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개학, 우리의 시작  [ 부제 : 김종인의 우울 ]

 





“아, 떨려~”


“뭐가.”

 



옆에 누운 어슴푸레한 인영이 가까이 다가와 또렷해진다.  종대는 개학이잖아아, 라며 종인의 어깨에 얼굴을 비볐다.  머리카락이 닿아 간지럽다.  그게 뭐.  묵묵히 대꾸했지만 종인은 내심 경수, 세훈과 같은 반이어서 다행이라 여기고 있다.  지금까지 학교라는 장소에서의 관계는 그저 긴장과 불안의 연속이었는데, 이번에는 조금 다를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평소보다 조금 들떴다.  내일부터는 놀지도 못한다고 징징거리는 애들에 못 이긴 척 저녁 공부도 내팽개치고 늦게까지 놀다가 이제 막 잠에 들 참이었다.

 



“백현이랑 같은 반이잖아.”


“웅.. 다행이야, 백현이 없었으면 오늘 심장 떨려서 못 잤어.”

 



종인이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틀어 옆에 누운 이를 쳐다본다.  아무하고나 다 금방 친해지는 주제에.  종대는 그만의 해사함으로 사람들을 끌어 당긴다.  이 애가 가진 따뜻함은 늘 반짝거린다.  내 하나의 말도 허투루 넘겨 듣지 않고 언제나 곁에 있을 거라고 속삭이듯 눈을 맞춘다.  흉내 내려고 해도 절대 못할 일이다.

 



“근데, 어떻게 첫 날부터 야자를 하냐아.. 너무해..”

 



입술을 삐죽거리더니 하품을 한다.  옆에 있던 종인에게 옮겨 둘이 나란히 입을 벌리고 있다.  눈을 느리게 깜빡거리면서 종인의 팔을 두 팔로 끌어안는다.  형과 함께 침대를 썼었다고 하니 원래 있던 버릇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만의 꿈나라 여행 준비이다.  처음엔 불편해서 잠이들면 슬쩍 팔을 빼버렸지만 요즘엔 익숙해져서 아무렇지도 않게 되어버렸다.  오히려 없으면 이상할정도.

 



“내일 밥은 같이 먹어야 돼, 알았지..”

 



대답을 듣기 위해묻는 게 아니라 당부이다.  점심 시간이고 저녁 시간이고 또 우르르 몰려다닐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피곤해졌다.  하지만 종인은 전혀 싫은 표정이 아니다.  금방 잠에 빠져버린 룸메이트를 따라 눈을 감았다.  이제, 진짜 시작이다.

 





오랜만에 일찍 일어나려니 죽을 맛이다.  비몽사몽 눈을 감은 채 타이를 매고 있는데 어깨가 붙잡혀 몸이 돌려졌다.

 



“하루 종일 할래?”

 



인상을 쓴 채 종대의 손에서 타이를 낚아채 빠른 손으로 매듭을 짓는다.  목이 조금 졸렸지만 헤헤 웃으면서 엄지 척- 칭찬을 받는 건 종인의 등이다.  문을 열고 나서는 뒤통수에 같이 가자고 조르며 종대는 얼른 가방을 집어 들었다.  복도 앞쪽에 막 나오고있는 찬열이 종인과 조우하고 있다.

 



“아침 연습 안 했어?”


“개학이라고 빼주더라.”

 



한쪽 눈을 찡긋거리는 찬열에게 비웃음 같은 것을 남기고 종인은 먼저 걸음을 뗀다.  차갑다, 차가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찬열에게 종대가 몸을 던진다.  귀여운 자식.  어깨동무를 한 채 걸으면서 종대가 세훈이는, 하고 묻자 의외로운 정색이 돌아온다.

 



“그 새끼가 더 차갑지, 일어나니까 없었어.”

 





4층 구름다리 앞에 종인과 경수, 눈을 감고 있는 백현이 모여 있다.  찬열과 종대까지 더해지니 금새 소란해진다.  우리, 같이, 야자, 공부 등의 단어로 반복적인 대화를 하며 구름다리를 지나 본관으로 향한다.  경수가 한 손으로 백현의 팔목을 힘겹게 잡은 채 끌며 종인에게 말한다.

 



“세훈이가 우리 자리 맡아놨대.”


“자리 맡으려고 일찍 간 거야?”


“에이.. 그렇게 미친 애는 아닐 거야.”

 



둘은 동시에 어깨를 으쓱거린다.

 



“근데 얘는 언제 시차 적응할거래?”

 



찬열이 불쑥 경수에게 끌려가고 있는 반 수면 상태인 백현을 가리키며 묻는다.  4반인 종대, 백현과 그 옆  5반인 찬열을 각각 교실 앞까지 데려다 주고 종인과 경수는 발걸음을 돌렸다.  낯선 애들이 북적거리는 복도를 지나면서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종대와 너무 멀리 떨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저를 올려다보던 동그란 눈 때문일까?  그냥 갑자기 그렇게 느껴져서 손톱으로 손 끝을 꾹 눌렀다.  지나치는 애들이 저를 쳐다보는 것 같다.  속이 울렁거리는 것 같아 걸음을 멈추었다.  작은 불안감이 크게 종인을 덮친다.  머릿속에서 떠올리기 싫은 기억들이 억지로 들추어졌다.  뒤처진 종인의 팔을 붙잡은 경수가 왜 그러냐고 물어와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괜찮아?”


“어, 어. 아침을 안 먹어서 그런가 봐.”

 



11반이라는 팻말이 달려있는 문으로 들어가자 맨 뒷자리에 앉아있는 세훈이 손짓한다.  그 앞 두 자리에 종인과 경수가 나란히 앉았다.

 



“왜 이렇게 일찍 나갔어?”


“자리 맡으려고.”

 



고개를 흔들면서 싱긋- 웃는다.  미친 애였어.  경수는 이 곳에 닿기 전에 나눴던 대화를 일러주며 세훈에게 어이없다는 웃음을 날렸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앞으로 저희들의 놀이터가 될 곳을 둘러보았다.  11반은 남학생 반.  온통 시꺼먼 놈들이 교실 곳곳에 영역 표시를 하듯 난리를 피운다.  담임 선생님은 이를 잠재우기 위해선지 무섭기로 소문난 ‘삽 자루’라는 별명의중년 남성이었다.  그는 야구 배트를 교탁 위에 올리면서 딱 한마디 던졌다.

 



“우리 반에서 무조건 전교 1등 나와야제.”

 



뒤에서 세훈이 둘에게만 들릴 정도로 좆됐다, 라고 속삭였다.  반 아이들 모두 같은 생각인지 표정이 비슷했다.

 경수는 옆 자리의 종인에게로 살짝 시선을 옮겼다.  복도에서부터 계속된 멍한 표정으로 가만히 앉아있는데 책상 위로 모은 두 손 끝이 하얘지도록 힘을 주고 있다.  이유를 물어도 괜찮다,라는 말이 끝이겠지.

 



‘지잉-‘

 



책상 아래로 핸드폰을 확인하니 세훈이다.  김종인, 왜 저래?  그도 경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영문을 모르는 둘의 시선을 알아채지 못하는 종인은 여전히 불안한 표정이다.  담임 선생님은 출석부 1번인 고씨 남학생을 반장으로 세웠다.  자리에 대한 말씀이 딱히 없으신 걸 보니 무슨 일이 생기지 않는 한 바뀌는 일은 없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세훈은 배구부 선배를 통해 이미 이렇게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고 의기양양.  시간표와 보충 학습, 1년 동안의 교육 계획에 대한 설명을 하신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종이 한 장씩을 나눠주셨다.

 



“자, 이번 시간은 다들 이거 써라.  오늘 야자 때 검사할끼다.”

 



1부터 10까지 숫자가 쓰여있고 맨 위에 굵은 글씨로 ‘1년 목표’라고 쓰여 있는 흰 종이.  ‘어른이 되기 전 마지막 관문을 후회 없이 보내라’는 막중한 임무를 띈 이들이 진중하게 펜을 놀린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을 따라, 이 종이 위에 힘찬 첫 걸음을 싣는 것이다.  종인은 아직 아무것도 적지 못한 종이를 보다가 창문 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목표..  나한테 선택할 수 있는 게 있기나 한가?  아직 봄이 닿지 않아 앙상한 가지가 바람에 떨린다. 

 



“야, 야.  내 꺼 봐봐.”

 



세훈의 종이가 앞으로 넘어와 둘은 가운데 놓고 눈을 굴린다.

 



“너 이거 다 못 해.  현실적으로 써라, 좀.”

 



1. 초콜릿 복근, 2. 반장, 3. 여자친구 만들기, 4. 대회 우승, 5. 모의고사 수리 만점, 6. 하계 훈련 잘 끝내기, 7. 친구들과 바다 가기.. 등의 목표가 빼곡하게 적혀 있는 종이에 경수가 일침을 놓는다.  심지어 10개가 넘어 아래에 숫자를 더 써넣었다.

 



“꿈은 크게 가지라고 있는 거야, 이 애송아.”


“멋있다..  어떻게 이런 생각 했어?”


“역시, 종인이가 뭘 좀 안다니까.”

 



반면, 종인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자신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것들을 쉽게 적어놓은 세훈이.  저의 종이가, 그리고 스스로가 초라해지는 기분을 감출 수가 없다.  경수와 세훈이 아옹다옹하는 새 옆에 있던 경수의 것으로 눈길을 돌렸다.  1.원서 『연금술사』 읽고 번역, 2. 원서『화씨 451도』 읽고 번역, 3. 모의고사 평균 3등급 이상, 4. 친구들과 여행, 5. 부모님께 편지 쓰기.  경수다운 계획들.  전부 의미 있게 느껴지는 것들이다.  종인은 급히 앞에 놓여있는 제 것을 반으로 접어 교과서 사이로 껴 넣었다.

 



“종인아, 숨기는 거 다 봤어.  보여줘.”

 



경수가 손을 내민다.  덩달아 세훈이 뒤쪽에서 종인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삐죽 나와 있는 종이가 어느새 경수에서 세훈의 손으로 넘어갔다.

 



“보지마, 진짜.. 창피해..”

 



잔뜩 풀이 죽은 얼굴로 웅얼거린다.  하지만, 순순히 돌려줄 리 없다.  접힌 종이를 펴 본세훈이 대박, 한마디를 던진다.  경수도 와, 라는 감탄사만 내뱉은 채 웃고만 있고.  할 말이 없을 거다.  나도 할 말이 없으니까.

 



“이야, 클래스가 다르네.”

 



세훈이 박수를 쳤다.  종인은 종이를 빼앗아 다시 책들 사이로 아무렇게나 집어넣었다.  불만스러운 입술이 살짝 앞으로 나와있다.  종인의 종이에는 1. 이라고 적힌 단 한 칸만 채워져 있었다.  ‘등’이라는 한 글자가.  1.뒤에 글씨만 쓴 것도 천재 아니냐?, 라며 둘은 계속 낄낄거리며 종인을 놀렸다.  그렇게 한 시간이 금방 지나가 버렸다.  쉬는 시간을 알리는 종이 치자마자 반 아이들이 썰물처럼 교실을 빠져나갔다.  아직 이 곳의 낯선 공기를 혼자 감당하기 벅찬 것이리라.  원래대로라면 나도 그랬겠지.  다시 기분이 가라앉았다.  경수와 세훈이 다른 반에 가보자며 몸을 일으켰지만 종인은 고개를 저었다.  방금 전까지만도 자연스럽던 그들 사이의 제 자리가 가시방석처럼 느껴졌다.  바깥이 온통 잿빛인건 내 탓일까, 날씨 탓일까.

 



“종인아아! 아..”

 



요란스럽게 들어오다가 급히 목소리를 낮춘다.  빠르게 옆 자리를 차지한 종대가 종인에게 얼굴을 들이밀더니 이마를 맞댄다.  열은 없고.  경수가 이상하다고 했는데.

 



“뭐 하는 거야? 왜 여기까지 왔어, 먼데.”


“뭐가 멀어어! 슝 하니까 왔는데.”



 

앞에서 헤벌쭉 웃고있는 룸메이트를 보고 있자니 얼른 방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다.  저가 있는 것이 자연스러운그 곳으로.  교실이라는 공간이 자꾸 심연에 감춰버린 것을 떠오르게 만든다.  열등, 소외감, 동정심.. 모두 역겨운 것들 뿐이다.  어두운 종인의 표정에 종대는 조바심이 난다.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오늘 종인은 확실히 평소와 다르다.  원래 표정이나 표현이 다채롭진 않지만 이렇게 암울해 보이긴 처음이다.

 



“나도 이 반 하고 싶다, 네 짝꿍.”


“합반이라서 좋다며.”


“아니, 완전 불편해.”

 



책상에 얼굴을 붙이고 엎드려서 종인을 올려다본다.

 



“빨리 방에 가고 싶다.”

 



잠들 때처럼 종인의 팔에 제 팔을 걸어온다.  나도 그래.  






종인은 제 눈치를 보고 있는 이들 때문에 곤란해졌다.  점심 시간에 종대가 강정을 제 숟가락 위에 올려주기까지 했는데 왜 그 때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닭이든 돼지든 고기라면 사족을 못 쓰는 종대가 강정을 양보한 건 정말 큰 일이었는데.  어쩐지, 쉬는 시간마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오더라니.  뭐라고 말을 꺼내야 될지 골치가 아프다.  이건 단지 내 문제일 뿐인데.

 



“머리 아파?”

 



특히, 감정을 숨기는 데 전병인 찬열의 큰 눈이 노골적으로 종인을 살폈다.  그의 물음이 밥을 먹던 모두의 팔을 멈추게 한다.  5명이 동시에 얼음! 상태.  얘네들, 지금 자기들이 어떤지 알고 이러는 건가?  우스운 친구들에 종인의 손이 얼굴로 올라와 콧등을 긁적거린다.  가려진 얼굴 새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진짜 바보들 같아.  유쾌한 웃음은 아니었지만 종인의 입 꼬리가 올라가자 나머지 5명의 입술도 어기적 따라 올라간다.  드디어 웃었다.

 



“얘, 진짜 맛탱이 갔다니까.”

 



그렇게 말한 세훈의 표정이 활기를 띈다.  나 멀쩡한데, 웃으며 말했더니 그제야 한껏 경직되어 있던 분위기가 말캉말캉해졌다.  내가 뭐라고 이렇게신경 써주는 거지?  난 그냥 김종인일 뿐인데.  아무것도 아닌..

 





야자 시간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에 옆에서 재잘거리던 종대와 백현이 난리법석을 떨며 11반을 뛰쳐나간다.  저 바보들.  세훈과 찬열은 배구부 연습을 가서 세훈의 의자는 경수의 가방이 차지했다.

 



“오늘 뭐 하게?”


“나 수학, 어제 못한 거.”

 



고개를 끄덕거린 경수가 머리를 쓸어 넘기며 책으로 시선을 옮긴다.  책들 사이에서 '수학의 정석'을 꺼내는데 반으로 접혀있던 종이가 책상 위로 툭- 떨어졌다.  그걸 가만히 응시하던 종인은 교실의 산만함을 빌어 2. 칸을 채우기 시작했다.  종이는 고이 접혀 가방에 넣어졌다.

 
 

너무도 조심스러워 채 다 적히지 못한 그의 2번은 이런 것이었다. 

'친구'

 




 

2-2. 흔한 3월의 토요일

 

 


오늘의 날씨 : 맑음.  

 
 

한동안 꽃샘추위로 감기가 유행이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포근해졌다.  꽃이 피는 것을 시샘하는 추위라더니, 교정에 하얀 목련이 송이송이 망울을 틔우고 있다.  준면은 한쪽 눈을 찡그리며 파란 하늘을 올려다 본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바람이 싱그럽다.  아, 기분 좋아.  나의 감수성이 한 층 더..

 

 


"야, 야! 넘친다!"


"미친, 터지는 거 아냐?"


“졸라 무서워! 무섭다고! 악!”

 


 

둥둥 소리를 내며 크게 진동하는 세탁기를 끌어안은 찬열이 악을 지른다.  얘네들 또 무슨 짓이지?  오늘은 세탁실이네. 

 


 

"꺄하하하, 차가워! 이상한 소리 나잖아아, 미쳤나 봐!"


"웃음이 나와, 병신들아!?"

 



배 찢어질 것 같아, 그만해!  웃느라 기진맥진한 백현이 아예 세탁실 바닥에 주저앉아 버린다.  세탁기 문이 닫히지 않은 채 작동하고 있어서 밖으로 튀어나오는 물벼락이 찬열의 얼굴과 몸으로 내리 떨어지고 있다.  경수는 팔짱을 낀 채 멀찍이 떨어져 있고 종대와 세훈이는 그 곁에서 물놀이 중.  빨래 바구니를 들고 서 있는 준면을 발견한 경수가 고개를 숙이며 쪼르르 다가온다.  잠깐, 입 좀 다물고.  난 멋있는 부기(부기숙사장)니까.

 

 


“안녕하세요, 형.”


"어? 형, 형! 박찬열이 세탁기 터뜨려요!"


"너희는 만날 때마다 시끄럽다."

 



경수가 죄송합니다, 웃더니 저도 죽겠어요, 란 말을 덧붙인다.  뒤에서 '살려줘!' 하고 울부짖는 찬열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재미있는 놈들.  준면이 빨래 바구니를 내려두고 벽면에 코드를 하나 하나 뽑아나간다.  세 번째 코드를 뽑았을 때 드디어 찬열이 들러붙어 있는 세탁기가 멈추었다.

 

 


"와, 천재."


"이 정도는 해줘야 부기가 될 수 있거든."


"생명의 은인.. 이에요..헉.. 형.."


“큭.. 청소해놔라.”

 


 

찬열이 몸을 일으켜 터덜터덜 다가왔는데 머리카락이며 옷에서 물이 뚝뚝 떨어진다.  얼마나 난리를 친 건지 얼굴마저 핼쑥해졌다.  큰 개처럼 머리를 흔들어 물이 튄다.  에잇, 차가워.

 

 


“종대야, 종인이는 아침부터 우리 방 와 있더라~”


“걔 아직도 거기 있어요?”


“민석이 형이랑 둘이요? 그럼 점심 형들이랑 먹은 거에요?”

 

 


동그랗게 놀란 다섯쌍의 눈이 준면에게로 쏠렸다.  세탁기에 빨랫감을 쏟아 부으며 준면은 천진하게 고개를 끄덕거린다.

 

 


“병아리들아, 세탁기 돌릴 때 뚜껑부터 닫는 거야. 알겠지?”


“웬일? 김종인 낯가리기 세계 챔피언 아니었냐?”


“그러게, 난 지금도 어색한데. 힛..” 


“형 말 듣고 있니?”


“와, 김종인 나쁜 새끼. 우리 방엔 오지도 않으면서!”

 


 

주르륵.  내 말 좀 들어주라고.  준면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버튼을 누른다.

 

 


“민석이 형도 낯가리지 않아요?”


“응, 그래도 잘 붙어있더라.”

 


 

근데 둘 다 말은 안 해.  준면이 비밀처럼 속삭이며 키들거린다.

 

 




“형, 이것도 여쭤봐도 돼요?”

 

 


준면의 책상에 앉아있던 종인이 몸을 일으킨다.  ‘기숙사 일보’에 실릴 기사를 작성하고 있던 민석이 재빨리 노트북을 덮어버렸다.  아무리 다 볼 거라지만 아직 수정도 거치지 않은 날 것이라 창피하다.  '네가 쓴 거, 다 초딩 댓글 같아.', 준면의 의견이지만 스스로도 동의하는 바이다.




"아직 보면 안 돼서.."




종인이 살짝 웃으며 안 볼게요, 하고 들고 있던 책을 내민다.

 

 


“이건 수학 아니잖아?”


“네, 영어인데..”


“경수한테 못 들었어?  나 수학만 잘해, 수학만!”

 


 

되려 당황한 민석이 종인을 올려본다.  ‘수학만 잘해서 미안해’ 표정이다.  그리고 그 맞은편 적지 않게 당황한 종인이 콧등을 긁적이며 ‘아, 아.’ 입만 뻐끔거리고 있다.  타이밍 좋게 철컥-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 동시에 안도의 숨을 내뱉고 만다.  다른 듯, 비슷한 선후배 사이.

 


 

“민석아, 본관 가봐야겠다.”


“오늘? 왜?”


“그 때 말했던 중국 교환 학생 때문에.”


“아, 그래?”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형들, 감사했습니다.”

 


 

고개를 꾸벅 숙이고 방을 나서는 종인에게 준면은 ‘애들 세탁실에 있더라~’하고 일러준다.  조심스럽게 닫히는 문에 민석의 한숨이 따른다.


 

 

 

 

요즘 들어 자주 이런 생각을 한다.  룸메이트인 종대의 정신연령은 몇 살?  흠뻑 젖은 옷가지들은 바닥에 늘어놓은 채  종인이 들어오자마자 잔뜩 울상을 하곤 하소연 중이다.

 

 


“변백현 그 또라이가! 막! 힝.. 옷을 흔들면서 미쳐가지고..”

 


 

오늘의 상대는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한 312호의 변백현이었나 보다.  

 
 

처음에 수줍어하던 모습은 내숭이었던 게 점점 더 확실해지고 있다.  박찬열까지 셋이서 틈만 나면 아옹다옹.  오세훈은 학교에서는 비교적 양반이기 때문에 제외.  지난 목요일에는 셋이 동시에 우리 반에 들어오겠다고 문에 끼어서 서로 밀고 난리를 쳤었다.  그 민폐를 보다 못한 경수가 ‘또라이 새끼들아!’라고 소리치며 가운데 있던 백현이를 발로 차서 일단락되었지만.  경수가 그렇게 무서운 거 처음 봤다.  그 뒤로 애들에게 ‘헐크’라고 놀림 받는 중.

 

 


“요기 봐봐, 얼굴에..이러케에..”

 

 


손끝으로 물기 어린 턱을 돌려보니 빨갛게 쓸린 자국이 나 있다.  종인의 소매에 매달린 손으로 축축한 한기가 전해진다.  응, 응.  들어주는 시늉을 하며 화장실로 가서 수건을 꺼내는데 가만히 있지 못하고 뒤따라온다.  징징거리는 얼굴 위로 수건을 덮어 버렸다. 

 

 


“애도 아니고, 이게 뭐야.”


“내 말이! 초딩인가 봐, 진짜.. 박찬열은 내 등에 막 매달려 가지고..”


“너 말이야, 너.”

 

 


어이없어 웃음이 나온다.  자긴 억울하다고 항의하는 입술.  계속 꿍얼꿍얼하더니 드라이어를 가져와 종인의 손에 쥐어준다.  내가 하면 감전되니까 말려줘.  말도 안 돼, 하고 얼굴을 밀어내자 손바닥 안으로 웃음이 흩어진다.  훈풍에 금새 입 꼬리를 올리며 무릎에 팔을 걸고 기대는 룸메이트.  차가워.

 

 


“저녁 먹고 산책 하자~ 응?”

 


 

싫다고 해도 끌고 갈 거면서.  종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종인아, 너 길치야?”


“아닌데.”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나선 게 화근.  저녁을 먹고 운동장을 한 바퀴 돌기로 해서 나오는 중이었다.  식당 아주머니가 몸집만한 쓰레기를 옮기는 걸 보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달려가 받아왔는데 소각장이 어디인지 모르는 것이 함정.  처음 저기다, 싶어서 간 곳은 체조실이었고 거기서 뒤쪽으로 발길을 뻗은 종인을 군말 없이 뒤따랐다가 학교 텃밭인 듯 보이는 공터와 창고에 가로막혔다.  김종인은 길치가 분명해.  먼저 발걸음을 돌렸다가 걸리적거린다고 같이 들고 있던 쓰레기를 빼앗겼다.

 이미 해가 저물어 산 중 학교는 몸을 어둠에 숨겼다.

 

 


“우리 손 잡을까? 여기 왜 이렇게 깜깜해, 뭐 나올 것 같아아..”

 


 

응?  종대는 찬 손에 감긴 온기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지금 이게무슨 상황인가 싶어 그대로 시선을 위로 올렸다.  앞을 향해 있는 룸메이트의 얼굴에는 일말의 감정도 담겨있지 않아 그는 지금 자신이 과민한 건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손을 잡는다는 행위는 종대에게, 아니 또래 남학생들에게는 너무 낯선 것이었다.  특히나, 같은 남자끼리!  잡힌 손을 의식하기 시작하자 손이 잔뜩 굳어 어정쩡하게 걸쳐있었다.  

 
 

불편해, 불편해.  그냥 한 말을 곧이곧대로 들어주는 종인이가 이상한 건지 아니면 지나치게 착한건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끌려갔다. 

 

 


“찾았다.”

 


 

멍해진 종대를 끌고앞서 가던 종인이 뒤로 돌아보며 환하게 웃는다.  종대의 눈이 동그래졌다가 어색한 웃음으로 바뀌었다. 

웃는 거 귀엽다.  심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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