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내용으로 건너뛰기

[백민] 악식惡食 上

백현X민석
















달이 자취를 감춘 그믐의 밤. 성산은 유난한 어둠 속에 만물을 숨겨 고요를 지키고 있었다. 스산한 불빛들이 나뭇잎을 어루만지며 지나친다. 졸던 이파리들이 소스라치게 놀라 팔랑거리자 빛은 한껏 소리 높여 웃었다. 느닷없이 밤을 찢는 홍소에 나무 아래 떨고 있던 산새들이 요란하게 날개를 퍼덕거리고 땅굴 속에서 새끼를 보살피던 늑대들이 뛰쳐나와 사납게 울부짖었다. 밤은 고요의 시간이란다. 올빼미 할아범이 깊은 어둠 속에 두 눈을 부라리자 색색으로 물든 바람결이 깃털 사이로 날아들었다. 아무도 없지? 어른 손바닥만한 불빛들이 서서히 저희만의 색을 밝힌다. 오색 찬란하게 빛나는 도깨비불. 그들이 둘러싸자 제법 몸집이 큰 올빼미는 인자하게 웃으며 모여 앉으라 손짓했다. 이제 막 사방四方신을 모시기 시작한 어린 도깨비들은 경계를 풀지 않고 여전히 불길의 모습 그대로다. 

들었어? 작은 산 바로 아랫집에 어린 애가 왔대. 호숫가 말이야? 아니, 맞은편 작은 산! 늙은 여자 혼자 사는 집 말이구나. 이 마을에 아이라니, 반가운 소식이네. 여긴 아이들이 없잖아. 그러거나 말거나 어차피 잡아먹지도 못할 텐데. 어린 아이는 맛있을까? 들뜬 목소리가 소곤거린다. 그들은 조금 더 머리를 맞대 앉았다. 큰 고기는 질기잖아, 게다가 냄새도 나지. 우리가 먹는 건 못된 어른이라 맛이 없는 걸까? 그렇겠지. 왜 산신의 것을 탐해서 골칫거리가 되는지 몰라. 속닥속닥. 

소란한 가운데,




“순수한 아이를 먹는 건 죄악이야.”




풀잎의 색을 가진 불빛이 일렁이더니 커다랗게 번져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낸다. 굵다란 나뭇가지에 다리를 꼬고 앉은 모습을 나타낸 세훈이 심드렁한 말투로 지옥에 떨어지기 싫으면 관심 끄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는 청룡을 섬기는 청靑 도깨비로, 이들은 도깨비들 중에서도 정직하기로는 으뜸이다. 불쑥. 하얀 빛이 그 옆에 앉으며 천진하게 웃었다. 민석이다.




“어르신들 몰래, 조금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궁금하잖아.”




그렇지 않냐고 동의를 구하듯 세훈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세훈은 어깨를 으쓱거릴 뿐 답이 없다. 민석은 다른 이들에게로 고개를 돌려 안 그래? 되물었다. 어떻게든 그렇다는 대답을 듣고 싶은 모양이다. 호기심 많은 백호의 수호신답다. 의뭉스럽지 않은 동그란 눈을 가진 백白 도깨비의 물음에 먼저 답한 것은 흑이었다. 흑黑 도깨비는 외양을 드러내지 않은 채 은밀히 속삭였다.




“오늘이라면 어르신들을 속일 수 있을 지도 몰라, 그믐이잖아. 내가 고서에서 읽은 건데……”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두리번두리번 저를 찾으려 애쓰는 세 명이 우스워 흑 도깨비 경수가 킬킬거렸다. 빨리 말해봐! 급한 성미를 감추지 못하고 빽 소리친 적赤 도깨비 종대가 밤에 숨어 모습을 감추었던 손목을 잡아당긴다.




“그믐에는 어르신들의 힘이 약해져서 요새에서 나오시지 않는 거래.”


“그러고 보니, 그믐에는 뵌 적이 없어.”


“대문도 잠겨 있고.”


“그렇다면, 오늘이야! 아이를 잡아먹자!”




문제는 따로 있어. 드디어 온전히 저를 드러낸 경수는 조금 귀찮다는 표정으로 종대의 무릎을 베고 누우며 허공에 손짓했다. 그러자 그의 손아귀로 너덜너덜 헤진 책 한 권이 나타난다. 올빼미는 곰방대를 입에 문 채 그들을 지켜볼 뿐이다. 신중하게 책장을 넘기던 손이 멈추자 슬금슬금 곁으로 모여들던 도깨비들이 숨을 들이켰다.




“찾았다.”




듣기 좋은 저음이 풀벌레 울음 위에 수놓아진다.


「삭일朔日 전은 음기가 강해 온갖 미물이 미식을 찾는다. 옛날 옛적에 한이라는 도깨비가 있었다. 어느 그믐날, 문지기였던 그이는 현무 어르신의 침소를 지키다가 인간이 기웃거리는 것을 발견하였다. 당시에는 간혹 인간이 대문을 찾는 일도 있었다. 인간은 도깨비를 보지 못하니 안심하고 다가가 동태를 살피는데, 별안간 그와 눈이 마주쳤다. 한은 놀라 자빠졌다. 그 인간의 검은 자위가 좁쌀만한 것이 아닌가? 기괴한 꼴이었다. 게다가 도깨비가 보이는 양 곧 쏜살같이 달아나버렸다. 더 이상한 점은 인간과 달리 목에 문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천리안인 도깨비에게도 깨알 같았다 한다. 재앙을 뜻하는 화禍, 후에 알아보니 그것이 새겨진 것들은 전부 지옥에서 기어 나온 요마妖魔였다.」




“’수호 일기’라는 책의 일부분이야.”

“할아범!”




가만히 눈만 굴리고 있던 종대가 올빼미의 부푼 깃 새로 안겨 들었다. 적 도깨비는 온순하고 겁이 많다. 이야기가 무서웠는지 잔뜩 울상이다. 그를 놀리듯 경수는 그치지 않고 목소리를 이었다. 이런 때에 산을 내려가는 건 위험하겠지.




“근데, 이 책은 수백 년도 더 됐잖아.”




기회를 놓치게 생긴 민석이 투덜거렸다. 기껏 어르신들의 눈씨를 피해 미식의 희망을 심어주더니, 수호 일기인지 뭔지를 들먹이며 다된 밥에 코를 빠뜨리는 경수가 얄미운 눈치다. 별칭이 ‘식충’일 정도로 타고난 식탐이 강한 민석은 평소엔 유순하기 그지없지만 먹을 것 앞이라면 말이 다르다. 뭐든 입에 넣어야 직성이 풀린다. 틈만 나면 부엌두렁을 타넘는 그가 꾸지람을 들으면 어르신들은 생전 굶주린 게라며 감싸주시곤 했다. 마을로 내려가면 위험해질 거라고? 천하의 도깨비가? 요물을 본 적이 없는 민석에게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샐쭉해진 그가 주위를 빙 둘러본다. 무릎께에 올려둔 책을 만지작거리는 경수는 밑지는 일은 절대 안 할 테고 이미 눈물이 그렁그렁한 종대는 데려가 봐야 짐이 될 게 뻔하다. 민석은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는 세훈을 힐끔거리다가 슬쩍 운을 뗐다.




“마을로 내려가자.”


“기어코 아이를 먹겠다고?”


“오늘은 안 들킨대도!”


“어르신들이 바본 줄 알아?”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다. 하여튼, 뚝하기는. 쩝쩝 입맛을 다신 민석은 허공에 벌렁 드러누웠다. 별 하나 없는 새까만 밤이 쏟아질 것처럼 시야를 채운다. 일이나 하자. 어느새 나머지는 아이에 대한 흥미를 깨끗이 지운 채다. 알아서 정하라는 듯 발만 까딱거리자 저희들끼리 구역을 나눈다. 나머지가 제 차지가 될 것이다. 가위 바위 보를 외치는 소리가 여러 번 귀를 간질였다.




“민석아, 네가 가운데야.”




다가온 종대가 가운데를 뜻하는 노란 민들레를 민석의 반듯한 이마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곤 토라진 것을 달래려는지 바로 옆에 쪼그려 앉더니, 다녀오면 얼린 곶감을 얻어주겠다고 소곤거렸다. 민석은 얼른 손을 뻗어 민들레를 집어 들었다. 당장 아이가 아니더라도 세상에 맛난 것은 아주 많다. 곶감도 그 중 하나다. 금세 기분이 좋아졌는지 입매 끝이 둥글게 패도록 웃는다. 물 빠진 진달래 색깔의 머리카락이 잘게 흔들려 어둠을 어지럽혔다.






거친 풀을 밟는 발이 미끄러진다. 헉, 헉. 가쁜 숨이 숲을 가로지른다. 아무렇게나 뻗어 있는 가시풀이 발목을 할퀴는데 민석은 고통을 느끼지 못하고 발 닿는 데로 내달렸다. 커진 눈은 정처 없이 흔들려 길을 찾지 못 하고 벌어진 입에서는 언어가 되지 못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더 빨리! 도망쳐! 불빛으로 꺼지면 될 것을 생각지 못할 만큼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다. 축축한 나무 내음이 독인 양 이성을 죽인다. 가로막는 고목나무의 결을 미느라 넝마가 된 손바닥이 다시 한번 눈 앞으로 늘어진 나뭇가지를 세게 쳐냈다.




“아아!”




뺨을 부여잡은 그는 휘청거리면서 옆으로 쓰러졌다. 휘둘러진 잔가지가 볼을 질게 베었다. 아린 상처도, 엉덩방아를 찧은 것도 대수롭지 않다. 민석은 급히 고개를 돌려 앞뒤를 고루 살폈다. 밤을 입은 풀숲은 무언가에 쫓기듯 나동그라진 도깨비가 의아하다. 땅을 짚은 두 손이 덜덜 떨렸다. 땀이 맺힌 콧등을 더러운 손으로 지워내 얼굴에 검댕이 그려진다. 저를 올려보던 눈동자가 떠올라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한밤중에 산 어귀에서 어린 아이가 흙 바닥을 파헤치는데 전혀 이상함을 느끼지 못한 까닭은 유난스러운 식욕 때문이다. 작은 산 그 집에 왔다는 아이로구나. 멀찍이서 살금살금 다가갔다. 마른 침이 꼴깍 넘어간다. 어떤 맛일까? 살점만 깨물어 숨는다면 괜찮지 않을까? 단숨에 뒤로 갔는데도 기척을 알아채지 못하고 땅을 헤집는다. 기쁨이 들어찬 눈동자가 반들거리고 헤벌쭉 입이 벌어졌다. 참을 수 없는 욕망. 순식간에 왜소한 어깨를 움킨 민석은 지체 없이 이를 세웠다. 무른 살에 콱 박자마자 뜨거운 피가 입 안 가득 퍼졌다. 달다. 달아. 허나 무자비하게 뜯은 살을 씹을 새는 없었다.




‘도깨비?’




무표정으로 돌아본 사내아이가 태평하게 중얼거렸다. 놀란 민석이 주춤 뒷걸음을 하다가 자빠졌을 때에는 이미 그이는 바로 코 앞에까지 와 있었다. 그의 어깻죽지에서 흐른 피가 허연 팔을 타고 내려 바닥으로 떨어졌다. 붉지 않고 검다. 어떻게 된 일이지? 곤경에 처한 건 갑작스런 습격을 당한 어린애였어야 했다. 틀렸다. 민석은 저를 직시하는 것이 인간이 아님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웩! 우욱!’




코로 넘어온 역한 냄새에 구역질이 났지만 이미 진득한 핏덩이와 살점을 삼킨 뒤다. 피칠갑을 한 입술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흐응, 도깨비한테 먹혀버렸네.’




아이의 얇은 입술에서 이질적인 음성이 새어 나왔다. 사색이 된 도깨비는 저를 빤히 내려다보는 걸 피하지도 못 했다. 기이하게 움직이는 한 쌍의 검은 자위가 멋대로 작아졌다 커졌다 하더니 곧 새파란 색을 띠었다. 고사리손이 꺽꺽 비틀리고 이내 온 몸이 빠드득빠드득 뼈가 갈려 자라나고 힘줄이 돋아나는 걸 눈 한 결 깜빡이지 못 하고 맞서야 했다. 이젠 완연한 남성의 외양이다. 그의 손이 겁에 질린 민석의 뺨을 툭툭 건드렸다.




‘아주 귀한 걸 찾았어.’




색정적인 빛을 띤 입술이 찢어질 듯 깊어진다. 점이 아니다. 오른 입술 위에 똑똑히 새겨진 표식. 화禍.




「그것이 새겨진 것들은 전부 지옥에서 기어 나온 요마였다.」




악惡이 웃었다.
















사탄 배켠... 욕심쟁이 도깨비 밍서기... 무서워서 밤에는 못 씀ㅎㅎㅎㅎㅎ










강나 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

댓글 12

SNS 계정으로 간편하게 로그인하고 댓글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