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너의 의미  [ 부제 : 슬럼프 ]

 

 


따사로운 햇빛에 교복이 짧아졌다.  여름 더위에 채 익숙해지기도 전에 이른 장마가 시작되었지만 말이다.  더운 날씨에 습도만 높아져 방 안이 꿉꿉하다.  침대 위 이불이 삼켜버린 습기를 견디지 못한 종대와 백현이 302호의 찬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  원래대로라면 백현은 첼로 레슨을, 종대는피아노 레슨을 받고 있어야 할 시간이지만 각각 같으면서도 다른 이유로 자유로움을 만끽하는 중.  종대는 부러진 손가락 때문에, 백현이는 종대의 부러진 손가락 때문에.

 



“나는 오늘 너 병원 가는 줄 알고 같이 가주려고 했지~”


“뻥 치지마, 그냥 삥땅치는 거잖아아.”

 



아니라니까, 말하는 표정이 능구렁이가 따로 없다.  말은 이렇게 했어도 종대는 오늘 혼자가 아니라서 좋다고 살며시 생각해본다.  일주일에 레슨이 없는 화, 목요일에는 9시까지 야간 자습에 의무적으로 참여해야 해서 억지로라도 책상에 붙어 뭐라도 하며-주로 공부하는 김종인 구경하기, 김종인 교과서에 아프니까 빨리 방 가자고 낙서하기, 산만하다고 경수한테 욕 먹기 등- 시간을 보냈지만 그 외 월, 수, 금요일에는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방에서 홀로 보내고 있었다.  야자를 해도 되지만 원래 안 해도 되는 걸 굳이 참여할 만큼 공부에 의욕이 있는 학생은 전혀 아니다.  물론, 계속 병원에 가서 물리치료를 받아야 했지만 팔 전체를 고정했던 깁스도 푸르고(지금은 두손가락 따로 고정 붕대 신세, 세훈이 왕손가락이라고 놀렸다) 다친 지 한 달이 넘어가자 그마저도 횟수가 줄었다.  초등학생 때부터 하기 싫다, 하기싫다 입에 달고 살았지만 막상 진짜로 피아노를 못 치게 되니 여간 좀이 쑤시는 게 아니다.  격렬하게 쾅쾅 베토벤 치고 싶다.  부드럽고 유연했던 제 손가락이 한 달 만에 기름칠이 필요한 고물이 되어 버린 것 같다.  이대로 피아노를 못 치게 되는 건 아닐까, 쓸데없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건 아마도 시간이 남아 돌아서일 것이다.  아니면 이 덥고 습하고 우중충한 날씨 탓이거나.

 



“백현아, 넌 왜 첼로 하는 거야?”


“잘하니까.”

 



나 바이올린도 하고 콘트라베이스도 하고 다 잘해, 만화책에 시선을 고정한 채 심드렁하게 잘난 척을 해와서 종대는 주먹을 쥐었다.  진지하게 물어본 거란 말이야.  씨익- 웃으면서 몸을 비스듬히 세워 그제서야 시선이 마주쳤다.

 



“처음엔 엄마가 하라니까 했는데 지금은 재미있어.”

 



그러고 보니 백현은 종대와 여러 가지로 비슷한 게 많다.  직접 음악을 하시거나 음악 관련된 직종을 가진 부모님, 그들에게서 물려받은 음악적 재능과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받게 된 체계적인 교육까지.

 



“맨날 똑같은데 재미있어?"


“매일 다른 생각으로 하거든.”

 



백현이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종대의 책상으로 향한다.  이거 써도 돼?  


 
 

노트와 펜을 가지고 엎드리더니 낙서하듯 울퉁불퉁한 선을 그려댄다.

 



“이거 보면 뭐가 떠올라?”


“음.. 심장 박동인가?”


“그것도 좋은데? 작년에 난 이런 그림을 보고 사람의 심리 상태라고 생각했어, 그리고 첼로에 대입했지.  쉽게 말하면 심리 상태에 알맞은 첼로 음을 발견해내는 거야. 기분의 밸런스를 첼로 음으로 맞출 수있게..”


“잠깐만! 누구세요? 당신 누군데 우리 백현이 몸에 들어온 거야? 외계인입니까?”


“큭, 내가 이런 사람이라고~”

 



장난스럽게 웃는 그를 따라 웃어버렸지만 종대는 낙서가 그려진 종이를 문지르며 저도 모르게 대단하네, 중얼거렸다.  이건 진짜 천재 아냐?  백현은 저가 이번에 기숙사 OT 전에 프라하에 갔다 온 것도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그 곳에 있는 심리학 박사를 만나고 온 것이라고 했다.  ‘체코어는 당연히 통역 알바 썼지.’라고 묻지도 않은 쓸데없는 말을 덧붙여서 천재성 -20%

 



“이런 비슷한 연구했던 박사가 있길래 내가 계속 메일 보냈었거든, 요즘도 계속 녹음해서 보내는 중이고.”


“난 네가 그냥 미친 또라인 줄 알았는데, 천재성 때문이었구나..”


“칭찬인데 왜 기분이 더럽지?”

 



자꾸 대단하다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해냈을까?  진지하게 설명하는 백현에게서 첼로에 대한,아니 음악에 대한 애정이 담뿍 퍼져 나왔다.  종대는 그 애정에 매료되어 제 것을 잃고 만다.  붕대로 칭칭 감겨있는 두 손가락을 내려다보는 눈이 매몰차다.  약간 침울해져 버린 그를 눈치챈 백현이 코 앞까지 얼굴을 들이민다.

 



“다음엔 네 피아노로 해볼래, 같이 하자!”


“.. 그럴까?”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아주 무거웠다.

 

 




일요일, 시장배 배구대회 결승이있는 날이다.  자랑스럽게도 찬열과 세훈이 둘 다 출전하게 되어서 응원을 가기로 했다.  주말에 학교 밖으로 이렇게 다같이 나온 적은 처음인 것 같다.  시합이 열리는 종합체육관이 학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어 버스를 타기로했지만 다가오는 택시에 본능적으로 팔을 흔든 준면 덕분에 편히 가게 되었다.  손 때문에 실랑이를 벌이느라 뒤떨어져 걷고 있던 종인과 종대는 다음 택시 대기.

 



“너 때문에 기다려야 되잖아아, 더워 죽겠는데!”


“네가 자꾸 손 흔드니까 그렇지.”


“그럼 걸어가는데 손이 안 흔들리냐?”

 



요즘 부쩍 신경질적인 종대의 흔들리는 팔을 붙들었다가 된통 당하는 종인이다.  손가락이 부딪힐까 걱정하는 마음은 알겠는데 오늘은 정말 날이 아니다.  비는 그쳤지만 그 동안의 비를 머금어 축축한 바닥이 햇빛을 받아 뜨거운 김이 올라오는 느낌이 들었다.  종인이도 함께 그 땅을 밟고 서있어서 인지 평소 같지 않게 그럼 알아서 조심해, 라고 말하더니 앞에 선 택시에 먼저 몸을 실었다.  으이구, 김종대 너 왜 그랬어?  스스로를 다그친다.  천사 같은 룸메이트가 저러는 걸 보면 분명 제 잘못이 더 컸던 게다.  다행이 에어컨이 빵빵 작동되고 있는 럭키 택시!  창문만 보고 있는 종인이.

 



“화났어?”


“아니, 네가 화 났잖아.”

 



종대가 슬쩍 의자에 놓여 있는 손등을 다친 손가락으로 두드린다.  움찔-  그러면 안 된다고 말하고싶은 걸 참는 게 두 눈 가득 들어온다.  두어 번 더 그랬더니 종대의 손 위로 큰 손을 올려 움직이지 못하게 덮어버렸다.

 



“왕손가락 숨막혀요.”

 



창 밖을 보는 척 하면서 입을 가리고 웃는 게 보인다.  신경질 부려서 미안해, 근데 너도 잘못이 없진 않아.  아니, 이 날씨가 잘못이다.  밝은 조명이 쏟아지고 있는 체육관은 팽창하듯 몸을 움직이고 있는 이들에 의해 바깥의 열기와는 또 다른 열을 발산하고 있었다.  우리는 당연히 수많은 사람 중 둘에게 시선을 빼앗긴 채다.

 



“우와.. 배구하는 거 보니까 또 달리 보이네.”


“그러게요, 평소에도 저러고 있었으면.”

 



일찌감치 와서 그런지 선수들이 모두 연습에 열중하고 있다.  우리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며 관중석 아래로 다가왔다.  벌써부터 땀에 얼굴이 젖어 있었다.  찬열이 개처럼 머리를 털어 몇몇의 다리에 땀이 튀어 기어코 욕을 먹었다.  민석은 더럽다고 발길질.  오늘 내가 다 발라주겠어, 너스레를 떨며 웃는 찬열 옆 세훈은 조금 긴장한 모양이다.  고개를 끄덕거리지만 정신은 다른 곳에 가 있는 게 티가 났다.  헤프던 웃음이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다.  종대가 과자 봉지를 내밀지만 손을 젓는다.  네가 좋아하는 알새우칩인데.

 



“청심환 사다 줄까?”


“됐어, 지금 그거 먹으면 기절이야”

 



머리를 쓸어 올리는데 눈이 충혈되어 있는 게 보인다.  입술도 바짝 말라있고.  그러고 보니 대회나 시험 같은 것을 앞두고는 퍽 예민해지는 것 같다.  시험 전에는 건드리면 안 된다며 302호로 피신했던 찬열이 떠올랐다.  종대가 과자를 옆에 있는 종인에게 밀어놓고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낸다.  끙차, 코트 쪽으로 몸을 기울여 세훈의 입술께로 내려진 립밤.  그제서야 살며시 웃으며 미소를 지으며 까치발을 들어 입술을 내민다.

 



“잘하고 와~”

 



시합은 초반부터 긴장감이 넘쳤다.  결승답게 두 팀 모두 맹렬한 기세였다.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지르고 방방 뛰고 난리를 치다가 뒤에 앉아 계시던 한노신사 분께 꾸중을 들었다.  경수는 4세트에서 찬열이 활어처럼 튀어올라 처지고 있던 점수를 만회하자 ‘박찬열! 잘한다, 내 새끼!’라고 소리를 질러 비아냥을 샀다.  평소에는 쪽팔리니까 아는 척 하지 마, 라는 게 입 버릇이면서.  그만큼 경기장 위의 그들은 빛나 보였다.  저들뿐인 코트 위에서 힘내라며 악을 지르는 것도, 점수를 냈을 때 우르르 몰려 서로의 머리를 세게 문지르며 활짝 웃는 것도.  그리고 경기가 끝났을 때 아쉬움의 울음을 터뜨려버린 세훈을 세게 끌어안으며 찬열이 손바닥으로 담담하게 제 눈물을 땀처럼 닦아냈을 때 코가 찡해질 만큼 멋있었다.  피아노를 하면서 난 저렇게 뜨거운 눈물을 흘려본 적이 있나?  파도처럼 밀려오는 경외감이 지나간 후 종대에게 남은 것은 허우룩한 마음뿐.

 

 




오늘은 뭐할까, 고민하던 중 저녁을 먹고 서점에 다녀올 거라는 경수의 말에 종대가 얼른 ‘나도 갈래애!’ 따라붙었다.  세훈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담임이 외출증 끊어줬어?

 



“응, 바로 해주시던데.”


“와.. 저번에 민호랑 정수는 병원간다는데도 절대 안 해줌.”


“도경수라서 해주나 보네, 이 새끼 얼굴에 딱 써있잖아.  나쁜 짓은 하기 싫습니다, 라고.”


“숟가락으로 내가 때릴까, 아니면 네가 맞을래?”


“이 악마 새끼!”

 

 


경수가 책 냄새가 좋다고 말하며 서점 한 켠으로 걸음을 빨리 해 나아가길래 종대는 자연스럽게 그와 떨어져 악보들이 꽂혀있는 곳으로 흘러 들었다.  와, 이루마 꺼 많이 들어왔네.  그 악보 위로 오른손을 내려 손가락을 움직여 본다.  수없이 늘어선 까만 음표들이 그의 눈동자 안에서 음악이 된다.  3주만 더 기다려줘.

 



“뭐 보는 거야? 으엑, 이게 뭐야?”

 



종대의 질색에 경수가 웃으며 꼬부랑 글씨가 사정없이 들어차 있는 책을 덮어 옆구리에 낀다.

 



“이건 아직 한글 번역본이 없거든, 내가 해보려고.”

 



아, 경수 번역가가 꿈이랬나?  그의 책장에 꽂혀있던 헤진 원서 몇 권을 상기해내며 종대도 앞에 있는 원서들 중 아무거나 꺼내 펼쳤다가 서둘러 제자리에 꽂는다.  갑자기 어지러워졌다.  진중하게 책들을 꺼내 훑는 경수는 저를 기분 좋게 한다던 책 냄새와 참 잘 어울린다.

 



“번역가는 원서 해석해서 내는 그런 건가..?”


“그렇지, 뭐. 근데 단순히 해석한다기보다 작가의 의도와 최대한 일치하는 우리말을 찾아야겠지? 가끔 보면 엉터리인 것도 많거든.”

 



사랑스러운 표정이다.  저 책들 속에 그를 기쁘게 하는 세상이 있다.  번역가에 따라 글이 더 유려해 질 수도 있는데 그건 새로운 창작이지, 내가 생각하는 번역이 아니야.  책에 올곧게 내려졌던 시선을 거두면서 덧붙인다.  나는 독자에게 작품과 작가를 있는 그대로 스스로 판단할 기회를 주는 그런 번역가가 되고 싶어.  확고한 의사에 종대는 홀린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런데.. 만약, 만약에 안 되면?”

 



그런 꿈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너무 절망적인 걸, 미아가 되어버릴 거야.  그에게 동화되어 종대는 겁을 내고 있다.  피아니스트가 되지 못한다면, 나는?  경수가 글쎄, 라며 말 끝을 흐렸다.  이렇게 똑 부러지는 경수에게조차 어려운 것인데, 바보 같은 나는 어떡하지?

 



“안 돼도 상관없을 것 같은데? 직업이 아니라도 좋으면 계속 할 거니까.”

 



그렇게 말한 경수는 약간 쑥스러운 듯 ‘그리고 난 내가 한 거 재미있더라, 내가 내 팬이야. 재수없지?’ 키들거린다.  오늘따라 유난히 까만 경수의 눈동자에 별빛이 반짝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해가 졌는데도 공기 중 더위는 가시지 않는다.

 



“들어간다.”

 



학교로 돌아오자마자 경수는 방에도 들르지 않고 자습실로 들어갔다.  창문으로 이미 그 곳에 있던 종인과 속닥거리는 것이 보였다.  경수가 내 쪽을 가리키자 고개를 돌려 손을 흔드는데 저 바보.  또 코피가 났는지 코에 솜 뭉치 같은 게 삐져나와 있었다.  얼마 남지 않은 모의고사야말로 중요한 시험이라고 말했던 전교 4등 룸메이트에게 안 중요한 시험이 있긴 한지 묻고 싶어진다.  하긴, 모의고사는 전국구니까 더 중요하겠지.  공부를 열심히 한다는 건 이미 잘 알고 있었지만 정말 잘 하기까지 할 줄이야.  전교 4등이라니, 그 등수를 알았을 때 놀라기도 했지만 그가 자랑스러워 어쩔 줄 몰랐다는 건 서로 말하지 않아도 알 수가 있다.  다섯 모두 ‘여러분, 전교 4등 김종인이 제 친구에요! 짱 친하다고요!’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공부도 해야 되는데에.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힘없는 발걸음은 자습실이 아닌 제 방으로 향한다.  종인은 11시가 넘어서야 방으로돌아왔다.  신발을 벗으면서 바닥에 드러누워 자고 있는 종대에게 피곤한 시선을 내린다.  또 너무 늦었나?  생각하며 콧등을 긁적-  그냥 자게 두고 싶지만 어제도 까먹고 늦게 돌아와서 머리를 감겨주지 못 했다.  아침에 거울 앞에서 떡진 머리 때문에 짜증을 냈던 것이 신경 쓰인다.

 



“김종대, 일어나.  머리 감고 자자.”

 



부스스 눈을 뜨더니 두 팔을 뻗는다.  거의 끌려가다시피 화장실로 옮겨졌다.  수건을 티셔츠 목에 넣어 둘러주는 손에 한없이 기대버리고 싶은 충동이 생겼지만 곧바로 머리를 누르고 샤워기를 들이밀어 그저 충동으로 그쳤다.  조물조물 제 머리를 문지르는 손, 나른함에 저절로 눈이 감긴다.  너무 능숙한 손길에 놀라 왜 이렇게 잘하냐고 물었을 때, 그는 ‘그냥, 뭐.’라고 얼버무렸었다.  가끔 얘기하는 그 여동생 때문에 잘하나?  근데 김종인 맨날 그냥이라고 대답하더라, 그냥이라고 할 때마다 입을 때려버릴까?  생각해보면 못 하는 게 없어, 얼굴도 잘 생기고 공부도 잘 하고 착하고 살림도 왠지 잘할 것 같단 말이야.  1등 신랑감이 따로 없네.  아, 그 때 그 여자애 설마 김종인한테 반한 거 아냐?  이런 저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수건이 머리에 감싸졌다.

 



“내일 병원 가?”


“응.”

 



불을 끄고 눕더니 종인이 빨리 가을 됐으면 좋겠다, 라고 중얼거렸다.  종대는 그의 말이 너무 뜬금없게 느껴진 나머지 헛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갑자기 왜?”


“네가 여름 너무 싫어하는 것 같아서.”


“내가? 아닌데, 나 여름 짱 좋은데?”


“덥다고 맨날 짜증부리면서.”

 



곰돌이 룸메이트가 투덜거리는 게 귀여워서 종대가 크게 웃어버린다.  그런 게 아니라고 변명했지만 돌이켜보면 기분이 요즘 날씨만큼이나 더럽다.  괜히 종인에게까지 화풀이를 한 것 같아 미안해진 종대가 그의 어깨에 이마를 기댄다.  고된 하루에 녹초가 된 종인이 금방 잠에 들었다.  모두가 이렇게 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는데 늘 저만 제자리 걸음이다.  어슴푸레한 어둠 속에 종대는 벽 쪽으로 돌아누웠다.  심해로 가라앉는 끊어진 닻처럼 처량한 마음.  우주의 먼지처럼 보잘것없는 저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 가슴 속이 뜨겁다.  이런 슬픔에도 기다려주지 않고 다가오는 내일이 두렵다.  그의 기다란 속눈썹이 닿아있는 이불에 습기가 어렸다.

 

 




병원을 나오니 7시 반, 해가 길어져 밤하늘이 잿빛이다.  언제부터 피아노를 칠 수 있냐는 저의 물음에 의사 선생님은 아직은 안 된다고 하셨다.  그리고 또래 사내 애들과 달리 관리를 잘 한다는 말씀을 덧붙이셨다.  괜히 찔린다.  그 관리는 저가 아닌 종인이 해준다는 것을 들킨 것처럼 얼버무렸다.

 



‘저기.. 나중에 피아노 칠 때문제 생기고 그런 건.. 없겠죠?


‘뼈도 잘 붙고 있고 그런 걱정 할 정도는 아니니까 관리만 지금처럼 잘 해줘요, 물리 치료는 고정 빼고 난 뒤에도 와야 되고.'


‘아, 네.  감사합니다.'


‘피아노 아주 좋아하나 보네? 걱정이많은 거 보니.’

 



그래도 다른 사람 눈에는 내가 피아노 좋아하는 걸로 보이나 보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나같이 책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습실을 지나가는데 마침 종인이가 창문을 쳐다봤다.  저를 보자마자 몸을 일으키더니 앞쪽으로 가 선생님께 뭐라고 하고 문 쪽으로 오는 게 보인다.  화장실 가려나?

 



“병원 갔다 오는 거야? 뭐래?”


“잘 붙고 있대, 관리 잘한다고 칭찬받았다아.”

 



네 덕분이야, 라는 말은 차마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그 동안 과잉 보호라며 귀찮게 하지 말라고 말했던 것들이 미안해져서.

 



“근데 왜 나왔어, 화장실 가게?”


“아니, 나 또 집중이 안 돼서.. 너랑 방 가서 좀 쉬게.”

 



방에 들어오자마자 종인이 침대로 몸을 던진다.  가방을 내리고 그 옆에 누웠다.  이 시간에 종인과 방에 있는 건 꽤 오랜만이다.  감겨있는 눈 아래가 거무스름한 게, 정말 피곤해 보인다.

 



“피아노 언제부터 칠 수 있어?”


“어? 음, 한 3주 뒤?”


“3주? 하아..”

 



저 한숨의 의미는 무엇이란 말인가?  종대가 떨떠름하게 종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챙겨주기 귀찮다는 나쁜 의미의 한숨일까 잔뜩 긴장해버리고 만다.  하긴, 밥 먹을 때도 다 치워주고 늦게까지 공부하고 와서 머리도 감겨주고..  나쁜 의미라고 해도 딱히 할 말이 없는 저이다.  의기소침한 채, 이유를 물었다.  사실 겁이 나서 묻고 싶지 않았는데 급격히 조용해진 302호에 저절로 목소리가 나왔다.

 



“네가 치는 피아노 듣고 싶어.”


“왜?”

 



제 예상을 완전히 벗어난 대답에 또 다시 저절로 입이 열렸다.  천천히 떠진 눈이 종대에게로 향하더니 비스듬히 팔을 괴어 내려다본다.

 



“진짜 신기하거든, 그거.”

 



말하는 목소리가 조금 신난 것처럼 들렸고 눈동자는 웃음에 묻혀 있다.  쑥스럽다는 듯이 콧등을 긁적이는 것도 빼놓지 않았다.

 



“네가 『달빛』을 칠 때, 시간이 멈춘 것처럼.. 그러니까 그냥 너무.. 안심이 돼. 다 괜찮다고 말하는 것 같이..”

 



가슴 속이 푹신푹신한 솜사탕 같은 것으로 가득 차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렇게 말해주는 사람이 필요했다.  저가 피아노를 소중하게 여길 수 있도록 말해주는 사람이.  지금 어떤 말도 함부로 꺼내지 않을 것이다.  가슴으로 느끼는 오롯한 감정들이 흩어져 버릴까 봐, 조금 더 품에 안고 있고 싶어서 그렇게 할 것이다.  종대의 벅찬 마음을 알 리 없는 종인은 그의 아픈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손을 뻗는다.  그러더니 제 입가로 가져가 그것들에 속삭여왔다.

 



“그러니까 빨리 나아라, 왕손가락들아.”

 



종대는 울고 싶은 마음과 웃고 싶은 마음 속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며 결국 이도 저도 아닌 해괴한 표정을 지은 채 종인의 가슴팍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저에게 피아노만큼 사랑스러워져 버리는 이를 어떡하면 좋을까?

 



“이 미친 놈아아, 으어엉! 넌 도대체.. 흐윽 왜 그래애!”

 



갑자기 울음이 터진 종대에 당황한 나머지 종인이 허둥지둥 몸을 일으켰다.  ‘내가 그런 거야? 아팠어?’하고 바보처럼 묻고 있다.  휴지를 찾던 종인의 코에서 피가 흐른다.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는데,

 



“으아, 너, 너 코피 나잖아! 흑, 휴지를 왜 날 줘! 너부터 해, 이 병신아아! 으엉, 엄마아~”

 

 


 
 

여러 날을 살다 보면 꿈에 설레는 때도 있고 두려운 때도 있다.

꿈이 두려울 때, 우리는 길을잃기도 한다.  하지만 잠시 길을 잃더라도 잊어서는 안 된다.

꿈을 사랑하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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