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내용으로 건너뛰기

[카첸] Murmuring Room 9

속삭이는 방

 



 






9-1.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학교를 하얗게 덮은 두툼한 눈 이불에 햇빛이 반사되어 반짝거린다.  수학여행을 갔다 와서 한 번의 모의고사가 있었고 그 뒤로 이어진 기말고사가 끝나자 학교는 곧 겨울 방학을 맞았다.  창 밖을 내다보는 종인에게 경수가 시간 빠르지? 라고 물어온다.  그와 처음 만났던 때의 기억이 피어올라 종인은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때와 비추어보면 겉모습은 크게 달라진 것 없이 경수는 여전히 반듯해 보이는 인상에 어른스럽게 웃을 줄 아는 이지만 우리 사이는 많이 변해있다.  종인은 이제 그에게서 불편함 대신 안락함을 찾게 되었다.

 



“그나저나 종대가 붙은 국제 콩쿠르 되게 유명한 거였어, 학교에서 출석까지 빼줄 만 하더라.”

 



종대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예선 결과는 12월이 되어서야 뜻 깊은 합격으로 그에게 안겨졌다.  마음 고생을 씻어버리듯 닭 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려서 저희의 놀림 거리가 되었지만 그 입 꼬리에는 찬란한 기쁨이 걸려 있었다.  2월 중순에 있을 콩쿠르 준비를 위해 그는 방학이 되자마자 집으로 돌아가야했다.  그는 한껏 뭉그적거리며 배웅을 나온 종인의 발걸음을 붙잡아 두었었다.  잘 하고 있던 목도리를 풀러 다시 해달라고 하질 않나, 몇 시에 일어나고 잘 건지 등 하찮은 질문을 연달아 쏟아내고.  저를 올려다보는 눈동자가 왠지 가기 싫다고 말하는 것 같아 종인은 그의 머리카락을 정리해주는 척 하며 살짝 부드러운 뺨을 쓸어보았다.  학교를 벗어나는 언덕길을 내려가기 전에 핸드폰 무음 해 놓으면 죽는다, 엄포를 놓더니 손을 흔들면서 곧 시야에서 사라졌다.  두 달을 못 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미치자 돌아서는 때부터 이미 마음이 허전했다.  저 애가 없던 16년은 어떻게 살아왔던 걸까, 바보 같은 자문을 해보고는 혼자 웃다가 머쓱해져 괜히 빈 운동장을 두리번두리번-  그 때의 저가 떠올라 민망해진 종인은 헛기침을 하며 경수의 발걸음을 따른다.

 



“근데 오늘은 왜 세미나실이야?”


“왜냐하면.”

 



사람이 많거든, 그의 웃음기 서린 목소리가 맺어지기도 전에 문이 열린 세미나실에서 생일 축하 노래가 흘러나왔다.  

 

종인은 너무 놀라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해버렸지만 등허리를 미는 경수에 의해 그들의 가운데 서게 되었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의식하며 고개를 숙여버렸다.  한낮이라 제 얼굴이 다 보일 것이다.  눈시울이 뜨거운 것 같아 갖다 댄 손끝의 떨림이 얼굴을 감쌌다.  왜 눈물이 나는지 알 수 없었다.  어떤 이유라도 생각해내고 싶은데 그저 뿌옇게 흐려진 케이크만 보일 뿐이었다.  그를 둘러싼 저희는 그저 종인이 오늘을 마음껏 기뻐할 수 있도록 기다려 주고싶었다.  세훈은 일부러 천장을 올려다 보았다.  모두 그처럼 서로의 시선을 피했다.  눈이 마주치면 눈물을 참을 수 없을 것 같았으므로.  떨리는 종인의 등으로 경수와 민석의 손길이 내려진다.  그가 말하지 않아도 언제나 마음으로 느껴왔던 저희들에게 미안하다고, 그리고 고맙다고 말하는 것 같은 흐느낌.  그것을 감추어주듯 그들은 오래도록 노래를 불러 주었다.

 





“진짜 곰 됐네, 저거 눈 부은거 봐.”


“우어엉, 얘두라 고마워!”


“.. 내가 언제 그랬어.. 죽는다..”


“종인이 울지마, 웃는 날이야. Happy birthday to you~”

 



머리카락에 간지럽게 내려앉은 장이씽의 입술에 종인은 살짝 웃어버렸다.  종인의 흉내를 내며 실컷 놀리던 백현이 내 생일 때 씽이 형은 빼줘, 라며 고개를 젓는다.  종대 전화 안 받는다고 난리다, 준면이 그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책상 위 종인의 핸드폰이 진동한다.  옆에 있던 찬열이 재빨리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영상 전화네.

 



‘뭐야아! 다들 왜 전화를 안 받아! 설마 벌써 생일 축하한 건 아니겠지!’

 



뜨끔-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에 세미나실은 고요해진다.

 



‘내가 케이크 할 때 영상 전화 하랬잖아, 미친 새끼들아아!’


“아씨, 존나 찡찡대! 형들 듣고 있다, 입 조심해라.”


‘형 새끼들! 으아악! 종인이 보여줘!’

 



짱 센데? 라며 찬열이 핸드폰을 넘겨준다.  가만히 웃고 있는 민석, 장이씽과 졸지에 같은 호구가 된 준면이 오기만 해봐, 소리치자 ‘헤헤, 사랑해요.’  종인은 콧등을 긁적거리며 화면 속 종대에게 고갯짓을 했다.

 



‘김종인! 생일 축하해, 내가 꼭 같이 해주고 싶었는데에.. 미안해. 그래도 내 맘 알지?’


“.. 응, 연습 중이야?”


“야, 김종인 펑펑 울었어~ 너만 못 봤다, 완전 귀여웠는데.”


‘.. 진짜? 울었어? 왜, 왜! 오세훈, 동영상 찍어놨어? 응?’

 



종인은 이마를 짚으며 얼굴을 가려 버렸다.  귀 끝까지 빨개진 그를 보며 모두 크게 웃었고 핸드폰에서는 종대의 ‘울지마아, 웃어봐.’ 따뜻한 속삭임이 흘러나왔다.  이제 뭐할 거냐 묻는 종대에게 백현이 약을 올리며 보충 째고 놀러 간다 말하자 화면 속 그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종인은 너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라는 말을 꾹- 삼켰다.  낯간지러워.

 


1월은 분명 겨울인데, 하나도 춥지가 않았다.  점심으로는 햄버거를 먹었는데 사은품으로 나온 머리띠가 모두 종인에게로 모아졌다.  종인둥절.

 



“생일이니까 너 다 해.”

 



하지만 민석이 형이 해주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뭘 해도 좋을 만큼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병신 소리를 들어도 웃음이 나왔다.  노래방에서도 누군가 생일 축하 노래를 예약해놓아서 민망해진 종인이 노래가 시작하자마자 취소 버튼을 눌렀다가 찬열에게 얻어 맞았다.  박찬열이었나 봐.  PC방에서는 세훈이 초보자인 종인을 계속 죽여서 레벨 업을 이루어 냈다.  난 처음인데, 투덜거리는 그의 손을 잡으며 ‘앞으로 너랑만 올 거야.’ 라길래 의자를 발로 살살 차 버리자 그걸 본 백현은 점점 성격이 더러워진다며 좋아한다.

 



“아, 장이씽! 여기로 보내라니까!”


“그런 충동적인 행동을 구지가 할 필요가 엄써.”

 



즐겁다.  저를 둘러싼 이 분위기가, 공기가.  시끄럽게 게임 삼매경인 그들을 돌아보며 종인은 가슴이 뻐근해지는 것을 느꼈다.  한 순간도 의심을 버릴 수 없었던 저에게 늘 괜찮다고 말해주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은 이들.  진짜 중요한 게 무엇인지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아서 그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가늠해 본다.  중요한 건 단지 지금 곁에 있어주는 저들의 애정 어린 시선뿐.  늦은 밤이 되어서야 302호로돌아온 종인은 불이 켜져 있는 방에 고개를 갸우뚱-  그러다가 침대 위 익숙한 인영에 저도 모르게 진한 웃음을 띤다.  잔뜩 어질러진 침대 위에 잠이 들어있는 종대.  기다리다 잠든 걸까?

 

종인은 숨을 죽이고 침대로 다가가 그 곁에 앉았다.  사랑스러운 머리카락을 만지고 싶었지만 그가 깨면 더 일찍 돌아가게 될까 봐 그러지 않았다.  살며시 눈을 떠 느리게 깜빡이다가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종인을 보더니 베시시-

 



“아, 왜 이제 와아!”


“올 줄 몰랐지, 전화하지 그랬어.”


“어차피 잠깐 온 거라서 너만 보고 가려고 했지, 아빠한테 아침 일찍 오라고 해야겠다.”

 



왜 일부러 왔어, 괜스레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꺼내본다.  종대도 그걸 아는지 입 꼬리를 늘리면서 저의 두 뺨에 손을 올려 흔들었다.  그리고는 나지막이 생일 축하해.  그 손길에 이런 날이 네가 좋아하는 ‘생일’이란 거구나, 헤아려본다.

 



“오늘 재미있었어?”


“응.”

 



다행이다, 손목 시계를 한번 보더니 그의 손을 잡아 끈다.  어디 가는지 묻지 않아도 곧 알게 되었다.  어둠이 내린 이 길목은 피아노 연습실로 가는 길이니까.  

 

종대는 익숙하게 피아노 앞에 앉아 손을 털었다.  손목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흰색 파스들이 눈에 들어왔다.  쑥스럽다, 혼잣말을 하더니 피아노에 시선을 내린 채,

 



“앞으로 이건 너한테만 쳐줄 거야.”

 



그렇게 말했다.  가슴이 일렁이는 것을 애써 억누르며 귓가를 간질이는 음들을 마음에 담았다.  그 손 끝에서 흘러나오는 하나 하나의 것들이 어떻게 이렇게 특별해질 수 있을까?  피아노 소리가 마음을 어루만지는 느낌이 드는 건 이 곡이 오롯이 저를 위한 그의 선물이기 때문일 거다.  앞으로 그가 이 곡을 연주할 때마다 그 곁에는 저가 있을 것이다.  종인은 옆에 잠든 종대에게 작은 목소리로 고마워, 속삭이고는 머리맡에 있던 핸드폰으로 손을 뻗었다.  채 답장하지 못한 <생일축하해. 옆에 있어주지 못해서 미안해.> 문자 아래 글자들이 썼다 지워졌다 반복되었다.

<고마..>

<고마워요....>

<..>

<고맙습니다..>

<고..>

<감사합니다..>

<네.>  전송.

다시 상처받더라도 지금이라면 괜찮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곤한 하루였는지 작게 코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종인은 살짝 웃으면서 이불 속 손을 뻗어 종대의 손 새로 저의 큰 손을 우겨놓았다.  네가 있다면 괜찮을지도 몰라.  너만 내 곁에 있어준다면.


아침 일찍 돌아가버린 종대가 두고 간 선물





 

9-2. 보고 싶은 마음에 이유가 필요하다면

 



방학이 시작된 지 한달 만에 집으로 돌아가는 길, 멀어지는 경수의 뒷모습을 보며 종인이도 몸을 틀었다.  터미널에서 표를 끊고 나서야 둘은 같은 지역에 산다는 것을 알고 잠시 머쓱해졌다.  종인은 조금 조바심이 나 가방 끈을 문질렀다.  경수가 그가 다니던 학교에서 꽤 거리가 있는 중학교를 나왔다고 해서 자기도 모르게 다행이라고 말해버릴 뻔 했다.  제 앞으로 서는 눈에 익은 색 바랜 승용차 한 대.

 



“종인아, 내가 늦었네! 많이 기다렸어?”


“아니에요, 금방 내렸어요.”


“맞춘다고 맞춰 나왔는데, 아이고. 이게 얼마만이야~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아니?”


“.. 저두요, 애들은요?”

 



눈가에 깊이 패인 주름마저 다정한 수녀님이 목이 빠지게 너 기다리고 있지, 답하신다.  시험은 잘 봤냐고 물으시기에 고개를 끄덕였더니, 호쾌하게 웃으셔서 그도 살짝 따라 웃었다.  그녀의 흰머리를 비스듬히 바라보며 종인은 딱딱한 자동차 시트에 등을 깊숙이 기댄다.  오늘 저녁상에는 분명 미역국이 있을 거다,본인의 생일은 잊으셔도 제 생일만은 잊은 적 없는 분이시니까.

 



“오빠!”


“종이니 형아다!”

 



다리를 끌어안는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는 종인에 따뜻함이 번진다.  한 명,한 명 이름을 불러주고 부드러운 얼굴을 어루만진다.  그리고 그들보다 뒤처진 아이를 눈에 담는다.  그 아이가 절뚝거릴 때마다 더 큰 보폭으로 다가가 번쩍- 안아 품에 담아본다.

 



“소윤아! 잘 있었.. 아야!”

 



볼을 꼬집는 앙증맞은 손에 엄살을 부리며 종인이 미안하다고 연거푸 속삭였다.

 



“오빠,정말 미웠어! 약속도 안 지키고, 나쁜 사람이야!”

 



그렇게 말하면서도 제 뺨에 닿은 얼굴의 볼우물이 오목하다.  딱히 방이라고 구분할 수 없는 한 구석에있는 빗자루부터 손에 쥐었다.  능숙하게 칙칙한 색깔의 나무 바닥을 쓸고 흐트러져 있는 헌 동화책들을 줄 맞춰 책장에 꽂고.  밖에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티없는 소리들이 그의 귓가를 간질인다.  바짝 말라 각 잡힌 잿빛 걸레를 들었다.  물방울 자국이 허옇게 말라있는 거울에 작은 칫솔들이 여러 개 다닥다닥- 붙어 있다.  종인은 걸레를 내려두고 손을 비누로 빡빡닦더니 칫솔과 칫솔걸이를 하나씩 떼어 정성스럽게 물때를 닦아 낸다.  제법 야무진 손길이다.  제 새끼 손가락 만한 칫솔 머리들.  그것들이 작은 만큼 더 가여운 아이들.  어릴 적, 안나 수녀님께 소망원 아이들이 불쌍하다고 말했던 적이 있다.  수녀님은 버릇처럼 그의 머리에 다정한 손길을 내리고는 말씀하셨다.  사람에게 타인의 가여움을 가릴 자격은 주어지지 않았다고.  하지만,그 때 종인은 묻고 싶었다.  그렇다면 자기 자신의 것은요?  전 저들보다 제가 더 불쌍한데 어떡해야하죠?  종일 애들을 보살피고 저녁에는 성당을 청소했다.  수녀님들의 손이 뻗을 수 없는 곳은 늘 그의 몫.  소망원이라고 새겨진 팻말이 달린 문을 여니 동그란 눈들이 온통 그에게로 쏠린다.  식탁에 옹기종기 모여서 저녁을 먹고 있다.  역시 미역국.  종인은 작은 아이들 사이에 끼어 앉자마자 밥풀을 떼어 제 입으로 가져가고, 손수건을 손가락에 말아 쥐어 작은 입을 닦아준다.  역시 잘한다니까.  맞은 편에 있던 마리아 수녀님이 엄지를 척-  종인이 오빠가 오니까 밥도 잘 먹네, 라는 수녀님 말씀에 소윤의 숟가락에 다시 한번 크게 밥이 얹어진다.  뒷머리를 긁적이다가 크게 웃어버렸다.  티끌 한 점 없이 맑고 순수한 아이들은 아무것도 아닌 저를 잠시나마 대단한 이로 착각하게 만든다.  그 순간만큼은 제 안에 웅크리고 있는 속된 마음을 외면할 수 있다.  씻고 화장실 문을 여니 그 앞에 모여 기다리던 아이들이 꺄, 꺄 소리를 지르며 흩어진다.  제 뒤꽁무니만 따라다니는 아이들 때문에 웃지 않을 수가 없다.  더 어린 아기들은 진즉 잠이 들었고 몇몇 아이들이 더 놀자고 칭얼거리는 것을 하나 하나 눕히고 토닥거려 재웠다.  소윤이는 끝까지 종인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졸졸.  까만 눈동자에 졸음이 한아름이다.

 



“얼른 자야 내일 또 놀지.”


“나 잘 때, 음 도망갈까 봐 그렇지~”


“도망가는 게 아니고 공부하러 가는 거라니까. 여기 누워 봐.”

 



종인이 옆으로 비스듬히 누워 제 품을 두드리자 여섯 살 새침데기가 얼른 그 자리를 차지한다.  조그만 어깨를 천천히 쓰다듬으며 아이의 이마에 숨결을 내린다.

 





“애들은 자니?”

 



문을 닫은 종인이 네, 라고 대답하며 그녀의 곁에 앉는다.

 



“학교 얘기 좀 해봐.”

 



마른 손등이 탁자 위 서류들을 정리한다.  종인은 잠시 잊고 있던 이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살포시 웃음을 내다 고개를 숙였다.  똑같죠, 뭐.  긁적-  둥근 금테 안경 너머로 종인을 넘겨보며 흐뭇하게 미소 짓는다.

 



“그나저나 핸드폰이 생기니 좋구나, 자주 통화도 할 수 있고. 혹시.. 다른 연락은 없었니?”

 



그는 종이 위에 잠시 시선을 올려둔다.  저가 답장하지 못 했던 여러 개의 문자가 떠올랐다.

 



“문자를 보내세요, 계속 답장을 못 하다가.. 생일에는.”


“.. 고맙구나, 우린 너한테 항상 죄인이야.”


“전 괜찮아요..”


“아니, 이건 괜찮고 안 괜찮고의 문제가 아니란 걸 알잖니..”

 



종인은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요, 라고 그저 중얼거렸다.

 



“용서하지 않는 사람이 더 괴로운 법이란다, 종인아.”


“..용서는 이미 오래 전에 했어요, 다만.. 어떻게 해야 좋은 건지 잘 모르겠어요.”

 



그녀는 닫힌 문을 안타까운 눈빛으로 쓸며 손을 모아 기도했다.  자비와 사랑, 동정심으로 저희를 보살피소서.  방으로 돌아와 침대 위 놓아두었던 핸드폰을 켜자 화면에 떠 있는 알림.  하지만 여러 명의 말풍선에 종대의 것만 없다.  콩쿠르가 얼마 남지 않았다더니 며칠 동안 연락이 없었다.  떨어져 있는 동안 저녁에 꼭 전화를 걸더니, 일과처럼 울리던 핸드폰이 잠잠해 조금 이상하다.  손목 아프다고 찡찡거리고 있겠지.  밥은 먹었나?  대화 창을 열었다가 바쁘겠지? 전원을 꺼버린다.  시간 있으면 했겠지.  괜스레 핸드폰 사진첩에 들어가 그 동안 모아온 사진들을 훑어본다.  요즘 종인의 취미는 ‘저장’, 어떤 사진이든 핸드폰으로 받은 것들은 무조건 저장한다.  무언가 그 시간을 소유하는 느낌이 들어서, 함부로 지나치기가 싫다.  종대는 그의 사진첩을 쓰레기장이라고 질색했지만 말이다.  사진들을 넘기던 와중에 한 곳에서 그의 손이 멈칫-  종대가 두 뺨 가득 빵을 먹고있는 사진.  이 때 몰래 찍다가 들켰었지, 바보 같아.

 



“아, 보고 싶어.”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목소리에 종인은 우습다고 생각해본다.  그래도,



 

“보고 싶다..”

 

 




근 1년 만에 기숙사 대청소가 실시되었다.  작전명 : 기숙사장에게 걸리면 최소 사망.  화창한 겨울날이었다.  2주 동안의 수학 올림피아드 겨울 학교를 마치고 돌아온 민석은 오랜만에 점호를 나섰다가 뒷목을 잡고 복도에 주저앉고 말았다.

 



“빨리 다 안 치워!? 이건 무슨 냄새야, 김치 쉰내 나! 여긴 지옥이야아아아! 다 죽여버릴 거야!”

 



이 나이 또래의 관리 안 된 사내 자식들의 방이란 마치 곰팡이 꽃이 핀 반숙 계란 프라이 같다고 할까?  민석은 눈 앞에 펼쳐진 모습들을 보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세탁실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옷가지들과 세탁기 사이에 끼어있는 퀴퀴한 잿빛양말들.  썩은 바나나 따위가 들어있는 방의 냉장고들.  과자 부스러기가 떨어질 것 같은 침구와 바랜 빛깔의 베개들.  제 잔소리가 없던 동안 마구 어질러진 기숙사는 그의 말마따나 지옥이었다.  아침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던 찬열과 세훈은 위층에 보이는 낯익은 얼굴에 손을 흔들었다.  장이씽이 저희를 보더니 보조개가 쏙-

 



“얘들아, 빨리 빨리. 민서기 악마야!”

 


 

아침부터 민석은 각각의 방을 들락날락하느라 분주했다.  찌푸려진 미간이 펴질 줄 모른다.  씽이는 그저 그가 돌아온 것이 좋아서 입술을 쭉- 내밀었다가 단호한 손바닥에 가로막혔다.

 



“꺼져, 네 방도 더러우면 죽을줄 알아.” 


“히익.. 무서워, 밍..”

 



그에 반해 준면은 오랜만에 활기를 띄는 기숙사에 싱글벙글-  하지만 옆에서 날아드는 날카로운 눈빛에 깨갱하며 괜스레 앞에 있는 애들에게 덩달아 ‘빨리 치워!’ 호통이다.  바보 준면.  장이씽은 울상으로 발길을 돌렸다.  오랜만에 민석의 예쁜 미소를 볼 생각에 들떴었는데 그깟 청소에 가로막히다니, 정말 보고 싶었는데.  기숙사장 껌딱지 1은 일찍이 청소를 시작했다.  종대가 가져다 놓은 만화책들, 신발들, 퍼즐 같은 것들이 아니라면 더 깔끔했을 텐데, 투덜투덜-  오늘이 아니면 언제 또 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책상까지 앞으로 끌어내는 종인이다.  먼지가 뭉쳐 굴러다니는 중에 파랗고 노오란 초코 볼이 여러 개, 500원짜리 동전 1개, 10원 짜리 4개, ‘종대 꺼’라는 이름표 붙은 펜이 3개.  그리고 몇 달 전부터 계속 찾아 다니던 것.  제일 좋아하는 양말이라더니, 아이언맨이었어?  못 살아, 혼잣말을 하며 웃어버린다.  바닥 청소를 끝내고 세훈에게서 빌려온 공기 탈취제까지 뿌린 그는 너른 침대에 잠시 시선을 둔다.  그러더니 냉장고 위에 올려있는 핸드폰으로 손을 뻗었다.

 



‘김종이인? 웬일이야, 전화를 다 하구!’


“아니.. 지금 기숙사 대청소 하는데, 우리 침대 어떡할까 하고.”


‘침대? 침대 왜?’

 



‘아니, 이제 너 잠도 잘 자고.’라고 말하며 발가락을 꼼지락-  종대에게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

 



‘아, 싫어어.. 그냥 놔두면 안돼?’

 



낮게 웃으며 알겠어, 답하더니 그답지 않게 다급한 목소리로,

 



“아, 맞다! 아이언맨 양말 찾았다.”


‘진짜? 어디 있었는데! 내가 다 찾아도 없었는데에~’


“크큭.. 책상 뒤에 떨어져 있더라, 바보야.”

 



핸드폰으로 흘러나오는 높은 웃음소리에 덩달아 웃음이 커진다.  밥은 먹었어? 물어오기에 응.  이제 누구랑 먹었는지 물어올 것이다.

 



‘누구랑?’

 



종인이 답하면, 언제나처럼 많이 먹었는지 묻고 잘했다고 말할 것이다.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그 동안 못 다한 얘기들을 전하는 달보드레한 목소리.  진작 전화해볼 걸, 얕은 후회가 밀려온다.

 



‘오늘밤 출국이야, 비행기 추락하는건 아니겠지? 헤헤-‘


“모레가 대회랬나? 떨려?”

 



‘조금.’이라고 답할 때, 약간의 망설임이 느껴졌다.

 



“또 담배 피웠어?”


‘아니. 윽.. 딱 한 번.’


“너무 스트레스 받지마, 네 피아노 정말 좋으니까.”

 



심사위원들이 귀머거리가 아니라면 네가 1등이야, 덧붙인 말에 종대가 낮게 키득거리는 게 들린다.  정말이냐고 되물어서 종인은 주저 없이 그렇다고 말했다.  열어놓은 창을 넘나드는 겨울 바람, 새들의 지저귐과 복도의 소란스러움까지 그 무엇 하나 302호에 방해가되지 않는다.

 



‘근데, 진짜 왜 전화한 거야?’


“.. 침대 때문에.”


‘거짓말.’

 



갑자기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종인을 따라 상대도 말이 없었다.  둘 사이의 정적은 절절한 색을 띠었다.

 



‘뭐야아, 나 보고 싶어서 했지?’

 



물음 끝에 따라오는 서글서글한 웃음기에 저도 모르게 응, 대답해버린 종인은 서둘러 아주 조금, 이라는 바보 같은 말을 덧붙였다.

 



‘왜?’

 



왜?  짙은 시선이 천장에 한참 동안 머물렀다.  침대를 보니까 네가 떠올라서, 아이언맨 양말을 찾아서, 302호는 우리의 방이라서, 오늘 점심 메뉴에 네가 좋아하는 강정이 있어서, 비어있는 칫솔걸이가 바짝 말라 있어서..  모든 게 그가 보고 싶은 이유였다.  그래서, ‘그냥.’이라고 대답했다.

 

 

민석은 광이 나는 것만 같은 복도를 돌아보며 그제서야 인상을 풀었다.  어디라도 기댄다면 잠에 빠질 수 있을 만큼 피곤했지만 마음만은 아주 상쾌하다.  줄곧 그와 함께 각각의 방을 검사하고 청소를 도와주던 준면은 거의 마지막에 방문한 306호에서 게임의 노예가 되어 볼썽사납게 날뛰었다.  꼴보기 싫어.  장이씽은 어디 처박혀서 안 보이는 거야?  민석은 제 방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그러다 정작 두 주인의 손길 한번 닿지 않은 211호의 오전이 떠올라 아연실색.  아마 지금은 그 방이 기숙사를 통틀어 제일 더러울 것이다.  저가 자리를 비운 동안 준면이 모아놓은 쓰레기 더미들.  민석은 차라리 기절해버리고 싶다고 생각하며 문을 열었다.

 



“어?”

 



한 눈에 들어온 깨끔한 방에 저절로 미소가 피어 올랐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것이어서 더 그랬다.  침대에 엎드려 있던 장이씽이 그를 보자손을 흔들며 몸을 일으켰다.  네가 한 거야? 묻자 뺨에 깊이 패인 볼우물이 대신 그렇다고 대답했다.

 



“민서기, 웃는 모습 계속 보고싶었어. 돌아온 걸 환영해~”



 

오늘 장이씽은 그 동안 보고 싶어했던 민석의 사르르-장이씽의 표현에 따르면 이런 미소-를 마음껏 볼 수 있었다.  민석은 고마운 마음에 그의 입술 공격에도 튀어나오려는 욕을 한번 꾹 참아주었다.  옷장 문을 열면 이 평화가 끝일 거라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강나 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

댓글 2

SNS 계정으로 간편하게 로그인하고 댓글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