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봄, 봄, 봄

 


 

눈이 녹기 시작하자 기나긴 잠으로 고요하던 숲이 깨어났다.  하이얀 감옥에 묶여있던 강물이 해방하고 흙에서 초록 기운이 올라온다.  고라니는 깊은 산 중을 더 빠르게 오를 수 있게 되었다.  우리의 두 번째 봄이다.  개학을 앞두고 그새 조금 야윈 듯한 종대가 돌아왔다.  그는 피아노라면 넌덜머리가 난다면서 답답해 보이는 손목 보호대를 습관적으로 잡아당겼다.  손목 관절에 염증이 생길 정도로 연습을 한 덕분인지 콩쿠르에서 3위에 입상했다.  저는 별 게 아니라며 쑥스러워했지만 관련 잡지사에서 인터뷰까지 해간 걸 보면 녹록하지 않은 것임에 분명했다.  지금은 레슨 가기 싫다고 현관에 앉아 10분째 징징거리는 중.  한 달이 넘도록 전화로만 들어왔던 쨍-한 목소리.  그걸 바로 옆에서 들을 수 있다는 것이 이렇게 기분 좋은 일인지 전에는 미처 몰랐다.

 



“아, 가기 싫어어! 이따 데리러 나와!”

 



미적거릴 수 있는 최대의 시간이 끝나자 그는 울상으로 방을 나섰다.  두 달 뒤에도 콩쿠르가 있어 긴장감을 유지해야 된다는 게 그의 설명이었지만 부르튼 입술과 손목을 보는 종인의 마음은 영 편하지가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그가 좋아하는 닭고기를 배불리 먹이고 깊은 낮잠에 빠지도록 하고 싶었다.  주말에는 그렇게 할 수도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며 문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피아노 연습실로 향하는 발걸음이 느릿느릿-  허공에 의미 없는 시선을 두고 걷던 종대는 걸음이 꼬여 넘어질 뻔 하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우뚝 멈춰서 이상해, 작게 중얼거리더니 잠시 룸메이트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보기로 한다.  어제, 분명 302호에 들어서기 전까지만 해도 오랜만에 보게 되는 그를 떠올리며 신이 나 있었다.  함께 밥을 먹고, 밤새워 공부를 하거나 뭐가 되었든 같이 보낼 시간을 생각하며 동시에 종인의 두 뺨을 늘이거나 팔을 끌어안고 싶다고도 생각해 보았다.  그런데 막상 눈 앞에 선 그에게 저는,

 



“아, 아, 안녕? 잘 지냈어?”

 



한 달 못 봤다고 어색해지기라도 한 걸까?  아니, 어색한 거랑은 무언가 달랐다.  평소와 모든 게 똑같았고 저만 달랐다.  옆에 있는 종인의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신경 쓰이지 않는 게 없었다.  순수하게 마주쳐오는 눈빛 끝 속눈썹까지 의식해버렸다.  생소한 감정에 종대는 오히려 스스로가 낯설어졌다.  얼굴에 반색을 띠며 졸졸 따라다니는 종인 덕분에 이런 느낌은 다행히도 금방 잊혀졌지만.

 



“손목은 괜찮아?”


“응, 시큰거리긴 하는데 괜찮아. 이거나 먹어봐, 일본에서 사왔는데 완전 맛있어어!”

 



내미는 초콜릿을 받아먹더니 또 아-  은근히 초콜릿 좋아한다니까, 키득거렸더니 인상을 쓰면서 무슨 생각했냐고 묻는다.  눈치는 빨라요.  떨어져 있던 동안의 이야기를 하던 중 종인이 몸을 일으켜 현관 쪽으로 향했다.  어디 가냐고 물었지만, 대답도않고 나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파란색 찜질 패드를 들고 들어왔다.  묻지 않아도 그의 마음이 들여다보여 종대의 입 꼬리가 말려 올라간다.  아까부터 계속 그의 눈길이 손목을 따라오는 게 보였다.

 



“박찬열한테 빌려왔어, 이거 하고 자.”

 



침대에 누워서도 그들은 오래도록 소곤거렸다.  잘 떠오르지도 않는 아주 시시콜콜한 얘기들.  마주 누운 채, 손목에 넓게 내려앉은 온기를 공유했다.  따뜻하다.  자연스럽게 내려앉은 정적 뒤에 종인이 먼저 잠에 들었다.  감긴 눈과 귀여운 코, 뚜렷한 입술 선을 눈에 담으며 이유 모를 죄책감 같은 것이 들었다.  아까의 그 생소한 감정이 다시 밀려와 종대는 침을 꿀꺽- 삼켰다.  따뜻한 패드 아래에서 닿을 듯 말 듯 가까운 두 손이 의식되어 손가락 끝에 힘이 들어간다.  손목이 시큰거렸다. 

 


그건 뭐였을까?  상념에 잠겨있던 그는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아직 찬 공기에 옷깃을 여몄다.  그냥 기분 탓이겠지, 뭐.

 

 




기숙사에 파릇파릇한 신입생들이 들어와 졸업생들의 빈자리를 채웠다.  잔뜩 굳은 채 복도를 종종 걸음으로 지나다니는 걸 보며 찬열은 그들이 꼭 펭귄 같다고 했다.  세미나실에 모여있던 우리는 창문으로 그들을 곁눈질하며 지난 1년을 얘기했다, 그것들을 추억이라 칭하며.  체육대회 이야기가 나오자 경수는 고개를 떨구며 욕을 읊조렸다.  그 앞으로 백현이 경수의 여장 사진을 내밀었다가 정강이를 차였다.

 



“이 사진은 왜 지워도, 지워도 끝이 없어! 개새끼야!”


“컴퓨터에도 있고, USB에도 있어. 가보로 대대손손 물려줄 거야.”


“씨발.”


“나도 보내줘. 씽이 형도 없죠? 단톡방에 올려.”


“앞에서 유포하지마, 병신들아.”


“인화해서 뿌린다.”


“이게 모야? 경수? 더러워~”

 



그 와중에 종인은 사진 저장.  마치 바닷가에서 예쁜 조개 껍데기를 발견한 마냥 좋아하는 표정으로.  하지만, 옆구리로 날아든 경수의 주먹을 피할 수는 없다.  세훈과 머리를 맞대고 큐브를 맞추던 준면은 노트북에 코를 박을 듯 엎어져 있는 민석을 발로 건드린다.  심심해.  의자에 널브러져 있던 찬열이 몸을 벌떡 일으킨다.

 



“아, 좀 쑤셔! 연습도 없고 가만히 있으려니까 돌겠네!”


“풋살이라도 할래? 진 팀이 이긴 팀 업고 운동장 한 바퀴 돌기!”


“콜!”


“나, 민석이 형 띰!”


“나도, 나도! 띰, 띰, 띰, 띰!”


“형, 한국인이지?”

 




 

“더 있다 갈 거야?”


“아니, 누나가 올 줄 알았으면 아예 땡땡이 칠 걸~”


“맞을래?”

 



종대가 고개를 저으며 익살맞게 웃는다.  그 앞에서 악보를 정리하는 소녀는 종대와 어렸을 때부터 함께 피아노를 배워온 4살 위 누나로, 피아노 선생님의 딸이다.  가끔 선생님 대신 종대의 레슨을 봐줄 때가 있었는데, 최근에는 데이트하느라 바쁘다며 통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낯선 표정과 목소리로 전화 통화를 하는 걸 보고 종대는 목 조르는 시늉을 하며 놀려댔지만 그녀가 수줍게 웃는 모습은 참 예뻐 보였다.

 



“그렇게 좋아? 어떤데?”


“너 누구 좋아해본 적 없어? 너 중딩 때 여친 있었잖아.”


“글쎄.. 그게 좋아한 거였나?”


“하긴, 좀 다를 수도 있지.”

 



그녀가 턱을 괴며 음, 운을 띄웠다.

 



“우선, 그 애를 생각하면 마음이 막 간질간질하다? 소름 돋는 것처럼!”

 



종대도 그 맞은 편에 앉으며 턱을 괴었다.  사랑에 빠진 소녀가 팔을 오므리며 흔드는 걸 보며 살짝 웃음이 났다.  누나도 연애하니까 귀여워지네.  근데.. 간질간질한 거?  막 가슴이 간질간질한 그거 말하는 건가?

 



“그리고 하루 종일 생각나.. 아침에 일어나서, 밥 먹을 때, 그냥 걸어갈 때도.. 심지어 화장실 갈 때도, 히히.”

 



우엑, 그가 놀려도 그녀는 그저 웃어버렸다.

 



“그냥 모든 게 좋아 보이고, 그러다가도 사소한 거에 확 가라앉고. 말하다 보니 정신이상자 같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좋아할지 고민하고, 다른 사람들이랑 있어도 걔밖에 안 보이고.. 이건 진짜 웃겨, 그냥 주변이 뿌옇고 걔만 보여. 사소한 거 하나 하나 다 신경 쓰이고..”

 



한참을 노래하듯 이야기하던 그녀는 키득거리더니 ‘내가 그냥 그 사람이 되는 거야.’ 라고 말했다.  왜 누나의 이야기를 듣는데, 내 머릿속에 그 애만 떠오를까?  그녀가 물음표 새겨진 얼굴로 저를 들여다보며 왜 그러냐고 물어와 웃으며 아무것도 아니라고 손사래를 쳤다.  손목이 시큰거렸다.  내가 그냥 그 사람이 되는 거라..

 



“다음에 봐, 손목 조심하고!”

 



손을 흔들며 멀어져 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지켜 보았다.  아니, 그녀를 지켜봤다기 보다는 그저 잠시 복잡해진 머릿속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종대의 어깨로 노을이 내려앉았다.  따뜻한 빛깔이었지만 그를 둘러싼 공기는 아주 차가웠다.  한 달 동안 종인과 떨어져 있을 때, 사실, 저는 좀 이상했다.  피아노를 칠 때를 빼고 거의 그를 생각했다.  아니, 집중이 잘 되지 않는 날에는 피아노를 치면서도 손 따로, 머리 따로.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밥은 먹었을지, 많이 먹었을지 같은 것들.  그냥 그런 것들이었는데.  종인이 단톡방에 다른 친구들과 찍은 사진이나 저 없이도 즐거워 보이는 말풍선을 띄우면 기분이 가라앉았다.  일부러 핸드폰을 끄기도 했다.  그리고 몇 시간 뒤 다시 켰을 때, 여러 개의 말풍선 중에도 그의 것이 없으면 신경질적으로 핸드폰을 가방에 넣은 채 들여다 보지 않았다.  혼자서 줄다리기를 하듯 연락도 하지 않았다, 그의 연락을 기다리면서.  밥맛이 없어 툭하면 식사를 걸렀다.  엄마가 신경이 예민해서 큰일이라며 걱정을 하셨지만, 그 이유는 정말.. 이상했다.  손으로 애꿎은 이마를 문질렀다.  설마, 라는 말을 내뱉었다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로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불안함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럴 리가 없잖아..”

 



종대는 마치 모르는 사람을 대하듯 스스로를 외면했다.  억지로 힘을 준 입술이 어색한 웃음을 만들어내며 끝나면 운동장으로 오라는 그의 말풍선을 읽어 내려갔다.  혼자인데도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해야 했다.  그래, 종인이랑 너무 친해서 그런 거야.  제발 쓸데없는 얘기 좀 하지 마라, 머리야!  아니, 마음인가?  아무튼 시끄러워, 조용히 하란 말이야.  운동장에 풋살을 하고 있는 악동들을 내려다보았다.  멀리서도 허우적거리며 공에 맞을까 피해 다니는 장이씽이 민석과 준면에게 구박을 받는 것이 보였다.  세훈은 추운지 계속 팔을 문지르며 설렁설렁 뛰었고 찬열은 반팔을 입은 채 운동장을 가로지르고 있다.  저미친 놈.  그리고 경수와 백현은 서로의 몸을 부딪히며 티격태격.  그들 사이에 종인이 저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환하게 웃고 있는 너.  항상 누구보다 빨리 저를 알아채 주는 사람.

 



“힛..”

 



저도 모르게 종대의 입술에는 그와같은 웃음이 걸린다.  손을 흔들어주었더니 그의 웃음이 더 진해졌다.  손목이 또 시큰거린다.  아니, 시큰거리는 곳이 손목인지 가슴인지 종대는 알 수가 없었다.  

 
 

그 봄의 시작에는, 그랬다.  감정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엔 아직 겁 많고 너무 어린 소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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