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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로켄] 상냥한 코즈메의 가을

쿠로오X켄마















하늘은 높고 맑다. 수놓아진 구름은 새하얗다. 선선하게 부는 가을 바람을 좋아하지만 그에 흩날린 머리카락이 뺨을 간질이면 성가시다는 생각이다. 붉어지는 나무에 매달려 여름 내내 울던 매미는 흙이 되었다. 무덤을 밟았다. 가을. 쿠로오는 쓸쓸한 계절이라고 말하곤 한다. 속이 빤하다. 그저 엉겨 붙으려는 속셈이다. 냉전을 종결한 기쁨을 감추지 않는다. 여름 말이다. 무더운 날에는 쿠로오든 배구든 전부 질색이다. 공기마저 괴로운 계절이었다. 아아, 매정해라. 그래서 그는 느물거리면서도 건드리지 않았다. 아쉬운 눈을 하고도 거리를 두었다. 사려 깊다. 그렇다. 늘 그래왔다. 난처하게 만들거나 애쓰게 하지 않는다. 그가 강제로 휘두른 적은 한번도 없다. 다만,




‘만지고 싶어.’




능숙하다. 

손대지 않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어떤 때는 교활하다고 여기지만 불평할 수는 없다. 결국 습하게 땀이 베인 쿠로오의 피부를 할퀴는 건 나다.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비죽 웃는 품으로 파고드는 이 또한.




‘넌 분명 팀을 강하게 만들 거야.’




그만두려던 배구를 아직까지 놓지 못 했다.

어쩌면. 좋아하기 때문일까?

느긋하게 체육관에 들어선 켄마는 곧장 라커룸으로 향했다. 아직 아무도 오지 않았다. 공기가 차분히 가라앉은 공간에 혼자다. 먼지가 부유하는 햇빛을 가로질렀다. 바지 주머니에서 꺼낸 열쇠에는 모 애니메이션의 귀여운 캐릭터가 달랑거린다. 자주 잃어버리고 우왕좌왕 찾아 다니는 꼴을 보다 못한 쿠로오가 달아준 거다. 확실히 효과적이다. 끼익끼익. 낡은 철제 라커는 군데군데 칠이 벗겨져 운다. PSP, 휴대폰, 노트 한 권, 바닥을 굴러다니는 펜 몇 자루 따위가 든 가방을 가만히 내려놓고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집에 가고 싶다거나 귀찮다거나. 글쎄. 감흥 없는 표정만 보아서는 어떤 상념에 빠져있는지 알 길이 없다.




“안녕하세요!”


“켄마, 일찍 왔네.”


“안녕.”


“오늘 점심 부실하지 않았어?”


“빵이라도 사올까요?”


“됐어, 농땡이 부릴 생각 마, 리에프.”


“카이, 여기!”




부원들이 우르르 몰려들자 금세 소란해진다. 원래 이런 곳이다. 청춘이 발산하는 열기와 땀냄새로 여름처럼 뜨겁다. 켄마는 장난스레 저를 건드리며 지나치는 타케토라를 살짝 흘겼다. 보통의 인사다. 교복 바지를 내리자 한기가 돈다. 이런. 또 잊었다. 셔츠 단추는 다 풀어헤치고 속옷만 입은 채로 쪼그려 앉는다. 명색이 운동부라 탈의에는 스스럼이 없다. 가방을 뒤적거려봤지만 빈 손이다. 아침에 티셔츠를 챙긴 기억이 없다.




“켄마.”




쿠로오다. 뒤쪽에서 들리던 목소리가 어느새 옆이다. 제 라커를 열면서 시선은 아래다. 자연스레 끝이 노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는 건 손버릇이다.




“뭐해?”


“쿠로, 티셔츠 좀. 안 가져왔어.”




실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주장의 더플백에는 항상 여분의 티셔츠가 있다. 켄마에게 빌려주는건 다반사고 가끔 다른 팀원에게도 빌려준다. 쿠로오는 얼른 하나를 내밀었다.




“이거 입어.”


“응.”


“저지도 줘?”


“아니.”




찰나다. 티셔츠를 건네고 멀어지던 손이 스치듯 갸름한 턱을 쓰다듬는다.

다음 주에 인근 고교와 경기가 있다. 친선 경기일 뿐이지만 다들 열성이다. 시험 기간임에도 훈련에 빠지는 인물이 없다. 한심하다. 그래서 즐겁다. 홀로 한심한 것보단 백배 나으니까. 배구부에는 지는 걸 싫어하는 사람만 모이는 건가. 쓸데없는 생각을 하다가 공을 놓쳤다. 야쿠가 받겠지. 감각에 예민하지만 코트와 배구화의 마찰에는 무디다. 점점 그렇게 되었다. 사뿐히 발을 디디자 땀방울이 흩어진다. 페이스 오버다. 쿵쿵거리는 심장이 버겁다. 기분 나빠. 다들 집에 안 가고 열심이니까 덩달아 한계를 넘나들게 된다.




“켄마, 쉬어!”




야쿠의 아우성에 못 이기는 척 물러났다. 아까부터 신경 쓰는 눈치였다.




‘특훈이라도 하는 날엔 펄펄 열이 나서, 얼마나 죄책감이 들던지……’




툭하면 어릴 적 이야기를 꺼내는 쿠로오 때문에 부원들은 켄마가 조금이라도 지친 기색이면 너도 나도 걱정이다. 그 때는 지금보다도 체력이 약해서 있는 힘껏 쿠로오의 연습을 돕고 나면 쉽게 열이 나곤 했다. 지금은 어쩌다 한번이다. 체육관 끄트머리에 털썩 주저앉는다. 코트는 매끈하다. 보이는 만큼 미끄럽진 않다. 손바닥으로 덮으면 차갑다. 시원해.




“괜찮아?”




뒤통수에도 눈이 달렸나. 1학년을 봐주고 있던 쿠로오가 펄쩍 앞에 선다. 허리를 숙여 주저 없이 목을 덮는 손이 크다. 안쪽은 굳은살 때문에 거칠하다. 손등에 불거진 힘줄이 두껍다. 특히 배구를 한 직후에는 더하고. 꼬집으면 어떨지 궁금해서 가끔 시도하지만 별다른 반응은 없다. 아프지 않은가 보다.




“무리하지마, 열나면 어쩌려고.”




누구 때문인데. 미간을 찌푸렸더니 능청스럽게 어깨를 들먹인다.




“딱 한 시간만.”




피곤해 보인다. 입술은 볼품없이 일어났고 눈은 빨갛다. 3학년인 그는 시험 공부도 허투루 할 수 없어 최근에 자주 밤을 샜다. 와중에 경기에 이기겠다고 훈련 강도까지 높였으니 앓아 눕지 않는 게 용하다. 왠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단단한 무릎을 동여맨 상아색 테이프가 덜렁거리는 게 거슬린다. 제 다리도 아닌데.




“쿠로는 테이핑 대충 했잖아.”




괜스레 쿠로오의 팔을 밀어내며 읊조린다.




“미안, 미안.”




하나도 안 미안한 얼굴이다. 웃고 있잖아. 애초에 미안할 일도 아니지만. 켄마를 달래는 데에는 도가 텄다. 실은 알고 있을 거다. 켄마의 짜증이 그까짓 테이프 때문이 아니라는 걸. 그는 빙긋 웃고는 돌아갔다.




“다들 수고했…… 윽, 혓바늘 났다!”


“침 바르면 나을 걸요?”


“말도 안 돼, 그럼 입 속에 생길 리가 없잖아.”


“천잰데?”


“역시 주장이네요.”


“수고하셨습니다!”


“하하, 잘 가.”




춥다. 늑장을 부리다가 느지막이 씻고 나온 켄마는 몸을 웅크렸다. 에취! 기어코 재채기를 한다. 마침 근처에 있던 야쿠가 얼른 옷을 입으라고 성화다. 직접 옷가지를 찾아주기까지 한다. 내밀어진 셔츠에 느릿느릿 팔을 꿰면서 잔뜩 귀찮은 표정이다.




“추워, 야쿠.”


“콧물 닦아!”




웃고 떠들며 부원들을 배웅하던 쿠로오가 힐끔거린다. 덩치가 커서 어슬렁어슬렁 다가오는 기척이 명확하다. 저한테 맡기라고 말하기 전에 야쿠가 돌아섰다. 먼저 간다! 눈치가 빤하다. 무슨 일이 없는 한 마무리는 늘 주장과 그 소꿉친구의 몫이다. 뒷정리는 다같이 끝마친 후라 마무리라고 해봐야 소등하고 문을 잠그는 게 다다. 야쿠마저 가버리자 언제 그랬냐는 듯 고요하다. 켄마가 옷을 다 입을 동안 쿠로오는 부실 구석에 던져진 페트병을 주워 쓰레기통에 넣고 라커가 잠겼는지 확인한다. 얌전히 기다렸다. 당연하다. 등하교를 따로 한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쿠로.”


“다 했어.”


“키스하자.”


“어어?”




환청이라도 들은 양 놀란 눈이다. 그러든 말든 켄마는 그의 셔츠를 잡아당긴다. 이제 키스야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켄마가 먼저 하자고 하는 건 드물다. 어안이 벙벙한 채로 가만하다. 그런 쿠로오를 올려다보던 눈초리가 슬그머니 아래로 떨어졌다. 뒤늦게 부끄러워진 탓이다.




“혓바늘 났다며.”




그래서?




“남의 침이면…… 나을지도 몰라.”




작은 목소리가 귀엽다. 상냥한 코즈메. 소리 없이 실소한 그는 두 손으로 켄마의 뺨을 살짝 그러쥐어 올렸다. 벌써 감긴 눈을 보고 키들거렸더니 잡은 셔츠를 신경질적으로 움킨다. 붉어진 속눈썹 아래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콧대를 스쳐지나 입술에 머물렀다. 평소보다 쉬이 열린 틈에서 난 혀가 부드럽게 엉킨다. 고단함이 잊혀지는 위로다. 쿠로오는 켄마가 혓바늘을 찾고 있다고 생각했다. 적극적이지만 어설프다. 그럼에도 욕망이 들끓어 밀어붙이게 되는 건 모순이다.

어쩌면. 좋아하기 때문일까?

아쉽게 떨어지는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가쁜 숨을 쫓는다. 어느새 집요해진 건 쿠로오다.




“내일도 해줘, 오늘도 밤샐 거라서 안 나을 거야.”


“몰라.”


“주말에 우리 집에서 자고 가.”




누구를 위한 제안인지. 물러나는 입술을 따라와 연신 쪽쪽 입을 맞추는 쿠로오를 흘겨본다. 가슴을 밀어냈다.




“춥다, 이것도 입어.”




어깨에 걸쳐진 저지에서 편안한 향기가 난다. 좋다. 가을. 따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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