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M 08:10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은 빌딩 사이, 정장 차림의 헌칠한 남자가 제과점을 나선다.  외양과 어울리지 않는 봉지가 달랑 들린 손이 경쾌하게 앞뒤로 흔들렸다.  벌써 낙엽이 지는구나.  미화원이 떨어진 가을을 쓸어낸다.  맑은 하늘빛이 바람을 타고 내려와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리자 그에 떠밀리듯 걸음을 재촉한다.  가방에 아무렇게나 넣어둔 사원증을 꺼내 걸고는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산만한 편인 게 분명하다.  앞코가 은근히 닳은 구두가 쉴 새 없이 바닥에 굴러진다.  이른 출근이라 사람이 많지 않다.  어제도 그랬고, 내일도 그는 같은 시간에 이곳에 서 있을 것이다.

  센서에 사원증을 대자 ‘하이바 리에프, 출근이 완료되었습니다.’라는 문구가 떴다가 사라졌다.  인사도 없이 휘적휘적 제자리로 향하는 양을 보니 사무실에 아무도 없다는 걸 알고 있던 눈치다.  가방을 내려두고 옆자리를 살핀다.  가지런히 놓인 서류 가방과 열쇠가 꽂힌 채로 반쯤 열린 서랍.  그 안에서 밀려 나오는 향은 싱그럽지만 지나치게 진하다.  리에프가 한 쪽 눈살을 일그러뜨렸다.  멀찍이.  어느 점을 응시하다 천천히 걸음을 뗀다.  원래 이리 부지런하냐고?  전혀.  신입사원?  사무실 막내는 맞지만 쓸데없이 일찍 나올 시기는 지났지.  그럼 다른 이유라도?  있긴 있는데…  말해도 되나?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기로 약속하면 알려줄게, 나한테는 정말 중요한 비밀이거든!  손가락 걸자고?  하하, 귀엽다.  자, 새끼손가락 걸고 약속했으니까 이제 조용히 따라와.

  사무실 끝에 자리한 자료실에 다다를 때까지 그는 구부정하게 몸을 굽히고 살금살금 걸었다.  문을 그대로 지나친다.  블라인드로 가려진 유리벽에 이르러서야 멈추었다.  고개만 내밀어 좁은 틈으로 안을 살피는 눈빛이 진중하다.  짧은 다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  그의 시선이 닿은 곳에 있는 남자는 키가 작은 편이다.  잘 맞지 않아 두어 번 접힌 셔츠 소매가 앙증맞았다.  급히 무언가를 삼키는 그를 훔쳐보다 돌아선 리에프가 흡족한 웃음을 띤다.  봤어?  저 사람, ‘야쿠 모리스케’가 내 비밀이야.

  긴 다리를 꼬고 앉아 핸드폰을 들여다보던 리에프는 다가오는 인기척에 얼른 고개를 들었다.  뚝한 표정으로 그와 어질러진 책상을 번갈아보는 야쿠의 입에서 잔소리가 나오기 전에 슈크림 빵 하나를 입에 물린다.




“좋은 아침입니다! 야쿠상이 좋아하는 주스 사왔어요, 빵도 있고요. 아침 안 먹었죠?”




  사무실에서 조촐한 아침식사를 하는 게 일과의 시작이다.  또 슈크림이야?  속없이 기뻐하긴 부끄러워서 고맙다는 말 대신 볼멘소리를 한다.  야쿠는 주스마저 쥐어주는 후임에게 애 취급 말라는 경고를 더했다.  그래봤자 푸른 이파리 재잘거리는 여름 색의 눈동자를 가진 이는 듣는 둥 마는 둥 사람을 뚫어져라 보면서 우유를 한 모금 마시더니 또 그 놈의 향기 타령이다.




“평소보다 향이 독해요.”


“그래?”




  야쿠가 향수를 퍼부은 제 손목에 코를 박고 킁킁거렸다.  열대과일을 떠오르게 하는 새콤달콤한 냄새.  좋기만 한데 왜 그런담?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를 두고 리에프는 폴폴 풍겨오는 내음에 얼굴을 찡그렸다.  가짜.




“이 향수 싫다니까요.”


“어쩌라고, 난 좋아.”




  무엇도 덧입지 않은 당신의 본연은 어떤 향일지 궁금하다.  턱을 괸 리에프가 못내 아쉬워 입술을 비죽거린다.  금세 주스를 바닥낸 야쿠는 아랑곳 않고 빵을 마저 해치웠다.  끈질기게 따라붙는 눈초리에 익숙하다.  태연하게 시선을 얽다가 혀를 내둘렀다.  오늘따라 집요하다.  두 눈을 손가락으로 찌르려 시늉하자 그제야 픽 웃으면서 물러난다.  하이바 리에프, 별종이다.  아기 새가 부화해 처음 본 것을 어미라 여기듯 입사 때부터 줄곧 선임 노릇한 저를 잘 따르다 못해,




“약은?”


“어? 약?”


“비타민이요, 매일 챙겨 먹잖아요.”


“으응, 먹었지.”




  지배하려 한다.  과민 반응인가?  꾸밈없는 리에프의 음성에서 이질적인 위화감을 느낀 야쿠가 움칠 떨었다.  그러자 리에프는 억지로 사람 좋아 보이는 눈웃음을 지었다.  경계의 대상이 되는 건 달갑지 않다.  부러 몸을 낮춘 채 그에게로 손을 뻗었다.  반대로 벋친 머리카락을 살살 쓸어 넘기다가 은근슬쩍 목덜미를 쓰다듬는다.  잘 했어요.




“까불지 말고 치워.”




순순히 팔을 거두었다.  또각또각.  발소리로 어수선해진 복도에 신경을 곤두세운 건 야쿠만이 아니다.  동료들이 인사를 건네며 들어왔다.




“사무실에서 향수 냄새가 진동을 하네.”


“보나마나 대리님이죠, 뭐.”


“안녕하세요! 밖은 쌀쌀하죠? 새벽에 비온 거 아셨어요?”


“안녕, 리에프.”




  어느새 저를 가로막다시피 하고 부산스럽게 동료들을 맞이하는 리에프의 뒤에서 야쿠는 어깨를 으쓱거린다.  이상하단 말이지.  단둘인 시간과 달라질 때마다 그렇게 느끼곤 한다.  누군가와 함께일 땐 더 호들갑을 떨고 경망스럽게 구는데 별로 자연스럽지가 않다.




“하하!”




  웃음소리조차 인위적이라고 생각하며 돌아앉아 업무를 시작했다.  그는 리에프가 주의를 끌려고 애쓰는 게 저 때문이라는 사실을 꿈에도 모른다.











  AM 11:00 야쿠 대신 심부름을 다녀온 참이다.  고작 서류 하나 부치는 일에 장정 둘이 가기엔 눈치가 보이고 야쿠 혼자 낯선 데로 보내긴 싫어서 저가 하겠다고 나섰더니 그는 리에프의 속도 모르고 귀찮았는데 잘됐다며 좋아했다.  방긋방긋 웃으면 불만하려야 할 수가 없다.  어라?  빈자리를 보고 허둥지둥 야쿠를 찾는다.




“대리님은요?”


“자료실에 있을 걸?”




  자료실 문고리에 손을 올린 리에프가 잠시 멈칫한다.  먹구름으로 하늘이 검었던 날이 떠오른다.  시계를 잘못 봤다는 한심한 이유로 너무 일찍 출근한 신입사원 리에프는 사무실에 멍하니 앉아있었다.  덩그러니 놓인 가방이 있었지만 주인의 행방이 묘연했다.  갓 입사했을 때여서 그 주인이 야쿠라는 것도 몰랐고 자료실에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그래서 갑자기 난 우당탕 소리에 놀라 자빠질 뻔 했다.  무서워도 호기심이 앞서서 몸은 이미 기척이 난 자료실 근처였다.  도서관처럼 줄줄이 늘어선 책장에 파일이 빼곡한 곳이다.  도저히 들어가 볼 용기까지는 생기지 않더라.  그 때,




‘허억… 젠장!’




  힘에 겨운 목소리가 들렸다.  분명 사람이다.  거기다 어딘지 익숙한 음성이었다.  자료를 빼돌리는 건가?  저도 모르게 몸을 숨긴 리에프는 슬쩍 유리 벽면으로 발길을 옮겼다.  잘하면 범인이 보일지도 몰라.  다행이 어슴푸레한 안이 뚜렷하게 그려졌다.  뜻밖의 운명 속으로 끌어당겨진 순간이었다.  야쿠상?  얼굴이 굳어진 리에프의 두 눈동자에 나동그라진 인영이 선명하다.  그는 홀로 여기에 있었다.  땅에 나온 물고기처럼 겨운 몸짓이다.  야쿠는 옆에 쏟아진 알약을 움켜 곧 마구잡이로 입에 욱여넣었다.  비타민이라더니 거짓말인 것 같다.  순식간에 질끈 감긴 눈에서 흐르는 눈물, 갈색 머리카락 끝부터 자그만 귀 아래로 이어지는 목울대, 소매가 접힌 흰 셔츠와 가느다란 손목까지 낱낱이 눈에 든다.  한껏 날선 감각이 몸을 감싸기 시작하자 당황한 리에프가 뒤로 물러났다.  숨을 삼켰다.  힘줄이 불거지고 경직되어 뻣뻣한 손으로 황급히 코와 입을 틀어막는다.  진한 향수 냄새에 뒤섞인 어떤 경고.  널 엉망으로 만들 거야.  주저 없이 그 자리를 떠났다.  다리에 힘이 풀려 한 번 넘어졌다.  건물을 나와 바깥 공기를 들이키자 등을 따라 짧은 경련이 일었다.  진짜?  입안에 흠뻑 고이는 침을 뱉었다.  아찔하게 박힌 잔상.  진짜 오메가야?  넋이 나간 남자는 바닥에 주저앉아 머리를 부여잡았다.  이로써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리에프는 알파였다.

  1,000명을 기준으로 3명은 알파, 1명이 오메가, 나머지가 베타다.  근현대에 들어 급감하기 시작한 알파와 오메가의 비율을 설명할 길은 많다.  유전학적으로 특이 형질은 생존 가능성이 희박하다.  형질의 대를 이을 확률이 낮고 수적으로 열세이니 어찌 보면 지금까지 존재하는 게 놀라울 정도다.  또한, 의학의 발달로 억제제뿐만 아니라 아예 오메가 형질의 특이성을 마비시키는 수술도 가능해졌다.  알파와 오메가에게 주기적으로 나타나는 발정기와 가임기가 아무래도‘불편하다’는 견해에는 반박 불가.  이런 흐름을 따라 대부분의 베타들이 알파와 오메가를 호르몬에 조종당하는 열등한 족속이라 이르는 분위기가 형성되었고, 이런 현상은 특히 오메가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그들은 필사적으로 숨겼다.  따라서, 리에프는 난생 처음이었다.  숨결만으로 저를 나락에 빠뜨릴 오메가를 만난 것도, 잊고 살던 강렬한 본성과 마주한 것도.




“야쿠상!”




  잠시 못마땅한 표정을 지어낸 야쿠가 애물단지가 나타났다고 중얼거린다.  고새를 못 참고 저를 찾아온 리에프에게 들고 있던 파일 꾸러미를 들려주었다.  마침 팔이 떨어질 참이다.




“점심 뭐 먹을까요?”


“네가 먹고 싶은 거.”




  더 말을 붙였다간 쫓아낼 게 뻔해서 입을 다물었다.  리에프는 게걸음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자료를 훑어보는 옆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본다.  그 때 이후로 다시는 그런 모습을 본 적도, 체향을 느껴본 적도 없다.  어떤 실수나 그의 안 좋은 타이밍을 저가 목격한 거다.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때때로 오목조목하고 꽃다운 사람이 남몰래 외로운 싸움에 무던히도 애를 쓰고 있다는 걸 상기하면 가슴 한켠이 시리지만.  호-




“야!”




  이마에 닿은 숨결에 야쿠가 소리쳤다.  회사에서 입술을 들이대?  진저리를 친 야쿠가 리에프의 정강이로 발길질을 한다.  아야!  피한다고 피했는데 무거운 더미를 들고 있어 발끝이 스쳤다.




“눈썹에 먼지가 붙었단 말이에요.”


“누가 보면 어쩌려고!”


“손을 쓸 수가 없어서 그랬어요, 이거, 들고 있으라고 했으면서.”


“됐어, 나가서 네 일이나 해!”




  리에프는 못 들은 척 콧노래를 부르면서 속으로 ‘이게 제 일인데요.’라고 대꾸했다.  야쿠가 들으면 낯간지러워 질색할 일이지만, 지금으로선 그의 곁을 지키는 것 말고 다른 건 생각할 겨를이 없다.











  PM 15:10 희한하다.  눈 깜빡할 새에 흘러가는 시간이 회사에서는 느림보 거북이가 따로 없다.  식사 후 한창 졸음이 쏟아질 때다.  모니터를 향한 눈이 흐리멍덩해질 즈음에 정체 모를 허전함을 느낀 야쿠가 허리를 곧추세웠다.  조용하다 했지.  옆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후임이 보인다.  콧대가 높다.  피부도 하얘서 예쁘장하지만 무지막지하게 큰 키랑 떡 벌어진 어깨로 달려들면 저절로 고개가 저어진다.  하는 짓은 별나지만 때로는 그저 웃어질 만큼 귀염성이 있다.  천사처럼 잠들어 있거나 조용할 때나 그렇다는 얘기다.




“어디 가요?”




  대답할 가치가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가 있나? 싶은 질문이다.  조심스레 자리를 벗어나다 소매를 붙잡힌 야쿠가 잠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묻는 그를 향해 눈을 치뜬다.  또!  하루에 몇 번 반복되는 실랑이임에도 어이가 없다.  회사 안에서 가면 어딜 가겠냐고 말하기도 입이 아파서 묵묵부답했더니 이 뻔뻔한 후임을 보라.  왜 대답이 없냐며 도리어 신경질적으로 의자를 돌려 앉고 있다.




“저기요, 혹시 금붕어세요?”


“네? 저요?”


“내가 어딜 가서 뭘 하든 신경 꺼, 제발!”


“어디 가시는데요? 화장실?”


“그래, 방광 터지겠다!”




  다른 사원들은 또 시작이라며 웃기 바쁘다.  그들의 예상대로 야쿠는 리에프의 의자를 세게 차버리고는 씩씩거리며 나가버렸다.  이제 곧 왜 저렇게 화가 많은지 모르겠다며 툴툴거린 남자가 그를 따라 나설 것이다.  역시나.




“왜 짜증을 내고 그래? 야쿠상, 같이 가요!”




  나란한 의자가 서서히 돌아가다 멈추었다.  야쿠의 부재는 리에프를 불안으로 내몬다.  가능성이 있는 일, 저가 없는 곳에서 그에게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은 머릿속에서조차 끔찍하다.  악의가 담긴 눈빛, 욕망을 드러내는 손길, 배척하는 등 따위가 덮치도록 둘 수 없다.  왜?  의미 없는 질문이야, 야쿠 모리스케는 내가 만난 유일한 오메가니까 지키고 싶은 게 당연하잖아?  그가 오메가가 아니었다면?  글쎄,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거야.  아침 안 먹으면 종일 저기압이라 챙겨줘야 하고, 작아서 치이고 다니니까 그걸 보고만 있을 수도 없고…  애초에 인기가 많단 말이야, 정말 위험해!  저렇게 귀엽게 손 흔들고 그러니까, 잠깐만, 가서 웃는 얼굴 좀 가려야겠어.  야쿠상!











  PM 06:15 퇴근이 완료되었습니다.  야쿠의 가방부터 챙겨든 리에프가 재빨리 사무실을 나선다.  얼른요!  하늘거리는 팔이 재촉한다.  또 제 발목을 붙들려는 속셈이다.  일주일에 반 이상, 삼시세끼를 꼬박 저 애와 먹는다.  밥 정이 무섭다는 건 참말이다.  요즘엔 혼자서는 밥이 잘 안 넘어간다.  야쿠는 못 이기는 척 앞서가는 그를 따랐다.  싫다고 할까 봐 연신 힐끔거리면서 가방을 인질로 잡고 있는 모양새가 우습다.




“풉…”




  조금 사랑스럽기도 하다.  오늘도 집에 가기 싫다고 생떼를 쓰면 어쩌지?  거절하기가 어려울 것 같다.  어물쩍 허리를 안고 놓아주지 않으면 쉬이 그와 밤을 보내게 될 거다.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 허물어진다.




“야쿠상? 왜 이렇게 느려요, 어디 아파요?”




  펄쩍 달려와 고개를 숙인다.  걱정으로 물든 낯을 살피는 그에게서 가방을 빼앗은 야쿠가 저녁 메뉴로 전골이 어떤지 묻자 리에프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좋다고 답했다.  길을 걸을 땐 말이 없는 편이다.  이따금 제 팔을 붙든 손에 힘이 들어가 고개를 들어보면 낯선 표정을 볼 수 있다.  매서운 눈씨.  누가 보면 지나가는 사람들이랑 눈싸움이라도 하는 줄 알 거다.




“아파.”


“아! 미안해요, 이리로 와요.”




  구태여 길 안쪽으로 당긴다.  영문을 모르는 야쿠는 성가시게 굴지 말라고 한 마디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맞은편 길가에 서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는 한 여성과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다.  형질을 전혀 숨기지 않은 알파다.  눈치 챌 리도 없고 종종 겪는 일이지만, 긴장으로 굳어지는 것만은 조건 반사다.  걸음이 느려지고 호흡이 달린다.




“걱정 마요.”




  별안간 어두컴컴해졌다.  목소리가 되어 나오지 못하는 언어가 혀끝을 맴돈다.  두터운 손이 야쿠의 눈을 가리고도 남았다.  거세게 휘몰아치던 파란이 가라앉는다.  이상하게 안심이 돼.  얼마나 그러고 있었는지 가늠이 안 된다.  온기가 앉은 속눈썹을 들어 올리니 시야가 거맸다가 눈부시게 하얘졌다.




“리에프! 내가 길에서 장난치지 말랬지?”


“놀랐어요?”


“죽을래?”




  야쿠는 천진하게 웃는 리에프를 따라 웃었다.  걱정 마요.  잘못 들은 것 치고는 또렷했지만 실재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럴 리가 없다.











  PM 08:53 밤길.  아롱아롱 번지는 불빛을 밟는 걸음.  선선해진 날씨를 핑계로 가까이, 가까이 다가서니 팔뚝에 자꾸 야쿠의 머리가 닿는다.  저녁 맛있었지? 묻는 그에 힘껏 고개를 끄덕거렸다.  웃음기 베인 눈이 반달이 되어 리에프에게로 향한다.




“기분 좋다!”




  이럴 때는 순수한 아이 같다.  꽃일어 만발하는 감정에 솔직하다.  회사에서는 남의 이목도 있고 서로의 위치도 달라서 이렇게 곁을 주려 하지 않는다.  가끔은 서운하지만 별 수 없지.  리에프가 이 때다 싶어 슬쩍 야쿠의 어깨에 팔을 얹었다.  가만하다.  손가락으로 턱을 쓰다듬어도 간지럽다며 키들거릴 뿐이다.  리에프의 뺨이 발그레해졌다.  발맞추어 걷다 보면 새삼스레 알아진다.  원하는 게 무언지, 얼마나 바라는지 말이다.




“들어갈게.”


“잠깐만요, 갑자기 발이! 아아, 접질린 것 같아요!”


“너 어제도 접질렸었어.”


“아, 그게 어제였나?”


“까불지 말고 얼른 가!”




  매일 돌아서고 멀어지게 둘 거야? 아니, 그러고 싶지 않아.




“야쿠상!”




  멈칫.  계단을 오르던 발이 다시 땅을 디딘다.  돌아본 야쿠는 헐레벌떡 쫓아온 그를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헉, 헉… 오늘은 들어야겠어요.”


“뭘?”


“왜 대답 안 해줘요? 좋아한다고 했잖아요.”




  골치가 아프다는 듯 제 이마를 슥 문지른다.  야쿠는 짜증이 난 것 같기도 하고 울 것 같은 얼굴이기도 했다.  대답하고 싶지 않아.  난관을 헤쳐 나갈 용기가 없어 좋다는 말은 차마 할 수가 없고 싫다는 말은 거짓이어서 나오지 않는다.  오메가라는 약점보다 감정이 앞선 적은 없다.  언젠가 상처가 될 관계는 늘 포기해왔다.  다시 등을 돌렸지만 앞으로 나아갈 순 없었다.  간절하게 옷자락을 부여잡은 리에프가 울먹인다.  진짜 갈 거예요? 라고 묻는 음성이 형편없이 갈라졌다.




“저는 억울해요, 안 보이면 불안하고 생각 안 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는데… 다 이해한단 말이에요! 그냥 의지해주면 좋겠는데 안 된다고만 하고, 야쿠상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네가 뭘 안다고 그…”




  매몰찬 대꾸는 예쁜 눈에 그렁그렁 맺힌 눈물 앞에 끝이 흐려졌다.




“다 알아요, 야쿠상이 오메가라는 거.”




  방울이 뚝 바닥으로 떨어진다.  잘못 들은 거겠지?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해야 하는데 보기 좋게 실패했다.  형질을 들킨 건 처음이라 얼이 빠진 야쿠는 눈물을 훔쳐내는 리에프만 바라본다.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지난날을 헤아릴수록 빠져나갈 길이 좁아진다.  유별나다고 여겼던 그의 행동이 전부 오메가를 겨냥한 채였다.  어떻게 알아챘을까?  주춤주춤 뒷걸음하다 벽에 닿은 등이 싸늘했다.




“머리 굴리지 마요, 지금까지 한 게 있는데 절 믿어야죠.”


“언제부터야?”


“자료실에서 쓰러진 적 있죠? 그 때 봤어요."




  딱 한 번이었다.  며칠간 몸이 좋지 않았고 종반에 함께 복용한 감기약이 억제제에 부작용을 일으켜 갑자기 히트 사이클 증세가 나타났었다.  독한 약을 닥치는 대로 먹어 가라앉혔지만 한 동안 꽤나 고생이었다.  목격자가 있을 줄이야.  아무 일이 없었다는 건 리에프가 베타라는 의미다.  온 종일 붙어있는 그에게서 오메가를 자극하는 유인을 감지한 적은 없으니까.




“어떻게 해야 되는 줄 몰랐어요, 도망친 건 미안하지만 지금은 잘한 일 같아요. 안 그랬으면 우린 미쳐버렸겠죠.”


“잠깐, 그 말은… 네가 알파라는 거야? 느껴지는 게 없는데?”


“굳이 드러낸 적 없었고, 약도 먹어요, 야쿠상한테 안 좋을 것 같아서.”




  처음에는 동질감이 가미된 같잖은 동정심으로 야쿠를 지켜보았다.  감쪽같이 숨겨 다니는 게 신기하고 우스웠다가 애달파지더니 어느새,




“눈을 뗄 수가 없어요.”




  사랑에 빠졌다.  우연히 닿은 서로의 손을 떨어뜨리지 못하고, 취기를 빌미로 처음 입을 맞추고, 매일 밤 잘 자라는 인사를 남길 때에 우리의 형질은 완벽히 통제되어 있었다.  리에프는 일어나자마자 호르몬 억제제를 먹었고, 야쿠 또한 비타민 통에 넣어둔 알약을 잊었을 리 없다.  깊이 탐한 야쿠의 살갗에는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은 향수의 독한 향이 베여 있고 그건 철저히 본래의 것을 감추었다.  그래서 그를 향한 끌림이 단순한 본능에 의한 것이 아님을 쉬이 깨달았다.  야쿠가 능히 감출수록 감정은 선명해진다.  코끝이 닿았다.  팔로 벽을 짚은 리에프의 그림자가 야쿠를 숨겼다.  눈물로 일렁이는 건 녹색이지만 혼란에 빠진 쪽은 반대다.  불그스름한 뺨에 입술을 대자 야쿠는 냉정하게 그를 밀쳐냈지만 헛수고다.




“야쿠상은 생각이 너무 많아요, 가끔은… 예상치 못한 일에 휘말리고, 끌려가기도 해요.”


“안 돼…”


“우린 피할 수 없어요.”




  눈물인지 아니면, 하이바 리에프한테 약한 건지 구분이 안 된다.




“지금처럼.”




  온 몸에 힘이 빠진다.  계단의 습한 냄새에 향기가 더해지고 눈물이 섞인 입맞춤이지만 감미롭고 황홀했다.  포개진 입술을 두고도 이래도 되는지 고민이다.  하지만, 야쿠는 곧 단단한 팔에 기대어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지긋지긋한 삶에 대한 보상이 이 애라면 그리 나쁠 것도 없지.  속절없이 리에프를 탐하면서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PM 10:40 안 가면 안 되냐고 징징거리는 리에프를 집에서 겨우 내쫓았다.  방금 전까지 그를 껴안고 소곤대었던 소파가 아직 따뜻하다.  큰일 날 놈이야.  앞날이 걱정스럽다고 야단하면서도 야쿠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좋아한다는 고백이 머물렀던 귓불을 문질러본다.  입술을 쓸던 보드라운 감촉이 생생하다.




“으악! 미쳤지, 미쳤어!”




  팔에 묻은 얼굴이 터질 것처럼 새빨개졌다.











  PM 11:51 침대에 누웠다.  머리카락의 물기가 이부자리에 스민다.  리에프는 입이 찢어져라 크게 하품을 했다.  그런 다음에는 배시시 웃는다.  그렇게 좋으냐고?  지금 나보다 행복한 사람은 없을 거라고 확신해, 그 만큼이야.




‘애냐? 칠칠맞기는.’




  입가에 묻은 크림을 닦아주던 조그만 손.




‘그만 쳐다봐, 일에 집중할 수가 없잖아!’




  동그란 머리, 도톰도톰한 볼에 삐쭉 올라간 입 꼬리.




‘고마워, 리에프.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




  듣기 좋은 말과




‘사랑해.’




  듣고 싶은 말.

  베갯머리에서도 야쿠가 모락모락 피어난다.  꿈에도 나왔으면.  [대리님, 내일 아침은 제 입술입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이불이 꼬물꼬물 움직이다 멈춘다.  메시지를 전송하자마자 가물가물한 눈을 이기지 못하고 쥐고 있던 휴대폰을 밖으로 밀어냈다.  쌕쌕거리는 숨소리가 적막한 방을 채운다.  울고 웃느라 고단했는지 고롱고롱 코골이까지 하는 리에프에게 답장이 도착했다.




[미쳐가지고♥]


[하트는 잘못 보낸 거야]


[야]


[리에프, 자?]


[잘 자, 내일 봐]











  AM 00:00 오늘의 비밀 일기 끝.



















* 오메가: 성별에 상관없이 임신이 가능한 형질로 알파를 미혹시키는 페로몬을 가지고 있다. 반대로 알파는 오메가를 자극하는 페로몬을 가진다.

* 히트 사이클: 오메가의 가임기, 이 기간에는 몸이 달떠 억제제를 복용치 않을 시에 이성을 잃고 페로몬을 흘려 알파를 유혹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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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호는 리맨물이 주제였어요.

중간중간 리에프가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듯한 장면이 있는데, 그건 바로 독자님♥

리에프랑 대화하는 느낌으로 읽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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