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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에야쿠] Moonlight 1

리에프 X 야쿠































오랫동안 편지를 놓지 못했다. 탁한 분홍빛 하늘이 창으로 쏟아지다 어둠이 되는 걸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땀이 베인 종이가 진한 색을 띤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고민한 것이 우스워 코웃음을 친 야쿠는 편지를 접어 도로 집어넣었다. 봉투에 휘갈겨진 발신인의 이름에서 흘러 넘치는 감정은 불분명하다. 허나 쓸쓸해진 것만은 분명했다. 손 끝으로 몇 번 그 이름을 그려보다가 돌아섰다. 등 뒤로 불을 밝힌 에펠 탑이 밤을 재촉한 탓이다.



“잠시 떨어져있게 될 거야, A.”



어느새 제 다리에 주둥이를 비비적거리는 검은 고양이에게 나지막이 속삭였다. 도쿄는 새벽이겠지. 고국의 어린 날을 떠올려도 고작 피아노뿐이다. 그리고 소년의 손을 잡은 푸른 눈의 이방인. 그는 성숙하고 다정했다.

놓을 수 있을까? 어쩌면. 당신의 손을.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구원해줘. 제발.






***






잠에서 깨어나고도 이불 속에서 눈만 깜빡였다. 작은 객실은 빙 둘러보지 않아도 될 만큼이다. 히터도 그렇고 욕조도 작다. 야쿠 모리스케는 실용성을 중시하는 나라답다고 남 일처럼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모국에는 정이 없다. 구름 지나 파도를 넘어 떠돌다가 언제든 되돌아올 집이 없으니까. 일찍이 부모님 여읜 후로는 친척집을 전전했고 한 장소에 오래 머문 적은 없다. 9년 전, 일본을 떠날 때는 소년이었다. 어쨌든 딱히 기억에 남는 건 없다. 기어코 떠올리자면 장소나 음악, 분위기, 맛이 아닌 어떤 사람에 대한 것뿐이다. 그마저 외부인이고.

고작 이튿날부터 향수병을 앓을 모양이다. 야쿠가 한숨을 내쉬었다. 철제 수납장을 긁는 고양이가 있는 파리 어귀의 집은 시끄럽고 비가 오면 창틀에서 물이 넘치곤 했지만 푹신한 남색 침대를 가졌다. 그곳이 그립다. 잿빛 하늘과 세느강 유람선의 경적, 울퉁불퉁한 돌다리까지 그리게 될 줄은 몰랐다. 일본에 적잖이 머물게 될 텐데 벌써부터 막막하잖아! 머리를 벅벅 문지른 그는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뻣뻣한 갈색 머리칼이 이마에 눌린다.

[일본에 가서……] 왜 제안을 받아들인 거냐고 후회해도 소용 없다. 그 사람의 말이라면 아마 바다 수영으로 대서양을 건너라고 했어도 따랐을 거다. 우습다. 이렇게나 약하다.




“어쩐다……”




세상의 모든 불행이 제게 쏟아진 것만 같은 동시에 살아있음을 느끼는 게 정상일까? 전부 그만두고 바닥으로 내려오니 잡념에 사로잡히기 쉬워졌다.

꼬르륵. 어줍잖은 우울에 빠져 끼니를 거른 것이 문득 거슬린다. 왜소한 몸집에 어울리지 않게 식탐이 강한 야쿠는 호텔에서 아사한 시체로 발견되는 제 모습을 상상하며 미간을 좁혔다. 공항에서 리무진을 타고 호텔에 들어온 이후 나간 적이 없다. 기가 막힌 행태를 비웃기라도 하듯 줄곧 꺼진 적 없던 취침등이 두어 번 번뜩이더니 결국 다시는 켜지지 않았다. 그제야 야쿠는 침대를 벗어났다. 할 일이 많았다.




“ありがとうございます.”




호텔 옆 골목 식당에서 연어 도시락을 주문한 야쿠는 거스름돈을 건네는 직원에게 감사를 전하며 얼굴을 붉혔다. 기분 탓이겠지. 오랜만에 입 밖으로 내어보는 모국어가 어색하기만 하다. 불어를 할 때에도 종종 부끄러울 때가 있다. 지울 수 없는 본토 억양을 의식하고 나면 창피해진다. 헌데 모국어도 마찬가지라니 공교롭다. 완벽한 방랑자가 되었다. 창가에 앉은 그의 눈동자에 비 내리는 잿빛 세상이 고스란하다. 집채만한 가방을 내리고 푹 눌러썼던 캡마저 벗자 몸이 한결 가벼워졌다. 스니커즈를 신은 발이 경쾌하게 의자 다리를 두드린다. 막상 나오니 기분이 나아졌음을 인정하며 콧노래까지 흥얼거렸다.




“집부터 구하고……”




두툼한 생선을 한입에 넣고 우물거리더니 눈을 둥글린다. 맛있어! 고슬고슬한 쌀밥을 욱여 넣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거린 야쿠는 순식간에 도시락의 절반을 먹어 치웠다. 이름 없는 가게 도시락이 프랑스에서 자주 다니던 일식당의 고급 메뉴보다 훨씬 맛있다는 생각이 들자 조금 서글퍼졌다. 그는 음식을 꼭꼭 씹으며 멀찍이 굴러간 펜을 집어 들었다. 펼쳐있던 노트는 낙서로 빽빽하다. 그 위로 여러 선이 덧그려졌다. 집, 구출 등 순번이 매겨진 목록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해야 할 일을 적은 거다.




“아니다, 이사를 먼저 해야지.”




중얼거리다가 귀퉁이에 그려진 동그라미에 색을 칠한다. 번화가는 피해야겠지. 어느새 진지한 얼굴로 턱을 괸다. 시골이 집세도 저렴하고 공기도 좋아. 주변에 방해 요소도 없을 테니 집중하기 좋을 거야. 피아노 때문에 거실도 있어야 하고, 방이 적어도 두 개는 있어야…… 정원까지 바라면 예산 초과인가? 복잡해. 돈 걱정은 없지만 흥청망청 써버리는 쪽도 적성에 맞지 않아 고민이었다. 야쿠가 일본에서 지낼 동안 쓰는 돈은 사적인 소비를 제외하고는 전부 프랑스를 본거지로 하는 피아노 협회에서 지원한다. 협회는 인재 발굴이라는 명목하라면 아낌이 없다. 지금도 야쿠처럼 각국에 파견된 멘토들이 청구하는 돈이 어마어마할 터. 날개 꺾인 예술가를 구원하자. 그들은 이 기획을 ‘Miracle’이라고 불렀다.




‘넌 우리의 기적이야, 모리.’




기적 좋아하시네. 야쿠는 코웃음을 치며 밥알을 씹었다.











며칠 뒤에는 달랑 매트리스만 있는 방에서 깨어났다. 도배가 안 된 방은 시멘트 벽이었고 바닥에는 비닐이 깔려 있다. 야쿠는 눈 뜨자마자 이불을 더 깊이 끌어안고는 핸드폰을 만지작댔다. 한참을 그러다가 이불 재치고 나온 건 맨몸이다. 춥다고 구시렁대는 걸음마다 비닐의 미끄러운 감촉이 달라붙었다. 얼마 안 되는 옷가지 중에서 두꺼운 후디와 무릎 늘어난 잠옷 바지를 입고 나온 그는 큰 창문을 활짝 열고 섰다. 논, 논두렁, 밭, 밭두렁, 작은 산, 또 논이랑 그 사이에 모여있는 집 몇 채. 이게 다갈색 눈동자에 비친 전부다. 하늘이 파랗고 구름은 하얗다. 이름 모를 산새가 노래한다. 씨익 웃은 야쿠는 자기가 고른 이곳이 마음에 들었다. 집은 2층이다. 오래 비어있던 집이라 을씨년스럽긴 해도 1층에 벽난로가 있어 금방 따뜻해질 테다. 사실 벽난로 있는 집에 사는 게 그의 로망이었다. 동화책에 나오는 집은 죄다 벽난로가 있었고, 그런 집에 사는 사람들은 행복하게 살았다. 그래서 행복해질 것 같냐고? 몰라. 밥이나 먹자. 감상에 젖어 시골 마을 내려다보던 야쿠가 휙 돌아섰다.




“하아……”




거실이고 화장실이고 거칠거칠한 회색이다. 의자에 다리 한쪽을 올려 앉은 야쿠는 시리얼을 먹으면서 연거푸 한숨을 쉰다. 작아도 있을 거 다 있는 2층집은 딱 하나, 도배가 안 되어 있는 게 흠이었다. 계약할 때에야 취향대로 꾸밀 거라며 좋아했지만 작금에야 멍청했다 인정한다. 당장 의욕 넘치게 벽지랑 바닥재 사올 생각이 말끔히 사라져버렸다. 벽난로만 있으면 다냐? 이제 와 혼자선 몇 날 며칠 걸려도 못 끝낸다고 냉철한 판단을 하고 있다. 물고 있던 숟가락을 우유에 빠뜨리듯 놓았다. 혼자 살 것도 아닌데 왜 내가 다 해? 말도 안 되지. 벌떡 일어난 야쿠의 발 구르는 소리가 계단으로 이어졌다. 다시 식탁으로 돌아온 그의 손에 들린 종이 뭉텅이. 야쿠는 시리얼을 퍼먹으면서 서류를 살피기 시작했다.




“뭐야, 이 양아치는?”




사진 두 장을 정면으로 들어 유심히 보는 눈살이 찌푸려진다. 머리카락은 흰색, 아니 밝은 회색이고, 녹안, 귀에는 피어스를 주렁주렁 단 남자. 도대체 구멍이 몇 개야? 굳이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세어본다. 하나, 둘…… 여섯 개? 저가 끙 앓는 소리를 낸다. 아팠겠다. 한 쪽 귀만 이 모양인가? 어느새 호기심 어린 눈빛이다. 회색 머리칼은 그러려니 했다. 러시아계 혼혈이라고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뚜렷한 이목구비 한 데 모아 인상 팍 쓰고 담배 꽁초 버리는 꼬락서니가 딱 봐도, 별로.




“나보다 어리고, 윽, 겨우 두 살 차이야?”




금방 도리질을 한다. 사춘기 청소년 아닌 게 어디야? 그는 누군가의 프로필을 꼼꼼하게 읽어 내린다. 시리얼이 우유에 불어 터져 죽이 될 때까지 눈길 떼지 않았다.




“Merde!”




마침내 다 읽었다. 야쿠가 욕설과 동시에 집어 던진 숟가락이 벽에 부딪히고 챙!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다. 꺼풀이 짙어진 동그란 눈이 아무데나 쏘아본다. 속았다. 일본행을 결정하기 전부터 협회 동료인 레나가 종종 이 애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었는데 글로 읽으니 천지차이다. 그녀는 특유의 두꺼운 입술을 비죽거리며 가난하고 불쌍한 청년에 대해 말했었다. 이 서류는 가난하고 불쌍한 데다가 불량배들과 어울리고 가끔 마약도 해서 경찰서에 가는 청년에 대한 설명문이다. 뿐만 아니다. 이의 알코올 중독 보호자까지 상대하게 될 야쿠는 벌써부터 뒷골이 당겼다. 내가 미쳤지. 질린 낯으로 욕지거리를 한 그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짧은 머리카락을 억지로 움키며 다시 악 소리를 질렀다. 살풍경한 동네에 한동안 절규와 욕설이 울려 퍼졌다.











딸랑. 문에 달린 종을 손등으로 밀어내며 나온 남자는 만사 귀찮은 표정이다. 긴 다리로 휘적휘적 편의점을 벗어난 그는 벽에 달린 노약자용 손잡이에 걸터앉아 담배를 꺼내 물었다. 여러 갈래로 헤진 청바지의 실밥이 바람에 나부낀다. 목에 걸린 편의점 앞치마, 가슴팍에 매단 이름표에 점원 누구누구 써 있는 걸 보니 아르바이트 중인가 보다. 하이바 리에프. 특이한 이름을 가진 그는 필터를 깊게 빨아들이며 어딘가를 응시했다. 아직도 있네? 푸른 눈동자가 지저분한 연립 주택 초입에 양반다리 하고 앉은, 나무 그늘 아래서 턱을 괸 채 정면만 보는 인영을 살피기에 여념 없다. 리에프는 편의점 안 시계를 힐끔 보고 시선을 되돌렸다. 두 시간 전쯤에도 그대로였다. 뭘 기다리는 거지? 오늘따라 손님도 없고 심심하니까 되는 대로 관심이 생겼다. 손님이 많아도 싫지만 없으면 더 싫다. 느려지는 체감 시간에 견딜 수 없는 화가 치밀기 때문이다. 시간이 멈춘 것 같은 느린 공기 속에서 완벽히 맞아떨어지는 0.1초, 1초, 1분, 1시간을 헤아리는 건 유쾌한 일이 아니다.




"아."




끝까지 닳은 꽁초를 쓰레기통에 던져 넣으려던 팔이 공중에 멈추었다. 놀란 틈으로 더운 바람이 든다. 다가온 사람이 내뿜은 온기인 줄 알았다. 여름 나무의 줄기 색이다. 그런 눈망울이 저를 빤히 올려다본다. 품이 넉넉한 티셔츠에 짧은 바지 차림의 외양은 틀림없는 소년인데 느껴지는 분위기는 이질적이다. 묘했다. 왜 날 째려보지? 리에프는 억눌리는 기분이었다.




“담배.”




턱짓으로 안을 가리킨 소년에게 저도 모르게 끄덕거린 리에프가 얼른 몸을 일으킨다. 신분증 얘기는 꺼내려다 말았다. 이 동네에서 법을 지키는 사람은 바보 취급을 받는다. 거주자 절반이 범법자다. 도둑 고양이들까지 합하면 거의 다고.




“몇 시에 끝나?”




대뜸 물으면서 지폐와 신분증을 던져놓는다. 소년은 여전히 리에프를 뚫어져라 보았다. 나? 리에프가 갸우뚱 고개를 기울이며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자 그는 성가시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기까지 했다.




“6시에 끝……”


“30분 남았네.”




말을 싹둑 잘라먹더니 손에서 담배와 신분증을 낚아챈다. 낯선 사람이 한번 깜빡이지도 않고 눈을 맞추니 당황스럽다. 거기다 콩알만한 주제에 말투나 몸짓은 위협적이라 리에프는 답지 않게 말문이 막혔다. 누구지? 여기 살면 모를 리가 없다. 신분증을 제대로 보지도 못 했다. 얼핏 ‘야쿠’라는 성만 기억이 난다.




“끝나면 곧장 집으로 가.”




성가시게 하지 말고. 낮게 읊조린 야쿠는 담배의 포장지를 벗겨내며 나가버렸다. 리에프는 넋이 나갔다. 지나가다 선방을 맞았어도 지금보단 낫겠다. 성가시게 하지 말고 집으로 가라고? 뒤늦게 정신을 차린 리에프가 홀연히 남은 지폐를 주머니에 구겨 넣으며 그가 나간 자리를 두리번거린다. 유리문 너머, 아까 그 자리로 돌아간 소년은 전처럼 바닥에 주저앉더니 또 앞만 본다.




“무서워, 미친 놈인가 봐!”




나한테 뭐가 보이나? 하는 허무맹랑한 상상까지 해버렸다. 끝나자마자 집구석으로 기어들어갈 거라 호들갑을 떤 리에프는 이내 손톱으로 테이블을 긁기 시작했다. 얼마 남지 않았다. 1,643번 남았어. 완벽한 속도로 시간을 쪼개는 행동을 반복할수록 의문의 남자는 희미해질 것이다.

밴드 연습은 오전이었고 아르바이트가 끝난 이후엔 딱히 할 게 없었다. 콕 집어 말하자면 남자의 말을 들으려던 건 아니라는 거다. 어쨌든 리에프는 곧장 집으로 돌아갔다. 금이 간 벽면을 긁으며 계단을 오른다. 여기저기 다른 색 페인트를 칠해놓은 빌라는 당장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허름하다. 문 앞에 내놓은 음식물쓰레기를 헤쳐 배를 채우던 점박이 고양이가 발자국 소리에 급히 달아났다. 막막하고 무료한 인생 중 하루. 반복되는 시간. 집까지 오는 길은 평소와 다름 없이 리에프를 답답한 기분에 휩싸이게 했다. 은발의 귓가에서 흘러나오는 굉음이 주변의 온갖 소음을 차단했다. 그래서 그는 꺼지라는 고함도 듣지 못 하고 현관에 놓여있는 낡은 키보드 가방만 내려보았다.

가만히 있어도 크게 흔들리는 중년 남성의 팔은 억지로 술병을 기울였고 여느 때처럼 추잡스러운 입가로 흘러내린 술이 바닥을 적셨다. 희끗거리는 턱수염이 흥건하다. 벙긋거리는 입으로 말을 걸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뭐라는 거야? 이어폰을 뺀 리에프는 질리도록 싫다는 생각뿐이다. 매일 봐도 무뎌지지 않는 혐오감이 때로는 놀랍다.




“나가, 나가라고!”




아버지는 갸웃거리는 그에게 나가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내쫓으시겠다? 내가 없으면 굶어 죽을 텐데? 아무래도 돈을 뜯어가려는 새로운 수법인 것 같다. 무시하기로 한다. 태연하게 신발을 벗고 가방을 들었다. 키보드는 아지트에 모셔놨으니 비어있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리에프가 들어올린 가방은 꽤 무겁고 반쯤 열린 사이로 젖은 옷가지가 걸려 있었다. 거기에서도 술 냄새가 났다. 제길. 방으로 들어간 그는 욕을 읊조리며 튀어나올 수밖에 없었다. 두 다리 뻗고 누울 수도 없는 좁은 방이 엉망이었다. 바닥으로 떨어져 깨진 싸구려 향수의 독한 향기가 코를 찌르고 유리 조각이 잠긴 핏자국이 시야를 붉게 메운다. 끝이 늘 처참했으므로 반항은 하지 않는 편이었다. 막무가내로 끌어내린 듯 헤진 옷 더미에 발길질을 한 리에프는 이번만큼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어쩌지 못 했다.










주홍빛으로 물드는 하늘이 곧 밤을 불러올 텐데 기다리는 사람은 깜깜무소식이다. 따분해. 왜 아직도 안 나오는 거야? 똑똑히 봤다. 멀대는 일이 끝나자마자 주택가로 향했다. 말귀 못 알아먹는 천치는 아니라 다행이다. 야쿠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저를 보던 낯을 떠올렸다. 조금 의외였다. 이목구비 강해 뻔지르르한 외모는 사진과 같았으나 느낌이 전혀 달랐다. 생각보다 뾰족하지 않았다고 해야 하나?




‘나?’




손가락으로 자기를 가리키며 커진 눈이 천진해 보이고 멍청하게 끄덕거리는 모양새가 순하게 다가왔다. 솔직한 감상을 늘어놓다가 고개를 젓는다. 사람은 겉모습으로 판단하는 거 아니야. 입술에 힘주고 짐짓 어른스러운 표정을 지어낸 야쿠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럴 줄 알았다는 혼잣말을 하게 되었다.

저 멀리서 터벅터벅 걸어오는 사람. 딱 봐도 야쿠가 기다리던 누구다. 옆으로 뻗친 가지에서 이파리를 하나하나 뜯어내며 쫓아 들어갈까? 말까? 유치한 장난이나 하던 참이다. 엉덩이 털고 일어났다. 품에 떨어져있던 나뭇잎이 팔랑팔랑 흩날린다.




“징그럽게 크네.”




새삼스럽게 투덜거린 야쿠의 표정이 굳어진다. 그가 다가올수록 점점 더했다. 제 키만한 가방을 든 남자가 땅만 보고 지나쳐간다. 못 알아볼 뻔 했다. 피에 젖은 머리카락 엉겨 붙은 얼굴이 피떡이니까 그럴 만도 하다. 끔찍해. 야쿠는 한 손으로 저절로 벌어지는 입을 막았다. 아무렇게나 뭉개지고 부어 오른 면면은 참혹한 색이었다. 돈 쥐어주니까 냉큼 자식놈의 시간을 팔아먹던 아비의 더러운 몰골을 상기해낸 야쿠가 눈을 치떴다. 대화를 시도했으나 역시 통하지 않더라. 연거푸 술만 들이키고 횡설수설하는 사람의 주정을 받아주고 있을 만큼 한가하지 않아 대뜸 계약서와 지폐 꾸러미만 내밀었다. 하이바 리에프를 사는 일은 이리 쉬웠다.




“이게 다야?”




얼른 뒤쫓아가 가방을 빼앗았다. 손아귀 힘이 하나도 없어서 가방 들어주기도 쉬운 일이 되었다. 야쿠는 헤진 손잡이가 끊어질지 모르겠다 생각하며 저에게로 향해진 녹색 시선을 올곧게 받아낸다. 가까이서 보니 더 참혹하다. 목 언저리에까지 말라붙은 피딱지를 훑어본 야쿠가 쯧, 하고 혀를 찼다.




“이게 다냐고 묻잖아.”




짜증 베인 음성이 올라 붙는다. 리에프는 얼이 빠진 채 버릇처럼 끄덕거렸다. 속눈썹에 늘어진 피 때문에 시야가 가물가물하다. 아직도 여기 있네. 그래도 따뜻한 색깔 덕지덕지 붙어있던 그 소년인 건 알겠다. 왜? 붙잡힐만한 이유가 떠오르지 않자 뒤늦게 물음을 던진다.




“……나한테 하는 말이야?”


“반말하지마. 더 지체하면 늦어, 역에서 밥 먹을래, 기차에서 파는 도시락은 별로더라.”




또 제 할 말만 하고 돌아서는 야쿠를 가만히 보았다. 짧은 다리로 씩씩하게도 걷는다. 보폭이 지나치게 커서 웃겼다. 잘못 맞아서 나사  빠진 게 틀림 없다. 픽 웃으니까 입술이 당기고 병에 얻어맞은 어딘가가 욱신거린다. 단통에 눈을 질끈 감은 그는 빈 손을 인지하고 나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저보다 한참 작은 남자가 버겁게 든 가방이 지금도 멀어지고 있다. 금세 따라잡았지만,




“무슨 짓이야, 이 미친…… 으윽!”




일순 시야 채운 건 어두컴컴해진 밤이다. 짧게 신음했다. 어깨에 손 얹자마자 때려눕혀진 리에프는 가슴 짓밟은 야쿠의 발을 두 손으로 부여잡았다. 살붙이에게 버림 받고 얻어터진 게 불쌍하다더니 거구를 던지다시피 한 야쿠는 의기양양한 표정이다. 취미로 익힌 호신술에 체력 단련이 특기라 만만히 보았다 큰 코 다친 사람 수가 꽤 된다. 까불지 말라는 본보기가 호되다. 일부러 발에 무게를 더해 눌렀다. 제대로 된 식사를 하고 기차에 타려면 슬슬 출발해야 한다. 인사는 생략하자.




“내가 널 샀어.”




리에프는 바닥에 뻗어 눈만 끔뻑거린다. 피멍이 들어 뜬 건 줄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이해는 고사하고 어지럽기만 하다.




“아버지한테 못 들었어?”




아버지가 쓰러진 제게 계약 운운하며 쥐어준 꼬깃꼬깃한 종이 얘기라는 걸 어렵사리 눈치 챘다. 집을 나서면서 버렸는지 가방에 쑤셔 넣었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그 인간, 정말 날 팔았구나. 허탈한 들숨에 야쿠의 압박이 더해졌다.




“튀면 계약 위반이야, 위약금은 내가 지불한 돈의 10배, 친절하게 설명하자면 네가 평생 막노동 해도 못 갚는 액수야, 아니, 무슨 짓을 해도 못 갚아.”




성이 ‘야쿠’던가? 생긴 건 안 그런데 제 몸 밟고 선 남자는 사납다. 떨어져 사는 모친과 혈육까지 들먹이며 으르렁거린다. 도망치면 죽이겠다는 말을 길게도 한다. 티셔츠에 발자국 남겠다고 리에프는 쓸데없는 걱정이나 했다. 실은 얕봐서 그랬다. 방심해서 당한 건 딱 한번으로 족하다. 달리 갈 데도 없잖아? 라며 약 올리는 남자는 넝쿨째 굴러들어온 먹이다. 그는 야쿠의 협박이 끝나면 잡은 바짓가랑이 당겨 쓰러뜨려놓고 울분을 담아 화풀이 하리라 마음 먹고 있었다. 차마 주먹질하지 못한 부친 대신 실컷 두드릴 거였다. 

허나,




“잔말 말고 따라와, 맛있는 거 먹이고 좋은 데서 재워줄게.”




그 계획은 허무하게 스러졌다.

좋은 냄새. 바짝 얼굴을 들이댄 야쿠에게서 난생처음 맡아보는 향이 흘러 넘친다. 아린 뺨 쓰다듬는 손길이 부드럽다. 리에프는 붙들었던 바지자락을 놓쳐버렸다. 멍해진다. 마비된 것처럼 삐걱거리는 몸짓에 야쿠는 살짝 웃었다. 어찌 보면 저 때문에 상처투성이 된 그가 가여웠던 걸까? 선심 쓰듯 미끼를 던진다.




“네가 원하면 개도 기를 거야.”




소원이 ‘멍멍이’가 뭐냐? 갈기갈기 찢어버렸던 리에프의 프로필 한 부분이 이렇게 쓸모 있을 줄이야. 채찍과 당근 모두 선사했으니 할 만큼은 했다. 




“나랑 가자, 리에프.”




리에프는 제 이름이 낯설다. 목 아래가 찌릿했다. 막연히 야쿠의 무게가 주는 통증인 줄만 안 리에프는 대답 대신 아프다고 말했다. 그러자 화들짝 놀라며 물러난다. 미안하다고 사과도 한다. 이상하고 웃긴 사람. 진짜 맛이 갔나? 정체도 모르는 이이에게 꼼짝없이 끌려가게 생겼는데 마구 절망스럽거나 슬프지 않다. 긴 다리 접어 일어난 리에프는 내팽개쳤던 가방 둘러메는 야쿠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유부초밥 좋아하지?”




뜬구름 잡는 소리와 함께 작은 손이 내밀어진다.




“다 알아, 넌 유부초밥 먹어. 난 뭐 먹지? 먹을 거 고르는 게 제일 힘들다니까.”




뭐에 홀린 듯이 그 손을 잡았다. 야쿠 딴에는 수갑이었는데 리에프에게는 이것도 미끼였다.

처음 만난 그들은 마주 앉아 밥을 먹고 기차에 나란히 앉았다. 야쿠는 냄새 난다 핀잔하면서도 계속 가방을 들어주고 휴지를 물에 적셔 피를 닦아 주었다. 리에프는 아무 말 없이 야쿠를 따랐다.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다는 낯빛에 박힌 눈동자만 경계심이 가득하고 몸뚱어리는 고분고분했다.

손바닥에 한기가 돌았다. 야쿠가 잠결에 제 손을 놓친 탓이다. 끊임없이 모습을 바꾸는 차창 밖 풍경을 바라보던 리에프가 고개를 돌린다. 담요 덮어쓰고 잠든 이를 반히 본다. 도망가면 죽는다고 엄포를 놓더니 잘도 잔다. 이 사람이 원하는 게 뭘까?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눈썹이며 콧등이며 군데군데 붙은 휴지 조각이 간지러울 법도 한데 딴 데 정신이 팔려 느끼지 못 한다. 리에프는 내내 어리벙벙한 표정이었다. 졸지에 내쫓긴 걸로 모자라 팔려가는 형편에 어울리는 모양새다. 머릿속은 뒤죽박죽이다. 집과 멀어진 지는 오래다. 어쩌다 여기까지 흘러온 건지 꿈만 같다. 진짜 꿈이라서 깨어나면 비루한 집구석일지 모른다. 그러면 좋겠어? 아니, 아니…… 모르겠어. 담요 밖으로 뻗쳐 나온 야쿠의 손이 허벅다리 위에 아무렇게나 놓인다. 리에프는 야쿠 쪽으로 웅크리고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

오늘 그를 기다리고 있던 건 꿈이라 착각할 만큼 뜻밖의 운명이었다.




























맛있는 거 먹이고 좋은 데서 재워줄게.

야쿠 넘 멋져브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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