ‘그러다 부서지겠어.’ 라고 말하자 마자 버튼 하나가 쏙-  오잉?

 



“튀어!”


“야, 이놈들! 너희 S중 놈들이지!”

 



둘은 운동화가 벗겨져라 전력질주를 하다가 보이는 골목으로 몸을 숨겼다.  한참을 숨을 헐떡거리다가 공중에서 눈을 맞추고는 푸하하하, 웃어버린다.  제일 친한 친구이자 조용한 저를 웃게 만들어주는 그런, 소중한 친구가 있었다.

 



“내일 봐! 빠이~”

 



멀어지는 뒷모습에서 눈을 돌린 종인이 그와 반대쪽으로 걷기 시작한다.  종종 저가 소망원에 산다는 걸 반 애들에게 들키면 어떻게 될지 상상해볼 때가 있었는데 그 상상 속에 늘 저 아이는 복도로 내몰린 소년의 앞을 가로막으며 ‘종인이 괴롭히지 마!’ 외치며 지켜주는 역할이다.  그래서 무서운 상상의 끝에는 종인의 웃음이 이어졌다.  몇 해가 지나자 거짓말처럼 상처가아물기 시작했다.  그건 종인이 더 이상 어린애라고 부를 수 없을 만큼 성장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두 사람의 끊임없는 애정 덕이 컸다.  예전처럼 품에 안기기는 어려웠지만 안나 수녀님과 눈을 맞추는 것이 전처럼 편해졌고 가끔씩 그녀가 들려주는 지수의 이야기를 듣고 웃음이 날 때도 있었다.  지수는 자주 전화를 걸었다.  처음에 억지로 수화기를 받아 든 종인이 아무 말도 않고 있자 그녀는 당황한 나머지 덩달아 목소리를 내지 않았었다.  몇번이나 숨소리만으로 통화가 끝났다.  조금 지나자 지수는 저가 듣던 말던 본인의 일과를 줄줄 늘어놓기 시작했다.  16시간이라는 시차를 홀로 극복해야 했던 목소리에서 늘 피곤이 느껴졌다.  그녀가 싫고 미웠지만 전화를 끊기 전, ‘미안해, 조금만 기다려줘.’ 울먹이는 목소리가 속삭일 때면 인정하고 싶진 않았지만 잠시나마 용서가 되었다.

 



‘그래서 말이야, 내가 그 자식 시험지에 Fuck you라고 써버렸다고! 그런 말을 하다니, 재수없어!’


“풉..”


‘.. Oh, my god.. 지금 웃은 거야?’


“아니, 그게 아니라..”


‘Wow! 말을 했어! 매일 밤 기도했더니 진짜 기적이 일어난 거야?’


“저기.. 혹시 꿈이 배우는 아니시죠..?”


‘조크까지.. 지금 내 꿈은 너와 함께 사는 것 뿐이야..’

 



창피하지도 않나 봐, 이 분.  조금 이상한 사람이야.  종인은 고개를 저었지만 날이 지나고, 달이 지날수록 점차 그들의 통화 시간은 길어졌다.

 



‘솔직히 엄마라는말은 귀가 간지러워서 못 들을 것 같아, Baby.’


“저도 못 해요.”


‘Why!’


“못 듣겠다면서요.”


‘My mistake, please~’


“큭.. 뭐라는 거야..”

 



종인은 그녀를 기다리게 되었다.  전화기가 울리기를, 그리고 그 날의 언약처럼 저를 데리러 오기를.  스스럼없이 통화를 하기까지는 1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기다림이 좋은 건 아니었지만 냉정히 말하자면, 애초에 함께 있었던 시간이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그리 어렵지가 않았다.

 

 


“걔랑 또 같은 반이에요.”


‘벌써 15살이라니.. 시간이 너무 많이 흘러버렸어, 난 머저리야.’


“그런 말 쓰면 엄청 한국인 같아요.”


‘난 한국인이야!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났고, 살고 있지만 히끅..’


“그래서 결과는 언제 나오는데요? 자꾸 술 마시고 전화하지 좀 마요.”


‘Heartless.. 이번에도 떨어지면 McDo staff로 일할 거야.. 빨리 돈을 벌어야 하니까.’


“뭐요? 맥도날드? 크크큭.. 그래요, 햄버거 많이 먹을 수 있겠네요.”

 



늦은 시간이 되도록 종인의 방에는 불이 꺼지지 않았다.  새 학년 첫 준비물인 가족관계 증명서와 사진을 가방에 넣으며 종인은 지수의 주정에 핀잔을 내리지만 그 표정은 밝다.  그녀는 변호사 시험 결과를 기다리는 중이었는데 한번 떨어진 적이 있어 걱정이 심한 모양이었다.  다음에 붙으면 되잖아요, 심드렁하게 말하는 아이에게 ‘싫어!’ 빽 소리를 치더니,

 



‘너무 보고 싶어, 나의 아기.. 조니니.. 푸..’

 



종인이 빨개진 얼굴을 짚었다.  직설적인 사람이야, 정말.  감성이 지나칠 때는 저를 내팽개쳤던 그녀지만 고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16살이라는 너무나 어린 나이에 절 낳을 용기를 가져주어서.  그리고 다시 제 손을 잡아주어서.  물론, 그렇다고 지수가 잘했다는 건 절대 아니다.  고단한 숨소리가 흘러나오는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소년은 나지막이 인사했다.  잘 자요, 지수.

 

 

안나 수녀님이 ‘신은 이겨낼 수 없는 시험을 인생에 내놓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적이있다.  하지만, 소년은 살풍경하게 느껴지는 교실을 가로질러 제 자리에 앉으면서 그 말씀이 틀렸다고 울부짖고 싶은 것을 참아내었다.  옆 자리를 채운 친구는 어제 아침처럼 손을 흔들어 주지 않았다.  둘의 책상 틈은 고작 손가락 한 마디 만큼인데 마음은 아무리 달려도 닿을 수 없을 정도로 멀어져 있었다.  그 거리감이 덮쳐오는 것을 견딜 수가 없어 팔에 얼굴을 묻고 엎드려 버렸다.

 


가족관계증명서를 제출하라는 선생님의 말씀이 내려지자 반 아이들 몇 몇이 그것을 걷으러 다녔다.  종인은 친구의 유치한 장난을 받아주고 있다가 한 아이가 그들 곁에 서자 가방에서 흰 종이를 꺼내 내밀었다.

 



“어? 왜 네 이름만 있어?”

 


 

천진하게 묻는 그와 제 것을 돌려보기 시작한 애들 앞에서 소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갔다.  소란스러움이 짙어지자 흩어져있던 반 아이들이 그 쪽으로 몰려들었다.  상상인지 실제로 일어난 일인지 구분이 어려웠지만 세게 쥐어진 주먹 때문에 상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손바닥에 손톱이 박혀 아릿했다.  웅성거림 속에 소년은 지체 없이 옆자리의 그에게로 눈동자를 돌렸다.  하지만,

 



“뭐야, 김종인 고아였어? 어쩐지~”

 



그를 짓밟은 건 다른 애들이 아닌 머릿속에서 늘 저를 구해주던 이였다.  판단할 시간도 얻지 못한 채 주먹이 그에게로 날아갔다.  동그란 눈동자 속에 담긴 형편없이 일그러진 제 얼굴을 피하려 교실을 뛰쳐나왔다.  냄새 나는 화장실 구석 칸에서 울렁이는 가슴을 누르며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자 저를 쳐다봤던 친구의 놀란 얼굴이 눈 앞에 크게 그려졌다.  그가 장난으로 그런 말을 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아마 지금까지 옆에 있었던 시간 때문에 그럴 수 있었던 것 같다.  좋은 애니까.  안심이 되자 돌아가서 어떻게 화해를 청해야 할지 고민해야 했다.  지수처럼 말도 안 되는 이상한 얘기를 늘어놔 볼까?  그럼 나처럼 어쩔 수 없이 웃어버리겠지?  뛰쳐나온 것이 민망해 귀 끝이 빨개진 채로 소년은 조심스럽게 교실 문을 열었다.  여러 시선이 향해졌다가 흩어졌지만 그 애만은 정면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학교 수업이 끝나고 종인이 교실에 혼자 남을 때까지도 친구의 눈을 한번도 다시 들여다 볼 수가 없었다.  그건 하루가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도, 계속 시간이 흘러가는데도 마찬가지였다.  다 내 잘못이야.  헛된 희망의 타성에 젖어 조심스러움이 없어진 것이 첫 번째 잘못이었고 피붙이조차 믿을 수 없는 저가 타인을 믿고 마음을 나눈 것이 두 번째 잘못이었다.  그리고 모든 근원인 마지막 잘못은 태어났다는 것이었다.  이후 나날이 더 엉망이 되었다.  태생에 대한 원망과 친구를 잃은 상실감에 젖어 그는 애써오던 것들을 놓아버렸다.  마음가짐이 달라졌다는 것만으로 시시각각 모든 것이 변하기 시작했다.  전과 똑같이 말을 걸고, 다가오려는 아이들이 있었지만 거기에 응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자 그걸 못마땅하게 여긴 몇 몇에 의해 괴상한 소문이 퍼져 얼마 지나지 않아 진짜 혼자가 되었다.  이상할 정도로 혼자인 것이 괜찮았다.  점심은 자주 걸러야 했지만 수업 시간엔 공부에 전념할 수 있었고 쉬는 시간에는 영어 단어를 외우거나 엎드려 자는 척을 했다.  가끔 친구의 눈길을 받을 때가 고역이었지만.  그 애는 저를 불쌍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우리의 틀어진 사이가 아닌 저가 고아라는 것에 더 마음을 쓴다는 것이 우스웠다.  아이들은 잔혹했다.  울타리 밖으로 나간 소년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배척했다.  괜히 다가와서 시비를 걸거나 몸을 부딪혀오는 애들이 있었다.  안나 수녀님께 자주 ‘넘어졌다’고 말해야 했다.

 



“정말 괜찮은 거니..”


“네, 괜찮아요.”

 



종인은 끊임없이 괜찮다고 속삭였기 때문에 스스로 정말 괜찮은 줄 알았다.  하지만, 어느 날 복도에 선 그는 제 손이 얼음장처럼 하얘진 채로 덜덜거리는 걸 내려다보며 충격에 휩싸였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을 때, 눈앞에 있는 모든 애들이 저를 향해 창을 겨누고 있는 것을 보고 기절해버렸다.  어떤 것도 다시는 저를 상처 입히게 두지 않을 거라는 방패의 손잡이는 칼날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 칼날은 방패를 든 그에게 더 큰 상처를 남겼다.  이 일로 정신병자라는 소문이 더해져 패악을 부리던 이들이 잠잠해졌다.  정말 다행이었다.

 



‘.. 저기.. 요즘 무슨 일 있어?’


“네? 아니요.. 별로..”


‘목소리가 우울해.. 혹시 내가 시험에 또 떨어진 것 때문이라면, 절대 걱정하지마! 네 티켓 쯤은 내가..’


“아니요, 그럴 필요 없어요.”


‘.. 응? 그럴 필요가 없다니, 우리 빨리..’


“아무것도 없이 거기가서 짐이 되고 싶지 않아요.”


‘짐이라니,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어차피 지금까지 떨어져서 잘 살았잖아요.. 그냥 내가 고아가 아니라는 것만으로 됐어요.”


‘자, 잠깐만..!’


“앞으로는 자다 일어나서 전화하지 마세요, 거기 새벽 4시죠?”


‘그건 상관없어!’


“자꾸 불합격하는거 나 때문이라는 생각 안 들어요? 전화해도 안 받아요, 끊을게요..”

 



지수를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에 대한 사랑이 남아있기엔 너무 피폐해져 있었다.  침대에 누우면 태어나지 않았다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 텐데, 라는 바보 같은 생각이 들었으므로.  전화는 오래도록 소음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그걸 받아줄 그녀의 천사는 존재하지않았다.  전화가 더 이상 울리지 않게 되자 종인은 자연스럽게 잘 됐다고 생각했다.  이제 실망하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이런 엉망인 모습을 그녀에게 보여주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가장 다행스러웠다.  학교는 고문을 견뎌야하는 곳, 집은 괜찮은 척을 해야 하는 곳.  마음을 내려놓을 보금자리가 없었다.

 



“종인아, 너 이거 해볼래? 너무 멀어서 좀 그런가?”

 



담임 선생님이 내미는 I 고등학교 안내서는 한창 홀로의 미래를 고민하던 그에게 한 줄기 희망으로 다가왔다.  교실의 숨을 나누던 이들과 멀리 떨어진 고등학교이자 좋은 대학에 들어갈 수 있는 발판, 거기다가 소망원을 벗어날 수도 있다.  이 곳이라면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시, 다시.  처음부터 다시.

 

 


“아, 설마 내 룸메? 우와, 나처럼 일찍 들어오는 사람이 있구나아-”

 



언제 놀랐냐는듯 입 꼬리를 늘려 웃고 있다.  종인은 당혹감을 숨기지 못한 채 좁은 현관에 서 있다 거침없이 손을 뻗은 허여멀건 놈에게 캐리어를 빼앗겨버렸다.  그는 끙차- 하며 캐리어를 들어 한 쪽 침대 옆에 놓더니 쨍한 목소리로 ‘너무 무겁다, 짐이 왜 이렇게 많아?’라고 물어왔다.  물어본 게 아닌 것 같기도 했다.  곧 또 다른 말을 늘어놓았으니.  하지만 종인의 귀에 담기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잠깐. 그만 말해, 너.”

 



적대적인 말이 튀어나간 것에 스스로도 놀랐다.  명백한 말실수.  벌어져있던 입이 스을쩍- 다물리는 것이 슬로우 모션처럼 눈에 들어왔다.  휘어져있던 눈은 원래대로 돌아가 아까와는 달리 조금 차가워 보였다.  처음부터 엉망이다, 김종인.

 



“헤헤, 내가 좀 시끄러웠지? 나도 모르게 반가워서.. 미안..”

 



뒷머리를 긁적이며혀를 살짝 내민다.  눈은 다시 반달이 되어 있었다.  다람쥐?  성격이 좋은 거야 아니면 멍청한 거야?  생각과는 달리 종인의 얼굴에 안도감이 내려앉았다.

 



“공부하려고 일찍 왔는데 막상 오니까 혼자 너무 무섭잖아!”

 



길고 얇은 입술을 삐죽이며 우는 시늉을 한다.  맞은편 침대에 걸터앉은 종인은 지나치게 살가운 이에 낯을 가리며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나는 김종대, 넌?”


“아.. 김종인.”


“김종인? 우와, 우리 형제 같아. 김종인, 김종대. 그치?”

 



칸막이가 있는 책상에 책들을 올리고 옷장에 대충 옷가지를 정리해 넣었다.  캐리어 안에 남은 건 CD 플레이어뿐.  얼마 전 지수가 보내온 생일 선물이었다.  낡은 CD 플레이어와 몇 장의 클래식 CD.  거기엔 ‘이렇게 보내는 건 마지막이 될지도 몰라.’라는 쪽지가 동봉되어 있었다.  입학을 앞두고 종인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편지를 썼다.  그 내용은 저를 잊고 행복하게 살라는 절절한 것이었다.  거의 진심이었다.  호기로운 생각과 달리 편지를 쓸 때 눈물이 찔끔- 났지만.  낳았다는 이유에 얽매여 지수의 삶을 불행하게 만들고 있다는 생각은 늘 가지고 있던 것이었으므로 이 편지에 대해 그러겠다는 답장을 받은 것이 그리 슬프지 않았다.  끝이 없는 외사랑일지라도 그녀가 행복하다면 상관없다고 허세를 부려보았다.  응?  이건 뭐지?  사탕이랑 젤리, 소윤이가 넣어놨나 보네.  종인은 맞은 편에 있는 룸메이트에게로 시선을 올렸다.  아까 못되게 말한 것도 있고 왠지 이런 거 좋아할 것 같은데.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켜 책상을 기웃거렸다.  막상 이걸 어떻게 건네야 할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손에 쥐어져 있는 것들이 바스락거릴 때마다 심장이 쿵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책을 읽고 있는 종대를 힐끔거리다가 그 책상 위로 알록달록한 그것들을 내려놓고 얼른 제자리로 돌아왔다.  키득거리는 웃음 소리에 괜한 짓을 했다는 후회가 밀려들었다.

 



“야, 이거 뭔데에?”

 



그 애가 아주 환하게 웃고 있었다.  새로운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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