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Tell Me ㉮

 

 


 
 

인생은 관계의 연속이라는 말이 있다.  

사람에 따라 이 관계에 격렬히 맞서거나 물 흐르듯 순응하거나 아예 저버리기도한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셋 중어떤 사람이라도 치열하지 않은 이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여기, 어느 누구보다 치열하게 관계에 얽혀있는 청춘들이 있다.

 

 

수업 내내 배고프다고 칭얼대던 백현이 쉬는 시간이 되자마자 교실을 뛰쳐나갔다.  졸음 가득한 눈으로 주위를 한번 둘러보고는 종대도 몸을 일으킨다.  11반에 들어서자 보이는 나란한 종인이와 경수.  가까이 가보니 둘이 사이 좋게 이어폰을 나눠 낀 채다.  종인이의 CD 플레이어가 책상위에 얹어져 있다.  이 CD 플레이어는 종인이의 애정이어린 만큼 많이 낡아있다.  처음 봤을 때 조선시대 유물이냐며 놀렸지만(CD플레이어인지도 나중에 알았다) 종인이는 그저 그것을 살살 매만지면서 ‘선물받은 거라서, 난 이게 좋아.’라고 말했다.  그 때의 표정으로 종인이가 얼마나 아끼는 것인지 알 수 있었다.  무슨 곡을 듣고 있는지는 모른다.  지금 경수가 저도 모르는 그것들을 종인과 공유하고 있다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조금 서운해졌다.

종대의 속눈썹이 아래로 처진다.  종인이 뒤 비어있는 세훈의 자리에 가만히 앉아 손으로 뒷목을 툭- 건드렸다.

 



“왔어?”

 



이어폰을 빼며 뒤돌아보기에 종대는 얼른 손을 내밀었다.  나도 들어볼래.  순순히 제 손에 들어온 이어폰을 얼른 귀로 가져간다.  응?  이건.. 쇼팽?  가요나 팝송 같은 음악이 흘러나올 줄 알았던 그 속에서 아름다운 선율의 피아노곡이 춤을 추고 있었다.  종인이가 피아노 곡을 듣고 있었다니!  종대의 입 꼬리가 깊이 패였다.  극과 극처럼 다른 저희에게서 뜻하지 못한 공통점을 찾은 것에, 그게 종대에게 소중한 ‘피아노’라는 사실이 기뻤다.  단숨에 비누 방울처럼 두둥실 떠오르는 기분이 된 종대가 소리쳤다.

 



“쇼팽이잖아, 녹턴 1번!”


“특기생은 다르네, 종대 멋있다.  난 이런 거 하나도 모르는데.”

 



경수의 칭찬에 당연하지이, 잔뜩신이 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 이거 칠 수 있어!

 



“너 피아노 특기생이야?”

 



그 사이에 끼어든 바보 같은 물음에 저보다 더 놀란 것은 경수처럼 보였다.  귀여운 모양의 입술이 일그러져 있었다.  안절부절 못하는 표정이 되어 302호의 둘을 번갈아 본다.  종대는 종인이 저를 놀리려고 저렇게 물을 애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너무 잘 알아서 삽시간에 굳어진 얼굴을 되돌릴 수가 없다.  평소에 볼 수 없던 그 표정을 마주한 종인과 경수는 함부로 입을 열 수도 없었다.  직접적으로 물어온 적은 없었지만.. 이건 너무하잖아.  두 달이 넘도록 연습실에 간다는 말에 무슨 연습이냐고 물은 적이 없긴 했다.  하지만 책상만 봐도 악보며, 피아노 관련 서적 천지인데.  조심스럽게 왜 그러냐고 묻는 종인과 제 눈치를 살피는 경수에게 어떤 표정으로 어떤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갈피를 잡지 못한 종대가 급히 몸을 일으켰다.

 



“종 치겠다, 나 갈게.”

 



도망치 듯 그들의 교실을 빠져 나왔다.  어렸을 적 고사리 손으로 힘겹게 세운 도미노를 형이 미운 손가락 하나로 무너뜨렸을때처럼 절망적이라면 적절한 비교일까?  종대가 책상에 팔을 괴고 엎드렸다.  제 기분을 다 알아챘을 경수 앞에서 종인이에게 하찮은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 너무 슬펐다.  그리고 그것이 진짜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더 슬퍼졌다.  처음으로 종인이가 싫다고 생각했다.

 

 

 

 


“종인아, 종대 피아노 하는 거 몰랐어?”


“응..”


“왜?”


“그냥.. 물어볼 생각을 못 했어..”

 



빤히 쳐다보는 눈길에 종인은 내가 잘못한 거 알아.  들릴락 말락 작은 목소리였다.  경수에게 혼나는 기분에 약간 고개를 숙인다.  말투와 표정은 다름이 없었으나 저와 마주친 눈빛에 단호함이 깃들어 있었다.

 



“내가 종대였으면 기분 안 좋을 거야.”


“화 많이 났을까..”


“아마도.”

 



평소 종인은 타인의 눈치를 적게 보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항상 눈치를 본다는 말이다.  혹시 저를 이상하게 생각하진 않을지, 저때문에 기분이 상하진 않을지 전전긍긍.  그건 언제부터인가 제 안에서 활화산처럼 존재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누구도 알아줄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곁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불편했다.  가까워질수록 더 그랬다.  그 사람이 언제 변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감내하는 것은 종인에게 벅찬 일이었다.  멋대로 그려놓은 선 앞에서 돌아서던 숱한 사람들.  그런데 종대는 조금 달랐다.  이것 좀 지워줘, 지나가고 싶단 말이야!  선을 밟고 서 계속 보채는 바람에 어느 샌가 그 부분만 닳아져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다른 사람들과 달리 쉽게 사라지지 않을 거라고 믿어버린 걸까?  상처받는 건 늘 종인이의 몫이었는데 종대에게 상처를 줘버렸다.  경수는 시무룩해진 종인을 들여다보며 고개를 숙여 웃었다.  저런 표정도 지을 줄 아네.  사진 찍어서 애들 보여주고 싶다.  한달 치 놀림감인데, 아깝네.  입술이 댓발 나와 갖곤 큰 한숨을 연거푸 뱉고 있다. 

 

 

9시 종이 울리자마자 가방에 책이며 펜이며 쓸어 담았다.  경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꾹 참으며 모르는 척 왜 벌써 가냐고 묻지만 그는 정신 없이 어어어, 공부가 안돼.  빠르게 시야에서 사라진다.  그래도 종대가 중요하긴 한가 보네, 김종인이 자습도 빼고 저렇게 뛰쳐나가는 거 보면.

 


종인은 방에 불이 꺼져 있는 것을 확인하고 욕을 읊조렸다.  혹시나 싶어 306호의 문을 두드렸지만 역시 답이 없다.  둘은 훈련 시간일 거다.  312호에서 백현이 ‘문 뿌서져, 새끼야~’라며 슬리퍼를 끌고 나왔다.

 



“종대는?”


“네 룸메를 왜 내 방에서 찾아?”


“저녁 먹고 어디 간다고 안 했어?”


“안 알랴~줌.”


“장난하지 말고.”


“몰라, 먹고 싶대서 오징어땅콩 사줬더니 땅콩만 뱉어놓고 튐.” 

 



백현의 어깨를 두드린 종인이 황급히 몸을 돌린다.  우당탕쿵쾅 사라지는 뒷모습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  쟤가 저렇게 난동을 피우다니, 벌써 우리한테 물들었나 봐.  감동.  한 인간을 변화시킨 나란 존재, 자랑스럽다.

 


종대가 갈만한 마지막 한 군데.  연습실.  하지만 어디인지 모른다.  종인은 스스로가 한심해 입술을 깨물었다.  교무실에서 피아노 연습실의 위치를 알아낸 종인이 바깥으로 나왔다.  본관과 신관(기숙사 건물)에서 떨어져 있는 별관에 있다는 피아노 연습실.  어두운 길목 가운데에서 이제서야 깨달았다.  밤 늦게까지 연습이 있을 때면 문을 부실 듯 뛰어들어오면서 아씨, 짱 무서워! 했던 것, 가끔 손목에 붙어있던 파스들.  그리고, 좋아하는 노래가 있으면 말해달라고 했던 일..  걸음은 쉬지 않은 채 시큰거리는 눈 아래를 손등으로 꾹 눌렀다.  흰 티에 땀이 스며들어 차갑게 종인의 몸에 달라붙었다.  종인은 알까?  항상 피하기만 했던 자신이 지금 얼마나 필사적인지.  힘겹게 찾아낸 소중한 것들을 잃지 않으려고 얼마나 아등바등인지  종대와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처음부터, 항상 먼저 다가와줬는데.  경수, 찬열이와 세훈이, 백현이, 형들까지 모두 종대가 아니었다면..  모든 것이 그가 아니었다면..

 




 

4-1. Tell Me ㉯

 

 


연습실의 작은 창을 들여다보며 쉽게 종대를 찾아낸 종인이 문 손잡이에 손을 올린 채 숨을 고른다.엎드려있는 뒷모습.  자는 걸까?  우선 사과부터 해야겠지, 어떤 단어로 어떤 말을 해야 목구멍을 뜨겁게 하는 이 마음을 전할 수 있을까.  관심이 없던 게 아니라 그저 함께하는 매일에 너에게만은 나태해져 버린 제 잘못임을.  너라는 사람이 처음이라 서투르게 할퀴어버린 것을.  젠장.  용서해주지 않으면 어떡해.  정리되지 않는 말들이 머릿속에 뒤죽박죽.  하지만, 명확한 것은 종인이 바라는 한 가지.  종대가 다시 저에게 웃어주길.  조심스럽게 문이 열렸다.  피아노 위 팔베개를 한 채 잠에 빠져 있다.  자는데도 입 꼬리는 올라가 있어.  그런데 오늘 저가 짓게 한 표정에선 이 입 꼬리마저 슬퍼 보였다.  손을 뻗어 긴 속눈썹을 건드리자 움찔- 뜨인 눈을 몇 번 느리게 깜빡거린다.

 



“어? 음.. 종인이? 여긴 왜 왔어어.”

 



눈을 비비고 기지개를 펴며 평소와 똑같이 종인에게 말을 붙인다.  벌써 화 풀렸나?  종인이 갈피를 잡지 못한 채 눈을 굴린다.  몸이 바짝 긴장한 채여서 뒷목이 시큰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데리러 온 거야? 오~ 잠깐만, 이것만 넣고 가자.”

 



흐트러진 악보를 한 장 한 장 정리하며 가방을 챙긴다.  302호로 돌아가는 길에서 종대는 평소와 똑같이 재잘거렸다.  보충 시간에 찬열이가 보낸 엽사 때문에 웃겨서 혼날 뻔 했다는 이야기, 백현이 잇몸에 박힌 생선 가시를 저가 빼줬다는 이야기 등.  그런 그를 곁눈질하며 종인의 입 안에서 괜찮아? 라는 물음이 맴돌기만 한다.  기숙사 건물에 거의 다다랐을 때 종인이 종대의 손목을 붙잡았다.  깜짝이야!

 



“얘기 좀 하자.”

 



응?  종대가 고개를 갸우뚱거렸지만 곧 앞서 걸어가는 종인의 뒤를 따랐다.  그의 손을 따라 제 손목으로 습기가 스민다.  둘은 벤치에 앉았다.  한참 동안 서로 아무 말이 없다.

 



“화났어..?”


“음? 어어.. 솔직히? 아까는.” 


“….. 지금은 풀렸어..?”


“응.. 아까는 너무 서운했다? 난 그래도 우리가 세달 동안 많이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나 혼자만 그랬나 싶구우..”

 



종대는 힐끔 옆에 떨어져 앉아 있는 룸메이트를 쳐다보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그렇게 넘어가려 했던 제 계획이 종인에 의해 틀어질 줄은 몰랐다.  평소처럼 종대가 결정한 대로 ‘아까 일은 묻어두기’에 말없이 동참할 것 같았던 그가 너무도 무거운 표정으로 ‘그냥 넘어갈 수 없어’를 선택한 건 정말 의외의 일이다.  조금 당황해 버렸다.  이 참에 대판 싸워버릴까!?  그럼지금 체한 것처럼 답답한 속이 조금 괜찮아질까?  근데 그러다가 진짜로 종인이랑 나빠지면 어떡해.

 



“근데! 이제 괜찮아.  음..너랑 나랑은 생각도 다르고 계속 생각해 보니까 그냥 그럴 수도 있겠다, 싶기도 하구.. 넌 그렇구나, 하고 이해가 되더라고.”

 



내가 어떤데.  낮은 물음에 종대는 고개를 틀었다.  이것도 예상치 못한 것인데.  종인이 피하지 않고 빤히 눈을 마주쳐온다.  누가 보면 네가 화난 줄 알겠다, 이놈아.  종대가 바닥으로 눈길을 피했다.

 



“남한테 별로 관심 없고, 남이 관심 없길 바라는 애.”

 



종대답지 않은 독설이다.  하지만, 그 말 끝에 감출수 없는 서운함이 잔뜩 묻어 있다.

 



“… 지마..”

 



너무 작은 목소리여서 잘 들리지 않았다.

 



“내가 잘못했어, 그렇게 생각하지마..”

 



종대가 뭐라 입을 떼기도 전에 종인의 말이 이어졌다.

 



“난 그냥.. 이렇게 편한 건 네가 처음이었어. 그래서.. 아..그러니까 계속 내 옆에 있으니까.. 처음에 물어보려고 했는데 타이밍을 놓치고.. 근데, 매일 같이 있으니까 언제든 상관없다고 생각했어. 근데, 그건 내가 잘못 생각한 거야. 그러니까..”

 



종인답지 않은 횡설수설이다.  하지만, 그 말 끝에 절절한 마음이 잔뜩 묻어 있다.  잠시 놀란 토끼 눈이 되었던 종대가 올라가는 입 꼬리를 붙잡으려 입술을 꾹 깨물었다.  나도 지금 너한테 조금은 가까운 사람이라고 말하는 거야?  맞아?

 



“그러니까.. 날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마, 앞으론 절대 이런 일 없을 거야.. 절대로.. 안 할게, 그러니까..”


“아, 그래서! 결론이 뭐야아아.”


“다시 웃어줘.”

 



아까부터 한번도 안 웃잖아, 라는 말을 내뱉은 입술이 우는 아이처럼 떨리는 게 보였다.  손을 마주한 채 불안해 보이는 모습.  그게 뭐냐, 바보.  종대는 종인이를 끌어안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다.  도리어 자신이 별 것도 아닌 걸로 그를 미안하게 만들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무것도 아닌 말들이 내뱉어졌다는 이유만으로 그들 사이의 빈 곳을 메운다.  우린 같은 마음인데, 다른 방식으로 말할 뿐이야.  아까 제 가슴에 열렬히 쏟아지던 폭풍우 같은 감정은 어디로 사라져버린 걸까?  너무도 쉽게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버린다.  지금 제 앞에서 그가 짓고 있는 표정, 진실한 눈빛, 떨리는 손길 때문에.  우리 언제부터 이렇게 서로가 당연해졌더라?

 



“칫.. 사회 숙제 대신 해주면 웃을게.”


“… 진짜? 그거면 돼?”

 



아까는 그렇게 무서운 표정이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천진하게 묻고 있다.  고개를 크게 끄덕거리면서 다 해줄게!  어둠이 짙은 학교 아래 벤치에 오래도록 종대의 웃음이 앉아 있었다.  둘이 찰싹 달라붙어 기숙사로 발길을 옮긴다.  발걸음마저 맞추는 그들.  이렇게 쉽게 화해한 걸 알면 경수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종인의 티셔츠 끝을 붙잡고 졸졸 걸으며,




"김종인, 너 국어는 못 하지?  아까 어, 근데, 그러니까, 음, 아, 그게, 이게 무슨 말이냐?"


"뭐가. 시끄러워."


"코 긁지 말고오!  솔직히 말해봐, 이 엉아가 절교하자고 할까 봐 쫄았지?"


"시끄럽다고 했다."


"히히, 네가 싫다고 해도 쭈우욱~ 붙어있을 건뎅!"


"아, 옷 늘어나!"


"말 돌리냐? 엉? 또 말해봐아, 내가 잘못했어! 웃어줘!"


"그만 해, 진짜.."


"그럼 나 안 웃을래."


"... 아.. 내가 잘못했.."


"크흑.. 바보냐! 아, 진짜 귀여워 죽겠다아!"


 

 

 

 

4-2. 시험 기간

 

 


 
 

따뜻한 바람에 꽃잎이 흩날려 공기마저 분홍으로 물든 5월 초 어느 봄날, 코치님이 갈고리로 떨어진 꽃잎들을 긁으며 꽃나무는 도대체 왜 심는거냐고 투덜거리셨지만 운동장을 내달리는 이들은 여느 때보다 기분이 좋아 보인다.  찬열이 일부러 옆에서 헉헉거리는 세훈의 어깨에 제 몸을 부딪힌다.  발길질을 했지만 혀를 내밀며 앞으로 치고 나가버려 닿지 않았다.  아오, 어제 한 시간만더 잤어도 저걸 그냥!  이마 위로 송골송골 맺힌 땀을 지워주는 바람이 시원하다.  꽃 위에서 낮잠이나 잤으면 소원이 없겠다.

 

 

샤워를 하고 나오니 자습이 끝나 부랴부랴 집으로 돌아가려는 애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흰 꽃송이 때문에 한밤이 밝다.  덜 마른 머리카락을 손  으로 털며 그 애들과 반대쪽으로 몸을 틀었다.  배고파 뒤지겠네.  멍하게 걷고 있는데 별관 옆에 익숙한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찬열이 쪼그리고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다.  미친 새끼..  이젠 대놓고 피네.  돌았네, 돌았어.  달려가서 머리를 세게 내리쳤다.

 



“미친 놈아! 여기서 담배.. 가 아니네.”

 



저를 올려다보는 눈이 이글이글.  사탕이 없었다면 저 입에서 틀림없이 지옥의 언어가 튀어나오고 있었을거다.  괜히 샐쭉- 웃으며 나 기다린 거야? 라고 물었다.  세훈이의 애교 작전.  뒤질래?  실패.

 



“아, 일어나! 졸라 배고파! 컵라면이나 땡기자, 내가 쏠게.”


“넌 고집이 센 거냐, 아님 멍청한 거냐.”


“지금 배고파서 못 싸워, 먹고 싸우자. 엉? 가자고~”


“그냥 하지 말라면 안하고 욕하면 죄송하다고 하면 넘어갈 걸, 왜 대들어!”

 



어물쩍 컵라면 회유 작전을 써보지만 씨알도 안 먹히는 걸 보니 단단히 화가 났나 보다.  훈련 중간 쉬는 시간에 교과서를 펼쳤다가 평소 세훈의 신경 긁기가 특기인 선배 한 명이 오늘도 어김없이 그를 걸고 넘어졌다.  ‘시험은 잘 보고 싶냐? 시합은 망쳐놓고 네가 이 따위로 하니까 다 흔들리는 거 아니야!’ 저번 시합에 공 한번 삐끗한 걸로 계속 괜한 트집을 잡히고 있었다.  오늘도 찬열이 끼어들어 넉살 좋게 그 선배를 달래었지만 날이 좋지 않았다.  며칠째 고된 훈련에 새벽 공부까지 강행하던 세훈은 예민함이 극에 달해 있었다.  평소였다면 찬열에게 고마워서라도 가만히 있었겠지만 오늘은 그럴 수가 없었다.  짜증스러운 욕지거리가 마음대로 입 밖으로 튀어나간 것이다.  그가 끝내 고개를 숙이지 않아 결국 길길이 날뛰던 선배에게 종아리를 몇 대 차였고 훈련이 끝난 후에는 하극상이라는 죄목으로 홀로 남아 기합을 받았다.

 



“그만해, 나 오늘 진짜 피곤해. 컵라면이나 먹자니까.”


“안 먹어! 네가 그딴 식으로 하니까 그 새끼가 더 그러는 거 아냐!”

 



내 고막 무사하니?  쩌렁쩌렁한 찬열의 목소리에 지나가던 애들이 다 우릴 구경한다.  끄덕끄덕 로봇처럼 계속 고개를 끄덕끄덕거렸다.  다음부턴 그러지 말라느니, 공부도 때려치우라느니 헛소리도 정성스럽게 하는 룸메이트.  하지만 세훈은 안다.  왜 지금 이렇게 찬열이 듣기 싫은 소리를 늘어놓는지.  다 절 걱정하는 마음이 커서 그렇다.  기합을 받는 절 두고 나가는 큰 눈에 걱정이 한 가득 담겨있는 걸 봤다.  착해 빠져가지고.

 



“씨발! 알았어?”


“네.”


“그래? 그럼 컵라면 먹으러 가자. 나쁜 새끼야.”

 



그냥 걱정된다고 한마디 할 것이지.  봄 같은 웃음이다.  세훈이 여전히 씩씩거리는 그의 어깨에 팔을 걸며 다리 아파 죽겠어, 칭얼거리자 찬열은 잘됐다고 비웃는다.  그러더니,

 



“들어가서 내 꺼 얼음 팩 해줄게, 컵라면 두 개 사.”

 

 

 

 


경수는 책에서 시선을 뗐다.  그래도 시험 기간이라고 자습에 따라와 이것저것 펼쳐놓고 집중을 하더니 어느새 꾸벅꾸벅-

 제 눈 앞에서 책상에 머리를 찧을 듯 크게 흔들리는 룸메이트의 머리통.  집중이 깨진다.  그냥 엎드려서 잘 것이지, 왜 저래.  그러다 갑자기 몸을 크게 떨고 눈을 반짝 뜬다.  입을 가리고 소리 없이 웃는 절 보더니 얼굴이 빨개져서는 입 모양으로 욕을 했다.  이번엔 주위를 한번 둘러보더니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한다.  갑자기 저까지 졸린 느낌이다.  슥-  경수의 책 위로 그어진 선.  그의 눈썹이 꿈틀- 하더니얼른 지우개로 지워버린다.  슥-  또 지운다.  슥-  따끔한 눈총을 받고 나서야 실실 웃으면서 안 하겠다는 표시로 손바닥을 보인다.  하지만, 시선을 거두자마자 스슥-  이번에는 선이 아니다.

 
 

미친 놈.  징그러워.  지우개를 집는데 책상 아래 제 무릎 위로 발 하나가 자리를 잡는다.  같이 앉은 내가 등신이지.  꿈틀거리는 경수의 눈썹에도 강아지처럼 웃고 있다.  샤프로 발가락을 찔렀더니 그 때서야 ‘아!’, 입을 막으며 발도 제 자리를 찾아갔다.  이제 경수 괴롭히기에는 흥미가 떨어졌는지 핸드폰을 꺼내 든다.  저러다 뺏기지, 고개를 저었는데입 모양으로 말을 걸어온다.  핸드폰 봐.

 

* I 고 기숙사 자율 학습실은 9시까지 강제 참여, 이후에는 자유 참여입니다. 
* I 고 기숙사 자율 학습실은 9시까지 강제 참여, 이후에는 자유 참여입니다. 

 

조심스럽게 자습실 문이 닫히자마자 백현은 호들갑스럽게 숨을 몰아 쉰다.


 

 

“졸라 답답해 죽는 줄, 후~ 하~”


“내일부터는 내 앞에 앉지마, 내 인생 망해.”


“걱정 마, 우리 경수는 엉아가 비서로 써줄 테니까.”


“너 뭐 할건데? 첼리스트 할 거 아니야?”


“나 첼로 연주하는 대통령.”


“어, 그래.”


“아아, 졸라 얄미워! 입술 한 대만 때려보자, 우리 경수. 응?”


“건드리면 죽는다.”

 

 




조용히 시험 기간을 맞은 211호의한 쪽 책상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책상 벽에 가로막혀 있지만 마주 보고 있는 듯 서로의 동선에 훤한 그들이다.

 



“사탕 좀 그만 먹어라.”


“넌 게임 좀 그만 하고.”


“어떻게 알았어?”


“네 주둥이는 게임 할 때만 조용해.”


“너무해!”

 



준면이 기지개를 펴며 몸을 일으켰다.  발 아래에 걸리적거리는 것들.  에너지 음료와 커피, 과자 봉지들이 어지럽게 깔려있다.  마치 경계를 나눈 듯이 준면의 공간만 그렇다.  큰일났다, 이따가 이거 보면 또 잔소리 폭격 당할 게 분명해!  하지만, 치울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까치발로 그 사이 사이의 바닥을 걸어 현관에 다다른다.

 



“어디 가?”


“교무실 가서 탄산수 훔쳐오게.”


“또? 학생회장이 잘하는 짓이다.”


“이러려고 된 거야.”


“탄핵해야 돼.”

 



어차피 학생회장이 누군지 관심도 없는데, 라고 대꾸하는 준면의 표정이 즐거워 보인다.  그렇다, 사실 준면은 작년에 선출된 학생회장이다.  선생님들과 학생회에서는 나름 인정받는 멋있는 회장님이지만 학교에 크게 관심이 없는 아이들은 이 사실을 잘 모르는 게 보통이었다.  입학식에서 축하 연설도 했었는데, 신입생들의 긴장에 묻혀 전혀 기억에 남지 못 했다.  심지어 기숙사 OT에서 민석을 도와주면서 부기숙사장이라고 소개했더니 철썩 같이 믿어버려서 사실 마음이 조금 쓰라렸다.  지금도 아는 애들만 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얼마나 많은 일을 하는지 모른다.  교무실에서 탄산수(교장 선생님의소중한 물인데) 훔치기는 빙산의 일각.  주간 학생회의, 학교 행사 준비, 학교 청소, 봉사 활동 등등.  요즘은 부기숙사장 행세 추가.  나갔던 준면이 민석을 부르며 헐레벌떡 달려 들어온다.

 



“야, 또 떨어졌대!”


“… 진짜?”


“응, 민기쌤이 알려주심.”


“우리 학교도 징하다, 어차피 올 거 걍 봐주지! 벌써 두 명 탈락이네.”


“이건한국 세뇌 교육의 문제야, 중국인은 따라올 수 없다구~.” 


“그럼 또 미뤄진 거야?”


“아마도? 다음 시험에 만약 붙는 애 있으면 방학 때 들어올 듯.”

 



교환학생으로 오기로 한 중국의 호남부고 학생이 벌써 두 명이나 I 고의 입학시험에 고배를 마신 가운데 둘은 어깨를 으쓱거린다.  책상 위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던 민석이 준면의 발 아래로 시선을 내린다.

 



“당장 치워!”


“아아아~ 시험기간이잖아, 끝나면 치울게. 한번만~”


“죽고 싶어!? 바퀴벌레 생긴다고!”


“어차피 내일도 이렇게 된다고!”

 



아이씨, 그건 맞는 말이네.  민석이 고민하는 사이 준면은 얼른 책상에 앉아 모습을 숨겨버린다.  어느새 비어버린 초록 병을 살짝 바닥에 내려 발로 미는 모양새가 퍽 자연스럽다.

 




 

9시 종 소리 뒤로 종인을 찾는 방송이 있었다.  오늘은 집중이 안 돼서 같이 방으로 돌아가기로 했던 종대에게 먼저 가라는말을 전한다.  종대는 얼른 고개를 끄덕거렸다.  기숙사에 들어온 이후 이런 일이 종종 있었다.  교무실에서 그를 찾는 방송.  처음에 이유를 물었더니 전화 때문에, 라는 짧은 답변이 돌아왔다.  핸드폰이 없는 종인의 집에서 온 전화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들어오면 앞으로 내 핸드폰 쓰라고 꼭 말해야지.



교무실.  쭈뼛거리며 다가온 종인에게 담임 선생님은 책상 위에 놓여있던 수화기를 내밀고는 자리를 피하신다.

 



“여보세요.”


‘종인이니?’


“네.”


‘저녁은? 아픈 데는 없고?’


“걱정 마세요, 밥도 잘 먹고 잘지내요. 음.. 수녀님은요?”


‘나야 늘 같지, 시험 기간이지?’


“네.”


‘무리하지 말고..’

 



언제쯤 올 거니? 조심스러운 물음에종인은 얼른 중간고사 끝나면 갈 거에요, 답한다.  애들 보고 싶다.  작고 동그란 얼굴들.

 

 

갑자기 처진 반대쪽 이어폰 때문에 종대의 귀에 꽂혀있던 이어폰도 떨어진다.  슬렁슬렁 책을 넘기던 종대가 이어폰을 고쳐 들며 종인에게로 고개를 돌린다.  벽에 기대어 뚱-한 표정으로 저를 쳐다보고 있다.

 



“왜, 방해돼? 혼자 들을래?”


“아니, 나 집중이 너무 안 돼.  어떡하지..”

 



나 같으면 진작 그랬다, 속으로 대꾸했다.  시험이 바짝 다가오자 종인은 며칠째 공부하는 기계처럼 굴었다.  새벽까지 안 자는 건 기본이고 아침에 코피를 쏟는 것이 예삿일이 되었으니 공부에 질릴 만도 하다.  시무룩한 얼굴.

 



“방법이 하나 있는데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의자까지 끌어당기며 제 곁으로 바짝 다가온다.

 



“오늘은 공부 안 하기!”


“아이씨..”


“이 바보야, 어차피 앉아 있어봤자 안 될 거 아냐? 그 시간에 전환 딱 하고!”

 



한숨을 푹푹 쉬더니 책을 덮는다.  오예~ 오늘 노는 날이다!  근데 뭐하지?

 



“피아노실?”

 



의외의 제안에 종대가 저도 모르게 왜? 물었다.  콧등을 긁적이면서 들어본 적이 없어서, 라고 중얼거리더니 괜히 이어폰 선을 꼬아 본다.

 



“듣고 싶어?”


“응, 네 손이 치는데 소리 나면 신기할 것 같아.”

 



부드럽게 휜 반달 눈이 제 룸메이트에게 고정되었다.  말도 왜 이렇게 귀엽게 하냐?  두 손으로 까만 얼굴을 감싸 흔들었다.  귀찮은 표정으로 가만히 당하고 있는데 곰탱이가 따로 없다.

 


피아노 의자에 나란히 앉은 둘.  종인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검지로 피아노 건반을 하나 꾹 눌러본다.  종대는 잼잼 손을 풀며 조금 뿌듯한 마음이 되었다.  떨린다, 처음으로 보여주는 건데 실수하지 말아야지!

 



“네가 평소 듣는 거 할까? 쇼팽이나 차이코프스키?”


“그렇게 말해도 잘 몰라, 난 그냥 있던 거 듣는 거라서.”


“그럼..”


“네가 제일 좋아하는 거 해 봐.”

 



종대는 방긋 웃으며 알겠다고 답한다.  건반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진 손.

 
 

금새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종인은 그 얼굴에 약간 낯선 느낌을 받으며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금 떨어져 앉았다.  진중하게 건반 위로 내려앉는 손길에서 산뜻한 음이 부드럽게 흘러나온다.  분명 힘있게 눌러지는 모습인데 종인의 귀로 스미는 음은 한없이 가녀리고 조심스럽다.  저도 모르게 침이 꼴깍- 넘어갔다.  종대의 몸이 선율에 따라 움직이고 눈이 느리게 깜빡였다.  피아노의 한 음 한 음과 그의 모습이 하나처럼 느껴진다.  아름답다.  마음이 가라앉는 것 같아.  종인은 지금 눈 앞에 있는 종대가 저가 알던 이가 맞는지 의심스럽다.  거의 5분 동안 넋을 놓고 있으니천천히 곡이 마무리 되었다.  부끄럽다는 듯이 웃으며 어땠냐고 묻는 종대.

 



“... 좋다. 무슨 곡이야?”


“드뷔시의 『달빛』인데, 되게 유명한 곡이야. 듣고 있으면 안심이 돼서..”



 

종인이 그의 손가락에서 눈을 떼지 못 한다.  그렇게 신기했냐고 장난스럽게 물었는데 진지한 끄덕거림이 돌아와서 조금 민망해졌다.  결국 헛기침을 하며 손 좀 그만 봐.

 



“종인아, 젓가락 행진곡 알아?”


“몰라.”

 



뻣뻣한 손가락을 피아노 위에 올려주자 싫다고 말하지만 전혀 싫은 목소리가 아니다.  종대가 옆구리를 간질이며 가르쳐줄게, 한번만~ 조르자 못 이기는 척 어색하게 손을 올린다.  늦은 밤, 덩그러니 불이 켜져있는 피아노 연습실에서 피아노 소리와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경쾌한 젓가락 행진곡이 엇나간 박자로 연주되었지만 이 둘의 귓가에는 완벽한 화음으로 들리지 않았을까?

 



“우리 가는 길에 핫바 먹으면 안 돼? 나 집중했더니 배고파아.”

 





“어? 뭐야, 너희.”


“야, 자습 땡깠냐? 양애취 새끼들아.”


“지는, 큭..”


“대박 사건, 우리 만나기로 한 줄.”


“우와, 우와! 우리 짱이다아.”


“배고파 뒤질 뻔!”

 



편의점에서 마주한 302, 306, 312호의 악동들.  금새 북적북적 시끄러워진 편의점에서 제각각 일용할 양식을 들고 나온다.  컵라면, 빵, 우유, 삼각 김밥..  누구 하나 빠짐 없이 입이 귀에 걸려있다.  시험 기간인 것은 모두 잊은 모양이다.

 



“야, 야 어디로 갈 거야?”


“우리 방 절대 안 돼!”


“그럼 302호 띰!”


“띰!”


“안 돼애! 종인아, 얘네 좀 말려봐!”


“아, 나 컵라면 냄새 베는 거 싫은데..”


“닥치고 열쇠 내놔, 뺏어!”


“끄아아!”

 



 
 

선선한 봄의 밤, 뜻하지 않게만난 반가운 얼굴.  그런 우리가 공유하는 시간.  이들의 시험 기간은 어느 하나 좋지 않은 것이 없다.

 

 




4-3. Do not hurt ㉮

 


 

우리를 건조시켰던 시험이 끝났다.  시험이 끝난 금요일, 황금 같은 3시.  담임 선생님의 종례가 끝나자마자 짹짹거리는 소란과 함께 누가 먼저랄 것도없이 바삐 교실을 빠져나가는 아이들.  종대는 해맑게 친구들을 배웅하고 마지막으로 교실을 빠져 나온다.  시험이 끝난 것과 별개로 기분이 가라앉는 걸 느꼈다.  시끌벅적했던 학교의 모든 공간에 찬 물이 끼얹어진 마냥 고요해졌다.  기숙사로 향하는 구름다리를 넘어가며 집에 갈지 말지 다시 한번 고민해보지만 어차피 비어 있을 집을 떠올리며 터덜터덜.  부모님은 결혼 기념일을 맞아 일본 여행 중,형은 이 틈에 신나게 술을 퍼 마시고 외박할 것을 선포했고.  날라리 자식.  그리고 이번 주말, 종인이가 처음집으로 돌아갔다.  잠을 못 자 퀭한 얼굴로 경수와 함께 손을 흔드는 모습이 웃기면서도 짠한 마음이 들게 했다.  기숙사마저 사람 냄새를 감추어 버렸다.  모두가 포근한 곳으로 돌아가며 온기들까지 모조리 가져갔나 보다.저가 가끔 집에 갔던 주말에, 종인이 이런 기분이었을까?  종대가 일부러 콧노래를 흥얼거려 보지만 기분이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다.  정말 다행인 것은 찬열과 세훈이 배구 대회 결승을 앞두고 훈련 때문에 저와 함께 남았다는 것이다.  훈련 때문에 저녁 시간에나 놀 수 있다며 세훈이 머리를 쓰담쓰담-  그 옆에서 찬열은 종대가 들으라는 듯 괜히 한바탕 배구부 욕을 늘어놓더니빨리 올게, 말했다.  고요 속에 이질적으로 속한 종대가 침대에 엎드린다.  시험 끝나면 애들이랑 놀 줄 알고 일부러 연습도 빼고 반 애들한테도 약속있다고 했는데.  에잇, 짜증나.  TV나 봐야지.

 

 




“진짜.. 나 가도 되는 거 맞아? 너네 팀 무서운데에.”


“어차피 형들 다 갔어, 딱 한시간만 뻐팅기다 분위기 봐서 빠지자.”

 



저녁을 먹고 찬열과 세훈에게 끌려 배구부가 있는 체육관까지 온 종대.  306호 장신 콤비의 뒤로 몸을 숨겼다가 쫄보 소리를 듣는다.  체육관 한 켠 의자에 종대를 앉힌 그들은 멋있다고 소리지르지 마라, 라며 웃옷을 벗었다.

 



“핸드폰 갖고 있어, 심심하면 레벨 업 시켜놔.”

  


 

체육관의 반질반질한 바닥과 운동화가 마찰하면서 삑삑- 소리가 난다.  입으로 배구하는 줄 알았는데 오늘 보니 장난이 아니다.  주저 없이 공을 향해 몸을 던지는 이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내리는 그들의 눈빛은 제가 알던 것이 아니다.  와.. 멋있다.  찬열과 세훈의 몸이 떠오르면 저도 모르게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큰 소리를 내며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공.  맞으면 대따 아프겠다.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주저앉은 세훈이 헉헉거리며 종대의 앞까지 기어온다.  그 뒤로 공을 들고 따라오던 찬열이 그냥 지나칠 리가 없다.  세훈의 허리를 꾹-

 



“아악! 개새끼야, 허리 나가!”

 



어느새 종대의 주변을 빙빙 돌며 육탄전을 벌인다.

 



“아하하항, 미친 놈들아, 그만해애!”


“허억.. 헉.. 타임.”

 



널브러져 있는 그들 곁 흰색 공을 종대가 조심스럽게 들어본다.

 



“나도 가르쳐줘! 해볼래!”

 



귀찮다고 못 들은 체 해보지만 한번만~ 아~ 제발~ 징징거리는 종대에게 당할 수가 없다.

 



“손을 이렇게 딱! 그리고 몸에 힘 빼고!”


“이, 이렇게?”


“어어, 그리고 공이 손에 감기는 느낌으로.”


“우리 둘이 하다가 토스할 테니까 쳐 봐~”

 



해맑게 웃으며 제 앞에서 왔다 갔다 하는 공을 보고 있던 종대가 아무 생각 없이 둘 사이 스파이크에 끼어든 것은 한 순간이었다.  아, 하는 짧은 비명과 함께 종대가 제 손을 쥐었다.

 

 

 



아, 시끄러워.  일요일인데 늦잠 좀 자자!  얼굴을 사정없이 찌푸리며 비스듬히 몸을 일으킨 찬열이 떠지지 않는 눈을 끔뻑거리며 제 앞에 펼쳐진 장면에 대해 머리를 굴려본다.  맞은 편 침대에서 저와 같이 그들을 보고 있는 세훈이가 보이고(근데 저 새끼, 머리가 왜 저래?) 바닥에 이불에 쌓인 채 종인에게 팔을 붙들려 있는 종대가 보였다.  비몽사몽 하긴 마찬가지.  미친 사람 보듯 종인을 보고 있다.

 



“야, 언제 왔냐..”

 



잠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 목소리가 쩍쩍 갈라졌다.

 



“얘 왜 이런 거야!? 괜찮은 거야?”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흰 붕대로 칭칭 감겨있는 종대의 팔을 신주단지처럼 두 손으로 받치고 있다.

 



“웅.. 종인아.. 나 괜찮아.. 왜 이렇게 빨리 왔어?”


“어쩌다 이랬어? 많이 아팠지? 괜찮아?”

 



순간 랩하는 줄 알았다.  빠르게 묻는 종인에게 종대는 왜 이래애,라며 팔을 뺀다.  그러자 ‘어어어! 조심해!’ 우렁찬 외침.  저건 무슨 신종 지랄이래?  세훈과 눈이 마주쳤다.  그도 저와 같은 생각인 듯 동시에 어깨가 으쓱-

 

 

뜻하지 않게 제 시간에 먹게 된 점심 때는 더 가관이었다.  김종대를 자리에 앉히고 대신 밥을 받아오는 것까지는 그러려니 하겠는데 지금 제 앞에서 아기 새처럼 입을 쩍쩍 벌리고 있는 김종대와 그 옆에서 수저 아래 손까지 받쳐가며 밥을 처먹이고 있는 김종인은 뭐란 말인가.  꿈인가 싶어, 제 뺨을 때려보지만 아플 뿐이다.

 



“야, 야. 정도껏 해라, 징그러운 새끼들아~김종대 오른 손은 멀쩡하거든?”


“그래도 아프잖아.”

 



그가 종대가 한껏 가엾다는 표정으로 비논리적인 대답을 해와서 할 말을 잃었다.  세훈은 실실 웃으면서 중간 중간 그들에게 핸드폰을 들이밀었다.  찍은 것을 백현이와 경수에게 보내면서 빨리 와서 좋은 구경하라고 쓰는 게 보였다.  종대는 그의 보살핌이 마냥 좋은지 고개를 까딱거리면서 헤헤-  아니, 고정시켜놔서 괜찮다니까!

 



“그래도.. 얼마나 아프겠어..”

 



김종대 몸도 작잖아, 라는데 무슨 말을 더 하오리까?

 



“나 안 작거든!  장조림 줘, 아-”

 



여전히 키득거리며 세훈이 작은 거랑 아픈 거랑 무슨 상관이 있냐고 묻자 그는 콧등을 손가락으로 긁적거리면서 ‘생각을 해 봐, 몸집이 큰 사람이트럭에 치이는 거랑 얘처럼 작은 애가 치이는 거랑 누가 더 아프겠어?’라고 되물어 잠시 세 사람을 멍-하게 만들었다.

 



“병신아, 트럭에 치이면 둘 다 뒤지겠지!”

 



젓가락까지 떨어뜨리며 깔깔거리는 세훈 대신 소리치자 입술을 살짝 내밀더니 끝까지 작은 목소리로 그래도.. 작으면 더 많이 아플 텐데..  종대는 좋아 죽겠단다, 몸을 뒤로 넘어가게 웃고 있다.  사실 저도 내내 웃고 있긴 하다.  김종인 제 정신 아닌 듯.  방으로 돌아온 이들은 각자 휴식을 취하기로 정했다.  남아있던 셋도 새벽까지 게임을 하고 웃고 떠드느라 피곤한 상태였고 종인도 집에서 통 쉬질 못했다며 몸을 일으켰다.  이틀 동안 306호에서 묵었던 종대의 짐과 이불을 챙기는 종인에게 찬열은 장난끼 가득 담긴 눈으로 얘 아픈데 업고 가지 그러냐? 라고 이죽거렸다 낭패를 보았다.  그가 진지한 표정으로 종대에게 그럴래? 물었기 때문에.  종대마저 민망함을 감추지 못한 채 손사래를 친다.  엉덩이로 쏟아지는 발길질을 피하며 302호의 둘이 얼른 복도로 나왔다.  

302호에 온기가 들어선다.  재빨리 이부자리를 정리하더니 더 잘 거냐고 물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화장실로 가 치약 얹은 칫솔을 내밀어온다.  아직도 저를 내려다보는 얼굴에 걱정이 한 가득.  우리 엄마도 너처럼 하진 않겠다, 이놈아.  그래도 기분 좋다.  힛..  먼저 누운 종대의 팔을 잔뜩 의식한 채 침대 위로 제 몸을 눕힌다.

 



“괜찮다니까! 오버하지마, 진짜.”


“넌 왜 공에 덤벼가지고..”


“아, 몰라아.”


“으휴.. 피아노도 치는데..”

 



풉.  종대의 입 꼬리가 길어진다.  지나치게 다정한 이 애에게 저가 뭐라고 말해야 걱정을 그칠까?  그는 조곤조곤 의사 선생님이 하셨던 말씀-왼손 약지와 중지 골절의 전치 8주-을 종인에게 일러주고 두 달 동안 꾸준히 재활 병행 치료를 받으면 문제 없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리고 방긋- 웃으며 당분간 연습도 없다, 짱 좋아!  아프지 않게 머리카락 위로 꿀밤을 때리더니 팔을 내린다.  딱딱한 깁스를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건드리더니 많이 아팠냐고 물어온다.  짙은 쌍꺼풀 아래 진득한 눈동자가 제 뺨을 쓰다듬는 것 같이 느껴졌다.  조금 약은 마음이 생겨 살짝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따 머리 감겨주면 안돼? 어제 애들이 해줬는데 귀랑 코에 물 다 들어가고 막 제대로 헹구지도 않고 그래 가지고..”

 



고개를 끄덕거린다.  더 필요한 건 없고?

 



“응, 졸려.. 너도 완전 피곤해 보인다, 집 가서 뭐했어?”

 



그냥 뭐.  눈을 감으며 언제나처럼 종인에게 팔을 겹치는데 그의 몸이 화들짝 뒤로 빠진다.  곧 다친 팔이 깔린다며 똑바로 누워 자라고 잔소리를 해와서 종대는 인상을 쓰고 만다.

 



“싫어!  이렇게 자야 잠 잘 온단 말이야아!”


“그럼 돌아누워, 다친 팔이 위로 가게.”

 



다쳐서 좋다고 생각했던 건 전부 취소다.  마음대로 하겠다는 말 대신 고집스레 눈을 감고 꼼짝도 하지 않았더니 포기할 생각이 들었는지 상대도 미동이 없다.  하지만 이른 생각 뒤 낮은 목소리가 단호하게 귀로 흘러 든다.  빨리 돌아누워.  아, 김종인 은근히 고집쟁이야.  이런 실랑이도 나쁘지 않지만 종대는 마주한 파리한 얼굴에 백기를 들어준다.  그에게 등을 보이며 벽을 마주하게 되었다.  집에 가서 뭘 했길래 피곤을 그대로 달고 돌아왔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 종대의 허리에 갑작스레 무게가 더해진다.  지긋이 감겨있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뒷목으로 따뜻한 숨결이 내려앉았다.

 



“너한테 집 냄새 난다..”

 



피곤한 목소리의 중얼거림을 끝으로 곧302호는 아늑한 정적으로 물든다.  그의 팔이 종대의 온기를 온통 앗아버릴 것처럼 더 세게 허리를 감아왔다.  새근새근-  숨소리가 귓가에 아주 가깝다.  종대의 졸음은 싹 달아나 버렸다.  솜털까지 바짝 깨었다.  마른 등으로 저를 안은 몸이 느껴진다.  제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는 걸 종대는 알까?  으, 심장 소리 들릴 것 같아.  맨날 붙어있는데 오늘따라 왜 이렇게 거슬려?  종대는 저를 두고 먼저 꿈나라로 가버린 종인이 깰까 숨마저 가려 쉬며 뜬 눈으로 한참을 누워 있었다.  그의 규칙적인 숨소리가 듣기 좋다고 생각했다.

 

 




4-3. Do not hurt ㉯

 

 


코 앞 룸메이트의 머리카락을 서서히 눈에 담으며 깨어난 종인은 팔을 들며 몸을 떼었다.  하지만, 저가 가득 끌어안고 있던 따뜻함을 공기 중으로 빼앗기자 다시 손을 뻗는다.  종대가 몸을 뒤척거렸다.  가느다란 목이 참 하얗다고 생각해본다.  완전히 잠에서 빠져 나와 살짝 몸을 일으켜 종대의 팔을 살핀다.  석고에 갇혀버린 오르골.  이른 아침, 잠에서 깨기 전 몰래 떠나온 소윤이 떠올라 그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운다.  너무 오랜만에 돌아간 저가 밉다 하면서도 작은 몸을 절뚝거리며 하루 종일 졸졸 쫓아다닌 아이.  지금쯤 그의 빈자리를 알아차리고 울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가늠할 수 없는 상처를 보는 것은 종인에게 늘 더 크게 와 닿아 버린다.






찬열은 제 눈 앞의 따뜻한 손길이 슬로우 모션으로 거둬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 손이 종인의 입으로 향하는 것도.

헐.  이건 또 무슨 지랄이지?

 



“그걸 왜 먹어어! 병 걸려!”

 



종인이 찬열의 입가에 묻은 밥풀을 떼어주더니 너무도 자연스럽게 입 속으로 쏙- 넣은 것에 충격을 받은 것은 비단 당사자 뿐이 아닌 것 같다.  다들 종인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중 종대만이 그 어깨를 두드리며 연거푸 뱉으라고 말하고 있다.  종인은 그 시선을 피해 고개를 조금 숙이더니 작게 버릇이 돼서, 라고 말했다.  찬열은 식탁 아래로 사라진 그의 손이 안절부절 못하고 꼼지락거릴 것이라고 확신한다.

 



“병신아, 심쿵 했잖아!”


“미친, 좋았냐?”


“뭔가 애기가 된 기분? 응애, 응..”

 



경수가 살며시 숟가락을 집는 걸 보고 찬열은 입을 다문다.  저건 진짜 때리고도 남을 놈이야.  갑자기 세훈이 미친 새끼라며 웃길래 그 근원지를 찾아 시선을 옮기니 백현이 인중 위에 완두콩을 올린 채다.  얼마 못 가 떨어져 버렸지만.

 



“야, 왜 박찬열만 해주냐?  내 얼굴에 붙은 건 똥이냐?”

 



세훈이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뭐 먹을 때 똥 얘기 좀 하지 말라고 소리친다.  오늘도 그의 상해버린 비위에 아랑곳 않고 다음에는 나도 해줘라, 엄포를 놓아 종인에게 긍정의 대답을 들어내고야 만다.  그것이 마음에 들었는지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날 가져~’ 했다가 올라가는 경수의 숟가락을 재빠르게 막아내고는 브이.

 



“아무튼, 김종인 진짜 착하다니까.”

 



경수의 말에 종인은 아니라고 하는데 그 얼굴에 쑥스러움이 지워지지 않는다.  전에는 웃기 전에 눈동자를 먼저 굴리더니 어느새 그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웃게 된 그.  찬열은 가끔 저들을 살뜰히 살피는 종인이 어색했다.  처음에는 그렇게 곁을 두더니.  어려서부터 건장하고 시꺼먼 놈들과 운동만 해와서 그런지 그런 게 죄다 낯간지럽다.  하지만, 오늘은 새삼 그의 다정함을 눈치채 본다.  무심코 받았던 것들이 하나 둘 상기되자 저도 조금 쑥스러워졌다.  운동하느라 공부할 시간 없겠다며 시험 기간 정리한 것을 제 방으로 가져온 일, 그래도 시험은 망쳤지만.  제일 좋아한다고 말하자마자 모조리 제 식판으로 옮겨진 브로콜리 같은것들.  친해지기 힘들었던 만큼, 아니 몇 배로 보상해 주려는 걸까?

 



“맞아, 내 룸메이트가 김종인이었으면 좋겠다~”


“그럼 꺼져, 나도 혼자가 좋아.”


“오구오구, 우리 경수~ 삐져또?”

 



결국 헐크의 숟가락은 백현의 머리에 떨어졌다.

 



“으아악!  이 헐크 새끼, 나한테만 지랄이야!  짱 아파!” 

 



미친 새끼들.  큰 입을 벌리고 마음껏 웃어본다.  홀로 그렇다고 여겨본 종인의 보상에 빌어 이 애들과 만나고 친해진 것에 대해 심심한 감사를 해보고 싶어지는 저녁이다.  종대의 식판을 치우는 종인.  찬열이 그 앞에 놓여있는 종인의 식판을 든다.

 



“어?  내가 할게.”


“됐어, 네 새끼 거나 챙겨.”

 



미안한 표정이 되어버리는 그에게 찬열은 짓궂게 혀를 내밀고는 마음 속으로 외친다.  나도 해줄 거야, 네가 주면 난 더 준다!

  

식사 이후 치뤄진 풋살(미니 축구)은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종인이 다쳐서 안 된다며 종대에게 가만히 앉아있으라고 말했다가 머리를 한대 얻어맞았다.  과잉보호의 결과였다.  알아서 할거야아! 꺼져! 소리치며 운동장으로 뛰어 내려가는 등 뒤로 한껏 입을 내밀고 또 다치면 어쩌려고, 말해보지만 옆에 있던 세훈조차 혀를 끌끌 차며 무시한다.  그렇게 시작된 풋살.  가위를 낸 종인과 경수, 백현이 한 편이 되었고 나머지가 한 편.  하지만 공이 종대 근처로 가기만 하면 종인이 제 몸을 던져 막아내는 통에 결국 나중에는 풋살이 아니라 ‘김종인 맞추기’가 되었다.

 



“끄하항, 김종인 비켜어!  바보야!”


“으하하하하, 미친 새끼! 졸라 웃겨!”


“또라이 아냐?”


“종인이 진짜.. 등신 맞아..”

 



잔디밭을 나뒹굴며 학교가 떠나가라 마음껏 시끄럽게 군다.  한밤중 풋살에 몸을 불사르는 이들, 다가오는 체육대회의 모습이 벌써부터 눈에 훤한 것은 왜일까?

 




 

4-4. 체육대회를 부탁해!

 

 


중간고사가 끝난 일주일 뒤로 체육대회가 예정되었다.  학생회장 준면은 선생님들을 도와 각종 시합의 예선전과 소품 준비 등의 각종 감독자로 나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다.  밤 늦게까지 스탠드를 켜놓고 대진표를 그리고 있는 그에게 민석이 눈을 비비며 다가간다.  저가 다가오는 것도 모르게 집중하고 있는 걸 보며 이렇게 공부를 했으면 중간고사를 그 따위로 보진 않았겠지.  어깨 위에 손을 내린다.

 



“도와줘?”


“어, 깼어? 미안.”


“아냐, 그냥 일어났어. 하암~ 줘, 내가 그릴게.”

 



올려다보는 하얀 눈길에 고마움이 묻어있다.  하지만 민석의 성격상 그걸 알은 체 할 수 없어 자와 커다란 종이를 뺏듯이 가져가 버린다.  괜히 더럽게 못 그렸네, 라고한 마디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걸 모를 리 없는 룸메이트 2년차 준면이 고개를 숙인 채 살포시 미소 짓는다.

 



“축구 나갈 거지?”


“당근.”


“계주는?”


“나갈 애 없으면 그것도.”


“솔직히 말해, 너 운동 선수가  꿈이지?”

 



자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무미건조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축구 선수.

 



“저번엔 수학 교수라며~”


“그건 희망 직업이고, 축구 선수는 꿈.”

 



두 개가 왜 달라, 준면이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민석이 이렇게 당연한 것도 모르냐는 표정으로 눈동자에 그를 담았다.

 



“수학 교수는 현실이고, 축구 선수는 꿈이라고. 말 그대로 꿈.”

 



준면은 발을 까딱거리면서 머릿속에서 잠시 체육대회를 지워본다.  현실과 꿈이라, 되게 어렵다.  그리고 조금 슬프네.

 



“미션 달리기? 이건 뭐야?”


“그건 그냥 이벤트. 아, 그거 뽑기도 만들어야 된다!”


“이건 안 해야겠다. 이상한 거 넣을 거지?”


“아~니, 그냥 교장 선생님 가발 가져오기 같은 거?”


“제발, 정신 좀 차려.”

 



생각만으로도 재미있겠다며 호들갑을 떠는 준면을 보며 민석은 진심으로 이 경기에 참가하게 될 누군지도 모를 이들이 불쌍해졌다.  한참을 이것 저것 미션에 대해 아이디어를 늘어놓더니 책상에서 내려와 민석의 곁에 앉는다.  같이 하자, 내가 줄다리기 쪽 그릴게.  나 개발인데 축구 나갈래, 으헤헤.  절대 안돼.

 

 



오전부터 학교가 들썩거렸다.  보드랍고 화창한 바람이 그들의 옷깃 사이에 스미고, 어느 때보다 들뜬 아이들이 자갈자갈거리는 소리가 초록 나뭇잎에 매달린다.  기숙사 3층의 악동들도 잔디밭 위에 모여 앉아 있다.  세 개의 학년이 반별로 같은 팀이 되어 총 11팀.  지난 며칠 동안 보충 시간마다 각 반 대항 예선전이 쉴 새 없이 치러졌다.  예선 주요 종목은 농구, 축구, 배구 등 구기 종목이었는데 찬열이 속한 5반이 배구 결승에 올랐고 민석, 준면, 백현과 종대의 4반이 축구 결승에 올라 있었다.

 



“… 10분 뒤, 축구 결승이 진행될 예정입니다.  결승에 오른 1반과 4반은 경기장으로 속히 모여주시기 바랍니다!”

 



조회대 위에서 마이크를 차지한 채 능숙하게 진행을 하고 있는 준면을 신기하게 바라본다.

 



“준면이 형이 학생회장이었다니.”


“누가 뽑은 거래?”


“저기 있으니까 잘생겨 보이네, 옆에 있을 때는 확 깨는데..”

 



구설에 오른 것도 모른 채 늠름한 우리의 학생회장님.  속마음은?  괜히 학생회장 했다, 쓰벌.  나도 내려가서 애들이랑 놀고 싶다.  민석이 백현과 경기장에 입장하며 조회대 위에서 크게 손을 흔드는 그에게 윙크를 날리자 신이 나서 마이크에 대고 편파적인 응원을 펼친다.

 



“다 이겨버려! 4반 짱짱!”


“학생회장이 저래도 되는 거에요?”


“몰라, 미친 놈.”

 



거의 모든 예선 종목에서 탈락한 11반의 종인은 종대를 따라 4반 응원에 끼게 되었다.  몸을 풀고 있는 민석을 보더니 종대가 형은 내 롤모델이야, 중얼거린다.  복근 훌렁 때부터 팬이 되었다나 뭐라나.  옆에 붙어있던 종인이 다른 의미로 나도, 라고 맞장구를 친다.  형은 수학을 짱 잘해, 멋있어.  둘의 소리 없이 뜨거운 응원을 받은 민석은10분 만에 한 골을 터뜨렸다.

 



“우와!! 민석이 형 짱이다아!”


“형!”

 



종인은 저도 모르게 신나서 크게 민석을 불러보았다가 얼른 주위를 살핀다.  다행이 주변의 시선은 모두 경기장에 쏠려있다.  종대가 해맑게 웃으며 ‘재미있다, 그치?’라고 물어와서 얼른 고개를 끄덕거렸다.  팔을 지나치게 흔드는 것 같아 살며시 잡아 꽉 쥐는 것은 그 다음 일.  그리고 잠시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들었다.  중학교 1학년 이후로는 체육대회며 수학여행이며 하는 것들에 참여해 본 기억이 없다.  일부러 찬물로 목욕을 해 독감에 걸리거나 그게 안 되면 하루 종일 식음을 전폐하고 아픈 척을 해서 결석을 했었다.  아이들이 모여 있는 곳의 따뜻한 기운에 젖어 좋아 보일수록 그는 불행해졌다.  그것은 아무리 반복되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기분이었으므로 피하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의 저는 너무도 따사로운 곳에 앉아 있다.  어젯밤 수도 없이 바보 같은 고민을 했던 것이 부끄러울 정도로 즐겁다.  함께 소리 치는 것이, 많은 아이들 사이에 서로를 찾는 것이 타인들에게 내가 ‘우리’로 보인다는 것이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겠다.

 

 

축구에서 그다지 활약하지 못해 준면에게 구박을 받은 백현이 보란 듯이 계주 1등을 차지했다.  그 소식을 들은 준면은 다른 게임을 준비하다가 ‘4반 1등! 500점! 백현아, 사랑해!’라고 외치면서 조회대 난간 위로 올랐다가 선생님께 끌려 내려왔다.  우리는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고개를 떨구면서 모두 저 형, 정말.. 절레절레-

 


 

“야, 도경수 왜 저래?”


“쟤 원래 가끔 또라이 같잖아.”

 



운동장 한 켠에 마련된 풍선 크게 불기에 흥미를 보인 경수.  저를 둘러싼 친구들의 조롱과 애들의 시선에 아랑곳 하지 않고 지고는 못살아.  종인은 복어처럼 부푼 그 얼굴을 보고 다시 한번 그가 괴짜 같다고 생각하며 웃음을 그칠 수가 없다.  그러던 중 누가 제 소매를 잡아당겨 시선을 돌렸다.

 



“푸하, 뭐야?”


“나 불쌍하다고 여자애들이 해줬어.”


“귀엽다.”

 


얼굴에 페이스 페인팅을 한 채 나타난 종대.

 



“뭐가 귀여워어, 난 아무것도 못하고 이게 뭐야!”

 



얼굴에 잔뜩 귀여움을 붙인 채 심술이 나있다.  딱딱한 깁스를 움직이지 않도록 은근슬쩍 잡으며 고개를 복어 경수 쪽으로 돌려주자 언제 그랬냐는 듯 까르르 웃는다.  세훈이 연속 촬영으로 경수를 찍는 소리가 요란했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미션달리기 시간입니다!  각 반 선수들 모두 입장해주세요!  미션 달리기는 저~기 바구니가 있는 곳까지 달려가 뽑은 미션을 완료하고 결승선으로 들어오면 되는 게임입니다!”

 



잔뜩 입술이 나와 있는 종인의 등을 밀며 찬열과 세훈이 마음껏 웃어댔다.  체육부장이 된 세훈이 종인과 경수를 마음대로 11반 미션 달리기 명단에 넣어버린 것이다.  종인은 싫다는 항의의 표시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가 저에게 쏠린 반 아이들의 시선에 우물쭈물 앉아버렸고 경수는 1등 상품이 자전거라는 말에 냉큼 콜.  종대가 제 속도 모르고 손을 흔들며 ‘잘하고 와, 김종인, 도경수 화이팅!’ 외친다.  젠장.  후들거리는 다리를 애써 누르며 종인은 준비 자세를 취했다.  옆에 있는 경수가 여유롭게 씨익- 웃으며 2등 해라, 라고 말해와서 살짝 웃을 수 있었다.  저를 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에 집중하지 않으려고 일부러 앞만 보는 두 눈.  다행이 미션이 들어있는 바구니 옆에 준면과 민석이 있어 정신을 그 쪽에 붙들어 두었다.

 



‘탕-!’

 



숨이 가빠질 새도 없이 짧은 거리여서 금방 바구니에 다다른 이들이 모두 종이 하나씩을 집어 들었다.  아.. 안돼..  난 못 해..  종인이 펼친 종이를 든 채 머뭇거리며 저희 쪽을 쳐다본다.  찬열이 ‘빨리 해, 새끼야!’라고 소리치자 난감한 표정으로 발을 떼는데 그 걸음이 무겁다.  경수는 종이를 들고 준면에게 가더니 커다란 짐을 받아 들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심상치 않은 표정들.  도대체 뭐길래 저러지?  준면과 민석이 준비한 것들을 내밀면서 배를 부여잡고 웃고 있다.  황당한 미션들뿐이었는지 모든 선수들이 우왕좌왕 군중을 헤집고 다녔다.  딸기 우유를 마시며 눈으로 종인을 쫓는 종대에게 옆에 있던 세훈이 이거 왠지 준면이 형이 만든 것 같아, 라고 속삭였다.  눈을 맞추며 맞장구를 치는데 갑자기 환호성이 터져 나와 그의 시선이 다시정면을 향한다.  종인이 잔뜩 얼어버린 표정으로 어떤 긴 머리카락의 여자애와 같이 결승선 쪽으로 걸어가는 게 보였다. 

 



“이야! 김종인 대박!”

 



찬열의 목소리가 잔뜩 흥분에 절어 평소보다 훨씬 크게 귀에 담겼다.  백현도 지지 않고 목소리를 높게 오빠 멋져, 라고 내질렀다.  그 속에 종대만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끼어 있었다.  아무리 미션이라지만 종인이 여자애와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하지만, 그를 더 놀라게 한 것은 지금 점차 가라앉는 제 기분에 대한 당혹감이었다.  응?  나 왜 이러지?

 



“몇 학년 몇 반이죠?”


“.. 1학년 11반이요..”


“예쁜 여자분을 모셔왔는데 미션지 한번 볼까요?”

 



모두 한 마음 한 뜻으로 긍정한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

 



“긴 생머리의 예쁜 여학생을 데려오시오!”

 



환호성과 야유가 동시에 흘러나왔다.  그 속에서 종인은 고개를 숙인 채 두 손을 꼼지락.  준면이 짓궂은 표정으로 예쁜가요? 물으며 종인에게 마이크를 내민다.  작은 목소리로 네, 라고 대답한 옆에 함께인 그녀가 수줍게 웃고 있었다.

 



“김종인 남자다잉!”

 



한껏 들떠 시끄럽게 몸을 밀어오는 애들 틈에 종대는 제 팔을 신경질적으로 끌어안았다.  여자친구 생기면 안 되는데, 저도 모르게 생각을 입 밖으로 내어 중얼거린다.  그의 복잡한 머릿속에서는 비이성적인 합리화가 거듭되고 있었다.  여자친구 생기면 나랑 안 놀아줄 거 아니야~  그건 싫지, 그래서 그렇지!

 



“자, 그럼 본격적으로 해볼까요? 남자친구 없죠? 없으면 우리 종.."

 



준면의 목소리가 갑작스러운 큰 함성과 웃음 소리에묻혀 들리지 않게 되었다.  모든 것이 일단락 되어 종인은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서둘러 저희에게로 발길을 옮겼다.  

 
 

전교생을 경악에 빠뜨린 장본인은 경수였다.

 



“미친! 끄아아아악, 더러워! 도경수, 미친 놈아!”


“아하하하항, 개더러워!”

 



경수의 아찔한 드레스 차림은 학교를 초토화 시켰다.  준면이 거의 울면서 말을 해서 무슨 질문인지 알아들을 수도 없었다.  제 앞으로 건네진 마이크에 경수는 단 두 마디만 내뱉은 채 등을 보였다.

 



“1등 아니죠? 씨X.”

 

 


저희들은 너무 웃어서 기진맥진한 채로 잔디밭에 드러누웠다.  뒷목과 팔에 닿은 잔디가 따가웠지만 웃음은 쉽게 수그러들지 않는다.  제 옆에 아직도 배를 잡고 웃고 있는 종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난리통에서 어느새 저를 찾아와 깁스를 붙잡고 있던 종인.  애들이 끈질기게 그 여자애와 엮어 종인을 놀렸지만 그가 정색을 하며 ‘아, 제발 하지마.’라고 말한 바람에 생각보다 싱겁게 지나가 버렸다.  경수를 따라간 백현이 찍어 보내온 사진들을 보여주며 세훈이 잔디밭을 뒹군다.

 



“끄항항항, 도경수 흑역사 쩔어!”

 



종대는 소란을 틈타 종인의 손으로 제 손을 가져갔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이유는.. 딱히 생각나지 않았다.  종인은 여전히 애들과 웃고 떠들며 아무렇지 않게 손을 맞잡아 주었다.  조금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끼며 다른 것들은 무시하기로 마음먹는다.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모든 건 종인이 너무 다정한 탓이라고, 별다른 이유는 없다고.

 
 

모두의 가슴에 각각의 의미 있는 기억으로 새겨질 체육대회가 그렇게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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