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안녕, 302호 

 



교정은 하얀 눈으로 덮여 있었다.  온통 하얘서 눈이 시리다.  지난밤에 꽤 많은 양의 눈이 내려 오르막길 끝에 있는 학교 앞까지 버스는 올라갈 수 없다고 했다.  때문에 종인은 전 정류장에서 학교까지 약 20분의 거리를 걷고 있었다.  양 옆이 논뿐인 오르막 눈길에 새겨지는 발자국에 달그락거리는 낡은 캐리어 소리가 바짝 따라붙었다.  I 고등학교는 소망원에서 버스로 2시간이나 떨어진 거리에 있었다.  성적이 출중하거나 예체능에 두각을 나타내는 학생만이 특정한 입시를 거쳐 입학할 수 있는 명문 학교였기 때문에 종인은 원거리 통학이라는 하찮은 이유로 진학을 포기할 수 없었다.  운 좋게도 작년 가을에 완공된 기숙사를 올해부터 이용할 수 있다는 연락을 받은 것은 얼마 전 일이다.  입시 성적 우수자 일부와 원거리 통학생이 우선적으로 기숙사를 배정받을 수 있었는데 종인은 두 가지 기준 모두에 합당한 학생이었다.  합격 통보를 받은 날, 수녀님의 손을 마주 잡고 기도를 했다.  그 기도는 생애 처음으로 감사하다는 내용의 것이었다.  교문에 서 잠시 숨을 골랐다.  운동장에는 눈이 더 두둑하게 쌓여있었다.  종인은 그것이 이불 같다고 생각하고는 픽- 웃어버렸다.  2시간 내리 타고 온 버스에서는 분명 마음이 무거워 잠도 오지 않았는데 도착하자마자 온데간데없이 해방감에 젖어 들었다.  당분간 그 곳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학교는 외따로 있는 것치고는 제법 크고 멋있게 세월을 맞이한 것처럼 보였다.  운동장이 넓은 것이 마음에 들었고 각각의 건물이 새 것은 아니지만 아늑하게 느껴질 만큼만 낡아 있었다.  학교를 둘러싸고 있는 벽은 낮은 편이었는데 걸음에 따라 그 뒤로 펼쳐진 논과 나무로 빽빽한 작은 산들이 보였다.  할 수 있는 게 공부밖에 없어서 대학을 잘 가는 게 아닐까?  교정을 가로지르며 주머니에서 미리 받은 안내문을 꺼냈다.  약도와 함께 학교에 대한 간단한 설명과 건물명 등이 적혀있는 것이었다.  제일 먼저 다다른 본관은 굳게 잠겨 있어 통과해서 가려던 생각을 버리고 건물 옆구리를 끼고 돌아 뒤쪽으로 향했다.  눈같이 새하얀 기숙사 건물.  또래에 비해 키가 큰 종인을 일찍이 발견한 경비 아저씨가 창을 열고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건물로 들어서자 갇혀 있던 쌀쌀한 기운이 몸을 감쌌다.  경비 아저씨께 건네받은 열쇠가 겨울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거린다.  그는 두리번두리번 복도를 살피며 계단으로 향했다.  1층에는 교무실, 의무실 같은 것들이 늘어서 있고 2층부터가 기숙사였다.  4층은 기숙사 전용 도서관과 자율학습실이 있다고 적혀있어 더 유심히 봐 두었다.  4층과 본관은 구름다리로 이어져 있었는데 유치하게 꼬마전구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것이 창문으로 보였다.  입학식을 2주나 앞둔 때라 기숙사 건물은 텅텅 비어있다.  3층 끝의 302호.  주저 없이 열쇠를 맞추어 돌리고 문을 열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이 너무 환해서 팔로 얼굴을 가리며 눈을 꽉 감고 말았다.



“누, 누구세요!?”

 


낯선 목소리가 저를 가리킨다.  햇빛에 감싸여있는 인영에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이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전개다. 기숙사에 먼저 온 학생이 있고, 하필 저와 같은 방이라니. 



“아, 설마 내 룸메? 우와, 나처럼 일찍 들어오는 사람이 있구나아-”

 


언제 놀랐냐는 듯 입 꼬리를 늘려 웃고 있다.  종인은 당혹감을 숨기지 못한 채 좁은 현관에 서 있다 거침없이 손을 뻗은 허여멀건 놈에게 캐리어를 빼앗겨버렸다.  그는 끙차, 하며 캐리어를 들어 한 쪽 침대 옆에 놓더니 쨍한 목소리로 ‘너무 무겁다, 짐이 왜 이렇게 많아?’라고 물어왔다.  물어본 게 아닌 것 같기도 했다.  곧 또 다른 말을 늘어놓았으니.  하지만 종인의 귀에 담기는 건 아무것도 없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신발을 벗었다.  룸메이트의 입술이 아직도 움직이고 있다. 

 


“잠깐. 그만 말해, 너.” 



적대적인 말투가 튀어나간 것에 스스로도 놀랐다.  명백한 실수.  벌어져있던 입이 스을쩍- 다물리는 것이 슬로우 모션처럼 눈에 들어왔다.  휘어져있던 눈은 원래대로 돌아가 아까와는 달리 조금 차가워 보였다.  처음부터 엉망이다, 김종인.

 



“헤헤, 내가 좀 시끄러웠지? 나도 모르게 반가워서.. 미안..”

 



뒷머리를 긁적이며 혀를 살짝 내민다.  눈은 다시 반달이 되어 있었다.  다람쥐?  성격이 좋은 거야 아니면 멍청한 거야?  생각과는 달리 종인의 얼굴에 안도감이 내려앉았다.

 



“공부하려고 일찍 왔는데 막상 오니까 혼자 너무 무섭잖아!”

 



얇은 입술을 삐죽이며 우는 시늉을 한다.  맞은편 침대에 걸터앉은 종인은 지나치게 살가운 이에 낯을 가리며 어쩔 줄을 모른다.  태연해 보인다는 게 함정.  그는 사교성을 ‘시간 낭비를 위한 준비물’이라고 생각하는 재미없는 청소년이었다.  대꾸해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 그 움직임대로 눈알만 움직였다.  마주 웃자니 웃음이 나오지 않았고 무시하자니 그러기는 싫다.

 



“나는 김종대, 넌?”


“아.. 김종인.”


“김종인? 우리 형제 같아, 김종인, 김종대. 그치?”

 



고개를 크게 끄덕이고는 후회했다.  뭔가 바보스러워진 기분.  그와 상관없이 종대라는 애는 여전히 웃음기 띈 얼굴로 침대로 가 하고 있던 짐 정리를 다시 시작했다.  계속 시끄럽게 떠들기만 하는 애는 아닌가 보다.  진심으로 다행이었다.

 



“창문 닫을게.”

 



종인은 또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놀랐지만 이렇게 된 이상 어차피 함께 지낼 사이였으니 상관없다.  더군다나 성격이 이상하거나 더러운 놈이랑 한 방이 될까 걱정이었는데 아닌 것에 감사할 일이었다.  힐끔- 시선을 던졌다.  두꺼워보이는 회색 후드에 파묻혀 있는 것처럼 보이는 종대가 책을 펴 보고 있다.  하얗다.  뭐가 즐거운지 입 꼬리가 계속 올라가 있었다.  나쁘지 않다.  

 
 

눈을 돌려 방을 둘러보았다.  종대가 먼저 고른 화장실 쪽이 확실히 답답해 보여 상관없겠냐 물었지만 웃으며 고개를 젓는다.  칸막이가 있는 책상에 책들을 올리고 옷장에 대충 옷가지를 정리해 넣었다.  캐리어 안에 남은 건 CD 플레이어뿐.  짧다면 짧지만 16년 인생의 전부가 캐리어 하나로 끝이라니, 씁쓸한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종대는 정리를 하다 알프레트 브렌델의 「피아노를 듣는 시간」을 발견했다.  좋아하는 책이다.  짐을 대충 쓸어 담아 왔더니 그 속에 섞여 있었던 모양이다.  무의식적으로 책을 펴 읽어 내려간다.  정신 없이 빠져들어 책에 언급된 세레나데를 흥얼거리다가 문득 방 안에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살짝 책을 내려 반대쪽에서 짐을 정리하고 있는 룸메이트를 관찰했다.  [덩치가 크고 쌍꺼풀 짙음, 얼굴이 까맣고 30분에 한 대씩 담배를 태울 것 같은 인상과 어두운 오오라 有] 이것이 어색함을 지우려 여러 말을 늘어놓는 저에게 닥치라고 일침을 날린 상대에 대한 첫인상이었다.  솔직히 삐쳤지만, 아니, 아니지.  울컥했지만 참았다.  단 몇 초의 순간으로 같이 지내야 할 저 애를 판단하고 싶지 않다.  분명 친해질 수 있을 거야.  지금까지 이런 종류의 믿음은 한 번도 종대를 배신한 적이 없었다.  그래, 친해질 수 있어!  그럴 수.. 있겠지?


갑자기 종인이 몸을 일으킨다.  종대는 얼른 책을 고쳐 들었다.  부스럭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귀를 간질인다.  책상 앞에서 무언가 정리하며 제 눈치를 보는 것이 또렷이 느껴졌다.  종대의 신경이 온통 종인에게로 쏠렸다.  힐끔 보니 안절부절 못하는 표정.  뭐 하는 거지?  갑자기 왜 내 눈치를 보는거야아아!  눈앞에 있는 글씨들이 제멋대로 울렁거렸다.  종인은 한참을 더 서있더니 침대로 돌아갔다.  조용한 방에 서먹서먹한 둘이 있으려니까 긴장감이 흘러 넘치네.  응?  저게 뭐지..

 



“풉..”

 



종대는 얼른 웃음이 새어 나온 입을 막고 종인에게 시선을 던졌다.  비어있던 종대의 책상 위에 무언가 잔뜩 어질러져 있다. 


 
 

반짝거리는 포장지의 사탕과 젤리 한 움큼. 

 



“야, 이거 뭔데에?”


“아.. 그냥.. 동생이 가방에 넣어놨어.”

 



종인이 콧등을 긁적거렸다.  책상 위의 작은 것들을 모아 쥔 종대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 안에 담긴 사탕과 젤리는 그 주인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서 조금 더 기쁜 마음이 되었다.  그것들이 종인을 대신해서 안녕이라고 속삭였다.  입술 위에 앉은 웃음.  머릿속 김종인 분석지에 하나가 추가되었다.  [덩치가 크고 쌍꺼풀짙음, 얼굴이 까맣고 30분에 한 대씩 담배를 태울 것 같은 인상과 어두운 오오라 有, 의외로 귀여움?]

 



“아하하학! 끄앙!”

 



아까 책상 앞을 서성이던 것이 고작 이것 때문이었다는 걸 상기하자 종대는 더 크게 웃어버렸다.  종인이 고개를 숙이며 웃지 말라고 읊조렸는데, 귀 끝이 빨개져 있었다.  우리 잘 지내자, 종인아!

 




 

1-2. 알 수 없는 룸메이트

 



종이 소리-  종대는 여전히 눈을감은 채 가만히 누워 있었다.  몇 시지, 배고프다, 김종인 저 독한 놈, 목말라 등을 머릿속에 주문처럼 늘어놓고 있다.  

 
 

그는 잠에서 빠져 나오는 이 시간을 좋아했다.  시침 소리, 냉장고 소음, 종인의 책장 넘기는 소리..  의식하지 못했던 소리들이 점차 또렷해지면서 베개를 끌어안고 뒹굴고 싶은 기분이 되는 시간.  빛을 머금은 이불 속이 환하다.  이불을 헤집고 얼굴을 내놓자 빈 책상 위쪽으로 종인의 까치집이 보였다. 

 



“꿍.. 몇 시야?”

 



종인의 대답은 들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이어폰을 끼고 있을 테니까.  기숙사 생활 5일째, 김종대의 아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12시가 넘는 시간에 겨우 일어나 공부하던 종인을 데리고 점심을 먹으러 가는 것이 첫 일과.  이불로 몸을 둘둘 만 채 바닥으로 늘어져 내려왔다.  꼬물꼬물 움직여 종인의 책상 옆까지 기어갔지만 얼마나 집중을 했는지 부릅뜬 시선이 정면을 벗어나지 않는다.  가만히 보고 있다가 발목을 잡자 큰 몸이 펄떡거렸다.  날아오르는 줄 알았다.

 



“야, 이씨!”


“크큭.. 짱 웃겨..”


“놀랐잖아.”


“헤.. 밥 가자아, 나 배고파.”


“눈이나 뜨고 말해라.”

 



점심 메뉴는 돈가스와 모닝 빵, 딸기잼 그리고 수프.  식판을 내려놓기가 무섭게 종대가 모닝 빵 한 개를 갈라 딸기잼을 푹 짜 넣고 입으로 가져갔다.  나머지 한 개는 포크에 꽂힌 채 김이 나는 수프에 담가진다.  두손에 빵을 차지하고 신이 난 표정이다. 

 



“오늘은 며 띠부터했쩌?”


“9시, 다 먹고 말해.”

 



부은 눈을 반만 뜬 채 그야말로 와구와구 먹는다.  종대의 식판에 종인은 자신의 빵을 놓아주었다.  돈가스를 욱여 넣으면서 ‘공부에 미친 놈, 독한 놈.’하는데 감으로 알아들을 뿐, 그 내용에 확신은 없다.  한참을 우물거리더니 갑자기 입술을 삐죽-

 



“먹으니까 또 졸려.”

 



종인은 젓가락으로 반찬을 뒤적거리며 그런 그를 빤히 쳐다봤다.  맞은편에서 아예 눈을 감고 새 빵을 입에 앙 넣고 있다.  조그만 놈이 먹기는 더럽게 많이 먹는다니까. 

 



“애 이어케..”


“삼키고 말해.”

 



종인을 흘겨본다.  볼에는 빵빵하게 음식이 들어차 있다. 

 



“다람쥐.”

 



종인이 포크로 그 볼을 툭툭 건드리며 웃자 종대는 팔을 휘저으며 ‘하지마아아!’라고 마음속으로 소리친다.  입 속이 꽉 차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왜 이렇게 피곤하지? 밥맛도 없는 것 같아.”

 



밥맛이 없어서 그렇게 먹는구나.  돈가스를 썰다 말고 아예 포크로 통째 찍어서 입으로 가져가고 있다.  뚱한 표정을 보면 밥맛이 없다는 말이 진심인것 같은데 양 입가에 소스가 묻던지 말든지 막무가내로 돈가스를 쑤셔 넣는 걸 보고 종인은 할 말을 잃었다.  기가 차서 입까지 벌어진 채 종대의 식사를 구경 중.  잠시 포크를 내렸을 때, 휴지를 접어 입가로 가져갔다.  종대가 놀란 듯이 얼굴을 뒤로 뺐다.  눈이 번쩍 뜨여 있다.  동생 소윤에게 해주던 버릇이 나온 것인데 불편하게했나 싶어 종인은 얼른 손을 거두어 식탁 아래로 내렸다.  하지만, 다시 돈가스를 입에 넣은 종대가 입술을 쭉 내밀었다.  또 해줘.  민망해졌던 종인의 손을 달랜다.  나중에는 장난을 치며 닦아 주지 않았더니 소스가 턱 끝까지 흘러내려 바보 같은 꼴이 되어 있었다.  웃긴 놈. 

 



“너 집 밖에서 자는거 처음이야?”

 



괜히 지금 물었다.  하나 남아있던 빵이 막 종대의 입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왕 너 엉더크 앙댜?”

 



어떻게 알았냐고 묻는다(고 쓰고 빵을 먹는다고 읽는다).  그가 빵을 다 넘길 때까지 기다렸다.  거의 일주일이 되어 가는 동안, 종인이 제게 먼저 무언가 물어온 것은 처음이다.  종대는 빠르게 빵을 씹어 삼키고 끝-, 빙긋 웃는다. 

 



“근데 어떻게 알았어? 나 집에선 형이랑 같이 자.”


“너 요즘 자도자도 피곤하지 않냐?”


“응, 맞아!”


“가위 눌려?”


“그게 가위인가.. 아무튼 응응! 뭐야아, 너 신기 있어? 짱!”

 



종인은 어깨를 으쓱거린다.  고개를갸우뚱거리는 종대를 앞에 두고 종인은 회상에 잠겼다.  기숙사에 온 첫째 날 밤이었다.

 

저녁을 먹고 청소까지 마친 후, 종인은 책상에 앉았다.  이미 이불 속으로 들어가 미친 거라며 절규하는 종대를 가볍게 무시하고 이어폰을 꼈다.  한 시가 아까웠다, 앞으로 3년이 제 인생 마지막 기회라 여기는 종인에게는.  오늘은 수리. 

 

3시간 쯤 지났을 때다.  종인은 뻐근해진 목을 주무르며 몸을뒤로 한번 젖혔다.  이어폰을 빼자 방은 무거운 정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손목시계의 시침이 가리키고 있는 숫자 12.  몸을 살짝 일으켜 반대쪽 침대를 보았다.  룸메이트는 자고 있었다.  아니, 그렇게 말하기엔 무리가 있지. 

 



“으응... 으.. 끄으으..”

 



악몽이라도 꾸나?  취침 시간의 정적 속에서 그는 간헐적으로 신음하고 있었다.  혹시 불빛 때문일지도 몰라 바로 책상에 붙어있는 스탠드를 켜고 방의 불을 껐다.  하지만, 끙끙거림은 계속 종인의 귀를 괴롭혔다.  다음 날도 마찬가지고, 그 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간혹 울기도 했다.  종인은 공부를 하다 갑작스런 흐느낌 소리에 놀라 뒤를 돌아본 적도 있다.  종대인 걸 확인하고는 혼자 무안해져서 헛기침을 했었지.  아무튼, 이런 이유로 종대는 아침마다 녹초 상태로 일어났다.  어제는 두통이 심하다며 약을 먹었다.  날이 갈수록 눈 밑이 퀭해져 첫날의 해사함은 지워진 지 오래다. 

 



“..... 야! 무슨 생각하는 고야~안 갈 거야?”

 



몸을 일으켰다.  본인은 모르는것 같다, 밤새 앓고 있다는 것을.  앞서 가는 뒷모습을 보며 종인은 말을 삼켰다.  정신적인 문제가 있어서일까, 단순히 잠자리가 바뀌어서일까.  섣불리 말을 꺼내지 못하겠다.  종인도 어렸을 때 비슷한 수면 장애를 겪은 적이 있어 더 신경이 쓰였다.  일단 며칠 더 지켜보기로 한 그는 앞에서 팔을 방방 흔들고 있는 종대에게로 걸음을 빨리 한다.

 
 

종인은 지금까지의 친구들과는 무언가 다르다.  저 애가 가지고 있는 나지막한 분위기.  가끔은 예상치 못한 행동으로 저를 놀라게 한다.  이를테면, 지금처럼 휴지로 입가를 닦아주는 손길이 그렇다.  잘못을 저지른 표정으로 황급히 손을 숨기는 저 모습도.  알면 알수록 이상한 룸메이트.  평소에는 무관심한 표정과 말투로 일관하며 보이지 않는 선을 긋는 것이 느껴지도록 한다.  뭐든지 적당히 반응해주고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이 종대에게 맞춰준다.  가까이 다가가려 하면 갑자기 곤란한 얼굴로 자신의 영역(종인의 침대와 책상)으로 들어가 이어폰을 끼고 책을 펴버린다.

 



“너 집 밖에서 자는거 처음이야?”

 



그런 주제에 종인은 멋대로 저의 가장 가까이로 다가와 버린다.  난 안 되고 자기는 된다는 식이다.  연달아 몇 개의 질문을 더 했는데 하나같이 의도를 알 수 없는 것들이다.  왜 이런 걸 물어보지?  그러더니 갑자기 대화를 뚝 끊고 혼자 깊은 생각에 빠져있다.  또 다시 멀어진 기분.  아, 피곤해.

 



“편의점 갔다 올게.”

 



아래에서 가만히 종인을 기다린다.  혼자 있으니까 금세 머리가 멍해진다.  너무 피곤해.  어제는 연습을 하다가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서 양호실에서 두통약까지 받아먹었다.  잠자리가 바뀌어서 그런지 새벽에도 여러 번 깨고..

 



“자.”

 



종대의 이마에 차가운 게 닿는다.  응?  고개를 드니 종인이 커피 우유를 들고 있다.

 



“피곤하니까 커피, 근데 밤에 잘 자야 되니까 우유로.”

 



또.  가장 가까운 곳으로 다가와 있다.

 



 


1-3. 우리의 온도

 

 


양치를 하고 나오니 웬일로 종대가 책상 앞에 앉아있다.  열심히 무엇을 끄적거리고 있는 어깨.  공부하는 건 처음 보네.  로션을 바르며 그 반대 쪽 책상으로 가 앉자 몸을 일으켜 눈을 맞춰온다.

 



“종인아, 이거 봐봐.”




 
 

책상 벽을 넘어온 손에 들린 흰 종이.

 



“푸하.. 이게 뭐야?”


“웃지 말고오! 그거 보니까 무슨 생각이 들어?”


“음.. 내가 진짜 이런가?”


“바보야, 내 꺼도 같이 봐.”

 



아무리 봐도 모르겠는데, 라고 중얼거린 종인이 콧등을 긁적거린다.  종대는 못마땅하다는 표시로 입술을 삐죽삐죽-  그러더니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한다.

 



“우리 친해질 시간이 없어. 이건 정말 심각해.”

 



다시 한번 그 종이를 들여다본 종인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바보 아냐? 

 



“큭.. 그래서? 어떡하자고.”


“그, 그러니까 저녁 먹고 같이 운동도 하고! 그러자는 거지.. 아, 공부도 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하는 종인 때문에 혼자만 심각했던 것이 조금 창피해졌다.  종이를 빤히 들여다보고는 있는데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같이 밥 먹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제대로 대화를 나눈 적도 없는 것 같다.  벌써 한 방에서 지낸 지 일주일이 넘었는데 말이다.  어쩌면 종인이는 이대로가 적당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나 혼자..

 



“무슨 밥 먹을 준비를 한 시간씩 하냐?”


“짐 싸고 막 이것저것 하는 거거든~”


“잠은 도대체 몇 시간을 자는 거야..”

 



왜인지 모르지만 약간 풀이 죽은 종대의 눈치를 살피며 괜한 핀잔으로 놀려보지만 멋쩍게 웃기만 한다.  그러더니 슬그머니 몸을 내려 시야에서 없어졌다.  내심 당황한 종인이 얼른 옆에 있던 연필을 종이 위에 세운다.

 



“그렇게 할까?”

 



눈 앞으로 팔랑거리며 떨어진 종이.  엎드려 있던 종대의 손에 들려진다.  헤헤.

 
 

지금이 ‘종대랑 놀기’ 시간인데, 라고 말하자 책상 너머로 뭐할까? 물어온다.  작게 써 내려진 ‘종대랑 놀기’라는 종인이의 글씨마저 그답다.  귀엽다니까.

 



“오늘은 같이 영화 보자! 내가 과자 사올게!”


“야, 야! 같이가!”

 



302호는 따뜻해지는 중.

 

 




1-4. 302호의 불면

 

 


302호가 주인을 맞은 지 10일째 되는 수요일.  종인이 잘 떠지지 않는 눈을 깜빡거리며 몸을 일으킨다.  얼굴에 드리운 돋을볕에 미간이 좁다.  커튼이 없어 임시방편으로 무슨 용도인지 모를 얇은 천을 겨우 테이프로 붙여놓는데 아침이 되면 항상 바닥으로 떨어져 있다.  피곤해서 도저히 이불 밖으로 나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벌러덩 다시 누워버렸다.  빠르게 다시 잠에 빠지면서도 그는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이따가 열심히..

 

다시 일어난 건, 12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간.  부은 두 눈 가득 졸린 기운이 가득하지만 팔을 젖혀 몸을 깨우곤 서둘러 침대를 벗어난다.  요즘 통 잠을 못 자 눈 밑이 푸르스름했다.  이불 속의 룸메이트를 위해 까치발을 든 그의 몸짓에 조심스러움이 묻어있다. 

 

 




“오늘은 혼자네?”

 



여전히 피곤한 얼굴로 멸치를 깨작거리고 있는 종인의 맞은편 의자가 당겨졌다.  어제 저녁에 312호로 입실한 도경수였던가.  아직 입실한 사람이 거의 없어 수건을 빌리러 먼 302호까지 찾아왔었다.  김종대라면,

 



“어, 안 일어났어.”


“어제는 고마웠어, 나중에 빨아서 갖다 줄게.”


“그냥 가져.”

 



에이, 그래도.  ‘반듯반듯’이라는 말이 쓰여 있는 느낌이 드는 얼굴이다.  짙은 눈썹 아래에 동그란 눈.  덩치는 종대랑 비슷하네, 라고 생각하며 302호의 이불 속을 떠올렸다.  천천히 점심을 먹으며 경수와 이것저것 얘기를 나누었다.  아니, 얘기를 나누었다고 말하긴 어렵고 경수의 질문에 종인이 대답하는 식의 것이었다.  거의 기숙사에 대한 질문이라 대답하기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룸메이트인 종대와도 이렇게 긴 대화는 아직 해본 적이 없던 터라 종인의 얼굴에 불편함이 서려있었다.

 



“되게 알기 쉽다, 너. 표정에 다 티나.”


“뭐가?”


“나랑 있는 거 불편하다고 써 있어.”

 



웃으며 정곡을 찔러 와서 종인은 당황했다.  아니라고 말하는데, 한 음절마다 더듬거리고 말았다.  차라리 솔직히 불편하다고 말할 것을.  헛기침을 하며 경수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까만 눈동자가 올곧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채근하는 눈빛은 아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어른스러운 눈빛.

 



“내가 좀.. 낯가려서.”


“알았어. 어제 처음 봤는데, 어색한 게 당연하지.”


“어, 음.. 그렇지.”


“그거 알아? 기분이나 상태를 먼저 알리면 말하기가 훨씬 수월해진대.” 

 



다음에는 나한테 네가 어떤지 먼저 말해봐.  종인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둘은 다시 숟가락을 들었다.  신기하게도 불편했던 마음이 조금 수그러들었다. 

 



“집 멀어?”


“응, 두 시간 거리.”


“나랑 비슷하네! 아, 그래서 말인데, 수건 좀 늦을 거야. 어머니가 보내주신다고 했는데 이틀은 더 걸릴 것 같거든.”

 



됐다니까, 종인은 픽- 웃음이 났다.  그 다음 경수가 단호한 표정으로 ‘안 돼, 나 빚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란 말이야.’라고 받아쳐 웃음이 더 커졌다.  하찮은 것에까지 성격을 적용하는 진지함이 일순간에 ‘도경수’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대변하는 것 같아서 웃겼다.  한마디로 괴짜네.  그 앞에서 경수는 비웃 듯 한 쪽 입 꼬리만 올리며 도대체 뭐가 웃기냐고 묻더니 이내 저도 활짝 웃어버린다. 

 

복도에서 서로의 방을 향해 양쪽으로 갈라섰다.  자습실에 갈 거라는 종인의 계획에 경수가 동참하기로 해서 1시에 만나기로 했다.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천천히 돌려 문을 열자 아늑한 냄새가 얼굴을 감싼다.  정적마저 온기를 띄고 있는 방 안, 한 침대에는 여전히 이불이 번데기처럼 말려 있다.  끙끙거리는 소리가 작게 새어 나온다.  그래도 점심시간이 되면 일어나서 밥은 꼬박 챙겨 먹더니, 어제랑 오늘은 아예 일어나지도 못 한다.  가방에 책을 넣던 종인이 잠시 손을 멈추고 그에 시선을 던진다.  새벽에 더 심하던데.  며칠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 생각했지만 그 반대여서 걱정이 불었다.  혹시 지나친 참견일까 싶어 옆에서 살피고만 있는 종인이다.  가방 지퍼를 올리고 고개를 숙여 책상 위 포스트잇에 글씨를 써내려 간다.  사각사각 글씨 소리, 끙끙 종대 소리.  포스트잇을 종대의 책상 위에 붙였다.

 




 

“미안, 많이 기다렸어?”


“아니.”


“핸드폰 번호 알려줘, 늦는다고 미리 연락도 못 했네.”


“핸드폰 없는데.”


“대박 사건.”

 



어울리지 않는 신조어를 툭 내뱉더니 공부 때문이라고 하면 죽여 버린다, 라는 말을 덧붙인다.  종인은 미소를 띠며 굳이 정답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손가락마저 무겁다.  종대는 흰 건반 위에 놓여있는 손가락과 울렁거리는 악보를 번갈아 보다가 천천히 옆으로 몸을 기울여 긴 피아노 의자에 누웠다.  감기는 눈.  머리가 지끈거려 눈 속까지 아픈 느낌이다.  아, 눈 아파..  졸려.. 

 

 




“윽..!”

 



종대가 눈살을 찌푸리며 몸을 일으켰다.  깜깜해진 것을 알고 서둘러 피아노 위에 올려두었던 핸드폰 버튼을 누른다.  07:50, 숫자가 크게 떠올랐다.  부재중 전화는 없음.  밥 혼자 먹었을까?  일어났을 때, 제 책상에 붙어있던 포스트잇이 《오늘부터 자습실 열려서 간다. 6시에 밥 먹으러 가자. -종인-》 

 





“종인아!”

 



불이 꺼져 있다.  온 몸에 힘이 빠져나가는 기분.  종대의 어깨가 힘없이 늘어졌다.  긴 속눈썹이 아래로 처져 뾰족한 그림자를 만든다.  터덜터덜 불도 켜지 않고 이불 속으로 쏙-  온기라곤 한 톨도 느껴지지 않는 방의 고요한 공기가 그를 짓누른다. 종대는 몸을 옆으로 웅크렸다.  찡해지는 코 끝.  혼자 있기 싫어.  몸이 안 좋은 만큼 마음도 약해진 모양이다.  온 우주에 이 침대와 저만 덩그러니 남아있는 것 같이 느껴졌다.  이불 밖으로 팔만 뻗어 핸드폰을 찾는다.

 



“... 여부세여.. 엄마.. 뭐해?”

 



밥 먹었냐고 물어오는 엄마의 목소리에 참고 있던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  킁킁거리는 종대에게서 누구보다 빨리 이상한 낌새를 알아챈 엄마는 따사로운 목소리로 귓가를 어루만진다.

 



‘우리 아가,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그러게, 왜 그렇게 빨리 갔어~’


“웅.. 몰라, 엄마. 나 아픈 것 같다..”


‘어디가?’


“히잉.. 몰라, 너무 피곤하고 머리도 아프구우..”


‘집으로 올래? 아빠 보고 데리러 가라고 할까?’


“아니, 그냥 잘래.. 내일 전화할게.”

 



더 많은 눈물이 쏟아질까 종대는 급히 전화를 끊어버린다.  쳇, 아무리 엄마라도 창피해.  종인이 놈은 언제 오는 거야?  배고프다.  바보같이 핸드폰도 없어가지고, 우리 학교에서 핸드폰 없는 놈은 김종인 한 명 일거다.  혼자 밥 먹고 신나게 공부하고 있겠지, 나쁜 놈.  근데, 핸드폰이 있었으면 6시에 나한테 왜 안 오냐고 전화했을까?  그 때, 달칵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마음속으로 욕하던 것이 찔린다.  양반은 아니야.  곧장 침대 쪽으로 다가온다.  또 자네, 하고 속삭이는 종인이.

 



"어어? 일어났.."

 



이불을 걷고 놀란 표정을 지은 종인의 목에 무작정 매달렸다.  두꺼운 몸이 휘청거린다. 

 



“왜 이래?”

 



퉁명스러운 물음과는 달리 손은 종대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고 있다.  어떻게 이리 어른스러울 수 있을까, 저와 같은 17살 남자 아이일 뿐인데.  질색하며 내팽개쳐질 예상이 빗나가자 종대는 더 울고 싶은 기분이다.  무거워.  종인은 몸을 틀어 침대에 풀썩 앉았다.  그래도 종대는 단단한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꼬옥 끌어안았다.  원숭이 새끼도 아니고.

 



"숨 막혀. 무슨 일 있었어?"

 



대답도 없이 가만히.  한쪽 어깨가 따뜻하다 못해 뜨거워진다.  다 큰 사내자식이 품에 안겨 우는 건 처음 있는 일이라 종인의 눈썹이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꿈틀거린다.  하지만 등을 토닥거리는 손길은 멈추지 않았다.  작은 몸이 크게 떨렸다.

 



"밥은?"

 



여전히 얼굴은 묻은 채 고개만 젓는다.  302호에는 한참 동안 훌쩍거림이 이어졌다.  떨림이 잦아들었을 때, 종인은 마른 등을 두드리던 손을 멈추고 약간 힘을 주어 몸을 떼어냈다.  종대는 의외로 순순히 떨어졌지만 눈을 가리고 있다.  어정쩡하게 들려있는 팔.  바보.

 



"아파서 그래? 아니면 지금은.. 창피해서 그러지?"


"...킁.. 아이거..든.."

 



종인이 웃자 아니라고오, 항의한다(말끝에 훌쩍거림이 따라왔다).  이마로 손을 가져갔다.  열은 없네.  팔을 든 채 가만히 있는 종대를 옆으로 밀고 몸을 일으켰다.  팔은 안 내릴 생각인가?  어지간히 창피한 모양이다.  키득키득거리며 현관 쪽으로 향하다가 뒤를 돌아보니 살짝 내려오던 팔이 재빨리 다시 올라가는 게 보였다.  진짜 바보.

 





"어디 갔다 왔어.."

 



창피함에 눈도 마주치지 않고 땅바닥만 보면서 물어 온다.  코끝이 아직 빨갛다.  눈가도.  종인은 그 앞쪽 바닥에 앉으며 들고 온 검은 봉지를 내려놓고 안에 들어있는 것을 하나하나 꺼내 놓았다.  파란 포카리 스웨트, 삼각 김밥 두 개, 단팥빵.  삼각 김밥은 종대가 좋아하는 치킨 마요네즈 맛.  단팥빵은 슈크림이 같이 들어있는 것으로.  괜히 입술을 삐죽거리고 있다.

 



"네 밥, 이거 일단 눈에 대고 있어."

 



캔을 받아 눈으로 가져간다.  차가워.  반대로 종인의 마음은 너무 따뜻하고.  종대는 아까의 창피함도 잊고 자꾸 올라가려는 입 꼬리에 힘을 주느라 애를 썼다.  언제 그랬냐는 듯, 음료 캔의 차가움에 머릿속이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한 손에 삼각 김밥이 쥐어졌다.  엄마, 제 룸메이트 천사인가 봐요. 

 





저를 의자에 앉혀두고 분주한 종인에게 의구심 가득한 눈빛을 보내며 투덜거린다.  이렇게 해도 되는 거야아, 진짜?  불편할 것 같은데. 

 
 

듣는 체도 안 하고 열심이다.  묵직한 가구를 옮기는 소리가 요란했다.  방금 종대의 몸 상태에 대해 진단을 내린 야매 김종인 의사의 의견은 다소 난해하면서도 의외의 것이었다.  그런 게 해결 방법이 될 리 없다며 병원에 가보겠다고 했지만 너무도 진지한 표정으로 일단 해보고 얘기해, 라고 말해서 입을 다물었다.  딱히 대꾸할 마음이 들지 않았으니까.  그만큼 지쳐있어서였다.  의자 등받이에 팔을 괸 채 종인을 구경했다.  진지하게 침대 틈에 수건을 욱여 넣고 있다.  우리 쓸 수건은 남아있는 거야?

 



“다 했어.”

 



붙여진 두 개의 침대.  

 
 

수건으로 메운 가운데 틈 위에 매트를 깔며 종인은 조금 뿌듯한 표정이었다.  떨떠름했지만 영혼 없이 와아아- 하며 박수를 쳐주었다.   아무래도 불편할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종인이가 웃고 있었기 때문에. 

 

종인은 삼각 김밥을 꾸역꾸역 먹고 있던 저에게 그 동안의 고민을 털어놓았다.  불면 때문에 몸 상태가 안 좋아졌을 거라고 말한 그가 내놓은 해결책은 살을 맞대고 자자는 것.  누군가 옆에 있으면 안심이 될 거라고.  어렸을 때 자기도 이런 방법으로 불면증을 고쳤다나, 뭐라나.

 





양치를 하고 나오니 종인이 침대 바깥쪽에 엎드려 책을 보고 있었다.  항상 저보다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서 침대에 누워있는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다.

 



“불 끄고 와.”


“어? 지금 자게?”

 



책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고개를 끄덕거린다.  웬일이래.  누워있는 종인을 타넘어 안쪽으로 기어 들어갔다.  침대가 넓어지긴 넓어졌네.  종인이 앞으로 돌아 눕는다.

 



“오늘도 그러면 그냥 깨워, 너도 나 때문에 잠 못 잔 거 다 알아!”


“응."

 



종인이의 옆모습을 보고 있다가 눈을 감았다.  평소보다 침대가 아늑하게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일까.  노곤함이 몰려온다.  누군가 옆에 있다는 사실이 이렇게나 마음에 안정을 주는구나.  신기하네..  곧 차분한 숨소리가 종인의 귀 옆으로 떨어졌다.  10살 때, 갑자기 바뀐 환경과 불안감으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눈을 감으면 무엇인가 바뀌어 있을까봐, 끝이 없는 어둠 속에 혼자 남겨질까봐 무서웠다.  나중에 그런 아이를 잠들게 한 건 ‘사람의 온기’였다.  살짝 고개를 틀어 종대를 보았다.  오늘은 잘 자.

 




 

반짝 눈이 떠졌다.  종대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가만히 있었다.  바로 시야를 채운 옆모습 때문에 놀라 비명을 지를 뻔 했다.  맞다, 이제 우리 같이 자기로 했지.  근데 얘, 웬일로 늦잠을 다 자네.  이것으로 자신 때문에 종인도 그 동안 잠을 설친 것이 분명해졌다.  미안한 마음에 종인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말았다.  다행이 깨지 않았다.  다만, 뒤척이며 돌아누워 등을 보였을 뿐.  베개 옆에 있던 핸드폰을 켜 시간을 확인했다.  AM 11:41.  도대체 몇 시간을 잔 건지 정확하진 않았지만 정말 오랜만에 깊은 잠을 잔 것만은 확실하다.  종인의 널따란 등에 대고 엄지를 치켜세웠다.  김종인, 너 최고.  기분이 좋아 종인의 몸을 따라가 등에 이마를 대고 비볐다.

 



“아이씨, 왜..”


“나 진짜 잘 잤어.. 어제 나 끙끙 안 했지? 그치?”


“......”

 



무시 잼?  최고 취소.  종대는 종인의 등에 얼굴을 묻은 채 다시 눈을 감았다.  그 입가에 서리는 미소.  네가 내 룸메이트인 건 최고의 행운이야.

 



 


1-4. 302호의 소란

 



시간이 흘러 2월 끝자락에 입학식과 반 배정이 있었다.  기숙사는 일주일이라는 짧은 봄방학의 시작과 함께 거의 모든 방이 주인을 맞은 상태였다.  필수로 참석해야 하는 오리엔테이션이 있는 날이 애매하게 봄방학 중간에 껴 있어 기숙사생 거의가 입실을 완료한 것이다.  복도가 시끌벅적하고 식당과 세탁실이 붐벼 종인은 조금 심기가 어지럽다.  방을 나설 때면 항상 심술보가 되어 투덜투덜.   종대는 이런 종인이 귀엽다.  이런 모습은 룸메이트인 저만 꾸밈없이 볼 수 있는 것(혼자만의 생각)이었기 때문에 특별한 사람이 된 기분을 느끼게 했다. 

 



"자습실도 시끄러워."


"종인아, 방에서 해! 나 바로 연습실 갈 거야."


"됐어, 경수랑 세미나실 들어가기로 했어."

 



달래 듯 엉덩이를 토닥거려도 여전히 표정은 풀리지 않는다.  종인이 짜증을 내는 가장 큰 이유는 아마 산만해진 자습실에서 마음껏 공부할 수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아직 학기가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애들이 분위기 잡고 공부를 할 리가 없다.  그런 면에선 종인이랑 경수가 좀 특이하지, 라고 마음속으로 생각하며 종대는 살짝 입 꼬리를 올렸다. 

 




 

"세미나실 괜찮다, 그치?"


"응."


"내일은 내가 맡을게, 몇 호인지는 종대한테 보낼게."


"응, 네 룸메이트는 아직도 안 왔어?"


"사감 선생님 말씀으로는 오늘 올 거라고 하시던데, 잘 모르겠어."

 



경수는 책을 정리해 가방에 넣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둘은 처음보다 많이 친해져 있었다.  경수가 입실한 뒤로 종대와 셋이 밥을 먹는 게 일상이 되었고 자습실도 같이 갔다.  나란히 앉지는 않았다.  처음부터 정해놓은 것처럼 둘은 멀찍이 떨어져 앉아 공부를 했다.  서로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연습실에 갔다 온 종대가 안절부절 못하며 둘이 싸웠냐고 물어서 그게 좀 이상할 수도 있는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종대는 그런 저와 경수가 비슷하다며 깔깔거렸다.  친구는 종대 하나면 충분하겠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경수도 친구가 되어 있었다.  중학교 시절 딱히 '친구'라고 부를만한 사람이 없었던 종인은 그들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는 스스로가 어색했지만 싫지는 않았다.

 



"그럼 이따 봐."

 



둘은 각자의 반대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복도 끝에 있는 큰 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주홍빛.  그 빛 때문에 복도의 소란스러움에 색깔이 입혀진다.  종대가 와 있을까, 생각하며 방문을 열었다가 다시 닫고 나왔다.  나 잘못 들어간 거야?  그리고 그가 닫은 문이 활짝 열리며 반달눈의 룸메이트가 팔을 뻗어왔다.

 



"종인아! 너 뭐하는 거야아! 아, 진짜!"

 



뭐가 그리 좋은지 방싯방싯.   종인은 난감한 표정으로 끌려가다시피 방으로 들어왔다.  낯선 얼굴이 둘이나 제 방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  종대의 친화력에 처음으로 반감을 느끼며 자신에게 손을 흔들고 있는 그들에게 종인은 어색하게 고갯짓을 한다. 

 



"와, 너 여자 깨나 울리겠다."

 



흰 얼굴에 눈이 큰 남학생이 손으로 카메라 앵글을 만들어 보이며 종인을 맞이했다.  종인은 갑작스런 칭찬을 자연스레 받아들이기 힘겨워 억지 웃음(남들이볼 때는 웃음이 아닌)을 지으며 책상 쪽으로 가 가방을 내려놓았다.

 



"나 지금 씹힌 거지, 허허."


"그러니까 졸라 나대지마."

 



그 옆에 있는 날카롭게 생긴 애가 뒤로 몸을 기대며 키들거린다.  

 



"공부도 굉장히 열심히 하나 보네, 허허."


"아, 그만 해. 어색해, 젠장!"

 



종인의 난감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서서 웃고만 있던 종대가 옆으로 다가왔다.  다른 둘은 제 방인 냥 어느새 서로에게 발길질을 하고 있다.  종인의 옷자락을 잡고 얼굴을 들여다본다.  괜찮은지 묻는 표정.  종대의 이마에 콩- 꿀밤을 내렸다.  종인의 표정이 살짝 풀어졌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종대는 종인의 뒤로 가 두 팔을 잡고 옆으로 끌었다.  그리곤 오금을 무릎으로 찍어 앉혔다. 

 



"야..!"


"안녕, 나는 김종인이야. 보기에는 이래도 천사 같은.."


"야.. 그만해.."

 



순식간에 종인의 귀가 빨개졌다.  종대가 뒤에서 종인의 팔을 흔들며 대신 한 자기소개에 앞에 있는 두 명이 웃음을 감추지 못한 채 끅끅거렸다.  안녕.  종대는 해맑게 한 번 더 그의 팔을 흔들었다.  아, 김종대 너 이따가 죽을 줄 알아..

 



"얘네 귀엽게 논다, 큭.. 우리도 질 수 없지, 오세훈 합체!"


"에이, 귀찮게.."

 



세훈이라 불린 애는 언행불일치를 실천하며 스스로 팔을 들고 있었다.

 



"안녕, 난 오세훈. 배구부에서 심부름을 맡고 있지."


"뒤질래?? 아냐, 나 세터야!"


"그리고 난 박찬열, 배구부 센터이자 남신을 맡고 있어."


“네? 낭심이요?”


“미친 새끼야, 남신이라고! 끄악!”


“꺄하항, 너네 짱 웃겨!”

 



둘은 또 포개어져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난리도 아니다.  종인도 살짝 웃음이 나 입을 가렸다.  아, 자존심 상해.  종대가 와중에 웃음이 터진 저를 본 걸 알고 종인의 귀가 다시 빨개진다.  찬열과 세훈은 옆옆 방인 306호에 들어온 배구부생들이라고 했다.  각자 다니던 중학교끼리 대회 결승에서 맞붙은 적이 있어 얼굴을 알던 사이란다.  하지만, 이미 누구보다 친해 보여 어제 만난 사이라고는 믿을 수가 없다.  그리고 정말 시끄러웠다.  종대까지 합세해 신나게 쫑알거리는 걸 보니 오늘 저녁까지 같이 먹으러 가야 할 판이다. 

 



“김종인, 김종대 이름만 보면 완전 형제 아니냐?”


“그치이! 우린 운명이야, 헤-”


“앞으로 302, 306은 일심동체다!”

 



302호가 이렇게까지 시끄러워질 수 있을 줄이야.  종인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 소란스러움이 즐겁게 느껴졌다.  지금까지 이런 적이 있었나.  잠시 생각에 빠져 있었더니 어느새 종대가 곁으로 와 빤히 쳐다보고 있다.  덩달아 뒤에 두 녀석도 종인을 보고 있고.  방이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하다.

 



“종인아, 화났어?”


“아냐, 화가 왜 나.”


 


속으로 계속 저의 눈치를 살폈을 종대를 알기에 종인은 일부러 더 부드럽게 말하며 큰 손으로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종대 대단하다.”


“그러게, 종인이랑 친하다니.”


“야아, 너희 종인이 놀리지 마! 얘 낯가려서 그래~”

 



종인은 이마를 짚었다.  잠시 이런 것도 다 괜찮다고 생각했던 자신에게 욕을 퍼부어주고 싶어졌다.  306호의 악동들은 반짝거리는 눈빛으로 마치 우리도 좋아해줘, 라고 말하는 것 같다.  과연, 친해질 수 있을까?  그 때, 별안간 노크 소리가 소란스러운 우리 사이를 갈랐다.  네 쌍의 눈동자가 문 쪽으로 옮겨진 와중에 종대가 벌떡 일어나 누구냐 외치며 나선다. 

 



“어? 경수야.”

 



난처한 표정의 경수 옆에 몸을 뒤로 숨긴 채 고개만 빼꼼 내민 누군가가 함께다.  처진 눈매.  룸메이트가 왔는데 얘도 수건을 안 가져왔대.  아직 종인의 수건을 돌려주지 못한 경수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작게 속삭였다.

 



“미안, 수건 하나만 더 빌릴 수 있을까? 아무래도 너희가 편해서 왔어, 부족하면 다른..”


“들어와, 들어와! 우리 수건 대따 많아!”

 



찬열이 제 집인 양 소리쳤다.  안쪽에서 들려오는 낯선 목소리에 경수가 고개를 늘려 방 안을 들여다본다.  길게 널브러져 있는 초면의 두 사람과 그들 곁에서 이마를 짚은 채 들어오라고 손짓하는 302호의 주인.  종대의 손에 떠밀려 경수와 그의 룸메이트가 얼떨결에 방 안으로 발을 들였다.  방바닥이 꽉 차 종인이 슬쩍 자리를 내주며 침대 위로 올라간다.

 



“우리 운동부라 수건 100개 있어.”

 



사람 좋은 웃음이다.  큰 눈에 또래답게 서린 장난스러움이 단번에 경계심을 지웠다.  경수는 바닥에 앉으면서 쭈뼛거리는 룸메이트의 소매를 살짝 잡아당겨 옆으로 앉도록 했다.

 



“오버 하지 마, 100개 같은 소리하네.”


“닥쳐, 오세훈.” 

 



경수는 뒤쪽의 종인에게 눈을 돌렸다.  어떻게 된 거야?  종인은 나도 몰라, 어깨를 으쓱거린다. 

 



“나는 도경수고, 312호야. 얘는..”

 



경수는 말끝을 흐렸다.  아직 룸메이트에 대해 아는 게 없는 건 저도 이들과 마찬가지.  모두의 시선이 경수의 룸메이트에게로 쏠렸다.  순해 보이는 얼굴에 당혹감이 서렸다. 

 



“여기선 이렇게 해야돼, 봐봐!”

 



침대 위 종대가 갑자기 쨍한 목소리로 말하며 다시 종인의 팔을 붙들고 흔들었다.

 



“안녕, 나는 김종인이야. 302호 귀염둥이!”


“죽는다, 진짜..”

 



종대의 소개 멘트와 화를 참는 것처럼 눈을 감고 읊조린 종인 때문에 모두 웃어버리고 만다.  마른 공기가 사라지고 일순 분위기가 따뜻하게 일렁거렸다. 

 



“항항, 얘네 이상해.”

 



세훈이의 특이한 웃음소리가 들리고 곧이어 찬열이 냉정한 표정으로 ‘종대, 이따 졸라 맞을 듯.’이라고 말해서 302호의 웃음소리는 더 커졌다.  풀어진 분위기에서 경수의 룸메이트는 나는 변백현이라고 해, 라고 수줍게 자기소개를 했고 동시에 찬열에게서 ‘똥’이라는 유치한 별명을 얻었다.  누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게 우르르 몰려 저녁을 먹으러 갔고 과자를 한 봉지씩 끼고 다시 302호로 돌아왔다.  그들은 오래도록 소란스러웠다.  사감 선생님의 11시 점호 전이 되어서야 각자의 방으로 흩어졌는데 끝 인사는 자연스럽기 그지없는  ‘내일 보자, 친구들.’이었다. 

 


 

 


1-6. 잘 부탁 드립니다!

 



별관 1층 소강당이 전에없이 떠들썩하다.  남자 기숙사 OT가 있어 저녁 식사 이후 모두 모여 있는 탓이다.  제 각각의 활기를 띈 아이들.  그 곳의 한 편에 끼어 있는 우리.  306호의 둘은 야간 훈련 때문에 늦어진다고 했고 종대는 이런 자리에 과자가 빠져선 안 된다며 편의점에 갔다.  경수는 어깨에 기대 졸고 있는 백현 때문에 잔뜩 경직되어 있다.

 



“많이 친해졌네.”

 



종인이 놀리듯 웃는다.  경수는 떨떠름한 표정이다.

 



“별로.. 아직도 시차 적응이 안 된대.”


“아, 근데 이건 왜 가져왔냐?”


“너한테 물어볼 거 있어서. 거기 별표 친 거.”

 



어제 풀었던 문제네.  경수가 백현이 깰까 조심스럽게 팔만 뻗어 그 쪽으로 샤프를 민다.  이거 좀 어려웠어.  종인은 거침없이 풀이를 써내려 간다.  그러다가 갑자기 손을 멈추더니 경수에게,

 



“이렇게 쓴 거, 알아보겠어?”


“아니.”

 



단호한 경수에게 되려 미안한 표정을 보이더니 다시 해줄게, 라며 지우개를 찾는다.  숫자 하나하나를 힘주어 또박또박.  경수는 그 모습을 보며 소리 없이 웃었다.

 



“뭐해애?”


“종대야, 종인이 왜 이렇게 착해?”


“종인이 원래 착해!” 

 



뭐래.  콧등을 긁적거린다.  한아름 안고 온 과자를 내려놓으며 종대가 ‘부끄러워한대요~’하며 노래를 불러 기어이 꿀밤을 맞고 만다.  그 때, 앞문이 열리며 셔츠 차림의 준수한 남학생이 들어왔다.  덕분에 삼삼오오 모여 있던 아이들이 입을 다물거나 제 자리에 엉덩이를 붙였다.  과자 봉지를 뜯던 종대의 손도 멈추고 경수는 제 어깨에 붙어있는 백현의 귀에 일어나라고 속삭였다. 




“어떻게 조용히시킬까 걱정했는데, 쓸데없는 걱정이었네요. 안녕하세요, 부기숙사장 김준면입니다.”




곳곳에서 웅성거림이 있었지만 거슬릴 정도는 아니었다.  남자는 자연스럽게 더 층이 높은 곳의 가운데로 향하며 살랑살랑 손인사를 했다.  시작할 건가봐, 애들은?  몰라, 연습중인가.  왜 저기앉지?  부기숙사장이 구석에 있는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는다.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었지만 전혀 개의치 않는 것처럼 보였다.  무슨 말이라도 늘어놓아야 할 그는 요지부동 핸드폰만 만지고 있다.  웅성거림마저 잦아들고 아예 소음이 사라지자 그 때서야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든다.




“아, 10분 정도 늦을 것 같으니까 계속 떠들고 있어요.”




잠시 의외로운 정적이 흘렀지만 그 곳은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백현은 아예 테이블에 엎드려버렸다.  종인이 슬쩍 옆에 있는 쿠션을 밀자 경수가 그것을 들어 백현의 팔 사이 틈으로 넣어준다.

 

종인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벌써 무리를 만들어 친해진 애들 사이로 간간이 불안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보고 있거나 주변을살피는 몇 몇이 보였다.  아직 어우러지지 못한 아이들, 종인은 누구보다 먼저 그런 아이들을 눈에 담았다.  중학교 때의 내 모습.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라 다시 고개를 돌렸다.  갑자기 옆에 있던 이들이 생소하다.  꾹- 눌리는 입술.  살며시 열리는 뒷문에 종대가 팔을 방방 흔든다.  여기!  찬열과 세훈이 익살맞게 웃으며 테이블로 와 끼어 앉았다. 

 



“이 과자들은 김종대의 짓이 틀림없군.”


“저 사람은 누구야? 존잘.”


“부기숙사장이래, 아직 시작 안 했어.”

 



연습 얘기며, 어제 밤 시끄러웠던 옆 방 얘기를 늘어놓고 있는데 앞문이 열리고 누군가 황급히 들어왔다.  앉아있던 준면이 벌떡 일어나 그에게서 흰 종이 뭉치를 받아 든다.  그리고 지체 없이 아래로 내려와 테이블마다 유인물을 나눠주기 시작했다.  마치 하인 같은 몸짓이었다.




“아, 아. 늦어서 죄송합니다, 바로 시작할게요. 기숙사장 김민석입니다.”



 

생김과는 다른 강단 있는 목소리가 모두를 집중시켰다.  작은 몸집에 동글동글한 이목구비.  종대가 살며시 손을 들어 종인의 귓가에 완전 귀엽다, 속삭이자 그는 무미건조하게 네가 더, 라고 대답한다.  뭐라는 거야, 미쳤냐?  말과는 다르게 종대의 입술에는 진한 웃음이 묻어 있다.  기숙사장 의문의 1패.

 



“우선, I 고등학교의 첫 기숙사생이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모든 것이 처음이라 여러분의 생각과 다르거나 미숙할 수도 있지만 저는 여러분과 함께 우리의 기숙사 생활이 의미 있고 즐거운 기억으로 남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또한...”

 



낯선 얼굴들, 여러 가지가 담겨 있는 눈빛들이 민석에게 모여있다.  어제 하루 종일 달달 외운 인사말.  제 말에 따라 고개를 끄덕이는 학생들을 돌아보며 기대감으로 벅차 오른다.  그 속에 섞여있는 몇몇의 친구 놈들이 입 모양으로 계속 뭐라고 말을 걸었지만 외면했다.  분명 쓸데없는 말이겠지, 저 자식들.  민석은 유인물에 적혀 있는 안내 및 주의 사항을 다시 한 번 차근차근 일러주었다.  그 중에는 술과 담배는 금지라는 항목도 있었는데 여기서는 ‘걸리면 죽는다.’고 엄포를 더했다.  찬열의 유인물에 담배란 단어에만 짙은 동그라미가 처져 있는 걸 본 세훈의 입가에 장난이 걸린다.

 



“너 걸리면 뒤진대.”


“너도 피잖아, 븅신아.”


“아닌데, 아닌데.  난 끊었어, 3일 전부터.”


“지랄.”


“일러야지~ 기숙사장님, 여기 좀 보세요, 얘 담배 펴요!”

 



세훈이 얄밉게 외치며 놀린다.  그 앞에서 찬열은 아연실색.

 



“닥쳐..! 들리면 어쩌려..”


“박찬열 담배, 306호 박찬열 담배 핀다~”


“아, 닥치라고!”

 



소강당에 있는 모두의 시선이 찬열에게로 쏠렸다.  민석과 준면의 시선 또한.  한술 더 떠 졸던 백현이 놀라 몸을 일으켜서 세훈과 종인은 얼굴을 가린 채 웃음을 참느라 이상한 소리를 냈다.  경수는 쪽팔려, 라며 관자놀이를 짚는다.  종대는 가감 없이 목젖을 보이며 뒤로 넘어가 사색이 된 찬열에게 더한 모욕감을 선사했다.  다행이 부기숙사장이 능청스럽게 ‘다시 우리 잘생긴 기숙사장에게 주목!’이라고 외쳐 분위기가 수습되었지만 찬열은 이미 멘탈 붕괴의 늪에 빠져 있었다.

 



“그럼.. 모두 잘 부탁 드립니다!”

 



민석이 고개 숙여 인사하자 우렁찬 함성이 터져 나왔다.

 
 

뒤쪽에서 준면이 ‘박수 함성’이라고 적힌 스케치북을 흔들고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내내 딱딱한 표정이던 민석이 그제서야 귀여운 입 동굴이 보이도록 웃는다.  갑작스러운 기숙사장의 미소 공격이 모두를 혼란에 빠뜨렸다는 후문과 함께 기숙사 OT는 순조롭게 마무리 되었다.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목, 시끄럽다.

 



“끄하학, 찬열이 오늘 귀여웠어!”


“닥쳐, 띠불..” 


“찬열, 진짜 담배 펴? 양아치.”


“넌 갑자기 왜 공격이세요.. 으아악, 다 뒤져라!”

 



찬열이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내뱉는 백현의 목에 팔을 걸며 포효했다.

 

 



 

“늦었네.”

 



침대에 누워 책을읽던 준면이 몸을 일으킨다.  미리 꺼내두었던 사탕을 까서 내밀자 고맙다며 입으로 쏙 가져간다.  기숙사장은 평소 피곤하면 사탕으로 당을 충전하곤 한다.  얼굴과 이름을 익혀야 한다고 OT로도 모자라 방마다 직접 점호를 다녀왔더니,

 



“아~ 완전 지쳤다.”


“어때? 1학년들?”




계속 웃던 애와 모르는 게 있으면 물어봐도 되냐고 묻던 까만 애, 난리법석 운동부 306호, 질린 표정으로 룸메이트가 시차 적응 중이라 벌써 잔다거 말하던 애..  민석은 혀로 사탕을 굴린다.  달다.




“음.. 나쁘지 않았어, 싸가지 없는 놈도 없고.”


“아까 닥치라고, 걔는?”

 



아까의 조그만 소동을 상기하며 준면이 물어온다.  글쎄.  웃길 것 같아. 

 



“기대된다, 다같이 잘까?”


“너무 앞서 나가시네, 가짜 부기숙사장.”


“가짜라니, 내가 맨날 도와주잖아.”

 



민석과 준면은 머리를 맞대고 앉아 키들거렸다.  둘 다 병아리들 앞에서의 어른스러움은 지운 채 천진난만한 18살로 돌아와있다.  211호 안에서.  재미있겠다, 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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