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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첸] Murmuring Room 6

속삭이는 방

 

 

 
 






6-1.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 ㉮

 

 


7월의 어느 주말 오후, 기숙사 4층 세미나실 중 하나가 떠들썩하다.  모의고사가 끝나고 눈 깜짝할 새 기말고사가 예정되었다.  백현이 중간고사 끝난 지 며칠이나 됐다고 기말고사냐며 길길이 날뛰자 경수는 두 달, 이라고 답해준다.  찬열이 과자 봉지를 뜯으며 ‘주객전도란,우리는 공부하기 위해 모인 것이 아니라 파티를 위해 모였다는 뜻이다. 으하하.’ 외친다. 

 



“야, 너 방금 ‘황소 개구리와 우리말’ 보고 말한 거지?” (고 1 국어 1단원)


“올~ 역시 도경수, 너 인정.”


“병신, 거기 기말 범위 아니거든. 언제적 황소 개구리야.”

 



봉지를 뜯던 손을 멈추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거짓말 하지마.  경수가 한 쪽 입 꼬리만 올린 채 그를 올려다 보는 것이 정말 악마 같아 보였다.

 



“으아악! 나 거기 다 외웠단 말이야!”

 



찬열이 미친 듯이 발악을 해보지만 누구를 탓하리오?  그 동안 배구 핑계 대고 공부를 완전히 놓아버린 제 탓인 것을.  넌 알고 있었어?  씩씩거리며 얌전한 제 룸메이트를 건드린다.  책에 무심히 시선을 내리고 있던 세훈은 대꾸조차 없다.  그저 잠시 ‘빙신.’이라는 입 모양을 보였을 뿐.  괜히 지렁이 젤리를 무자비하게 입에 털어 넣고 있던 종대에게로 불똥이 떨어졌다.

 



“아, 개빡쳐, 국어책 새끼.. 김종대! 일어나, 한 대 피러 가자.”


“미친 놈 아니야아? 싫어!”


“너도 나 무시해?”

 



굳이 물으신다면 야무지게 파랗고 노란 지렁이를 씹으며 응, 이라고 대답할 수 밖에.  대상을 알 수 없는 저주를 퍼붓고 있는 찬열에게 백현이 빼빼로를 내민다.  이거나 피워.  종대가 고개를 돌리더니 옆에 있는 종인의 입술을 말랑한 젤리로 툭툭-  지렁이가 네 뱃속 구경하고 싶대.  입을 벌려 젤리를 받아먹는 제 앞에서 반달 눈으로 까르르 웃는 룸메이트를 따라 웃어본다.  찬열이 언제나처럼 지랄 났네, 한마디 던지면서 과자 봉지를 던져왔다.  머리를 맞고 종인의 품으로 떨어진 감자 과자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이다.

 



“초코 송이는 없어?”


“초코 송이 같은 소리 하네, 꼭 지 같은 것만 처먹어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 왜 찾아주는 건데?  세훈이 몸을 일으키며 귀엽다는 듯 찬열의 귀를 잡아당겼다.  얼굴 가득 장난기가 어려있다.  초코 송이 과자를 막 손에 쥔 찬열의 얼굴이 그와 상반되게 새빨개졌다.  괜히 세훈의 목에 팔을 걸며 ‘뭐, 이 새끼야~’하더니 종대 대신 세훈을 얼러 나가버렸다..

 



“초코 송이 먹고 싶었으면 말을 하지, 그럼 내가 100개 사왔을 텐데에~”

 



귀엽게 생긴 초코 과자를 입 앞으로 가져오며 눈을 반짝이는 바람에 또 저절로 종인의 입이 벌어졌다.  간질간질.  종대는 요즘 들어 저를 이런 기분으로 만드는 일이 잦다.  그가 말하는 ‘이런 기분’이란 어리둥절 반, 간지러움 반.  자습실에서 맞은 편에 앉아 멍하니 종인만 쳐다보고 있거나 그가 내뱉는 언어 하나 하나에 고개를 끄덕거리거나 맞장구를 치는 것, 침대에 누워있을 때 팔이든 가슴팍이든 등이든 얼굴을 묻고 킁킁 냄새를 맡으며 기분 좋은 표정으로 잠에 빠지는 것.  이런 것들은 사실 별로 놀라울 게 아니다.  이전과 별반 다를 게 없기 때문에.  진짜 문제는 바로 저 눈동자들이다.  손가락이 완치된 이후로 기분이 얼마나 좋은 건지 하루라도 반짝거리지 않는 날이 없다.  반들반들한 눈동자가 계속 종인을 따라다닌다.

 



“종인아, 무슨 생각해? 또 시험 걱정이야?”


“넌 오늘도 기분 좋아?”


“응! 완전 좋지이!  우리 오랜만에 다같이 있잖아, 짱짱 좋아!”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순순히 따라나올 걸, 생각해보는 종인이다.  

 



“우리 종이니~ 초코 송이 좋아쩌요? 어구어구?”


“아, 하지마.. 진짜 소름 끼쳐, 큭.”


“어쿠쿠, 소름 끼쳐쩌요?”


“나도 소름 끼친다, 미친.”

 



생각보다 모의고사 등급이 낮게 나와 침울했는데 이 애들 사이에 껴서 시시콜콜한 얘기를 주고 받고 웃고 있으니 거짓말처럼 기분이 나아졌다.  안 가겠다는 저를 붙들고 30분이나 귀찮게 해준 종대에게 고마워진다.  종인은 늘 남들한테는 괜찮아, 라면서 스스로에게는 넌 안 돼, 채찍질만 하는 것이 버릇이다.  하지만 요즘은 이 채찍질도 무용지물인 것 같다.  곁에 딱 달라붙어 당근을 먹여주는 사람이 일곱이나 되기 때문이다.  허기진 날이 언제였는지 잊었을 정도로 배가 부른 나날이다.  친구들과 축구를 하고 들르겠다던 당근 제공자 중 한 명이 문을 두드리고는 세미나실로 들어섰다.

 



“뭐야, 공부한다더니 과자 파티였냐?”


“형아~ 민석이 형아 왔다아.”

 


 

눈을 반짝거리면 무얼 하나?  민석이 오자마자 종인이 쫄래쫄래 꼬리를 흔들며 수학책을 들이미는 바람에 쫓겨나다시피 한 종대가 경수와 백현 옆자리에 털썩- 앉는다.  마침 찬열과 세훈이 들어오면서 민석에게 고개를 숙이더니 후다닥 이들 틈에 끼어든다.  찬열이 ‘으아, 민석이 형 언제 왔어? 담배 냄새나?’ 저들에게 속닥거리는데 엄청 많이 나, 라고 대답하는 건 민석이다.

 



“줄이기라도 해, 안 좋아.”

 



이 고개를 숙이며 네, 대답하는 목소리가 아주 작았다.  민석이 피식- 웃더니 다시 종인의 수학 시험지를 살핀다.

 



“너 이것도 중간에 기호 놓쳤잖아.”


“아..”


“자면서 풀었냐?”


“진짜네.. 긴장했더니 정신이 나갔었나봐요.”

 



콧등으로 손가락을 가져가는 종인을 보며 민석은 구석에 모여서 속닥거리는 나머지들에게 들으라는 듯이 입술을 뗀다.

 



“전교 4등도 긴장한다는데 너희는 뭐하냐?”


“형! 그건 저 새끼가 유별난 거에요, 허허. 난 앞으로 모의고사 때 꿀잠 예약, 잠 존나 잘 와.”


“맞아, 수학이랑 외국어 시간에 누가 나한테 마취 총 쏜 줄.”


“난 언어!”


“미친 놈, 1교시부터 자냐? 보스몹이네, 이거.”

 



저들끼리 낄낄거리는 모습을 보며 종인도 살짝 웃는다.  제 걱정들도 이들과 함께라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오늘은 좀 괜찮아 보이는데?”

 



세훈이 옆 테이블의 종인을 곁눈질하며 어깨를 으쓱-

 



“김종대 너는 평소랑 하는 짓이 똑같잖아, 발전좀 해라.”


“난 평소에도 종인이한테 잘해주니까 그런 거거든~”


“저 곰돌이 새끼는 모를 거야, 우리의 눈물겨운 노력을.”


“존나 감동적이야, 우리 우정.”


“뽀렙, 크큭.”


“아, 그건 더럽다고.”

 



모의고사 결과에 실망한 종인이 침울한 것은 저희에게도 걱정이었다.  그래서 '김종인 우울 방지 위원회'가 소집된 것이다.  특명! 김종인을 웃겨라.  성공.  종인은 많이 변했다.  그게 자의든 타의에 의한 것이든 기쁜 일이다.  짙은 눈을 굴리며 눈치를 보는 일이 줄어들었고 어깨를 끌어안아도 놀라지 않게 되었다.  그에게 가장  고마운 건 ‘우리’가 되는 것에 처음처럼 주저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르게 종인은 그들에 스며들어 있다.

 

 




종인이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털면서 나온다.  침대 위에 앉아 핸드폰을 만지고 있던 종대가 은근슬쩍 오늘 재미있었지? 라고 물어본다.

 



“너네, 요즘..”


“으응?”

 



종대가 저도 모르게 침을 꾸울꺽-  들킨 거야, 우리?

 



“더 병신 같아.”

 



바보처럼 웃어버리는 그를 따라 종대의 입 꼬리가 말렸다. 

 






6-1.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 ㉯

 

 


붙어있는 피아노 연습실들 사이 한 곳에 종대가 있다.  부드러운 손길이 닿은 건반에서 흘러나오는 음들은 그 곳의 공기마저 감미롭게 만든다.  저의 음악에 매료된 듯 함초롬한 그의 눈.  마지막 떨림까지, 연주가 끝이나자 멀찍이 떨어져 있던 피아노 선생님이 박수를 치며 곁으로 다가왔다.

 



“완벽해, 3일만에 완성했네.”


“정말요? 으~ 다행이다!”


“이 자식, 우리 연습을 이렇게 열심히 해줄래?”


“헤헤, 다음주부터요..”


“근데 갑자기 누구 들려주려고?”


“음.. 있어요!”


“너, 여자친구 생겼지?”


“아니에요오! 얼른 가세요, 쌤! 늦었잖아요~”

 



선생님을 계단까지 배웅하고 다시 연습실로 돌아온 종대가 뿌듯한 표정으로 피아노를 쓸어본다.  좋아할까?

 

 

여유로운 토요일의 밤이었다.  바깥의 후끈한 열기를 비웃기라도 하듯 에어컨이 세게 돌아가고 있는 302호.  그 방에 물티슈로 방바닥을 훔치며 흥얼거리고 있는 주인 1.  손가락을 압박하던 붕대를 시원하게 풀어버리고 완치 판정을 받은 종대에게 새로 생긴 취미는 청소, 다른 말로는 소꿉장난이라고 할 수 있다.  핸드폰에서 흘러나오는 큰 음악소리가 종인이 들어오는 문소리조차 삼켜버렸다.  어느새 제 눈 앞으로 보이는 발에 종대가 고개를 들어 올려다본다.

 



“줘, 내가 한다니까.”


“다 나았다니까아! 귀찮게 하지말고 얼른 씻고 나와요~”

 



이크, 방금 너무 신혼 부부 같았잖아!  혼자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한 룸메이트를 걱정스레 내려다보던 종인이 바보라고 중얼거리며 몸을 돌린다.  종인이 씻는 사이, 바닥을 마저 닦고 아무렇게나 걸려있던 교복들을 정리했다.  제 것보다 사이즈가 큰 상의를 꺼내 몸에 대본다.  역시 크네.  옷에서 종인이 냄새 난다.  거기에 코를 묻고 좋다, 하며 입 꼬리가 늘어진다.  잠 오는냄새.

 



“변태냐?”


“야! 엄마!”

 



또 울그락불그락.  종인이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털며 어깨를 으쓱거린다.  놀랐잖아아, 라며 수건을 뺏더니 종인의 어깨를 눌러온다.  내가 해줄래!  종인이 고개를 저으며 수건을 뺏으려 하자 다쳤던 손가락을 들이밀어 가만히 따를 수밖에 없다.  두 달 동안 챙겨준 것에 보답하려는 듯 자꾸 저를 살뜰히 챙기는데 그 손길이 영 서툴다.  머리카락을 몇 번 문지르지도 않은 수건을 바닥에 내팽개치더니 목을 주물주물-  또 몇 번 하지도 않고는 귀 옆으로 바짝 얼굴을 들이밀며 ‘시원해?’ 묻는 얼굴이 퍽 즐거워 보인다.  종인은 웃으면서 고개를 크게 끄덕거렸다.  가뜩이나 작아서 하는 행동들이 다 아기 배냇짓 같다.  지금도, 칭찬을 받은 것에 신이 났는지 어깨를 두드리는데 시원하긴커녕 간지럽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몸까지 들썩이며 열심이다.  다람쥐.  내일은 늦잠을 자도 누구 하나 뭐라 할 수 없는 일요일이기에 둘은 늦게까지 잠에 들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끊이지 않는 배경음악이 틀어져 있고 그들은 지금 나태한 청소년 역할.  종대는 벽에 기대 만화책을 보고 종인은 그의 다리를 베고 누워있는데 그 모습에 불편함이라곤 한 톨도 찾아볼 수가 없다.  마지막 장을 넘기며 재미있다, 키득거리더니 책을 내려두고 종인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린다.  괜히 이마를 손가락으로 피아노 치듯 두드려 보기도 하고 속눈썹을 쓸어보기도 하고.  그리고 느닷없이 지금 이 시간이 너무 좋다고 생각해본다.  이렇게 좁은 공간에 얼굴을 맞대고 가까이 있어도, 굳이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아도 괜찮은 우리.  옆에 붙어있는 게 너무 당연한 너와 나.  그는 잔뜩 간지러워지는 마음을 견딜 수 없어 애꿎은 종인의 머리카락을 헝클어버린다.  죽을래?, 여전히 국어책에서 시선을 놓지 못하는 모범생 룸메이트.

 



“어? 지금 나오는 노래 뭐야?”

 



종인이 갑자기 고개를 틀어 물어온다.  응?

 



“이거? 이루마 『May Be』일 걸?”


“좋다.”

 



가요들 중 고작 몇 곡 껴있는 피아노 곡을 좋다고 말해와서 종대는 웃어버렸다.  무언가 그답다고 해야 하나?  근데 하필이면 이 곡은 연주해 본 적이 없다.  이건 해본 적 없는데, 라며 금새 풀이 죽어 입술을 삐죽거리는 그를 보던 종인의 얼굴 위로 드리워져 있던 책의 그림자가 걷힌다.  조금 난감해진 표정이다.

 



“음, 그래도 『달빛』이 제일 좋아.”

 



이 애는 세상에서 저의 기분을 가장 잘 맞춘다.  귀여워,히히..  됐거든요, 틱틱거리면서 종대는 어느새 핸드폰을 들어 급히 문자를 써 내려갔다.  ‘선생님, 저 이루마 - May Be 해야 돼요!’

 


종대는 포근했던 그 날을 떠올리며 서둘러 4층 자습실로 향한다.  주말에 형의 생일이 있어 금요일인 오늘 종대는 집으로 돌아갈 예정이다.  마음이 급하다.  지난 며칠 동안, 그가 좋다고 말했던 『May Be』를 빨리 들려주고 싶어서 손가락이 저절로 그 곡을 연주할 만큼 연습 했다.  저를 위해서 연습한 걸 알면 왠지 기뻐할 것 같다.  그 애라면.

 



“도갱, 도갱! 종인이는?”


“김종인? 외출.”


“갑자기?”


“사전 잃어버렸다고 사러 나갔어.”


“헐..”


“왜?”

 



아니라고 말하는 얼굴에 실망감이 가득 안겼다.  일부러 야자 쉬는 시간에 맞춰왔는데 자리에 있어야 할 종인이 없다.  핸드폰이 없는 종인이가 조금 미워졌다.  좋아하는 4교시 음악 시간이 갑자기 도덕 시간으로 바뀔 때랑 비슷한 기분.  제 하루에서 종인이 원래 없던 사람처럼 감쪽같이 사라져버린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떨쳐지지 않는다.

 



“아빠 오려면 1시간 남았으니까 기다리지, 뭐.”

 



애써 스스로를 다독이며 종대는 일부러 학교 운동장이 제일 잘 보이는 본관 계단에 엉덩이를 붙인다.  어슴푸레한 하늘에 까만 구름이 느릿느릿 서로를 감싸 안는 걸 구경했다.  기온이 너무 높아져서 소나기 올지도 모른다고 했는데, 우산은 가져간 거야?  종대가 무의식적으로 핸드폰을 켰다가 고개를 떨군다.  짜증나아, 3일이나 못 만나는데.

 
 

두꺼운 빗줄기가 요란하다.  대지가 머금은 햇빛의 흔적 곳곳에 빠르게 스며든다.  야자를 끝마치고 집으로 향하는 아이들이 갑작스러운 소나기에 평소보다 어수선하다.  그들 사이에 끼어있는 종대는 세 걸음에 한번씩 불이 꺼지기 시작하는 학교를 돌아본다.  결국 종인을 만날 수 없었다.  한껏 들떴던 마음이 까무룩 가라앉아 오랜만에 만나는 아빠가 어리둥절해 하셨다.  차 유리창에 빗방울들이 서로를 찾는 것처럼 합쳐진다.  응?  종대의 눈이 갑자기 동그랗게 커지더니 ‘아빠, 차 돌리면 안돼?’ 라고 소리쳤다.  맞은편 인도에 비를 맞으며 뛰어가는 종인이 보였다.

 



“말이 되는 소릴 해라, 이놈아~ 왜, 뭐 두고 왔어?”


“아.. 응..”


“뭔데, 중요한 거야?”


“응..”

 



빠르게 멀어져 가는 종인의 뒷모습을 보고 있는 눈이 처진다.  아빠의 목소리는 그의 귀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종대는 그저 학교에 두고온 ‘중요한 것’ 생각뿐이었다.  우산도 없이 비에 젖어 학교로 돌아가는 모습이 자꾸 눈 앞에 아른거렸다.  속상하게 쟨 왜 저러고 다니는 거야?  바보같이 핸드폰도 없어가지고..  종대의 마음에 내린 소나기는 밤새 그치지 않을 것처럼 소란스러웠다.

 

 




무심코 종대를 부르며 문을 연 종인은 저를 맞이한 깜깜한 방에 놀라 멈칫해 버렸다.  맞다, 집에 갔지.  불을 켜고 들어와 문을 잠근다.  혹시라도 젖을까 소중하게 끌어안았던 까만 봉지를 내려두고 교복에 매달린 빗방울을 털어내지만 이미 교복은 회생 불가.  쫄딱 젖어버렸다.  화장실로 가서 수건으로 손만 닦고 봉지에서 두꺼운 사전과 얇은 종이 쪼가리를 꺼내 책상 위로 가져간다.  바닥이 빗물에 젖든 말든 신경은 온통 그것들로 향해있나 보다. 다행이다, 라고 읊조리는 걸 보니 잘 지켜낸 모양.  종인은 따뜻한 물로 씻고 나와 마른 걸레로 바닥의 물기를 닦아내고 물티슈로 한번 더 닦았다.  종대가 바닥을 닦으려 엉덩이를 치켜 들고 왔다 갔다 하던 모습이 떠올라 살짝 웃음이 따라왔다.  한 두어 번 힘있게 닦다가 금새 제 눈치를 한번 보고는 대충 현관으로 먼지들을 밀어버리는 걸 알고 있다.  지금쯤 푹신푹신한 곳에서 가족들과 실컷 웃고 있을 것 같다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마음이 허우룩해졌다.  종인은 괜히 빡빡 바닥을 문질러본다.  302호에 혼자 남겨진 저가 자꾸 종대를 떠올리는 게 억울하다.  하지만, 떠올리지 않기엔 이 방은 종대로 가득하다.  널따란 침대며 어질러져 있는 만화책들이며, 어느 곳 하나도 그가 아닌 게 없다.  심지어 종인까지도 이 방에서 그의 흔적이 되어 있었나 보다.  늘 종대가 닿아있던 곳들이 허전해서 일찍 잠에 들 수가 없었다.

 

 




점심을 먹고 312호에서 경수의 원서들을 구경하는 종인에게 백현이 아이스크림을 내민다.  너도 이거 읽었어? 묻자 미쳤냐고 대답한다.  역시.  같이 영화를 보기로 해서 왔는데 1시간째 다운로드 중.

  



“이거 말고 쭈쭈바는 없어?”


“아이~ 은근히 졸라 까다로워, 깜종 새끼.”

 



작은 냉장고 문을 열더니 골라, 라고 말하길래 종인이 고개를 그쪽으로 돌리고는 곧 눈이 커졌다.  저절로 발길이 냉장고로 향해진다.  갖가지 아이스크림으로 가득 차 있는 냉장고.

 



“우와.”


“이게 312호 금고야, 털리면 넌 줄 안다.”

 



핸드폰을 들여다 보고 있던 경수가범인은 무조건 김종인, 이라고 백현의 말에 맞장구를 친다.  종인이 그들과 더불어 신난 듯 아이스크림을 고른다.

 



“아, 우리 방에 프링글스 있는데.”


“닥치고 가져와.  조폭 영화 볼 때는 프링글스 있어야 돼,꼭이야.”

 



평소 같으면 이미 종대가 챙겼을 텐데, 생각하며빨갛고 둥근 과자 통을 옆구리에 낀다.  막 신발을 신으려는데 어디선가 ‘지잉- 지잉-‘ 핸드폰 진동 같은 것이 울렸다.  어라?  종인이 냉장고 위에 올려져 있는 핸드폰을 집어 든다.  ‘형님’이라고 뜬 이름.

 



“여보세..”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 뭐해애!’


“뭐야, 너? 핸드폰 안 갖..”


‘나 지금 밖이야, 카톡 봐!’

 

 


 
 

종대는 핸드폰 화면에 새겨진 ‘빨리 올래?’라는 그의 물음을 한참 동안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보고 싶다는 말인 거야?  미쳤나 봐, 진짜 미친 놈인가봐.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의 눈은 이미 반달이 되어있다.  이미 앞서 걸어가고 있는 가족들에게로 달려가면서 소리친다.

 



“나 내일 일찍 가야 돼애! 학교에 무슨 일 생겼대! 아침에, 8시!”

 




 

새 소리가 요란한 아침, 종대는 조심스럽게 302호의 손잡이를 돌린다.  커튼 사이로 드는 햇빛이 엷게 물들어있는 방 안.  한 발 한 발 소리 없는 걸음을 내리는 그의 발에 무언가 툭- 채인다.  한영 사전.  종인을 비 맞게 했던 사전이다.  왜 여기 있고 난리야?  툴툴거리며 집어 드니 그 아래 하얀 종이가 더 있다.  종대는 그걸 들여다보더니 입술을 달싹거렸다.  

 
 

웃음이 새어 나와 종인을 깨울 것 같아 손으로 입을 막았다.  아, 심장 간지러워.  어떡해?

 




 

6-2. Enjoy Your Summer

 

 


7월 말 요란한 매미 소리에 두 손 두 발을 다 든 학교가 방학을 선언했다.  사상 초유의 무더위라는 뉴스가 연일 흘러나오는 그런 여름.  방학이 시작되고도 근 3주 동안 보충 수업이 진행되었는데 말이 보충이지, 많은 학생들이이 시간을 방학 때 친구들과 놀기 위해 모이는 시간 쯤으로 여겼다.  저기 저 애들과 마찬가지로.  마땅히 비어있어야 할 운동장을 가로지르는 반팔 소년들을 내려다보며 준면은 덥겠다, 중얼거린다.

 



“빨리 안 나와, 새끼야! 개더워!”


“형, 빨리요!”


“나도 선크림 줘, 선크림~  김종인 이리와, 이거 발라야 돼애!”


“걘 안 발라도 돼.”

 



누가 쟤네 좀 말려줘, 준면이가기 싫어잉!  돌아서는 뒷모습이 도살장 끌려가는 소가 따로 없다.  그럼 다녀 오겠습니다.  준면과 함께 그들을 내려다보던 희끗한 수염의 교감과 사회 선생님은 뜨거운 열기마저 푸르게 발산하는 이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 한다.  깊게 패인 주름에 묻혀버린 청춘을 잊은 채 살아가는 이들의 과거.

 



“허이고~ 저 때가 좋았지.”


“내가 저 나이 땐 여름 더위에도 땀이 안 났어!”


“에끼, 이 사람아! 공갈치지 말어~”


“부럽네, 부러워.”

 



 
 

더위마저 기꺼이 삼켜 마땅한 청춘들.  그들에게 고한다, Enjoy Your Summer!

 




 

이틀 후 민석은 한국 수학 올림피아드 고등부 여름학교에 간다.  5월에 1차 시험을 통과한 이후 사감 선생님과 준면의 양해를 구해 2주 동안 기숙사를 비우게 된 것이다.  꾸준한 교육과 시험을 거쳐 내년에 있을 최종 시험까지 합격한다면 국제 수학올림피아드에 출전할 한국 대표가 된다.  저보다 흥분한 준면이 브라질 갈 때 자기도 데려가라며 발을 굴러 얼굴을 밀어버렸다.  괜히 말했어.

 



“붙고 나면 말해, 겨우 1차 통과야.”


“1차가 쉬워? 넌 지금 우리 학교, 지역 대표야! 아니, 예비 한국 대표!”


“어디 가서 입 뻥긋 하기만 해 봐, 특히 애들한테.”


“.. 자랑하면 안돼?”

 



닥쳐.  가자미 눈을 하고 저를 쳐다보더니 갑자기 아! 하고 핸드폰을 들여다본다.  언제나처럼 즐거워 보이는 티없는 얼굴.

 



“올라! 무이뚜 쁘라제르. 메우 노미 에 준면.”


“뭐래, 미친.”


“브라질 인사, 으흐흐.  연습해놔야징.”


“내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지.”

 



반복적으로 올라! 올라! 팔을 흔들다가 결국 민석에게 엉덩이를 걷어차인다.  근데 무슨 뜻인데, 나도 알려줘봐.  풉, 봐봐.  올라가 안녕하세요고, 무이뚜 쁘~라제르.  무뚜 뿌라제?  넌 입 모양이 희한해서 발음이 구린가?  죽는다!  침대 위에 나란히 엎드려 키득거리다가 무언가 생각난 듯 준면이 고개를 틀어 그에게 묻는다.

 



“내일 일보 원고 내는 날이잖아, 왜 안 보여주냐? 냈어?”


“헐! 어떡해.. 나 까맣게 잊었어, 으아..”


“어쩐지, 잠잠하더라. 그냥 대충 사진 넣어서 내.”


“안돼, 사감이 이번에 봉사 다녀오라고 했단 말이야. 학교 홈피에 올려야 된다고..”

 



머리를 쥐어뜯는 민석을 보며 혀를 찬다.  대충 학교 앞 쓰레기 줍는 거 찍어서 보내자고 했더니 단칼에 거절.  하긴, 제 룸메이트는 대충이란걸 모르는 이다.  사소한 일이라도 허투루 넘기길 싫어한다.  입국 예정의 중국 교환학생에게 벌써 몇 주 전부터 기숙사장 노릇을 하고 있는 것만 봐도 그렇다.  어차피 귀찮아질 거 사서 고생이라고 핀잔했더니 ‘어차피 친해질 거 미리 친해지는 거지.’란다.  그에게 가끔 중국어 문자가 오면 중국어 제일 싫어, 울상을 지으면서도 서둘러 한자가 어질러진 책을 펼친다.  그나저나 이제 곧 만나겠네.

 



“내일 환경 미화 해야겠다!”

 



눈을 번뜩이더니 금새 다시 풀이 죽었다.  이 더위에 누가 가겠어?  준면이 버릇처럼 사탕을 내밀다가 주먹을 쥐어서 민석은 사탕 대신 그의 손을 쥐어버렸다.

 



“있잖아, 너라면 사족을 못 쓰는 김종인.”


“종인이? 아, 좀 미안한데..”


“김종인이어야 하는 이유 하나, 걔가 가면 종대가 따라온다. 둘, 종대가 애들한테 가자고 한다. 셋, 김종대 찡찡거리면 답 없다.”

 



준면의 말은 토씨 하나도 어긋나지 않고 그대로 되었다.  다만, 그가 예상치 못한 한 가지.  그 애들에는 저도 포함된다는 것이다.  거리 곳곳의 쓰레기를 줍는 건지, 아니면 노는 건지 분간하기가 힘든 까닭은 끊이지 않는 즐거운 소음 때문이다.  간간히 덥다는 투정이 섞여 있지만 그마저도 손 부채질을 해주며 미안한 만큼 더 시원하게 웃어보이는 기숙사장에 의해 웃음소리로 바뀌어버린다.

 



“형, 쓰레기 제일 많이 주운 사람 아이스크림 사줘요!”


“뻥 안 치고 100개 주움.”


“나 300개."


“지랄 마아!”

 



종인이 슬쩍 옆에서 집게를 딱딱거리던 경수에게 묻는다.  쟤네 진짜야?  헛웃음을 터뜨린 그가 종인의 귀로 은밀하게 입술을 가져간다.

 



“이럴 땐, 닥치고 1000개 외치는 거야.”

 



고개를 갸웃하는 그의 등을 떠민다.

 



“나 1000갠데..”

 



콧등을 긁적이며 우물쭈물 내뱉은 그에게 시선이 쏠린다.  준면이 ‘더위 먹었나 봐, 쟤 어쩌다가 저렇게 됐냐?’ 하며 웃는데 그 옆 306호 장신 콤비는 왠지 흐뭇한 미소다.  ‘잘 컸어, 내 새끼’하는 아빠 미소.  백현과 떨어져 있던 종대가 푸하하 웃으면서 다가오더니 제 엉덩이를 두드리면서 그래쩌요~? 혀짧은 소리를 해와서 마구 놀림 당한 기분이 되었다.  모르는 척 저 앞에서 담배 꽁초를 줍고 있는 도경수, 죽인다.

 



“짱 덥다, 진짜.. 그거 알아? 개들이 더울 때 혀 내밀고 헥헥 거리잖아, 그렇게 하면 안 덥다?”


“헤헤.. 이렇게?  헥헥..어? 헐! 진짜 안 더워!”


“헥헥헥.. 그치? 쩔지~”


“븅신들.”


“그래도 착한 일 하니까 기분 좋다! 형아, 다음에 또 해요!”


“아니, 다음엔 제발 물놀이로 해주세요..”

 



민석이 살짝 준면의 옷을 잡아당겨 무리에서 떨어뜨렸다.  날씨가 덥긴 더운지 땀이 맺힌 동그란 이마.  준면이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가 신경질적인 손에 저지 당한다.  1년 전, 그와 친해진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축구를 하고 교실로 들어오자 그는 지금처럼 손수건을 꺼내 제 땀을 닦아주었었다.  그 때, 민석은 신사적이라는 말을 처음 입 밖으로 사용해 보았다.   하지만 이게 콧물 닦기 용이라는 걸 아는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또, 비염 왔냐?

 



“그나저나, 이따 진짜 할 거야? 걸리면 난 모른다.”


“일단 내려볼게, 어떻게든 되겠지.”

 




 

무더위 속에 고된 봉사활동을 마치고 돌아온 그들은 말없이 각자의 방으로 흩어져버렸다.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백현은 옷가지를 하나 둘 벗어 던지고 팬티만 남긴 채바닥에 늘러 붙는다.  시원하다며 흙탕물 속 아기 코끼리처럼 몸을 뒹굴리더니 씻고 나오자 까무룩 잠이 들어있다.  입을 다물고 있으니 순하기 짝이 없는 룸메이트.  평생 잠만 잤으면.  경수가 씻고 자라고 발로 두어 번 건드려보지만 미동도 없다.  나도 바닥에 눕고 싶은데, 중얼거린 그는 방을 한번 둘러보더니 물티슈에 시선을 둔다.  저가 닿아있을 왼쪽 팔을 들어 쓱싹쓱싹, 왼쪽 다리를 쓱싹쓱싹-  귀여운 입술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몸을 누인다.  더운 여름날, 시원한 바닥에 누워청해보는 단 잠.

 



“개새끼.”

 



제 배 위로 올라온 백현의 먼지 묻은 오른 다리가 무겁다.  다 닦아줄 걸.

 


얼마나 지난 걸까?  쿵쿵거리고 웅성거리는 소음에 경수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린 곳에 떠 있는 파란 얼굴에 놀라 헉!

 



“놀랐어, 뚜뚜?”


“뭐야! 불도 안 켜고!”


“정전이래. 애들 형네 내려간다는데 우리도 가자, 짱 신난다!”

 

 


정전에 이성을 잃은 건지 복도에 모여 있는 이들은 평소보다 몇 배 더 격앙되어있다.  경수의 팔을 잡아 끌며신나게 핸드폰 불빛을 흔들어대는 룸메이트도 마찬가지. 평소에도 제 정신이 아닌데 지금은 절레절레-

 



“끄아아악!”

 



211호 문을 열자마자 난데없는 비명을 지른 종대 때문에 더 놀란 저는 뒷걸음질을 쳐 문에 머리를 박아버렸다.  어리둥절해 있으니 핸드폰 불빛이 여럿 더해져 밝아진 방 안이 눈에 들어온다.  키득거리고 있는 형들과 세훈이, 무릎에 얼굴을 묻고 있는 찬열(왜 귀여운 척이야?), 그리고 목석같은 종인의 목을 끌어안고 있는 종대가 보인다.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이야?

 



“어여 앉아, 크큭. 지금 귀신 얘기 중이야.”


“아, 너네 때문에 진짜 놀랐잖아아!”

 



내가 더.  백현이 신이 나서 손을 든 채 ‘내가 백현이로 보이니~’ 이 지랄이다.  경수는 그들 사이에 끼어 앉으면서 조금 웃어 버렸다.  캠핑 온 기분이다.  어둠 때문에 생긴 긴장감이 달갑진 않지만 옆에 어느 때보다 달라붙어 있는 이들과 둥글게 모여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조금 들떠 버리고 만다.  근데 옆에 있는 찬열이 아직도 고개를 파묻은 채다.

 



“야, 뭐해? 울어?”


“.. 으어어.. 나 귀신 조온나 싫다고! 씨발! 오지마!”

 



허공을 향해 주먹질을 하며 소리치는 이를 제일 크게 비웃는 건 종대.  아까 찢어질 듯이 비명을 지른 건 어디의 누구?  그들을 보며 가만히 웃고 있는 종인에게 넌 괜찮냐고 묻자 고개를 끄덕이면서 ‘난 기도하면 돼.’라고 대답한다.  방에 십자가도 있어, 덧붙인다.

 



“그럼 오늘 십자가 가운데에 놓고 자자!”

 



제 룸메이트의 쨍한 목소리에 진지하게 그러자는 걸 보고 상종하기가 싫어졌다.  저 바보들.  계속 이어지려던 준면의 목 없는 귀신 얘기는 발을 동동 구르며 자꾸 소리를 지르는 찬열에 의해 결국 마무리 되지 못한 채 끝이 났다.  옆에서 보니 큰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덩치값 좀 하라고 속삭이자 뭐라고 뭐라고 욕 같은 걸 해대는데 울먹이는 바람에 하나도 못 알아들었다.  핸드폰 불빛으로 서로의 얼굴을 비춘 준면과 민석이 눈짓을 주고받는다.  갑작스러운 납량 정전에 기숙사생 모두가 여름날의 무력감에서 벗어나 활기를 되찾았다.  우리 사이를 차지한 생소한 어둠 때문인지 오늘따라 다들 말이 많다.  마치 고해성사를 하 듯-내용은 전혀 아니었지만- 학교 이야기, 집 이야기 그리고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이야기들까지 그들의 입으로 전해졌다.  그리고 지금은 이런 자리에 사춘기 남학생들이 빠뜨릴 수 없는, 아니 빠뜨려서는안 되는 이야기가 더해졌다.  좋아했던 여자애의 생머리, 짝꿍이 되었을 때 싫은 척 허세를 부렸던 일, 처음 손 잡았을 때의 떨림 같은 것들.

 



“뭐? 그럼 첫 키스를 5학년 때 했단 말이야? 대박 사건.”

 



엄지를 치켜드는 찬열에게 의기양양하게 형님이라고 불러, 백현의 어깨가 내려올 줄 모른다.  옆에 있던 세훈에게로 바로 바통이 넘어갔다.  의외로 그는 두 손으로 뺨을 누르며 ‘저는 아직이요.’ 대답했는데 그 모습이 퍽 부끄러워하는 걸로 보여 모두가 놀랐다.

 



“뽀뽀도?”


“에이~ 형, 뽀뽀는 해봤죠.”


“여기 뽀뽀도 안 해본 빙신 있나염?”

 



아무도 대답하는 이가 없었다.  하지만 모두의 시선이 마치 짜맞춘 것처럼 종인에게로 쏠린 건 왜일까?

 



“깜종, 너 뽀뽀 해봤어?”

 



평소 여학우들과는 교류조차 없고 아예 관심도 보이지 않는 그를 바로 옆에서 봐왔던 이들로서는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종대의 고개도 홱- 종인에게로 향해졌다.

 



“응. 나 자주 했는데.”


“자주!? 누, 누구랑?”

 



민석이 모두의 궁금증을 한 입술에 모아 물었다.  세훈은 신난 듯 추임새를 넣는다.  그 사이에서 종대는 조금 몸을 뻣뻣이 굳혔다.

 



“소윤이요.”


“그게 누군데!”

 



흥분해서 날뛰는 애들 사이로 종대의 느닷없는 웃음 소리가 끼어들었다.  그는 방금까지와 달리 한껏 풀어진 얼굴로 종인 쪽을 바라보더니 대신 대답한다.

 



“김종인 여동생이잖아!”


“죽고 싶냐.”


“농락 잼? 키스도 못 해봤지?”

 



의문스러운 표정을 짓는 종인에게 종대가 어깨를 붙여온다.  그럴 줄 알았어, 김종인.  애들은 괜한 실망감에 젖어 그 쪽으로 베개며 핸드폰이며 집어 던지는데 당사자는 아직도 어리둥절.

 



“얘가 해봤겠냐? 입술 잘 지켜라, 요즘 깜종 노리는 애들 졸라 많잖아.”


“맞아, 우리 학년 애들도 종인이 물어보더라.”


“우리 반 여자애들 쟤 때문에 나한테 잘해줌,킥.”

 



뒷머리를 긁적거리면서 관심 없어요, 낮게중얼거린 종인이 재수없다며 욕을 먹는 와중에 종대 혼자 다른 세상이다.  어둠을 빌어 생각에 잠겨있다.  종인이의 여자친구?  왜 이렇게 기분이 더럽지?  내가 지금 무슨 생각하는 거야?  이런 생각 하는 거 정상이야?  정상이 아니면 비정상이야?  나 비정상이야?  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들로 가득 찬 머리가 급하게 무거워져 종인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잘 보이지 않는 얼굴로 제 머리카락에 대고 ‘왜 그래? 아직도 무서워?’라고 묻는다.  저에게만 들릴 듯 작은 속삭임.  다른 이들은 아직도 실체조차 없는 종인의 여자친구 얘기를 하며 각자 언성을 높이고 있다.

 



“응, 자꾸 생각나.”


“걱정 마, 십자가 있으니까.”

 



이 바보.  종대가 웃어버리자 안심했다고 생각하는 건지 고개를 끄덕거린다.

 



“손은?”

 



종대는 느닷없는 이 물음이 정말 제 입에서 튀어나간 게 맞는지 혼란스러웠다.  그건 인지할 틈조차 없었던 마음의 소리였기 때문에 잠시 착각이라고 여겨졌다.  하지만, 깜깜한 곳에서 들려온 주저 없는 대답 때문에 착각이 아님을 깨닫는다.

 



“잡아줄게. 무서워하지마, 그런 거.”

 



여름처럼 내 뺨을 뜨겁게 만드는 너.  이번 여름은 지독히도 덥다는데 나 녹아버리면 어떡하지?  금새 혼란스러웠던 머릿속을 또 다른 고민으로 지워버린 종대는 해맑게 웃으면서 211호의 소란함 속으로 숨어버린다.

 

 

그 시각, 사감 선생님은?

 



“어떤 놈이 차단기를 내린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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